'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유하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건 엄정화와 감우성이 주연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서였다. 물론 10년전에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란 영화가 있긴 하지만 제목만큼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등의 흥행세를 몰아 최근에 <쌍화점>을 내놓았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쌍화점>이 그저 그랬다. 많은 이들이 공감했겠지만 주진모의 연기력을 확인한 것 외에 쌍화점은 조인성과 송지효의 베드신을 보여주기 위한 2류 영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 외에는 사극으로서의 스케일만 커졌을 뿐 감독의 시야는 오히려 후퇴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나는 유하 감독이 남자들 세계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싫다. <비열한 거리>에서도 병두(조인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황회장(천호진)과 민호(남궁민), 그리고 그의 조직원이었던 종수(진구) 중, 감독의 페르소나를 대변하는 듯한 영화감독 민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병두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남자들의 우정을 피도 눈물도 없는 '조폭'의 세계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접근이다.
유하 감독의 또다른 작품인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남자들 사이의 배신이 판친다. 우식(이정진)을 따르는 현수(권상우)는 우식을 아끼지만 1인자의 자리를 다투는데 있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경쟁하는 데에 있어서는 서로 무심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냉정하다. 또한 우식의 꼬봉격인 햄버거(박효준)는 순간의 욱한 심정에 우식에게 상처를 입혀 싸움 끝에 결국 학교를 떠나게 만드는 장본인 역할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조차 우식이 떠나고 소식이 없어도 현수와 햄버거는 재수학원 앞에서 취권을 휘두르며 즐거워한다.
<쌍화점>에서도 이런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왕(주진모)과 연인 관계에 가까운 홍림(조인성)은 왕을 목숨처럼 지키는 친위부대 수장이었다가 왕후(송지효)와의 대리합궁으로 왕후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왕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왕의 고뇌와 질투, 그리고 분노는 효과적으로 전달되지만 홍림의 정사와 배신은 왕후와 육체적인 사랑 그 이상의 무엇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왕과의 관계가 파경으로 치닫는데 대한 설명력을 잃는 듯 하다. 또한 만일 왕후와 홍림의 관계가 육체적 사랑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색계>에서 펼친 양조위와 탕웨이의 베드신처럼 왕후와의 정사가 캐릭터의 심리까지 전달될 정도로 농염하지도 않다.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반복적 베드신은 반복되는 파격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주 등장하는 베드신이 의아하게 느껴진다.(베드신을 위한 영화?) 결국 거세당한 분노로 배신의 칼을 뽑아든 홍림의 비장함은 플롯을 잃어버린 채 때때로 코믹하게 보이기까지한다.
대작이라 불릴만한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저 선하거나 그저 비열하기만 하지는 않다. 잔인하기 그지 없는 마피아 영화에서조차 배신자의 심리는 복잡하기만 하다. 일례로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를 제외한 나머지 동료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고 다른 이름의 삶을 살아가는 맥스(제임스 우즈)는 말년에 누들스를 초대해서 자신의 비리를 폭로하고 자살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 콜리오네는 아버지인 비토 콜리오네(말론 브랜도)의 사후 권력 다툼에서 자기 형을 죽인 죄값으로 평생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배신자의 복합적 심리를 파고드는 것은 단지 얼마나 파격적이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얼마나 감독이 캐릭터들을 마음으로 감싸고 이해하려 드느냐 하는 것에 있으며 감독은 이 부분을 자주 간과한다.
오히려 여성 캐릭터들은 정반대로 너무 지고지순하고, 일편단심으로 남자 주인공들을 따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엄정화)는 준영(감우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캐릭터이다. 결국 준영은 연희를 자신을 섹스 상대 정도로만 여기는 속물로만 보다가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녀가 의사인 남편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과 결혼하여 변변찮은 삶을 살 마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은주(한가인)도 친구들이 모두 등을 돌린 우식이 찾아오자 현수를 버리고 우식을 따라서 사라진다.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를 사랑하는 현주도 마찬가지고, <쌍화점>에서도 대리합궁으로 육체적인 정을 나눈 홍림에게 왕후는 마음까지 허락하여 함께 도망가자고 권하기도 하며 결국 홍림의 신변을 위협하는 왕마저 해칠 계획을 세운다. 강자에게 순종적인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환타지를 충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시대에 맞지 않게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내비치는 대목으로 읽히기도 한다.
감독은 이렇듯 주인공을 둘러싼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중 잣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남자들의 세계는 단순히 비열하고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다. 마치 남자들의 세계가 그렇다는 듯. 때로 주인공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배신할 때는 가차 없다. 2인자는 자주 배신하며 그 배역 자체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있지 않아 보인다. 반대로 강자를 사랑하는 여인들은 너무나도 순종적이고 헌신적이다. 강자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남자들의 세계는 지나치게 단순한 캐릭터로 달려가고 그를 따르는 여성은 가부장적 권위에 순종하는 감독의 전반적인 영화 흐름이 나는 불편하다. 설령 가부장적 가치관의 팩트들을 끌어감에 있어서도 사건들을 풀어가면서 그 사건에 개입된 이들의 동기와 심리, 그리고 행동의 원인들을 찾아가지 않는 한, 캐릭터의 극단적 평면성은 스케일이나 촬영기술, 시각효과의 뛰어남으로도 커버되지는 않을 것이다. (끝)
기김진호 | :: [2009/01/09] | 와~! 이아이가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길 기도합니다. 평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길... |
|
경임 | :: [2009/01/09] | 오.. 축하드려요 ^^ 산모가 고생이 많으셨네요 ㅠ_ㅠ 그래도 건강한 아기라니 축하드립니다 |
|
지강유철 | :: [2009/01/09] | 용주, 지난 주일부터 오늘까지 대구갔다 오니 반가운 출산 소식이네! 정말 축하드리고, 10시간이나 진통을 겪은 명희 씨에게도 제 축하의 뜻을 전해주시길...이제 드디어 용주도 애 아빠가 되시네..그런데 성하라.. 범상치 않은 이름이다. 뭔가 깊은 뜻이 담겼을 것 같네..설명 좀 해봐요..^^ |
|
이정현 | :: [2009/01/09] | 고정희 시인의 시편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있는 기도라네>에 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 -- 밤과 낮 오고가는 이 세계는 하늘과 땅으로 짝지어졌다네 하늘과 땅은 서로 한몸 이루어 곡식과 나무와 들풀을 키우며 생명을 이어가는 원으로 산다네 하늘과 땅의 원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나네 아기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딸은 자라서 처녀가 되고 처녀는 훗날 어머니가 된다네 아들은 자라서 총각이 되고 총각은 훗날 아버지가 된다네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지만 여자와 남자 한몸 이루어 그리움 이어받는 원으로 산다네 보시오 그리움의 胎에서 미래의 아기들이 태어나네 그들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 딸과 아들로 어우러진 아기들이여 우리 아기에게 해가 되라 하게, 해로 솟을 것이네 별이 되라 하게, 별로 빛날 것이네 우리 아기에게 희망이 되라 하게, 희망으로 떠오를 것이네 그러나 우리 아기에게 폭군이 되라 하면 폭군이 되고 인형이 되라 하면 인형이 되고 절망이 되라 하면 절망이 될 것이네, 오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 길이 되라 하면 길이 되고 감옥이 되라 하면 감옥이 되고 노리개가 되라 하면 노리개가 되기까지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들이여 그러나, 여자 남자 함께 가는 이 세상은 누구나 우주의 주인으로 태어난다네 누구나 이 땅의 주인으로 걸어갈 수 있다네 고정희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있는 기도라네> 전문 |
|
이유봉주 | :: [2009/01/09] | 와! 축하합니다! 용주씨 아빠가 되었네요! 저는 첫 아이 출산할 때 온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던데! 어떠셨나요? |
|
김세진 | :: [2009/01/09] | 축하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면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부부(夫婦)에서 부모(父母)가 되셨군요...^^ |
|
박충구 | :: [2009/01/09] | 축하합니다. 생명은 평화를 먹고 자라지요.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식구들이 되기를 빕니다. | |
김용주 | :: [2009/01/09] | 모두들 감사합니다. 답글들도 퍼가야겠네요.^^ 산모가 퇴원하는 날 조리원 보내고 밤에 블로그에 글을 썼습니다. http://myjay.byus.net/tt/480 앞으로도 종종 육아일기를 써야 할 것 같네요, 아니 쓰게 될 것 같네요. |
|
권동국 | :: [2009/01/10] | 늦었지만 저도 축하드립니다~ 블로그 사진 속의 아이가 참 똘망똘망하고 귀엽게 생겼더라고요. 아이가 주님의 사랑 안에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
|
엄이재윤 | :: [2009/01/10] | 저도 블로그에 있는 귀여운 아기의 사진을 봤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생명의 신비로움을 만껏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
|
강수경 | :: [2009/01/10] | 꺄~~!! 추카 드려요 ..ㅎㅎ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길 바래요!! 그리고..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아이가 되길 ~~ |
[세상의 다른 이름] - 시에틀 추장의 글
워싱턴의 얼굴 흰 대추장이 우리에게 우정의 표시와 안부를 전해왔다. 무척이나 친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우리의 우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위대하고 훌륭한 백인 추장은 아울러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 할 것이다.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백인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우리가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우리로부터 사들이겠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 부족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에서 솟아오르는 수액은 우리들 붉은 얼굴 가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의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이며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따라서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의 땅을 사겠다고 한 제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의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 넘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문명인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함을 안다. 그에게는 우리의 땅 조각이 다른 땅 조각들과 똑같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밤중에 걸어오는 낯선 자이다. 대지는 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는 대지를 정복한 다음에 그곳으로 이주를 한다. 그는 대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다.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 우리는 당신의 방식과 다르다. 우리의 대지를 팔아야 한다면, 그 공기 또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불어 보내는 것이 공기이며, 세상의 모든 아침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것이 그 공기이다. 바람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과 마지막 숨을 주었다. 그 바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묶여 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사람이 삶의 거미집을 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오라기의 거미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거미집에 거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온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조상들의 육신과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대지를 존중하도록 해야 한다. 대지가 풍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풍요롭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듯이,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에게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대지에게 가해지는 일이 곧 대지의 아이들에게 가해진다. 사람이 땅을 파헤치면 곧 그들 자신의 삶도 파헤치는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안다. 대지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의 소유물이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머지않아 당신의 부족이 홍수 뒤의 강물처럼 이 대지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반면에 나와 내 부족은 썰물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러한 운명은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스라한 별을 지켜보듯이 우리의 소멸해 가는 운명을 지켜볼 뿐이다.
얼굴 흰 사람들의 꿈을 우리가 알 수 있으려면 좋으련만. 그들이 마음 속으로 어떤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으며, 긴 겨울밤에 자기의 자식들에게 그려 보이는 내일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면...하지만 우리는 야만인들이고, 문명인들의 꿈은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며, 얼굴 흰 형제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니까.
당신의 부족과 나의 부족은 기원도 다르고 운명도 다르다. 이 두 부족 사이에는 공통점이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들의 유해가 더없이 성스러우며, 그들이 휴식하고 있는 장소는 신성한 곳으로 모셔진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 조상의 무덤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그럼에도 후회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의 조상은 무덤의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자기가 난 이 땅과 당신들을 사랑하기를 그치고 먼 별들 아래를 헤맨다. 그리고는 금방 잊혀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죽은 혼들은 자기를 태어나게 한 아름다운 세계를 결코 잊지 않는다. 육체를 떠나서도 구불거리는 강과 숨은 골짜기, 이 거대한 산과 호수들을 변함없이 사랑한다. 저마다 외로운 사냥꾼들인 살아있는 우리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들이 가 있는 저 '행복한 사냥터'로부터 돌아와 종종 우리를 방문하고 위로하고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밤과 낮은 한 집에 살 수 없다. 얼굴 붉은 사람들은 떠오르는 아침 녘 해에 새벽 안개가 달아나듯이 문명인들이 다가오면 뒤로 달아날 수 밖에 없다. 남은 날들을 어디에서 보내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남은 날들도 많지 않으니까.
우리에 대한 당신의 제안을 공정한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부족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제공하는 인디언 거주지역 안으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얼굴 흰 대추장의 명령을 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자연의 목소리라 여기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몇 번의 달이 더 기울고, 몇 차례의 겨울을 더 넘기고 나면 한때 이 드넓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던, 한때 위대한 정령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실던 힘센 부족의 아들들은 모두 무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한때는 당신들보다 더 강하고 더 희망에 넘쳐있던 한 부족의 아들들이.
하지만 내가 왜 내 부족의 운명을 슬피 여길 것인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한 부족이 가면 한 부족이 오고, 한 국가가 일어나면 한 국가는 물러난다.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한 차례의 눈물, 한 번의 타나마우스, 즉 한 번의 만가(輓歌)와 더불어 그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영원히 떠나간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의 부족이 쓰러질 날이 지금으로선 아득히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문명인들이라 해도 공통된 운명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제안에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것이며, 결정이 나는 대로 알려 주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가지 조건을 제시하는 바이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당신에게 팔더라도 항시 자유롭게 우리 조상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친구와 아이들의 무덤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족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신성한 것이다. 모든 언덕빼기, 모든 골짜기, 모든 평야와 숲덤불이 우리에게는 아득히 사라져간 날들의 슬프고 기뻤던 사건들을 간직하고 있다. 고즈넉한 해안을 따라 태양 아래 죽은 듯이 입다물고 있는 바위들조차도 우리 부족의 삶과 연결된 사건들에 대한 추억으로 몸을 떨고 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이 흙도 우리 부족의 발이 닿으면 훨씬 더 다정하게 반응한다. 이 흙은 우리 조상들의 뼈로 이루어졌고, 당신들의 구두 신은 발보다 우리의 맨발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짧은 계절 동안 이곳에서 삶을 누렸던 흩어진 전사들과 그리운 어머니들, 마음씨 좋은 아줌마들은 아직도 이곳의 장엄한 침묵을 사랑한다. 설령 최후의 얼굴 붉은 사람이 사라져서 우리 부족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 하나의 신화로 남을지라도 이 해안은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먼 훗날 당신의 아이들이 황야에서, 슈퍼마켓에서, 고속도로 위에서 또는 고요한 삼림 속에서 자기가 혼자라고 느낄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므로.
이 모든 대지 위에 자기 혼자라고 할 만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마을과 도시의 거리들이 밤이 되어 고요해지고 당신은 황량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아직도 이 아름다운 땅을 사랑하는 우리 부족의 숨결이 모든 곳에 가득하다. 문명인들은 결코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라 해서 아무런 힘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당신은 우리 부족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내가 '죽은 자'라고 말했던가? 그렇지 않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결혼 2년차 즈음부터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갖기를 원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질 않았다. 오랜 시간 아이를 갖지 못한 분들도 많겠지만 1년 정도가 지나고 나니 마음이 참 초조했었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아이를 선물로 주시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아내는 다시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고 우리의 출산 계획은 다시 조금 미루었다. 기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작년 5월 즈음 아내가 무심코 해본 테스트에 임신이 되었다고 나왔다. 확신은 들었지만 상심이 클까봐 그 날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산부인과 처음 진료를 보는 날. 처음 찾아간 대부분의 여성은 이런 얘길 들었겠지만 아직은 확실치 않으니 1주 정도를 더 지켜보자고 한다. 초음파 사진 속 콩알 같은 점이 임신의 표지일지 아닐지 모른 채 간호사가 챙겨준 사진을 들고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돌아왔다. 그 일 주일 동안이 얼마나 조바심이 나고 걱정이 되었던지 아내와 감질나게 주고 받던 대화들이 생각이 난다.
정밀 초음파 사진으로 네 모습을 보던 날 너의 X자를 그린 손으로 인해 네 엄마와 나, 그리고 네 고모가 될 가족들과 친할머니를 무척이나 즐겁게 해 주었다. 덕분에 네 엄마는 네 3D 모양을 확인하러 몇 번 더 병원에서 정밀 초음파 검사를 해야 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놓고 누구를 닮았는지 한참을 이야기했었다.
너를 출산하던 날. 네 고모부가 만들어준 두루치기를 먹고 네 엄마는 양수가 터져서 급히 병원에 갔다. 진통이 없어서 하루를 더 보내고 그 다음날부터 10시간을 아파하다가 너를 낳았다. 세상 모든 남편이 다 속이 타들어가는 시간이었겠지만 나는 마지막 3시간째에 네 엄마가 산소호흡기를 꽂고 호흡을 고르게 하지 못할 때는 너의 존재에 대해 잠시 원망을 하기도 했다. 아주 잠시지만.
나는 출산 전후의 사람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정말 출산하는 자리에 산모와 함께, 비단 네 엄마 뿐만 아니라 다른 산모들도 함께 대기실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 모든 엄마들이 새삼 위대해 보였다.(나쁘게 말해서 불쌍해보이기도 했다.) 특히 예전에는 당연히 받았어야 할 보살핌조차 받지 못한 내 어머니를 포함한 그 세대의 산모들에게도 더 그러했다. (그래서 네 할머니에게 다시 한 번 감사했단다. 마음만이 아니라 직접 말로 표현을 다시 했다.)
솔직히 네가 태어났을 때 그래서 탯줄은 달고 있는 네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네 모습보다 너를 보고 웃는 네 엄마의 모습 때문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너를 보았다. 눈은 부어서 속에 사탕이라도 담고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아이들 처럼 우렁차게 잘 울지도 않아서 걱정도 되었지만 무사히 나와 주어서 너무 감사했다.
너를 낳고 회음부를 꿰매고 돌아온 아내와 처음 너를 맞았을 때, 너는 목욕을 못해서 그런지 너에게서 갈비집에서 회식하고 나온 사람의 냄새가 났다. 특히 머리에서. 그날 저녁 밤늦게 곤히 자고 있는 네 모습을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봤다. 신기하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성하야. 세상 모든 부모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과정을 거치고 같은 말을 하겠지만 나도 너의 출생을 비슷한 언어와 비슷한 과정으로 표현해서 미안하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은 요동치고 설레인다. 이 속사람의 '흔들림'을 무슨 말로 적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너무나 바라던 선물임을 감사 또 감사한다.
하지만 네 출생의 주역이지 이 모든 잔치의 축하받을 주인은 네 엄마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네가 너무 예쁘고 연약해서 나를 포함한 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하물며 당사자 본인조차-너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수고했다고, 사랑한다고, 더 아껴주겠다고 말해도 모자랄 네 엄마를 너도 너의 출생일에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