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혹은 사이비 페미니스트로 행세하면서도 몇몇 퍼즐들은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가 되었다. 지난 주말부터 읽기 시작한 모린 머독의 <여성 영웅의 탄생>의 도움이 컸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많은 딸들에게도 권하고 싶을 정도로 내면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딸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안의 남성성에 대한 갈등과 왜곡을 잘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서도 풀리지 않던 몇몇 매듭들이 풀리는 느낌마저 받았다. 소화가 다 되면 언젠가는 썰을...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아래는 몇몇 인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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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딸이 한 개인으로 독립하고 성공하는 것을 지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많은 딸들이 어머니와 거리를 둔다... 불행하게도 이 현상은 보편적인 주제이다. "자라면서 자아 발달과 성장에 방해를 받은 어머니는 딸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할 수 있다. 아니면 반대로 아이의 성공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려고 자신의 딸에게 '특별한' 아이나 '천재적인' 아이가 되라고 부추길 수 있다." 많은 아이들이 "나처럼 살지마라. 그렇지만 나처럼 살아라." 혹은 "성공해라. 하지만 너무 성공해서는 안 된다." 같은 모순되고 양가적인 메시지를 딸들에게 보낸다. 여성이 남성성을 선호하고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남성성이 자신의 독립과 성공을 가치있게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난 항상 어머니가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슬픔의 원인을 아버지라고 진단하는 마거릿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동화 속 여주인공들에게 하나같이 반복되는 오랜 주제처럼 나는 어머니를 악당이라 생각했고 아버지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아버지를 우상화했고 구원자로 보았다. 나는 왕자님이 와주기를 기다리는 예쁘고 똑똑한 딸의 역할을 잘 해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나를 구해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하려고 나와 어머니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아버지의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면 어떤 게임을 해야 하는지를 일찍부터 배운다. 그들은 똑똑한 척, 귀여운 척, 수줍은 척, 유혹하는 척한다. 침실 안에서건 밖에서건 아빠에게 중요한 건 힘과 권위다. 여자아이가 함께 시시덕거리는 첫번째 남자는 아빠이다. 아빠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딸의 성적인 발달에 결정적이다. 아버지의 따뜻함, 장난스러움, 사랑은 여자아이의 건강한 성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사랑의 대상은 계속 최초의 애착대상인 어머니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배욕, 소유욕, 비판은 여자아이의 이성애적 발달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어린 딸의 성을 보호하는 보호자로서 자연스러운 역할을 무시하거나 남성적 지배욕 때문에 근친상간으로 딸의 정상적인 성적발달을 침해하는 아버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은 여성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성을 회복하는 일에 나머지 인생을 쏟게 될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아빠 주변에서 너무 똑똑하게 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배운다. 여자아이들은 조롱과 비판을 받거나, 인정받지 못하거나, 신체적 학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야망을 잊고 자신들의 보스를 멋져보이게 만드는 여성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일에 대해 그저 수동적이고 냉소적으로 씁쓸해할 뿐이다.
우리사회는 남자아이들이 자율성을 갖도록 지지하는 것만큼 여자아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아이들에게는 부모와 가족과 의존적인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록 강요하며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이들에게로 의존적 관계가 옮겨 가도록 조장한다" 여성들은 다른 사람의 의존 욕구를 배려하도록 요구받고 미리 알아차리도록 어릴 때부터 훈련받는다... 어떤 여성들은 배우자의 자아를 강화하거나 배우자를 보호하느라 의존적으로 행동한다. 남편이 강해지려면 아내가 약해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관계의 법칙이 있다. 이 신화는 한쪽이 자신을 약화시키면 배우자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