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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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가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바뀐 후,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그건 마구 눌러대는 셔터일게다. 메모리카드 용량만 충분하다면 필름 값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같은 구도에서도 여러 번 '샷'을 날리기 일쑤다. 특히 인물 사진을 찍다보면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초점이 안 맞거나 구도가 불완전하더라도 찍은 사진들을 지우는 것이 힘들다. 대상 인물이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거나 그 장소에서 찍은 사진 중에 건질 사진이 하나 뿐인 경우,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진을 지우지 못하고 그걸 다 인화하거나 블로그에 올리기도 한다.

허나 내가 알기로 프로페셔널은 '완전'하지 않은 사진은 쉽게 버린다. 그래서 프로들에게는 찍는 것도 일이지만 고르는 것도 일이다. 트리밍을 하거나 후처리를 한다 해도 어정쩡한 사진을 남겨두는 일은 거의 없다. 영화 '취화선'에서 주인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그림이나 도자기는 일말의 고민 없이 찢어버리고 깨어부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게 엄선한 사진은 '작품'이 되고, 이러한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나는 그게 쉽지 않다. 자꾸 못난 사진들에 정이 간다. 포토샵을 켜서는 이렇게 저렇게 '가공'을 해본다. 이 사진은 이래서 못 지우고 저 사진은 저래서 못 지운다. 특히 인물 사진이 그렇다. 그 사람의 특징이나 내가 아는 어떤 특유의 인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진들 앞에서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다. 그래서 계속 '가공'을 하고는 다시 모든 사진을 뽑는다. 내가 보기에도 내 사진은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 골고루 끼어 있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내 사진을 무난하다 혹은 그저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끔 모든 일에 완전한 것들만 내보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결과만을 엄선해서 나란 사람을 꾸민다면, 그러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다부진 마음을 품어 본다. 그게 처세며 자기 관리이고, 또한 직장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프로페셔널의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인물 사진을 고르는 방식처럼 내 삶에서 프로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 '잃어간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그런 '나태한'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향은 분명 아니니까. 하지만 어느 새 나이가 들어가고 시간 속에서 내 서툰 모습들이 익숙해져간다.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또는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는 것도 같다.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삶에서 아마추어가 되어간다. 오늘도 나는 찍은 사진들을 살려 보고 있다. (끝)

2008/05/25 19:57 2008/05/2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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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피로연에서 들러리를 섰던 여자는 담배를 피울 곳을 찾고 있고 여자를 주의깊게 보던 남자는 '작업'성 말들을 건네기 시작한다. 약간은 냉소적으로 대꾸를 하는 여자는 대화 자체를 즐기는 듯 하다. 대화를 한창 하다가 결혼하는 신부가 남자의 여동생임이 밝혀지고 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임이 드러난다. 남자와 여자는 오래 전에 이혼한 커플이었고 여자는 남자를 떠나 런던에서 심장전문의와 새 삶을 시작한 것이었다.

남자는 결혼식에 여자가 오리라는 기대감과 만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비춘다. 여자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무심함으로 대화와 하루 밤을 보내고 유유히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사라진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는 훌륭하다. 내내 두 개의 화면을 겹쳐보이게 하는 촬영 기법은 때로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 때로는 남녀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에 유효적절하게 사용되며 두 배우의 불안해보이는 대화와 표정 연기도 거의 절정 수준이다. (사실 이 영화는 팀 버튼의 아내인 헬레나 본햄 카터 때문에 본 것이다.)

하지만, 결말이 정작 아쉬운 부분이다. 여자는 흔들리던 마음과는 달리 정신 없이 택시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간다. 처음부터 여자는 하루 밤을 전 남편과 보낼 생각 외에 다른 '기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어짐과 혼자 런던에서 씩씩하게 살았을 그녀의 배경에 대한 어떠한 조명도 없이 남자-전남편의 작업에 흔쾌히 동행했다가 몇 시간 만에 마음을 정리하고 어떤 여운도 없이 돌아가는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 볼 여유조차 영화는 허락하질 않는 것이 아쉽다.

감정의 변화를 행동으로 예측하기 어려워서, 보는 관객들조차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드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아오이'나, 9년 만의 만남에서의 심리적인 묘사를 대화로 훌륭하게 풀어낸 [비 포 선셋]의 '셀린느'처럼, 영화 속 여자 주인공도 보여주고 싶은 내면의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에 당혹스럽다.

2008/05/15 19:06 2008/05/1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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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가십을 싫어한다. 가십보다는 냉소적이고 비꼬는 식의 말들을 더 싫어하며,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화를 내고 쌍욕을 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글의 시작부터가 좀 추상적이었다. 영화 <비스티 보이즈>는 보고난 후 내도록 기분이 안 좋았다. 승우가 끝내 지원을 칼로 찌르고 재현이 일본으로 떴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좋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있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회식을 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빨 사이에 낀 음식 때문에 계속 혀를 감아가며 신경쓰는 것처럼 이 영화가 내겐 좀 불편했다. 왜였을까, 왜였을까..

난 영화평을 전문적으로 하진 않지만,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 중 하나로서 영화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감독이 배역들을 향한 시선이다. 그 배역 하나하나를 깊이 이해하고 파고들어서 그 배역의 내면, 심리, 그리고 행동의 이유들을 파헤쳐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탈 사이트에 아버지를 죽인 아들 기사가 뜨면 한 줄만 읽고도 세상 말세라고 혀를 차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 아들은 왜 자신의 아버지의 숨통을 끊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주의깊게 살펴보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대가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들의 이야기다. 문제는 감독이 호스트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고 싶었다면, '호스트의 생활은 이렇더라'는 호기심 이상의 '개입'이 전제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승우는 집안이 망해서 호스트를 시작한 것으로 설정되었고 재현은 자신과 동거하는 승우의 누나 한별을 떠나려는 야비한 남자로 비춰진다. 그가 진 5000만원의 빚은 노름으로 날린 듯이 보인다. 지원은 폭력을 쓰는 남자를 싫어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자신에게 폭력을 쓴 재현을 떠난다. 재현은 지원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의심하다가 지원에게 집착하게되고 결국 그녀를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영화에서 간혹 등장하는 호스티스는 호스트바에서 스트레스를 풀며 호스트들은 자기가 만나는 여자들의 등처먹을 생각만 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파편적인 장면들이 툭툭 던져지는 <비스티 보이즈>는 결국 내게 일종의 불쾌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이 영화는 마치 내게 회식 자리에서 "호스트바에 일하는 애들이 이렇게 산대. 골 때리지 않냐?'라고 가십을 한껏 쏟아내는 친하지 않은 회사 동료를 보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그 어느 배역도 그 어느 상황도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둘러대는 재현에게 혀를 끌끌 차게 되며, 승우와 지원의 다툼은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커플을 팔짱끼고 구경하는 행인들처럼 관객들 눈쌀을 지푸리게 만든다. 지원은 거짓말을 했다는 듯이 2차를 나가는 업소에서 일하면서도 별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난 영화가 끝난 지금도 한 없이 궁금하다. 왜 재현은 자신의 빚을 갚아주려는 한별을 결국 떠나 일본으로 갔을까. 승우는 왜 결국에는 지원을 칼로 찌르게 되었을까.
지원은 승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별은 왜 재현에게 집착했을까. 호스트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여운을 두기 위해 감독은 CF나 뮤직비디오의 영상들처럼 그냥 한 장면 한 장면씩을 보여준 걸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보여준 감독의 날카로움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비스티 보이즈>의 하정우보다는 10년전 <태양은 없다>의 이정재가 더 그립다.(끝)

2008/05/08 19:04 2008/05/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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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보지식인 하워드 진이 25년 전에 쓴 <미국 민중사,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의 개정판이자 젊은 세대를 위해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하워드 진은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살아있는 진보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미국 역사의 어두운 면, 즉 원주민 학살, 노예제도와 노사문제, 여성 인권 등에서부터 최근 이라크 전쟁까지의 '불편한 진실'들을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콜럼버스와 링컨 등과 같은 영웅들의 실제 상황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허락한다.

나는 미국인 대다수가 하워드 진을 불편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국민들은 대체로 성실하고 선하며 정치에 둔감하다. 근면하고 보수적인 시민일수록 공화당을 옹호하며 악행을 저질렀다 해도 대통령을 비꼬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을 싫어한다. 이 책을 내면서도 하워드 진은 많은 부정적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도 책의 서문에 언급했다. 그 내용을 소개함으로 책 소개를 대신할까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아왔다. "당신은 다른 보편적인 미국 역사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당신의 역사 서술이 젊은 세대에게 적합하다고 보십니까? 그들이 현 사회에 대해서 환멸감을 품게 되진 않을까요? (중략)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인디언 학살, 노동자에 대한 착취, 인디언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미국의 무자비한 팽창정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비애국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어째서 사람들이 어른들은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들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반면 젊은이와 아이들은 그런 걸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젊은 독자들이 조국의 정책에 대해 정직하게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그렇다 문제는 정직함이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정직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조국의 정책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 (본서, 11-12쪽)
2008/05/08 19:03 2008/05/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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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교회 문화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밀양’은 솔직히 불편한 영화였다. 개봉 첫 주에 아내와 함께 달려가서 본 이창동 감독의 신작은 앉아 있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지 ‘교회’를 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은 냉소적인 시각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보여줬고 그 객관적인 잣대가 오히려 ‘교회 안’의 나를 뒤흔들었다. 극중 신애와 약국 김집사가 특히 내겐 불편한 인물이었다. 아마 내 신앙의 여정에 많지는 않아도 몇몇 ‘신애’가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김집사’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양’이 개봉된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교계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와싱톤한인교회의 김영봉 목사도 그간의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잠시 미룬 채, 이 영화를 놓고 4주간 동안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그 내용을 보충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 교회 이야기, 그리고 숨어계신 하나님, ‘비밀 햇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神觀)를 풀어나간다.

먼저 저자는 ‘밀양’이라는 영화가 ‘한국 교회에 대한 뼈아픈 고발’이라고 고백한다. 특히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이청준씨가 ‘값싼 용서’를 비판하고 싶었던 점에 집중하며, 진정한 용서는 당사자의 회개와 보상, 그리고 개혁으로 이어져야 함을 지적한다. 또한 신애의 주변에 있던 교인들을 통해 한국 교회 문화에 편만한 ‘조급성’과 ‘피상성’을 직시하며 기독교인들의 친절하게 포장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당신은 멸망할 사람이라는 전제’가 오만한 모습으로 깊게 배어 있음을 비판한다. 저자는 하나님을–한국교회의 선전과는 달리-비밀 햇볕처럼 ‘온화하게, 따뜻하게, 드러나지 않게 차분하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활동하시기를 더 좋아하는 분’으로, 고난에 처한 자녀들이 그것을 회피하게 만드는 위약(僞藥)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고난의 현실을 끌어안고 당신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기를 원하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과잉친절과 피상적인 모습으로 신애에게 다가간 약국 김집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신애가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고 함께해 준 종찬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책을 놓은 지금도 한 대목이 머리 속을 맴돈다.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김 집사의 말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다만 고난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고 난 후에만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마음에 못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아픔을 만난 사람에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나를 신애에, 종찬에, 그리고 저자에 대입시키기는 쉬웠다. 하지만 ‘밀양’을 볼 때의 불편한 심기처럼 적어도 물리적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삶의 터전에서의 나는 ‘김집사’에 가까울 때가 많다. ‘형제’, ‘자매’, ‘하나님의 사랑’, ‘낮아짐’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피상성과 조급성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문화에 젖은 내 안의 ‘김집사’가 이 책을 읽고 변화되기를 기도해 본다.(끝)

*IVP BOOK NEWS 2008년 5/6월호 기고글.

2008/05/01 01:40 2008/05/0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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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2)
- 겸손과 관대함 사이에서


신입사원 시절, 나에게는 '작업복'에 관한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현장 실습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작업복을 지급 받았는데, 사내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출근 후에는 그 작업복을 입어야 했다. 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침에 따라 간부부터 사원까지 동일한 작업복 차림을 한 모습들이 나는 참 좋아 보였다. 물론 작업복 차림이라고 해서 노사간의 위화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작업복이 그런 것을 덮기 위한 얄팍한 미봉책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에는 ‘현장경영’이라는 모토 아래 직원 모두가 같은 작업복을 입는다는 상징적 의미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실습 교육이 끝나고 드디어 나는 연구소로 '입성'했다. 팀 배치를 받자 서무 직원이 신입사원들의 상의 사이즈를 다시 쟀고, 당일 저녁 새 작업복이 지급되었다. 거기에는 '기술 연구소'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그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연구소 직원임을 의미했다. 그 날 공교롭게도 내 차례에서 작업복이 바닥났고, 새 작업복을 지급받으려면 최소 1주일은 걸린다는 서무 직원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인식하지 못한 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신입사원들은 모두 연구소용 작업복을 입고 돌아가는데 나만 구별된 작업복을 못 입는다는 사실에 순간 속이 뒤틀렸던 것 같다.


머리 속으로는 '현장경영'이란 모토와 작업복 차림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공장 라인을 탈 때도 영등포시장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판촉 활동을 할 때도 서비스 센터에서 오일을 갈며 기름 때를 묻히고 있을 때에도, 나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짧은 기간 동안 단순 반복적인 바닥 일의 맛만 보고 나면 종국에는 보다 중요하고 고차원적인 일을 하는 연구소로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말하기 부끄럽게도 나는 혹여 연구소를 돌아다닐 때 석, 박사 출신의 연구원들이 나를 현장직이나 영업직, 혹은 정비직 사원으로 볼까봐, 그게 그렇게 싫었던 것이다. 대학에 대학원 공부에, 그런 것들이 뭐 대수냐고 말하면서도 내 혈관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미 대접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 사탕 발림 같은 겸손, '낮아짐'과 같은 단어의 형이상학적 지향성이 실제 삶 속에서는 내 신앙을, 내가 믿는 예수의 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고 내 속의 이런 저런 나쁜 생각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참으로 부끄러웠다.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싶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엔 내가 최고지/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 겸손은 힘들어/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은 힘들어”

조 영남 노래 중에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랫말이다. 맞는 말이다. 유독 배운 게 많은 사람일수록, 아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겸손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많다. 특히, 요즘과 같이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추면 더욱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과장하거나 속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가 가진 것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도록 요구 받는다. 어느 날 팀장님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XX씨, 영어 좀 하나?”라는 질문에, 과장해서 잘난 티를 내야만 외국 업체와 회의 때 주도적인 역할이 주어지는 직장인들에게는, 매사에 겸손하라는 목사님의 설교와 실재 일상의 처세술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점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만 만만하게 보이면 자기 업무조차 마구 떠넘기는 회사의 고참 동료들 사이에서, 자동차 접촉 사고에서 먼저 미안하단 말을 꺼내면 이를 악용하는 상대 운전자들 사이에서, 인터넷을 설치하거나 물건을 환불 받는 등의 서비스 업무를 볼 때 내가 먼저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면 혜택들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 직원들 사이에서 과연 눈물을 머금고 ‘겸손’해야 하는지 슬슬 갈등이 된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일상에서도 ‘내가 좀 어리버리해’, ‘내가 많이 부족하지’하며 자신의 단점들을 내세워 몸을 낮추면 가까운 사람들조차 말을 쉽게 옮기고 비웃기 일쑤다. 이런 일들을 계속 겪으며 맘 고생을 하는 이들이 결국 못 참고 불쾌해하면 농담이었다고 애써 무마하려 하거나 ‘쿨’하지 못하다고 도리어 비난 하기 일쑤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은 그의 책 <마음 미술관>에서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한 사람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갖는 ‘겸손함’보다는, 나를 긍정하고 나를 높이면서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심정으로 ‘관대함’을 갖는 것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의미일 게다. 내가 남보다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우리에게, 조금만 억울한 일이 생기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대로 내면에 축적되어 속병을 앓거나 반대로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갚아주게 되는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의사의 처방인 셈이다. 그녀의 글에 동의가 된다. 잘 되지도 않는 겸손을 체화하려고 속을 썩느니 관대하게 타인을 용서하는 ‘가진 자’의 마음을 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타인에게는 동일한 행동처럼 보일 것이고 내적으로는 죄책감에서도 해방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마음 한 켠이 껄끄럽다. 그건 지금도 여전히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을 떠나서조차 겸손히 행하는 이들에게 결국 감동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총각네 야채가게'로 유명한 이영석씨가 매사에 겸손과 성실로 하루하루 일하는 모습에 많은 CEO들조차 감동받으며, 가수 김장훈의 자랑하지 않는 묵묵한 선행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또한 나의 불편함은 여전히 예수의 도를 좇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무엇보다 성경은 겸손을 ‘마음의 변화’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도의 성자’라 칭송 받는 선다싱이나 ‘하나님 손에 있는 연필’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테레사 수녀, ‘작은 예수’라 불린 장기려 선생 같은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 속에는 타인에 대한 ‘가진 자’의 관대함과 같은 내면의 타협점이나 처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내 기대와는 달리 매 순간 겸손과 관대함 사이에서 줄타는 듯한 나의 일상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들에 비하면 여전히 작은 일에서조차 대접받고자 얼굴을 붉히는 내 속 사람이 부끄럽다. 서른의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음이,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말만 늘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비전만을 궁색하게 둘러대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 삶과 글 사이에 있는 거품들을 줄여가야 함을 절감한다. 그리고, 마치 신용카드를 사용하듯 말부터 뱉어내고 나중에 행하면 된다는 식으로 신앙에 있어서도 더 이상 채무자의 자세로 살지 않고, 더 늦기 전에 현금 내지는 직불카드를 사용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교정해가야 할 성 싶다. 천국의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끝)


*본 글은 <복음과상황> '08년 5월호 기고글입니다.

2008/05/01 00:03 2008/05/0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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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를 마치고 아내와 마이클 무어의 신작 <식코, Sicko>를 봤다. 식코는 제목처럼 미국의 의료 실태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이클 무어는 의료보험 민영화 이후에 미국 사회에서 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손가락을 다쳤을 때에도 손가락 하나당 엄청난 비용을 매기는 것이나 9/11 테러 사태 때에 봉사에 힘썼던 이들이 폐질환으로 고생하는 데에도 미국 정부와 보험 회사에서는 그들에게 정당한 치료를 해 주지 않아 오랜 시간 고통 속에 몸도 마음도 상처로 가득한 경우를 보여줄 때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이클 무어 영화의 특성 상, 그는 과감한 생략과 극단적 사례들을 드는 경향이 있다. 특히, 미국의 민영화된 의료보험 제도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타 국가들, 이를테면 영국, 캐나다, 프랑스의 의료 혜택의 장점만을 보여준 점, 그리고 미국의 환자들을 데리고 간 쿠바의 하바나 병원이 쿠바에서는 최고급 진료에 속한다는 점 등은 안티들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분분한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아파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 앞에서 그들의 상처를 먼저 돌아보지 않고 이윤과 손실액부터 따져보는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무섭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그것이 한 사람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사람을 그렇게 내몰고 있는 상황이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고통스러웠다.

무어는 말한다. 쿠바도 할 수 있고, 캐나다도 할 수 있고, 영국, 프랑스도 할 수 있는데 미국은 못하겠냐고. 사람이 아파 쓰러질 때 그 사람부터 살리고 보는 정상적인 사회를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이 이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 때로는 편파적으로 스크린을 채우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편파성을 지지하고 싶다.

2008/04/11 19:00 2008/04/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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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축하한다. 항상 행복하렴.
- 누나

 

생일축하해~~ 잘 지내는거냐?? 축하콜라 한잔 해야지!!
- 상국 옹

 

생일축하해요~ 교육 중이라 기쁨 두 배 겠구만!!ㅋㅋ
생일턱은 언제 낼꺼야? ^^
- 김장호&이동욱

 

아도라 생일을 추카추카 한단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라. 마니마니 사랑해.
- 어머니

 

근데 거북이가 죽었대. 불쌍하고 섭섭하네.
- 어머니2

 

용주군 해피버스데이투유라네^^
마눌님 미역국은 먹었남?
- 가가

 

아니 형님~!!!!!!!
이리 좋은 날 태어나셨습니까^^
덕분에 우리가 기쁨을 누립니다~~
- 진숙

 

형 생일축하해요
요즘 자주 못 뵈어서 안타깝네요ㅋ
명희 누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창서

 

형 생신 축하드립니다~ㅋ
건강 잘 챙기시고 담에 함 바여~ ^^
- 태종

 

생일축하해요.
아가 키우느라 외출 못하는 아줌마 위로 방문 좀 해주지.ㅋ
가깝고도 먼 이웃^^
- 종임

 

오라버니 어제 연락한다는게 깜빡했네.
쪼꼼(?)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으흐흐 ^^
- 정은

2008/04/05 22:31 2008/04/0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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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기고글 모음/삶처럼 글쓰기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1)
- ‘소비되는 것들’에 대한 단상

 

 

결혼하고, 그러니까 아저씨가 된 이후로 체중이 많이 불었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운동량은 부족하고 피로는 쌓인데다 잦은 회식자리 등의 이유로 한 번 불어난 내 체중은 줄어들 줄을 모른다. 해서 최근에는 식사를 하다가 음식을 남기는 경우가 잦았다. 아내의 조언대로 되도록 육식은 줄이되 채식을 많이 하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 연유로 회사에서 자율 배식으로 먹는 식사는 가져온 만큼을 다 먹지 않고 버리기 일쑤다. 그것도 내심 욕심대로 다 먹지는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면서. 하루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잔반을 국그릇에 담고 있던 중 어릴 적 아버지가 ‘쌀 한 톨도 버리지 말라’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간혹 내가 남긴 밥그릇 위쪽에 남아 있던 밥풀을 보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으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남긴 한 톨의 쌀을 만들기 위해 농민들의 한 해 수고가 있었음을 상기시켰고 그럴 때면 나는 죄책감에 숟가락 소리가 심하게 날 정도로 밥그릇을 비우곤 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음식을 배에 버리지 말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요즘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내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아무런 의식 없이 음식을 먹다가도 쉽게 버리게 된 셈이다. 사실 마트에서 얼마의 돈을 주고 쌀 몇 킬로그램을 사면 농민의 노고가 밥을 먹는 내게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쌀과 농민의 소외, 쌀과 나와의 소외, 나아가 쌀을 경작한 농민과 쌀밥을 먹고 있는 나와의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그 면전에서 버리기는 어렵다. 그 사람의 수고와 애정이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한 끼의 식사조차 물질로, 얼마의 돈을 지불하면 살 수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때문에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그 물질을 살 수도 있고 필요하면 쉽게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제는 모든 것들이 자동화, 인스턴트화 되어서 쉽게 똑같은 음식들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도 있다. 그러한 음식들은 포드자동차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누가 만들었는지조차도 불분명하게 흐르는 과정 속에서 기계적인 반복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대량으로 소비되고 대량으로 버려지고 있다. 이러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사이클 안에서 보릿고개를 겪은 아버지 세대의 구태의연한 ‘쌀 한 톨의 미학’이 자리잡을 틈이 없음은 자명하다.

비단 음식뿐 아니다. 주어진 모든 사물들의 가치를 금전적 잣대로 바라보는 나는, 물건 귀한 줄을 모르고 산다. 어릴 때는 양말에 구멍이 나면 꿰매 신기 일쑤였고 우산이 고장 나면 수리를 해서 썼다. 솔직히 나이 스물이 넘어서는 옷을 헤질 때까지 입거나 낡아져서 버린 일이 거의 없다. 촌스러워져서 혹은, 스스로 지겹다고 생각되면 쉽게 옷을 버렸다. 중고책방에서 꼼꼼히 살피다가 책을 건지기도 했던 나는 어느새 돈을 벌면서부터는 헌 책이 있더라도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책을 손에 넣는 것에 쾌감을 느껴 개정판이 나오면 같은 책을 다시 사기도 한다. 그런 책 몇 권 정도 살 형편은 되니까, 옷 몇 벌은 백화점 옷은 아니더라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 입을 형편은 되니까 옷이 멀쩡해도 내가 질리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비슷한 류의 물건을 '상쾌한 마음으로' 사대곤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그 동안 나의 소비행태가 분명하게 보인다. 과한 욕심으로 사고 나서는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 쓰지도 않고 버릴 날만을 손꼽고 있는 많은 물품들이 즐비하다.

복상 편집위원인 박총 형이 자주 언급하는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란 책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는지를 소상히 알려준다. 커피, 햄버거, 신발, 신문, 자동차와 컴퓨터까지 그것의 재료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의 부담과 가공과정에 관련된 많은 노동착취, 그리고 그 물건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이 소상히 적혀있다. 그런 일련의 전지구적 환경, 노동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물건을 사고, 쓰고 버리는 일련의 나의 일상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런 일상에서의 윤리관이 없는 채로 사회 참여나 운동, 그리고 복지나 윤리에 관한 말들을 참 많이 내뱉고 산다. 누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참으로 두렵다. 나의 거창한 생각, 나의 인생, 나의 기도 속에서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이는 악한 일상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녹 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교계에서 실무자로 활동하는 후배가 있다. 비교적 검소하게 사는 그녀는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며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게 체질에 맞다'는 얘기를 했더란다. 사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사실 난 많이 벌어 적게 쓸 궁리를 했었는데, 그건 결국 따지고 보면 많이 벌어서 적게 쓰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내 속내를 감춘 것이었다. 수입에 여유를 두고 싶은 것은 어느 정도의 물질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심 감추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런 내 속내를 쉽게 이기지 못할 성 싶다. 하지만 이제는 노력하고 싶다. 내 미시적인 삶이 정화되지 못한다면 내가 자주 말하는 거시적인 삶의 윤리적 토대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가면을 쓰지 않는, 일관된 삶을 살고 싶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4월호 기고글.

2008/04/01 00:02 2008/04/0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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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머리 속에서 무언가 끄집어내려 하지만
아무 것고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나올 것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공허한 머리. 공허한 생각.
복잡해 보이는 내 머리 속은 엉킨 건지, 텅빈 건지.
2008/03/16 19:56 2008/03/16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