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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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세계의 오지나 전쟁, 대지진, 전염병 등 재난의 현장에서 자발적인 무상 진료 활동을 펼치는 쿠바 의사들의 인도적인 의료 지원은 유명합니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모토 하에 지난 45년 간 101개국에 무려 10만 명이 넘는 쿠바 의사가 파견되었답니다.

대지진의 현장에서 반년 넘게 천막 진료를 하고 있는 의사나 한 번의 진료를 위해 몇 시간 동안 밀림을 헤치고 걸어가는 의사나 그들이 바라는 보상은 간단합니다. ‘의사가 친절하고 좋다’는 말만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의사에게 ‘친절하고 좋은 의사’라는 말보다 더한 보상이 어디 있을라구요. 선생님에게 ‘졸업하고도 계속 보고 싶은 스승’이라는 말만큼 짜릿한 보상이 또 있을라구요. 부모에게 ‘나는 엄마 아빠가 참 좋아’라는 말 이상의 보상이 다시 있을라구요.

모든 혁명의 처음이 그런 것처럼 본래 인간의 모든 행위와 관계는 본질적이었을 겁니다.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영양 공급으로 비만을 초래하는 식탁처럼 자꾸 넘치는 욕망 쪽으로 몸을 기울이다가 종래에 알맹이는 없고 덧대기만 남아 있는 형국인지도요. 특별히, 인간의 모든 관계에서는 본질을 꿰뚫는 쿠바 의사같은
‘혁명가 정신’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출처]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본질|작성자 혜신이



오늘 정혜신의 그림 에세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본질을 꿰뚫는 혁명가 정신의 '본질'이라는 것이 친절한 의사가 되는 것, 졸업하고도 제자가 찾아오는 스승이 되는 것, 그리고 자녀가 좋아하는 부모가 되는 것이라는 점에 이제는 크게 동의가 되었다.

사실 청년기에 나는 거대담론에 빠져 있었고, 세상을 변화시키자는-그것이 '종교'적인 의도에서건 '진보'라는 잣대에서건 간에-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포부가 크면 클수록 사실은 본질적인 부분보다는 인정받고 싶은 허영과 공명심에 취해 있었던,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욕구가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원초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동기가 사람을 진정한 혁명가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부모가 장애를 가진 이들에 더 관심을 갖게 되듯이 사람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단순한 기대와 소망들이 사실 우리 안의 본질적인 혁명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글은 <작은 도서관 운동>을 처음 시작한 최해숙 관장님의 인터뷰 글이었다. 이 운동을 하게된 계기를 묻자 그 분은 이렇게 말했었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을 해서 아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손자를 돌보면서였다. 내 아이들이 자랄 때에는 생계를 위해 은행에서 일하느라 아이들을 내 손으로 직접 키우지 못했다. 손자들이 생기자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남에게 아이들을 맡기면서까지 일을 했나.’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손자만큼은 온 정성을 다해 키우고 싶었다.

책을 좋아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육아일기를 꾸준히 썼다. 아들을 키우면서 썼던 육아일기는 며느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손자를 3년 반 키우면서도 자연히 일기를 쓰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손자에게 책도 많이 읽어주었다. 그러던 중 꾸준히 구독하고 있던 <새가정> 잡지에서 어린이를 위한 좋은 책을 소개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잡지를 통해 어린이도서연구회라는 부모들의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 아이를 위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선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책을 내 아이들에게만 읽힐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읽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잘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다른 아이들도 같이 잘 자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민간 어린이 도서관은 아마 내가 처음으로 시도했을 것이다. 큰 비전을 보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책을 골라서 읽혀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출처: 주간기독교 인터뷰 내용 중에서)


'내 아이를 잘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다른 아이들도 같이 잘 자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은 도서관 운동>을 시작한 최해숙 관장, 그리고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모토 하나로 세계를 누비는 쿠바 의사들. 나도 이러한 작은 혁명을 꿈꾸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2009/07/01 20:11 2009/07/0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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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첫 번째 정리 by 노종문)

일시: 2009.5.25. 19:30~21:30
장소: IVP 2층 회의실
참석자
양형주(목사, 대전초원교회)
김명윤(목사, 수서교회)
노종문(목사, IVP 총무)

노: 톰 라이트의 훌륭한 기여는 지난 세기의 성서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해 놓은 방대한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고, 복음주의적으로 잘 소화하여 해설해 줌으로써, 그 거대한 지식의 축적물을 교회가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물고를 터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 훌륭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 학문적 성경 연구와 교회의 선포를 연결시켜 주는 소중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톰 라이트의 중요한 저서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 그가 주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존의 유대인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세계관을 어떻게 전복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여러 면에서 전복시켜서 그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 동안 우리는 예수 믿고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이야기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성경적 종말론과 소망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이야기 세계를 다시 한번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위해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김: 저는 조금 비판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뭔가 한 두 단계를 건너 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같이 신약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굳이 여러 가지 문화적인 설명으로 회피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 질문을 제기한 것처럼 그 텍스트의 내용이 당시의 세계관과 신앙의 반영이 아니냐 하는 질문에 직면해야 하는데, 이 책은 단순히 텍스트 뒤로 숨었다는 느낌이 좀 듭니다. 텍스트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오늘날의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건너 뛰는 느낌이 든다는 거죠. 앞 부분에서 1세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텍스트를 설명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우리 시대의 상황은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가능성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이미 내려진 결론에 대한 적용의 장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 기대를 가지면서 읽어내려 갔는데 명쾌하게 안 풀린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사실 설교할 때 가장 걸리는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부활한다. 이게 어떻게 성립하느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건 나름대로 조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성경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두 사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이 책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적 사건이 되려면, 부활이 예수라는 특수한 경우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으로 인류와 죽음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 되는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부활했답니다. 많은 증인이 봤어요. 근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 부활했으면 여기 있어야지. 그 사람이 부활한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되면 이건 아주 특수하고 희귀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은 될 수 있지만, 그걸 보고 나도 부활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저로서는 제일 큰 관심이었는데, 그 부분은 여전히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양: 어떤 내용이 들어갔으면 하는 기대가 있으셨습니까?

김: 말하자면, ‘그가 우리같이 되심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와 같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기독론적인 장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의 부활을 보고 우리가 우리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 하는 내용을 다루어주는. 예수님은 그때 부활했는데 우리의 부활은 아직 안 일어나고 있는 이 간극이 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있을 지 모르겠는데 우리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다는 거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 고리가 나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는데 그게 끝까지 안 나오는 거에요.

양: 그것과 관련해서 뒷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보증’이라는 말에는 ‘첫 번째 납입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첫 보증으로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되는 것이죠.

김: 아무튼 저는 그것까지 좀 더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얘기도 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관련해서 저는 또 승천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우리 가운데 있으면 간단한 문젠데. 도마의 경우처럼 누구든지 불신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서 만져봐, 하면 전도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도마 이후로 이천 년 동안 만져지는 예수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그 어간에 있었던, 제자들이나 목격자 사이에 있었던 그 사건은 그 후로 재현되진 않았습니다. 그게 승천과 재림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 활동하는 물질적 육신을 가진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우리가 보증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활 사건과 우리의 경험과의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이 질문은 여기서 명쾌하게 다루지 않았는데, 다 설명 됐다고 생각하고 비껴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은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망할 세상이다, 벼랑으로 가는 차 기름칠 해서 뭐하냐, 이런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행하는 모든 수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재창조 하신다고 설명하는 부분들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부활이라는 것이 1세기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말할 순 없을까 하는 의혹이 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각적으로 만져지고 경험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론을 이야기하려는 그 태도가 특수한 하나의 세계관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니냐, 서구적인 세계관과 연결되어있는 존재론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아닐까요.

노: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활을 설명하는 다른 어떤 세계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건인 것 같습니다. 보통 서구의 세계관에 두 가지 근원 즉, 헬라적 세계관과 히브리적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는 물질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물질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세계라고 봅니다. 톰 라이트가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부활은 창조가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믿는 세계관을 확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저도 아쉬웠던 점을 하나 이야기 하면, 책의 뒷 부분에서 실천적 대안과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행전이고, 성령님의 선교거든요. 한국 교회에는 성령님에 대해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성령님을 빼고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가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어, 성령님은?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지요. 지금이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면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역할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었으면 했습니다.

노: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성령님의 위치는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진술이 구체적으로 안되었는지 모르겠지만요. 성령님은 피조세계의 부활이라는 약속을 현재화하는 새 창조의 영이시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육체적으로 부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재하시면서도 임재하시는 그 미묘한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으로서 성령님이 계신 것이잖아요. 톰 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예수님이 교회와 지나치게 일치되면 교회는 예수님을 볼모로 잡고 승리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가 있지만, 예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지금 이 물질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죠.
 
양: 예. 그런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독자들이 오해하기 쉽죠.

김: 그래서 저도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 드는 것이, 이 정도 이해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이것은 알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건너뛰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예요. 앞부분에서 부활을 증명하고, 그 사건의 의미와 충격을 서술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이게 전제가 되었다면 그 다음은 실천으로 넘어 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더 친절한 징검다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100페이지나 200페이지 정도 늘렸더라면 하는 소망이 조금...

노: 이 책의 원제목이 Surprised by Hope니까, 주로 Hope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Hope의 핵심 내용은 부활이고, 부활만 일어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 있는 새로운 창조인 것 같습니다.

양: 사실 이건 엄청나게 충격적인 내용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Hope가 죽음을 이긴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떨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죠. 그 소망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이 세상을 장악한 악을 이기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에요.
그렇다면 사실 보증이라는 말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텔레비전을 살 때 돈을 일시불로 다 내지 않고 계약금만 주면 가져올 수 있잖아요. 그리고 집에 두고 계속 돈을 조금씩 내서 완전히 갚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부활도 우리에게 오는 거죠. 예수님의 부활이 첫 보증금을 내신 것과 같은 사건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상당히 뚜렷한 비전이 있고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 저는 부활이 개인의 부활을 담보한다는 차원보다는 온 세상이 부활을 위해서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지금 온 세상이 궁극적인 재탄생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 이게 역사의 의미다. 이런 말이 좀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복음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상당 부분이 소멸하거나 파괴되거나 망가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로 가니까 뭐 크게 소망스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회복의 비전, 고통과 고난 자체가 온전히 극복되는 그런 비전을 품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중에, 과거에 일어났던 슬픈 일과 고통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로 마지막만 좋으면 뭐하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부활과 재창조의 복음은 일부분만 좋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변혁되는 그 운동을 하나님이 지금 계획하시고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온 우주의 변화라는 점이 굉장히 새로운 기대를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종학씨의 [블랙홀 교향곡]을 읽었는데, 그 책을 보니 우주가 너무 넓은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우주라는 공간에 비하면 지구는 이게 뭐 진짜 너무 말도 안 될 정도로 좁은 공간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우주가 이렇게 넓은데, 만일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셨다면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공간의 낭비다. 그러므로 우주를 하나님이 만드셨을 리가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의 승천 이야기에 대한 해설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하나님의 통제실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그 곳에 들어가면 우주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런 위치가 된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상상도 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중에 저 넓은 우주를 다 사용할 계획을 준비해 두셨는지도 모르겠다.

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방금 제가 찾던 유비가 하나 떠올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웠던 것이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들과 경험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려고 했는데, 이제 부활이라는 곳에 지레의 받침대를 놓고 거꾸로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이 굉장히 신선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수많은 세계관적인 논의들을 청소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비유가 없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방금 떠오른 것이 뭐냐 하면 영화 [트루먼 쇼]입니다. 그 영화에서 트루먼이 완벽하게 지어진 스튜디오 세계 안에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장면에서 스튜디오 등이 하나 떨어집니다. 등이 떨어지는 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사건인데, 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세계 전체의 구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은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문은 사실 전체 공간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구명에 불과하지만 그 구멍의 존재 자체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우주론을 다 무너뜨리는 한 구멍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허구성을 한 점이 폭로할 수 있는 거죠.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싶었지만 뭔가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으면 이 한 점의 파워를 더 생생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양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사고에 길들여져 있어서 한 사람 보다는 수많은 사람의 증거를 찾는 것이죠. 단 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논하는 논리적 점프에 대한 부담감이 항상 있었는데 지금 얘기하다 보니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 천장에 구멍이 하나 뚫린 겁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또 다른 빛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죠.

노: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기독교 세계관에 관해 다시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이 현대의 다른 세계관과는 달리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닥에까지 내려가면 그 존재론적 기초의 기둥이 되는 사건이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단순한 선언적 명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며 그 사건 때문에 우주관 자체가 전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을 복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속죄 쪽에 너무 집중하다가 보니 부활이 복음에서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속죄마저 개인 구원의 문제와 죽어서 천국 가자는 식의 메시지로만 해석이 되어 버리니까 복음의 어떤 전복하는 힘이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양: 그런데 이 책이 제시하는 복음의 전복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복음 운동이 과연 그런 모습이었는가 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공동체가 탄생한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로마 제국 체제 전체를 정복하고 뒤집는 어마어마한 운동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우리가 보통 선교라고 부르는 정도, 즉,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레오바고 같은 데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옮겨가고, 교회세우고, 또 옮겨가고, 이렇게 된 거잖아요? 물론 얼마 후에는 환난과 핍박이 있고, 그 환난 속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 메시지가 포함된 요한계시록이 나오기는 하는데, 정치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복음 전파로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는 성격이 달라진다는 느낌이 사실 있는 것 같습니다.

노: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가 복음전파하는 모습하고 이 책에 나타난 복음의 전복성에 대한 해석이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말이군요.

김: 이 책에서 파루시아(왕의 현존)라는 말을 설명할 때 그 부분을 좀 언급하는 것 같아요. 바울은 누가 정말로 세계를 다스리는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복음과 상황] 인터뷰에서 김세윤 박사는 바울이 현실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두 가지 생각, 즉, 로마가 궁극적인 통치자는 아니지만, 또한 로마제국이 이룬 평화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주권자가 예수님이라고 선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굳이 그걸 가지고 로마제국과 대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다. 구원자. 이런 의미 자체가 상당한 정치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었음에도 그 극단으로는 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노: 그렇게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요구가 정치적 액션이 아니라, 뭐랄까 십자가의 길과 그 후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이런 것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어떤 정치적인 액션이 아니었고, 그냥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갔는데 정치적인 세력과 충돌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들이 받은 사명이 예수가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 정치적 핍박이 오면 받는 거고, 핍박이 없으면 즐겁게 또 계속 선포하는 것이었죠. 또 통치자들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잠정적인 권세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관하실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이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 초대교회의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사실은 로마 제국이 그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가 나온 거지 핍박이 없었다면 로마 제국을 그렇게 사단의 졸개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쓴 로핑크는 당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대조 사회라고 말을 하잖아요. 제자 공동체가 그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사회였고, 그래서 세속 체제와 너무나 대조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로마가 영향을 받아서 바뀌었다는 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글로벌 이슈를 갖고 적극적으로 액션을 취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끌어오는 노력 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이루고 그로부터 어마어마한 공동체적 변혁력이 생겨나는 그런 그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은 문제가 되는 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너무 욕을 많이 먹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의 변화보다 먼저 교회가 대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이런 부분이 이 책에는 생략된 느낌이 듭니다.

김: 무시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데 생략된 것 같습니다.

노: 저는 이 책이 제시하는 부활과 새 창조라는 비전을 중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새롭게 재구성 한다면, 그리고 철저히 그 패러다임에 맞춰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수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로마 제국 내에서 미미한 존재였고, 그들의 공동체는 변두리의 소수자 공동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복음전파는 전략적으로 보아도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오늘 한국 교회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적인 성찰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인 집권자들과 힘있는 교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 이 책에서도 잠깐 다루지만,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가진 내러티브 자체가 모던적이어서 발전과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현실을 해석합니다. 한쪽은 경제 성장을 통해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이고, 한쪽은 민주화 내지는 계급 투쟁을 통해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양쪽 모두 모더니티의 진보의 환상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내러티브는 그 틀 자체의 한계로 인해 약자의 문제라든지 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었습니다. 현 정권이나 한국교회의 일부 흐름도 힘으로 뭔가 밀어붙이고 제압을 하여 평화도 만들고 발전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던적인 스토리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이 내러티브 자체를 좀 새로운 것으로 대치하고 현실 정치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함이 필요한데, 이것은 한국에도 없고 미국에도 없고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더니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성경적인 내러티브를 써내야 할 과제가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약자 중심의 내러티브라든지, 출애굽 스토리와 같은 그런 종류의 내러티브로 한국 역사를 읽는 다든지, 뭔가 좀 다른 이야기로 우리의 삶을 읽고 그에 비추어 정치적 과제를 설정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양: 사실 부활의 능력은 십자가를 전제로 했을 때 오는 거잖아요. 십자가는 우리가 제일 약하고 무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건데, 사실 우리가 힘이 있을 때는 십자가가 사라지게 되죠. 저는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대안들이 교회가 어느 정도 사람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은 우리가 십자가의 무력함을 통해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됩니다.

노: 결국 이 부활이 소망이 되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며 경험되는 것인데, 부활 만을 강조하다 보면 아까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이 또 무시될 수 있겠네요.

김: 이 책은 여러 강연들을 엮으면서 정리를 했기 때문에 연결 부분이 느슨한 것 같습니다. 큰 덩어리는 두 가지인데, 부활에 대한 상세한 논의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현실적인 과제들 이 두 개의 큰 기둥이 있고 그 사이는 약간 느슨하게 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 한 권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 책은 복음주의적 사회참여를 위한 든든한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는 결정판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명목상으로만 가지고 있는 사회 변혁 운동들은 뭔가 신학적 기초가 부족했고, 반대로 보수적인 진영에서는 왜 세상을 개혁해야 되는지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는데,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최근의 복음주의자들의 논의들이 사회참여와 복음 사이의 튼튼한 다리를 놓는 좋은 기여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면서 내가 가졌던 당혹감은 내가 교회에서 만나는 청년보다 이 사람들이 더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 낫고, 의지도 강하고.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을 전도해서 우리 교회로 데리고 가면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오히려 교회의 청년들을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들에게서는 정말 이 사회의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느껴지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신앙 공동체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의 이기적인 자아와 죄성에서 벗어나서 정말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헌신하는 존재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꽁꽁 묶어놓고 있고,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 중요한 일들이 진행되니, 과연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손이 따로 하나씩 두 개가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어요.
요즘 나름대로 정리하는 생각은 끝이 다르더라는 거에요, 끝이. 인간적인 개혁이라는 것은 그 어떤 수많은 지뢰밭들이 있는 것 같아요. 죄성의 유혹과 성취의 결과물을 자기들이 취하려는 욕심들 때문에 개혁의 주체가 어느 순간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런 일들이 내 주변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종종 보이더군요. 부활과 신앙의 세계를 전제로 가지지 않은 인간적인 개혁이 갖는 수많은 덫들이 그때는 안 보였는데 지금은 조금씩 보이면서 정말 이 세상 개혁을 위한 토대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노: 이 책에서 톰 라이트가 약간 미묘한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는 경구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을 말할 때,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 이라는 표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라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고, 하나님 나라를 정말 건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우리는 그 일을 기대하면서 지금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소명 받아 실행하는 것이고. 이런 긴장을 놓치면, 아까 말씀 하셨듯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또 성취감을 맛보려고 하고 뭐 이렇게 되는데, 그것은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천박한 수준에서 이해한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결국 하나님 주권에 의해서 오는 나라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큰 비전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것을 준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고요.
초대교회가 로마사회에서 노예제도를 왜 대대적으로 뒤집어 엎지 않았을까. 그런 면을 보면 초대교회는 알았던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직접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오는 나라인데, 그걸 기다리는 중에 우리는 그 첫 열매를 누리면서 축하하고 있는 공동체다. 그런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기뻐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거다 곧 이루어질 거다’라는 기대와 전망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그래서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예상보다 지연이 되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것 자체가 크게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첫 열매고 하나님 나라를 조금 미리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하나님이 정하실 것이다’라는 패러다임 자체가 크게 바뀐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게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양: 근데 조금 아쉬운 것은, 지옥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으면 좋았겠는데…

김: 저도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양: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 대해서 천국 못지 않은 관심이 있잖아요. 단테의 신곡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옥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나오거든요. 이 책이 지옥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 정도의 말로 마치니까 아쉽더라구요. 물론 신약성경이 지옥에 대해 더 자세히 제시하지 않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요.
오늘날 교회에서는 지옥을 설교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시대적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그럼에도 은근히 다 전제하고 있는 것이 지옥이거든요.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이 연옥, 낙원, 지옥인데, 연옥과 낙원까지는 좋은 설명을 하는데, 지옥은 전통적인 지옥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넘어가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입니다.

김: 그것도 아마 일종의 컨텍스트와 관련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 이야기 조차 안 한다, 그런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대다수 영국 성공회 교회들이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자기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겠다. 다만 이거보다 더 말하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는 어렵다. 아무도 모르는 영역이다. 그 정도에서 멎은 것 같아요.

양: 가끔 지옥에 다녀 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묘사하는 지옥에 대해 들어보면 지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곳인데, (웃음) 좀 아쉽네요.

노: 성경 본문만으로 본다면 지옥에 대해 이 정도로 가르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상상력이 덧입혀지고 그것이 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와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양: 하지만, 단테의 신곡에 그려진 지옥의 많은 장면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을 기초로 쓴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계시록에 묘사된 지옥에 대한 기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시록을 1세기의 이야기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가 종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많은 부분이 계시록 때문이거든요.

김: 복음서 안에서도 양과 염소의 심판 장면이라든지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간다든지[마25:46],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막9:48]는 묘사가 나옵니다.

양: 사실 지옥에 대한 이런 묘사가 주는 종말론적 긴장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노: 성경에는 죽은 악인의 영혼들이 머무는 음부와는 다른 최종 심판으로서의 형벌 받는 불 못이 분명히 나오지만, 이 불 못이 영원토록 지속하는가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는 겁니다. 불 못이 오랜 시간 후에 불이 꺼져버리느냐, 아니면 문자 그대로 영원히 계속 타느냐 이게 논쟁이 되었었죠.

양: 사실은 계시록과 복음서에서 지옥이 심판의 이미지로 종종 나타나니까, 지옥을 너무 무덤덤하게 축소해서 기술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노: 그러니까 현재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죄에 대해서 분명히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는 메시지 자체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김: 톰 라이트는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루살렘성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도시 밖으로 흘러가서 만국을 소성시키는 장면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나가고 그 강변에 치료하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비전으로 마무리 된다는 거죠. 그 부분은 만유회복의 이미지인데, 우리는 이 부분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는, 우리는 구원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지옥에서 불타고 고통 받고 있다. 그럼 그게 무슨 구원이겠는가, 그건 양쪽 모두 영원한 저주로 느껴진다는 거죠. 이게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는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 위해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연옥과 같은 개념도 없고.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식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수가 어떻게 해서든 거기까지 흘러갈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전혀 연민의 정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저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완전히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므로 우리에게 고통과 연민의 감정이 없을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로 정리하면 어느 정도 설명은 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찜찜하죠.

노: 이제 좀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우리 교회와 독자들이 특별히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김: 지금까지 우리는 속죄론 중심의 복음을 전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부분부터 전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부활 중심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특히 남성들의 경우 교회에 나오는 중요한 계기가 죽음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죽고, 죽음을 가까이서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죠.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인식하면 그 안에 죄가 포함되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가 죽음 이후의 삶,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에 대해 안내를 해 준다면 자연스럽게 전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노인들을 전도하는 부분에서도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양: 요즘 웰-다잉이나 존엄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는데, 교회가 어차피 우리는 죽어야 될 존재인데 어떻게 죽어야 되고 죽음 이후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를 성경적으로 잘 제시하여 소개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정황에 적절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 이 책의 흐름도 죽음의 문제로 시작해서 부활을 말하고 더 큰 새 창조의 비전까지 확 나가고 있는데,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듯이 죽음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르는 세계이며 혼란이 많고 때로는 굉장히 공포스럽기도 한 존재입니다. 제 주변에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본 경험을 말하는 분들이 있고 저도 심리적으로 정말 공황장애와 같은 경험,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믿을만한 설명이 있고, 그 공포스러움에 대해서 복음이 뚜렷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그 메시지 자체가 안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교회에서 잘 가르쳐지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복음이 소개될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 재창조의 첫 열매를 누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런 식으로 복음이 좀더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죽음을 단순히 하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하고, 죽음으로서 모든 고통이 끝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자살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죠. 내가 이 고통을 죽을 때까지 당해야 한다면 지금 죽음으로써 여기서 해방이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라고 말할 수 있죠.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면 내가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왜 정죄하는가 물을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보다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 것인가를 확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오래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 분의 장례식에 참여해 보면, 죽음으로 이제 드디어 고통이 끝이 났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벗어나 예수님의 품에서 쉴 수 있구나 하는 기대가 생기는 거죠.

노: 그런 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듯이 우리는 죽으면 주님 품에서 쉬는 것이죠. 그 약속은 정말로 좋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좋은 약속, 부활의 약속이 그 뒤에 또 있는 것이고요.

김: 오늘날의 많은 삶의 모습들이 정말 지치고 힘들고 하니까 죽음을 오히려 환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방향의 유혹을 받는 세대에서 삶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려면, 그 복되고 기쁜 삶에 대한 가시적 증거가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교회 공동체가 그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삶,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음과 삶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 이게 강력하지 않으면 이 육신에서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이거를 영원히 잊는 쉼을 선택하고 싶어지겠죠.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고 기뻐야 이 삶을 영원토록 이어가고 싶은 소망이 생기는데, 이 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노: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 죽은 후배의 삶에 대해서 묵상하며 이건 부활이 없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라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친구의 인생의 모든 절정이 다 경험된 것이라면, 그것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아, 우리 인생의 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비로소 피는 것이구나’라는 소망을 주죠. 또, 노인이 평생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그러면 그분의 인생이 정말 만족스러운 인생일까. 하나님은 그가 경험한 인생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 꽃이 활짝 피는 상태를 아직 남겨두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부활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게 하는, 그래서 현세의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없는 소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 이 책에는 어떻게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와 있고, 왜 우리 삶에 이런 불완전함과 고난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분의 다른 책이 있죠?

노: 그 책은 제가 번역한 책인데,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책입니다.

양: 저는 이 책이 교회에게 큰 과제를 남겨주는 책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해야 되느냐 하는 과제죠. 상당한 창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교회는 힘이 많다는 것, 그리고 양극화 현상으로 힘이 없는 교회도 많다는 것,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교회가 연대하여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제입니다. 교회 안에 아직은 불일치와 싸움과 신학적인 입장 차이들이 다양한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조화하여 각자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이 사회를 하나님의 정의와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하느냐 하는 어마어마한 과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노: 저는 그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데, 우리가 그걸 못 발견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데 주파수를 맞추고 있거나, 하나님의 재창조역사와는 다른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창조해 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눈 먼 자들을 눈 뜨게 하시는 메시아적 사역을 행하시는 그 현장 속에 교회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된 곳에 딱 진을 치고 '평안하다'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희망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중산층만의 종교 집단이 되어가는 위험스런 신호가 보이는 것 같아서요. 정말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그 곳에 교회가 함께 있어야 되고 또 교회가 성령님의 그런 운행하심을 가시화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제가 이 책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은 상당히 명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신약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혼란과 분열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가장 존중한다고 내세우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에 별로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좀더 분명하게 형성이 된다면, 세부적인 차이들에 대해서 좀더 관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입장 차이를 관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해석함에 있어서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든지 하는 판단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성경의 권위를 동일하게 인정하고 텍스트를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이면서 부분적으로 다른 해석을 취한다면 상호간의 소통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면에서 서로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그런 내용을 성경에서 읽어냈느냐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성을 포용하는 데 주저함이 있는 것이죠.

양: 그런 면에서 우리가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아요. 열린 대화 말입니다. 서구에서는 타 종교와의 대화까지도 진행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의 대화도 잘 못하고 있죠.

김: 복음주의든 에큐메니컬이든 서로에 대해 너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 라는 판단이 너무 강해요. 이것이 그저 실천 방식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갈등이 이 책이 제시하는 정도만이라도 성경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읽는다면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제일 큰 소득은 그것입니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구나. 저는 지금까지 성경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할까에 혼란스럽게 고민해 왔었는데, 성경이 상당히 일관성 있는 그림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 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 저로서는 제일 큰 소득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 우리가 핵심적인 어떤 진리, 부활이라든지 십자가라든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이라든지 이런 핵심적 진리를 함께 충분히 많이 공유하고, 지옥 문제라든지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아서 논쟁의 결말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열린 마음으로 겸손함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 좀더 깊이 연구하고 좀더 많은 대화를 해서 공통된 비전을 형성한다면,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겠습니다.

양: 우리의 대전제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소망하며 하나가 되어 함께 일하자는 거니까, 그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될 것입니다.

노: 이렇게 마무리를 하면 좋겠습니다.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본 출처: IVP BOOKNEWS 7-8월호
   http://www.ivp.co.kr/booknews/index.php?bno=87&cid=225#Read_start
2009/06/26 20:47 2009/06/2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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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정보들/유용한 자료
내가 즐겨 찾는 RSS 목록 중 알라딘 베스트셀러 페이지가 있다.
그 중에도 '좋은 부모' 분야 베스트가 매주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http://www.aladdin.co.kr/rss/bestseller/2030


아래는 DVD 베스트 셀러ㅋㅋ
http://www.aladdin.co.kr/rss/bestseller/dvd

RSS를 끌어오기 나름이므로 가서 목록을 잘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예를들면, '유시민'이나 '재즈'같은 검색어로도 RSS 구성이 가능하다)


추신)
알라딘 홍보글 맞음. 그러나 받는 건 없음.^^
2009/06/05 20:45 2009/06/0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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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기고글 모음/기독교세계관 소고

[복음과상황]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고②: 변화와 반론(1)

 

 

기독교 세계관‘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기독교 세계관의 저자들과 담론 생산자들 중 다수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수정·반성·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2003년에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 포럼’을 통해 교계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복음주의권의 젊은 필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고 글과 논쟁 글들, 그리고 주요 기독교 세계관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더욱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 논의에는 크게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적인 토대에서 생성, 발전된 담론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든 현대에 와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고스란히 가진다는 점이며, 또 다른 전제는 그간 알려진 기독교 세계관이 기독교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잣대가 아니라 여러 잣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간에 통용되어온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쓰인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므로 구체적으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라 불러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전자의 문제, 포스트모던적 상황화(context)를 중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

기독교 세계관은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의 공격에 방어 내지는 대항하기 위한 신학적 결과물이라는 소극적인 면뿐 아니라 모더니즘적인 전제와 방법들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는 비판적 시각도 포함된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모더니즘적인 전제들은 허물어졌고 모더니즘적인 요소들은 모두가 수정 내지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후 논의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언급이 필요할 듯하다. 모더니즘의 세 축은 과학과 경험, 그리고 합리성으로 대변되는데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전제들은 학문에 있어 객관적인 잣대, 절대 진리의 추구, 역사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들의 근저에는 서구인들의 서구중심주의적인 자신감이 그 사상적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진보, 계몽,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잃게 되었고, 학문적 영역에서 사이비(pseudo) 학문처럼 보이는 형이상학, 신학과 같은 것들을 학문의 구획(demarcation)에서 제거하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과학과 같이 객관적 진리 영역으로 치부되던 학문과 사상들도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진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주체’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모든 것은 사실, 진리의 영역이 아닌 ‘해석’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또한 서구중심적이었던 서양인들은 자문화 우월주의적인 생각으로 제3세계에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교화를 일삼았음을 반성하고 다원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교계에서 때때로 사단의 사상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이러한 모더니즘적 한계에 대한 비판과 성찰, 완성 혹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기독교적 요소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적인 ‘서구 종교’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또한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풍토 역시 단순히 초월적인 기독교의 신 존재를 반대한다는 관점을 넘어 그간에 이루어진 이성중심주의의 타파, 거대담론의 해체, 자율적이며 절대적 판단자로서의 이성의 한계 인식, '주체'의 죽음과 같은 모더니즘적 배경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 진리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주의, 다원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모더니즘과 계몽주의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타당한 면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섭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연유로 모더니즘적인-이성적, 합리적인 방식으로―변증을 시도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비판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잣대로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은 어떨까. 간단히 말해, 포스트모던적 상황(context)은 비판적으로 수용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포스트모던적 전제로 기독교 세계관을 면밀히 따져보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틀로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자체를 폐기 처분하려는 시도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명제성과 메타내러티브, 구조-방향 모델에 대한 비판들이 있어왔으므로 세 가지 비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명제 vs. 내러티브
첫째는, 명제적(propositional)으로 제시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많은 내용을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명제를 통해 핵심 교리를 함축적으로 제시했다.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적 구도에 대해서는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성경의 긴 흐름을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명제들로 함축하여 제시하려는 노력은 모더니즘의 특징적 요소로, 그간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창조-타락-구속이 가지는 명제성이 성경의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를 손상시킨다는 지적을 해왔다. 알버트 월터스도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에서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그것은 세계관을 명료하게 정립하기 위해 그 이야기에 깔린 기본 가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임을 인정했다. 또한 세계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그 효용성에 대해 선을 그었다.

 

“세계관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데 비해, 세계관은 교회가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도우려고 복음의 구조적 특징을 설명하는 인간적 시도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손으로 하는 작업인 만큼 잘못될 수도 있고 역사적 제약성도 갖고 있다. 사실 복음을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그러하다.”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왈쉬와 미들톤도 자신들의 책에서 “내러티브는 세계관의 본질, 특별히 성서와 성서적 세계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N. T. 라이트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이트는 많은 기독인들이 성서를 데일리 라이트 신문(Daily Light edition)처럼 정돈해서 본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성서는 뒤죽박죽이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초월한 진리나 모델 또는 도전을 푹 삶아 우려내서 천상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한다. 시간을 초월한 이 진리들을 성서라는 그릇에서 우리 국그릇으로 옮겨 담고 현대적 정황의 구미에 맞게 그것들을 다시 용해시키기 위해서다.” (왈쉬, 미들톤,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결국 기독교 세계관이 가진 명제성은 포스트모던적인 틀로 보면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초월적 진리와 개념의 명제를 추출해내려는 시도로 읽히며 그렇게 추출된 명제들은 성경 속 각각의 내러티브 즉, 아담과 아브라함, 야곱, 여호수아와 베드로 등의 개별 이야기를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김기현에 대한 반론 글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표명한 바 있다.

 

“내러티브는 성경이 어떤 지침이나 규율, 혹은 신조와 같은 명제로 추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가진 긴 서사(敍事)라는 말이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과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공통분모를 뽑아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혹은 온전한 기독교인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 류의 고민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이 신학과 세계관에 녹아나는 일은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제적 성격의 기세를 평가 절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이는 마치 예수님의 행적이 중요한가, 그가 가르친 주기도문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와 같다. 물론, 둘 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둘은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 관계를 따지자면 주기도문은 명제적 성격이 강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서사적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내러티브의 살이 붙어야 그 명제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한 강화된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세의 일관성과 명제성을 배제하고 내러티브를 살린다면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관통할 수 있겠는가?” (<복음과상황> 200호 김용주,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견”)

 

왈쉬와 미들톤은 이러한 내러티브의 긍정적 영향을 간파하여, 기존에 도예베르트가 제안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유지하되 그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개별적 내러티브들을 살려내는 방식의 새로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내용들은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이스라엘, 예수,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서사적 드라마 안에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내러티브의 정황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서는 그 안에서 해석된다.”(왈쉬, 같은 책)

 

물론,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이나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에서는 기존에 제시된 명제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그 원리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예화들을 제시하는 데 그치기도 했다. (나는 신국원의 책이 세계관 입문서로 탁월하다고 생각하며, 최근 비판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송인규의 책 역시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단지 내러티브를 살렸냐 아니냐에 국한된 지적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성 자체에 대한 지나친 부정보다는, 왈쉬의 책에서와 같이 이후에도 명제와 내러티브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유효적절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내러티브 vs. 메타 내러티브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기독교 세계관의 주된 비판은 메타내러티브, 즉 ‘거대담론’의 문제로도 환원된다.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란 단순히 어떤 특정 종족의 이야기, 어떤 지역에서 있었던 한시적인 이야기가 아닌 태초에서 종말로 진행하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겠고 역사관 내지는 세계관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도 메타내러티브다.) 어찌 됐건, 포스트모던 사회의 도래 이후에 우리가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은 바로 이 ‘거대담론의 죽음’이다. J. F.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면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했다. 왈쉬는 메타내러티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자율적 진보에 대한 근대적 신화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독교 이야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 이러한 메타내러티브는 보편성이라는 허황된 주장 아래 자신의 구성적 특성에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통일성, 동질성 등에 특권을 주면서 차이, 이질성, 타자성, 개방성 등을 은폐한다. … 메타내러티브는 지배 내러티브다. 도덕적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체계에 근거하든 메타내러티브에 근거하든 간에 결국 도덕적 보편성은 권력과 권위가 있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정당화해준다. … 특권적인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 그 대신 지역적이고 다원적이며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고무되어야 한다.” (왈쉬, 같은 책)

 

포스트모던적 잣대에 따른다면 창조―타락―구속의 내러티브는 명제성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지배 내러티브이자 거대담론으로 현대에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며, 최소한 이스라엘 민족의 개별 내러티브로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왈쉬는 포스트모던적 전제에도 비판의 여지가 있음을 논증했다.

 

“이러한 부족 전쟁은 최근에 자행된 르완다에서의 대학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하마스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테러 기구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끔찍한 유혈사태는 모두 국지적 내러티브에 의해 촉발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 보편성에 대한 명백한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적 내러티브는 적으로 규정한 공동체나 집단에 대한 전면전을 정당화하고 있다. …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메타내러티브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증을 하기 위해 메타내러티브에 은밀히 호소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일관성 있는 메타내러티브가 없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최근 30년 동안 북미, 유럽, 기타 제3세계 국가의 도시에서는 폭력범죄가 증가했다. 폭력범죄의 증가 추세는 그 동안 인간의 삶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해주었던 근대적 메타내러티브와 정체성을 제공하는 대안적 전통이 효력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왈쉬, 같은 책)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는 다르게 세상이 메타내러티브에 의해서만 폭력과 억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 내러티브에 의해서도 더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폭력과 억압은 메타내러티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메타내러티브가 불필요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또 다른 메타내러티브에 호소하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으며 메타내러티브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에 오히려 혼란과 도덕적 표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결국 왈쉬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상정한, 문제의 근원이 메타내러티브이며 그 해결이 메타내러티브의 죽음이란 논지는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구조―방향 모델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따르면 ‘구조―방향 모델’도 현실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명제일 따름이다. (물론 구조―방향 모델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잣대로만 비판 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전반적인 비판을 언급하였다.) 구조―방향 모델은 첫 연재 글에 소개된 바 있으므로 지면상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이원석 편집위원은 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수한 구조에 대한 개혁주의 세계관 진영의 믿음이 개혁주의 세계관의 현실 감각 부재를 보여주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에서 해법은 간단하다. 구조가 선하므로(어떠한 악도 개입될 수 없으니까) 방향만 바꾸면 된다. 이 해법 속에는 구조와 방향이 현실 속에서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냐는 논의가 배제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구조이고, 어디부터 방향인지가 그렇게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간 개혁주의 세계관 논의가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고성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복음과상황> 204호 이원석, “‘순수한 구조’는 현실 속에 없다”)

 

또한 김기현은 구조―방향 모델이 불이나 성(性)처럼 유용과 오용을 동시에 설명해 주고 세상을 변혁하는 데에 유익한 방법론적 틀을 제공하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인정하면서도, 구조가 악하거나 이중적일 수 있음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구조가 선하다고 못 박는 것은 결국 구조결정론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구조와 방향’보다는 오히려 ‘정사와 권세’ 모델(?)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제도 혹은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는 ‘정사와 권세’이다. … 그러기에 톰 라이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세계관적 질문에 대해 예수의 진정한 원수는 이스라엘 내부도, 이스라엘 밖의 로마도 아닌 사탄이라고 대답한다. … 라이트의 질문, “지금은 어느 때인가?”에 대한 대답을 정사와 권세와의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구조와 방향의 구도보다는 ‘정사와 권세’가 훨씬 더 성경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틀이 된다.” (김기현, 같은 글)

 

재미있는 사실은 월터스도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 후기에 N.T. 라이트의 질문, ‘지금이 어느 때인가’에 대한 논의를 비교적 길게 기술하였다는 사실이다.

 

“라이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이 어느 때인가’이다. … 지금이 어느 때인가? 바로 증언과 선교의 시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두 시대가 중첩된’ 시기,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속한 시기의 의미는 그것이 사도적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도록 주어진 기간이라는 데 있다. … 이 구속의 시대는 많은 사상자를 속출하는 치열한 전투의 시기다.” (월터스, 같은 책)

 

월터스는 이러한 질문에 답함에 있어 다른 모델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다시 구조―방향 모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실한 교회라면 우리 문화와 적대적 관계밖에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선교사들은 이 딜레마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은 두 가지 요인에서 나온다. 첫째, 교회는 문화적 이야기를 구현하고 있는 사회의 일부다. 둘째, 기독교 공동체는 그와 다른 이야기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데 이 이야기도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범위가 포괄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두 개의 공동체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긴장을 해소하려면 우선 구조와 방향의 구별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사명은 선한 창조를 반영하는 통찰과 구조를 분별하여 포용하는 동시에, 우상 숭배로 인해 왜곡된 모습을 배격하고 뒤엎는 것이다.” (월터스, 같은 책)

 

같은 책에서 월터스는 구조 자체를 ‘선하다’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계승하는 요소’를 구조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타락의 영향 아래 있는 요소’를 방향으로 규정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해 구조와 방향을 구별 짓고 나아가 악한 방향으로부터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즉 세상의 변혁을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설명이 (김기현의 지적대로) 구조가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과 (이원석의 지적대로) 현실적으로 구조―방향의 구별이 어려우며 상대적일 수 있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가’라는 라이트의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월터스의 주장대로 구조―방향 모델이 굳이 못 빠져나갈 이유도 없다. 또한,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의 구분 자체가 어렵다는 문제 제기에 답변이라도 하듯, 지면의 상당 부분을 영적 은사, 성(性), 춤, 오이코스(oikos, 로마제국의 기초 사회단위)에 이르기까지 예로 설명하고 있다(같은 책 5장과 후기를 보라). 또한 김기현이 제시한 권세―정사 모델은 주로 국가나 정치 분야에는 적용하면서도 (기독교 세계관이 주로 적용하고 있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특유의 대립구조를 잘 적용시키지 않고 있다. 만일 문화와 예술 분야에 권세―정사 모델을 적용시킨다면 ‘사탄이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는 이른바 신상언 류의 극단과도 만나지 않겠는가. 전에도 밝혔듯 나는 구조―방향 모델의 효용성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물론 단순한 도식과 모호한 ‘구조’ 개념은 비판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모델이든 현실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 어떤 명제보다도 단순하게 표현되었지만 90년대를 기독대학생으로 보낸 내게 영혼구원에 국한된 ‘사영리 모델’―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을 넘어서 방향성, 즉 선악의 구분이 세상과 교회, 예배와 일상, 성경공부와 학문연구,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도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이 구조―방향 모델은 십여 년간 교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계속)

2009/06/01 23:36 2009/06/0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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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사를 이끌었던 빌 게이츠에 대해서는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가 없다. 다만, 몇몇 파편적인 기사들로만 접했던 빌 게이츠에 대한 생각들을 이 책을 통해 좀더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간 나는 오픈 소스(open source) 운동을 비롯한 카피레프트 운동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영 체제 및 웹브라우저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온 빌 게이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 시장에 처음 진입하면서 하드웨어와는 달리 소프트웨어는 개발자의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들어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드웨어에 끼워 파는 공짜(free)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카피레프트 운동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것도 이 개발자에 대한 합당한 보수 및 권리의 인정 부분임을 감안하면 빌 게이츠의 이러한 노력들은 소프트웨어 시장이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두 번째로 본서에서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넷스케이프와의 독점 소송 문제를 통해 빌 게이츠는 결국 일선에서 물러나서 제2의 인생을 재단을 통한 자선사업가로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빌 게이츠에게 좋은 평가를 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선 사업이 아내 멜린다 게이츠의 노력에 의해서였음을 밝히고 있지만 결국 빌 게이츠는 자신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이 재단에 쏟아내고 있으며(2005년 135억 6천만달러, 2006년 156억 250만달러), 이 재단을 통해 전 세계에서 목숨을 구한 사람만 70만명에 이른다.

한 때 공격적인 회사 운영으로 독점 기업의 중심에 떠올랐던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 그의 인생 후반에서 변화가 느껴지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 시작하는 그의 이른바 '창조적 자본주의'가 그저 자본주의적 입장에서의 하나의 후원 체제를 넘어 보다 창의적인 방향으로 더 진일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 한국의 기업들도 빌 게이츠와 같은 리더들이 많이 생겨나길 기대해본다.
2009/05/17 20:44 2009/05/1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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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살림지식총서에서 스티브 잡스와 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 인물 시리즈를 출간하였다. 그 중 가장 먼저 읽은 <스티브 잡스>는 그의 삶의 여정이 그러하듯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는 애플의 CEO라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2년 전 즈음에 아이팟 나노 출시 동영상을 보면서, CEO가 직접 자사의 신제품 발표를 한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물론 빌 게이츠도 자신이 발표를 하지만 느낌이 너무 달랐다) 사실 흥미 정도가 아니라 흠뻑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적절한 언어와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활용하는 모습은, 프리젠테이션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탁월했다. 이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저 유명한 스탠포드 졸업식 축사 또한 단 7분 동안이었지만 최고의 연설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압축적이면서도 메시지가 강렬했다.

본서는 나 기타 잡스에 대한 다소 두꺼운 책들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인생 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쓴 최고의 평전(?)이라 불릴만 하다. 특히 2009년 건강 악화 문제나 작년에 개봉한 픽사의 <월-E>의 성공까지도 다루고 있으니 스티브 잡스에 대한 가장 업데이트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에서처럼 스티브 잡스의 영웅적 면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갈등이 있었던 동료들에게 행한 권모술수와 냉혹한 비난들도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어서 비교적 스티브 잡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듯 하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로부터 시작해서 메킨토시와 픽사 애니메이션, 그리고 아이팟과 아이튠으로 대변되는 MP3 음반 시장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기술과 대중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흥미진진한 삶의 여정으로 인해 이 책은 잡자마자 단 숨에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09/05/15 20:43 2009/05/15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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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사를 했다.
4개월된 아이를 데리고 이사하는 건... 정말 죽음이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어머니가 올라오셨고 포장 이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월차를 낸 금요일과 주말 내내 죽도록 일하고 월요일에 출근했다.ㅜㅜ
아.. 전세이사... 힘들고나.
그래도 자주 이사를 하니 묵은 짐들 정리는 잘 되는 것 같다.
2년만 지나도 집안 곳곳에는 쓰지 않으나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로
가득차기 마련인데 자주 이사를 하다보니 그런 짐들은 미련 없이 버리게 되었다.
때때로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엔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많은 물질들에 대해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방치'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그렇게 그렇게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이건 있으면 유용하고 저건 언젠가 쓸 날이 올 것이고... 그런 이유로 점점 소유가 늘어난다.
이사를 할 때면 이 세상의 삶을 나그네에 비유한 베드로가 떠오른다.
실제로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나그네로서의 삶에 대한 긴장이 많이 떨어졌다.

2. 요즘 책소개 포스팅을 전혀 못하고 있다.
물론  읽고 싶은 책은 여전히 많아서 책은 정기적으로 사고는 있다.
문제는 최근에 기독교 세계관 연재글을 쓰면서 예전 책들을 읽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어서 산 책들은 먼지가 쌓인 채로 늘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연재가 대충 정리가 되면 그간 쌓아둔 책들을 봐야지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뭐 책 읽는 게 대수랴!
점점 풀려가고 있는 날씨에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바람도 쐬고 자전거도 타고..
그럴 여유도 좀 부려야겠다. 책은 분명 유익한 도구지만 너무 묻혀살면 샌님되기 십상이다.

3. 자전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에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마트에 다녀왔다. 아내에겐 금방 갔다올게..해놓고
거의 1시간만에 돌아왔다.ㅜㅜ 나는 체중이 상당히 늘어 있었고 운동은 하도 안 해서
패달을 조금만 열심히 밟아도 다리가 아팠다. 젠장... 어느덧 이런 지경에 이르다니.
기김진호 선생님의 포스팅을 보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정말 좋아 보였는데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 본 나는 괴롭기만 했다. 운동이 필요하다... 정말. 크흑...
2009/05/13 22:48 2009/05/1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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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1)
: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정리하며


들어가면서
작 년 말 즈음 아는 지인으로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웹진에 세계관 연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예전부터 웹진에 대한 생각을 자주 말했던 그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고 싶다고 했고 본인 자신도 지금 공부 중이라고 했다. 알게 모르게 주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관심 있어하는 기독인들이 더러 있다. 하긴 90년대에만 하더라도 진보적인 기독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는 거의 동일한 단어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는 무슨 말만 하면 기독교 세계관 운운했고, 대화 중에도 프란시스 쉐퍼가 후렴구처럼 등장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기독교 세계관은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과 함께 80-90년대의 진보적인 한국 복음주의권 내에서 신앙의 지침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와 사회문제에 괴리된 성경공부와 개인영혼구원의 시급성을 앞세운 사영리류의 전도 및 대형집회 위주의 한국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행해진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천명한 로잔언약을 통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깨우쳤다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교회 활동만이 영적이며 세상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문화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설령 그 열매가 미미할지언정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사고 전환은 신앙과 학문의 조화를 통한 지성의 제자도 추구, CCM이나 기독영화제와 같은기독교 문화 사역의 질적 성장 및 낙천, 낙선 운동으로 대변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 운동의 흔적들을 남겼다. 90년대를 캠퍼스에서 보낸 나를 포함한 청년들에게 있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성 보수적인 교회에서 품고 있던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시켜주었고 기독교적 지성의 추구를 통해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변화에 있어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개혁주 의 기독교 세계관의 의의나 비판적 성찰은 추후에 더 언급하겠지만 내가 서론에서 장황하게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그것이 한국 교회에 끼친 유익이 크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이제는 점점 청년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데, 그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 혹은 담론 자체가 이제 갓 공부를 시작하려는 입문자가 접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내용이 복잡해졌고 다양화되었으며 어려워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쉐퍼나 아더 홈즈, 알버트 월터스 등으로 시작된 기독교 세계관은 그동안 많은 반론과 그에 대한 해답, 그리고 대안적인 세계관이 제시되어왔다. 이제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서로 떠올리는 '관'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지금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어렵고도 혼돈스러운 일이며 항상 논쟁의 여지가 존재함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연재글을 쓰려는 것은 세계관 입문자들에게 비교적 쉽게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중요한 이슈들을 소개하고 앞으로 기독교 세계관 담론에 대하여 더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계관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연초부터 쓰기로 한 글은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로 여전히 나는 독서 중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오죽할까. 초반부터 엄살이 심했다. 이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들을 내가 아는 선에서 되도록 쉽게 써내려가볼까 한다.


세계관은 어렵다
사 실 내게 글을 청탁한 지인이 좀 특별한 경우이지 주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하는 신앙인들이 거의 없다. 복클(복음주의 싸이클럽)이나 기학연, 복음주의연구소 등 몇몇 교계의 학구적인 그룹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느끼기에 지역 교회 내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죽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용어를 쓰는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신앙 지침'이나 '교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신앙에 대해 지성적 측면에서 깊이 알고자 하는 소수만이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들이 결국 앞서 언급한 학구적인 그룹들의 논의들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최근에 ‘복음주의연구소’에서 아볼로 포럼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추가로 진행되었다. 송인규 목사의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 관>이라는 책에 대한 김기현 목사와 양희송 실장의 논평,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있었는데 결국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어떤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수 교단에서 자란 많은 기독인들은 이러한 신앙적 불일치를 불편해 한다. 내 주변에는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인들이 많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이런 논쟁들에 무관심하거나 조금 발을 담그다가 내부적인 불일치로 인해 불편한 마음으로 관심을 접은 채 그저 열심히 말씀 보며 기도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적군과 아군이 분명한 것을 선호하는데 기독교 세계관 논쟁에 있어서는 누가 '우리편'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다. 나는 이런 지역 교회의 평범하고 보수적인 성도들이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는 것이 기독교의 지성적 후퇴를 가져다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문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 논의 자체가 이미 너무 복잡해졌고 입문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워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잠시 예전에 썼던 글을 인용해볼까 한다.

“ 알버트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철학, 신학과 구별 짓는 키워드로 ‘일상’과 ‘상식’을 든다. 세계관이 그만큼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상식의 문제이며 일상적인 문제다. 하지만 개혁주의 기세 자체가 철학, 신학을 잘 알지 않으면 논의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을 많은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중략) 물론 세계관이 신학, 철학적 토대 없이 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관은 철학과 신학에 대해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철학적, 신학적 연구가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된다.”
(복음과상황,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론)

원 컨대 기독교 세계관이 일상과 상식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학과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 전반에 걸쳐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은 어찌 보면 기독교 내의 지성 그룹 안에서 ‘뜨거운 감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도예베르트가 정립한 것으로 주로 화란 개혁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혁주의를 말할 때는 칼뱅이나 아브라함 카이퍼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관 명제들이 모두 개혁주의적인 교단의 영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쳐도 관련 논문과 책들이 엄청나다. 그뿐인가.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 중 최초의 저작이자 가장 얇은 책인 <이성에서의 도피>에서는 헤겔, 키에르케고르, 슐라이엘 마허, 칼 바르트에 미미하나마 미쉘 푸코까지 다소 어려운 사상가들의 명제들을 비평한다. 관련된 사상가들의 원전은 고사하고 입문서들이라도 읽으려면 그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브라이언 월쉬와 리차드 미들톤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란 책에서는 현대(근대) 세계관들을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친절하게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도서 목록>이라는 15페이지 분량의 책목록을 소개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95년에는 처음 저작이 현대성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모습의 세계관 저서를 추가로 선보였다. 이 책은 2007년에 김기현 목사와 신광은 목사를 통해 다소 늦게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과 이전 저작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존 하워드 요더나 니콜라스 톰 라이트, 스탠리 하우어워스 같은 신학자들의 저작들도 언급하였다. 이런 주요 저작들 몇 권만 언급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분야는 개신교 역사와 신학, 그리고 철학, 사회학 등등 실로 그 영역이 방대하다. 그 뿐인가. 실천성을 담보한 기독교 세계관은 종종 북미의 정치적 상황과 우리 나라에서의 복음주의 역사들을 자주 언급한다.

일 이 이쯤 되고 보면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수많은 신학자들과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한 번쯤은 뛰어들려고 하는지 알 만 하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 학문과 기독교 사상을 연계해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또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만 일방적으로 제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복음주의 안팎의 여러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기존의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거나 나름의 대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의 학문적 향연이 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분야는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지속적인 담론 생산이 가능한 화두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흐름은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담론들이 점점 평신도들의 관심 내지는 일상 생활과는 괴리감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 자체의 난해함과 그것이 학문활동에 기인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캠퍼스 학생들과 직장 신우회에서 시간을 쪼개서 성경 공부하듯이 기독교 세계관과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그런 방향으로 권면을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입문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기독교 세계관 논의 자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느 정도 소통의 통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미 10년 넘게 흘러온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이미 새로운 입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논의가 넓어졌고 깊어졌다.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골목길 맛집 같다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나는 비교적 거칠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그 렇다면 세계관은 무엇인가. 알버트 월터스에 따르면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좀 어려운가. 브라이언 왈쉬의 좀더 평이한 정의를 따른다면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자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세계관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중요한 이유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이 특정한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이 그 세계관에 부응하도록 방향 지워진다는 사실 때문이다.(브라이언 월쉬, 그리스도인의 비전)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삶이 특정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수긍하더라도, 그 삶이 세계관에 의해 방향지워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들도 있다. 이러한 정의 자체가 자율적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 그 행동을 규제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적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일관되게 행동하지도 않을뿐더러 합리적이지도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제임스 사이어는 그의 책 <기독교세계관과 현대 사상>에서 세계관의 유형들을 '참된 최고의 실재', '세계의 본질', '인간', '죽음', '지식', '도덕의 기초', '역사의 의미'라는 7가지의 질문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브라이언 월쉬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좀더 간단한 4가지의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세계관의 유형을 구분 짓는다. 이러한 구분작업의 유익은 첫째, 몇 가지의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회심을 한 이후에도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변화되어온 현대 사상-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허무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 사상으로 치부해도 무방한-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관들과는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짧은 지면에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몇 가지의 특징만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적 구조
첫 째,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명제적 구조로 요약한다. 이는 헤르만 도예베르트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이후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틀이 되었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도에서 중요한 것을 몇 가지 정리하자면 첫째로 '문화 명령'이라는 개념이다. 창1:28에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흔히 청지기적 사명으로 표현한다. 월터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물러나셨지만 자신의 형상(인간)을 땅 위에 세우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땅의 발전은 인간 종족의 방식에 의하며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포함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이 발전시키는 사회와 문화의 창작물 혹은 조직들도 모두 이 청지기적 사명에 포함된다. 거칠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문화 명령'이라고 정의하는데 성경은 '문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선한 창조'라는 개념이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선포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선포는 창조의 완전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어 등장하는 타락 사건에서의 타락은 '전도된 악'이며 결코 존재 자체의 악한 면이 아니라고 한다. 부연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선악구도는 기타 종교의 신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선과 악의 존재적인 대립이 아니라는 의미다. 악은 선의 타락이고 존재의 왜곡이며 결코 지속적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의 이런 일시적인 타락 구조를 회복시키기 위해 ‘구속’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고, 구속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강조되는 사실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타락과 구속의 범위’ 혹은 영역이다. 악의 전도가 피조계의 전영역에 미쳤던 것처럼 구속 또한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피조계의 모든 영역,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문화와 사회제도와 예술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피조계 전 영역에서의 구속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인간 존재의 전영역에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은 땅은 한 치도 없다"는 이른바 영역주권론에 근거하고 있다. 리차드 니버는 자신의 고전적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대립, 일치, 종합, 역설, 변혁의 5가지 모델 중에서 변혁 모델을 다른 모델보다 우월하게 제시했는데, 그는 이 변혁 모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인간의 문화 영역(사회적 관습, 정치 기구, 언어, 경제 조직 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역사 속에서 부패한 인간의 사회 질서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써 종말론적 미래를 종말론적 현재로 수용한다고 주장한다.(김영한,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피조계의 전 영역에 대해 세상 가운데에서 지속적으로 문화 명령을 수행할 책임을 가지며 사회와 문화를 포함한 전 영역에서의 변혁을 추구하도록 부름 받는다.


구조-방향 모델, 이원론 문제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구조-방향 모델’이다. 이는 <창조, 타락, 구속>과 <그리스도인의 비전>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먼저 '구조(structure)'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자체나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지시하며 ‘본체’, ‘본성’, ‘본질’로도 표현할 수 있다. 이것도 말이 어렵고 모호하긴 하다. (실제로 월터스가 사용한 ‘구조’란 용어는 설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쿤의 패러다임만큼 용어의 모호함으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방향’은 무엇인가. '방향(direction)'은 ‘죄와 구속의 질서’이다. 여기서의 한쪽 방향은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과 변질이며 다른 방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타락을 설명할 때 구조-방향 모델은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창조계가 원래의 일방성(순종)을 잃고 이방성(순종-불순종)의 존재로 변한 것으로 묘사하는 셈이다. 이 때 구조는 가치중립적이며 방향에 의해서만 선악이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방향 모델은 기독교 세계관을 흡수한 많은 청년들에게 적용점을 시사했는데, 일례로 80-90년대에 교회 안에서 전자기타를 사용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었을 때 가치중립적인 전자 기타(구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방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특정 교단에서 전자기타나 드럼의 사용, CCM의 수용 문제는 나름 진지하고 심각했다.) 진보-보수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구조-방향 모델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구조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혁명에 동조할 수 없고, 방향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무사안일의 보수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월터스, 창조-타락-구속)

셋째는 이원론 문제이다. 월터스에 따르면 이원론이 교회에 침투한 역사를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어거스틴이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보지 못하여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 속에 거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른바 ‘구조’를 ‘방향’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선과 악 자체가 창조 자체에 내재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며, 이는 선한 창조 내에 어떤 것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송인규는 <평신도 신학>에서 ‘세상1’(구조)을 ‘세상2’(방향, 즉 세속화)처럼 여겨서 ‘세상1’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혼합주의로 치부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잘못된 이원론적 구도는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 예배와 활동, 성경과 학문,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등 세상 속의 많은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층위의 개념들을 성속 개념으로 대체하게 만들었고 이른바 이런 ‘이원론적 행습’의 탈피는 80-90년대 로잔언약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지성의 강조: 신앙과 이성의 통합
마 지막 특징은 합리적, 논리적 지성의 강조이다. 이는 프란시스 쉐퍼의 3부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절망의 선(the line of despair)’과 ‘신앙의 비약(the leap of faith)’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쉐퍼에 따르면, 고전적 철학과 사상은 헤겔에 이르러 상대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헤겔은 진리의 문제를 정립-반정립의 과정을 거쳐 종합에 이르는 이른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는데, 쉐퍼는 헤겔이 변증법적 방법론을 통해 현대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았으며 진리로서의 진리는 사라지고 상대주의적 사고와 종합(synthesis), 즉 양립가능한 다양한 ‘진리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쉐퍼는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키에르케고르가 헤겔로부터 시작된 현대성을 본격적으로 이끌었다고 보았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는 종합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대신에 우리는 ‘신앙의 비약’을 통해서 참으로 중요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고 주장했다. 쉐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의 비약이라는 개념을 선포했을 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적, 신학적 모두의 현대 실존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 만일 합리주의적 인간이 삶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목적, 의미, 사랑의 정당성과 같은)을 다루기를 원한다면 그는 합리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크고도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을 이루어야 한다. 합리주의 구조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 답변을 제공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통일된 지식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해야 했다. (프란시스 세퍼, 거기 계시는 하나님)

쉐 퍼는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종교적 실존주의는 기독교를 합리적으로는 논증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냈으며 신앙은 결국 비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쉐퍼가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문제는 바로 이 ‘절망의 선’의 와해, 즉 신앙과 이성, 신앙과 합리성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상대주의적 진리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성경적 진리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성의 강조, 신앙에 있어서 이성의 사용에 대한 강조는 비단 기독교 세계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행한 <칼빈주의 강의>에서 그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설명하는 대신에 칼빈주의와 정치, 과학, 예술, 미래의 주제를 다룬 바 있다. 카이퍼는 이 강연에서 종교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했으며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통합,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추구하는 일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수혜를 입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주요 특징이자 우선적인 과제임에 분명하다. (계속)

*이 글은 웹진<크리스찬 프레스>와 월간<복음과상황> 5월호 기고 글입니다.

2009/05/01 23:35 2009/05/0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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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현재 스타급 연예인으로 활약 중인 이들의 경험담을 종합하면,
연예인 선발 오디션 현장에선 간절한 소망과 준비가 많았던
당사자는 떨어지고 무심결에 그들을 따라나선 친구나 동생이 발탁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지요.

제 생각에 머피의 법칙같은 이 희안한 현상의 핵심은,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꾸밈보다 있는 그대로의 ‘무심함’이 더 강력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극도로 공을 들인 신부 화장이 그 사람의 가장 매력적인 모습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처럼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띠동갑 정도 되는 연하남의 구애가 심심치 않은
한 여성 화가는 그 비결을 묻는 주위의 부러운 시선에 ‘무심함’ 때문일
것이라고 자체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그 연하남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다는 거지요.

때론,
열정조차도 없는 고요한 상태에서 자신의 심리적 속살이 무심하게
드러날 때 자기매력이나 자기 에너지가 가장 파워풀해 집니다.
아무 거칠 것 없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는 봄의 산과 들이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만큼 설레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처럼요.

그렇게 본다면,
심리적 속살을 가로막는 지나친 몰입이나 욕망 혹은 집착이
문득 문득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지도요.
2009/03/30 22:47 2009/03/30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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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오늘은 간단히 해먹는 별식을 찍어봄.
어제 새벽에 올리려고 했으나 성하가 보채는 바람에...
함께 잠들었음.

첫번째는 뽕잎 김치국수. 뽕잎 국수는 파는 걸 삶았을 뿐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번째로는 과일 샐러드. 그냥 과일 잘라다가 마요네즈로 무쳤을 뿐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은 여기까지.^^

2009/03/21 23:28 2009/03/21 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