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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고②: 변화와 반론(1)
기독교 세계관‘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기독교 세계관의 저자들과 담론 생산자들 중 다수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수정·반성·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2003년에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 포럼’을 통해 교계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복음주의권의 젊은 필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고 글과 논쟁 글들, 그리고 주요 기독교 세계관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더욱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 논의에는 크게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적인 토대에서 생성, 발전된 담론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든 현대에 와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고스란히 가진다는 점이며, 또 다른 전제는 그간 알려진 기독교 세계관이 기독교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잣대가 아니라 여러 잣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간에 통용되어온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쓰인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므로 구체적으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라 불러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전자의 문제, 포스트모던적 상황화(context)를 중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
기독교 세계관은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의 공격에 방어 내지는 대항하기 위한 신학적 결과물이라는 소극적인 면뿐 아니라 모더니즘적인 전제와 방법들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는 비판적 시각도 포함된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모더니즘적인 전제들은 허물어졌고 모더니즘적인 요소들은 모두가 수정 내지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후 논의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언급이 필요할 듯하다. 모더니즘의 세 축은 과학과 경험, 그리고 합리성으로 대변되는데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전제들은 학문에 있어 객관적인 잣대, 절대 진리의 추구, 역사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들의 근저에는 서구인들의 서구중심주의적인 자신감이 그 사상적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진보, 계몽,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잃게 되었고, 학문적 영역에서 사이비(pseudo) 학문처럼 보이는 형이상학, 신학과 같은 것들을 학문의 구획(demarcation)에서 제거하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과학과 같이 객관적 진리 영역으로 치부되던 학문과 사상들도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진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주체’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모든 것은 사실, 진리의 영역이 아닌 ‘해석’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또한 서구중심적이었던 서양인들은 자문화 우월주의적인 생각으로 제3세계에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교화를 일삼았음을 반성하고 다원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교계에서 때때로 사단의 사상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이러한 모더니즘적 한계에 대한 비판과 성찰, 완성 혹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기독교적 요소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적인 ‘서구 종교’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또한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풍토 역시 단순히 초월적인 기독교의 신 존재를 반대한다는 관점을 넘어 그간에 이루어진 이성중심주의의 타파, 거대담론의 해체, 자율적이며 절대적 판단자로서의 이성의 한계 인식, '주체'의 죽음과 같은 모더니즘적 배경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 진리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주의, 다원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모더니즘과 계몽주의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타당한 면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섭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연유로 모더니즘적인-이성적, 합리적인 방식으로―변증을 시도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비판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잣대로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은 어떨까. 간단히 말해, 포스트모던적 상황(context)은 비판적으로 수용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포스트모던적 전제로 기독교 세계관을 면밀히 따져보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틀로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자체를 폐기 처분하려는 시도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명제성과 메타내러티브, 구조-방향 모델에 대한 비판들이 있어왔으므로 세 가지 비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명제 vs. 내러티브
첫째는, 명제적(propositional)으로 제시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많은 내용을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명제를 통해 핵심 교리를 함축적으로 제시했다.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적 구도에 대해서는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성경의 긴 흐름을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명제들로 함축하여 제시하려는 노력은 모더니즘의 특징적 요소로, 그간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창조-타락-구속이 가지는 명제성이 성경의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를 손상시킨다는 지적을 해왔다. 알버트 월터스도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에서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그것은 세계관을 명료하게 정립하기 위해 그 이야기에 깔린 기본 가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임을 인정했다. 또한 세계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그 효용성에 대해 선을 그었다.
“세계관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데 비해, 세계관은 교회가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도우려고 복음의 구조적 특징을 설명하는 인간적 시도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손으로 하는 작업인 만큼 잘못될 수도 있고 역사적 제약성도 갖고 있다. 사실 복음을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그러하다.”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왈쉬와 미들톤도 자신들의 책에서 “내러티브는 세계관의 본질, 특별히 성서와 성서적 세계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N. T. 라이트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이트는 많은 기독인들이 성서를 데일리 라이트 신문(Daily Light edition)처럼 정돈해서 본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성서는 뒤죽박죽이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초월한 진리나 모델 또는 도전을 푹 삶아 우려내서 천상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한다. 시간을 초월한 이 진리들을 성서라는 그릇에서 우리 국그릇으로 옮겨 담고 현대적 정황의 구미에 맞게 그것들을 다시 용해시키기 위해서다.” (왈쉬, 미들톤,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결국 기독교 세계관이 가진 명제성은 포스트모던적인 틀로 보면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초월적 진리와 개념의 명제를 추출해내려는 시도로 읽히며 그렇게 추출된 명제들은 성경 속 각각의 내러티브 즉, 아담과 아브라함, 야곱, 여호수아와 베드로 등의 개별 이야기를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김기현에 대한 반론 글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표명한 바 있다.
“내러티브는 성경이 어떤 지침이나 규율, 혹은 신조와 같은 명제로 추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가진 긴 서사(敍事)라는 말이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과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공통분모를 뽑아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혹은 온전한 기독교인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 류의 고민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이 신학과 세계관에 녹아나는 일은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제적 성격의 기세를 평가 절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이는 마치 예수님의 행적이 중요한가, 그가 가르친 주기도문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와 같다. 물론, 둘 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둘은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 관계를 따지자면 주기도문은 명제적 성격이 강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서사적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내러티브의 살이 붙어야 그 명제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한 강화된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세의 일관성과 명제성을 배제하고 내러티브를 살린다면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관통할 수 있겠는가?” (<복음과상황> 200호 김용주,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견”)
왈쉬와 미들톤은 이러한 내러티브의 긍정적 영향을 간파하여, 기존에 도예베르트가 제안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유지하되 그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개별적 내러티브들을 살려내는 방식의 새로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내용들은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이스라엘, 예수,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서사적 드라마 안에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내러티브의 정황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서는 그 안에서 해석된다.”(왈쉬, 같은 책)
물론,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이나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에서는 기존에 제시된 명제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그 원리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예화들을 제시하는 데 그치기도 했다. (나는 신국원의 책이 세계관 입문서로 탁월하다고 생각하며, 최근 비판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송인규의 책 역시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단지 내러티브를 살렸냐 아니냐에 국한된 지적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성 자체에 대한 지나친 부정보다는, 왈쉬의 책에서와 같이 이후에도 명제와 내러티브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유효적절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내러티브 vs. 메타 내러티브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기독교 세계관의 주된 비판은 메타내러티브, 즉 ‘거대담론’의 문제로도 환원된다.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란 단순히 어떤 특정 종족의 이야기, 어떤 지역에서 있었던 한시적인 이야기가 아닌 태초에서 종말로 진행하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겠고 역사관 내지는 세계관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도 메타내러티브다.) 어찌 됐건, 포스트모던 사회의 도래 이후에 우리가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은 바로 이 ‘거대담론의 죽음’이다. J. F.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면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했다. 왈쉬는 메타내러티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자율적 진보에 대한 근대적 신화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독교 이야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 이러한 메타내러티브는 보편성이라는 허황된 주장 아래 자신의 구성적 특성에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통일성, 동질성 등에 특권을 주면서 차이, 이질성, 타자성, 개방성 등을 은폐한다. … 메타내러티브는 지배 내러티브다. 도덕적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체계에 근거하든 메타내러티브에 근거하든 간에 결국 도덕적 보편성은 권력과 권위가 있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정당화해준다. … 특권적인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 그 대신 지역적이고 다원적이며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고무되어야 한다.” (왈쉬, 같은 책)
포스트모던적 잣대에 따른다면 창조―타락―구속의 내러티브는 명제성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지배 내러티브이자 거대담론으로 현대에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며, 최소한 이스라엘 민족의 개별 내러티브로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왈쉬는 포스트모던적 전제에도 비판의 여지가 있음을 논증했다.
“이러한 부족 전쟁은 최근에 자행된 르완다에서의 대학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하마스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테러 기구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끔찍한 유혈사태는 모두 국지적 내러티브에 의해 촉발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 보편성에 대한 명백한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적 내러티브는 적으로 규정한 공동체나 집단에 대한 전면전을 정당화하고 있다. …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메타내러티브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증을 하기 위해 메타내러티브에 은밀히 호소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일관성 있는 메타내러티브가 없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최근 30년 동안 북미, 유럽, 기타 제3세계 국가의 도시에서는 폭력범죄가 증가했다. 폭력범죄의 증가 추세는 그 동안 인간의 삶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해주었던 근대적 메타내러티브와 정체성을 제공하는 대안적 전통이 효력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왈쉬, 같은 책)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는 다르게 세상이 메타내러티브에 의해서만 폭력과 억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 내러티브에 의해서도 더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폭력과 억압은 메타내러티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메타내러티브가 불필요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또 다른 메타내러티브에 호소하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으며 메타내러티브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에 오히려 혼란과 도덕적 표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결국 왈쉬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상정한, 문제의 근원이 메타내러티브이며 그 해결이 메타내러티브의 죽음이란 논지는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구조―방향 모델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따르면 ‘구조―방향 모델’도 현실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명제일 따름이다. (물론 구조―방향 모델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잣대로만 비판 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전반적인 비판을 언급하였다.) 구조―방향 모델은 첫 연재 글에 소개된 바 있으므로 지면상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이원석 편집위원은 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수한 구조에 대한 개혁주의 세계관 진영의 믿음이 개혁주의 세계관의 현실 감각 부재를 보여주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에서 해법은 간단하다. 구조가 선하므로(어떠한 악도 개입될 수 없으니까) 방향만 바꾸면 된다. 이 해법 속에는 구조와 방향이 현실 속에서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냐는 논의가 배제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구조이고, 어디부터 방향인지가 그렇게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간 개혁주의 세계관 논의가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고성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복음과상황> 204호 이원석, “‘순수한 구조’는 현실 속에 없다”)
또한 김기현은 구조―방향 모델이 불이나 성(性)처럼 유용과 오용을 동시에 설명해 주고 세상을 변혁하는 데에 유익한 방법론적 틀을 제공하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인정하면서도, 구조가 악하거나 이중적일 수 있음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구조가 선하다고 못 박는 것은 결국 구조결정론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구조와 방향’보다는 오히려 ‘정사와 권세’ 모델(?)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제도 혹은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는 ‘정사와 권세’이다. … 그러기에 톰 라이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세계관적 질문에 대해 예수의 진정한 원수는 이스라엘 내부도, 이스라엘 밖의 로마도 아닌 사탄이라고 대답한다. … 라이트의 질문, “지금은 어느 때인가?”에 대한 대답을 정사와 권세와의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구조와 방향의 구도보다는 ‘정사와 권세’가 훨씬 더 성경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틀이 된다.” (김기현, 같은 글)
재미있는 사실은 월터스도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 후기에 N.T. 라이트의 질문, ‘지금이 어느 때인가’에 대한 논의를 비교적 길게 기술하였다는 사실이다.
“라이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이 어느 때인가’이다. … 지금이 어느 때인가? 바로 증언과 선교의 시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두 시대가 중첩된’ 시기,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속한 시기의 의미는 그것이 사도적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도록 주어진 기간이라는 데 있다. … 이 구속의 시대는 많은 사상자를 속출하는 치열한 전투의 시기다.” (월터스, 같은 책)
월터스는 이러한 질문에 답함에 있어 다른 모델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다시 구조―방향 모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실한 교회라면 우리 문화와 적대적 관계밖에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선교사들은 이 딜레마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은 두 가지 요인에서 나온다. 첫째, 교회는 문화적 이야기를 구현하고 있는 사회의 일부다. 둘째, 기독교 공동체는 그와 다른 이야기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데 이 이야기도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범위가 포괄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두 개의 공동체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긴장을 해소하려면 우선 구조와 방향의 구별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사명은 선한 창조를 반영하는 통찰과 구조를 분별하여 포용하는 동시에, 우상 숭배로 인해 왜곡된 모습을 배격하고 뒤엎는 것이다.” (월터스, 같은 책)
같은 책에서 월터스는 구조 자체를 ‘선하다’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계승하는 요소’를 구조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타락의 영향 아래 있는 요소’를 방향으로 규정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해 구조와 방향을 구별 짓고 나아가 악한 방향으로부터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즉 세상의 변혁을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설명이 (김기현의 지적대로) 구조가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과 (이원석의 지적대로) 현실적으로 구조―방향의 구별이 어려우며 상대적일 수 있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가’라는 라이트의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월터스의 주장대로 구조―방향 모델이 굳이 못 빠져나갈 이유도 없다. 또한,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의 구분 자체가 어렵다는 문제 제기에 답변이라도 하듯, 지면의 상당 부분을 영적 은사, 성(性), 춤, 오이코스(oikos, 로마제국의 기초 사회단위)에 이르기까지 예로 설명하고 있다(같은 책 5장과 후기를 보라). 또한 김기현이 제시한 권세―정사 모델은 주로 국가나 정치 분야에는 적용하면서도 (기독교 세계관이 주로 적용하고 있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특유의 대립구조를 잘 적용시키지 않고 있다. 만일 문화와 예술 분야에 권세―정사 모델을 적용시킨다면 ‘사탄이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는 이른바 신상언 류의 극단과도 만나지 않겠는가. 전에도 밝혔듯 나는 구조―방향 모델의 효용성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물론 단순한 도식과 모호한 ‘구조’ 개념은 비판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모델이든 현실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 어떤 명제보다도 단순하게 표현되었지만 90년대를 기독대학생으로 보낸 내게 영혼구원에 국한된 ‘사영리 모델’―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을 넘어서 방향성, 즉 선악의 구분이 세상과 교회, 예배와 일상, 성경공부와 학문연구,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도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이 구조―방향 모델은 십여 년간 교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계속)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1)
: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정리하며
들어가면서
작 년 말 즈음 아는 지인으로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웹진에 세계관 연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예전부터 웹진에 대한 생각을 자주 말했던 그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고 싶다고 했고 본인 자신도 지금 공부 중이라고 했다. 알게 모르게 주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관심 있어하는 기독인들이 더러 있다. 하긴 90년대에만 하더라도 진보적인 기독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는 거의 동일한 단어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는 무슨 말만 하면 기독교 세계관 운운했고, 대화 중에도 프란시스 쉐퍼가 후렴구처럼 등장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기독교 세계관은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과 함께 80-90년대의 진보적인 한국 복음주의권 내에서 신앙의 지침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와 사회문제에 괴리된 성경공부와 개인영혼구원의 시급성을 앞세운 사영리류의 전도 및 대형집회 위주의 한국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행해진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천명한 로잔언약을 통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깨우쳤다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교회 활동만이 영적이며 세상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문화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설령 그 열매가 미미할지언정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사고 전환은 신앙과 학문의 조화를 통한 지성의 제자도 추구, CCM이나 기독영화제와 같은기독교 문화 사역의 질적 성장 및 낙천, 낙선 운동으로 대변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 운동의 흔적들을 남겼다. 90년대를 캠퍼스에서 보낸 나를 포함한 청년들에게 있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성 보수적인 교회에서 품고 있던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시켜주었고 기독교적 지성의 추구를 통해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변화에 있어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개혁주 의 기독교 세계관의 의의나 비판적 성찰은 추후에 더 언급하겠지만 내가 서론에서 장황하게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그것이 한국 교회에 끼친 유익이 크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이제는 점점 청년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데, 그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 혹은 담론 자체가 이제 갓 공부를 시작하려는 입문자가 접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내용이 복잡해졌고 다양화되었으며 어려워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쉐퍼나 아더 홈즈, 알버트 월터스 등으로 시작된 기독교 세계관은 그동안 많은 반론과 그에 대한 해답, 그리고 대안적인 세계관이 제시되어왔다. 이제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서로 떠올리는 '관'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지금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어렵고도 혼돈스러운 일이며 항상 논쟁의 여지가 존재함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연재글을 쓰려는 것은 세계관 입문자들에게 비교적 쉽게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중요한 이슈들을 소개하고 앞으로 기독교 세계관 담론에 대하여 더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계관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연초부터 쓰기로 한 글은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로 여전히 나는 독서 중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오죽할까. 초반부터 엄살이 심했다. 이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들을 내가 아는 선에서 되도록 쉽게 써내려가볼까 한다.
세계관은 어렵다
사 실 내게 글을 청탁한 지인이 좀 특별한 경우이지 주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하는 신앙인들이 거의 없다. 복클(복음주의 싸이클럽)이나 기학연, 복음주의연구소 등 몇몇 교계의 학구적인 그룹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느끼기에 지역 교회 내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죽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용어를 쓰는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신앙 지침'이나 '교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신앙에 대해 지성적 측면에서 깊이 알고자 하는 소수만이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들이 결국 앞서 언급한 학구적인 그룹들의 논의들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최근에 ‘복음주의연구소’에서 아볼로 포럼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추가로 진행되었다. 송인규 목사의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 관>이라는 책에 대한 김기현 목사와 양희송 실장의 논평,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있었는데 결국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어떤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수 교단에서 자란 많은 기독인들은 이러한 신앙적 불일치를 불편해 한다. 내 주변에는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인들이 많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이런 논쟁들에 무관심하거나 조금 발을 담그다가 내부적인 불일치로 인해 불편한 마음으로 관심을 접은 채 그저 열심히 말씀 보며 기도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적군과 아군이 분명한 것을 선호하는데 기독교 세계관 논쟁에 있어서는 누가 '우리편'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다. 나는 이런 지역 교회의 평범하고 보수적인 성도들이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는 것이 기독교의 지성적 후퇴를 가져다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문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 논의 자체가 이미 너무 복잡해졌고 입문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워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잠시 예전에 썼던 글을 인용해볼까 한다.
“ 알버트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철학, 신학과 구별 짓는 키워드로 ‘일상’과 ‘상식’을 든다. 세계관이 그만큼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상식의 문제이며 일상적인 문제다. 하지만 개혁주의 기세 자체가 철학, 신학을 잘 알지 않으면 논의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을 많은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중략) 물론 세계관이 신학, 철학적 토대 없이 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관은 철학과 신학에 대해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철학적, 신학적 연구가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된다.”
(복음과상황,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론)
원 컨대 기독교 세계관이 일상과 상식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학과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 전반에 걸쳐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은 어찌 보면 기독교 내의 지성 그룹 안에서 ‘뜨거운 감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도예베르트가 정립한 것으로 주로 화란 개혁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혁주의를 말할 때는 칼뱅이나 아브라함 카이퍼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관 명제들이 모두 개혁주의적인 교단의 영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쳐도 관련 논문과 책들이 엄청나다. 그뿐인가.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 중 최초의 저작이자 가장 얇은 책인 <이성에서의 도피>에서는 헤겔, 키에르케고르, 슐라이엘 마허, 칼 바르트에 미미하나마 미쉘 푸코까지 다소 어려운 사상가들의 명제들을 비평한다. 관련된 사상가들의 원전은 고사하고 입문서들이라도 읽으려면 그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브라이언 월쉬와 리차드 미들톤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란 책에서는 현대(근대) 세계관들을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친절하게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도서 목록>이라는 15페이지 분량의 책목록을 소개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95년에는 처음 저작이 현대성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모습의 세계관 저서를 추가로 선보였다. 이 책은 2007년에 김기현 목사와 신광은 목사를 통해 다소 늦게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과 이전 저작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존 하워드 요더나 니콜라스 톰 라이트, 스탠리 하우어워스 같은 신학자들의 저작들도 언급하였다. 이런 주요 저작들 몇 권만 언급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분야는 개신교 역사와 신학, 그리고 철학, 사회학 등등 실로 그 영역이 방대하다. 그 뿐인가. 실천성을 담보한 기독교 세계관은 종종 북미의 정치적 상황과 우리 나라에서의 복음주의 역사들을 자주 언급한다.
일 이 이쯤 되고 보면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수많은 신학자들과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한 번쯤은 뛰어들려고 하는지 알 만 하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 학문과 기독교 사상을 연계해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또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만 일방적으로 제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복음주의 안팎의 여러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기존의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거나 나름의 대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의 학문적 향연이 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분야는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지속적인 담론 생산이 가능한 화두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흐름은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담론들이 점점 평신도들의 관심 내지는 일상 생활과는 괴리감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 자체의 난해함과 그것이 학문활동에 기인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캠퍼스 학생들과 직장 신우회에서 시간을 쪼개서 성경 공부하듯이 기독교 세계관과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그런 방향으로 권면을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입문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기독교 세계관 논의 자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느 정도 소통의 통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미 10년 넘게 흘러온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이미 새로운 입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논의가 넓어졌고 깊어졌다.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골목길 맛집 같다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나는 비교적 거칠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그 렇다면 세계관은 무엇인가. 알버트 월터스에 따르면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좀 어려운가. 브라이언 왈쉬의 좀더 평이한 정의를 따른다면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자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세계관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중요한 이유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이 특정한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이 그 세계관에 부응하도록 방향 지워진다는 사실 때문이다.(브라이언 월쉬, 그리스도인의 비전)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삶이 특정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수긍하더라도, 그 삶이 세계관에 의해 방향지워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들도 있다. 이러한 정의 자체가 자율적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 그 행동을 규제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적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일관되게 행동하지도 않을뿐더러 합리적이지도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제임스 사이어는 그의 책 <기독교세계관과 현대 사상>에서 세계관의 유형들을 '참된 최고의 실재', '세계의 본질', '인간', '죽음', '지식', '도덕의 기초', '역사의 의미'라는 7가지의 질문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브라이언 월쉬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좀더 간단한 4가지의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세계관의 유형을 구분 짓는다. 이러한 구분작업의 유익은 첫째, 몇 가지의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회심을 한 이후에도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변화되어온 현대 사상-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허무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 사상으로 치부해도 무방한-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관들과는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짧은 지면에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몇 가지의 특징만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적 구조
첫 째,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명제적 구조로 요약한다. 이는 헤르만 도예베르트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이후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틀이 되었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도에서 중요한 것을 몇 가지 정리하자면 첫째로 '문화 명령'이라는 개념이다. 창1:28에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흔히 청지기적 사명으로 표현한다. 월터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물러나셨지만 자신의 형상(인간)을 땅 위에 세우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땅의 발전은 인간 종족의 방식에 의하며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포함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이 발전시키는 사회와 문화의 창작물 혹은 조직들도 모두 이 청지기적 사명에 포함된다. 거칠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문화 명령'이라고 정의하는데 성경은 '문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선한 창조'라는 개념이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선포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선포는 창조의 완전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어 등장하는 타락 사건에서의 타락은 '전도된 악'이며 결코 존재 자체의 악한 면이 아니라고 한다. 부연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선악구도는 기타 종교의 신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선과 악의 존재적인 대립이 아니라는 의미다. 악은 선의 타락이고 존재의 왜곡이며 결코 지속적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의 이런 일시적인 타락 구조를 회복시키기 위해 ‘구속’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고, 구속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강조되는 사실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타락과 구속의 범위’ 혹은 영역이다. 악의 전도가 피조계의 전영역에 미쳤던 것처럼 구속 또한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피조계의 모든 영역,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문화와 사회제도와 예술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피조계 전 영역에서의 구속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인간 존재의 전영역에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은 땅은 한 치도 없다"는 이른바 영역주권론에 근거하고 있다. 리차드 니버는 자신의 고전적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대립, 일치, 종합, 역설, 변혁의 5가지 모델 중에서 변혁 모델을 다른 모델보다 우월하게 제시했는데, 그는 이 변혁 모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인간의 문화 영역(사회적 관습, 정치 기구, 언어, 경제 조직 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역사 속에서 부패한 인간의 사회 질서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써 종말론적 미래를 종말론적 현재로 수용한다고 주장한다.(김영한,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피조계의 전 영역에 대해 세상 가운데에서 지속적으로 문화 명령을 수행할 책임을 가지며 사회와 문화를 포함한 전 영역에서의 변혁을 추구하도록 부름 받는다.
구조-방향 모델, 이원론 문제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구조-방향 모델’이다. 이는 <창조, 타락, 구속>과 <그리스도인의 비전>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먼저 '구조(structure)'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자체나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지시하며 ‘본체’, ‘본성’, ‘본질’로도 표현할 수 있다. 이것도 말이 어렵고 모호하긴 하다. (실제로 월터스가 사용한 ‘구조’란 용어는 설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쿤의 패러다임만큼 용어의 모호함으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방향’은 무엇인가. '방향(direction)'은 ‘죄와 구속의 질서’이다. 여기서의 한쪽 방향은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과 변질이며 다른 방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타락을 설명할 때 구조-방향 모델은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창조계가 원래의 일방성(순종)을 잃고 이방성(순종-불순종)의 존재로 변한 것으로 묘사하는 셈이다. 이 때 구조는 가치중립적이며 방향에 의해서만 선악이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방향 모델은 기독교 세계관을 흡수한 많은 청년들에게 적용점을 시사했는데, 일례로 80-90년대에 교회 안에서 전자기타를 사용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었을 때 가치중립적인 전자 기타(구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방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특정 교단에서 전자기타나 드럼의 사용, CCM의 수용 문제는 나름 진지하고 심각했다.) 진보-보수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구조-방향 모델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구조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혁명에 동조할 수 없고, 방향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무사안일의 보수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월터스, 창조-타락-구속)
셋째는 이원론 문제이다. 월터스에 따르면 이원론이 교회에 침투한 역사를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어거스틴이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보지 못하여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 속에 거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른바 ‘구조’를 ‘방향’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선과 악 자체가 창조 자체에 내재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며, 이는 선한 창조 내에 어떤 것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송인규는 <평신도 신학>에서 ‘세상1’(구조)을 ‘세상2’(방향, 즉 세속화)처럼 여겨서 ‘세상1’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혼합주의로 치부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잘못된 이원론적 구도는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 예배와 활동, 성경과 학문,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등 세상 속의 많은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층위의 개념들을 성속 개념으로 대체하게 만들었고 이른바 이런 ‘이원론적 행습’의 탈피는 80-90년대 로잔언약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지성의 강조: 신앙과 이성의 통합
마 지막 특징은 합리적, 논리적 지성의 강조이다. 이는 프란시스 쉐퍼의 3부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절망의 선(the line of despair)’과 ‘신앙의 비약(the leap of faith)’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쉐퍼에 따르면, 고전적 철학과 사상은 헤겔에 이르러 상대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헤겔은 진리의 문제를 정립-반정립의 과정을 거쳐 종합에 이르는 이른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는데, 쉐퍼는 헤겔이 변증법적 방법론을 통해 현대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았으며 진리로서의 진리는 사라지고 상대주의적 사고와 종합(synthesis), 즉 양립가능한 다양한 ‘진리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쉐퍼는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키에르케고르가 헤겔로부터 시작된 현대성을 본격적으로 이끌었다고 보았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는 종합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대신에 우리는 ‘신앙의 비약’을 통해서 참으로 중요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고 주장했다. 쉐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의 비약이라는 개념을 선포했을 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적, 신학적 모두의 현대 실존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 만일 합리주의적 인간이 삶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목적, 의미, 사랑의 정당성과 같은)을 다루기를 원한다면 그는 합리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크고도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을 이루어야 한다. 합리주의 구조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 답변을 제공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통일된 지식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해야 했다. (프란시스 세퍼, 거기 계시는 하나님)
쉐 퍼는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종교적 실존주의는 기독교를 합리적으로는 논증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냈으며 신앙은 결국 비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쉐퍼가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문제는 바로 이 ‘절망의 선’의 와해, 즉 신앙과 이성, 신앙과 합리성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상대주의적 진리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성경적 진리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성의 강조, 신앙에 있어서 이성의 사용에 대한 강조는 비단 기독교 세계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행한 <칼빈주의 강의>에서 그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설명하는 대신에 칼빈주의와 정치, 과학, 예술, 미래의 주제를 다룬 바 있다. 카이퍼는 이 강연에서 종교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했으며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통합,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추구하는 일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수혜를 입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주요 특징이자 우선적인 과제임에 분명하다. (계속)
*이 글은 웹진<크리스찬 프레스>와 월간<복음과상황> 5월호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