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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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유명한 시트콤 <프렌즈>의 전편을 다 보았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미국의 유명했던 시트콤에 지난 몇 년간 나도 참 많이 끌렸고 한 시즌 한 시즌 재미있게 본 기억이 아직도 많이 남는다. (물론, 프렌즈에 관한 한 아내의 '집착'을 빼 놓고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나에겐 이 코믹한 드라마가 흥미와 즐거움 이상의 것이었다. 물론, 몸값이 오를 대로 오른 배우들에게서 풍기는 매력이라거나, 각 시즌마다 짜임새있게 쓰여진 시나리오의 구성, 재치있는 입담들을 빼 놓을 순 없겠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 내가 깊이 매료되었던 건 내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시기가 한창 내가 '일'에 파뭍혀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냥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주변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는 항상 학교, 교회, 선교단체와 같은 어떤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일을 꽤 잘 하는 사람의 범주에 속했기 때문에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나는 사적으로 받는 전화가 거의 없는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연락처가 쓰여진 플래너를 펼친 어느 날을 잊을 수 없다. 내게 소중한 우정을 가진 이들이 누구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무심코 펼쳐든 플래너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누구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고 있는지 사실 나조차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내던져진 이후로 나는 세상이 나를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스쳐가듯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중요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고 때로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도 갑자기 친해지곤 했다.

어느날 <프렌즈>를 보면서 카페에서 편안하게 매일같이 만나서 아무 이유없이도 서로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세상에 내 몸을 맡기고 내 인간관계를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속 그들에게 있어서도 우정이 지속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들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이사를 하거나 직장을 먼 곳으로 옮긴다거나 친구들 간의 삼각관계.. 하지만 그들은 우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친구들의 요구에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는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우정을 키워가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들은 시트콤의 출연으로 맺어졌지만 스튜디오를 나와서도 서로 간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선천적으로 가진 장점들과는 별개로 자신이 노력해서 가꿔가야 할 부분이 점점더 커진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의 인간관계,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나는 너무 힘들게, 먼 길 돌아가듯 깨달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더더욱 가까운 사람들이 소중하며 나에게 주는 의미도 그만큼 크다.

나란 사람은 원래 혼자 있길 즐기고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친구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안다. 우정없이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만큼 나에게 당신은 소중하다. 아니, '당신'이 아닌 '우리'는 소중하다.

2008/12/27 19:29 2008/12/2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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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Sam"을 보면서 마음 한 편이 껄끄러웠다. 사실 당시에는 샘의 모습, 변호사의 변화, 딸의 말과 부녀간의 애절한 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감정이입에 충실 하느라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껄끄러웠던 감정들은 가벼운 분노의 마음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처음에 비치는 장면은 스타벅스 커피샵이다. 샘은 지능이 낮은 아버지로 등장하며 스타벅스에서 주문을 받거나 청소를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후반에는 피자헛으로 그 직장을 옮기게 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은 실제 프랜차이즈 안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바쁘게 주문이 오고 가며 빠르게 움직이는 점원들을 유심히 보면서 매니저를 제외한 사람들 중에 샘과 같은 사람은 고사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들을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샘은 복잡한 주문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들이 무서워서 근처 단골 식당이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으며 딸의 고집에 못 이겨 따라갔던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는 급기야 당혹스러움을 표현한다. 그런데 왜 그 곳보다 더 분주하고 주문도 복잡하게 받는 스타벅스와 피자헛은 편안한 직장으로, 따뜻한 분위기로 비춰질 수 있었을까.

한편,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가장 중요한 대사들 속에는 미국 팝음악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비틀즈 맴버들과 노래들 제목으로 가득 차 있다. 배경음악으로도 쓰이고 있는 비틀즈의 음악은 가장 핵심적인 대사 가운데에서도 맴버들의 사생활이라거나 비틀즈의 음악 세계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코드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마지막의 감동적인 샘의 대사는 미국에서 영화의 고전으로 받아들이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대사를 외운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기위해 미국인이 선호하는 영화들까지 봐줘야 한다.

영화는 은근히 미국적인 것이 참으로 따뜻하고 안락하며 뭔가 의미 있는 코드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그 위에다 모자란 아버지와 영리한 딸이라는 안타까운 플롯을 얹은 셈이다. 제3세계에 속한 우리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황색 인종들은 스타벅스나 피자헛에서 안락함과 인간적인 면들을 발견해야 하고 비틀즈의 음악 세계에 빠져들어야 하고 그 맴버들의 이름은 물론 히트친 노래들과 가사들을 암기하고 맴버들의 관계들도 추가로 이해한 후에 뿌듯함을 느껴야만 한다. 결국 가장 미국적인 무엇을 알아야만 이 영화는 우리에게 휴머니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이 영화의 주제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팍스 아메리카나"가 아니었을까..

2008/12/27 19:27 2008/12/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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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70-80년대를 살면서 시대의 사건들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여염집 며느리 마냥 장님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보내고 나니, 국민투표로 대통령도 뽑고 경제도 어느 정도 발전하여 거리에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만 보던 프랜차이즈들이 즐비한데다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와 영화, 미디어들, IT와 같은 첨단 기술들이 발전하면서 그것을 따라잡고 향유하는 데에도 정신과 시간, 물질을 투자하기 바빴을테니 말이다.

인문학 내지 사회학을 하는 사람들의 어설픈 흉내를 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흔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가까운 집에서 이혼을 했다거나 아이가 죽었다거나, 부모님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이사를 갔던 일들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들을 되내어 보면 소문만 무성했지 정작 그 사람들의 손을 맞잡거나 이사를 도와주거나 어려웠던 부분들을 함께 짊어지기 보단 쉽게 이야기하고 가볍게 넘기던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시작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심하게 짜증나게 만들었다. 3.15 부정선거에 주인공 성한모(송강호역)는 그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야산에 투표함을 묻거나 투표용지를 먹어버리는 일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는 이발사였다. 가까이 일하는 이발사 보조(문소리역)를 강간하여 동거를 시작하는 구도도 그러했다. 코믹한 설정이지만 내심 그게 그렇게 우습게 치부할 성질의 일들이냐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웠던 장면은 1960년 4월 19일에 있었던 부정선거 철회 집회의 스케치였다. 사사오입을 억지로 갖다 붙여 임신한 아이를 낳게 되는 당일에 군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질을 해댔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성낙안이라는 아이의 코믹한 출산의 배경으로만 지나치는 개그씬에 다름아닌 장면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반면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씩 집중할 수 있었던 대목이 있었다면 그런 코믹한 장면들 뒤로 무덤덤하게 보도되는 왜곡된 라디오 뉴스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러했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너무나 담담한 보도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영화가 <개그 콘서트> 분위기에서 <송환>의 분위기로 전환하는 대목은 성한모의 아들 성낙안이 전기고문을 받고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면서부터다. 사실 암울한 시대의 여러 사건들이 효자동에 사는 이발사에게는 별 생각없이 웃을 수 있는 일상이었지만, 옆집 사람들이 잡혀가게 되고 그들이 병신이 되어 돌아오거나 감옥으로 가게 될 때에는 그러한 거리감이 조금씩 좁혀지게 된다. 결국 자신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게 되자 영화는 코미디의 색을 잃는다. 잿빛 하늘처럼 어두워진 플롯은 결국 아들이 영원히 주저앉은 채로 일어서지 못하는 대목에서 객관성도.. 무덤덤함도 잃어버린채 울분의 정서가 폭발하고 만다. 일개 이발사에 불과한 성한모가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자르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나라를 욕하는 장면에서 이제 더이상 이 영화는 세상을 타자화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주검이 되고 병신이 되어 돌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도 하고 흥미로워하기도 하고 대부분이 그렇듯이 무관심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병신이 되거나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역사이며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탓이다. 영화는 무엇을 말해주려고 했을까. 이러한 인간들의 간사함과 그로인해 겪은 사회의 비참함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려고 일부러 처음에는 바보처럼 웃어 재끼도록 설정을 한 건 아닐까. 아무 생각없이 웃고있던 많은 사람들이 종국에는 간사하고 이기적인 자신을 쳐다보며 느끼게 될 당혹감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괴롭고 아프지만, 귀하디 귀한 선물은 아니었을까..

2008/12/27 19:24 2008/12/2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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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중반까지>

로이는 약간의 정신질환을 보이는 사기꾼이다.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그런 자신이 불편하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정신적 문제가 자신과 헤어진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 기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이의 행방을 찾는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다시 만나게 된 딸 안젤라. 안젤라는 아버지 로이를 만나자 반가워하며 그의 공간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자신의 딸 안젤라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로이의 정신 질환들은 호전을 보이며 딸과 있는 시간을 통해 큰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자신을 닮아가는 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신의 일을 정리하려 마음을 먹는다. 결국 그가 사기치는 일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정작 함께 일하던 가장 친한 친구가 그를 배신한다. 그 친구는 로이에게 가짜 정신과 의사를 붙여 주었으며 그가 자신의 딸이라고 믿던 안젤라도 사실은 그 친구가 로이를 속이기 위해 고용한 여자였다. 로이는 이미 전 재산이 있는 곳을 안젤라에게 알려주었고 모든 것을 알고 난 로이는 크게 놀란다.


<개입>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흐트러진 삶을, 혹은 잘못 선택된 삶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곤 한다. 기왕 망가진 인생, 어쩔 수 있겠냐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자신의 삶에 소중한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은 쓰레기 더미에서 살더라도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가 좀더 좋은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소중한 사람은 허상에 불과했다. 사실 자신과는 아무 상광이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그가 쓰레기 더미에서 모아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은 채로..


<영화의 후반>

로이는 크게 흥분했고, 무슨 일을 치를 것 같아 보였다. 거기에서 그의 모습을 사라진다. 1년 후... 그는 카페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곳에서 우연히 안젤라를 만난다. 그는 안젤라에게 별 다른 말 없이 그녀를 용서한다. 그 돈은 원래 너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이는 장을 본다. 간혹 거기에서 인사하던 여직원이 있었으나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로이는 열쇠로 문을 여는 대신 초인종을 누른다. 전에 매장에서 본 그 여직원이 그의 아내가 되어 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한 채.


<개입 II>

때때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사람들은 변한다. 그 변하는 내용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미숙하다.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 하지만 로이는 달랐다. 그는 안젤라와 있었던 시간을 통해서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딸을 임신했던 여자를 떠날만큼 미숙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안젤라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가정의 소중함, 삶의 평안함 같은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잃은 돈과 자신을 속인 사람들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는 일 대신, 거짓이긴 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소중한 기억들을 진실되게 누릴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행복을 누리는 일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

2008/12/27 19:23 2008/12/2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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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읽은 책이 많지 않아 다분히 주관적인 선택이지만, 한 번 모아 보았다.
연말 휴가 때 한 두권을 손에 들고 정리하는 것도 좋을 듯.^^


<myjay의 2008년 추천도서 10선>

1. 주식투자란 무엇인가 1,2 -박경철 (리더스북) / 2008년 10월  
   : 주식투자에 대한 근본적 성찰,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주식'의 관점으로
     파헤친 교과서적인 책.

2. 회심 -짐 월리스(IVP) / 2008년 10월  
   : 이것이 진정한 복음주의권의 바이블이다!

3. 나쁜 그리스도인-데이비드 키네먼.게이브 라이언 (살림) / 2008년 7월
   :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문조사의 모든 것. 기독인이라면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

4.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추수밭)
   : 미국의 지성 하워드 진의 미국역사서.

5. 사람 - 김용택 (푸르메)
   :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사람들.

6. 르몽드 세계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선별한 세계의 문제들.

7.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 -국제앰네스티 지음 (사파리) / 2008년 9월
   : 유명 동화작가들의 그림으로 엮은 세계인권선언.

8.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김용택 (창작과비평사) / 2008년 8월
   :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동시들. 그의 혜안이 부러울 정도.
 
9.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이택광 (아트북스) / 2008년 8월
   : 중세의 그림에 빠져들고 싶다면 이 책을 기억하라.

10. 기우뚱한 균형  -김진석 지음 (개마고원) / 2008년 7월
   : 김진석 교수의 긴 호흡의 기고글들. 균형 속에서 줄타기하는 그의 생각들.
2008/12/26 19:21 2008/12/2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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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를 보다가 <공부의 천재>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에게 합숙을 하면서 공부법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나름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통해 듣게 되는 이야기와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진행자들과 친밀해져가는 과정이 연예프로그램 치고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을 익히고서 치른 모의고사의 점수 공개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더군요.

성적이 오른 학생들과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프로그램은 끝이 났습니다. 허나 나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분명 1시간 내내 몰입해서 보았지만 유용했던 영상들과 음성들이 뒤섞여 제 머리 속을 맴돌았고 이내 저는 그 안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 날의 프로그램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나와서 공부법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공부법은 간단명료했고 무엇보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도전 의식을 심어줄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환경을 통해서 학업에 대한 열심을 내었던 그의 긍정적 에너지에 큰 박수마져 쳐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서는 그러한 공부의 '목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생의 목적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어쩌면 <공부의 천재>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도구로서의 공부에 대한 기술,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기 때문에 그 천재 학생의 가치관, 인생의 목표, 삶의 열정 같은 것이 배제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저의 불편한 마음은 공부의 기술만을 보여주려했던 방송 프로그램에게만 돌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제가 그 학생으로 대변되는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 그 학생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을 가정한다면 저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그 학생이 공부를 잘 하고 싶었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최고의 학생들과 겨루고 싶다"는 경쟁심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일류와 겨룰 수 있고 그 일류 집단에서 머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채찍질했고 그 어렵던 방대한 분량의 공부도 넉넉히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타인과의 경쟁, 겨루기로서의 학업 목표에 대해 당황스러움을 갖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크게 불편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된 공부가, 경쟁으로서의 목적 자체가, 진정한 학문의 대가가 되었을 때에는 자연히 더 근본적인 방향으로 전이될 확률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고지를 향한 걸음으로서의 학업은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대상은 아닌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공부를 잘하고 정보를 많이 익히고, 학문의 대가의 반열에 오르더라도 그의 인생은 허무할 수 있으며, 때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일에, 타인을 파괴하고 이웃을 삶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배움이 인간성을 구원할 것이라던 계몽주의적 근대성은 커다란 2개의 전쟁으로 인해 그 명맥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였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공부법은 중요합니다. 운동을 할 때에도 정확한 이론에 근거한 자세, 방법, 훈련의 기간을 숙지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진전이 없는 것처럼 학업에도 효율이 높은 방법과 TIP들이 있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원대하고 희생적인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하더라도 개별 학문에 있어 정확한 정보의 이해와 뛰어난 실력이 없으면 그 목표에 합당한 삶을 사는 데에 장애요소가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적인 접근으로만 끝나는, 그리고 나아가 그 방법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 고지론인, 일류 그룹에서의 경쟁 그 자체라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강연에서 히틀러와 간디의 유일한 차이는 그의 윤리관이자 가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는 인간과 동물을, 나아가 존경과 비판의 대상을 구분짓는 가장 근본적인 잣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자는 순서가 뒤바뀌었을 뿐 일단 고지를 점령해야 더 큰 이야기, 즉 거대담론, 메타담론, 세계관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히틀러와 간디의 차이가 생겨났다고 믿습니다.

<공부의 천재>를 보면서 갑자기 "공부해서 남주자"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최고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일류이든 이류이든 상관없이, 가장 효율적이든 도리어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인생이 <공부의 천재>이자 <인생의 천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씁쓸한 마음이 털어지지 않는 저녁입니다. (끝)
2008/12/22 19:24 2008/12/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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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복음주의자라면 이 책은 바이블이다!

소저너스라는 공동체와 잡지로 유명한 짐 월리스의 본서는 IVP 클래식 시리즈에 포함될만큼 깊이와 넓이를 두루 갖춘 책이다. 초판인 1981년을 개정하여 9/11테러와 관련된 내용이 추가되었고 냉전 체계가 해체됨에 따라 컨텍스트를 수정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히듯이 신앙인의 두 부류를 자극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 그 누구도 시대를 향한 회심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두 운동 모두 역사적으로 적실한 제자도에 대한 이해 없이 허둥댄다. 복음주의자들은 전도에는 강하지만 사회참여에는 약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은 그 반대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을 수 있다. 만일 두 그룹이 각각 빵을 반쪽씩 가지고 있다면 해결책은 반쪽짜리 두 빵을 한데 합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둘 다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풀로 붙여 하나를 만드는 식의 해결은 복음의 본질적 통일성을 타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래 메시지에 든든히 서 있는 그런 신앙이 더욱더 필요하다."

본서에서 짐 월리스는 그러한 신앙의 본질을 회심 사건에서 찾는다. 운동가로서는 구별되게 그의 행동의 근원에는 말씀에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본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양날개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함을 환기시킨다.

그는 회심을 역사적으로 구체적이며 성경 내러티브 가운데에서 찾을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개인의 영적인 전환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회심을 정의할 것을 지적하며 개인의 소유욕과 행복에 영합한 현대 미국적인 기독교에 일침을 가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지 못한 현대 복음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정 수단이었던 희년 제도를 상기시키고,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가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고 회심의 외적 척도로 그들을 향한 행동의 표출이 일어남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회심'을 통해 이뤄진 세상과는 구별된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의 유일성에 대해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분량면에서는 많지 않은 그의 글은 충격적이리만큼 직설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이미 많은 이들이 사회참여, 구제, 신앙의 열매,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해왔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그 길을 걸어왔고 또한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걸음의 이면에는 '회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신앙적 기초가 탄탄함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자주 말하는 '회심'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복구시킨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복음주의자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바이블이 될 것이다. (끝)
2008/12/15 19:17 2008/12/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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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8)
- 신앙과 삶, 그 갈증에 대하여

 

 

신앙과 삶
내게 기독교는 말과 글의 종교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나는 목사님의 설교와 주기적으로 읽는 성경에 매우 익숙하다. 내가 회심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도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면서였다. 나는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남은 부분들을 읽기도 했었다. 사실 교회를 나가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목사님의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으면 주일 하루가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하지만, 설교가 성경을 벗어나거나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마음이 무겁고 하루가 심란하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기독교는 내 머리 속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적인 종교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하지만 내가 껄끄럽게 느끼는 나의 종교성은 한국 기독교의 그것과 흡사하다.

한동안 나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앙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고 설교도 많이 들었다. 사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는데 지식, 지각의 영역이 신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신앙과 삶, 즉 신앙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대충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전히 갈증이 난다. 왜일까.


논쟁 속 사람들, 공동체 속 사람들
글을 쓰다 보면, 특히 반론이나 논쟁 글을 쓰다 보면 반대 의견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흥분하여 망발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신의 말을 반복하곤 한다. 난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면 비판의 대상이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논리임을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그런 노력들이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때론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다. 몇몇의 심한 경우에는 권위를 내세워 협박을 하기도 했고, 때론 비열한 방법으로 대응을 해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교양이 없는 건지, 사람들이 보수적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거나 나는 감정이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글쓰기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상은 내 영역이 아니겠거니 했다.

글뿐이겠는가. 여러 종류의 공동체에 속해있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교회에서는 어떤가. 처음에는 상냥하게 웃음으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면서 왕래를 하며 친절을 베풀다가도 진보, 보수와 같은 신앙의 색깔이나 성격, 정서적인 이유로 패가 갈리기도 한다. 한 번 벌어진 서먹함은 이내 깊게 골을 만들고 어느덧 ‘우리들’에서 ‘그들과 우리’로 지칭하는 단어들이 바뀐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중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 입장에서 그들의 ‘인간 관계’는 회사의 입사, 퇴사의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회사에 들어오니 별별 정말 희한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흔히 하는 말이다. 회의를 하면 엄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해 비위를 건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아랫사람을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상사도 있고 윗사람에게 잔머리를 굴려가며 뒤통수를 치는 조수들도 있다. 가족은 또 어떤가. 가장 소중하게 다뤄져야 할 구성원들 서로가 진저리를 치며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서로의 약한 부분을 비난하거나 원망하기가 더 쉽다. 그래서 가족은 ‘웬수’라고 했던가.


스탠다드, 예절, 에티켓
나는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표준(Standard)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예절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에티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흔히들 말하듯 전화 예절, 화장실 예절, 지하철 예절처럼 인간 예절 혹은 대인관계의 예절 같은 것이 표준처럼 작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겐 너무 명확해 보이는 선악의 문제가 세세한 일상과 인간 관계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표준을 제시하고 숙지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오만한 생각 말이다.

한때 과학철학을 공부하다가 흥미롭게 읽은 글 중에 빈학파(Vienna Circle)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을 읽고 학문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다. 그래서 학문의 구획을 정함에 있어서 논리적, 과학적이지 않은 명제들을 제외시키고 검증된 진리들로만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결국 그들은 이러한 구획의 문제(Demarcation Problem)을 명쾌히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가설을 수정하였는데, 그는 말년에 언어도 구체적인 맥락에서 쓰여질 때 의미가 있고, 마치 게임처럼 상황과 규칙에 지배를 받는다는 이른바 ‘언어게임 이론’을 전개하였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인간 행동에 대한 어떤 표준이 있다는, 혹은 있어야 한다는 나의 이상적인 생각-사람들의 행동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쉽게 골라내려 했던 생각-을 버렸다.


기독교의 본질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내게 있어서 기독교는 말과 글의 종교다. 나는 말과 글에 의해 종교성을 학습했고 그러한 말과 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곤 했다. 때때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과한 말과 행동을 불쾌하게 여겼고 그들을 성경의 틀, 혹은 내가 가진 가치관의 틀에 맞춰서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소신과 종교적 잣대에 걸맞게 산 것도 아니었다. 난 몸을 사리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나의 기준대로 잘 살아온 것 같진 않다. 그런데도 나는 이러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자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가고 화를 잘 내고, 상처를 받으면 왜곡된다. 부모와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또한 쉽지 않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특수성을 외면하고 어떤 잣대에 의해 사람들을 규정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조금씩 발견해간다.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고 회복하기 힘든 상처들이 있다. 내가 쉽게 재단하고 싶은 타인의 모습 속엔 그런 나약함과 상처, 그리고 왜곡되었지만 자신에겐 익숙한 습관들이 숨겨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한 모범적 인간들을 양성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모나고 부족한 사람들이 타인의 죄를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매일 일어나는 천국의 현현(顯現)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러한 고백이 토론과 논쟁 등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 진리로 다가가려는 열망의 의미 없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리와 지성의 추구는 합당하지만 기독교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특별히 나는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살다 보면, 마음 속으로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생긴다. 또한 반대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되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머리 속에서만 굴러다니는 망상이 아니라 살면서 겪게 되는 관계의 발자취이자 쓰디쓴 결과들이다. 내게 있어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그들의 상처와 한계, 그리고 환경들을 깊이 공감하며 그들과 동행하는 일이리란 생각이 든다. 또한 나와 다른 부분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나에게 행한 악행들을 용서하며 나또한 나의 부족한 행동들을 매순간 고백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 (끝)


**월간 복음과상황 12월호 기고글.

2008/12/01 00:09 2008/12/0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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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도노조 문제로 뉴스를 보면 시민을 볼모로 무리수를 둔다는 둥, 시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불편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왜 철도 노조원들은 파업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무감하다. 구조조정이 철도 노동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초래하고 그들은 어떤 이유로 구조조정을 반대하는지에 대한 팩트보다는 시민인 나의 불편함을 위주로 뉴스화하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홍세화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듯이, 프랑스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체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위상이 높다. 또한 그들은 단위 사업장의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토론과 논쟁을 통해 그들의 요구와 행동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면 자신의 불편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지하철이나 철도 노조가 파업을 하면 그들을 위해 친히 자가용이나 자전거, 심지어 걸어서 출근하는 것을 기쁘게 동참한다.
 
우리 나라는 시민과 노동자 사이의 간극이 크다. 이는 시민들 자체가 부르주아 계급을 지향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노동자의 단위 사업장 중심의 이기주의적 요소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의 요구사항과 그 진행 과정에 너무 무심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생한 불편함에 짜증만 내곤 한다. 보수적인 매체들은 이런 시민들을 담보로 쉽게 노조를 죽이는 기사를 남발한다. 마음이 답답하다.

2008/11/19 20:08 2008/11/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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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는 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빌과 2007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독일예술영화조합상 수상, 2007 BAFTA 스코틀랜드 여우주연상 수상의 화려함 때문에 큰 기대감으로 본 영화다. 단적으로 말해서 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빌과 여주인공 소피아 마일즈의 연기가 돋보인 이 영화는 감독 데이빗 맥킨지의 명성을 한 단계 올려놓은 영화로 평가될 것 같다.

주인공 할람은 사랑하는 친 엄마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잘 대하지 못하고 멀리서 훔쳐보는 버릇을 가진 소년이다. 그는 엄마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상처, 그리고 엄마가 죽기 전부터 아빠는 새엄마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증오심은 새엄마에게 향하며 그녀가 자신의 친엄마를 죽였다는 심증을 키워간다. 한편으로 그는 아빠와 새엄마의 정사장면을 보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도 키워가던 중 이를 감지한 새엄마와 관계를 갖고 자괴감에 빠져 집을 떠나 에든버러로 도망친다.

도시 한 가운데에서 엄마와 닮은 여성(케이티)을 쫓아가 그녀의 도움으로 호텔 식당에 취업한 그는 또다시 끊임없이 그녀를 숨어서 관찰하고 다가간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행각이 탄로난 할람에게 호기심과 모성애을 느끼는 케이티는 잠시 그에게 애정을 갖다가 이내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 먹는다. 할람은 다시 찾아온 새엄마의 독설에 화를 품고 그녀를 익사시키려 하지만 다시 그녀를 구해내고 달려온 아버지의 호소에 마음이 동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케이티와 헤어짐을 받아들이며 덤덤한 웃음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할람의 모습으로 장식된다. 그는 상처입은 소년의 위치에서 어느덧 성장을 경험한 것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지탄 받을만한 상황들에서조차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가서, 따뜻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조명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과 정사를 나누는 새엄마조차도 악인으로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의 설정은 과장되지 않지만 진실하다.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매일 케이티를 미행하고 훔쳐보는 할람이나 유부남과 애인 관계를 갖다가 할람의 모든 행동을 알고도 그를 받아들이는 케이티도, 아내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고 반항하는 아들에게 끝까지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까지. 다 악한 면과 나약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공감이 가는 인물들이다. 또한 이 모든 인물들은 결국에는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의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들은 그대로 남지만 인물들 각각이 그러한 미결의 문제 또한 받아들이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주인공은 새엄마를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용서하지만 자신이 일하던 호텔을 나오고 케이티와도 헤어진다. 케이티는 전 애인이었던 유부남과 헤어지고 할람을 선택하지만 할람이 아직 어리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와도 헤어진다. 상처들은 조금씩 치유되지만 모든 관계는 미결로 남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표정은 한결 밝아보인다. 아니 극도로 흥분하며 증오심에 휩싸이거나(이 경우 영화에서 주인공은 짐승의 가죽을 쓰고 얼굴에 색을 칠하는 행동으로 대변된다), 반대로 극도로 기뻐하며 방안을 휘젓고 다니던 모습으로부터 이제는 다소 안정되고 여유있는 웃음이 뭍어난다. 큰 산을 넘긴 했지만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피엔딩의 결말이 아니기 때문에 더 영화에 마음이 가는 부분이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열린 결말이 더 현실의 일상에서 진정한 의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싶다. (끝)

2008/11/19 19:16 2008/11/19 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