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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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도 어김없이 주말이 돌아왔다.
장보러 갔더니 소고기 값은 엄청 비싸져서 수육을 맛있게 해보기로 맘 먹음.
(물론 소고기 가격을 보기 전부터 수육할 생각이 있었지만...)

수육은 그냥 돼지고기를 삶기만 하면 되지만
삶을 때 돼지고기 특유의 느끼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갖은 양념이 들어간다.

**수육은 삶는 방법이 중요한 것 같은데, 저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마늘, 생강, 커피, 과일(사과) 등을 넣고 삶습니다.
그리고 고기가 너무 두꺼우면 잘 안익고, 함께 삶은 재료들의 향이 잘 안 스며들기 때문에 김밥보다 약간 굵게 토막을 내서 삶습니다.
삶을 때는 압력솥을 이용했습니다.

이번에는 사과 1개를 통째로 사용하여 만든 성하아빠표 돼지고기 수육~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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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조출연: 성하 할머니표 묵은 김치.^^

2009/03/14 23:24 2009/03/1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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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복음주의가 변질된 결정적 계기 - 이안 머레이 (이주일)

아직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인데, 이안 머레이가 추적해 낸 복음주의 변질의 역사적 계기는 1967년 키엘 대회 -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가 변질되는 원인을 제공한 시기
: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의 오판 - "복음주의가 포용주의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신학적 중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 패커는 이에 대해 뒤늦게 오판을 인정한 것으로 이안 머레이는 밝히고 있다.
- 머레이에 따르면,
   패커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면서도 키엘 대회가 아닌 그 이후 2차, 3차 성공회 복음주의 대회에서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지나친 포용적 태도로 복음주의 신학을 타협한 것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키엘 대회에서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가 유지하고 싶었던, 또 그렇게 될 줄 알았던 복음주의 신학의 중심성,
"스토트-패커 노선"이라고 불리는, 이런 노선이 이후에도 유지될 것이라고 (스토트와 패커는) 믿었으나,
실제로 신학적 포용성을 기본 입장으로 내세우자 후세대들은 엄격한 복음주의적 교리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결국 신학적 중심을 주장했던 제임스 패커를 늙은 원로로 무시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패커는 1970년대 이후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 그룹에서 소외되었고, 캐나다로 (쫓겨나듯) 옮겨가게 되었다.

:: 존 스토트는 이 과정에서 어떤 태도와 입장을 취했는지, 상술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
아마도 키엘 대회와 복음주의 그룹의 포용주의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사람이 제임스 패커기 때문에
스토트는 이와 같은 설명에서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키엘 대회 이전에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가 포용주의적 태도를 갖게 된 원인들을 추적해 보자면,
영국 성공회에 미친 "빌리 그래함"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머레이는 지적하고 있다.
철저히 "실용주의적 복음전도"를 추구했던 빌리 그래함의 태도 때문에
영국 성공회 및 복음주의자 또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외로운 광야의 목소리"의 입장을 취했다.
빌리 그래함식의 복음 전도를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대했고(지도급 인사 중에서),
이후 키엘 대회의 포용정책 노선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1966년의 존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분열은
분리주의자였던 로이드 존스의 '극단적인 순결주의적' 태도에 대해
존 스토트의 '균형있는 대응'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안 머레이는 철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스토트와 패커가 오판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1966년의 결별 사건과 관련해서 로이드 존스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안 머리. <분열된 복음주의>(부흥과개혁사) 를 읽는 중에...
2009. 3. 6. 새벽 2시




이주일:
이안 머레이의 책에서 프란시스 쉐퍼와 로이드 존스는 이와 같은 복음주의의 변질에 대해 처음부터 강력히 경고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기독교는 진리에 있어서 타협하면 무너진다는 것이다. 쉐퍼의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등의 저작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09.03.06 02:14)
    
제임스 패커는 우회적으로라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한 것 같은데, 존 스토트는 이런 해석과 평가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와의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로이드 존스를 상당히 존경하고 존중하면서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금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안 머레이의 해석에 여전히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 (09.03.06 02:16)
    
결국 미국 복음주의의 변질의 핵심은 '빌리 그래함'에게, 미국보단 덜했을지 모르지만 영국 복음주의 변질의 핵심은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에게 있다는 것이 이안 머레이의 해석인 것 같다. 스토트와 패커가 이안 머레이의 말을 들으면 꽤 아파할 지도... 물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는 빌리 그래함 만큼 신학적으로 어리숙하게 타협하진 않았다. 빌리 그래함에게 문제가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09.03.06 02:19)



김용주:
개인적으로 이안 머레이의 입장에 다소 비판적임. 존 스토트의 입장은 그의 말년 자서전 격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듯. 개인적으로 신앙의 입장이 존스토트, 알리스터 맥그래스, F.F 브루스, 마크 놀 등등의 입장에
서있는 나로서는 이안 머레이의 입장이 근본주의처럼 느껴짐.결국 오래된 복음주의라는 입장은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반대, 성경 비평을 자유주의 진영의 고등 비평과 동일하게 비판하며 신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제시한 복음주의자의 범주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이안 머레이의 입장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듯. (09.03.10 01:55)



이주일:
네. 용주형. 안 그래도 형 팀블로그였던 것 같은데, 형의 글을 읽고서 이안 머레이의 입장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현재까지는 머레이에 동의하는 입장인데, "근본주의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어요.

1. 유신론적 진화론 : 아시겠지만, 쉐퍼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 복음주의 내에 포괄될 수 있는 창세기 해석 방법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저도 쉐퍼와 비슷한 입장에 서 있구요. 머레이의 입장은 잘 몰랐는데, 형을 통해 듣게 됐군요.

2. 에큐메니컬 운동 : 이안 머레이의 역사적 분석이 옳다면, 저는 머레이의 입장에 동의가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로이드 존스를 새롭게 보게 되었는데, 로이드 존스를 과연 "근본주의"라는 말로 낙인찍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3. 성경의 무오성 : 예수대학 강사모임 때도 이 이야기를 백목사님과 나눴는데, (저는 맥그래스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서 질문했고, 백목사님은 오히려 맥그래스를 방어해 주시긴 했지만) 성경의 전적무오성에 대해 맥그래스가 부정하고 있는 것 만은 사실이지 않나 싶습니다. 존 스토트, 알리스터 캑그래스, F.F. 브루스, 마크 놀은 저도 매우 좋아하는 저자이고 지금도 그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무오성 만큼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지점들만으로 과거에 낙인된 "근본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인가.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 의해)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과연 그렇게 "보는 것"이 정당한가? 에 대해 의문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어서, 용주형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 시간이 되시면 이야기해 주세요. <복음주의의 기본진리>는 ivf 시절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형 이야기를 듣고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펼쳐봐야 겠네요. (09.03.10 15:32)



김용주:
유신론적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 연구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와 성경 비평을 고등비평과 동일하게 보는 입장, 그리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비판이 근본주의적인 입장으로 알고 있음.
결국 이안 머레이의 오래된 복음주의적 입장이 그러하다는 의미임.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을 듯.
무오성 관련해서 나는 버나드램의 <성경해석학>에서 제시된 입장을 따르는 편이나 항상 열려 있음.^^
에큐메니컬 관련해서는 신복음주의자로 구별되는 저자들과 헨리 나우웬, N.T라이트나 레슬리 뉴비긴
같은 저자들의 발굴이 오히려 복음주의를 풍성하게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
로이드존스를 근본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게 아니라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안 머레이의 편협한 구획 설정이 그의 색깔을 근본주의적으로 만드는 것 같음.
풀러 신학교나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미국 IVP에서 출판되는 많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저서들
을 다 '변절'로 치부하면 나도 자유주의자나 급진적 복음주의, 좌파 복음주의로 분류될 듯...ㅜㅜ (09.03.10 17:16)



이주일:
그렇군요. 용주형의 친절한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대한 저의 입장을 간략히 말해보자면요.

1. 이안 머레이의 주장에 대해서는 <분열된 복음주의>를 통해 사실상 처음 접했기 때문에 이안 머레이의 현대 과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형을 통해 알게 되었구요. 유신론적 진화론이 복음주의 틀로부터 완전히 배제시켜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 머레이의 입장이라면, 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만, 복음주의 틀 안에 두면서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라면 저의 입장과 같다고 보이네요. (명확한 확인이 필요할듯~)

2. 에큐메니컬에 대해 저는 최종적으로 입장을 정리하진 않은 상태지만, 기본적으로 로이드 존스, 프란시스 쉐퍼, 데이비드 웰스, 이안 머레이의 입장에 따르는 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이란 기본적으로 성경적 정신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만, 신복음주의가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교리적 공통분모를 '최소화'시킨 것 또는 교리적 중심을 주변화시킨 것이 현대 복음주의를 '구복음주의'와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지적에 공감을 하는데요. 물론 항상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신복음주의의 학문적/지적 장점들을 저도 인정하는 편입니다. 문제는 교리적 중심에 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3. 자유주의자, 급진적 복음주의, 좌파 복음주의 이런 말들에 대해서 저도 일정부분 그런 용어들로 분류를 하지만, 이런 분류들이 과연 명료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은 회의적입니다. 각자 이런 말들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내고 싶어하는 의미가 서로들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교리적 태도에 대해서라면 형의 분류에 따르면, 저 또한 근본주의자로 분류되거나 불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프란시스 쉐퍼 또한 "근본주의의 사도"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라면 저는 근본주의자라는 '오명'을 기꺼이 뒤집어 써야하지 않을까 싶구요. (09.03.10 17:53)댓글




이주일:
학문적 태도나 대화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만약 근본주의자를 편협한 반지성주의자, 분열주의자(반연합주의자)로 지칭한다면 저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라는 낙인을 사용하는 것이 잘 정의된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비평과 관련해서는 머레이의 입장이 모든 성경 비평을 거부하는 입장이라는 것인지, 다시 말해 고등 비평과 하등 비평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머레이는 양자 모두 거부한다는 것인지--확인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개혁주의적 입장에 따르자면 하등 비평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아는데요--궁금하네요
예를 들면, 저는 성경을 기본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지만,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머레이는 하등비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문자주의자'인가요?

** 다른 것을 떠나 <분열된 복음주의>의 핵심 쟁점은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추진된 에큐메니컬 운동의 동참에 있는 것 같은데요. 머레이의 다른 견해들은 제외해 놓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키엘 대회와 그 이후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에서 명확한 교리적 입장(예를 들면, 패커가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성공회 39개조 등에 대한 믿음)이 유보되거나 폐기되었다는 것에 대해(p.192~ 참조)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구복음주의와는 교리적 태도에서 상당히 달라진 것이 분명하고, 이는 분명히 비판받을 만한 지점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09.03.10 17:53)



김용주:
오호.. 내공이 장난이 아니구나. 멋진데? 정통 개혁주의자의 준비된 답들이 술술 나오는구나.
난 교회의 연합 문제를 교리의 잣대로 척척 잘라내는 행위가 다분히 폭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쉐퍼도 <그리스도인의 표지>에서 자신의 스승이 메이천 교수의 분리에 대해 이해는 하면서도
그것이 바른 결정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던 걸로 기억한다.
개혁주의의 교리 전통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복음주의자로 한평생을
헌신한 제임스 패커 같은 대가에게 '실패'라는 오명을 그렇게 쉽게 던져주는 머레이의 태도에서
나는 실망이 되었던 게 사실이야.
제임스 패커가 스스로에 대해 후회했다는 그의 자료들을 보면서는 나도 좀더 파고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드는구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는 다분히 문제가 있었던 것을 나도 알고 있고
연합된 교회 중에는 교리적으로 비판이 필요한 이들이 있었음 또한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존 스토트의 고백대로 자신이 교리적 잣대로 비판했던 많은 이단스런 교회들이 실제로는
더 보수적인 교회들도 있었고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핵심 교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일치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에 나는 크게 감동했었지.
따지고 보면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신부고 라이트나 존 스토트는 성공회 신부이지만
우리는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달면 끌어들였다가 교리라는 칼로 다시 그들을 단죄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 존 스토트의 평생 살면서 씨름한 지옥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멸절론적인 사적 신앙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주변에서도 망령이 들었느니 미쳤느니...하며
쉽게 떠들어 대는 IVF 선배들을 보며 그들이 공산당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었다.
이안 머레이의 글에서 나는 그런 류의 냉정함과 비판의 날을 보아서 그런지 좀 심기가
안 좋았지. 어찌보면 스스로는 거장들에 대한 배려를 했다고 생각할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의 신앙과 나의 신앙이 항상 조율이 가능하고 날과 날이 만나면 더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우리의 지성도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더 타오를 것을 기대하며... 쩝... (09.03.10 18:21)댓글수정삭제



이주일:
용주형에게 칭찬을 받다니 기쁘네요. 그리고 용주형의 자세한 대답들을 들을 수 있어서 참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어쩌면 제가 현대 복음주의의 느슨한 교리적 태도들을 지금 굉장히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제 자신이 (아마도 ivf를 통해 길러진 태도라고 보이지만) 신복음주의자의 대열에 오랫동안(거의 20대 말까지) 서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ivfer, 기독학생연합회 대표, 뉴스앤조이.복음과상황 간사 이런 닉네임만으로도 이 점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제임스 패커를 저는 지금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저작들을 관심있게 참고하는 편이구요. 머레이의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패커가 실패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작업이 실패했다기 보다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구복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는 점이라고 저는 이해했는데요. 이런 점에서 스토트나 패커가 비판받을 점이 있다는 것. 저도 스토트를 제의 신앙의 영적 아버지로 여길만큼 존경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비판받을 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형이 말씀하신 내용에도 상당히 공감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자" "정통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협소한 잣대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은채/읽지도 않은채) 마구 잘라내는 것에 대해 저 또한 조심스럽고 비판적입니다. 정서적으로 불편하기도 하구요. 프란시스 쉐퍼의 태도처럼,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고, 심지어 무신론자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여야 하며, 특히 정통 개혁주의자의 태도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09.03.10 18:36)



이주일:
한 가지, 프란시스 쉐퍼의 후회는 진리를 말하면서 '사랑의 태도로' 말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쉐퍼는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랑이 없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 그의 후반기에 특히 많이 돌아보며 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쉐퍼가 진리 없는 사랑, 또는 진리 없는 연합을 추구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쉐퍼는 끝까지 '진리'의 문제를 타협한 70~80년대 복음주의를 이런 이유로 "위기"라고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근거는 이안 머레이에 따르면, 쉐퍼는 키엘 대회와 그 선상의 연합 논의들에 대해 "경고"하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고, 또 하나 쉐퍼 자신의 책에서 "로잔 언약"의 성경관 부분에 대해 "애매하게 기술되었다"라고 강경하게 비판하고 있으니까요. (09.03.10 18:46)


쉐퍼와 스토트 (김용주)
회사에서 대충대충 썼더니 내공이 딸려서리... 주일이가 쉐퍼에 대해서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10여년 만에 집에서 쉐퍼 전집을 끄적여본 결과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니라 <주목하는 교회 앞에 선 교호>에 언급이 되어 있더구나. 쉐퍼는 메이첸 교수의 성직 박탈과 관련하여 장로교교파연합회의 해체를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교단을 나온 사람들은 그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그 연합회를 해체시켜 버리고 바로 그 순간까지 그들과 함께 이 전장에서 싸워왔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형제들과의 모든 교제를 대체로 끊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결단으로인해 40년 동안이나 고통을 겪어 왔다."

여기서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주일이 말대로 쉐퍼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다는 점이야. 그가 후회하는 것은 연합회를 탈퇴함으로서 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게된 많은 교단에 속한 참된 형제들과의 교제를 끊은 점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도 다른 교파에 속한 이들과 특정 사항에서 차이를 보임에 있어서도 그들과 교제와 연합이 가능함을 암시하는 듯 하다. 쉐퍼는 마지막 부분에서 "성경을 믿는 장로교인인 나는 다른 전통들로부터 온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교파적 차이들을 지닌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가서 그들과 악수하며 마치 내가 영원전부터 그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과 얘기한다. 우리가 교리의 특정한 사항들에 이르면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고 언급하지. 물론 '성경을 믿는'이라는 수식어로 경계선을 그으면서.

쉐퍼가 가시적인 교회를 바라보면서 가졌던 태도가 그랬던 것 같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는 교리가 희석되는 일들이 생기는 것에 반대했지만 연합에 있어서 분리주의적인 태도가 나머지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있지만 성경을 믿는 참된 성도들에게는 그로 인해 오랜 시간 상처를 주었고 그들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되는 것을 방관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랑으로 말하는 것 뿐 아니라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도 분리주의적인 태도가 야기하는 남은 경건한 자들에 대한 배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지. 또한 다른 교단에 속한 각론적 차이를 보이는 참된 형제들 사이에도 사랑으로 연합과 교제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 같다.

(추가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쉐퍼의 사상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많아서 지금에와서 쉐퍼의 사상을 파는 것에는 회의적이지만, 쉐퍼만큼 당대의 회의론적인 이들, 특히 지적으로 방황했던 청년들을 라브리를 통해 사랑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두고 함께 씨름했던 사실에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어. 그에게 현대 사상과 신학은 자기만족이나 지적 유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려는 복음전도의 다리 놓기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적 고민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나갔다는 점이 그를, 그가 불리기 바랬던 대로 20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로 칭하게 만든 것 같다.)

물론 나는 쉐퍼보다 더 나아가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서 우리가 이단시해온 가톨릭이나 진보진영의 교단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보수 신학을 고수하거나 복음주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온 이들이 발굴되었다는 점에 고무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고. 아마 여기에서 주일이와 내가 갈라지는 부분인 것 같구나.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토론할 계기가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나는 존 스토트의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말년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며 했던 말이 나를 흔들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쓰려고 하는 글에서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사상계(가톨릭, 자유주의, 복음주의)가 항상 상호 배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님을 잊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차이점과 더불어 합일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지지하는 것과 절대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종교개혁의 많은 진리들을 여전히 확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주의의 모든 핵심 진리가 복음주의만의 독특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방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헐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중략)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비록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적인 방침과 종종 원칙없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교회 연합 운동에서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확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분별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주일    
형의 친절하고 세심한 답변에 참 감동이 됩니다^^ 형과 이렇게 깊이 대화를 해 본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 같아서 늘 아쉬웠는데, 형의 답변을 읽으면서 형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 저도 답글을 달아볼께요^^ (09.03.12 04:23)



용주형의 답변에 대한 저의 답변/ 이주일
먼저 언급할 것은 여러 가지 바쁘신 중에 있을거라 추정되는데, 시간을 내서 꼼꼼하게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려고 노력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전 형과 함께 교회를 섬길 때 좋은 교제의 기회들이 있었음에도 아쉽게도 정작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했었던 것이 제게 남아 있는 하나의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도리어 한 교회를 섬기지 않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렇게 형의 친절한 답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형이 꼼꼼하게 검토하고 인용문까지 직접 글로 옮겨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도 형이 옮겨주신 부분들을 참고해서 다시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좀 더 형의 답변을 전체적으로 여러 번 읽어보면서 형의 생각을 예전보다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선 참고로 형이 갖고 있는 쉐퍼 번역서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발간된 책인 것 같은데요. 저는 ‘생명의말씀사’에서 번역된 책을 갖고 있어서 약간 제목이 달라 잠시 혼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언급하신 <주목하는 교회 앞에 선 교호>는 <The Church Before The Watching World>를 가리키는 것 같네요. ‘생명의말씀사’에서는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형이 맨 처음 인용해 주신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 교단을 나온 사람들은 그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그 연합회를 해체시켜 버리고 바로 그 순간까지 그들과 함께 이 전장에서 싸워왔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형제들과의 모든 교제를 대체로 끊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결단으로인해 40년 동안이나 고통을 겪어 왔다."(저의 책으로는 전집 234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근거로 형은 “쉐퍼는 메이첸 교수의 성직 박탈과 관련하여 장로교교파연합회의 해체를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라며 “쉐퍼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지만, “그가 후회하는 것은 연합회를 탈퇴함으로서 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게된 많은 교단에 속한 참된 형제들과의 교제를 끊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다른 교파에 속한 이들과 특정 사항에서 차이를 보임에 있어서도 그들과 교제와 연합이 가능함을 암시하는 듯 하다”고 해석을 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형이 더욱 진전시키면서 “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는 교리가 희석되는 일들이 생기는 것에 반대했지만 연합에 있어서 분리주의적인 태도가 나머지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있지만 성경을 믿는 참된 성도들에게는 그로 인해 오랜 시간 상처를 주었고 그들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되는 것을 방관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여기까지 형의 해석을 따르자면, 형이 보실 때 프란시스 쉐퍼는 메이첸이 기존 교단을 떠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나중에 후회하였으며, 에큐메니컬 운동이 교리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속했어야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으로 제게 이해가 됩니다(적어도 이 책을 쓰던 시점인 1971년에는 말이죠). 물론 형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바른 신학”을 에큐메니컬 내부에 확산시킴으로 갈수록 자유주의화되는 기존 교단들을 조금이라도 지켜내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조금 더 명확하게 해야만 저의 입장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첫째, 프란시스 쉐퍼가 부수적인 특정 교리에 대한 차이를 갖고 있는 ‘교단간 연합’에 대해 긍정적이었다는 것에 대해 저는 동의합니다. 형이 글의 중간에 인용하셨던 것처럼, (저의 책에는 236쪽에 있는 내용인데) 형이 인용해 주신 부분 바로 앞에는 (저의 책에 따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실질적인 간격은 장로교인과 기타 사람, 또는 루터교인과 기타 사람, 또는 영국 국교회와 기타 사람, 또는 침례교인과 기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간격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자복하고 따라서 언어로 표현된 명제적 의사소통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간격이다.”(형도 이 부분을 언급하셨었죠.)

즉,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쉐퍼의 다른 표현에 의하면,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인다면) 형이 인용하신대로 “ 성경을 믿는 장로교인인 나는 다른 전통들로부터 온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교파적 차이들을 지닌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가서 그들과 악수하며 마치 내가 영원전부터 그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과 얘기한다. 우리가 교리의 특정한 사항들에 이르면 우리는 서로 다르다.”(형의 인용문)라 고 쉐퍼는 말합니다. 이 말에 바로 이어서 쉐퍼는 “비록 장로교인은 아닐지라도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나는 친근감이 가지만, 장로교인이라 하면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친근감이 없어지는 것이 나의 솔직한 체험이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쉐퍼는 성경의 무오성을 중심으로 핵심적인 교리에 동의한다면, 교단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부수적인 교리들의 차이는 연합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둘째, 프란시스 쉐퍼는 에큐메니컬 운동에는 분명하게 반대한 것으로 제겐 보입니다. 또한, 메이첸 박사가 기존 교단을 떠나기로 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같은 책의 좀 더 앞부분(저의 책은 209쪽)을 보면, 간음과 배교를 다루는 2장에서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이 연합에 있어서 반대하는 ‘자유주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진보주의 신학”(the progressive theology)에 관해서도 좋은 말을 사용하여 우리의 태도와 진술을 꾸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은 진보주의 신학이 아니라 퇴보주의 신학이며 고전적 로마 카톨릭 용어로 말하면 인본주의이다.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자유주의라 부른다.”

2쪽을 넘기면(211쪽) 쉐퍼는 “자유주의 신학만큼 타락해 온 음녀도 없다”고 말하면서, 같은 책 1장(저의 책으로 176쪽)에서 언급했던 “구자유주의는 기독교적 견해에서 볼 때 하나의 이단이다”라는 결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여기서 볼 때, 우선 당시 로마 가톨릭과의 연합 운동은 분명히 반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쉐퍼는 교단 탈퇴 문제와 관련해서 같은 책 3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데요. (저의 책 217쪽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표지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①가견적 교회의 순결을 실천하는 원리(즉, 성경관과 명확한 교리적 태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 ②그리스도인 안에 사랑과 하나됨을 다루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두 가지를 가견적 교회에서-즉 현실 교회에서-동시에 모두 이룰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219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즉 육체 안에서는 우리가 사랑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할 수 있을 뿐, 육체 안에서는 그 양자를 모두 자발적으로 강조할 수는 없더라는 것이 그 결론이었다.”

물론 성령님을 순간순간 의지하면서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이렇게 전제해 놓고 쉐퍼는, (저의 책 220쪽에서) 자신이 속했던 미국 장로교가 “확실히 모든 목사가 다 자유주의적으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교단으로서 장로교단이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통제하에 명백하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의 책 221쪽에서) “1936년 자유주의자들은 너무도 득세하여 그레샴 메이첸 박사를 성직 박탈시키고 그를 종교활동의 일선에서 제거했다.”고 언급합니다. (저의 책 228쪽에서) “그러나 1930년대에 구자유주의는 메이첸 박사를 추방했다. 이유는 그가 성경과 복음에 대해 취하는 명백한 태도 때문이었다.” 즉 그레샴 메이첸 박사가 교단에서 나오게 된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성직 박탈 때문이지 메이첸 박사의 분리주의적 성향이나 결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메이첸 박사가 당시 근본주의 세력과 필요에 따라 연대를 했던 건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근본주의의 분리주의적이고 전투적이며 지엽적인 특정 교리를 지나치게 고집하는 태도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근본주의와 선을 그을 수 밖에 없었다고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이안 머레이는 이야기합니다. 38쪽과 39쪽에서,

“메이첸과 그의 동료들은 근본주의(의) 몇 가지 문제 때문에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로 불리기 꺼려했다. …… 이들의 정책은 현대 사조와 싸움에 너무 집착했고, 기존 교단과 싸움에만 너무 신경쓰는 경향도 있었다. 대다수의 근본주의자들은 분리주의적인 경향이 너무 강해서, ‘따로 살림을 차리는 주의’(come-out-ism)에 열중했다. …… 이들은 이제 곧 실현될 예언을 강조하면서 현대 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사회는 곧 망하게 될 것임으로,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이 기독교인의 유일한 사명처럼 취급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메이첸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꺼려했지만, …… 1937년에는 또 한 번의 교단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메이첸이 따르던 구 장로교 신학(Old-School Presbyterianism)과 근본주의 문화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었다.” (저는 이와 같은 의미의 ‘근본주의’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쉐퍼는 교회/교단/연합체의 분리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책 222쪽에서)

“지금 여기서 의미하고자 하는 사실은 이런 것이다. 가령 우리가 인간적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후에도 그들이 여전히 계속 자유주의를 주장한다면 교회 내의 자유주의자들은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의 책 230쪽에서)

“…… 교리적 순결을 위한 투쟁이 패했을 때 우리는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실천하기 위해 취해야 할 제2의 방법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이 관계해 오던 저 가견적 기구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떠난다 할지라도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한다. 교회를 떠난다고 해서 북치고 깃발 날리며 떠날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볼 때, 쉐퍼는 최대한 연합을 지켜야 하지만,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중요한 교리적 핵심이 침해당하게 될 지경에 이른다면, 최종적으로 분리를 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바른 교리 안에서의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쉐퍼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저의 책 231쪽과 232쪽에서 쉐퍼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모든 사람이 ‘동시에’ 기존 교단에서 떠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아 있게 된다는 거죠. (여기에는 각자의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위험한 것은 먼저 떠난 사람들은 쉐퍼의 표현에 따르면 “완고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조그마한 교리 문제에 대해서까지 절대주의자들이 되려고” 합니다. “절대적인 것을 믿는 것과 만사에 절대주의적 정신을 가지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쉐퍼는 꼬집어 얘기합니다. 또한, 머물러 있는 사람의 경우 “교회적 포용주의에서 타협적 종합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 관해 말을 하면서도 점점 진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교리적 종합주의를 받아들이기 쉬울 뿐 아니라 특히 성경에 대한 분명한 견해도 무시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고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프란시스 쉐퍼는 연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그것은 중요 교리를 양보해서는 안되며, 성경의 중요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합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교단 내부에 자유주의자가 생기면 최대한 노력을 한 뒤에는 ‘징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대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사랑’의 태도를 가견적으로 보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를 말하되 사랑으로 말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먼저 뛰쳐나온 사람들과 남아있던 사람들 사이에 교제를 끊어버렸던 먼저 뛰쳐나온 사람들의 “완고한 태도”에 대해 중대한 ‘실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저의 책 233쪽). 메이첸의 기존 교단에의 분리는 메이첸의 뜻이 아닌 당시 교단을 지배하던 자유주의자들의 추방 때문이었구요(적어도 쉐퍼의 글에 따르면).

따라서 형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의 책 234쪽에 따르면) 쉐퍼는 먼저 뛰쳐나온 사람들이 기존 교단(연합체)에 아직 남아있던 참된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를 단절했던 실수로 인해 미국 교회는 “더 한층 자유주의적으로 되고 말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남아 있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쉐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그리스도인의 순결(교리적 태도)에 대해 입장을 함께 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에는 바로 이와 거의 같은 입장에서 이안 머레이는 로이드 존스와 스토트-패커의 대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머레이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와 같습니다. 34쪽에서

“1950년대까지 복음 사역을 이끌던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하여 아주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각자 속한 교단에서는 소수자로서 이 문제와 전면적으로 싸울 입장이 아니었다. 대신 자신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다양한 모임과 조직을 통해 모여서 협력했고, 적어도 그곳에서는 다른 신앙 사조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런데 1967년 제1회 전국 성공회 복음주의 대회였던 키엘 대회에서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같은 교단 내부의 자유주의자들과 “연합”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69쪽에서,

“결국 1967년 4월 키엘에서 열린 전국성공회 복음주의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 NEAC 1)에서는 이전 태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따라서 키엘 대회의 개회사는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판, 대속적 죽음 같은 교리도 믿지 않았”(67-68쪽)던 마이클 램지 대주교가 맡아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 정신에 입각해서 청중에게 ‘경험’이 ‘신학’보다 우선하다는 점을 주지시켰고, 복음주의자들도 성공회 안에서 정말 제 몫을 누리기 원한다면, 과거의 배타성은 버려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가 반대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키엘 대회가 열리기 6개월 전에 앞서 열렸던 1966년 10월의 ‘전국 복음주의 대회(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과 기성 교단 내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복음주의의 독특한 신앙을 훼손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생각”(73쪽)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존 스토트는 “(1954년 이래로 복음주의자들이 전국적으로 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상황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발전에 새로운 기회가 왔을 뿐 아니라, ‘동시에’ 기존 교단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73쪽)습니다.

이안 머레이에 따르면, “로이드 존스도 교단의 차이는 진리의 근본적인 문제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논점은 복음주의가 원래 자리를 지키려면, 무엇보다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연합부터 추구해야 정상이라”(75쪽)는 것입니다. 또한, “자주 잘못 인용되는 ‘순수한 개혁주의 교단을 만들자.’라는 식도 아니었”(75쪽)습니다. 76쪽에서 보면, 로이드 존스는 언론들이 기사화했던 것과 달리 교단을 떠나서 순수한 복음주의 교단을 만들자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76쪽)습니다.

결국 이안 머레이의 분석의 결론은 172쪽에서 “이제 성공회 가톨릭파 신학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경적 복음의 또다른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173쪽에서 자유주의자들을 “원칙적으로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동료로 대하고, 이들과 거리를 두려는 노력을 (60년대 이전처럼) 따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안 머레이가 볼 때, 에큐메니컬 운동은 반대해야할 연합 운동이었는데, 그 이유는 가톨릭파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수용한 결과 패커가 인정하는 것처럼, 영국 성공회 (구)복음주의자들의 핵심 교리였던 성공회 39개조 신조가 포기되었습니다.

많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저의 입장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하여 프란시스 쉐퍼, 로이드 존스, 이안 머레이와 입장을 함께하는 이유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성경관과 중심 교리를 믿는 교단간 연합’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관과 중심 교리를 부인하는 가톨릭과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관과 중심 교리가 분명히 다름에도 ‘연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저는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지엽적인 교리가 다른 ‘교단간 연합’에 대해서 저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스토트와 패커가 중심 교리를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키엘 대회에서 가톨릭과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면 복음주의자의 교단 내부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순진한 상황 판단’이었다는 쉐퍼-로이드 존스-머레이의 지적에 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른 점에서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를 저는 무척 좋아하고 깊이 존경하며 그들로부터 저는 배웁니다.

형이 마지막에 언급하신 존 스토트의 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비록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적인 방침과 종종 원칙없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교회 연합 운동에서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확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분별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내용에 따르면, 자유주의자-가톨릭과 연합하되 복음주의적 진리를 개별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스토트는 여전히 생각이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에 앞서 스토트는 형의 인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방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헐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저는 ‘참된 의미’(성경관과 중심 교리를 공통분모로 하는)에서 복음주의자들 간의 연합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찬성합니다. 교단 간 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톨릭 세력과의 연합(에큐메니컬 운동)에는 반대합니다. 이것이 쉐퍼-로이드 존스-머레이의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용주:
나는 쉐퍼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뎅.
분리된 것도 메이첸이 교단을 나온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 장로교연합회마저 해체하여 남아있던 교단의 형제들과의 관계를 끊은게 문제였던 것 같다. 쉐퍼도 그렇게 말했고 나도 그렇게 인용했고.
그래서 나는 쉐퍼보다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고 말한거고. (09.03.12 07:59)



이주일:
네 그렇다면 제가 형의 글을 일부분 오독했던 것 같네요 ^^ 쉐퍼의 주장에 대한 이해에는 차이점이 없군요^^ 에큐메니컬 운동이나 연합 운동의 원칙에 대한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 (09.03.12 08:04)


**이글은 주일이가 운영하는 <개혁주의 싸이클럽>에서 퍼왔습니다.
2009/03/14 20:42 2009/03/1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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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정신분석에서는 내담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침묵을 하면
침묵 직전의 이야기에 그 사람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합니다.

둘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침묵이 흐를 때 가장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침묵의 불안을 견디는 인내지수가 제일 낮은 사람입니다.
침묵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일종의 심리적 능력입니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침묵이 없는 이야기는 무의미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적 휴지기(休止期)를 견디지 못하는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적절한 휴지기를 삶이 정체된 것으로 착각해
침묵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필요하게 신발끈을 조이다 보면 괜한 에너지 소모가
많을 수밖에요.

침묵 직전의 이야기에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듯이
심리적 휴지기 뒤에는 반드시 삶의 고갱이가 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2009/03/13 22:47 2009/03/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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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음악

처음 홍대에서 뜨고 있다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UCC를 봤을 때,
그저 웃긴 친구라는 생각을 했다.
예사롭지 않아보이긴 했지만 워낙 백댄서하며 퍼포먼스가 코믹 컨셉처럼 여겨져서
그다지 잘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곧 RSS뉴스에 장기하라는 이름이 간간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얼마 전에는
그가 녹음한 붕가붕가 레코드에서 정식 1집 앨범이 발매된다는 사실을 알고
한 번 들어볼까 싶어 음반을 주문했다.
발매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알라딘 자간 음반 판매 순위 1위.

난 처음 음반을 들을 때는 조용한 곳에서 헤드폰으로 듣는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인 경우에는 주변 잡음이 없는 것이 최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들었다. 기가 막히다.
한 마디로 총평하자면 사견이지만 퀸 이후로 이렇게 창의적인 밴드는 처음이다.

유쾌하면서도 세련되고 운동권 노래 같다가도 '얼터너티브'스럽다.
어떤 곡은 송창식스럽기도 하고 키보이스의 "해변으로가요"가 연상되는 대목도 있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스캣? 추임새 류의 가사들도 곡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준다. 게다가 가사는 미시적이면서도 사고하게 만든다.

장기하와 얼굴들. 난 그의 열렬한 팬이 될 것이다.

 

*별일 없이 산다 - 장기하와 얼굴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
왜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다리 쭉뻗고 잠들진 못할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건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거다
이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좋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알았냐?

2009/03/13 20:38 2009/03/1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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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지난 번 포스팅에 이어 이번 주말에도 요리 삼매경에 빠진 성하 아빠...
이번에는 크림 소스 스파게티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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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맛있다고 했으나 빈말인지 사실인지 확인할 길 없음.
나는 맛있었음. (뭔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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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다시 난이도가 올라감. 메인 메뉴는 불고기. 나름 어려운 메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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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지난번에 했던 돼지갈비 김치찌게. 콩나물로 시원하게 끓이는 것이 관건임.
돼지갈비 김치찌게는 외할머니에게 전수받은 음식이라 할 때마다 외할머니 생각이 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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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산모의 필수 음식인 미역국. 매일 기본적으로 한 솥이 준비되어 있다.
오늘도 요리 삼매경에 빠진 아빠의 밤은 짧고나.

2009/03/08 23:21 2009/03/08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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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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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조규찬 공연을 갔다.
아내가 회사일로 바쁜 중에 육아를 돕느라 수고한다고 하루 휴가를 준 셈.^^ 함께 육아로 뺑이치고 있는 상국이 형에게 연락하여 함께 토요일 저녁 대학로로 휴가를 떠났다. 상국이형과는 95년도에 처음 조규찬공연을 대학로 소극장에서 같이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리더-멤버의 관계라 지금처럼 친하지는 않았고 14년 동안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리라 생각도 못했었다. 생각해보면 형과의 관계는 정말 흥미롭다.

95년 전에 무얼 먹을지 몰라 대학로 골목을 2-3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에는 분식집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때 무슨 얘길 했던 것 같은데 이젠 기억이 잘 안나네. 아무튼. 2집 공연을 시작으로 3집 공연, 박학기 듀엣 공연 등 몇 차례가 우리는 같이 공연을 보았고 4년 전에는 결혼한 아내들과도 조규찬을 들었다.

어찌보면 조규찬은 좋아하는 가수이기도 했지만 나의 청년 시절의 발자욱 구석구석에 흔적이 남아 있는 추억거리다. 그도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고 이제는 마흔이 가까워온다. 공연은 그의 음악 인생을 편한하게 풀어낸 것 같았다. 그가 좋아했던 영화들, 음악들이 같은 세대인 나에게도 그러했다. 그는 공연 중간에 간간이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곤 했는데 그의 나이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이 있었다.

'고려장'
그는 지금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려장에 비유했다. 아직 건강한 아버지를 등에 지고 산으로 데려가는 힘쎈 아들로 인해 급하게 자신의 자리를 다음 세대로 넘겨주고 사라져야 하는. 벌써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심사위원으로 교수로 강의나 하도록 밀어내고 있는 주변의 분위기를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의 중년은 우리 아버지 세대보다 더 빨리 세상에서 떠밀려 나가는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엔지니어인 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10대부터 뜨고 20대 후반이면 퇴물취급받는 연예계에서 가수라는 직업의 그가 느끼는 '밀려남'의 강도는 더욱 가파를 것이다.

따뜻했던 그의 공연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또한 차분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은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이 나를 움직였다. 내 몸의 변화만큼이나 내 머리와 감성들도 변해가는 걸까. 아니면 똑같이 느끼는 나를 세상이 먼저 다르게 바라보는 걸까. 그 순서가 어찌됐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혹은 아니어야 하는 것 같다.
2009/03/08 20:34 2009/03/0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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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요즘 아내가 육아에 바빠서 주말에는 내가 음식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음식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느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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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베이스로 용주표 멸치볶음.
간장이나 소금을 넣지 않아도 간이 맞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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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 요리는 버섯야채볶음. 아내의 요청으로 당근 첨가.
(개인적으로 당근을 싫어해서 웬만한 요리에 당근은 거의 안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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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지만 맛있는 웰빙 버섯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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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보너스 시금치나물. 이제 나물도 쉽게 만들어내는 성하 아빠!
아... 요리 삼매경에 빠졌고나.

(사진: Nikon D70s)

2009/03/01 23:18 2009/03/0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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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매해 목표를 잡을 때 주로 책을 몇 권 읽겠다, 글을 몇 편 쓰겠다는 결심을 주로 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말과 글보다는 실천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올해부터는 작게나마 목표를 잡을 때 다른 것보다 실천에 무게를 더 두기로 했다.


1. 스타벅스 커피 끊기
   : 개인적으로 스타벅스 커피에 중독이 된 지 오래다. 스타벅스 커피는 특유의 향과 맛이 있다.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 이는 유통망이 길기 때문에 커피의 로스팅을 오래하는 편인데 그로 인한 짙은 맛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작년부터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되었다가 최근 CEO인 하워드 슐츠가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을 후원하고 있고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독한 마음으로 禁별다방 하기로 마음 먹었다.

2. 대형할인마트 안 가기
   : 안 가기는 사실 힘들다. 올 해는 되도록 공산품은 동네 가게에서, 육류는 집 앞 2등급 한우 정육점에서 사고 채소류와 기타 생선같은 장보기는 농협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3. 일대일 어린이 결연
   : 오래전부터 하려고 했던 일인데 올해 아이가 태어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일대일 어린이 결연은 후원을 필요로 하는 한 아이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원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제 막 방글라데시의 한 아이와 결연을 맺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아이들과 결연을 맺고 싶다.

4. 녹색평론 후원
   : 이것도 계속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일이었는데. 올해에는 정기구독하던 잡지들을 정리하고 녹색평론을 후원하기로 결심했다.(주로 기독잡지가 많다. ㅡㅡ;;;) 원래는 정기구독을 할 계획이었으나 녹색평론 사이트를 방문하고 보니 후원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비록 적은 금액으로 시작하지만 녹색평론 같은 좋은 잡지가 200호, 300호, 1000호가 나올 수 있다면 더 많은 지원을 할 계획이다.

5. 공정 무역 거래 상품 구입 및 후원
   : 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이익을 볼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은 덤핑(헐값 판매)의 압박을 받고 있는 제3세계 생산자들이다. 그들의 노동시간과 근로조건, 아동 학대, 성차별, 생산지 황폐화 등등의 현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나라도 대형 마트 및 유통업체의 횡포로 생산자에게 합당한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커피와 초콜릿 등을 시작으로 더 많은 상품들을 찾아서 구입하고 후원할 계획이다.


후기.
개인적으로 구제와 봉사의 가장 저급한 행동이 후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저급한 후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시간을 할애하고 몸으로 나누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점점더 내 시간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할 것 같다. 지금처럼 회사에 모든 시간을 던져주는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야 한다. 한 10년 후에는 더 많은 실천의 목표들이 실현되길 기대하며.
2009/02/13 22:45 2009/02/13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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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정보들/유용한 자료
저는 요즘 공정 무역에 관한 조사를 좀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먹거리들도 공정 무역 단체들을 통하여 구입할 계획입니다
품질 좋고 생산자에게도 공정한 댓가가 돌아가는 곳을 잘 선별해서
다음에 또 포스팅 한 번 하렵니다.^^
아래는 공정 무역 관련 정보들입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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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이란?

공정 무역은 무역 거래의 공동 협력으로써, 투명성과 존중 그리고 대화에 기초를 두며, 국제 무역에서 공정성을 더 확대하는 것을 추구 한다. 경쟁에서 뒤쳐진 (특히 남반구 지역의) 생산자들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더 나은 무역 조건들을 제공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는 데 기여한다. 공정무역 기구들은 (소비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전통적인 국제 무역의 법규와 관습으로부터 변화을 만들어 내기 위한 운동과, 의식적 자각을 일으키고, 생산자들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공정무역의 기본적 원칙
공정무역 옹호자들은 일반적으로 무역 관계에서 다음의 원칙과 관례를 지지한다:[6]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생산자들을 위한 기회의 창출
    공정무역은 빈곤의 완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전략이다. 그 목적은 전통적인 무역 관행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생산자들을 위한 기회를 창출한다.

투명성과 책임성
    공정 무역은 투명한 관리를 필요로 하고, 상거래 관계가 무역거래 상대방을 존중하며 공정하게 거래하도록 한다.

생산 능력 배양
    공정 무역은 생산자들의 독립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공정 무역 관계는 생산자들과 그들의 마케팅 기구들이 , 새로운 시장에 대한 접근권과 그들의 관리 기술을 향상시키는 동안에 연속성을 유지한다.

공정한 가격의 지불
    그 지역 또는 현지 사정에서 맞는 공정한 가격은 대화와 참여을 통해 합의된 것이다. 그것은 생산 원가 뿐만아니라 생산이 사회적으로도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건전하게 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까지 망라한다. 생산자에게 공정한 급료를 제공하며, 여성이든 남성이든 똑같은 노동에 똑같은 급료를 지불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공정무역의 거래자들은 가능한 한 생산자들이 수확전 또는 생산전에 자금조달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의 거래자에게 즉시 지불하는 것을 책임진다.

양성 평등
    공정 무역은 모든 남성과 여성의 노동에 있어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고, 보상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어느 사람이든 생산 과정에 대한 그들의 기여만큼 항상 임금이 지불되어야 하고, 그들의 조직이나 성에 관계없이 자격이 주어진다.

노동 조건
    공정 무역은 생산자를 위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 환경을 의미한다. 아이들의 참여(만일 있다면)는 아이들의 복지와 안전, 교육적 요구 조건과 활동에 대한 필요가 해롭게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고, UN 아동인권선언 뿐만 아니라 현지 사정에 입각한 제도와 관습을 따라야 한다.

환경 보호
    공정 무역은 더 나은 환경 관행과 책임성있는 생산 방법의 사용을 촉진한다.



관련 사이트들

한국공정무역연합
http://www.fairtradekorea.net

공정무역가게 울림
http://www.fairtradekorea.com

여성환경연대 희망무역
http://ecofairtrade.or.kr

두레생협연합
http://www.dure.coop

두레 쇼핑몰
http://www.dure.coop/shop

한국YMCA연합회 피스커피
http://www.peacecoffee.co.kr

아름다운 가게: 아름다운 커피
http://www.beautifulcoffee.com

(출처: 위키피디아)
2009/02/06 20:33 2009/02/0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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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삐뽀삐뽀 119 소아과 - 2005년 대한의사협회 선정추천도서 
하정훈 (지은이) | 그린비

많은 엄마들이 아기를 잘 키우고 싶다는 바람으로 육아와 아기 질병에 관한 여러 비법들(?)을 서로 전수해 주곤한다. 하지만 정말 아기를 '잘 키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제대로 먹이고, 몸과 마음이 다 같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아플 때 아기의 병이 심해지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 바로 아기를 잘 키우는 방법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주장한다. 제대로 먹이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는 것은 많은 엄마들이 비교적 잘 해낸다. 그러나 아기가 병에 들었을 때는 어찌해야 좋을 지 몰라 당황하거나, 무조건 병원을 찾지만은 않는지? 그러나 병은 병원에서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엄마와 아빠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면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쉽게 나을 수 있고 또 사전예방도 가능하다. 이 책의 목적은 아기가 병에 걸렸을 때 엄마가 잘 몰라서 혹은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아기의 병이 심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감기, 피부병, 소화불량, 설사 등등 아이들이 쉽게 걸리는 질병을 중심으로 다양한 증상과 대처법을 엄마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부딪히는 실질적인 고민들에 대해 소아과 전문의인 저자의 속시원한 대답이 잔뜩 들어있다.


임신 출산 육아 백과 -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 만드는
중앙M&B 편집부 (엮은이) | 랜덤하우스코리아

한방과 양방의 최신 의학 정보를 함께 담은 종합 가이드북. 계획임신부터 출산일까지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주단위로 구성된 총 40주 임신프로그램과 건강하게 몸매 회복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6주 산후 프로그램, 신생아부터 첫돌까지 육아 12개월 프로그램 등 총 3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자신이 해당하는 시기에 맞는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좀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베스트 궁금점을 찾아보면 된다. 주마다, 달마다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정리해놓아 체크리스트의 역할도 한다.



지후맘의 베이비바이블 육아소아 대백과 
지후맘 (지은이) | 김영사

'지후맘의 임산부 모여라'(http://cafe.naver.com/imsanbu)는 회원수 30만을 자랑하는 네이버 랭킹 1위 카페로 임산부와 초보엄마들의 커뮤니티이다. 본 책자는 카페에 올라온 육아, 소아에 대한 궁금증과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베테랑엄마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전문가 선생님들의 원고와 책임감수의 글을 더하여 만들어졌다. 아이를 키우는 데 표준과 정답은 없다. 아이들의 성향이 다르고, 자라는 환경이 다르며, 키우는 엄마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만 왜 그럴까? 하는 고민과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카페에 올라와 있는 다양한 엄마들의 경험을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고 또 바르고 현명하게 키우는 비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의 살아있는 육아일기가 바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아이를 키우는 비법이다. 아이를 키우며 부딪치는 난관 앞에서 쩔쩔맬 때 여러 엄마들이 보내온 조언과 충고! 엄마가 딸에게 대물림하는 육아소아 비책!


베이비 위스퍼 골드 - 행복한 엄마들의 아기 존중 육아법, 총정리 실전편
멜린다 블로우, 트레이시 호그 (지은이), 노혜숙 (옮긴이), 김수연 (감수) | 세종서적

'베이비 위스퍼러'(아기 달래주는 사람)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전문 유모가 20년 간 5,000명 이상의 아기 보육 경험에서 터득해온 비법을 소개한 책. 저자의 고객 중에는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 제이미 리 커티스, 폭스TV 사장 데이나 월든 등 할리우드 유명인사가 많았다. 그만큼 그녀의 아기 돌보기가 믿음직했다는 얘기다. <베이비 위스퍼>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기도한 이 책은 신생아부터 4세까지 유아 발달단계 전부를 한 권으로 정리했다. 아기를 존중하는 저자의 육아원칙과 함께 월령/연령별로 자세한 육아법을 수록하고, 상황별로 많은 사례를 들어 실전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자장가 CD와 '베이비 위스퍼 육아수첩'을 부록으로 제공한다. 저자의 E.A.S.Y 원칙에 의거해 매일매일을 시간대별로 기록할 수 있게 한 육아 일기장으로 앞머리에는 베이비 위스퍼 전권의 내용을 정리한 핵심 요약이 실려 있다. 수첩 하나만으로도 독자들은 아기의 발달 흐름을 한 눈에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 가방에 쏙! 야무진 육아 24개월 - 아기 돌보기부터 엄마 산후관리까지 꼼꼼 완벽 가이드
(주)K.K판타지 (지은이) | 프리미엄북스

육아에 바쁜 엄마들에게 500~600페이지에 이르는 육아 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워낙 양이 많다 보니, 궁금한 것이 있어도 한 번에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같은 단점을 보완해 <엄마 가방에 쏙! 야무진 육아 24개월>은 생후 0개월부터 24개월까지, 꼭 알아야 할 육아 정보를 모아 개월별로 정리하여, 읽기 쉽고 찾기 쉽게 구성했다. 아기의 성장발달 과정, 건강검진 일정과 예방접종 정보, 모유수유와 이유식 만들기 등 기본적인 육아 정보를 꼼꼼하게 담았다. 또한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로 키우는 놀이법과 대화법, 알쏭달쏭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Q&A, 질병 및 사고 대처법 등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 가득하다. 이 외에도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육아정책 관련 정보 등도 담아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귀여운 캐릭터, 간결한 일러스트가 엄마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사진 대신 귀여운 캐릭터와 간결하고 단순한 일러스트를 사용하여 특히,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이 지하철이나 은행, 병원 등 공공장소에서도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수연의 아기발달클리닉 - 집에서 하는 아기발달검사 
김수연 (지은이) | 빈센트

필자는 이스라엘의 영유아발달 전문 연구소에서 연구 및 임상경험을 쌓은 다음 귀국하여 국내 최초로 인하대병원에서 '아기발달클리닉'을 개설하고, 0-3세 영유아의 성장발달진단 및 부모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때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1998년에 '김수연의 아기발달클리닉'을 저술했다. 1999년에는 '김수연아기발달연구소'를 독자적으로 개원하고 임상경험을 더욱 쌓아나갔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기존 책자를 수정 보완하고 “집에서 하는 아기발달검사”와 “아기발달클리닉” 상담사례를 추가하여 개정판을 냈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아기의 성장 평가와 발달 검사는 신세대 아기 부모가 공부해야 할 새로운 주제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부모 역할의 출발은 내 아기의 발달 특성을 이해하고 그 특성을 존중하며 키워야 한다고 한다. 아기마다 발달 특성이 다르며 부모가 감당하기 힘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도 있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도 있다. 이런 아기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말 못하는 아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부모 또한 같이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출처: 출판사 제공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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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육아를 시작하면서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좋은 책들을 추천도 많이 받고 선물도 받았는데 육아에 관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좋은 책들이 많았다.
[삐뽀삐뽀 119 소아과]는 상국이 형이 알려줬고, [임신 출산 육아 백과]는 종임이가 명희에게 준 책.(둘은 부부다.^^) [지후맘의...]은 아내가 가입한 30만명 가입의 최대규모 임신출산육아 카페의 주인장이 낸 책으로 인터넷에서 구입. [베이비 위스퍼]는 i-nomad님이 회사 우편을 통해 선물해준 책. 나머지 두 권은 인터넷 서평을 읽고 구입. 모두 추천할 만 하다.

2009/01/27 23:17 2009/01/27 2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