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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 이재철 목사, 이단 되어 돌아오다

몇 달 전 지인으로부터 이재철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교단과 관련된 문제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솔직히 그냥 흘려들었다. 그렇잖아도 개인적으로 바쁜 요즘에, 교단 문제는 교단에서 행정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면 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흘렀을까, 얼마 전 이재철 목사가 속해 있던 예장통합 서울서노회가 기소위원회에 이재철 목사를 '이단적 행위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책 <성숙자반>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은 자를 위해 기도조차 해줄 수 없다면 그것이 과연 복음인가. 그런 상황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따뜻하게 기도해 주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라고 한 구절이 이단적인 주장이라는 것이었다.

"차광호 목사 외 8인은 이재철 목사가 교단 헌법 제1편 제3장 6조와 제10장 4조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제3장 6조는 '택한 자 외에 누구도 그리스도에게 구속받지 못 한다', 제10장 4조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과 믿는 종교의 율법을 좇아서 근면하게 생활할지라도 다른 아무 방법으로도 구원을 못 얻는다'는 내용이다." (<뉴스앤조이>, "예장통합 서울서노회, 이재철 목사 이단으로 고발")

내 눈을 의심할 만한 기사였다. 이재철 목사가 누구던가. 그는 교계의 주목받는 출판사인 홍성사의 발행인이었으며, 신앙 양서들을 저술한 탁월한 목회자가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이재철 목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2000년에 자신의 모교인 장신대 신학대학원 신앙사경회에서 사흘간(3/29~3/31) 행한 설교 <비전의 사람>을 들으면서부터였다. 당시 사경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을 통해 이재철 목사의 설교 마지막 날 참석한 이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는 후문까지 듣던 터였다. 나도 그 설교를 테이프로 세 번이나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뿐인가. 이재철 목사는 주님의교회를 개척했을 때, 임기 이후에는 사임할 것을 약속했다가 10년 후에 약속대로 교회를 떠남으로써 교계의 본을 보이기도 했었다.

이 재철 목사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많은 내겐 이 상황이 의문투성이로 다가왔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사실 그런 적도 많았다. 교계를 깊이 알아가면 갈수록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조금만 그 사람을 면밀히 살펴보면 실망스러운 분들도 종종 있지 않았던가. 이재철 목사도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머리가 복잡하던 차에 이단 고발에 대해 이재철 목사 측에서 직접 해명을 했다.

"이에 대해 100주년기념교회는 보도자료를 내고 "이재철 목사는 <성숙자반> 291-292쪽에서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시고'를 근거로 '예수 믿지 않고 지옥에 간 사람들도 전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섣불리 속단하거나 확대해석'하는 것은 안 된다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사항이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명명백백하게 밝혔다"며, "서울서노회가 거두절미하고 이재철 목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과 신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전적으로 부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순한 의도의 사실 왜곡이자 음해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경직 목사가 1974년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영결식에서 한 안식을 비는 기도,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가 1979년 불교 신자였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 때 개신교를 대표해 한 기도, 지난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 때 권오성 목사(KNCC 총무)의 기도와 명성교회(김삼환 목사) 성가대의 조가 등을 언급하며, "서울서노회에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경직 목사, 강신명 목사, 그리고 김삼환 총회장이 담임하는 명성교회도 '이단적 행위'를 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뉴스파워>, "서울서노회, 이재철 목사 고발 파문")

물론 이단 시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성숙자반>의 문맥을 따져보더라도 "예수 믿지 않고 지옥에 간 사람들도 전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섣불리 속단하거나 확대해석하면 안 된다"고 설명하면서, 구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점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그의 논지를 애써 무시하려는 서울서노회 측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서울서노회가 고발한 <성숙자반>이라는 책은 내가 알기로 초판 발행일이 2006년 3월로, 3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그간에는 노회에서 이 책에 관심이 없었다가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셈이다. 노회는 왜 갑자기 이재철 목사의 책이 신학적으로 이단인지 아닌지가 궁금해졌을까. 내 상식선에서는 이단 문제로 고발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이유로 인해 뒤늦게 이재철 목사의 책에서 논란거리를 찾아내려고 한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 



이단 혐의 이전부터 이재철 목사를 기소한 서울서노회

실제로 이재철 목사를 고발했다는 기소위원회는 이미 이단 시비 이전부터 이재철 목사를 기소했다. 처음 서울서노회가 기소위원회에 이재철 목사를 기소한 건 '장로 권사 호칭제'를 문제 삼아서였다.

" 예장통합이 애초에 문제 삼았던 것은 100주년기념교회가 하는 '장로 권사 호칭제'다. 100주년기념교회는 교회 등록 후 일정 기간이 지난 어른들을 장로와 권사로 호칭하기로 정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한독선연 소속이므로 자체적으로 운영위원회에서 정한 정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예장통합은 담임목사가 예장통합 소속임을 강조하며, 교단 헌법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노회 허락을 받아 교인 투표로 선출해야 하는 장로'를 호칭제로 만들어, 장로와 권사로 불리기 원하는 타 교회 교인을 유인해 수평 이동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서울서노회는 '장로 권사 호칭제'를 문제 삼아 이 목사를 기소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목사, "양화진 지키기 위해 교단 탈퇴"")

이단 문제로 기소되기 이전에도 교단 헌법을 어기는 행위를 저지르다니, 이재철 목사가 문제가 많은 모양이다.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니 교회는 독립 교단 소속이라 예장통합 교단 헌법을 따를 필요는 없으나, 이재철 목사가 예장통합 소속이라 투표로 뽑지 않는 장로, 권사 호칭제도에 대해 서울서노회가 기소를 했고, 이러한 호칭제로 인하여 이재철 목사와 100주년기념교회가 장로, 권사가 되고 싶은 교인들의 수평 이동을 조장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서울서노회의 노회장인 차광호 목사는 이재철 목사가 장로, 권사 호칭제로 장로와 권사를 '쓰레기 모으듯 긁어모은다'고 말했을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양화진 연구원으로 있는 지강유철 선임 연구원이 해명을 한 바 있다.

"100주년기념교회의 장로, 권사 호칭제는 이재철 목사님이 독단적으로 시행한 것이 아닙니다. 2006년 4월 4일에 열렸던 (재)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제22회 정기이사회에서, 그러니까 통합 측 이사인 이종윤 목사님과 김삼환 목사님을 대리한 김상학 목사님께서 참석했던 바로 그 이사회에서, 100주년기념교회는 교회의 창립 경과, 교회 운영과 교인 호칭, 즉 장로, 권사 호칭제에 관한 것을 모두 상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 …… 2007년 3월 22일에 있었던 제23회 정기이사회는 …… 100주년기념교회 창립 등에 관한 전권위원회의 처리 결과를 보고한 그대로 가결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백보 양보하여, 예장통합 교단의 주장처럼 100주년기념교회의 장로, 권사 호칭제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면 왜 통합 측 이사 목사님들은 2006년과 2007년의 이사회 때 문제를 삼을 수 있었는데도 침묵하셨는지요. 때문에 저는 2009년에 와서야 예장통합 총회나 6개 노회가 갑자기 100주년기념교회의 장로, 권사 호칭제를 문제 삼는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뉴스앤조이>, "예장통합 서울서노회장 차광호 목사님께 드리는 공개편지")

그렇다. 기사를 검색하면 할수록 나도 그 '저의'가 궁금해진다. 게다가 기사에 의하면 서울서노회 측은 6월 26일 이미 교단을 탈퇴한 이재철 목사를 기소하고 7월 16일에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100주년기념교회가 독립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재철 목사가 예장통합 목사이기 때문에 장로, 권사 호칭 문제로 기소하려 했다면 교단을 탈퇴하는 것으로 사태가 매듭지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탈퇴라는 극약 처방까지 결심한 목사를 놓아주지 않고 2차에 거쳐 거듭 출석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결국 교단 문제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서울서노회 측은 뭔가 논리가 다소 안 맞더라도 급하게 이재철 목사를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의구심마저 들게 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간 기사를 검색하면서 이미 기소 이전부터 그 의문들이 풀리고 있었는데, 최근 기소위원장인 장찬호 목사와 서울서노회 노회장 차광호 목사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 이유를 해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양화진 문제였다.

"장찬호 목사는 "기소 중에 탈퇴하면 면직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에서 손을 뗄 때까지 면직할 수 없다"고 했다. 장 목사는 "모든 문제가 양화진에서 시작했다. 이 목사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양화진에서 떠날 것을 용단해야 한다"고 했다. 차 목사는 "이 목사가 양화진에 대해 꿍꿍이가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다루기에는 '준비 미흡'")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

정 리하자면 서울서노회에서 이재철 목사를 기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양화진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단 혐의가 됐든 장로, 권사 호칭제가 됐든 간에, 그 본질적인 문제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문제로 환원되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단 혐의뿐 아니라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재철 목사가 항복을 선언하고 양화진을 떠날 때까지 교단에서는 제삼, 제사의 기소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차광호 목사의 지적대로 이재철 목사는 양화진에 대한 무슨 꿍꿍이가 있으며, 그는 이재철 목사를 왜 양화진에서 떠날 것을 주장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5월 예장통합에서 양화진묘원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아래와 같은 발표한 바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총회장 김삼환)가 성명서를 통해 양화진묘원을 100주년기념교회(이재철 목사)에게 '전권 위임'한 것은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이사장 정진경) 기본 정신에 어긋난 처사라고 주장했다. 예장통합은 5월 6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유니온교회가 25년간 사용한 예배 장소 양화진묘원을 상실케 하고, 선교사 후손들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소란이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는 것은 한국교회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표명했다. 또한 유니온교회가 25년 동안 양화진묘원의 관리를 소홀히 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니온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20개 교단 및 26개 기독기관의 공교회적 연합인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책임이며 곧 한국교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예장통합은 "한국교회의 발전과 묘원을 둘러싼 갈등의 근본 해결을 위해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개편되고 보완할 것"을 촉구했다." (<뉴스앤조이>, "통합, '양화진묘원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장통합의 주장대로라면 양화진묘원의 전권을 100주년기념교회에 위임한 것은 기본 정신에 어긋난 처사이며, 유니온교회가 그간 사용한 예배 장소를 상실케 하고, 선교사 후손들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등 문제가 많아 이를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개편, 보완할 것을 촉구한 것이며, 이러한 요구는 비교적 정당해 보인다. 예장통합의 주장에 대해 100주년기념교회에서도 기자회견을 하여 해명한 내용이 있지만, 이에 앞서 양화진에서 벌어진 갈등을 처음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선교사묘지공원'은 한국교회가 성지로 내세우는 곳으로,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해 헐버트와 헤론을 비롯해 16개 나라 206기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안장돼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자랑스럽게 성지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한동안은 관리가 매우 허술했다.

<뉴스앤조이>의 이승규 기자에 의하면, 100주년기념교회가 들어오기 전 양화진은 그야말로 '종(관리는 하지 않고)은 없고 주인(권리만 내세우는)만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선교사의 후손들이 속해 있는 유니온교회가 관리를 해왔으나 금전적인 이유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서, 그 사이 선교사가 아닌 이들의 묘들도 다수 발견되었고 대형 교회들의 기념비들이 들어서거나 묘지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났다. 게다가 기사에 따르면 양화진선교회에서 임의로 안내를 해주고 안내비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양화진선교회'(대표 신호철 장로)가 이곳을 실질적으로 이용했다. 양화진선교회는 지난 2002년 설립됐다. 신호철 장로가 만들었고, 양화진을 찾는 이들에게 안내를 해주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가이드'다. 또 양화진과 관련된 책도 여러 권 펴낼 정도로 이곳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다. 그러나 문제는 양화진선교회가 양화진 묘지를 이용만 하고 있지, 관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묘지의 관리는 원칙적으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와 유니온교회가 맡아서 해야 하지만, 이곳을 이용한 신 장로에게도 최소한의 관리를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양화진선교회를 통해 양화진을 찾은 사람은 3만 명이 넘는다. 신호철 장로는 2006년 5월이 되면 5만 명이 넘을 예정이라고 했다. 이들은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방문 예약을 받고 있고, 이들을 대상으로 안내를 해주고 있다. 안내에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물론 소정의 '안내비'도 받고 있다. 신 장로는 그 돈은 후원회비라면서도 구체적으로 얼마를 받는지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에게 '돈'과 관련된 얘기는 쓰지 말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그 누구도 돌보지 않은 양화진")

결국 양화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서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1980년 20개 교단과 26개 기관 및 단체가 참여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초대 이사장 한경직 목사)를 만들었고, 5년 뒤 '경성구미인묘지회'는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 묘지 소유권을 넘겼다. 소유권을 넘겨받은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2003년부터 시작됐으나, 2005년까지는 다소 지지부진했다가 이재철 목사가 2005년 7월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유니온교회 대신 묘지 관리를 맡기게 된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의욕적으로 묘지 관리에 나서기 시작했고 지난 2년 동안 25억 원을 들여 양화진묘를 한국교회의 성지로 복원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양화진묘 안내도 안내비 없이 행했고 교인들이 묘비를 닦고 청소하는 일에 봉사자로 나섰다. 100주년기념교회는 2006년에 마포구청과 협의하여 홍보관 건립에도 나섰다. 홍보관 건립에 들어가는 예산(30~40억 원 추정)은 모두 100주년기념교회가 부담하고, 운영은 마포구청이 맡는다는 조건이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이 홍보관을 마포구청에 기증하고 19년 정도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뉴스앤조이>, "선교사 묘지공원, "우와~"") 



유니온교회와 100주년기념교회의 갈등

이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한 100주년기념교회의 활동에 힘입어 양화진은 2006년 말부터 2년 7개월간 약 11만 7,000명이 묘지를 방문하여 명실공히 한국교회의 명소가 되었다. 문제는 그간에도 유니온교회와의 갈등이 있어왔고, 결국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예장통합에서도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발단은 예배 처소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00 주년기념교회가 들어오자 교인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선교기념관에서 예배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약 200명. 2007년 9월 기준으로 100주년기념교회는 약 2,000명의 교인이 출석했다. 협소한 장소 문제가 골칫덩어리가 됐다. 어쩔 수 없이 100주년기념교회 쪽은 2007년 5월 유니온교회에 예배 시간을 오후로 옮겨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8월 첫째 주일부터 예배 시간을 오후 4시 30분 이후로 변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전까지 유니온교회는 주일 오전 9시 30분에, 100주년기념교회는 오후 1시 이후에 예배를 했다. 교인이 늘어나니 100주년기념교회 쪽은 선교기념관 전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온교회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편하게 사용해오던 예배 장소를 내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100주년기념교회, "더 이상 당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예배 처소의 문제였지만, 이재철 목사는 100주년기념교회 소식지의 인터뷰 기사에서, 근본적으로 유니온교회가 양화진 관리자로서의 100주년기념교회를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내가 판단하기에도 이 갈등은 결국 100주년기념교회가 위임 받은 관리 주체로서의 소명에 대해 유니온교회는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 보아탱 목사님(유니온교회 담임)은, "100주년선교기념관은 우리가 관리하니까 너는 빠져! 이건 협의회하고 유니언교회 간의 문제지 100주년기념교회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래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 지난번에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묘원과 선교기념관의 관리 주체임을 강병훈 목사님 그리고 김경래 장로님과 함께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냐"고 하니 아니라는 거예요. 그 이후 김경래 장로님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말씀드렸어요. 말로 하지 말고, 100주년기념교회가 새로운 관리 주체임을 협의회가 문서로 정확하게 알려주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협의회가 9월 14일에 유니온교회에 공문을 보내 양화진묘원과 선교기념관의 관리 감독 및 세무와 행정 처리를 공식적으로 100주년기념교회에 위임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저는 그때 위임받은 신분과 우리 교회의 소명을 유니온교회가 수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 월 소식지 <버들꽃나루 사람들>)

기사 에 따르면, 유니온교회는 묘지 관리를 100주년기념교회에 위임하는 조건으로 선교기념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나 100주년기념교회에 지하실을 사무실로 내주는 등 주객이 전도된 행동을 일삼았고, 이에 대해 이재철 목사는 관리 주체를 명확히 하려는 목적으로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 유니온교회는 심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00주년기념교회로부터 쫓겨났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5차례에 걸쳐 100주년기념교회에 소송을 걸었다가 모두 각하 내지는 기각 처리된 바 있다. (양쪽의 이러한 갈등이 언론 등에 보도가 되자, 마포구청은 2007년 8월 21일부로 선교기념관에서 예배를 하지 말라고 양쪽에 통보했고, 지금은 100주년기념교회는 홍보관에서, 유니온교회는 연세대학교 채플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장통합, 왜 양화진에 갑자기 관심을?

그렇다면 왜 양화진을 둘러싼 두 교회의 문제에 예장통합 교단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 나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2007년 12월자 <뉴스앤조이> 기사를 보면 몇 가지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 예장통합은 겉으로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의 후손을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은혜를 잊지 말자는 얘기다. 또 이 문제가 사회 법정에까지 비화되면서, 사회적 인지도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한국교회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장통합으로서는 동역 관계를 맺고 있는 미장로교회(PCUSA)의 요청도 무시할 수 없다. 예장통합은 지난 8월 17일 미장로교회 서기인 클리튼 커크페트릭(Clifton Kirkpatrick) 목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이 편지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예장통합이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문제는 지난 11월 27일 열린 교단장협의회 총회에서도 거론이 됐다. 일단 12월 13일 열리는 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결정됐다. 교단장협 한 관계자는 "100주년기념교회와 유니온교회가 현재 대화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양쪽의 대화로 원만하게 합의가 되길 바라는 게 교단장협의 기본 입장이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양화진 묘지 둘러싼 갈등 '왜' 해결 안 되나")

하지만 양쪽의 대화로 원만하게 합의하기를 바라던 예장통합의 2007년도 입장과는 달리 지금은 양화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기소하려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번복하는 등, 다소 조급하게 그리고 공격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당시에도 기사에 따르면 "뜯어보면 유니온교회의 손을 사실상 들어준 셈"이라는 평가를 내리고는 있으나, 당시에는 이 정도로 극단적으로 이재철 목사를 몰아낼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연 교단이 이토록 격하고 거친 행동을 하도록 만든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예장통합에서는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가 양화진을 떠나게 하기 위해 극약처방까지 일삼으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노회 입장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최소한 100주년기념교회의 그간의 행적 가운데에서 어떤 허물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주로 특정 매체의 기사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그 매체의 편향된 시각으로 인해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나는 교단이 그렇게 조급한 방식으로 강압적인 제재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만일 특정 매체의 편향된 시각이 문제라면 교단에서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기사들에 대해서 적극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해명들은 미흡해 보이며 오히려 최근에는 기자에게 촌지를 건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더욱 오해만을 살 뿐이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다루기에는 '준비 미흡'")

이재철 목사는 어쩌다가 이러한 진흙탕 싸움에 연루되어 이단 혐의까지 받게 되었을까. 혹 지금이라도 그가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교단의 지시대로 교회를 떠나면 되지 않을까. 이단이라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버틸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 이재철 목사는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에 따르면 100주년기념교회는 처음부터 양화진 관리자로서의 소명을 부여 받은 교회로 "100주년기념교회 교인들이 양화진 묘역을 둘러보고, 1년에 몇 번씩 손수 비석을 닦고 잡초를 뽑고 꽃과 잔디를 심는" 봉사를 행해왔고 "돈을 들여 축대를 쌓고 묘역 보호 철책을 두르는" 등 "양화진을 한국교회 공동 유산으로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이 100주년기념교회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이해하고 그 소명을 충실히 행해왔다고 말한다.

그는 개인의 자격으로 양화진 문제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간 한국교회의 성지를 복원하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한 헌신된 100주년기념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불의하고 악의적인 비방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묘역을 통해서 한 일은 사유화했던 것을 막은 것밖에 없다"며 "그동안은 사실이 아닌 주장에 대해 협의회와 100주년기념교회가 인내하면서 참아왔다"며 그간 속내를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장통합은 왜 양화진에서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를 몰아내려고 하는가. 겉으로 내세우는 대의명분처럼 선교사들의 후손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기 위해서인가. 그러기에는 대화로 원만히 해결하기를 바라던 2년 전의 입장과는 사뭇 달라진 현재의 과격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이 그동안 유니온교회가 선교사들의 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들도 선뜻 묘지 관리에 나서지 못하다가 100주년기념교회가 몇 년 사이에 수십 억 원을 들여서 단장하고 수천 명의 봉사자가 가꾸어 이제는 한 달에 거의 4,000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양화진을 찾게 되어서야 갑자기 이재철 목사에게 이단 혐의까지 씌워가며 흠집을 내려는 것이 더 어색하지 않은가 말이다.

임기가 끝나면 주저 없이 교회를 떠나서 교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불과 몇 년 전에는 교단의 학교인 장신대 사경회에서 기립 박수까지 받았던 바로 그 설교자를 돌연 이제는 이단이라고, 장로를 쓰레기 긁어모으듯 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이단이라고 기소했다가 돌연 미흡하다고 이단 항목은 삭제를 하고, 취재기자에게는 촌지를 주는 등 어색하고 부산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왜인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재철 목사의 말대로 그가 한 일이 양화진을 "사유화했던 것을 막은 것밖에 없다"면 혹시 예장통합이 양화진을 사유화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100주년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를 음해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이 두 논리가 양립할 수 없다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셈이 될 것이며, 아마 예장통합 측에서 앞으로 더 공격적으로 양화진 문제를 개입하면 할수록 이러한 양화진의 교단 사유화에 대한 의구심은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양화진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이재철 목사를 항복시키는 일에 더 적극적이겠지만 말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재철 목사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며

나 는 최근에 이재철 목사의 이단 시비와 양화진 문제를 보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 생각이 났다. 임금님의 나체를 보고도 모두 모른 척하고 멋진 옷을 입은 것처럼 대하는 것이, 명약관화한 양화진 문제를 두고서 이재철 목사가 이단이냐 아니냐, 교단 헌법을 어겼냐 아니냐를 따져대는 모습과 닮아 보였다. 누구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가리키며 벌거벗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교계의 님비현상일까.

내 주변의 비교적 진보적이라 불리는 기독인들과 매체에 이야기를 해도 솔직히 그들은 별로 교단 문제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교단 문제는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등, 겉보기보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등 이런 저런 이유를 들며 공식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한 평신도 형제가 인터넷 카페에 교단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자 이를 본 다른 평신도가 글을 쓴 형제가 지역 교회에서 내쳐질까봐 우려하는 모습도 보았다.

내 생각에 교단에 속한, 아니 한국의 교계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교단 문제를 비판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며 놀라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 행렬을 향해 박수만 칠 따름이다. 과연 이재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기립 박수를 쳤던 많은 신학생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자신이 존경해 하던 한 목사가 자신의 소명을 다하다가 자신이 몸담았던 교단을 탈퇴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단 혐의로 기소까지 받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너무 조용하다. 그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비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존경받던 한 목사의 이러한 처지에 대해 모두가 함구하는 건 왜인가.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던 목사를 성도 스스로가 지켜주지 못한다면 교회의 갱신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나는 한국의 평신도와 신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전직 대통령처럼 잃고 나서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고 후회해봐야 소용없다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를 지켜주자고.

2009/09/11 23:54 2009/09/1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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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5)
: 복음주의권의 보수와 진보, 그 소통과 연합을 기대하며 


기독교 세계관 운동: 1990년대
이 제까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 자체에 대한 논의를 주로 했다면 이번 연재에서는 세계관 운동, 특히 국내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변화와 그 원인들을 짚어보고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국내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관련된 논의에 있어서는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실장의 기여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2002년에 GSF에서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시작한 바 있으며 2003년에는 편집위원인 박총과 함께 본격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인 시각을 정리하였고, 같은 해에 기학연과 복상 공동주최로 이루어진 기세포럼에서는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 비판적 성찰"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이론과 실천 영역 모두를 진단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을 손꼽았는데 내용을 잠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당 시 국내의 ‘기세’에 실천적 모델을 결합시킨 상징적 인물로 손봉호 교수를 꼽을 수 있겠다. 목사가 아니지만 교회에서 설교자로 사역했고, 서울대 교수로 가르치는 분야뿐 아니라 기독교수 모임을 통해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복음주의권에 시민운동의 한 사례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공정선거감시운동’을 주창해 그 해 대통령선거와 이후의 선거에 복음주의권 교회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길을 트기도 했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인 시민사회의 도래를 알린 시민운동 단체 <경제정의실천연합>의 창립에도 깊게 관여함으로써 종교운동의 범주를 넘어서 시민사회와 결합하는 모델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희송, 2003년 기독교세계관 포럼,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 비판적 성찰")

1987년 창립된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복음주의권은 기윤실의 약진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윤실’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요 실천적 활동으로 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겠으나 지면 관계상 주로 기윤실만을 다루기로 한다.) 또한 <복음과상황>의 창간과 더불어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민운동과 문서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공정선거감시운동’과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그 활동이 각인될 만큼 어느 정도 사회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기윤실은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양희송은 발제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이유로 기윤실이 입지가 줄어들었음을 논증했다.

“<기윤실>이 ‘문화소비자 운동’을 통해 초창기부터 꾸준히 펼쳐온 ‘스포츠신문 음란성 고발 캠페인’은 상당히 호응을 받고 있었으나, 이와 더불어 진행해온 대중문화 공연이나 음반, 영화 등에 대한 캠페인은 적잖은 반발을 수반했다.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 반대(1995), 싸이, 박지윤, 박진영 등의 음반 방송금지 혹은 불매운동, 영화 ‘거짓말’, ‘죽어도 좋아’ 등의 장면 삭제 혹은 상영제한 캠페인 등은 다른 문화운동 단체들과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기윤실> 문화정책을 한국 사회 보수집단의 전형적 문화취향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교회개혁 문제에 있어서 <기윤실>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교회개혁 실천연대>가 <기윤실>에서 분리해 나간 것에서도 드러나듯 ‘목회 세습 문제’ 등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미온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현실인식의 긴박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윤실>은 그 활동 전반이 갖고 있는 건강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협소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관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이제 기독교권 내에서도 기독교적 실천 모델의 다양화가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이다... 이런 시민운동 자체가 곧 ‘기세’적 실천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대표 모델들이 선도성을 잃어가는 현상은 ‘기독교적 실천’의 부름에 단일대오로 나서는 일이 점차 더 어려워짐을 보여준다.” (양희송, 같은 글)

양희송은 기윤실로 대변되는 1990년대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문화운동에서의 보수적 취향, 교회 개혁 문제에 있어서의 미온적 입장으로 인해 입지가 줄어들었고, 기독교 세계관 자체가 개혁주의로 경도되는 현상과 정치판에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원칙론 이상의 발언을 하지 않은 것들을 위축의 주요 이유로 설명했다. 그의 지적대로 “원론에 값하는 각론이 나올 때가 되었으나, 이 지점에서 ‘기세’ 논의는 계속 지체”되었고, 90년대 후반에는 정권교체로 인해 정치적 긴박감의 해소되어 “‘기세’ 논의도 상당부분 문화분석이나 문화관 논의의 형태를 띄고 진행”되었다. 결국 문화변혁운동으로 변화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영적 비평’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보수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전까지는 정치적으로 동질감을 가졌던 국내 진보적인 비기독인들의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렇듯 90년대 기윤실로 대변되었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초반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크게 위축되었고 기독교 세계관 내부적으로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00년대

90 년대의 정체 현상과 내부 비판에 기인하여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2000년에 들어서면서 운동의 주체 세력이 두 갈래로 분열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는데, 주로 그간 통용된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젊은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들과 이를 고수하려는 기성 개혁주의 전통의 교계 분위기 사이의 대립 양상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의 이론적인 내용은 그간 연재를 통해 정리하였다.) 이러한 대립 양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구 세력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2003년에 있었던 기독교세계관 포럼에서 김기현과 양희송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 성찰을 발제의 주 내용으로 담았고 이승구와 최태연은 다소 열린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주된 입장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옹호와 비판적인 입장에 대한 반론들을 내세웠다. 최태연은 정정훈, 양희송, 이원석, 김기현의 글들을 꼼꼼히 읽고 그에 대한 긍정과 비판을 다루면서 마지막에는 열린 경주를 제안했지만 이승구는 발제문에서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에 근거하여 살아 나가는 일”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은 없어지거나 치워져서도 안 되고, 수정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나는 가장 성경이 철저한 방식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사는 일이 더 철저하고 폭 넓게 나타나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요구들과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

포럼에도 참석하고 당시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기에 당시 분위기는, 개혁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목회자, 신학자들에게 있어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비판적인 논의’가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고 건방지며 다소 성급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어떤 교수는 이러한 논의가 학회나 전문 집단에서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가혹하게 당사자의 글에 대해 평가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저 젊은 세대의 ‘반란’ 정도 치부하기도 했다. 내 생각에 신구 갈등 혹은 진보-보수 갈등처럼 번진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기성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적 보수성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 연재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가 결국 신학적인 문제로 환원되는데 대다수의 기성 개혁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혁주의 전통의 구획 안으로 규정지었으며 이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용어 자체가 개혁주의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분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 요소들을 명제적으로 제시한 것 자체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간주했으며 이렇게 제시된 기독교 세계관은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의 ‘행동 지침’에 가까웠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개혁주의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왜”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에 국한된 영역 문제만 축소하여 고민했고, 주로 그 핵심적인 명제들을 쉽게 설명하거나 세상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잣대로 제시하거나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론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에 집중해왔다.

 

문제는 그 신학 근본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인데 대부분 젊은 기독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좌파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성경의 무오성 내지는 무류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으며 에큐메니컬 진영의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등 빈번하게 기독교 세계관의 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개혁주의의 보수적인 신학 입지를 흔드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보수 교단에 속한 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은 이를 불편하게 느꼈음이 분명하다. 초창기에 기독교 세계관을 국내에 소개한 대표적인 이들이 이 젊은 기독인들의 주장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심증을 더 굳히게 만든다. 이러한 분위기는 내가 알기로는 몇 년간 지속되었으며 기독교 세계관의 두 진영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듯 했다. 그러다가 양희송이 코스타 대회와 청어람 아카데미를 통해 개혁주의자로 대변되는 교수 그룹과 여러 차례 세미나를 통해 교류와 화해(?)를 시도했고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내러티브의 강조 및 기독교 세계관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 등과 같은 문제에 있어 조금씩 어느 정도의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허나 내 생각에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합의점이 여전히 미진해 보이는데 그 부분에 대한 몇몇 원인들을 좀더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진보적 복음주의, 혹은 좌파 복음주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분열되었다고 지적을 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분열되었다기보다는 복음주의권 자체가 분열된 듯한 느낌이다. 90년대 학번인 나는 학생 시절에 기독 운동 자체에는 어떤 연합 전선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다. 기윤실이 됐든, 복음과상황이 됐든, 혹은 학복협이 됐든 간에 복음주의권에서의 정치, 문화, 신앙에 있어서의 어떤 광범위한 합의점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광범위한 합의점들은 신구 갈등, 신앙적 진보-보수 갈등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나는 듯 했는데 내가 처음으로 복음주의권에서 내가 구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목창균 서울신학대학교 총장의 책인 <현대 복음주의>를 통해서였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복음주의 신앙의 전통적 경계선을 넘어 자유주의 신학 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진보적 복음주의의 특성은 개방성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비복음주의 신학자들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신학의 자원을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 경험에까지 확대하는 것, 목석처럼 융통성 없는 성경 접근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내재성과 관계성을 강조하는 개방적 신론, 자신의 영역 수용과 보편적 구원에 대한 열망, 예수의 인간성 강조 등이다. 신학적 다원주의에 대한 더욱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성경 내 다양성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공개적 토의, 진화 개념을 수용하는 우주 기원에 대한 설명, 불신자의 구원의 가능성, 영원한 지옥 형벌 교리를 대체하는 절멸 개념에 대한 개방, 복음주의 교리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즘 등이다. 진보적 복음주의자의 수는 복음주의 공동체 전체로 보면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그 영향력이 점증하고 있으며 복음주의 신학계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 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저술을 주로 출판하는 곳으로는 Inter-Varsity Press를 들 수 있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활발한 지적 활동은 통해 현대 복음주의의 최대 취약점인 반지성적 경향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경계선을 훨씬 넘우 자유주의 신학 쪽으로 이동함으로써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또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같은 뿌리였던 보수적 복음주의보다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에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목창균, “현대 복음주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변에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다수는 진보적 혹은 좌파 복음주의자에 속한다. 그들의 특징은-목창균 총장이 지적한 대로-이전에는 보수적 개혁주의 내부에서 볼 수 없었던 신학적 ‘개방성’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한 사안들에 대해 하나의 그룹으로 묶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보편적 구원에 대한 열망, 에큐메니컬에 대한 입장, 진화론의 수용 등의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라 하더라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류될 것이 분명하다. (나또한 이 책의 분류대로라면 진보적, 혹은 좌파 복음주의자이겠지만 진보 계열 안에서는 다소 보수적인 위치로 비춰질 것이다.) 문제는 이전과는 다르게 기존 전통적 신학 입장과는 차별화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기독인들이 복음주의의 진보 진영에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머징 교회 운동과 기독교 세계관

최 근에는 교계에서 ‘이머징 교회’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머징 교회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 간에 다소 겹치는 영역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머징 교회의 개방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음주의권의 기독인이 진보 진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D. A. 카슨은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에서 이머징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운동에 속한 많은 사람은 ‘새로 떠오르는’이라는 말이나 ‘신흥의’라는 말을 그들의 운동을 규정하는 형용사로 사용한다. 수십 권의 책들이 이 ‘새로 떠오르는 교회’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어느 웹사이트는 방문자들에게 ‘새로운 친교’를 나눌 것을 권하는데 이 말은 결국 이 운동 내에서의 친교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운동의 핵심에는 문화의 변화는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예고한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새로 떠오르는 교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D. A. 카슨,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있어 이머징 교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들의 특징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들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내에서 ‘이머징 교회’라는 특정 집단을 구분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카슨의 다소 광범위한 구분에 따른다면 이교회 운동의 특징을 기성 교회에 대한 저항,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적인 신조주의, 명제주의에 대한 비판, 초교파적인 교회 운동, 포스트모더니즘적 인식론 수용, 교회 예식과 교리보다는 공동체를 더욱 강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교회 운동은 기성 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일삼고 있는데 카슨은 이 책에서 이머징 교회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이머징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겸손한 태도로 모더니즘적인 신조주의의 참모습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고 우리의 조상들이 은혜에 힘입어 복음에 충실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가장 나쁜 본보기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고 그런 사례를 조롱하는 듯 하다... 이머징 운동을 옹호하는 저자들이 보기에는 모더니즘은 나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좋거나 영광스런 기회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려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어느 쪽에도 완전히 동조하지 말아야 하며 그 두 실체를 전적으로 부정해서도 안 된다. 이머징 교회 운동은 조금 더 공평해져서 모더니즘의 내적인 장점을 명확히 밝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할 때 비로소 성숙한 경지로 만개할 것이다.” (D. A. 카슨, “이머징 교회 바로 알기”)

카 슨은 이외에도 여러 문제들을 다루었지만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이머징 교회가 균형성을 유지할 것을 경고했는데, 그는 “우리의 유한성이 지닌 함의 우리가 배우고 아는 과정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 모더니즘에 대한 유용한 비판 등을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을 간직”하면서도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의 보존, 즉 “객관적 진리가 들어갈 자리”를 남겨 놓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 연재에서도 다루었듯이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 문제와 신학적인 개방성의 문제는 결국 현대 기독인들에게 큰 숙제로 다가오고 있으며 복음주의권 내의 기독인들 사이에서도 진보-보수를 나누게 만드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들의 개방성이 모더니즘적인 토대의 신조주의나 신학적 보수성을 고수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로 비판적, 적대적이며 때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는 데에 있다.


복음주의권의 보수와 진보, 그 소통과 연합을 기대하며
내 가 요즘 느끼는 주된 우려감은 복음주의권 내의 진보-보수 간의 미묘한 갈등과 분열이다. 물론 교계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도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하는 진보, 보수의 구분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을 것이며 실제로도 복음주의권 내부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다양해졌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입장에 따라 진보진영도 세분화되거나 중도우파와 좌파로 분류될 수 있으며 복음주의권에서 <복음과상황>의 이사로 있던 김진홍 목사가 뉴라이트 운동의 핵심인사로 분류되면서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보수의 길을 걷는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북미의 경우에는 찰스 콜슨이나 오스 기니스가 같은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라크 파병 문제로 정치적 보수성을 드러내었고, 그에 따라 좌파 계열로 분류되는 짐 월리스나 아나뱁티스트 신학자인 하워드 존 요더의 사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기도 했다.

 

신학적으로 구분해 본다면, 개혁주의 내부에 모든 기독인들을 보수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복음주의권은 다수를 개혁주의자로 등치시켜도 무방할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사실 다양한 부류로 기독인들이 나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진화론에 대한 성경적 입장으로 복음주의권이 나뉘는데 특히 프란시스 쉐퍼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낸시 피어시가 자신의 책 ‘완전한 진리’를 통해 진화론을 전면 비판하고 지적 설계운동을 긍정하면서 이를 유일한 기독교 세계관으로 제시하여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이 뜨거운 상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경우에는 진화론에 대한 열린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우종학이 최근 자신의 책에서 진화론에 대한 열린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진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유신론적 진화론을 소개한 바 있는 장대익 교수가 얼마전 출간한 <종교전쟁>을 통해 종교에 적대적인 리차드 도킨스를 잠정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더욱더 진화론을 긍정하는 기독인에 대한 우려감을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진화론에 대한 입장 차이는 서로에 대한 대화보다는 평행선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으며 이는 비단 진화론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 나는 자주 진보 진영 기독인들이 보수적인 기성 교단의 목회자, 신학자를 ‘꼴통 보수’ 취급하는 경우를 본다. 반대 입장에서는 진보적인 기독인들의 개방적 입장에 대해 전혀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그들을 마치 자유주의로 경도된 부류로 치부하고 그들의 신앙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나는 요사이 기독인들이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명목으로, 무례하고 독한 말과 글들을 일삼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나의 우려는 이런 것이다. 갈수록 기독교 세계관의 수혜를 입은 공동 전선의 기독인들이 나뉘어서 서로 특정 사안을 놓고 비판하고 스스로를 구분시키는 일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은 지금 이들을 아우르고 있는 테마고 또한 서로를 비판하고 구분 짓고 분열을 일으키는 뜨거운 감자이며 지금까지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회자되고 있는 이슈인 셈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지루한 그리고 갈수록 점점 논의가 어려워져서 이제는 신앙인들에게 멀어져 가는 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된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분열의 사안들을 짚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더욱더 적극적으로 소통하여 종국에는 연합의 방향성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다름을 이야기할 때에도 사랑과 온유함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희생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것이다. 연재를 함에 있어서 글의 방향성을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것으로 잡았으나 중간중간 내 의견들이 많이 드러난 것 같다. 전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설명만을 고수할 수는 없었음을 인정하며 혹자의 지적대로 비전문가 입장에서 다소 무리를 두는 논지도 있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끝)




**이 글은 <복음과상황> 9월호 원고입니다.

2009/09/01 23:46 2009/09/0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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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9일, 3선개헌반대 시국대강연회 연설 (효창구장)

▶ 미친 황소는 도살장으로
지난 6월 28일자 조간신문을 보니까 경기도 안성(安成)에서 황소 한 마리가 미쳐 가지고, 주인 내외를 마구 뿔로 받아서 중상을 입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황소를 때려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나섰지만 잡지 못해서 마침내 지서 순경이 와가지고 '칼빈' 총을 다섯 방이나 쏘아서 기어이 때려잡았습니다. 나는 이 신문을 보고 "과연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웃음) 왜? 대한민국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한 공화당이 지금 미쳐 가지고 국민 주권을 때려잡을 3선 개헌 음모를 하니까, 미물 짐승인 황소까지 같이 미쳐서 주인한테 달려든 것이다 이것이에요. ("옳소!",환성·박수)

내가 오늘 여기 와서 "반공을 하고 국방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겠느냐?" 하는 것을 내가 여기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야당이 강연대회를 해야 돼! 왜? 서울시에서는 40만에 달하는 예비군을 오는 22일부터 소집하기로 했다가 신민당이 연설을 한다니까 어제 저녁부터 부랴부랴 서둘렀다 말이야. 여러분! 서울시가 아무리 그렇게 예비군을 소집하고 경찰관이 나와서 삐라를 뿌리고 해도 하느님은 우리 편이요 보시오. (환성·박수) 지금까지 오던 비가 오늘 오후 2시 정각부터 딱 그쳤어! (박수·환성)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데모'가 지난 방학 전에 전국에서 퍼졌습니다. '데모'를 제일 치열하게 한 데가 어데냐? 서울이 아닙니다. 경상도, 정권의 본고장인 경상도에서 제일 '데모'를 치열하게 했어! 그것도 朴正熙씨가 나온 경상북도라 그 말이여! 대구서는 대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가 총동원 됐어!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면 그 대학교의 총장을 할 것이라는 소문의 영남대학교 학생들의 '데모'구호가 재미있다 그 말이여! 무엇이라 했느냐? "미친 황소의 갈 길은 도살장뿐이다." 그랬다 그 말이여! (박수·환성)

내 오늘 여기서 450만 서울 시민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마디 얘기 좀 해야겠어. 박정희 씨여! 당신은 지금 입으로 점잖게 무어라고 하지만, 당신 내심으로는 헌법 고쳐 가지고 71년 이후에도 영원히 해먹겠다는 시커먼 배짱 가지고 있는 것 사실 아니오?

3선 개헌은 무엇이냐?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 독재국가로 이 나라의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여! 3선 독재가 통과되는 날, 3선 개헌이 통과되는 날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는 조문은 장사 지내는 날이다. 이 말이여!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좌익독재뿐만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은 적이여! ("옳소!",박수) 히틀러도, 도죠 히데기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음모에 의한 이 1인 독재도 민주주의의 적인 데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이 말이여! ("옳소!",박수)

아....... 이 나라가 누구 나란데! 이 나라가 박정희 씨 나라요? 이 나라는, 대통령은 바뀌어도 헌법은 영원한 것이여! 헌법은 박정희 씨보다 위여! 박정희 씨를 위하여 헌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이말이여! ("옳소!",환성·박수)

아까 유진오 당수께서도 말씀했지만 놀라운 이야기여! 머....... 이번에 헌법을 고치면 지금 같은 준전시 하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안 하겠다? 이번에 개헌만 되면 71년에는 선거를 안 하겠다는 게여!
다시 말하면 털도 안 뽑고 그대로 먹겠다는 게여! (폭소)

공화당에 윤치영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 이래의 위인이다." 이랬다 말이여! 단군 이래의 위인이니까 신라의 金庾信, 고려의 태조 王建, 이조의 世宗大王, 李舜臣장군보다 더 위대하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 사람 대통령 바뀔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한단 말이여! 과거 李박사가 사사오입 개헌 때도 "李박사는 개국 이래의 위인이다." 이랬어! 우리가 과거에 결혼식에 가면 축사를 많이 했는데 축사를 하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해. 신랑은 대학을 나온 모범청년이고 신부는 가정에서 부덕을 닦은 요조숙녀(窈窕淑女)라고. (폭소) 아마 이 양반 대통령에 대한 아첨을 무슨 결혼식의 축사로 착각을 한 모양이여! (폭소·박수·환성) 이번에 '아폴로' 11호가 달 세계로 가는데, 안되었지만 이런 양반들을 실어다가 거기다 두었으면 대한민국이 편할텐데. (폭소·박수)

▶ 檀君 이래 폭군 된다
박정희 씨가 단군 이래의 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박정희 씨가 3선 개헌을 그대로 추진했다가는 박정희씨가 단군 이래의 위인이 아니라 단군 이래의 폭군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말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소.("옳소!".환성·박수) 남은 정치 생활해 가지고 평생을 국회의원 한 번 못된 사람이 수두룩한데 밤중에 한강 건너와 가지고 남의 정권 뺏어 가지고 10년 해먹었으면 됐지, 뭘.....다시 자기가 만든 헌법을 고쳐 가지고 또 해먹겠다는 것이여!(폭소·박수)
지난번 국회에서 金泳三의원이 "박정희씨는 독재자다." 이랬다 말이여! 공화당 사람들이 노발대발 했어! 그야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대놓고 "너 이 자식 못생긴 놈" 이라고 하면 화 안내는 사람 없겠지요, 박정희 씨가 독재자냐? 아니냐? 단적인 증거가 있어! 명색이 민주국가에서, 명색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나라에서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가 국민의 머슴인 대통령에 대해서 독재자라 했다 해서 그 말이 신문에 한 자도 못나간 그 사실이 "이 나라가 독재자가 지배한 나라" 라는 것을 반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 말이여, 여러분! ("옳소!".환성·박수)

여보시오! 세계에서 민주주의 한다 해가지고 3선 개헌해서 영구 집권하는 민주주의가 어디 있소.(박수) 무슨 속담에 공자·맹자 10년 배워도 쫄쫄이란 문장 처음 듣고, 무당생활 평생 해도 목탁이란 귀신 처음 들어본다고 그러지만, 내 들어봐도 이런 민주주의가 있다는 소리 처음 들어봤어.

오늘날 이 나라 현실이 어떻습니까?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말살되었어. 신문은 신문기자나 편집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밀어라, 빼어라, 높이 올려라, 아래로 내려라, 다 결정한다 그 말이여......
오늘날 신문기자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없어.

국회는 어떻소? 지난 6·8선거가 온통 부정선거여! 나도 목포에서 박정희씨한테 좀 단단히 당해 보았어. (폭소) 이 양반이 직접 와서 목포에서 연설을 하고 전 국무위원들을 데리고 와서 회의까지 하고, 한 때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서 목포에 이사를 왔어. (폭소·박수) 선거가 끝나고 올라와 보니까 웬지 국회는 온통 가짜 투성이여! 진짜는 3분의 1도 못되고 3분의 2는 국민이 뽑은 게 아니라 중앙정보부나 경찰이나 면장·반장들이 뽑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옳소!") 이래 가지고 이 사람들이 국회에서 우리가 아무리 무슨 옳은 소리를 해도 듣지 않아! (폭소) 하도 분통이 터져서 "이 자식들아" 하고 한 번 달라들어 보자만. 웬걸, 공화당사람들은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많아서 유도가 3단, 당수가 5단이었다 그 말이여!(폭소) 해볼 수가 없어. (폭소) 이 다음에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을 때 제발 당수 잘하고 유도 잘하는 사람 빼어 주었으면 좋겠어(폭소)

사법부는 어떻소? 사법부 독립은 지금 완전히 유린됐어! 동백림 사건 그 판결의 일부가 비위에 안 맞는다 해서 대법원을 빨갱이의 소굴로 몰았어! 대법원 판사들은 金日成이의 앞잡이로 몰았어! 노판사가 그만두고 나갔대!

학원은 지금 짓밟힐 대로 짓밟혀서, 학원은 이제 더 이상 진리의 탐구 장소도 아니요, 대학의 자치도 없는 것이요, 학생들이 나라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가는 최루탄과 곤봉에 의해서 대가리가 터지고, 갈비가 부러지고 대학은 자유의 낙원이 아니라 창살 없는 감옥이요,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번호표 없는 죄수라는 것은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그 말이여! ("옳소!".환성·박수)

▶ 大學은 창살없는 감옥
이 나라의 국시인 민주주의는 지금 빈사 상태에 들어갔어. 국체는 이미 변혁 중에 있는 것이여, 여러분! 이 더러운 민주주의에 대한 원수들, 이 용서 못할 조국에 대한 반역자들, 나는 분노와 하염없이 통분된 심정을 금할 수 없으면서 내가 호소하는 것은 "하느님이여! 이런 자들에게 벌을 주소서, 국민이여! 궐기해서 이런 자에게 철추를 내리라"는 말을 나는 호소하고 싶습니다. ("옳소!".박수)
여러분! 나는 저기 계신 金九선생과 삼열사의 무덤 앞에서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 나는 피로써 여러분께 맹세해! 나는 이 조국과 국민을 멸망과 불행의 진구렁 속으로 끌고 간 박정희씨의 3선 개헌에 대해서는, 내 이 사람의 정치적 생명뿐 아니라 육체적 생명까지 바쳐서라도 의정단상에서 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옳소!".환성·박수)

우리는, 우리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우리의 집주소를 서대문 현저동 101번지로 옳긴 지 오래여!(폭소)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있다 이 말이여! 천명대로 우리의 목숨을 바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할 사람들은 아니여! 내가 여러분들한테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우리 신민당은 유진오 당수 중심으로 결속해서, 우리들의 눈동자가 새까마한 국민 여러분이 자유와 조국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단코 박정희 씨의 망국적인 3선 개헌을 저지하고야 말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 앞에 분명히 말씀한다 그 말이여!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온갖 정성과 온갖 결심으로써 박정희씨에게 마지막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할 지각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와 6·25때 죽은 우리 영령들 죽음의 값에 대한 책임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만은 하지 마라.("옳소!".환성·박수) 만일 당신이 3선 개헌을 했다가는 이 조국과 국민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죄악을 가져올 뿐 아니라 박정희씨 당신도 내가 몇월 며칠날 그렇게 된다고 날짜와 시간은 말 못하지만 당신이 제 2의 李承晩 씨가 되고 제 2의 '아유브 칸'이 되고, 공화당이 제 2의 자유당이 된다는 것만은, 해가 내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보다도 더 명백하다는 것을 나는 경고해 마지않는 바입니다.("옳소!".환성·박수)

국민 여러분! 국체의 변혁을 꿈꾸는 3선 개헌을 분쇄합시다. 국민 여러분이여! 민주주의를 이 땅에 꽃피워, 우리 나라의 후손들에게 영광된 조국을 넘겨 줍시다. 여러분! 다 같이 궐기해서 3선 개헌 반대투쟁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사의 용사가 될 것을 호소하면서 저의 말씀을 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69년 7월 19일

김 대 중



'71년 장충단공원 연설' 전문 (1971. 4. 18)

‘독재·특권경제 끝내겠습니다”
연설을 시작하기 전 나의 경쟁상대인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건강과 건투를 빕니다. 나는 전국의 유세결과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승리로 결정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씨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게 됩니다. 나는 공화당이 그런 계획을 했다는 사실과,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야당이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박정희씨는 며칠 전 대전에서 연설하면서 ‘나의 상대는 북괴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김일성은 박정희 후보만의 상대가 아니라 3천만 국민의 대결상대요, 여러분과 나의 대결상대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공산당을 키워주고 공산당을 승자로 만든 박정권의 독재와 썩은 정치와 특권경제를 우리가 다같이 종식시키지 않으면 이 나라는 장차 공산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공산당을 이기기 위해서도 박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이 나라의 독재체제를 단호히 일소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부터 4년 전 목포에 나를 잡으러 왔었습니다. 유명한 6·8 목포선거 당시 내가 박대통령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국회의원 부정선거한 것을 보니까 삼선 개헌할 목적 아니냐” 이랬더니 박대통령이 목포 역전에 2 만여명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삼선개헌은 절대로 안한다. 내가 삼선개헌을 한다는 것은 야당놈들의 모략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다는 삼선개헌을 해버렸습니다.

‘대통령은 두 번밖에 할 수 없다’는 헌법 제69조 3항은 누구도 고칠 수 없다고 헌법부칙에 못박아 앞으로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 헌법을 고치는 일은 영원히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정권을 잡으면 정보정치를 일소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말만 민주주의입니다. 백성 민(民), 임금 주(主) 백성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백성에게 선거의 자유가 없습니다. 야당유세장엔 나오지도 못하고 가더라도 박수를 치지 못합니다.

중앙정보부는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정선거를 지휘하고 야당을 탄압하고 분열시키고 심지어 여당조차도 박정희 1인 독재에 반대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재작년 삼선개헌 때 반대한 공화당 국회의원들은 지하로 끌려가서 몽둥이로 맞고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삼선개헌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공화당 의장직을 그만두고 탈당한 김종필이라는 사람이 오늘날 자기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정보정치의 압력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산당을 이깁니다”
중앙정보부는 학생들을 괴롭히고 학자와 문화인들을 탄압하고 있으며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경제에 개입해서 모든 이권에 간섭합니다. 요즘도 경제인들을 수백명 불러다가 “김대중에게는 돈을 주지 말아라. 만일 돈을 주었다가는 너희 사업을 아주 망쳐놓겠다”고 협박해서 절대로 안 준다는 각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각서를 썼다는 말도 밖에 나가서 안 하겠다는 각서를 또 한 장 받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독재의 본산입니다. 이 같은 정보정치를 그대로 놔두면 이 나라의 암흑과 독재는 영원할 뿐 아니라 국민 여러분의 권리와 자유가 소생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중앙정보부를 단호히 폐지해서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킬 것을 여러분 앞에 약속드립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지방자치를 실시해서 민주주의 기초를 확립하겠습니다. 대통령 직속 하에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어서 우리 1천5백만 여성들의 교육과 생활과 사회적 대우에 대해 특별배려를 하고, 우리 여성들의 능력을 개발해서 지금까지 파묻혔던 여성들의 실력을 국가건설에 활용해 새로운 민족중흥의 힘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여성문제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산당을 잡으려는 중앙정보부나 전국의 정보경찰들이 지금 공산당을 잡고있습니까. 내가 전국을 다녀보니까 그 사람들이 밤잠 안자고 잡으러 다니는 것은 공산당 간첩이 아니라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공산당도 잡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력을 저하시키고 있습니다. 군대내 사고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립돼버렸습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1년 이내 서울 5백50만 시민들이 안심하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국방태세를 완수할 것입니다. 첫째로 완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가 서기 때문에 공산당이 발붙일 데가 없습니다. 모든 정보기관이 공산당 잡는 데 집중하니까 간첩이 얼씬도 못합니다. 국군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시키니까 오직 대공전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국제적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나서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니까 우리 우방국가들이 더욱 도와주고 여기에 미군의 철수가 준비됩니다.

이번에 정권교체가 돼야만 민주주의가 승리하게 되고, 우리의 안보태세는 반석 위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책임지고 말하겠습니다. 김일성은 앞으로 10년내에는 대한민국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38선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김일성은 지금 그럴 힘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정치가 잘못돼서 우리 내부에서 사고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치를 하루빨리 시정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정권교체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향토예비군을 폐지한다고 말했더니 전국 국민들이 호응했습니다. 우리는 향토예비군이 없어도 예비역이 있어서 유사시 10분내 동원할 법과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향토예비군은 민주주의 아래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향토예비군은 이중 병역의무입니다. 헌법위반입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향토예비군 중대장을 불러다 훈련시키는데 그것이 공산당을 잘 잡으라는 게 아니라 이번 대통령선거에 김대중 후보를 잘 때려잡으라는 얘기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권을 잡으면 국방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독재체제 강화에 악용되는 군사조직, 향토예비군을 전면 폐지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공화당은 우리에 대해 생트집만 잡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 박정희 정권은 바뀌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선거 때는 야당이 비판을 하고 트집을 잡고, 여당이 정책대결을 하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야당이 정책대결하고 여당이 트집만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화당이 이미 국민에게 내세울 밑천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4대국 한반도 전쟁 억제 방안’은 아까 유진산 당수가 말했기 때문에 내가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나라에서 제2의 일·청전쟁, 일·러전쟁을 하지 말아라. 뒷구멍에서 조정해 이 나라에 다시는 6·25같은 것을 일으키게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뭐가 잘못입니까.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남북교류 문제에 있어서도 김일성이 전쟁을 포기하고 파괴분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 동포끼리 소식도 알아보고 체육경기도 하고 기자도 왔다갔다 하자, 뭐가 나쁘냐 말입니다. 세계에서 동족끼리 자기 부모형제간에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편지도 못하는 나라는 박정권 치하 대한민국뿐입니다.

국제정세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4대국의 한반도 전쟁억제’ 방안은 내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도 내 설명을 듣고 “당신의 그런 훌륭한 정책을 미국 지도자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다”고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나 MIT대학의 윌리엄 교수 같은 사람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도 금년 연두교서에서 아시아에서의 안전보장은 4대국가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박정희씨에게 조그마한 국내정치를 악용하려고만 하지 말고 크게 아시아와 세계를 내다보고, 50년과 1백년 앞을 내다보고 국가의 운명을 생각하는 대통령학을 공부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지방을 다녀보면 도처에 ‘중단없는 전진’이라고 써 있습니다. 박정권이 전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진은 무슨 전진입니까. 이 나라에서 중단없이 전진하는 것은 오직 부패입니다. 이 나라의 부정부패는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박정희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청와대 비서실의 책임자, 경호실 책임자, 박정희씨 처남, 박정희씨 처조카 사위….

독일같은 데서 1백만∼2백만원짜리 비싼 개를 사다가 사람도 못 먹는 쇠고기를 먹이는 이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단단히 세금을 물려야 합니다. 노인은 땅 한 평 없는데 30만평·40만평짜리 골프장이 대한민국에 10개 이상 있습니다. 단단히 입장세를 내야 합니다. 3백만원·5백만원짜리 보석반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치세를 내야 합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

군대와 국민은 하나
나의 공약에 대해 공화당이 실천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이중곡가제와 도로포장, 초등학교 육성회비 폐지, 기타 지금까지 내가 한 공약에 모두 6백90억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예산 5천2백억의 1할5부만 절약해도 7백50억이 나옵니다. 오늘날 특정재벌과 결탁해 합법적으로 면세해준 세금만 1천2백억입니다. 정권을 잡아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면 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돈이 8백억이나 남는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박정권의 정신과 도덕을 무시한 정책을 시정해서 종교단체와 사회단체의, 또 문화인과 교육자들의 국민정신 재건과 국민도의 재건정책에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사회부패를 일소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하는 건전한 시민사회를 만들어 나라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물질만능을 배격할 것입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국내외에 걸친 민주 거국내각을 실시하고, 군에 대해서도 내가 완전무결하게 장악·통솔할 것입니다. 민주국가의 군대는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군대도 그런 군대입니다. 군대와 국민을 따로 갈라놓아 생각하는 것은 박정권의 독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이번에 승리하면 군대는 3군 총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복종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박정희씨와 공명선거에 대해 협의하려고 해도 그는 안 하려고 합니다. 서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해도 안 합니다. 국민 앞에서 TV나 라디오를 통해 토론하자고 해도 안 합니다. 독재적인 수법만 취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을 총동원해서 부정선거를 하고 있습니다.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습니다. 5·16은 군대가 저질렀습니다. 이제 오는 4월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 전 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교체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우리가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7월1일은 청와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입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7월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연금해제·사면복권 이후 서울에서의 최초 대중집회 연설 (1987.9.10 홍사단금요강좌)

민족발전을 위한 나의 정치철학
우리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도산 안창호(安昌浩)선생! 이 민족을 그토록 뜨겁게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셨던 우리들의 애국자 安昌浩 선생! 이 분은 독립투사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실한 교육자였습니다. 이 분은 독립만이 목적이 아니라 민족의 발전이 목적이었습니다.도산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또 선양시키는 이 흥사단(興士團)에 와서 불초 이사람이 감히 민족발전을 위한 나의 생각을 말씀드린다는 것은 외람되기도 하지만,한편 생각하면 지극히 의의가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양해구할 것은,너무 열기를 내서 말하는 이사람이 좀 더운데 저고리를 벗어도 됩니까?(네)


우리민족을 생각할 때,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조그만 혹같이 붙어있는 한반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기적같은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중국을 보십시오.지금부터 4천년 전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오늘의 한(漢)민족,이들이 양자강 이남까지 ·서쪽까지 ·동쪽까지 동화시켜왔습니다. 한 때 이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해서 많은 제국을 세웠지만,특히 원나라를 세워서 100년을 지배한 몽고족의 징기스칸이 했던 것, 동·서로 그 판도를 넓혀서 아시아 대륙의 최대패자(覇者)였던 몽고족,이 몽고족이 오늘날 모두 중국에 포함되어 버리고, 몽고인민공화국에는 150만 밖에 사람이 없습니다.또 1616년에 만주족이 청나라를 만들어 청조 300년을 통치했습니다. 중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만주족은 한사람도 없이 증발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108년,한무제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던 이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우리 한민족! 우리가 어떻게 하여 중국사람되지 않고 ,몽고사람·만주사람 다 중국사람됐는데 ,어떻게 우리만 되지않고 ,아시아 동쪽이 한반도가 오늘날 6천만 대민족이 -여러분 ! 6천만이면 얼마나 큽니까? 세계 160개 나라 중에 12번째 대민족입니다.영국보다 불란서보다 이태리보다 큰민족입니다.이런 대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교육수준이 높고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성취동기가 높은 이 민족이 여기 엄연히 있다,절대 중국사람되지 않는다,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민족을 생각할 때 과거 사대, 열등적인 역사관을 배제한다면,우리 조상들이야말로 이 어려운 지경에서 ,그 압도적인 영향속에서,우리 조선민족, 한민족의 자주성과 우리의 본질을 지켜온 우리조상들이 얼마나 위대한 조상들인지 새삼스럽게 감사하지 않울 수 없다 이거예요.만일 위대한 민족이 이웃나라를 함부로 강탈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빼앗고 이런 민족을 위대한 민족 이라고 한다면 우리민족은 절대 위대한 민족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이 있어도 남을 침략하지 않고 그러나 내 주체성은 꼭 지키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문화,독자적인 의식구조,독자적인 정치·경제·학문, 제도를 유지해 가는 그러한 평화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면 ,우리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겁니다.(박수)

여러분!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십시오.여기 안창호선생도 독립운동가의 한 분으로서 옥중에서 병을 얻어가지고 돌아가셨지만 세계에서 나라가 망했는데 근 40년동안,그 이상 이웃나라를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니면서 독립군을 만들어 가지고 끝까지 투쟁한 그런 민족이 있습니까? 많은 식민지 민족이 있었지만 없습니다. 3·1운동이 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서 불과 9년전에 있었던 제국제도를 폐지하고 국왕제도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를 만든,이러한 진취적인 민족,그래서 고난속에서 ,박해속에서 ,천대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간판을 짊어지고 상해에서 중경으로 옮겨다니면서 끝내 해방되는 날까지 우리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런 민족이 세계에 있느냐 이거예요.

이를테면 나는 지난번에 헌법 전문(憲法全文)을 만들때,이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고,또 그것이 다행히 넣어졌습니다만,나는 이런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의 해방은 미국의 승리 연합군의 승리 덕택이라는 말은 말은 안된다 이겁니다.만일 그렇다면, 카이로 회담에서,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 독립이 특별히 규정됐겠느냐? 한국의 독립이 그렇게 특별히 규정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의 선열들이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중국대륙에서 목숨을 걸고 황야에서 이리떼의 밥이 되면서도 싸운 그 덕택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해방이 외세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는 사대주의적인 역사관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이말이에요.(박수)

이렇게 쟁취한 해방이었는데, 해방 이후 42년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발전이 저해된 그런 42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조국이 둘로 갈라져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아무 책임도 없이 미·소 강대국이 멋대로 줄을 쳐가지고 우리를 두 동강이로 잘라놨어요. 그래가지고 북쪽은 공산주의 , 남쪽은 자본주의 또 이렇게 점령군의 영향을 받게 됐어요. 이러한 우리의 본의 아닌 분단, 통일신라 이래 1300년 동안 유지해왔던 우리의 통일국가가 이와 같이 외세에 의해 분단됐다는 그 사실뿐만 아니라, 역대 남북을 지배한 정권 배후에서는 이 외세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체제를 강요하고, 백성을 무시하고, 소수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기 나라에 굴종하고 추종하는 그런 체제를 강요하고,(박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민족의 발전을 저해한 최대 요인은 외세의 간섭이었다고 단언하면서, 그러한 외세의 간섭에 대해서 이것은 자기네들이 사적인 동기를 위해 여기에 영합하고 아부한 사대주의자들이 이 나라 민주발전을 망쳤다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옳소!", 박수)

남한 내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민족발전을, 국민발전을 망친 것은 하나는 친일정권이요, 다른 하나는 군사정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박사, 명색이 애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사람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를 주위에 집결시켜 가지고 대한민국을 처음부터 친일파 일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군에는 광복군이나 독립군에 참가했던 사람을 제외되고, 만주군·일본군에 나갔던 일제의 고등계 형사들이 다 잡았고, 관리는 총독부 관리들이 다 잡았어요.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애국자들은 전부 소외되었을 뿐만아니라 김구선생의 경우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의 절대 애국자인, 일본놈들도 감히 죽이지 못했던 그 분이 친일파들 손에 의해서, 李承晩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이 얼마나 민족반역적인 것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

나는 지금도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김구선생, 황량한 벌판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다 돌아가신 애국자들, 아버지 때문에 일제시대에 박해받고 공부도 못하다가 해방 후도 여전히 고통에 휩쓸려 교육을 못받은 그 후손들, 반면에 친일파의 자식들은 전부 고관대작, 부자 아버지 덕에 외국 유학도 가고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대대로 잘사는 그 사실, 이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李박사 치하의 현실인 것입니다. 李박사의 신념은 친일파적이었습니다. 그런데 李박사 시대가 끝나고 나니까 박정희라는 진짜 친일파가 등장했습니다.(웃음)

오늘의 정권이란 것도, 이 친일정권 박정희씨 가 친일파의 후계자들이요, 이 정권의 교관들이나 이 정부 이 사회의 소위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버지가 친일파였고, 그 돈으로 외국 유학갔던 사랍들이요. 이런 자들이 이 나라를 계속 지배하고 있으니, 민족정통성이 서지 않는, 정의가 서지 않는, 올바르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조국을 위해 몸바친 사람들이 버림받는 이런 사회야말로 민족발전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중략)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1998. 2. 25)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 시대를 엽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50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 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김영삼 전임 대통령, 폰 바이체커 독일 전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 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 내외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취임식의 역사적인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려는 정부가 마침내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이 정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 입니다. 모든 영광과 축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리면서,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봉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3년 후면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됩니다. 21세기의 개막은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탄생한 인간혁명으로부터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의 5대 혁명을 거쳐 인류는 이제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보화 혁명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어, 국민경제로부터 세계경제시대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습 니다. 정보화 시대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손쉽고 값 싸게 정보를 얻고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민주사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전조에 전력을 다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 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나마 파국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애국심으로 뭉친 국민 여러분의 협력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EU국가 등 우방들의 도움 덕택입니다.

올 한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 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정치, 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 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께서는 놀라운 애국심과 저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우리는 IMF시대의 충격 속에서도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의 위업을 이룩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고 이미 20억 달러가 넘는 금을 모아 주셨습니다. 저는 황금보다 더 귀중한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편 우리 근로자들은 자기 생활의 어려움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는 등 고통분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수출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지난 3개월 간 연속해서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애국심과 저력에 대해 세계가 경탄하고 있습니다.

근로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는 대화를 통한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이 일을 이루어낸 노사정 대표 여러분께 국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금년 1년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안보 그리고 남북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좌절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정이 투명하게 되고 부정부패도 사라집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정부가 고통분담에 앞장서서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과 기능을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에 대폭 이양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에는 더욱 힘 쓰겠습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정부], 이것이 [국민의 정부]가 지향 하는 목표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의 경제적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일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시키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다같이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경제만 받아들인 나라들은 나치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서 보여준 바와 같 이 참담한 좌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나라도 2차대전 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이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발전하게 되면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부패는 일어 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실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물가안정 없이는 어떠한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똑같이 중시하되, 대기업은 자율성을 보장하고 중소기업은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양자가 다같이 발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품질좋고 가장 값싼 상품을 만들어 외채를 많이 벌어들이는 대기업이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기술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입니다. 이를 적극 육성 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대기업과 이미 합의한 5대 개혁, 즉 기업의 투명성, 상호지급보증 금지, 건전한 재무구조, 핵심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에 대한 협력, 그리고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은 반드시 관철될 것입니다.
이것만이 기업이 살고 우리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정부는 기업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수출 못지 않게 외국자본의 투자유치에 힘쓰겠습니다. 외자유치야말로 외자를 갚고, 국내기 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농업을 중시하고 특히 쌀의 자급자족은 반드시 실현 시켜야 합니다. 농어가 부채경감, 재해보상, 농축수산물 가격의 보장, 그리고 농촌 교육여건의 우선적 개선 등 농어민의 소득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겠습니다.

애국심과 의욕에 충만한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과 같이 올바른 경제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 경제는 오늘의 난국을 반드시 극복하고 내년 후년부터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를 믿고 적극 도와주십시오.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신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정의가 최고의 가치로 강조되는 정신혁명 말입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 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둬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혁명과 바른 사회의 구현에 모든 것을 바쳐 앞장서겠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도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합니다. 저는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높은 교육수준과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컴퓨터를 가르치고 대학입시에서도 컴퓨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 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습니다.

교육혁명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대학입시제도를 획 기적으로 개혁하고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청소년들은 과외로부터 해방되고, 학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로부터 벗어나게 하겠습니다. 지식과 인격과 체력을 똑같이 중요시하는 지덕체의 전인교육을 실현시키겠습니다. 이러한 교육개혁은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성취 하겠다는 것을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굳게 다짐합니다.

우리는 민족문화의 세계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담겨 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문화산업은 21세기의 기간산업입니다. 관광산업, 회의체 산업, 영상 산업, 문화적 특산품 등 무한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의 보고입니다.

중산층은 나라의 기본입니다. 봉급생활자,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 등 중산층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권익보장과 능력개발을 위해서 적극 힘쓰겠습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나 남녀차별의 벽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청년은 나라의 희망이자 힘입니다. 그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 그리고 복지의 향상을 위해서 정부는 아낌없는 지원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1세기는 경쟁과 협력의 세기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외교는 냉전시대와는 다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외교의 중심은 경제와 문화로 옮겨갈 것입니다. 협력 속에 이루어지는 무한경쟁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역, 투자, 관광, 문화교류를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자주적 집단안보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적 단결과 사기 넘치는 강군을 토대로 자주적 안보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동시에 한미 안보 체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등의 집단안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구축을 위해 4자회담을 반드시 성공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대화와 교류는커녕 이산가족이 서로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합니다. 1천3백여년간 통일을 유지해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도 한없는 죄책감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 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 입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협력과 불가침, 이 세 가지 사항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미 남북한 당국 간에 이루어 져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북한에 대해 당면한 3원칙을 밝히 고자 합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간에 교류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나 국제기구와 교류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할 것입니다.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북한 당국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나이 들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남북의 가족들이 만나고 서로 소식을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최근 북한이 긍정적인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을 예의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학술의 교류,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도 확대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한 남북간의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해외동포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해외동포들이 거주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한국계로서 안정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돕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고난을 딛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시다.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얼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민족수난의 굽이마다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선조들처럼, 우리 또한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일에의 도약을 실천하는 위대한 역사의 창조자가 됩시다. 오늘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읍시다.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 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드높입시다.

감사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 (2000. 12. 10)

국왕 폐하, 왕세자와 공주 등 왕실가족 여러분,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과 신사 숙녀 여러분.

노르웨이는 인권과 평화의 성지입니다. 노벨평화상은 세계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하는 숭고한 메시지입니다. 저에게 오늘 내려주신 영예에 대해서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수 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영광은 제가 차지할 것이 아니라 그 분들에게 바쳐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세계의 모든 나라와 벗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노벨평화상을 저에게 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6월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그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남북 화해•협력 과정에 대한 평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노벨위원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북한에 갈 때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지만 오직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념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회담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남북은 반세기 동안 분단된 가운데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휴전선의 철책을 사이에 놓고 불신과 증오로 50년을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남북관계를 평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저는 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북에 의한 적화통일을 용납하지 않는다.둘째,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셋째, 남북은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가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은 처음에는 우리 햇볕정책을 북한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여기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관되고 성의있는 자세와 노르웨이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나라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는 마침내 북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북 정상회담 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참으로 힘든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민족의 안전과 화해•협력을 염원하는 입장에서 결국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이룩하자,또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우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협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둘째,종래 남북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북한은 우리가 주장한 통일의 전 단계인 ‘1민족 2체제 2독립정부’의 ‘남북연합제’에 대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형태로 접근해 왔습니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통일에의 제도적 접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셋째,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전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50년 동안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를 최대 쟁점으로 주장했습니다. 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조했습니다. “미•일•중•러의 4강에 둘러싸여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수한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는 우리로서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필수불가결하다. 미군은 현재 뿐 아니라 통일 후에도 필요하다. 유럽을 보라. 당초 ‘나토’의 창설 과 미군의 주둔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침략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산권이 멸망한 지금도 ‘나토’와 미군이 있지 않느냐.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그 존재가 계속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뜻밖에도 종래의 주장을 접고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나타냈는데, 이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뜻 깊은 결단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데 합의했으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원만하게 실천에 옮겨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에 대해서도 합의를 했습니다. 이미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등 4개의 협정을 체결하는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우리는 그 동안 북한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비료 30만t과 식량 50만t을 지원했습니다.그리고 사회•문화 교류에 대해서도 합의해 스포츠, 문화예술, 관광 교류 등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남북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열려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데 합의했습니다.남북 간의 분단된 철도와 도로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양쪽 군이 협력하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한편 저는 남북관계의 개선만으로는 한반도에서 평화와 협력을 완벽 하게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일본과 다른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할 것을 적극 권 유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클린턴’대통령, ‘모리’총리 등 미•일 양국의 정상에게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권고했습니다.

또한 저는 지난 10월에 서울에서 열렸던 제3차 ASEM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우방국가들에게도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북•미 관계와 유럽•북한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한반도의 평화에 결정적인 영향과 진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제가 민주화를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투쟁할 때 언제나 부딪힌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한 뿌리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아시아에는 오히려 서구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인권사상이 있었고 ,민주주의와 상통한 사상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하늘로 삼는 다. ’‘사람이 즉 하늘이다. ’‘사람 섬기는 것을 하늘 섬기듯 하라. ’이런 것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근 3,000년 전부터 정치의 가장 근본요체로 주장되어 온 원리였습니다. 또한 2,5000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 는 교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사상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상통되는 사상과 제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는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다.하늘 이 백성에게 선정을 펴도록 그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다.그런데 만일 임금이 선정을 하지 않고 백성을 억압한다면 백성은 하늘을 대신해 들고일어나 임금을 쫓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존 로크가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설파한 국민주권사상보다 2,00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미 기원 전에 봉건제도가 타파되고 군현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공무원을 시험에 의해서 뽑는 제도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임금을 포함한 고관들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는 강력한 사정제도도 존재했습니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풍부한 사상과 제도의 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시아에서는 대의적 민주제도의 기구는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인류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서구의 민주제도는 민주적 뿌리가 있는 아시아에서 이를 채택할 때 아시아에서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일본•필리핀 •인도네시아•태국•인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주민들이 민병대의 혹독한 학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독립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가했습니다. 지금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고난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 국민과 민심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미얀마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회복되고 국 민에 의한 대의정치가 다시 부활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절대적인 가치인 동시에 경제 발전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또한 시장경제가 없으면 경쟁력 있는 경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적 기반이 없는 국가경제는 사상누각일 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98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함께 ‘생산적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2년 반 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의 병행 실천이라는 국정철학 아래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적극 보장하고 있습니다.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의 4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복지의 중점을 저소득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인력 개발에 둠으로써 이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을 조속히 마 무리함으로써 전통산업과 정보산업,생물산업을 삼위일체로 발전시켜 세계 일류경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시대로서 부(富)가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정보화시대는 부의 편차가 심화되어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빈부격차도 커져 갑니다. 이것은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인권의 탄압과 무력의 사용을 적극 반대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보화에서 오는 새로운 현상인 소외계층과 개발도상국의 정보격차를 해소함으로 써 인권과 평화를 저해하는 장애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 개인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릴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6년의 감옥살이를 했고,40년을 연금과 망명과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는 데에는 우리 국민과 세계의 민주인사들의 성원의 힘이 컸다는 것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동시에 제 개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첫째,저는 하느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 오고 있으며, 저는 이를 실제로 체험했습니다.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저는 한국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긴급뉴스에 경악했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은 저를 일본 해안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공작선으로 끌고 가서 전신을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의 머리 속에 예수님이 선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를 구원하는 비행기가 와서 저는 죽음의 찰나에서 구출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저는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이겨 왔습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저는 죽음의 공포에 떨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데는 ‘정의필승’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의 확신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국민과 세상을 위해 정의롭게 살고 헌신한 사람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자가 된다는 것을 저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승자들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하더라도 후세 역사의 준엄한 심판 속에서 부끄러운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국왕 폐하,그리고 귀빈 여러분.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도 노벨 경(卿)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여러분과 세계 모든 민주인사들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2000. 12. 10.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 특별연설 (2009.6.11)

존경하는 선배 동지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이 나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6.15와 10.4선언을 생각할 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과 저만이 북한에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한 그 사건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저하고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노 대통령은 부산상고, 저는 목포상고를 나왔습니다(청중 웃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갔고 저도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갔습니다(청중 웃음). 노 대통령은 대학 못간 뒤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고, 저는 열심히 사업해서 돈 좀 벌었습니다(청중 웃음). 그 후로 저는 이승만 정권,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등 독재정권에 분개해 본업을 버리고 정치에 들어간 것입니다.

정치에 들어가서 또 다시 반독재투쟁을 같이 하는 등 노 대통령과 저는 참으로 연분이 많습니다. 당도 같이 했고, 국회의원도 같이 했고, 그리고 북한도 교대로 다녀왔습니다. 이런 걸 가만히 보니까 전생에 노 대통령과 저하고 무슨 형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형님은 제가 되고요(청중 웃음). 제가 노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만 봐도 여간한 인연이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할 때 노 대통령을 해양수산부장관을 시켰습니다.

저는 오늘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을 맞이해서 먼저 이명박 대통령과 북한에 대해서 몇 말씀하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국민이 얼마나 불안하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북한에서는 매일같이 남한이 하는 일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 무력대항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60년 동안이나 이러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력히 충고하고 싶습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합의해 놓은 6.15와 10.4를 이 대통령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그래야 문제가 풀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철수한 금강산 관광을 다시 복구시켜야 합니다. 개성공단에 노동자를 위한 숙소를 지어주기로 우리가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6.15와 10.4의 약속을 지키고, 금강산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것을 철회하고, 개성공단 숙소 건설을 약속한 것 등 우리의 의무사항을 우리가 이행하겠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박수).

다음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게 말씀하고 싶습니다. 저는 북한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994년 제네바협정을 해 가지고 북한은 핵을 포기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경수로를 지어주고 경제 원조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클린턴 대통령이 합의해 놓은 것을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불신이 생겨났습니다.

또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자기가 당선되면 북한과 이란의 수반들을 직접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자기의 대북정책은 부시 정책이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가 하던 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의 기대가 아주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중동, 러시아, 심지어 쿠바까지 대화하겠다고 손 내밀면서 북한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한다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모욕입니다. 북한이 또 다시 속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극단적인 핵개발까지 끌고 나간 것은 절대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6자회담에 하루 빨리 참가해서, 또 미국과 교섭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해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제가 이번에 중국에 가서 시진핑 부주석을 만나 1시간 정도 얘기했는데, 중국 지도자 누구를 만나 봐도 북한 핵을 반대하는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중국이 북한 핵을 상당히 반대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북한이 핵실험을 하니까 중국이 상당히 엄격한 비난을 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대북결의안이 합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억울한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핵을 만들면 누구에게 쓰겠습니까. 거기에는 우리 남한 사람도 포함돼 있을 것입니다. 1,300년 통일국가,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우리끼리 상대방을 전멸시키는 전쟁을 해서 되겠습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계속해서 아직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발표 안했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 있습니다. 물론 초조한 심정은 알겠지만,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정책을 따라가겠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저와 만찬을 했는데, 클린턴 대통령은 저와 같이 한 햇볕정책을 실천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도 북한 핵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고,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 상응하는 대가를 주면서 상대방 기분도 챙겨가면서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건의를 했는데, 자기가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여사에게 전달하겠다는 말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북한이 요구한 안전보장과 경제재건, 미국과 일본과의 국교 재개 등을 미국이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북한 핵 문제는 1994년 제네바 회담에서 합의되었고, 2005년 6자회담 9.19 합의에 의해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열고, 한반도는 평화협정을 맺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을 합의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교섭과 인내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해야지, 핵 문제를 갖고 나온다는 것은 안 된다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력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국 제가 말한 것은 외교는 윈- 윈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좋고 나도 좋아야 외교가 성공합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장거리 미사일까지도 포기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에 줄 것은 줘야 합니다. 그래서 외교도 해주고 경제원조도 하고 한반도 평화협정도 맺어야 합니다. 다 합의되어 있는 얘기를 미국이 실천을 안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되었을 때 제가 당선된 것처럼 기뻤습니다. 또 힐러리 여사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의 아내이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북핵 문제는 제네바 합의에 의해서 한반도 비핵화가, 북한의 핵 포기가 결정됐고, 그리고 6자 회담 합의에 의해서 북한 핵 문제가 다 합의되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클린턴 대통령에게도 ‘무엇이 안 되냐, 북한도 합의했고, 미국도 합의했다. 오바마 정부는 부시하고 다른데, 왜 북한을 안심하게 하고 북한도 기다릴 수 있는 기회를 안 주고 이런 데까지 왔느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 전국에서 500만명이 문상을 한 것을 보더라도 지금 우리 국민들의 심정이 어떤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국민이 걱정하는, 과거 50년간 피 흘려서 쟁취한 10년간의 민주주의가 위태롭지 않느냐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불안합니다.

민주주의는 나라의 기본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죽었습니까. 광주에서, 인혁당 사건 등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 모든 민주주의적 정치가 계속됐습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청중 박수).

저는 오랜 정치 경험과 감각으로, 만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지금과 같은 길로 계속 나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리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더불어 여러분께도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 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든지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알면서도 행동하면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를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픈 일입니까.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떻게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을 반대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는 어디까지나 6자회담에서, 미국과의 회담에서 반대해야지, 절대로 전쟁의 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통일을 할 때 100년, 1000년이 걸리더라도 전쟁으로 통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와 서민경제를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2009.6.27)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2009.6.27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7월 14일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위해 준비했던 마지막 미발표 연설문

9.19로 돌아가자
존경하는 장 마리 위르띠제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회장, 장 자끄 그로하 소장, 유럽연합의 각국대사, 그리고 이 자리에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몇 말씀드리게 된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21 세기는 세계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세기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시대가 출현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동안 세계는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였습니다. 세계는 미국과의 친소관계, 이해관계, 종교적 차이 등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 세계는 달라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친소와 원근에 상관없이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그동안 미국의 이분주의에 고통을 겪다가 이제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그 동안 소원하고 적대관계에 있던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 등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와의 접근이라는 획기적인 자세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문제만은 예외가 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란, 북한의 지도자들과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당선 이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취했던 정책처럼 유연한 태도로 북한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를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아마 북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의 기대처럼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정권은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인 반발자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를 둘러싼 북한 내부의 상황이 사태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여하튼 북한으로서는 지금 절박한 입장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면 사생결단의 자세로 생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북한은 핵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를 이은 부시 정부는 당시 합의된 경수로 건설, 국교정상화, 경제협력 등의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북미간 실질적인 합의에 접근한 장거리 미사일 문제 협상도 부시 정권에 의해서 파기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감시요원을 추방시켰으며, 핵실험까지 강행했습니다. 북핵 문제는 다시 꽁꽁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부시 정부는 6년 동안 북한에 온갖 압박을 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굴복하지 않았고 북한정권이 무너지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태도를 바꾸어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합의를 통해 핵문제 해결의 길을 열었습니다.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 미국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경제지원을 한다. 미국과 북한은 협력해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실현한다’ 등이 합의되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다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다시 핵 사찰 문제, 에너지 지원 부진 등으로 혼미한 사태가 거듭되다가 부시 정권은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와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핵문제를 풀겠다는 오바마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바마 정권 하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들이 대화를 통해 유연하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북한과의 관계도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협조하는 동시에 2005년 9.19 합의에서 이루어진 북미 국교 정상화를 위한 관계개선 등의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우울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핵문제는 전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도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성공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저는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서 시진핑 국가부주석 등 여러 정치지도자들과 대화했습니다. 중국의 태도는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북한 핵을 절대 반대한다. 그러나 이웃국가인 북한에 대한 경제적 원조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역사적, 지리적 관계로 봐서 이웃국가인 북한이 파멸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입니다.

전쟁이 있을 수 없고, 경제제재가 큰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대화와 협상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국제적 제재는 어느 정도 고통을 주겠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협상은 우방국가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를 주고받고 윈윈(win-win)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와도 얼마든지 협상을 해야 합니다. 북한의 근본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체제보장, 북미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을 통한 국제사회의 진출입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하게 해서 태평양 국가들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안전보장,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조건입니다. 이 조건에 대한 합의는 이미 2005년 9.19 선언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북한은 완전무결하게 핵을 포기해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과 국교 정상화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켜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평화롭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원만한 해결의 길입니다.

변화를 내건 오바마 대통령은 오래된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비핵화를 통한 점진적 관계개선'이라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접근방식을 지속하기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사태가 급박합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조속히 막아야 합니다.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방법으로 전환할 때가 되었습니다. 평화협정, 외교관계 수립, 경제협력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함께 핵 폐기를 실현하는 일괄타결방식으로 한반도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다시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 그것을 준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도 좋고, 일본도 좋고, 중국도 좋고, 러시아도 좋고, 한국도 좋고, 북한도 좋은 것입니다.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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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라딘 편집팀 블로그
   http://blog.aladdin.co.kr/editors/category/21893355?communitytype=MyPaper
2009/08/30 22:53 2009/08/3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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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4): 변화와 반론(3)


이원론과 혼합주의(2)

지난 연재에서는 분량상 이원론과 혼합주의의 양립 가능성만을 언급하고 재세례파에 관한 소개로 인해 논의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원론과 혼합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전에도 설명한 것처럼 개혁주의의 변혁모델과 제새례파의 대립모델이 각각 이원론과 혼합주의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 에큐메니컬 진영에 속해있는 레슬리 뉴비긴을 주로 인용하려고 한다. 먼저 이원론의 극복이 여전이 중요함을 언급했던 나의 이전 글을 잠시 인용할까 한다.

하지만 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김기현이 이성주의 시대로 대변되는모더니즘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근대주의는 이성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경험적합리적과학적인 것들을 신격화했다. 근대 기독교인들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많은 탈기독교적인 답변들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모더니즘이 한 세대를 휩쓴 후, 기독교 신앙을 포함한 종교는 사유화, 내면화, 탈사회화 되었다. 종교는 이제 학문정치문화사회에 개입할 수 없으며 신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김용주, “’다시 쓰는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소견”)

 

이 글을 쓰고 난 후 나는 신광은 목사로부터 신앙의 사유화와 내면화가 모더니즘 때문이라는 진단이 너무 단순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내가 쓴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학문적으로 다양한 의미로 쓰이므로 그 정의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 표현상 문제가 있었다고 치고, 레슬리 뉴비긴의 표현을 빌어 내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뉴비긴은 자신의 책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에서 계몽주의가 끼친 신앙의 사유화와 이분법적 사고를 지적했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삶을 사실 중심의 공적 세계와 가치 중심의 사적 세계로 나누는 계몽주의 이후의 이분법과 맥을 같이 한다이 주장의 부정적 측면 즉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긍정적 측면 곧 교회 본연의 과제는 개인 영혼의 영원한 구원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제까지 인간의 종교 사상을 다분히 특징지어 온 이분법을 접하게 되는데 주목할 점은 성경에서는 그런 이분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내적이며 영적인 것과 외적, 가시적, 사회적인 것을 따로 분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레슬리 뉴비긴,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뉴비긴은 자신의 짧은 이 책-부제는복음과 서구문화이다-에서 계몽주의의 업적에 대해서 일면 긍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계몽주의 이후 근대사회에서의 공적 세계(정치)와 사적 세계(종교)의 이분법,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다. (이러한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실상 송인규의 진단과 유사하다.) 그는 세상과 기독교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회복, 즉 혼합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토대에서 긴장점을 유지하려면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그리스도인 사이에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낭만주의가 유행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점을 아주 강조할 필요가 있다-우리가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본보기를 사용해서 마니교도가 했던 식으로 모든 권력을 악하게 여겨 정치 권력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갈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은 가능다. 어쩌면 콘스탄티누스 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삶 전체-정치적 경제적 도덕을 포함한-에 걸친 그리스도의 왕권을 증언하는 것을 교회의 삶에 구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세대에 주어진 그야말로 새롭고 유래 없는 굉장한 도전거리다. 이 도전을 단호하게 수용하는 것이 복음과 서구 문화의 선교적 대면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요건이다.” (레슬리 뉴비긴, 같은 책)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와 정치 권력간의 관계에 대한...

결국 뉴비긴이 관심을 가지고 풀어가는 핵심 의제는복음과 서구 문화의 선교적 대면이다. 뉴비긴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 설정에 있어 흥미롭게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와 국가 간의 구도가 이후 천년 간 서구 기독교의 사상과 관습을 좌우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시기는...교회가 핍박을 받던 상황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에 도달한 시점도 아니었다. 하나는 지상의 국가로서 자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상의 도시에서 재류 외국인으로-동시에 하나님의 시민으로-사는 자들은 그 곳의 선한 질서를 위해 애써야 하고, 통치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공동선을 도모할 종의 심령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그래서 천상도시의 시민들이 지상도시의 평화와 선한 질서를 열심히 도모하되, 최후의 심판 곧 그 둘이 가시적으로 분리되고 천상의 도시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모두 드러낼 때를 앞서서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자세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뉴비긴 , 같은 책)

 

뉴비긴은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기독교가 현대의 상황과 흡사한 면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먼저사랑이 사회의 기초이며 그러한 사랑은 질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피지배자들을 섬기는 정부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함을 전제한 후, 교회가 지상 도시의 정의 실현에 있어 평화와 선한 질서를 열심히 도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함을 입증한다. 그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교회와 정치 권력간의 관계에 있어 교회가 정치권력과 동일시되거나 반대로 사적 종교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지상 세계에서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역설한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교회는 그 나라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고 다만 그 나라의 종이자 증인이요 표지의 역할을 하고자 애써야 마땅하지만 그런 역할을 사적인 부문에 한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내가 믿듯이, 교회와 정치 질서 사이에 전적인 동일화나 전적인 분리가 있을 수 없다면 양자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많은 토론의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선한 목적을 위해 제정하셨으나 악의 도구로 전락하기 쉬운 이런 권세들이 올바르게 작동하는 일에 무관심할 수 없다...오늘날에도 교회가 기독교 신앙에 비추어 국가의 공적 삶과 산업 및 상업 분야에서 세계적 질서를 세우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그 책임을 저버린다면 결코 죄책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그들(정치 권력)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세는 자기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에 달려있다. 그들은 자기에게 위탁된 권력을 오용할 수도 있는, 그리고 때로는 실제로 오용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바른 일을 행하고 진리를 인정할 책임이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킬, 즉 피해서는 안 될 책임을 언제나 지고 있다... 공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지 않는 개인 구원의 사적 종교는 과거 로마의 법 아래서 완벽한 안전이 보장되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오늘날 복음주의가 우리 사회의 보호 아래 아주 번창하게 되었는데 초대 교회도 이와 동일한 입장이었다면 처음 3세기에 거쳐 윤리우스의 통치하에 굉장히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복음은 이런 식의 전략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국가가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반영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뉴비긴, 같은 책)

 

내가 판단하기에 뉴비긴의 이러한 주장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가 계몽주의 이후의 이원론(이분법)적 사고와 혼합주의라는 현대 기독교 문제의 진단 모두를 긍정하면서도 기독교와 서구문화, 기독교와 정치 권력 간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훌륭한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그는 교회와 서구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 교 회가 그 어떤 정치 질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혼합주의를 비판했고 공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지 못한 채 개인구원의 사적 종교로 전락한 이원론적인 기독교 또한 책임을 방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교파 안의 기독교 세계관, 교파 밖의 기독교 세계관

지 난 연재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주의라는 교파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으로 그 외에도 다양한 기독교적 관점의 세계관들이 가능하다는 비판이 있었고 그러한 잣대로 지적되어온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인 몇몇 이슈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선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결국 그러한 선이해는 교파적인 배경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의 주된 이슈는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과 기타의 기독교 세계관이 양립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제까지 이원론과 혼합주의를 예로 들어 개혁파와 재침례파의 세계관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를 개혁주의 밖에서는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고 타 교파들, 혹은 신학자들이 기독교 세계관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유일하다거나 자신들의 입장 자체가 정리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주 인용되는 리차드 니버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는 결국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4가지 유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것은 동일하게 4개의 세계관으로 환원 가능하다. 지난 연재에서 자주 인용했던 하우어워스와 요더의 대안 모델, 혹은 고백 교회 모델은 재세례파의 신학에 기초를 둔 또 하나의 기독교 세계관이라 불릴만하다. 이러한 초교파적 관점에서 기독교와 세상, 기독교와 정치권력, 기독교와 문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로 다양하며, 갈수록 많은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그러한 이들의 관점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물론 교리와 명제를 중시하는 정통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이들의 입장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는 힘든 부분들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글을 마치면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변화와 반론 가운데 연재 중에 자주 언급했던 개혁주의 외부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와, 스탠리 하우어와스, 그리고 N. T 라이트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지적되는 비판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1.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존 하워드 요더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내 기억으로는 신원하 교수의 <전쟁과 정치,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서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존 요더의 평화주의와 정치윤리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하였다. 이후로 최근에야 비로소 요더의 대표작격인 <예수의 정치학>이 번역되어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김두식의 <평화의 얼굴>에서도 기독교 평화주의의 근간이 되는 재세례파의 역사와 그 중심에 서있는 신학자 존 요더를 다룬 바 있다. 이렇게 최근 복음주의권에서 회자되고 있는 요더는 20세기의 걸출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 현대 메노나이트파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로 국내에서는 소수 교파인 재세례파의 신학과 윤리를 재탐구하고 보수하여 현대 신학계와 윤리학계에 그 입장을 재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원하 교수는 요더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그는 기독 교회의 문화와 사회에 대응하는 유형과 방식을 다섯 가지로 유형화한 리처드 니버의 고전적 유형론(typology)에 지배되어 온 신학계와 윤리학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문화와 사회에 대한 역사적 교회들의 대응 방식에 대해 새로운 틀에 의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철저한 평화주의(pacifism) 윤리사상을 주창하면서 기독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의 지성인들에게도 평화주의를 알리는 전도자 역할을 하였다. 요더에게 기독교 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예수께서 직접 보여 주신 그 삶을 모범으로 하여 어떻게 그를 닮아가고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당시의 제자들과 교회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개인들과 교회 공동체의 사회 윤리에서도 실제적인 모델과 규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행동과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동을 위한 규범적인 유형도 제공한다는 것이다.” (신원하, ‘존 하워드 요더의 생애와 그의 윤리학의 중요성중에서)

 

물론, 요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신원하 교수는 <예수의 정치학> 후기에서 요더가 기존 사회의 질서와 정치가들의 정치와 그 산물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이해한다고 전제한 후,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회에 무관심하기를 권하지는 않지만 행동의 구체적인 제시가 없음을 지적했다. 또 한 그가 국가 또한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지만 국가가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해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타락한 창조 세계에서의 국가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원하 교수는 요더가 국가의 역할에 있어서도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2001년 타임지로부터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호평을 받았으며, 미국 인문학 분야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기포드 강좌 강연자(2000-2001)로 선정되기도 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존 요더의 기독교 평화주의를 널리 알린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복있는사람>에서 그의 대표작인 <하나님 나그네 된 백성>을 비롯하여 <십계명>, <십자가 위의 예수> 등을 꾸준히 번역하여 하우어워스의 저서들을 널리 보급하고 있다. 문시영 교수는 하우어워스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타임'지가 2001년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이름 붙인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독특한 제안을 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덕성의 함양을 통해 평화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다르게' 사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의 윤리는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흠뻑 젖어 있다. 교회를 통해 예수 이야기대로 살아갈 모티브를 얻으며 교회 안에서 신앙인의 성품과 덕성이 훈련되고 성숙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굳이 '내러티브'라는 용어로 표현한 예수 이야기는 여기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사회가 교회를 본받게 될 것이며, 윤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스며 있다. 하우어와스는 교회가 사회 문제들에 어설프게 개입하기보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기독교 내부의 성향이 기독교를 세속적 권력과 결탁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우어와스가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존 하워드 요더의 영향이 클 듯 싶다...요더가 예수 이야기대로 살아가려는 노력과 평화의 가치를 강조했다면 하우어와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의 가치와 신앙인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포스트모던 문화를 비판하고 덕의 윤리를 회복하자고 제안한 매킨타이어와의 교감은 하우어와스에게 큰 통찰을 주었다. 신앙인의 윤리는 자연법 윤리와 다르며 신앙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복음 속에서 정체성과 역할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평화를 위한 기독교적 덕성의 훈련장이요, 탁월한 성품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문시영, 국민일보 “21세기 신학자들―⑭ 스탠리 하우어와스 듀크대교수중에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문시영 교수는 같은 글에서 하우어워스가 소종파주의적이고 세상으로부터의 퇴거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기독교의 독특한 '다름'에 대한 주장이 지나쳐 윤리적 게토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실 제로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에서 공공신학과 라이벌이기도 한데 공공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신앙을 사적인 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변증하며 윤리적 통찰을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그는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과제로 제시했다.

 

3. N. T.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N. T. 라이트는 청어람아카데미의 양희송 실장이 복음주의권에 처음 그의 저서들을 소개한 이후 지속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하나이다. 톰 라이트는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교수하다가 지금은 영국 성공회 주교로 있으며 현재 영미 신학계에서 부활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역사비평을 받아들여 스스로 이름 붙인 ‘제3의 연구’를 통해 새롭게 부활된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집중해왔다. 과거의 역사비평적 방법이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면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제3의 연구 방법을 통해 부활의 역사성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의 역사비평 방법에 대해서 와싱톤한인교회의 김영봉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는 보수주의와 복음주의 진영에서 아직도 불편해하고 있는 역사비평 방법을 철저히 연마하고 그 방법론으로 신약성서를 연구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역사비평 방법의 전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는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철학적 입장에서 역사비평을 사용한다. 비판적 실재론은 연구를 통해 알려 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알기 원하는 사람이 알려는 대상과 지속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점차 그 실재에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과거 사건을 ‘있었던 그대로’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계몽주의적 실증주의와 차이가 있으며, 실재를 부정할 정도로 주관적 의미에 치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도 큰 차이가 있다. 역사비평은 실증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방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라이트는 비판적 실재론에 근거해 역사비평 방법을 창조적으로 사용해 왔다... ‘예수 세미나’로 유명한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는 라이트의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고상한 근본주의’라고 비꼬았는데, 라이트는 오히려 “아무 입장도 없는 해석이란 불가능하다”고 반박해 왔다. 많은 역사가들이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이 그를 가리켜 ‘정통 기독교의 수호자’라고 평가한다.” (김영봉, 국민일보 톰 라이트 주교, 복음-자유주의 아우르는 사상가중에서)

 물론 이러한 라이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역사 비평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으며, 최근에는 바울 연구와 관련하여 칭의론에 대한 존 파이퍼와의 논쟁이 이슈가 되고 있다. IVP 대표간사인 노종문은 톰 라이트를 소개하는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이 논쟁을 소개하였다.

최근에 신약학자이며 설교자인 존 파이퍼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 (Crossway, 2007)이라는 책을 통해 라이트의 칭의론이 루터의 성경 해석과 개신교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새로운’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라이트는 올해 2월에 나온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SPCK)이라는 책으로 응답했다. 라이트는 파이퍼가 성경 자체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친숙하고 안전한 느낌을 주는 과거의 전통에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라이트가 볼 때, 루터와 그 이후의 개신교 이신칭의론의 전통은 지나치게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며 복음이 원래 주후 1세기 유대인들과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어떤 사회-정치적 의미로 전파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회피하는 것이다.” (노종문, IVP 북뉴스, “톰 라이트는 누구인가중에서) ()



**이 글은 월간<복음과상황> 8월호 기고글입니다.

2009/08/01 23:45 2009/08/0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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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나와 네 엄마의 일과가 되어 버렸구나.

때론 혹여 숨을 쉬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달려와서 너의 작은 가슴에 귀를 대보던 적도 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너는 내 세상의 한 구석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듯 하다.

가끔씩 너는 나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 소리에 너와 네 엄마는 넋을 잃고 너를 바라볼 때가 많다.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서야 돌아오는 아빠의 자리가
네겐 멀게 느껴질까 걱정이 된다.

네가 잠이 들 즈음에 돌아와서 말을 걸면
잠이 달아나서 자정이 되어서야 잠이 드는 걸 아는 네 엄마는
네가 잠을 잘 못잘까봐 걱정하면서도
아빠 구경 시켜주려는 마음에
나를 반기느라 잠이 달아나는 너를 때때로 그냥 내버려 두곤 한다.

네가 하나 뿐인 이빨을 드러내며 웃을 때
난 가끔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네 할머니가 느꼈을 뭉클함을 떠올린다.
할머니는 가끔 전화로 네 새끼 너무 이쁘지? 하며 당연한 사실을 물어보곤 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나이가 아마 지금의 내 나이인 걸 보면
내가 널 생각하는 마음을 네 할머니도 느끼는 것 같다.

네 엄마는 가끔은 화를 못 참는 성격의 사람인데
너에게는 절대 큰 소리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을 보며
신기해 할 때가 많다.

네 엄마는 자주 자고 있는 나를 깨우곤 하는데
눈을 떠 보면 너의 잠자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럴 때가 많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시선을 너에게 가져가면
너는 마치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신비로운 모습으로 내 옆에 누워 있다.

가끔 너는 자다가 크게 웃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듯이 신음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항상 네 엄마와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고 네 모습을 바라본다.

너로 인해 매 순간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
항상 몸이 약했던 나는 네가 네 엄마의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
그것 또한 감사하다.

네가 태어난 이후 네 엄마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개미처럼 부지런해졌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고단하다는 표현을 자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존재가 우리 사이에 들어와줘서 고맙구나.

네 잠든 모습을 보며 글을 써본다. 사랑한다. 성하야.

백일을 많이 지난 어느 밤.
사랑하는 아빠가.

2009/07/27 23:29 2009/07/27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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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더 말이 필요없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빌리 엘리어트>와 <디 아워스>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스티븐 달드리의 세 번째 작품이다. 성장기 소년이 연상인 여인과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청춘>과 비교되곤 하는데 사실 이 작품은 그 영화가 지향하는 바와는 다르며 플롯은 두 사람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 속으로 확장된다. 이 영화가 비교적 많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이루이지지 못한 채 여자 주인공이 자살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해 가기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두 사람의 심리, 특히 여자 주인공의 심리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이클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한나에게 성적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는데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으며 마이클을 만나고 나서는 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두 사람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과 더불어 함께 책을 읽으면서 둘 사이의 연인관계를 형성해간다. 그녀의 성실한 성품으로 인해 사무직으로 진급을 하게 된 한나는 자신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조용히 직장을 그만두고 그 지방을 떠나려 하고 마이클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마이클의 몸을 씻겨주고 사랑을 나눈 후 사라진다. 마이클은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그 곳엔 아무도 없다.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법대생이 되었고, 우연히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재판에서 홀로코스트의 전범으로 서게된 한나를 지켜보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이 영화(소설)은 빛을 발하게 되는데 - 마이클의 심리 갈등은 8년만에 만난 한 여인으로 인해 극대화된다. 시대적 정황으로 볼 때 그 당시의 독일 학생들은 홀로 코스트, 즉 유대인 학살에 크게 분노했고 자신의 부모들과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크게 반성했다. 전범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으며, 그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는 마치 맹목적인 신앙과도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8년 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한나에 대한 그의 이중적 감정은 법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점점 커져만 간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걸까', '왜 유대인을 학살하는 감옥 관리자로 자원한거지?', '다 지난 일이야,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며칠 밤동안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매일 지속되는 학교 내의 법정 토론에서 한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치부되었다. 마이클은 아직 그의 몸 속에 각인된 한나의 체취에 대한 애정과 증오의 감정들로 괴로워하다가 지도 교수에게 가서 우회적으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결국 그는 한나를 설득하러 가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 그가 찾은 포로 수용소. 그 곳에서 셀 수조차 없는 죽은 유대인들의 신발들을 발견한 마이클은 그 신발 주인들의 목숨을 해치는 일에 가담한 한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짓고 그녀를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그가 돌아와서 같은 과 여학생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한나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정죄이자 깊은 한 구석에 담아둔 그녀를 떠나보내겠다는 다짐인 듯 하다.

 

마이클은 그 여학생과 결혼하지만 금방 이혼하게 된다. (한나에게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준 테입을 교도소로 보내는 장면에서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이클은 한나에 대한 이중적 원망-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렸던 사랑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치의 전범으로 자신조차 용서할수 없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서 아무런 도덕적인 행동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기에 겪은 사랑의 열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상처받기 쉽고 꼬여있는 한 소년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풀려나기 직전 교도소에서는, 그녀와 연락이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마이클에게  퇴소 후 그녀를 맡아줄 것을 요청한다. 몇 십년 만에 그녀와 만난 마이클. 연인으로 자신의 앞에 선 줄 알았던 마이클은 그녀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과 똑같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도덕적 반성과 참회를 요구한다. (영화에서는 과거 생각을 많이 하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대한 한나의 반응으로 표출된다.)

 

마이클에게 한나는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떠나버린 연인이었다. 그가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마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타인들처럼 그녀의 죄명으로 그녀를 비난하려 했고 그것에 대한 사죄를 들으려 했다. 한나는 자신의 연인으로, 세상 가운데 버려지고 세상 그 누구와도 소통이 어려운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던 그에 대한 마지막 믿음이 상실되는 순간, 그녀의 삶의 의미를 잃었다. 갑자기 자살이라는 결론을 맺은 한나의 돌발행동은 전혀 돌발적이지 않다. 그녀의 일상은 책읽어주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버팀목이 되어왔고 세상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 속에서도 심리적으로 그에게 의지해왔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정죄했던 세상과 동일시될 때, 그리고 그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 크로스, 혹은 랄프 파인즈(마이클 역)은 비교적 플롯의 진행방향대로, 즉 서사적인 방식으로 캐릭터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정보와 단서를 주지만 케이트 윈슬렛(한나 슈미츠 역)은 관찰자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심리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도 계속 한나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어찌보면 한나는 많은 남성들의 고통스런 첫사랑의 환타지와 같다. 아무런 설명 없이 떠나버린 첫 사랑이 언젠가 자신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리라는. 그 첫 사랑에 대한 증오와 사랑의 이중적 감정을 가진 남성들의 끝나지 않는 질문을 떠올리게 만드는, <더 리더>는 그런 영화다. (끝)

2009/07/26 20:49 2009/07/2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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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찬이 책을 냈다.
난 항상 그의 가사들을 보면서 그의 글재주를 부러워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에서 짧은 글을 써서 낭독하곤 했는데 어느날 그 글들을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담당 PD에게 부탁하여 받은 원고를 다듬어서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지난번 소극장 공연 때 들은 얘기다. 책을 낸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그림도 함께 그렸고 나레이션 음반도 덧붙였다. 그의 감성적이면서도 때론 날카로운.. 그리고 대부분이 몽환적이기도한 글들을 책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책과 함께 소극장 공연도 다시 한다고 하니 언제 한 번 가볼까 싶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10문 10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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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온 편지』에 대한 조규찬의 10문 10답

1. 음악만 하다가 갑자기 덜컥 책을 냈다. 생뚱맞고 낯설다. 무슨 일인가?
책을 받아보는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짧은 글을 써서 낭독하는 <달에서 온 편지> 라는 코너가 있었다. 한 주에 한 편을 썼고,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글이 모였다. 노래, 그림, 글은 모두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단지 모양만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통해 그런 일을 해온 나에게는 전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급조된 기획은 이 책 어디에도 없다.

2. 책을 보면 가족애 같은 느낌과 낯선 풍경 같은 것이 느껴진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랄까, 의도가 있다면?
그리움이다. 사라져버린,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사랑이다.

3. 음악과 책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레드 제플린의 <노 쿼터>를 들으면 『해변의 카프카』의 스산한 바람과 낮게 드리워진 짙푸른 구름이 느껴진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 레드 제플린의 <노 쿼터>가 흐른다.

4. 당신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음악 외적인 일들을 부단히 요구하는, 하고 싶어 해온 일.

5. 당신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란?
나 자신도 잊게 될 나를 기록하는 일.

6. ‘조규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감미롭고 때로는 완벽한···, 하지만 좀 가깝게 다가갈 수는 없는 사람 같다. 실제로 그런가?
세상을 사랑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마음이 사람들에게는 거리감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7. 미술을 하다 음악으로 전향했다. 책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나는 못생겼다. 그리고 음악을 처음 시작할 무렵까지 나는 가난했다. 가난하고 못생긴 나에게 미술과 음악은 그 현실의 칼날을 막아주고 잊게 해줬다. 적어도 붓을 놀리고 기타를 퉁기는 동안만큼은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8. ‘나, 조규찬’이라는 챕터가 있다. 한 마디로 조규찬을 스스로 요약한다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9. 전체적으로 음악만 빼고 당신의 전부를 압축한 것 같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나의 아들이 나를 이해하고 기억하게 하는 ‘아빠 설명서’ 가 되어 줄 거라는 희망.

10. 앞으로의 계획과 하고 싶은 음악은? 또 쓰고 싶은 글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다. 이 단순해 보이는 일이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그리운 것들, 그리워하게 될 것들을 기록하고 싶다.
2009/07/18 20:48 2009/07/1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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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의 일이다. 13세의 조던 챈들러가 말했다. “마이클 잭슨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사진)은 알몸 수색을 당했고 언론은 그의 집에서 포르노 잡지와 어린이의 나체가 그려진 그림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잭슨과 섹스를 했고 입으로 하는 성행위까지 강요당했다는 챈들러의 진술 또한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챈들러의 가족은 2330만 달러를 합의금으로 챙겼다.

2001 년의 일이다. 잭슨이 말했다. “소니는 아티스트로서의 제 재능을 파괴하려 해요. 모욕을 당해왔습니다.” 뉴욕 투어 중 할렘가를 지나던 참이었다. <인빈서블> 앨범 출시 이후 격해진 소니뮤직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청중 가운데 누군가 소니를 욕하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리자 잭슨도 따라 했다. 그날 미국의 주요 언론은 일제히 마이클 잭슨의 상스러운 손짓을 수십 번씩 되풀이해 방송했다. 잭슨은 소니와의 연장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2003년의 일이다. 13세의 게빈 아르비조가 말했다. “마이클 잭슨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그는 잭슨의 도움으로 암수술을 받고 건강해진 상태였다. 200명이 넘는 증인이 소환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소년의 어머니를 신뢰할 수 없다는 증거가 속출했다. 수년에 걸쳐 결국 무죄판결이 내려졌지만 3억 달러에 이르는 소송 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2009년 6월25일, 소아성애자면서 성형중독자이고 흑인을 혐오해 백인이 되고자 했다는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 어느 한쪽 주장을 일관되게 전달해왔던 언론의 바로 그 지면에는 잭슨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회고하는 기사가 채워졌다. 고인이 반대했으나 소니가 일방적으로 발매했던 두 장의 히트곡 편집 앨범과 <스릴러>는 일주일 만에 31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소니와 소니뮤직의 회장은 “잭슨은 시인이고 천재였다”라고 입을 모았다. 잭슨에게 소아성애자라는 꼬리표를 남겼던 조던 챈들러는 당시 주장이 아버지의 강요로 이뤄진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없게 돼 원통하다고 덧붙였다. 조만간 챈들러의 자서전이 출간될 예정이다.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괴물은, 그렇게 우상이 되었다.
2009/07/16 22:50 2009/07/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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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고(3): 변화와 반론(2)


이원론 vs. 혼합주의
지난 글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모더니즘적인 요소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반론들을 살펴 보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기독교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세계관이 아니며, 그간에 통용되어온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므로 구체적으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라 불러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우선은 ‘이원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송인규는 자신의 책 <죄많은 이세상으로 충분한가>에서 ‘이원론적 행습의 탈피’를 세계관의 핵심 문제로 내세웠고 이후 <복음과상황>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저서 <평신도 신학>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원론 문제는 첫 연재에서 다룬 바 있으나 주의 환기를 위해 다시 조금만 인용한다.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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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인규는 <평신도 신학>에서 ‘세상1’(구조)을 ‘세상2’(방향, 즉 세속화)처럼 여겨서 ‘세상1’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혼합주의로 치부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잘못된 이원론적 구도는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 예배와 활동, 성경과 학문,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등 세상 속의 많은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층위의 개념들을 성속 개념으로 대체하게 만들었고 이른바 이런 ‘이원론적 행습’의 탈피는 80-90년대 로잔언약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김용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고”)

이에 대해 김기현은 자신의 연재 글을 통해 이원론 자체를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치부하여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송인규의 세상과 세속화 구분에 대해 “한국교회의 문제는 ‘세상1’과 ‘세상2’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2’가 교회 안에 침투해서 사실상 장악 당한 것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세상과 교회의 이원론적 구분보다는 교회의 세속화에 더 주목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니, 사실상 그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이원론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그는 <평신도 신학>에서 수미일관되게 성속 이원론이 세상과의 격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분리도 세상과의 관계 맺는 하나의 존립 양식이고,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듯이 분리도 변혁적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과 절대 고립된 공동체는 추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절연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기현,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

따라서 그는 이원론이 아니라 실제 교회의 문제인 세속화 즉, ‘혼합주의’를 기독교 세계관의 전면에 세울 것을 제안한다.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이원론에서 혼합주의로의 전환은 결국 개혁 모델에서 대립 모델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최근에 있었던 <아볼로 포럼>에서 송인규의 발제에 대해 김기현은 아래와 같이 논평했다.

"저는 기독교 세계관의 패착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성서와 우리 현실은 이원론을 별반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란 것 자체가 허구입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늘 문제였지요. 언제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세상과 동떨어진 채 살았나요. 지나치게 세상적으로 살았지요. 예배와 생활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예배도 황금송아지를 숭배했지요. 성경적으로 예배했는데, 삶에서 그대로 못 살아낸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가, 신앙 자체가 세속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점을 ‘혼합주의’라 명명했습니다. 교회사에서 ‘콘스탄틴주의’라는 말을, 현대신학에서 ‘세속주의’라는 말을 문화 인류학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바꾼 것이지요.” (김기현, “다시 써야 할 기독교, 세계, 관”)


하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송인규가 자신의 책 <평신도 신학>에서 이미 이원론과 세속화 문제를 통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세상-세속-교회 모델(이렇게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을 아래와 같이 세분한 후에 각각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나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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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교회의 영역에 속한 사항이나 활동. 비세속적, 영적인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
② 교회의 영역에 속한 사항이나 활동. 세속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
③ 세상의 영역에 속한 사항이나 활동. 세속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④ 세상의 영역에 속한 사항이나 활동. 비세속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그는 ②영역, ‘교회영역의 세속화’를 소주제로 다루면서 “특히 신앙에 열심 있는 이들과 지도자들 편에서 깊이 생각하고 또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고 “보통 교회나 영적인 것에 연관된 활동이나 항목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다고 그릇되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려했으며 나아가 “영적인 일도 얼마든지 정욕과 자랑 같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찌들 수 있다는 경각심이 둔화”될 수 있음을 경계하였다. 결국 송인규의 세상-세속-교회 모델은 김기현의 비판에 대한 자체 방어가 가능한 셈이다. 실제로 그는 <아볼로 포럼>에서 김기현이 지적한 논평에 대해서 “한국 교회에 있어 이원론은 없고 혼합주의만 존재한다라는 식의 진단은 사실을 부인하는 일”이며 “이원론과 혼합주의의 문제는 양자택일이 아니고 양자병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부연설명 한 바 있다.


개혁모델이냐 대립모델이냐
그렇다면 왜 김기현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이원론적 사고를 부정하는 것일까. 그는 이원론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 진단이 이원론이냐 혼합주의냐에 따라 세계관의 방향성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만일 교회의 주된 문제가 잘못된 이원론적 행습의 탈피라면 세상에 침투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른바 개혁주의적인 ‘변혁 모델’이 그 대안이 될 것이지만, 혼합주의가 교회의 고질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라면 결국 그 해결책은 변혁 모델이 아니라 교회의 세속화에 강하게 저항하는 ‘대립 모델’(리차드 니버의 구분을 따른다면)이 그 대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니버가 비교적 우월하게 평가한 변혁(개혁) 모델에 대한 비판은 김기현의 지적대로 존 하워드 요더나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같은 신학자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하우어워스는 변혁 모델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요더의 유형론을 토대로 고백 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해왔다.

“니버가 특정 유형의 교회론을 선호하며 그것은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행위의 통일성을 내세워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와 정치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콘스탄틴주의의 사회전략을 승인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니버가 제시한 유형론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존 하워드 요더의 유형론이다. 요더는 행동주의 교회, 회심주의 교회, 고백 교회로 구분한다. 고백교회는 위에서 언급한 두 견해를 종합한 것이 아니며 그 중간쯤에 있는 유용한 이론도 아니다. 차라리 별개의 급진적인 대안이다. 고백교회는 회심주의자들의 개인주의와 행동주의자들의 세속주의를 거부하며 또 양쪽이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동일시했던 태도도 거부한다. 고백교회는 자신의 주된 정치적 사명이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세상에 나그네 된 백성>)

니버의 대립 모델을 ‘고백 교회’라고 부르건 ‘대조 모델’이라고 부르건 간에 이러한 세계관 모델의 차이를 가져다 주는 근본 원인은, 내가 판단하기에는 무엇보다 신학적인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차이가 결국 김기현이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로도 환원되는 것 같다. <아볼로 포럼>을 다녀온 정정훈은 이와 관련하여 비교적 설득력 있는 글을 복음주의 싸이클럽에서 쓴 바 있다.

“기독교 세계관의 다양성은 결국 모든 기독교 세계관의 상대성(상대주의가 아니다)을 인지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양성이 어떤 층위의 다양성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가설적이지만 나는 그 다양성의 층위는 결국은 신학적 층위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차이는 신학적 입장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들의 세계관을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전이론적 차원이 절대 아니다. 신학이라는 이론적 층위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전이론적' 차원을 오히려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이 신학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결국 문제는 세계관이 아니라 신학이다. 이는 조금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사실상 세계관이란 신학의 외피에 불과한 것이며, 세계관을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학을 배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복음주의 싸이클럽 “아볼로 포럼을 다녀와서”, 정정훈)

과거 한국의 복음주의는 대체로 칼빈주의(개혁주의) 계열에 속해왔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적 개혁주의자가 아닌 다른 교파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최근 복음주의권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존 하워드 요더는-변혁 모델에 비판적인 김기현과 하우어워스가 자주 인용하는- 메노나이트 계열(재세례파 중 최대 교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따라서 존 요더가 가진 ‘고백 교회’라는 유형에 대해 이해하려면 메노나이트와 칼빈주의에 대한 약간의 추가적인 비교가 필요할 듯 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교파간의 차이를 비교적 간략하게 설명한 남병두의 저서 <기독교의 교파>를 주로 인용할까 한다. 먼저 칼빈주의에 대한 남병두의 설명을 인용해보자. 

 “칼빈은 제네바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면서 개혁 작업을 성공적으로 실현시켰으며 제네바는 개혁의 한 모델을 보여주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처음부터 교회와 시의회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져갔다.
교 인의 삶에 정부의 적극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 칼빈은… 정부가 교회의 외형적 치리에 있어서는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제네바 모델은 각 나라의 개혁자들에 의하여 모방되었고 곧 유럽의 곳곳에서 개혁교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프랑스의 위그노파,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영국의 청교도, 그리고 이후 신대륙에 세워진 회중교회 등이다.” (남병두, <기독교의 교파>)

따라서 칼빈의 영향 아래에 있는 개혁주의는 처음부터 세상을 협력 내지는 적극적 참여와 개혁의 대상으로 여겨왔고 그에 대한 일련의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권력과 조화 자체가 문제임을 인식했던 또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존재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남병두는 이러한 또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연장선 상에서 재침례파(재세례파, 아나뱁티스트)가 생겨났음을 설명한다.

“또 하나의 종교개혁은 주류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적-신학적 문제제기에 동의하면서도 교회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교회와 국가의 합일, 즉 교회와 사회의 구별이 없는 국가교회에 있다고 주장한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존 교회는 기초부터 잘못 세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각 개개인의 신앙고백을 근거로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했으며 의도적 분리를 시도하였다. 복음적 재침례교가 여기에 속한다… 당시 기독교 유럽에서 세속 군주들과 함께 그들의 영역 안에서 정치적 진행상황과 직간접으로 연관을 가지며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의 상황에서 세속군주들의 도움을 거부하고 제도 교회의 틀을 깨고 나온 '재침례운동'이 주류에 들어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은 당대에는 적들에 의하여 조롱의 의미로 '아나뱁티스트'라고 불리곤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가 신약성서에 나타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개혁'이라는 말보다는 '회복' 혹은 '복귀'라는 말을 더 선호하였다… 그들은 교회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을 윤리적 타락이나 신학적 타락에서 찾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 상실에서 찾았다. 교회의 정체성 상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권하였던 4세기 초부터 시작된 국가와 교회의 합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남병두, 같은 책)

따라서 평신도들의 입장에서는 재침례파와 개혁파의 역사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변혁이냐 대립이냐를 두고 경쟁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사실상 신학의 문제이자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큰 ‘습속’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변혁 모델을 부정하고 대립 모델을 내세우는 김기현이나 요더의 기독교 세계관은 재침례파의 전제 즉, 기독교의 문제가 교회와 국가의 ‘혼합주의’라고 여기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요더의 사상 근간에 흐르는 기독교 평화주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재세례파의 신학적 입장이다.

“재침례교 운동의 신학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회론에 있다. 국가교회를 배격하고 신자의 교회를 추구하면서 신약성서의 원시기독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염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정교분리와 완전한 종교자유를 주장하였다. 국가는 오직 시민들의 질서와 공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교회의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그들의 사상은 평화주의였다. 그들은 산상수훈에 근거하여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도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재침례교의 평화주의 사상은 현재 정당전쟁 이론의 뚜렷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남병두, 같은 책)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 문제 있나?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분명 변혁 모델을 우위에 두었음이 분명하지만 그는 변혁 모델만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읽었다면 양희송의 지적대로 니버의 책을 오독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반대로 (김기현의 지적처럼) 마치 세계관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전제하고는 개혁 모델 자체를 현실성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나는 문제라고 본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이 둘은 충분히 양립 가능한 모델들이다. (그러한 이유로 두 교파도 양립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개혁파 입장에서 보는 재세례파는 어떠한가. 대학 시절 나는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하면 왠지 모르게 이단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알게 모르게 재세례파에 대한 개혁주의 내의 비판이 간간이 있었던 것 같다. 이후에는 이러한 편견이 많이 해소되었지만 몇 년 전 신국원의 책을 읽다가 비슷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천국관의 대표적인 예는 제세례파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제세례파의 천국관은 처음에는 혁명적이었다. 이미 임한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사거은 1534년 독일 서북부에서 일어났다. 일단의 재세례파가 뮌스터를 함락한 후 그 곳을 새 예루살렘으로 명명하고 신정을 펼쳤다. 그러나 천국을 이루려는 과격한 개혁으로 도시는 곧 혼란에 빠져들었다. 예를 들면, 미혼여성을 모두 결혼시키다보니 남성이 모자라 일부다처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런 소식에 분노한 신구교 연합군의 공격에 1년여 만에 도시가 함락되고 지도자들은 생포되었다… 어쨌든 이런 사건 이후 제새례파는 급진주의를 버리고 정반대로 은둔과 내세적 신앙으로 돌아섰다…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것은 통하는 데가 있게 마련이다.” (신국원, <니고데모의 안경>)

물론 신국원은 세계관 논의를 하면서 그릇된 천국관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는 은연 중에 재세례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재세례파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파이며 특히 천국관에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고 이제는 반대 극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복음과상황>에 아나뱁티스트 관련 글을 기고했던 김창규는 이러한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오해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재세례파에 대한 이런 평가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뮌스터사건이 재세례파를 대표하거나 정의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여러 분파의 재세례파들 중에 일부였고, 실제적으로 재세례파의 큰 줄기인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재산공동체인 후터파(Hutterite), 북부 독일과 화란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의 그룹과는 극히 대조되는 신학과 삶을 보여준다.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의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게 되면 하나의 잘못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김창규, 복음과상황 170호<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뱁티스트>)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마지막 연재를 통해 좀더 이야기할 생각이지만, 아나뱁티스트에 대해서는 한국 교회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 하나를 다시 언급하고 싶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중에 우리 나라에서도 ‘인간 방패’로 반전평화팀을 파송했을 때 복음주의권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이 거론되었다. 아나뱁티스트가 복음주의권에 회자된 이유는 복음주의권에서 파송하지 않은 반전평화팀을 아나뱁티스트는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주재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은하 씨는 편지 한 장만 들고 알지도 못했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라크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여기 아니면 아무도 나를 이라크로 보내주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없나요."... 이재영 간사는 아나뱁티스트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화운동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명하다. 우리가 파송하지 않아도 그는 이라크에 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파송하자'고 회신을 보냈다. 캐나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들도 유은하 씨를 위해 기도하며 모금활동을 펼쳤다. 유은하 씨는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 이라크로 향했다... 전쟁이 끝나 생사의 문제가 부담이 안 되는 지금에야 비로소 다들 유은하 씨와의 관계를 들춰내고 있다. 유은하 씨는 분명 몸은 '복음주의 진영'에 있었지만 파송은 평화주의 교회로부터 받았다.” (주재일, 뉴스앤조이 “유은하가 전쟁터로 떠난 이유는?”)

당시 나는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 마음이 착잡했었다. 사회 참여를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친정과도 같은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내쳐진 반전평화팀을, 아나뱁티스트는 흔쾌히 받아주고 그들을 파송하고 진심으로 기도해주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나는 김두식 교수의 <평화의 얼굴>이나 존 요더의 책들을 읽으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 반전 평화운동과 같은 이들의 실천에 크게 감동했었다. 나는 신학이나 세계관에 있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못되지만 이원론이나 변혁 모델을 끌어안지 못하는 김기현보다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몸소 실천한 아나뱁티스트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파 정도로 평가절하하고 고고하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이 더 큰 문제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단지 나만의 생각인가. (계속)


**이 글은 월간<복음과상황> 09년 7월호 기고글입니다.

2009/07/01 23:38 2009/07/0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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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에 대해서는 지금도 공중파를 통해서 연일 그의 삶을 조명하는 내용의 방송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는 예전부터 그를 좋아했고 대통령 선거 때도 그를 뽑았다. 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선의로 받아들였으나 집권 후에는 다소 실망한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 민주당과 갈라섰던 대목에서 나는 민주당에 잔류했던 추미애를 더 높이 평가했고, 이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은 채 진행된 한미FTA 협정에서는 그의 정치 철학을 뒤집는 듯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런 때문인지 이번 검찰 조사에서도 노무현에 대한 실망이 그리 크게 생기지는 않았다. 항시 권력 주변에는 자신이 원치 않아도 비자금이 어떤 식으로든 생길 수 있으며 그 금액조차도 미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사법처리하겠다는 데에 나는 반대였지만, 진보적인 이들이 MB를 겨냥하고 법대로 집행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반드시 사법처리하라는 이들의 말을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돌연 목숨을 끊었다. 조사를 받고 나온 날 기자들을 향한 어색한 웃음을 뒤로 한채 고향 봉하마을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다수는 그렇지 않으나 간혹 주변에서 노무현과 그의 죽음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듣는다. 그 중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비판은 그 주변이들에게 한(恨)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의 죽음이 권양숙 여사와 그 자녀들에게는 한국 정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고, 그들이 어느정도 연루되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기 힘들 것이다. 유시민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도 아마 남은 삶을 살면서는 현 정권에 대한 분노의 정치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분노와 비극의 화살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던지는 것은 그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 마치 벼랑 끝에 내몰고 나서도 떨어지지 말고 버티길 명령하는 것처럼. 그것은 목숨을 뒤흔들어 놓고도 혼들리지 말라는 요청에 다름 아니다. 노무현은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대통령직을 잘 보존했다지만 그는 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진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힘들어하는 여린 존재였다. 냉정한 정치판에서 눈물을 보이기 일쑤였고 자주 흥분했으며 말을 삼킬 줄 몰랐다. 그런 그를 국민들은 지지했고 때론 크게 실망했고 이제는 결국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생의 마지막 며칠은 병원에 입원을 권유받을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 보였고 기력이 없어 보였으며 심하게 자주 스스로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를 둘러싼 많은 조력자들을 하나둘씩 단지 노무현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속에 들어갔고, 점차 가족들에게도 그 수사망을 좁혀 압박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비난의 잔을 그는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죽음을 놓고도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지만 나는 그의 죽음이 여린 그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가혹한 방법으로 그를 몰아세워갔고 이 비극이 그가 벼랑끝에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었다고 느낀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를 만들고는 잘못을 했으니 그것을 달게 받고 끝까지 견디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에게 우리가 요구해야 했던 도덕성의 본질이었던가.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전직 대통령이 아닌, 인간 노무현이 너무 안타까워서 매순간 현기증이 난다. 봉하마을에서 그의 원대로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낼 수는 없었을까. 정부가, 검찰이,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그를 심판하고 싶었던가. 그를 지지했건 그렇지 않았건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를 애도할 것이다. 그의 생전에 그의 비판적 지지자였던 나도 그를 가슴에 묻어야겠다. 권양숙 여사의 말처럼 이제는 더이상의 고통없이 편히 쉬시길 기도한다.

2009/07/01 22:51 2009/07/01 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