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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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5)
- 직장인과 기독인 사이에서

 


어느 날 상사가 내게 주말엔 뭘 하고 지내냐고 묻길래 별 생각 없이 일요일엔 교회를 간다고 했다. 그러자 대뜸 실눈을 뜨며 "너 그런 것도 하냐?"라며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반응으로 인해 하루 종일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교회에는 뭐하러 귀찮게 다니냐고 물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나 같은 부류가 교회를 다닐 거라는 건 좀 의외라는 반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상사는 나 같은 부류는 어떤 부류라고 생각한 걸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는 술자리를 마다 않는 부류로 생각했을까? 아님, 식사 시간에 밥을 앞에 두고 잠시 묵념조차 하지 않는 부류로? 솔직히 그런 것보다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삶에서는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부류로 보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분은 기독인에 대한 안 좋은 면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해서 그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곤 했는데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했으니 내가 유별나 보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기독인은 어떤 모습일까.

 

때로 주변을 보면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부류의 직장인들을 만난다. 같은 선교단체 출신의 학사들을 만나면 주일성수나 경건생활을 규칙적으로 못한 지 오래되었다며 학생 때보다 망가져서 산다는 푸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주일에 교회에도 잘 가고 회사에서 신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식사 시간을 쪼개어 말씀을 나누고 퇴근 버스 안에서도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나만의 느낌일까. 난 교회를 다닌다고 자처하는 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혹은 교회의 지체들에게서 뭐라고 딱히 꼬집을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이기적이라고 할까, 혹은 냉정하다고 할까. 아무튼 그들은 쉽게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동료들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법이 없다. 주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하겠다는 말로 슬쩍 발을 빼기는 해도, 즉시 달려가 살펴봐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한 경우가 많다. 또한 사내의 불합리한 구조적인 문제나 집단 행동에 있어 자주 방관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업무를 하는 데에 있어 책임감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종종 듣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안 좋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나는 내 눈보다 더 부정적으로 기독인들을 대하는 직장의 동료들, 상사들과 함께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를 다닌다고 말한 그 날 이후로 나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정작 그 분에게 교회 다니는 후배 사원인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 날 이후로 나는 회사생활 5년 만에 처음으로 먼 발치에서 나란 사람을 돌아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많은 기독 직장인들과 구별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가. 사실 자신이 없다. 물론 나는 튀는 사원임에는 분명하다. 회사에서 있었던 진급자 회식날, 여성 도우미들이 나오는 유흥주점에서 한 턱을 크게 내라는 회식 분위기에서 가족과 자녀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식사 모임으로 하지 않으면 회식비를 안 내겠다고 우겨서 결국 진급자 축하 회식날 상사들의 가족들과 함께 주말 식사를 했던 적도 있었고, 회의 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의사 결정에는 굳이 나서서 따져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내에서 경조사가 생기면 항상 어디든지 가서 경사면 축하해주고 조사면 위로해주는 동료들도 많은데 나는 자주 그러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늦게까지 일을 마치지 못해도 나는 내 업무가 끝나면 언제고 별 고민 없이 퇴근했다. 솔직히 그간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어필은 많이 했어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희생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역으로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세속적인’ 직원들을 오히려 직장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부류로 취급하기도 하니, 사실 그간에는 회사 생활에서 한 발을 적당히 빼고 지내는 게 올바른 행동 같았다. 이 세상 집은 내 집 아니듯 이 직장도 내 진정한 삶의 터전이 아니리라!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이는 회사에 대한 희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일터에 속한 공동체 일원들에 대한 희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 속에서 기독인인 나의 자리 매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 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많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을 보며 때론 놀라고 때론 칭송하며 그 무리를 따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공유했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도를 따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낼 필요 없이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높은 도덕성과 헌신, 그리고 사랑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내 일터, 내가 속한 지역 사회는 어떤가. 그들은 내가 전도를 하고 다니지 않아도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나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나의 높은 도덕성으로 인해 매 순간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불합리한 업무에 또박또박 불만을 토로하기는 잘 하지만, 여러 일들로 힘들어 하는 주변 동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노력 없이 이름만 몇 번 불러대는 형식적인 기도로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리곤 하는 나와 같은 기독인에게서 진정 복음을 발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은 삶이자 일상,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예배당에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여기 저기에서 큰 소리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다 해도, 직장이나 지역 사회, 가정과 같은 일상의 구석 구석에서 섬기며 희생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서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실감한다. 굳이 식사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예수에 대해 마치 보험을 팔 듯 입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지 않아도 기독인의 주변을 통해 그들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의 현장성이 우리 기독 직장인에게는 부족하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교회 다닌다는 나의 고백에 누가 됐든 또다시 내게 “너 그런 것도 하냐?”는 물음을 던질 것이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8월호 기고글

2008/08/01 00:06 2008/08/0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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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와스는 자살을 그 행위자에 대한 판단으로 귀결시키지 말고 공동체로서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보듬어 주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로 보도록 합니다. 그는 이것을 '자살의 문법'(grammer of suiacide)이라고 명명합니다. 삶은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인데, 그 선물을 서로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비극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살은 그 공동체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상처받은 연약한 영혼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없이 그들을 또다시 지옥간다는 말로 협박한다거나 장례마저 거부하는 것은 최소한 죽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거니와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다운 행동이 아닙니다.

(김기현, "가룟 유다 딜레마" 중에서)

2008/07/20 20:06 2008/07/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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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문제로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가수 싸이가 지난 12월 17일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재입대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합니다. 싸이는 “공연 하면서도 못 뺀 살을 군대에서 빼고 돌아오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는군요. 싸이에게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간 싸이가 구질구질하게 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은 꽤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엔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끝까지 잘못한 게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참 많지요. 그 점에서 보자면 싸이씨의 이 화끈한 멘트는 가슴에 팍 와 닿습니다. 싸이가 그간 역설해온 ‘챔피언'의 진정한 면모를 뒤늦게나마 보여준 게 이만저만 반가운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함보다는 실수를 하더라도 그 실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에 더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싸이,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살 빼는 건 당신의 자유입니다만, 당신의 한 팬으로서 당신의 살도 사랑한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군요. 늦은 나이에 군대생활을 다시 한다는 게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만, 당신은 그마저 기쁨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우리 모두의 챔피언이라는 걸 믿습니다.

(<지성인을 위한 교양 브런치>중에서, “그동안 구질구질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전문)
2008/07/20 19:10 2008/07/2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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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관이 있는거야?
/한벼리

목하고 엉덩이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는거야?
목이 아프면,
목에다 주사를 맞아야 되는 것 아니야.
목하고 엉덩이하고 상관이 없으면,
목이 아픈데,
왜 엉덩이에다 주사를 맞는 것이야.


참 이상해요
/강준형

우리 형아는요, 참 이상해요.
자기가 라면 끓여 놓고요.
할머니 보고요,
'잘 먹겠습니다.' 하거든요.


(박문희, 이오덕 "침 튀기지 마세요" 중에서)
2008/07/18 19:08 2008/07/1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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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4)
- 직업과 소명 사이에서


예 전에는 더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간간이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질문이 있다. 자동차회사가 적성에 맞느냐는 거다. 이런 류의 질문은 대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과 친구들도 자주 묻곤 했다. "넌 공대생 같지 않아" 사실이 그랬다. 나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세계관과 기독교 문서운동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교회 목사님은 내가 신학을 할 거라고 생각했고, 선교단체 사람들은 내가 문서사역 내지는 기독 출판계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나 또한 전공필수 과목 외의 선택 과목은 과학철학이나 논리학, 미학 같은 공대생들이 거의 듣지 않는 과목에 시간을 쏟고 있었고, 때때로 기독교 단체들 주변을 기웃거리곤 했다. 내겐 그런 일들이 더 신앙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다른 무엇보다 더 가치가 있어 보이곤 했다. 물론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다. 장학생은 아니었지만 매주 해야 하는 과제들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단지 믿는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듯 이 일이 내 소명은 아니라는 생각,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전공에 몰입할 수 없었고 졸업을 앞두고는 최선을 다하는 일에 자주 머뭇거리곤 했다. 졸업할 시기가 되어 진로를 고민하다가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옳은 일인지 갈등이 되었다. 나의 신앙적 기준으로 볼 때 나 같은 사람은 대학을 다니면 안 되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한 것이니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나는 대학원을 가기로 했다. 대학원 진학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내겐 4년간의 학문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고 졸업 후, 6년간의 투자에 맞는 전문직을 얻어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그 시간이 내겐 중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 생활은 유익했다. 유익했다는 말이 좋았다거나 즐거웠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론에 충실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했다. 글을 쓸 때에도 스토리에 관심이 있지 통계치나 디테일한 부분을 그리 잘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간 연구실은 주로 전산설계를 하는 곳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로그래밍에 할애하곤 했다. 프로그래밍은 흥미로웠다. 사실 내게 모든 학문은 흥미로웠다. 특히 개론 과목들은 언제나 나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석사 1년차에 나는 첫 세미나를 하게 되었고 논문과 책에 나온 자료 구조(data structure)와 컴퓨터 그래픽 알고리즘(algorithm) 몇 가지를 발표했다. 새로운 개념들이 즐비한 논문들에 나는 매혹되었고 발표하는 내내 내가 요약한 발표 자료들과 힘있는 내 목소리가 한 곡의 클래식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갑자기 박사과정 선배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매우 디테일한 질문들이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은 어떤 것인지, 코딩 시에 인터페이스는 어떻게 구현되는지, 데이터가 초과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등등 지금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그런 질문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게 뭐 대수냐는 류의 대답을 우회적으로 했던 것 같다. 선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해봤어?" 난 논문에 나온 결과들을 다시 읊었고 선배는 다시 되물었다. "네가 직접 코딩해봤냐고." 결국 한 주 뒤에 프로그램을 짜서 다시 발표를 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더 많은 것들을 공부할 수 있을텐데 사소한 코딩에 시간을 쏟는 것이 아까웠지만, 못 믿겠다는 선배의 표정을 바꿔놓고 싶어졌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났지만 코딩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방법도 아니고 10여년 전에 이미 완성된 논문 속 알고리즘을 짜는데 한 달이 걸렸다. 알고리즘은 간단해 보였지만 컴퓨터 환경 안에서 구현해야 하는 알고리즘들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윈도우즈 환경에서 입출력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UI(유저 인터페이스)를 구성해야 했고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메모리 관리를 해야 했다. 내 프로그램이 메모리 부족으로 다운되지 않으려면 다른 프로그램의 동작들을 자주 방해했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과 컴퓨터 메모리를 효과적으로 나눠 쓸 수 있도록 자료 구조를 설계해야 했다. 물론 지금은 컴퓨터 환경이 더 좋아졌고 반복적인 코딩 작업들은 자동화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컴퓨터 안에서 직선 몇 개를 보여주는 데에도 알아야 하는 그래픽 관련 함수들이 많았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한 달 후 시연을 보인 프로그램은 돌발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갑자기 마우스를 더블 클릭을 한다거나 보이는 창의 사이즈를 키우거나, 데이터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입력하는 경우 프로그램은 오작동했다. 그러한 돌발 상황에 대한 에러 처리 코딩을 매번 해 줘야만 완벽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난 한 달 동안 이 허접한 프로그램과 씨름하고 나서야 박사과정 선배의 "해봤어?"가 마음으로 와 닿았다. 안 해보면 모르는 거다. 난 모르고 있었다.

실행 의 중요성에 대한 맛보기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이론과 개론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내게 대학원 2년이란 기간은 충분치 않아 보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2만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고, 그 2만개의 부품 중 몇 개의 아이템을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 개발회의에 들어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회의실에 온 연구원들은 부품들의 배치를 놓고 의견 조율을 하고 있었다. 말이 의견조율이지, 까놓고 말하자면 자기가 설계하고 있는 부품들 간의 간격을 확보하기 위해 대놓고 싸우고 있었다. 자동차 안의 공간은 정해져 있는데 개발 컨셉트에 따라 그 공간 안에서 부품들은 서로의 간격을 정해진 규칙대로 확보해야 한다. 신입 연구원인 나에게 그 회의 광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5~6밀리미터 정도의 간격 때문에 머리가 하얀 아저씨들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듯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 키보다도 훨씬 큰 자동차에서 손가락 한 마디조차 안 되는 길이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 날 나는 사수에게 흔히 하는 말로 엄청 깨졌다. 자기 부품이 못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내 모습에 화가 난 것이다. 그 날 나는 과거 대학원 시절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부품의 치수들은 내 어림짐작보다 더 중요했다. 5밀리미터 간격을 더 두느냐 안 두느냐에 따라 차량 주행 중에 소음이 발생하곤 한다.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도 내가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손가락 한 마디보다 짧은 간격으로 인해서다. 그 뿐이랴. 3D모델로 정교하게 설계하더라도 실제 부품을 만들 때는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금형(金型)에 쇳물을 부어서 식힌 후에 빼내어 완성되는 대부분의 자동차 부품들은 금형의 뽑기 방향에 따라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이도 반드시 설계자가 고려할 부분이다. 공차 관리도 해야 한다. 0.2밀리미터까지 도면으로 관리하는 공차에 따라 볼트나 너트가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 가기도 한다. 이런 설계자의 작은 실수들로 인해 부품지원이 늦어져서 결국 차량 제작이 몇 주씩 늦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성능은 배제한 순수 부품의 조립만을 고려한 것이다!

MBTI 성격유형에 따르면 나는 ENTJ(지도자형) 혹은 ENFJ(언변능숙형)에 속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로 논리를 세우는 일들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창피한 일이지만 때때로 나는 실행해보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도 대략 감만 잡히면 마치 모든 것을 겪어본 것처럼 과장하기도 했다. 난 가끔 내가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하여 공과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았다면, 더욱 허풍이 세져서 말을 과장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내 본성이 그랬다는 말이다. 난 경험하지 않은 일에 있어서조차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말을 곧잘 하지만, 사소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고 작은 일에도 책임감 있게 끝까지 그 일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상당 부분에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직업은 최소한 나의 모난 성격을 다듬어 주고 있다. 특히 말단 연구원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마치 내가 CEO라도 된 것처럼 큰 방향이나 설정하고는 사소한 일들에는 의미를 좀처럼 부여하지 않는 내 부족한 모습을 직시하고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내 직업이 천직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가지고 전공으로 선택한 데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은 이렇듯 나를 바꿔놓고 있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자리는 내 인격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이며 작은 일에서조차 최선을 다해야 하는 곳임을 조금씩 깨닫는다. 앞으로 펼쳐질 삶의 많은 여정 가운데 나의 선택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떠하든지 말이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7월호 기고글.
2008/07/01 00:05 2008/07/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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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 (3)
- 손으로 쓴 편지


요즘은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더 이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설가 김훈처럼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글을 쓰지 않으며, 굳이 연필로 글을 써야만 고상해 보인다는 생각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음악도 그렇다. LP판으로 듣기를 고집했던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도 CD나 SACD와 같은 진보된 기술에 마음을 열고 있다. 그 뿐인가. 휴대폰은 버스 안에서도 내 위치를 알려 줄 수도 있게 되었고, 이제 영상을 보면서 통화를 하는 시대가 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고속철도로 2-3시간이면 이동이 가능하다. 처음 인터넷에 접속했을 때, MIT나 칼텍 같은 유명한 대학교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원서로만 보았던 교수의 이름과 수업 커리큘럼, 그리고 참고 도서나 강의안과 같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그 당시의 인터넷 속도는 너무 느려서 문서 파일을 받는 데에만 몇 분이 걸렸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또한 전자메일이 보편화 되어 지방에 있는 친구들이나 미국에 사는 이모에게도 실시간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급속도로 빨라지는 기술의 발전에 비교적 호의적이다. 공학 전공자로서 이전에는 기술이 없어서 구현하지 못했던 많은 현실적인 제한들이 이제는 무의미해졌음을 절감한다. 상상력만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기는 오히려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빠르고 저렴한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할 수 있는 많은 도구들이 생겨나는 것에 감사하기까지 하다. 내 할머니 세대의 어른들은 자식이 이민 가던 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마중을 나선 길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이모나 사촌 동생들을 블로그나 인터넷 공간에서 매일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사진이나 글들을 읽으며 마치 옆에서 그들을 대하듯이 느끼고 경험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친척이 지방에 내려가서 살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끊었고, 더 길게 이야기할 사연이 있으면 편지를 썼다. 편지는 답장을 받는 데에만 열흘이 남짓 걸렸다. 지금은 길을 걷다가도 생각만 나면 부산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대화할 수 있다. 편지를 쓰고 싶다면 인터넷의 우체국 사이트에서 쓴 글을 봉투에 넣어 하루나 이틀 사이로 배달까지 해준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지인들의 생일이나 경조일, 그리고 기념일들도 저장해두면 매년 잊어버리지 않고 나에게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허나 이런 기술의 최첨단 시대에도 문제는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연락도구들은 점점 발달하고 있는데 나는 이전보다 더 인간관계가 삭막하게 느껴지고 외로움과 고독감을 심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익숙한 것들에 더 무심해지기 때문일까. 처음에 환호했던 이메일이나 인터넷 블로그에는 상업적인 글들만 즐비하고 이젠 안부를 이메일로 묻는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는 기술적 우월성은 사람을 더욱 나태하고 가볍게 만드는 듯 하다.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으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제한된 종이에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 받고는, 엽서에 글을 쓰기 전까지 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지극히 절제된 글을 가족들에게 썼다. 그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여건에서 썼던 글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엽서>를 통해 다시 읽어 보아도 한 줄 한 줄 가슴을 울린다. 내가 매일같이 소리의 속도보다 빠르게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날려보내는 많은 이메일과 정보들 중에도 이런 절제와 진중(鎭重)함이 있었던가. 마치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허락 받은 이후로 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죄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처럼, 더 편해지고 가치 있어 보이는 ‘연락 도구들’은 우리를 서로에 대해 더 무관심한 존재로 만드는 듯 하다.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본 지가 10년이 넘은 것 같다. 아니 특정한 용건 때문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람을 기뻐하여 사람을 위해 편지를 써 본 지가 참 오래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우정을 나눈 벗들에게. 매일 수많은 말들을 내뱉지만 그것들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지고 그런 수많은 말들을 아끼고 아껴서 어떤 공간 안에 빼곡히 담았다가 전해주는 일이 그립다. 우리는 그리운 지인들이 생각나면 단축번호를 눌러서 안부 몇 마디에 수화기를 끊고는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자주 들어가는 인터넷 공간 상의 짧은 댓글들 속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온기를 경험하기도 쉽지 않다. 때때로 지나친 편안함은 도리어 무심함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과 속도의 진보는 내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영혼과 사람됨에 해를 끼치는 듯 하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어디나 누구에게나 닿을 법한 첨단 환경 속에서도 절제와 진중함을 훈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한 편의 글을 쓸 때에도 탈고하기 전까지 읽고 고치고 또 읽는 일을 반복하듯,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거는 일도 좀더 준비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묵상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적 여유 속으로 충분히 빠져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성 싶다. 매번 연락 가운데 그런 기다림과 성실함이 마음 속 깊숙이까지 전달된다면, 조금은 드문 지인들의 연락에도 세상살이가 덜 외롭다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끝)


*월간 <복음과상황> 2008년 6월호 기고글.

*김용주 님은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선행차량의 부품설계 및 해석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블로그(http://myjay.net)를 통해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꾼다. 그동안 <복음과상황>에 '회색지대 보고서', '도발적인 캠퍼스보기', '세상보기' 등을 연재한 바 있다.
2008/06/01 00:04 2008/06/0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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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말이 내가 특별히 허드렛일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순반복적인 가사일들은 때로는 짜증이 날 정도로 지겹고 귀찮다.
그런 일을 누군가가 도맡아서 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비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가사노동이 허드렛일이고 단순반복적인 지루한 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일을 가족의 일원이 분담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나는 설거지를 좋아한다.
곧 날씨가 더 더워지면 설거지를 조금만 미뤄도
주방에서는 악취가 가득해진다. 날파리도 접시 사이로 날아다닌다.
돼지고기라도 먹은 날이면 기름기 가득한 그릇들로 씻을 엄두가 안난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임을 난 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걸 볼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일단 설거지를 시작하여 그릇을 씻기 시작하면
접시 하나 하나가 손 끝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씻겨진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렇듯,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씻김'이 설거지의 묘미이다.
과거에 날파리가 꼬였든 곰팡이가 피었든, 접시가 붉게 물들었든 간에
설거지라는 반복적인 행위에 의해 그릇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맛깔스런 음식을 담은 채 화려하게 식탁으로 컴백한다.

나는 설거지를 통해 삶을 배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씻김'을 통해 누구나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러하다.

2008/05/28 20:03 2008/05/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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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와 명예, 부귀영화를 가까이하지 않는 이도 청렴결백하지만,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이 더욱 고결한 사람이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이도 뛰어나지만,
쓸 줄 알면서도 쓰지 않는 사람이 더욱 뛰어난 사람이다.

(홍자성, '채근담' 중에서)
2008/05/27 20:02 2008/05/2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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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우리는 자주 주변의 관심과 칭찬에 기대어 산다.

초등학교 시절,
"참 잘했어요"라고 쓰여진 도장이 공책에 찍히면
나도 모르게 내가 했던 숙제를 보고 또 보곤 했다.
대충 하려던 것도 그 전날 숙제에 찍힌 도장을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 TV만화와 간식을 뒤로한 채
나름 열심히 몇 자 더 적던 기억이 가끔 난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대학을 가고 글을 쓰고 직장을 다녀도
주위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가던 길을 가려 하지만
때로 누군가가 "참 잘했어요"라고 내 걸어온 길에
진한 잉크로 도장을 찍어주길 기다리는 건 여전하다.
숨기고 무덤덤한 척 하지만,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지지해주고, 칭찬해주길 기대한다.

누군가의 관심과 인정, 그리고 사랑.
오늘도 나의 한 걸음은,
그들의 "참 잘했어요"로 인해 나아가는 것이다.

2008/05/27 20:01 2008/05/2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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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군대도 가기 전인 스물 하나의 나는
캠퍼스 노천 극장에 늦은 시간 캔맥주를 사들고
친구들과 앉아 미래에 대한 넋두리를 하곤 했다.

그래,
그 땐 나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십년 후의 내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던 터라
안개 속 산 길을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들이 내 앞에 펼쳐질 것 같은 두려움과
한 편으로는 은근히 설레는 기대감에 잠겨.

그렇게 달빛에 물든 캠퍼스 구석구석에 시선을 내려놓고
씁쓸한 맥주를 삼키듯 마시곤 했다.
희한하게 그 땐 맥주가, 지금처럼 잘 넘어가지질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잠시 떠올려보는 시간들.

2008/05/25 20:00 2008/05/25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