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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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를 봤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20년만에 처음 보는 소설인 것 같다. 은교를 보게된 건 영화 [은교]를 보고 영 찜찜했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는 사실 별로였다. 아니 나쁘지 않았지만 플롯이 좀 성글게 느껴졌달까. 결국 열흘을 보내고 소설을 전자책으로 다운받아 읽었다.

일단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단편 '은교'란 소설은 없다.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자기 스승 이적요가 몰래 써 놓은 은교(에 관한 개인의 기록)을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함으로써 갈등이 심화된다. 문제는 소설은 영화에서처럼 이적요가 불같이 대노하거나 두 사람의 갈등이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은 사제간이며 글쟁이들인지라 미묘하게 얽히는 - 물론 중간에 은교라는 17세의 소녀를 두고서도 -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싸이클이 존재하는데 영화는 이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뭉개버린다.

 

특히 마치 은교를 사이에 두고 욕정과 질투에 불타는 두 남자의 대결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는, 마지막 서지우의 차사고 장면에서도 이적요가 미리 자동차를 고장낸 사실을 알고 분노의 질주를 하다 중앙선을 고의로 넘으면서 사고가 나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소설에서는 그 사실을 안 서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한다. 이는 오랜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데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렇게 서지우는 죽기 직전까지 이적요를 놓지 못했다. 이적요 시인 또한 차를 타려는 서지우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잠시나마 차를 타는 것을 말리려했다. 은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둘은 서로 많이 아꼈노라고 회상한다.

은교와의 관계도 그렇다. 영화는 후반에 이적요가 이마에 키스를 하자 그를 재우고 서지우와 섹스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은교가 먼저 이적요에게 자신에게 키스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허나 이적요는 이마에만 키스를 하고 은교 또한 이적요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온다. (이 차이는 크다) 소설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이적요의 내외적 갈등들도 모두 삭제되었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은교와 만나기로 하지만 은교의 남친 행세를 한 서지우의 지인에게 길바닥에서 고딩을 희롱한 노인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그 사건으로 이적요는 심한 상처를 받는다. 이후에도 은교와 함께 들어간 카페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그 과정에서 겪는 노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특히 이적요의 과거사. 이렇다 할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겪지 못한 그가, 서지우를 질투하는 가운데에서도 셋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행복해하는 장면이나, 어릴 적 동네의 인민군 학생들에게 피터지게 맞던 자신을 구해준 D라는 처녀.(그녀가 이적요의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다) 얼마 전까지 만났던 후배 여성 시인과의 밀회가 자신이 원할 때 발기되지 않는 나이로 접어들면서 관계를 끊은 일 등. 은교보다는 이적요에게 상당히 많은 지면과 묘사를 할애하고 있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의 인생(인간성)을 잘라내버리고 은교에게 호감을 주는 '시적 천재성'(기능)만을 부각시켰다.

장면들도 영화에서는 들쑥날쑥하다. 집청소 알바를 하기로 한 은교가 바로 다음에 이적요의 집에서 잠을 자고 그날 밤 천둥소리에 이적요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자는 장면은 소설 속에서는 한참 후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시인 이적요가 17세의 은교에 대한 욕망이 발전하고 급속도로 안에서 번지다가 내적 갈등 후 그 아이를 내면 깊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지만 영화에서는 70대 노인의 '로리타 애착' 정도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다분하다.

서지우와의 관계도 삼각관계임에는 분명하나 둘의 갈등의 주변 상황들을 잘라내어 그 갈등의 깊이를 무디게 만들었다. 일례로 서지우는 인세 중 육천만원을 가로채지만 그 사실을 이적요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은교라는 단편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비평매체에 싣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그가 이적요의 단편 소설 몇 개를 훔친 뒤 그 결론 부분을 살짝 개작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적요가 불편해하는 것은 서지우가 도둑놈일 뿐 아니라 자신의 소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말을 수정하여 그 소설 자체의 통일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느 인터뷰 상에서 원작 소설가 박범신은 동명의 영화에 대해 비교적 좋게 평했지만, 내 생각에 그는 영화 은교에 대해 서지우의 각색처럼 불편하게 여긴 점들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소설 은교는 참 좋았고 영화 은교는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뭔가 잘못 손댄 '덧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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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는 노출로도 홍보가 많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아쉬운 점을 짚자면 소설 은교에서는 서지우와 한은교의 섹스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적요 시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장면을 적나라한 영화 노출신의 하이라이트로 설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내 생각에 영화의 대중성을 고려해서 굳이 강한 베드신을 넣어야했다면. 서지우가 한은교를 모텔로 데리고 가서 억지로 잠자리를 갖는 장면이어야 했다고 본다. 그게 임팩트도 있고 서지우의 심리 묘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012/05/14 22:41 2012/05/1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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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적은 약자다' 라는 말이 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말이 있도 있다. 며느리의 적은 시어머니고 여성 사원의 적은 여성 상사라는 의미다. 이 부분을 좀더 풀어서 말해볼까 한다.

 

사회에서 부를 가지지 않은 자,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반대 계급, 이를테면 부를 가진자, 남성, 비장애인, 고용주에 의해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지속적인 차별과 억압을 당한다. 이것은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지만, 실제 개개인인의 미시적인 삶에서는 구조적 개혁이 더딘 관계로 구조를 뜯어고치기 보다는 개인의 윤리와 처세에 보다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가난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성으로 차별을 받지만 그 상황에 불평하지 말고 더 열심히 일해서 가정과 회사 모두 인정받는 삶을 살아라.. 등.

이 대목에서 우리는 관련된 수많은 처세법들과 그것들을 상세하게 정리한 서적들을 만난다. 이른바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대변되는 마인드 컨트롤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최악의 사건이 오더라도 긍정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하면된다는 믿음을 잃지 말기를 종용한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은 실제로 심리학적으로도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며 자수성가한 다수의 개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꿈을 이루고자 하는 긍정적 사고+불굴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게 되었다는 류의 말을 자주 언급한다.

 

나도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매사에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어떤 일이나 삶 전반을 바라보기 보다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일이든 노력하면 성취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개인의 능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렇게 노력하여 소위 '성공한', '자수성가한' 이들이 원래 자신이 속했던 열등 집단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분명 이들의 피나는 헌신과 노력, 열정은 개인적 차원에서 칭찬할 만한 무엇이 되겠지만 자신의 예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질책하는 방식 - 이를 테면 '나도 XX해봐서 아는데 죽도록 힘쓰면 이룰 수 있다, 불평불만만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더 노력해라' - 으로 변하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폭력이 될 수 있다.

며느리의 위치에서 성실히 수행하여 인정받은 여성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며느리의 위치에 불만을 품은 여성을 억압하고,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CEO에 올라선 사람은 노조운동을 하며 회사를 비난하는 사원들에게 손가락질한다. 장애를 극복한 이들, 흑인이면서 헐리우드에 스타가 된 배우, 육아와 직장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퍼 비지니스 우먼.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억압받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나는 구조에 불만을 품지 말고 저렇게 뼈를 깎는 노력을 덜 해서 지금 이 처지가 되었다는 윤리적 자학에 빠지게 만든다.

어메리칸 드림처럼, 사실상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성공하는 개인이 나올 확률은 극히 적다. 허나 매체나 사회는 이런 이들을 대서특필하고 긍정적 사고를 통한 개인의 노력에 매진할 것을 권한다. 이러한 푸닥거리 이면에는 불평등한 체제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보수집단의 욕망이 숨어있지만 말이다. 고로 성공한 몇몇 개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자신의 성공에 스스로 놀라며 누구나 나처럼 하면 된다는 계몽을 시도하지만 노력해도 그를 쫓아 계급적 도약을 하지 못하는 다수의 차별받는 이들에게는 좌절감에 더불어 죄책감까지 떠앉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자수성가한 이들에 대한 집중적 조명과 칭송보다는 그가 그 과정에서 겪게된 차별과 불평등한 상황들을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관점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공담을 조중동같은 보수 매체에 넘겨주기 보다는 좀더 그 성공의 내러티브(스토리)를 풀어내어 차별받는 더 많은 개개인들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중간 장벽들을 거대담론이 아닌 삶의 미시적 차원에서 조명해야 하며, 이러한 작업은 사회구조적 측면, 거대담론적 사회비평과는 사뭇 다른 층위의 조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작업이야말로 성공지향적이고 처세술이 판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공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2/05/03 01:03 2012/05/0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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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문서와 전자문서
기업과 관공서에 전자문서가 도입되면서 종이문서가 혁신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더 많은 종이가 소비되었다. 이전에는 종이에 글을 쓰다보니 수정이 어려웠지만 전자문서는 수정은 물론 아무리 긴 글도 복사하고 편집하는 게 용이하다보니 보고시점별, 보고대상별로 기하급수적인 보고문서의 수정이 이루어졌고 여전히 서면보고를 받는 기업문화 속에서 보고 건수 대비 종이출력물의 양은 예전보다 몇 배로 증가했다.

결국 이러한 관행 속에서 종이절약을 위해 이면지 사용을 권장했고 관공서에서는 강제적으로 보고서는 이면지를 사용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보고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면지를 '만들어내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면지의... 사용은 자원절약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이면지를 사용하다보면 성능이 나쁜 프린터 특히 구사양의 프린터들은 용지걸림으로 인한 고장이 잦아서 공용 프린터에는 하나둘 '이면지 사용금지'라고 붙여놓게 되었다. 이 이율배반적인 - 이면지로 보고하되 프린터에 이면지를 넣으면 안 되는 - 상황은 실무를 뛰는 직딩들로 하여금 돌아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린터에도 제어장치와 모터등의 전자 장치가 들어가고 그러한 칩들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펄프를 생산하는 공장과 비슷한 규모의 환경오염을 야기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면 보고 없는 전자결재라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상사에게 '내 자리로 와서 내가 쓴 보고서 함 바바'...라고 하기엔 ㅎㄷㄷ한 문화가 강하다. 물론,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문서를 상사에게 보내는 일도 가능하지만 그건 '나 여기까지 했으니 니가 고쳐서 보고해바바'...라는 무언의 손털기로 받아들여져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된다. 마지막 방법으로(내가 권장하고 싶은 방법인데) 상사에게 전자 결재를 상신하면 상사가 불러서 모니터를 함께 보며 수정지시를 하고 그 방법에 따라 재상신하는 방법이 있겠다. 이럴려면 상사가 오픈 마인드로 팀원을 불러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보고서 수정 방향을 나누어야겠지만 잘못하면 상사에게 수시로 불려가서 모니터 앞에서 깨져야 하는 번거로움, 스트레스성 보고가 되기 쉽다. (전자보고의 용이함 때문에 동일하게 서면보고 대비 전자보고로 인해 팀원이 상사에게 깨질 빈도수가 훨씬 높다는 가정하에.)

그것도 아니라면 최후의 방법이 있다. 태블릿PC로 보고서를 보고 하고 터치펜으로 수정 지시한 내용을 표기 후 재보고-수정-재보고-수정 후에 최종 전자결재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블릿 PC는 진정한 종이문서의 대안이 될 것인가.



태블릿PC가 종이문서를 구원할까.
태블릿 PC는 종이매체를 대체할 기기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이 태블릿PC는 전자책 시장을 타겟으로 삼아서 많은 양의 컨텐츠를 내고 있으며 카페의 메뉴판, 출장가는 회사원의 발표자료, 중고교 교과서 대용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환경적 측면에서도 이를 통해 분명 종이매체를 통해 소비되는 펄프, 즉 아마존 삼림들을 비롯 종이를 만드는 펄프 공장의 오염물질 등을 줄이는 등 자원 보존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PC 안에 들어가는 CPU와 램 등의 전자칩들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중금속과 제조공장 설비, 제조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폐기물들도 환경오염을 가속화시킨다. 결국 이는 누가 더 자원을 많이 소모하고 환경을 더 오염...시키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쉽게 생각하면 아이패드 1개를 구입한 사람이 구입기간동안 소비하는 종이를 모두 전자매체로 전환한다고 가정하면 사실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지금은 태블릿PC를 소유하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제3세계의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전자기기 가격이 떨어지면 언젠가 중국과 인도 시장에서 1인 1태블릿을 소유하게 될 수도 있다. 1인 1태블릿이 종이매체 소비보다 더 지구적으로 바른 소비인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1인 1차량과 같은 문제 아니겠나)

두번째. 새 모델의 주기(model year/period)다. 한 개인이 자동차를 구입하듯 태블릿 PC 구입 후 10년간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1~2년마다 새모델이 출시되면 소비자의 상당수는 새 제품을 구입한다. 결국 1인 1태블릿이란 개념은 그 자체도 무시못할 숫자지만 1-2년주기로 태블릿을 소비한다면 그 규모로 볼 때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광물 소비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환경단체들이나 녹색당이 운동을 펼치면 소비자들은 태블릿PC를 버리고 종이매체로 돌아갈까. 운동가들은 기술의 발전을 막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소비자들은 환경운동가들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원을 고갈시키는 소비를 멈추게 될까.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특히 소비자의 양심을 자극하여(라고 말하지만 결국 훈계하거나 혼을 내서) 소비를 막는 운동성에 대해 비관적인 편이다.

물론 착한소비, 개념소비, 공정무역이라는 방향으로 진보주의자들은 나름 고민하며 소비를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안으로는 무엇보다 제조업체 즉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도 필요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PC를 제조하고 모델변경 시점에 구모델을 반납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은 반납 조건으로 신제품을 할인해준다.(보상기변같은..) 그리고 법으로 신모델 출시시 구모델의 부품 호환성을 '40%이상'처럼 규제하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기업의 설계차원의 리싸이클링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비자가 재활용에 동참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제조사에서 구모델을 동물들이 여기저기에 똥을 싸고 돌아다니듯 뿌려대고는 '폐기'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한 플라스틱류, 중금속, 전자칩들과 같은 노동집약적이며 주요 자원을 소비하는 전자제품 쓰레기들을 줄일 방법이 마땅치 않다. 1년마다 새모델이 쏟아져 나오는데 시민 개개인에게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10년을 쓰라고 하면 과연 버틸 인간이 얼마나 될까.

고민을 하면 할수록 결국 대안은 기업의 리싸이클이란 생각이 강해진다. 사실 현재까지의 '재활용'이라는 프레임은 지나치게 시민 개개인의 윤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는 기업에게는 공장의 폐수정화나 설비 차원에 국한된 이른바 '제조 공정의 개선'에 제한한다. 이미 환경운동가들은 전지구적 자원의 고갈에 대해 경고한다. 따라서 아마도 다가오는 세대에서는 '재활용' 프레임의 확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관점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끝)

2012/04/27 22:38 2012/04/2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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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나는 갈구는 농담이 싫다. 오늘도 그렇고 최근에도 페북의 귀한 친구들, 그것도 대체로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과 대화하다가 꼭 비슷한 패턴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굳이 지적(질)을 하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름 재밌으라고 갈구며 던지는 농담에 나는 대체로 즉시 입꼬리가 내려가는 편이다.ㅠㅠ
 
2. 예를 들면, 내가 지적하고 싶은 문맥은 '우리 진짜 바보같지'라는 대화에 3자가 '니네 진짜 바보같아'라고 답할 때의 '바보'란 단어는 화자의 포지션에 따라 언어게임 상에서 용례가 다르다는거다. 혹은 '우린 참 대가리가 크다'라고 할 때 3자가 '대가리 큰 애들끼리 잘들논다'라고 하는 거다.

3. 기사로도 나왔지만 페북에서 갑작스럽게 친구관계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 '댓글에 맘이 상해서'가 많았다고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쿨하려고 애쓰고 쿨하게 굴 것을 자주 강요받지만 나는 사람들의 정서가 쿨 할 수 없다는 데 한표를 던지는 편이다.
 
4. 한때 몸담았던 교회는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꽤 괜찮은 교회였다. 서로 진솔한 나눔들이 있었고 어느 시기를 지나자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모임 때마다 웃으며 상대를 갈구는 농담을 즐겼는데, '너네집 가난하잖아. 남은 음식 싸가야 하지 않겠어?'라거나 '어이 지방대 출신!'이라거나 '너 머리에 총맞았냐' 같은 말들이 난무하는 분위기에서, 솔직히 견딜 수가 없었다.
 
5. 아마도 그 시절 너무 오랫동안 불편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지켜본 탓인지 나는 상대를 비하하면서 즐기는 개그나 대화에 동참하기가 싫다. 때때로 나도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갈구면서 웃었을 수도 있다. 나도 살면서 어떤 시기에는 그렇게 웃어넘겼고 나름 예리하게 잘 찔러댔던 것 같다.

6. 정혜신 선생은 자학하면서 웃기는 연예인들, 이를테면 뚱뚱하거나 못생겼다고 자학하며 웃기는 개그맨들의 상당수가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그것이 쿨하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줘서 결국 고통 속에 그 상황을 해소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지적한다. 깊이 공감했다.

7. 어쨌거나 나도 그런 거 같다. 구창모의 희나리 가사처럼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나는 까는 농담이 싫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갑자기 마음 문을 닫고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마치 없었다는 듯 '언팔'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의 이런 지적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에 가깝다고 하겠다.

2012. 4. 4



#2.
페미니즘 문제에 있어 남성이 여성적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여성 스스로가 그들의 목소리로 풀어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일면 정당하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어떤 논제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그 논제를 말하는 발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성차별문제에 있어 남성은 가해자이자 권력자이고 가부장제에서 지속적으로 여성을 괴롭혀온 당사자이다. 남성 발화자가 여성의 주체성을 논제로 들며 여성 스스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대목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노예 스스로 힘을 키우기 전까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은 이 불합리한 상황을 고수하겠다는 의미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권력을 가진 나(남성)는 성추행을 할 수 있고 커피 심부름을 시킬 수 있고 육아를 전담시키고 세끼 밥상을 차리라는 등 가사 노동을 전적으로 위임할 수 있고 힘이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주체의 자격, 주체의 역량, 주체의 권력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나(남성)는 고수할 것이다... 불행히도 남성은 여성의 주체성을 논할 발화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가해와 폭력, 그리고 가부장제를 강화해온 전범으로써 여성에게 사과하고 권력을 위임하고 여성을 젠더적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채무자이다. 따라서 가부장적 질서를 해체하는데 남성의 회개와 성정체성 변화도 '일상적으로' 주체적 행동이 요구된다.

2012. 4. 7



#3.
진보진영이 다양성을 존중하면 분열될까 아니면 연합할까. 아마도 이건 정답이 보이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이상적으로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연합하는 것이 아름답겠지만, 대체로 사람은 타인과 나의 견해 차이나 행동지침, 지지기반이 달라질 때 자주 분열하고 나아가 상대 전체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보수는 언제든 '우리가 남이가?', '그 사람도 OO대, OO도 출신이야'하며 눈쌀을 찌푸려질 정도의 강한 연대정신을 보이는 게 문제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진보는 너무 자주, 자신이 품었던 사람에 대한 지지를 실망을 안겨준 단일 사건만으로도 철회하는 냉혹함을 보인다. 어쨌거나 현제까지는 진보진영은 다양성, 차별성을 표현하는 순간 그 즉시 분열해왔다. 그것도 정서적 반감을 표하면서.(그래서 이번 야권 단일화에 대한 생각이 다분히 긍정적이다)
 
살면서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나는 인간 관계에서 오는 상처로 인한 스트레스에 취약한 것 같다. 예전엔 이 문제를 내가 정서적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으로 보았다. 이성적인, 객관적인,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초월적 존재가 되기를 꿈꿨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나를 인정하고 끌어안고 싶다.
 
나는 이중적이게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성적 측면에서 비판을 하고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지만, 스스로는 실제로 나와 견해차가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감정의 흔들림 없이 그 견해를 인정한다고 당당히 말하지도 못하겠다. 이 딜레마 사이에서 현실적 관계의 멘붕이 온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어느순간, 이꼴 저꼴 다 보기 싫고 결국 관계 자체가 피곤한 일로 여겨진다. 그저 익숙했던 마음의 동굴로 돌아가고픈 욕망이 다시 똬리를 튼다.
 
진보진영이 다양성을 존중하면 분열될까 아니면 연합할까. 이 문제에 어떤 건조하고 원론적 판단을 말하기에 앞서 나는 내 한계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샤프한 판단에 정서가 뒤따라주면 정말 땡큐겠지만 나란 사람이 그런 샤프한 판단력도, 더불어 땡큐한 인격이 아닌 관계로 매사에 많이 좌절한다. 그런데 이 불일치를 부정하려니 이중인격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상적인 얘기만 겉으로 하고 속이 썩어간다. 정신 건강을 위해, 그리고 서투르더라도 관계의 '거북이 걸음식' 진보를 위해... 나는 일단 내 미숙한 관계의 수준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2012. 4.9



#4.
대한민국 1% 남편에 도전 중인 나. (풉)
 요즘 아내가 월요일마다 강의가 듣고 싶다고 해서 월요일만 퇴근길에 성하를 데리러 가고 있다. 아내가 잘 부탁하여 다행히 어린이집에서 늦게까지 기다려주기는 하는데 그 늦게라는 게 내 입장에서는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회사에서 나와야 가능한 시간이다.

결국 월요일부터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엉덩이를 쳐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눈치가 보인다. 아이 데리러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아마 다수는 아내는 뭐하고 네가 가냐 라고 물을 것이고 선임은 나를 배려하기 보다 나를 주시할 것이다.

월요일의 이른 퇴근(10분? 15분?)은 일시적이고 나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지속적으로 데려오지 않아도 되는 남성이니 이것은 그냥 하나의 체험이겠지만 매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리러 가야 하는 직장 여성들은 출퇴근만으로도 스트레스 만땅일 것 같다. 듣기로 서울은 어린이집이 유아를 3~4시 이후로는 안 봐준다고 하여 아이만 픽업해서 집에 데리고 오는 직업도 있다고 한다.ㅠㅠ
 
여성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눈치를 보며 회사를 다녀야 하나. 사업장마다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건 참 머나먼 숙원사업인 듯 하고, 지금으로서는 아이 데리러 가는 여성들 뒷통수에 대고 헛소리나 지껄이지 말고 맘편히 가게 해주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다.

그나저나 오늘은 또 어떻게 퇴근한다냐... 흠흠.

2012. 4. 9

2012/04/27 01:07 2012/04/2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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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저스'를 봤다.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는 각 만화의 주인공들을 불러서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보더라도 이 영화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어벤저스가 최첨단 시대에 외계인이나 신화를 스토리의 메인 모티브로 삼은 부분이 인상적이다. 기술문명과 신화가 통합(synthesis)되는 영화 속 내러티브는 갈등을 넘어 이제는 공존을 이야기한다. (첨단을 달리는 '아이언맨'과 구시대 히어로 '캡틴아메리카', 그리고 신화속에나 나올법한 천둥의 신 '토르'가 서로 소통하며 갈등을 풀어간다.)


하지만 그 소통과 공존 사이에서 구영웅주의와 신영웅주의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른바 수정-자경주의로 일컫는 흐름을 말하는데 구영웅주의가 사명감이 투철하고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캐릭터였다면, 신영웅주의는 자신의 한계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그러면서도 매순간 복합적 권력구도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때로는 대의를 저버리거나 위기에 빠진 시민을 구하지 않는-'왓치맨'의 코미디언처럼 도리어 공격하기도 하는-불완전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벤저스에서도 구영웅으로 대변되는 '캡틴 아메리카'와 신영웅으로 대변되는 '스타크'(아이언맨)의 관점 차이도 흥미롭게 지켜볼만한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만한 캐릭터는 퓨리 국장이다. 그는 내 생각에 니체가 말한 '초인'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는 지도자로서 강인한 모습,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의 소유자다. 시민들이나 심지어 히어로들에게도 국방부의 비밀 계획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친구의 죽음도 전쟁의 동력으로 쓸만큼 전략가와 행동가로 모자람이 없다. 심지어 권력자들이 반대하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강압에도 흔들임없이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해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서 히틀러를 본 건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불편했던 건 열등한 인간들을 다스릴 '초인'을 기다려온 역사의 실패 때문일까. 혹은 만화속에서조차 마키아밸리즘의 단면을 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일까. 만약 현실세계에서 무법의 자경단을 만들어내고 시민들을 불법사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감금시키고 권력에 무릎꿇게 만드는 초인이 있다면 그들이 멋있어 보일까. ('배트맨'에서 존 웨인은 악당을 잡기 위해 시민들의 휴대폰 통화를 감시하며 그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는 그 일로 그를 떠난다) 그들에게 엄청난 부와 엄청난 군사력, 그리고 정보력을 허락한다면 그들은 만화속 어벤저스처럼 스스로 자정능력을 가진 집단으로 진보할까. 사실상 그저 시민들을 탄압하고 괴롭히다가 결국은 비토 세력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벤저스나 왓치맨 같은 무법의 자경단들이 현실에서는 반드시 은퇴해야 한다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왓치맨'에서는 히어로들은 시민들의 시위로 공권력을 경찰들에게 이양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2012/04/20 22:40 2012/04/2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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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유모의 심정으로 수고한 바울 (살전 2:7-12)   
 
  
[개역개정]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메시지]
7-8 우리는 여러분에게 무관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생색을 내거나 으스댄 적이 없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여러분에게 마음을 썼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9-12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그 시절에 우리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며 밤 늦도록 수고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우리를 후원하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얼마나 신중하고 경우 있게 처신했는지, 또한 여러분을 믿음의 동료로 얼마나 세심하게 대했는지, 여러분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거저 얻어먹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했습니다.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격려의 말을 속삭였고, 그분의 나라, 곧 이 기쁨 넘치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법을 차근차근 보여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스스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으나 유모처럼 유순하게 굴었다는 이야기를 서신의 처음부터 언급하는 걸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셀프깔대기 수준의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거나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한다는 언급은 정작 서로 신뢰하고 서로의 공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이들 간에는 굳이 필요치 않은 사족같다.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낯뜨겁게 언급하는 이 도입부는 역설적으로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느꼈던 불안함, 근심스러움 혹은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울은 이후 서신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 비난하는 교회 내 일부 분위기에 대해 변론에 임한다. 한때 자신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고 양육한 한 교회에서 자신이 떠난 후 비난의 목소리를 듣게된 바울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오 해를 바로잡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허탈함, 서운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서신을 써서 자신의 메시지를 바로잡고자 하는 그의 편지 초반 목소리에 다분히 사족같은 자기 공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언급들이 주를 이룬다. 선의의 행동이 오해를 받았을 때 만큼 상처가 되고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일이 또 있을까. 바울은 어쩔 수 없이 한때 공동체였던 지체들을 향해 자기변론에 임한다. 한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도 자기변론적 글을 참 많이 썼던 듯 하다. 오해와 불신의 싹이 틀 때에도 동굴에 숨거나 인신공격, 혹은 맞비방의 마음을 버리고 힘들더라도 자기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바울 사도가 그러할진대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12. 4. 13.

2012/04/13 23:20 2012/04/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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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장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은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 다짐과 남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37)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37-38)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된다.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대개는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시살은 못 견뎌한다. (39)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40-41)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44)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비극의 성별적인 두 주체,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존재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한다. 전자는 불쌍한 혹은 수치스런 존재지만, 후자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다. (53)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분류, 분리하는 방식은 聖女와 性女, 정숙한 여성과 순진한 여성, 본처와 애첩, 아내와 애인...은 배타적인 범주 같지만 남성을 위한 여성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55)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62)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124)

2012/04/10 01:05 2012/04/10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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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다 (막 15:6-15)     

   
[개역개정]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메시지]
6-10 명절이 되면 백성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바라바라 하는 죄수가 있었는데, 그는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 중에 살인을 저지른 선동자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무리가 다가와서 죄수를 풀어 달라는 탄원을 올리려고 할 즈음에, 빌라도는 이미 그들이 할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내가 유대인의 왕을 풀어주기를 원하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자기에게 넘긴 것이 순전히 악의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고 있었다. 11-12 대제사장들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하도록, 이미 무리를 선동해 두었다. 빌라도가 되받았다. “당신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내가 어찌하면 되겠소?” 13 그들이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4 빌라도가 따졌다. “그러나 무슨 죄목 때문이오?” 그들은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5 빌라도는 무리의 뜻을 들어주었다.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는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다.

 

 

1. 군중심리. 갑자기 선동된 군중이 범죄자인 바라바를 풀어주고 종려나무 가지로 이스라엘 입성을 환영했던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해 죽일 것을 빌라도에게 요구한다.

2. 전날밤 예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공회 앞에 선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무력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를 치며 거짓 증언하는 사람 앞에 침묵했고(14:56,57) 어떤 이는 침을 뱉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비아냥도 그냥 감내한다. 나중에는 하인들마저 예수를 손바닥으로 때린다.(14:65)

3. 이 모든 과정을 베드로가 지켜본다. (그가 무력감에 낙향하여 다시 어부가 되고 예수가 부활하여 그를 찾아왔을 때에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예수의 이런 충격적인 나약한 모습을 본 탓일 수도 있으리라.) 얼마전까지 베드로는 나약한 자신의 선생을 책망하며 '약해지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죽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라고 충고하지 않았던가.

4. 모든 게 끝났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빛나던 그의 혁명가로서의 모습은 온데 간데가 없다. 결국 권력의 핵심층인 대제사장, 서기관 앞에 끌려가자 그는 모멸감을 당하고도 벗어나거나 도망조차 치지 못하는 가짜 선지자의 모습이다.

5. 내가 베드로였다면. 나는 즉시 그자리에서 안티-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을 얻었을 것 같다. 이 자에게 내가 속았구나. 대제사장 앞에서 이 자의 스케일이 드러난 것이구나. 메시아는 개뿔... 나는 어쩌자고 이지경이 되도록 가족과 신앙공동체를 버리고 이 자를 따라왔던가.

6. 갑자기 돌변한 군중들의 분노, 그 군중들을 의식한 빌라도의 정치적 처세. 많은 묵상 교재들이 이들에 대해 손쉽게 책망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피상적인 교훈을 던져주지만 3년간 정치적, 종교적 행보를 따랐던 한 민족의 기대감... 그것이 완전히 허물어졌을 때의 집단적 공황상태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 같다.

7. 특히 진보진영의 정치인들, 이를테면 김민석이나 김영삼 한때 노무현에게 비쳤던 기대감과 그 이후의 실망감, 쏟아졌던 비난들은 우리가 자신을 신격화했던 예수의 초라함 앞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했을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행보를 걷는 지도자를 원할 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어두운 선지자를 원하지는 않았다.

8. 나는 예수님의 감정이나 마음은 사실 헤아릴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며 설파한 메시지에 귀를 닫고 그를 떠난 제자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자신의 앞길에 뿌리고 메시아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송했던 군중들이 이제는 범죄자 바라바는 놓아주되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들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보는 심경... 

9. 세상을 사랑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세상에 버림받은 예수. 군중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들었을 고독감. 하나님마저 그 자리에는 함께하지 않았던 그 철저한 혼자됨의 슬픔의 강도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에서... 영혼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12. 4.

2012/04/05 23:19 2012/04/05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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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갈구는 농담이 싫다. 오늘도 그렇고 최근에도 페북의 귀한 친구들, 그것도 대체로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과 대화하다가 꼭 비슷한 패턴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굳이 지적(질)을 하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름 재밌으라고 갈구며 던지는 농담에 나는 대체로 즉시 입꼬리가 내려가는 편이다.ㅠㅠ

2. 예를 들면, 내가 지적하고 싶은 문맥은 '우리 진짜 바보같지'라는 대화에 3자가 '니네 진짜 바보같아'라고 답할 때의 '바보'란 단어는 화자의 포지션에 따라 언어게임 상에서 용례가 다르다는거다. 혹은 '우린 참 대가리가 크다'라고 할 때 3자가 '대가리 큰 애들끼리 잘들논다'라고 하는 거다.

3. 기사로도 나왔지만 페북에서 갑작스럽게 친구관계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 '댓글에 맘이 상해서'가 많았다고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쿨하려고 애쓰고 쿨하게 굴 것을 자주 강요받지만 나는 사람들의 정서가 쿨 할 수 없다는 데 한표를 던지는 편이다.

4. 한때 몸담았던 교회는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꽤 괜찮은 교회였다. 서로 진솔한 나눔들이 있었고 어느 시기를 지나자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모임 때마다 웃으며 상대를 갈구는 농담을 즐겼는데, '너네집 가난하잖아. 남은 음식 싸가야 하지 않겠어?'라거나 '어이 지방대 출신!'이라거나 '너 머리에 총맞았냐' 같은 말들이 난무하는 분위기에서, 솔직히 견딜 수가 없었다.

5. 아마도 그 시절 너무 오랫동안 불편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지켜본 탓인지 나는 상대를 비하하면서 즐기는 개그나 대화에 동참하기가 싫다. 때때로 나도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갈구면서 웃었을 수도 있다. 나도 살면서 어떤 시기에는 그렇게 웃어넘겼고 나름 예리하게 잘 찔러댔던 것 같다.

 

6. 정혜신 선생은 자학하면서 웃기는 연예인들, 이를테면 뚱뚱하거나 못생겼다고 자학하며 웃기는 개그맨들의 상당수가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그것이 쿨하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줘서 결국 고통 속에 그 상황을 해소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지적한다. 깊이 공감했다.

 

7. 어쨌거나 나도 그런 거 같다. 구창모의 희나리 가사처럼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나는 까는 농담이 싫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갑자기 마음 문을 닫고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마치 없었다는 듯 '언팔'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의 이런 지적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에 가깝다고 하겠다.

2012/04/04 18:37 2012/04/0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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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겟세마네의 기도 (막 14:32-42)     

     
[개역개정]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메시지 성경]
32-34 그들이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 두려움과 깊은 근심에 빠지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괴로워 죽을것 같다.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5-36 예수께서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리셔서, 피할 길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37-38 예수께서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가 자다니, 어찌내게 이럴 수 있느냐? 단 한시간도 나와 함께 견딜 수 없더냐? 깨어 있어라. 자신도 모르게 위험지대에 들어서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세상을 몰라서는 안된다. 너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다만, 한편으로는 난롯가에 잠든 늙은 개처럼 나른하구나.” 39-40 예수께서 다시 가서 똑같은 기도를 드리셨다. 예수께서 돌아와 보니, 이번에도 제자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말로 변명해야 할지 몰랐다. 41-42 예수께서 세 번째로 돌아와 말씀하셨다. “밤새도록 자려느냐? 아니다. 잠은 충분히 잤다. 때가 되었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팔린다. 일어나거라! 가자! 나를 배반할 자가 왔다.”



많 은 미사여구를 들여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형이상학적 고백들과 묵상들이 많이 있지만 사실상 나는 하나님과 동등되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자신의 죽음 앞에 직면한 괴로움, 고뇌, 그 슬픔이 잘 공감되지 않는다. 나는 자주 나약했고 비겁했으며 때로는 불의한 행동을 일삼고 사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흠없고 티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게 되었다는 그 실존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쉽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정수이며 그 논리에(특히 존 스토트의 역작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풀어낸 십자가의 도에) 나는 압도되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다. 물론 누군가의 죄로 인해 내가 죽게 되었을 때의 억울함, 그런 것은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절대선이자 신이 아닌 관계로 내가 죄에 접촉하는 고통에 동참하기가 정서적으로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가끔 내가 개미가 되어 개미 대신 죽는다는 비유를 듣는다. 문제는 개미가 불의하다거나 인간이 개미를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했거나 개미가 인간에게 불순종한 어떤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으므로 내가 개미가 되어 개미를 위해 죽는다는 비유는 '개죽음' 이상의 공감이 되지 않는다. 삼위일체 만큼이나 정서적 공감이 어려운 신적 영역의 죽음 앞에.

예전에는 멋진 표현들이나 극적인 형상화를 곧잘 하여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 마치 내가 그가 된 것처럼 흉내내기를 시도하곤 했다. 그것은 때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 때때로 내가 지은 죄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인식이 찾아올 때 내 죄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에 회개의 눈물을 쏟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그와 동등된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겪은 신적 고독과 죽음의 고통 앞에 나는 겸손히 침묵해야 할 때라는 걸.

37년의 삶 속에 깨달은 자기인식. 나는 예수의 고통을 잘 모른다.

 

'12. 4. 3.

2012/04/03 23:18 2012/04/03 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