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기타 이슈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피에타>는 서울 청계천 공장들이 배경이다. 이곳은 15살 때부터 ‘기계밥’을 먹으며 삶을 버텨낸 어린 김기덕의 터전이었다. 1960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공식 학력을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내고 만다. 비인가 농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 구로공단에서 단추공장·폐차장·전자공장들을 다니며 교과서 밖 세상을 배워갔다." (한겨레 기사 중)
 
나는 홍상수와 더불어 김기덕을 싫어했다. 홍상수 감독은 자주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불호를 말할 필요는 없겠고. 김기덕은 '나쁜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가 싫어졌다. 특히 '나쁜 남자'는 예술 영화가 아니라 그냥 나쁜 영화라고 결론내린 기독교계의 입장과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 공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까지도 페미니스트를 위시한 여성들이 김기덕 영화를 불편해하고 비난하는 입장에 대해 동의하고 이해한다.)
 
그를 다시 보게된 계기를 만든 작품은 <수취인 불명>. 양동근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사실 김기덕 영화인지를 모르고 봤다. 알고 나서는 김기덕이란 감독에 대한 내 평가가 너무 편향되지 않았나 돌아봤다. 이후로 장동건이 출연한 <해안선>과 하정우가 출연한 <시간>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계기는 <영화는 영화다>를 제작하면서 생긴 제자감독과 배급사와의 불화와 그로인한 은둔 생활의 시작, 그리고 <아리랑>으로 복귀한 일련의 과정에서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간 '김기덕'을 깊이 파고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의 영화를 모두 다시 보았다. 오늘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학력이 없으며 15살때부터 공단에서 기계공 생활 등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하류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청소년기는 전형적인 밑바닥 인생이었고 아마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결국 그 이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아는 김기덕의 모습으로, 촉망받는 감독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잔인하고 가학적이고 성적인 묘사가 많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의 영화 스타일이 헐리우드 CSI로 대변되는 그것 - 폭력, 섹스의 묘사 - 보다 건강하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미국 드라마 속의 폭력과 섹스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선사하기 위한 묘사인 경우가 많지만 김기덕에게 그것은 그의 하류인생 속에서 겪은 삶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부모의 폭력, 길거리를 전전하며 겪는 가학적 일상, 주변에서 겪는 매춘, 그것에 연루된 여성들, 다시 그들과 엮인 남성들. 그 잔인하고 힘겨운 일상 가운데 김기덕은, 그 안에서도 휴머니즘을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지 않았나 하는 변명, 혹은 소극적 옹호를 하고 싶다.
 
내가 그의 영화에 애정을 갖는 또다른 이유는 그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 공감과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악인조차 그 악행의 이유가 있고 정의에 불타는 선인에게도 빈틈이 있다. 그 인물들은 환경(하류인생) 속에서 추락을 거듭하지만 그 안에서도 때때로 (그의 표현대로) '연꽃'을 피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김기덕이 유하보다 더 나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유하 감독의 인물들은 원래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배신자이고 원래부터 악한이다. 그런 인물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물론 감독의 동정조차 받을 수 없다.)
 
이번 영화, 피에타도 청계천의 공단들이 철거되는 한국적 상황 그 가운데에서 내몰리는 서민들이 부채를 갚지 못해 고통받는 자본주의적 구조 안의 지옥같은 삶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 일상은 실제로 김기덕이 경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내 편안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돌아보면서, 내가 그런 힘든 삶을 살지 않았기에 김기덕 영화의 극단적인 스타일에 대해 관객으로서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싶다. 또한 그의 다소 극단적인 스타일은 선정성을 도구화하는 헐리우드식 영화나 미드의 스타일과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 예전에도 한번 썼듯이 - 궁극적으로는 나는 그가 최우수영화상을 수상하는 것보다 고단했던 그의 생의 남은 시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끝)

2012/09/10 21:51 2012/09/10 21:5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복상과의 인연은 건 대학교 휴학 중에 우연찮게 기고한 글로 인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대학생을 필자로 대접해주는 분위기에 자뻑하여 잡지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깊이 들어간 복상이라는 잡지는 당시 위상과는 달리 거의 폐간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매달 발송 도우미를 모집하는가 하면 기자들 없이 편집장이 교정 교열을 일일이 보고 과장 한 분이 영업과 기타 모든 행정업무를 보는 식이었다. 매월 적자가 누적되어 급여 및 디자인 업체에 비용 지불이 안 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갔다. 당시에 독자모임을 만들었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 때 편집부의 멤버들이 모두 물러났고 혼란스럽던 재정문제를 뉴스앤조이가 떠 안았다. 뉴스앤조이는 복상이라는 잡지 자체를 살리려는 생각 하나로 뛰어들었지만 괜히 복상을 탐낸다는 오명을 얻었고, 복상 또한 그렇게까지 생명을 연장해야겠냐는 비난도 받았다.
 
이후로 나는 다소 거리를 두고 이 매체를 지켜봤다. 잡지 자체가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부실하던' 시절도 있었다. 작년 초엔가 박총형이 귀국하여 복상 편집장으로 일하게 됐고 나는 그의 권유로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거지꼴 같은 복상이지만 그 와중에도 오랜 생명력과 좋은 컨텐츠로 말미암아 한국의 크리스채너티투데이급으로 분류하는 이 잡지의 편집위원이 된 것이 한편으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편집부의 열악한 상황으로 박총형은 근무중 병을 얻어 편집장 직을 내려놓았다. 대체로 내부 분위기는 잡지를 살리자는 의견이었고 사실상 편집위원 중 존재감이 없는 나는 박총형의 사임에 함께 책임, 내지는 입장을 정하자는 의도로 편집위원직을 내려 놓았다.
 
그 이후로 복상은 힘들게 운영되다가 최근 새 편집장을 영입했고 10월호를 휴간하고 다시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때때로 나는 복상이 참 '악마같은 잡지'란 생각이 든다. 잡지와 관련된 사람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면서 정작 잡지의 명성은 커가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복상을 대할 때 극단적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잡지의 생존을 걱정하며 달려들었다가 불에 덴 것처럼 아파서 멀어지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이 잡지 주변을 기웃거린다.

이 잡지를 통해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또한, 원치않게 그 소중한 관계가 틀어지는 걸 지켜봐야했다. 십여년 동안 반복되는 이 뒤틀린 관계를 생각할 때면 이제는 현기증으로 물리적인 구토가 날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 '서편제'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서 판소리꾼은 자기 딸의 득음을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든다. 오빠도 떠나보낸다. 그 고통 속에서 그 딸은 판소리의 대가로 성장하고 그 목소리는 어떤 판소리꾼보다 깊어진다.

물론 복상이란 잡지가 일부러 연관된 사람들에게 고통과 분열을 안겨주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유의미한 목적을 위해 구성원들의 상처와 시련으로 '그 대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복상과 서편제는 닮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자주 책임 운운하며 이 조직을 떠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송구스럽고 백번 사과하고 싶다.

아울러 바라기는. 나는 복상이 누군가가 바라듯 탁월하고 풍성한 컨텐츠가 넘치는 잡지가 되길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차라리 사람들이 "도대체 이 쓰레기 같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맨날 즐거워 보이는거지?"라는 소문이 무성한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소박한 바람이다.

2012/09/09 21:51 2012/09/09 21:51
Posted
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나주 성폭행 사건으로 한동안 성폭력에 대한 많은 담론이 쏟아져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임산부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고 남편의 호소글이 공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함께 분노하고 두려워했다. 이에 화학적 거세에 더해 물리적 거세론이 SNS상에서 극단적인 표현과 함께 회자되었고 금주에는 새누리당이 이 '물리적 거세'를 법안으로 제출하기까지 했다. 사실 우리나라 성폭행 문제는 많은 담론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다소 투박하겠지만 고민하던 부분을 정리해볼까 한다.


1. 가해자의 인권, 사회구조적 문제
전자 팔찌, 가해자 신상 공개로부터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론으로 여론이 확장되어갈 때 인권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은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국가적 개입에 우려감을 내비친다. 최근에 성폭행당한 여성의 남편이 "남의 집에 침입해서 때리고 강간한 범죄자의 인권만 있고 피해자의 인권은 없는가"라는 호소를 했다. 특히 미국은 유아 성폭행범은 99년형 내지 사형에 처하나 국내는 강한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최대 15년형을 구형받았다.

가해자의 인권을 걱정하는 이들은 성폭행범을 만들어낸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을 돌아본다. 널리 알려진대로 성폭행범은 대체로 불우한 유년기에 학대와 폭력으로 점철된 과거를 가지고 있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루저가 되어 시골로 내려간 뒤 범죄자가 되는 경우를 돌아보면서 조한혜정 같은 이는 근본적으로는 '마을(공동체)'의 제건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2. 성불평등한 사회, 여성은 배설하는 용기
몇몇 극단적인 사례들과는 별개로(개인적으로는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만) 우리나라는 성폭행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나라다. 남녀의 권력구도에서 대체로 여성이 아랫사람이 되고 남성은 권력을 동반한 잦은 성적 희롱과 나아가 성폭행으로 이어지는 사례들이 자주 발생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정희진이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개선은 이런 남녀의 성적 불평등이 고착화된 사회가 해결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희진 표현에 따르면 남성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참을 수 없고 그것을 적당한 곳에 배설해야 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에 지배적으로 깔려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성은 길에서 하거나(성폭행) 돈주고 하거나(성매매) 집에서 해야하고(파트너) 그 대상인 여성은 '배설하는 용기(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폭행과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성폭행 피해자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회와 격리된다. 내가 당했는데 성폭행 피해자는 자기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감수해야 한다. 그로 인해 신고가 용이하지도 않다. 여성 입장에서도 주먹으로 맞은 것과 성기로 강간을 당한 것은 차이가 있다. 후자는 더 큰 심적 트라우마를 동반한다.


3. 남성은 짐승, 그것을 자백하라.
남성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생리적인 문제다. 이 말은 다분히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다. 허나 어떤 면에서 보자면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기도 하다. 남성은 여성과는 상대적으로 다르게 시각적 자극에 성적 흥분을 한다. 또한 성기의 가벼운 자극만으로도 섹스할 준비가 된다. 짧은 피스톤 운동만으로도 금방 절정에 오르고 사정 후에는 금방 몸이 식는다. 반면 여성은 그보다는 조금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은 의도된 혹은 이해되는 섹스를 지향하지만 남성은 즉흥적이고 물리적인 조건만으로도 섹스를 지향할 수 있다.

이 생물학적 차이는 두 담론으로 진화가 가능하다. 하나는 그래서 '남자는 욕구가 생기면 배설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에 덧붙여 '남자는 그런 존재이니 여자가 조심해라. 옷을 야하게 입거나 밤늦게 돌아다니거나 집문을 열어두면 그건 남자를 유혹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입장. 반대로 여성 입장에서는 '아빠 오빠 말고 남자는 모두 늑대'라는 입장이다. '네가 성폭행범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지만 사실 너도 짐승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너도 잠정적 강간범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하라'는 거다. 이렇듯 이 두 입장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간극이다.


4. 극단적 성범죄자 단상
앞서 잠깐 내비쳤듯이 나는 성폭행 연쇄살인범, 중독 수준의 유아 성폭행범과 일상적 성희롱, 성폭행 치사범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입장들이 사실은 이 두 케이스를 구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전자는 범인 개인의 암울한 과거(부모에게 버림받음, 지속적 폭행, 루저로 낙향)에 기인한다. 이들에게는 물리적 거세나 전자 팔찌 등으로 그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방식이 아닌, 조한혜정의 입장대로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런 사회구조적으로 분노 폭발직전인 밑바닥 인생에 대해 공동체적 돌봄의 접근이 필요하다. 단 그 근본적 해결이라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고 소원한 일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이런 접근은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구조적 피해자가 성폭행 가해자가 되어 언제든 근처에서 나를 강간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여버리거나 (새누리당의 법안대로) 성기를 잘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처럼 공동체가 그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몇년간의 적당한 형량에 낙인만 찍어버린다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던 대로 하고 살면서 감방을 들락거리는 일밖엔 없다. 그리고 그건 여성들 입장에선 더 큰 공포가 아닐 수 없다.


5. 일상적 성범죄자 단상
이런 극단적 범죄자는 아니지만 일상적 성폭행이라 치부되는 전반적인 사건들을 저지르는 남성들도 많다. 검색해보면 매일같이 신상을 밝히지 않은 많은 성폭행, 성추행 사건들이 인터넷 기사로 올라온다. 짐작하기로 우리나라에서 하루에도 신고되지 않는 성희롱, 성폭행 사건은 수십건이 될 것이다. 구별되는 점은 여기에 연루되는 대다수의 남성들은 허우대가 멀쩡한 이들이 상당수라는 거다. 이 부류들은 정희진의 지적대로 평소에 사회생활 속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쉽게 소비하는 이들이다. 한국이야말로 술자리 2차나 룸살롱 등 퇴근 후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그야말로 '꼴리면' 어디서나 성욕을 채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밤거리와 낮거리의 구분, 접대 여성과 일반 여성의 구분이 상당히 모호한 경계에까지 이른 우리나라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지적대로 자기 성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정희진의 지적대로 언제나 자신의 정당한 배설욕구에 그릇(여성)이 따라줘야 한다. 이들은 (전자의 극단적 사례처럼) 분노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지만 자신의 '자연스런 행동'(성추행)을 처벌하려 할 때 사실을 부인하거나 자기만 걸렸다는 억울함으로 뒤늦게 분노한다! 이들은 천막을 치고 변두리에 살지도 않고 파산을 한 것도 아니다. 집에서는 아이들과 몇 시간씩 놀아주는 착한 아빠요, 아내에게 은근히 잘하는 남편이다. 그저 성욕의 해소는 사회생활 가운데에서 비교적 자연스러운 남성문화이며 그것이 잦아지면서 경계가 모호해지다가 재수없이 걸렸을 뿐이다.


6. 중간 결론
장황하게 쓰긴 했는데 지금에 내 생각은 (분노를 동반한 즉흥적 반응이 아니라면) 성폭행이라는 문제가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개인, 가족과 사회구조, 과거와 현재가 복합적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여성이 주된 피해자라는 분명한 사실을 제외하곤 쉽게 어떤 입장을 정리하거나 대안이라고 제시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전자 팔찌는 사후 약방문에 불과하고, 가해자 신상공개나 3년 정도의 감금은 가해자에게 '넌 계속 그렇게 살아'라는 메시지밖에는 줄 수 없다. 이들을 한 마을이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교정해나간다는 것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지금 내 옆에서 누군가가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비한다면 과할 정도로 현실적이지 않다.

더욱이 한국사회는 사회생활에서 성매매가 여전히 남성들이 향유하는 하나의 직장문화처럼 존재하고 있고, 여성이 남성의 동료가 아닌 권력구도상 비서나 부하직원인 경우가 다반사이므로 '짐승같은 남성들'이 쉽게 성매매와 성희롱의 경계를 넘나든다. 문제는 공동체가 허물어진 한국사회에서 평범한 남성이 성추행을 해서 일단 낙인이 찍혀버리면 그 남성도 곧 '너도 이미 성범죄자이니 계속 그렇게 살아'라고 치부하는 격이 된다.

결국. 나는 한심하게도 이 모든 문제에 있어 좀더 고민해보자는 입장이다. 그리고 특별히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고민해보자고 제안하련다. 남성을 짐승 취급해서 잠정적 성범죄자로 배제해버리고 여차하면 '거세'의 위협을 주는 게... 정서적으로 백분 공감은 되지만 장기적으로 서로에게 득이 될리 없다. (특히 남성 입장에서 '나는 그런 류의 짐승이 아니다'라고 항변하거나 반대로 '나도 잠정적 강간범이다'라는 인정의 극단이 좋은 해결구도를 만들 성 싶지 않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보다 현실적으로 성폭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안과 장기적으로는 성폭행 건들을 줄여서 남성과 여성의 공존 공간을 확장해갈 수 있는 담론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 기사
- [조한혜정 칼럼] 한 아이를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0139.html

- [정희진의 낯선사이]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 ··· 3D990100

2012/09/07 01:04 2012/09/07 01:0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내 전화를 받고 나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내가 말하길, 오늘 성하가 어린이집 친구인 지연이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빠직) 내일 결혼할거란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내일 월차내고 지연이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집에 와서 최대한 온유하게, 평정심을 잃지 않고 성하에게 물어봤다.


나: 성하야 너 지연이랑 결혼하겠다고 했어?
성하: 응
나: 아... 그렇구나...아하하 ㅡㅡ+
성하: 근데 나 해솔이랑도 할거야.
나: 뭐? 둘이랑 결혼한다구...?
성하: 응. 둘다 좋아.
나: ...
다시 나: 그건 안돼. 한사람과만 해야지...어..어... 엄마 아빠도 한사람하고만 했잖아. 너, 엄마가 둘이면 좋겠어? (젠장, 이게 먼소리야..ㅠㅠ)
성하: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

이때 아내가 황당해하며 개입!
아내: 성하는 그냥 여자친구가 둘다 좋단 소리야!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
ㅠㅠㅠㅠ
난 그저 성하를 뺏기는 게 싫을 뿐이라구...쩝...

 

 

'12. 9. 5

2012/09/05 23:42 2012/09/05 23:4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I believe that a great sense of humor save the world."
(탁월한 유머 감각이 세상을 구원할거야.)

오늘 페북에 올린 글이다. 다소 설명이 필요한 글이 될 것 같다. 최근에 나는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을 봤다. 먼저는 책을 소개할까 싶다. <언제나 새로웠어요>라는 제목의 책인데, 이 책은 케이 재미슨이라는 정신과 교수가 죽은 그의 남편을 기억하며 쓴 것으로, 사실 저자의 이전 책인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An Unquiet Mind>을 인상적으로 읽었기에 이 책은 그로 인해 집어들게 된 케이 재미슨의 두번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책의 저자인 그녀는 정신과 교수이기 이전에 중증 조울증 환자이기도 했으며 이 정신병으로 인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저자가 '되었다'. 사실 그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분투의 과정에는 친오빠나 전 남자친구, 그녀의 정신과 의사 등 숨겨진 조력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이겨내는 데 남편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그녀가 회상하는 남편은 섬세한 의사이며 뛰어난 '유머감각'의 소유자였다.

"리차드는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과 함께 찾아온 나의 조울증이라는 병을 날마다 조금씩 더 겪는 것도 낯설어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대단한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정말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웃게 할 수 있었다. 그는 극진히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한번은 심한 말다툼 끝에 숙모에게서 선물로 받은 도자기 토끼인형을 침실 벽에다 집어던진 적이 있었다. 사실 지금은 왜 그랬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난다. 귀여운 토끼 '눈 뭉치'는 산산조각이 났다. 핑크빛 귀 한쪽과 조그마한 발을 제외하고는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깜짝 놀란 리처드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웃음을 보였다. 나를 더 자극하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리튬(조울증 약)을 너무 많이 복용했어"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표적이 빗나갔잖아." 결국 우리는 웃음보가 터져서 바닥에 쓰러졌다. 나의 분노는 리처드의 유머를 당할 수 없었다." (케이 재미슨, <언제나 새로웠어요>)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영화.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Il y a longtemps que je t’aime>란 영화다. 주인공인 줄리엣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최근엔 '사라의 열쇠'로 많이 알려진)의 신들린 연기가 영화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주기도 했다. 영화에서 줄리엣은 15년만에 감옥에서 출소하여 동생 레아의 집에 머문다. 그녀는 15년 전 자신의 6살난 아들을 죽인 살인혐의로 구속되었고 남편의 불리한 증언에 의해 징역이 확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단 한 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고 영화는 설명한다. 레아는 그녀를 증오하게 된 부모님의 반대로 언니와 연락조차 못하고 지내다가 출소 후에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다소 충격적인 이 사건에 있어, 영화의 말미에 드러난 진실은 이렇다. 사실 줄리엣의 아들은 고통스러운 병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증상을 의사인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다. 아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갈 것을 염려한 그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아들과 행복한 하루를 보낸 후 아들에게 약물을 투여해 죽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죽음이 예정된 아들'이라는 그녀의 현실이, 그녀에게는 감옥이나 다름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에게서 고통을 제거하고 자신은 물리적인 감옥으로 걸어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오랜 시간동안 줄리엣은 침묵했고 경직되어 있었고 퇴소 후에도 여전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레아의 집에 머물면서 마주치는 레아의 어린 딸들을 속으로는 애뜻해 하면서도 실제로는 일부러 거리를 두었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남자와의 섹스 후에도 그 표정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건조해 보인다.

그런 줄리엣을 레아의 학교 동료 교수인 미셸이 지켜본다. 미셸은 '위트'가 넘치는 중년 남자다. 그 또한 아내와 이혼한 지 10년이 되었고 영화는 그 이혼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친구들과 함께 별장으로 놀러가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술취한 한 친구가 줄리엣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어보고 참다못한 줄리엣은 자신이 아들을 죽여서 감옥에 갔노라고 덤덤히 말한다. 친구들은 집요한 물음에서 벗어나려는 농담으로 치부하여 다함께 크게 웃어넘기지만, 미셸은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직감한다. 그 후로 자주 미셸은 줄리엣 주변에서 그녀에게 바보같은 농담을 던진다. 미셸은 조금씩 그 위트에 반응한다. 감정이 없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시도때도 없이 농담을 날리는 느낌이다. 그 농담들은 줄리엣을 웃게 만든다. 그와 시간을 보내던 줄리엣은 어느 순간 레아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영화에서는 피아노를 함께 치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결국 영화의 말미에 레아에게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죽이게 되었는지를 15년 만에 처음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미셸의 유머'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런 얘기다. 내가 하고픈 말, "탁월한 유머가 세상을 구할 것이란 믿음"은 그런 얘기였다. 여기에서 '세상'은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금도 세상은 신음한다. 구조적인 악에 의해 고난을 당하거나, 타인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심감에 빠졌거나,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분노에 휩싸여 살거나 간에... 그 깊은 고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막연히 나무나 숲을 관망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직시할 때. 그런 가까운 거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나는 자주 뒤틀려진 관계의 실타래를 발견하곤 한다. 굳어진 관계, 굳어진 사람, 굳어진 대화, 굳어진 삶의 터전들. 결국 그 사이사이를 '사람'이 지나 다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굳어진 얼굴에 던져진 탁월한 유머 몇 개가 그들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틈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굳어진 무언가가 갈라진다. 그게 세상을 바꾸는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본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2012/09/05 18:42 2012/09/05 18:4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교향곡이 아닌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하.
오늘따라 즈피아노 협주곡을 유심히 보다가 입을 뗀다.
"지휘 아저씨 머리.."
"응? 머리?"
"머리털 많은거 같애"
(ㅋㅋㅋ지휘자는 네빌 매리너경이다.)
"피아노 아저씨는..."
"머리가 쪼꼼 빠질라그래."
풉! 웃다가 물어본다. "그럼 아빠는!"

내 이마 위를 유심히 보더니,
"아빠는... 아빠도 털이 좀 빠진거 같애"
ㅡ,,ㅡ+

 


'12. 9. 3

2012/09/03 23:38 2012/09/03 23:38
Posted
Filed under 컨텐츠/기타 이슈들

공지영-하종강-이선옥

다시 한번 느낀 건데 트위터는 논쟁의 도구로는 부적합한 것 같다. 파급효과는 큰 반면 제대로된 소통에 제약이 있어보인다. 즉흥적, 즉각적 감정 대응...그에 따르는 순식간에 팔로워를 타고 전파되는 속도가 정말 무서울 정도다.

공지영-하종강-이선옥의 표절 문제는, 과거 월간지 논쟁으로 본다면 2-3개월간 주고받을 내용이 축약+감정고조 상태로 진행된 느낌이 적지 않다. 더우기 한 가지 이슈로 한 사람의 내면이나 그의 인생 여정을 모두 난도질하는 식의 표현들이 오가는 대목에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제3자 입장인 나조차도 꽤나 불쾌했다.

다들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겠고 트위터라는 공간 자체의 특수성도 감안해야겠다. 그리고 언제나 공지영은 주변의 지적에 다소 까칠한 언니의 모습을 보여왔는데, 그 까칠함이 적에게 향했을 때는 환호하다가 아군을 향하니, 비판을 넘어 '공지영'이라는 인간 자체를 냉소하고 실망감을 내비치는 경우들은 ...좀 아쉽다. 공식적으로는 '좀'이지만 내심 상당히 아쉽다.

'12. 8. 16.


힘조절
 
1.
 섬세한 작업이나 운동 경기에서 힘조절을 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장에서 자동차 조립시에도 규정 토크를 줘서 나사를 돌려야지 과토크를 주면 나사 머리가 날아가거나 나사산이 뭉개진 채로 차에 박힌다. 그러면 빼내서 다시 조립하기 조차도 쉽지 않다.

2.
아내와 대화 중에 말하길 우리 나라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10개 중에 1-2개 잘못했는데 그것을 잘 가려서 비판하지 못한다는 얘길 했다. 트위터나 게시판 댓글에도 지지와 비난의 극단을 달릴 줄만 알지 그 사이의 입장 표명이 쉽지 않다는 거다. 모처럼 탁월한 지적이란 생각을 했다.

3.
 보수층은 너무 덮어줘서 문제라면, 진보는 서로에 대한 분노지수가 너무 높은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진보:보수:무당파를 30:30:40으로 분류
하지만 난 우리나라 진보가 30이나 되는지 잘 모르겠고(그런 이유로 김두식 교수는 자주 진보를 찻잔 속 태풍으로 비유한다) 그 진보의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고 그 사이가 너무 소원하다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한다.
 
4.
비판은 장려되어야 한다. 비판은 당사자와 더불어 지켜보는 제3자에게도 양쪽의 논리적으로 약한 부분을 짚어보는 계기를 만들며 더욱 다양한 시각,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힘조절되지 않은 비판은 때로는 과투입된 처방전처럼 독이 된다.
 
5.
 사사로운 잘못에도 매번 회초리 100대를 맞아야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완성도가 뛰어난 성인이 될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승자독식 사회와 더불어 패자, 실수자에게도 가혹한 사회다. 또한 진보 논객들은 그런 오류나 잘못들을 귀신처럼 찾아내어 극단적인 혐오나 냉소를 쏟아내고 스스로의 '관'이 없던 대중들은 그 논리대로 호불호를 흡수하여 그 극단적 정서를 가감없이 '리트윗'한다.
 
6.
 어쩌다 공지영 얘기가 나와 이 글의 말미는 공지영의 옹호가 되는 느낌이지만,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하다못해 철새 김민석에서 코리안 드림 박찬호, 최근에는 임수경, 이정희까지. 내가 겪은 많은 이들은 그들을 중간 정도를 옹호하고 중간 정도를 비판하지 않았다.

7.
 난 가끔 내 주변 진보 진영 지인들이 나의 말실수나 잘못된 논지 한두번으로 나를 떠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종종 있다. 요즘은 진영에 상관없이 SNS에서 주기적으로 언팔에 친구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지애를 느끼던 이들이 실망감을 비추고 갑자기 관계망에서 사라지면 참 마움이 지옥 같다. 삶의 방향성이 같은 지옥. 솔직히 난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12. 8. 16.



입금하라!

아내와 오늘도 공지영-하종강-이선옥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내 트위터와 페북에도 여전히 관련 글들이 오르내린다. 이제 나도 세 사람 당사자들의 글들은 충분히 읽었다. 솔직히 모두 공감이 간다. 허나 여기서 누구의 손을 드는 순간 뭔가 내 주변 사람들과도 서로 벽을 만드는 느낌마져 드는, 일종의 '서늘함'이 내 이마에까지 전달되는 요즘이다.

사실 나는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의 근본에는 22명의 자살로 귀결된 쌍용차 문제 자체가 존재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같은 사건으로 이십여명이 줄줄이 목숨을 끊는 이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에 국민적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데 세 사람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호불호로 확대 재생산, 그것도 강한 분노와 더불어 퍼지는 게 공감이 되다가도 이 논리싸움이 솔직히 때론 절망스럽기도 하다. 그만큼 각자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반대입장으로 해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사실상 이 문제는 담론의 과잉 수준에 이르렀으니 당사자가 아닌 제3자들은 논지를 퍼나를 때에 근본적인 쌍용차 문제 자체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또한 자판이나 두들기며 잘잘못을 가르는 무책임한 논객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글 하나 쓸 때마다 후원계좌에 입금하라는 거다. '닥치고 입금'이 아니고 '선 떠들고 후 입금'하라는 거다.

인증샷까지 권하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고. 글하나에 입금 한번. 잘잘못 가리는 일이 중요한 만큼 쌍용차 노조에 도움을 실질적인 주었으면 싶다. 먼저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일빠로 입금하련다...!

'12. 8. 21.

2012/08/22 21:49 2012/08/22 21:49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김동문 선교사님과 대화 중에 김선교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귀국한 후로 주변 사람(기독교배경)의 대화의 절반은 못알아듣겠다고. 이유인즉슨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할 때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책들과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저자명과 서명이 어떤 기호나 암호처럼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김선교사님은 그간 본인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음을 반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친 외국 저자들의 이름이 난무하는 대화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살짝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우기도 쉽잖은 미쿡, 유럽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 사실 그 핵심 주장들이 그리 낯설지 않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어내기 보다는 저자명, 서명으로 암호화한다는 말이다. 결국 알맹이는 단순하고도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임에도 많은 대화에서 그 담론을 암호키 주고받더라는 거다.

나는 크게 공감했다. (아마도 원저자, 원저서명을 주고받는 이런 트렌드는 레퍼런스를 장황하게 밝히는 미국학풍을 반영한 것이리라.)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좋은 저자의 핵심 개념, 탁월한 상상력을 캐치하는 것이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중첩시켜놓고 실천, 참여(앙가주망)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미 내 것이 된 개념의 레퍼런스명들을 장황하게 외우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송하는 키값(key value)처럼 주고받을 이유는 없지 않나...하는 거다.

불현듯, 중고등학교 때 사건의 의미보다는 연도나 위인의 이름을 외우던 역사시험 시간이 떠올랐다.

2012/08/20 21:47 2012/08/20 21:47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가끔 주변 눈치 보지말고 정말 네가 원하는 걸 하라는 얘길 듣는다. 물론 주변 눈치를 보면서 욕망을 누르는 것도 문제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강하게 원하는지 지금 원하는 것이 일시적 무료함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본질을 뒤흔드는 일인지에 대한 불확실함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따라서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알라'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타자(세상)와 나를 구별짓거나 때론 동일시한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개인은 타인과 같은 욕망, 타인과 구별된 욕망을 찾아낼 수 있고 그 때에야 비로소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나는 자아, 혹은 자신의 내적 에너지가 없는 이들에게 무성의하게 '네가 원하는 걸 하라'는 선언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를 단련하라'고 격려하는 게 어떨까 싶다.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으로 때론 자아를 낮추고 조직에 몸을 맞추는 겸손함도 배우고, 때론 공동체와 구별된 독특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때는 그것을 발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세상은 점점 조직화되고 속도에 민감하게 흘러가서, 개인이 스스로를 인지하면서 성장하기를 기다려주기보다는 일단 그 나이와 역할에 맞는 톱니바퀴에 물려놓고 그 추동에 의해 개개인이 '잘 돌아가기만을' 기대하는 듯 하다. 한번 물린 이빨 안에서 적응하다보면 아무리 외부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빠져나와 돌아가라고 소리쳐도 그 보수적 추동을 끊기가 쉽지 않다.

대중과 섞여 있으면서 대중과 동화되는 지점과 차별되는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는 개인은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향해 빠르게 행동할 확률이 높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단련된 사람들은 동질감을 느끼거나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에도 극단적인 분리 경험 없이 소통의 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2/08/18 18:41 2012/08/18 18:4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선다. 줄이 길어지면서 일직선이 되지 않은 틈에 비뚤어진 중간 즈음에 누군가가 슬쩍 줄을 선다. 그 뒤로 사람들이 다시 줄을 선다. 이때 나는 심기가 불편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서 있다. 줄이 어느덧 두 줄이 되고 그 줄 사이로 간간이 사람이 들어와서 2.5줄 비슷하게 된다.

솔직히 나는 끼어든 줄보다 끼어든 줄에 아랑곳하지 않는 원래 줄의 사람들이 더 밉다. 잠시 후 버스가 온다. 버스는 줄 앞이 아니라 줄과 4~5미터 뒤에 정차하고 그 지점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줄과 상관없이 버스에 타기 시작한다. 출입구에 3~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이쯤되면 처음부터 줄이란 건 없었던 것처럼 혼잡하다.

이게 뭔 미친 짓이란 말인가... 사실 이런 일은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겪는다. 커피주
문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눈치를 잠간 보다가 점원에게 뭔가 물어본다. 그러고는 슬쩍 메뉴를 주문한다. 내 차례가 되어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뒤에서 먼저 라떼 두잔이요..라고 소리친다. 점원은 그 주문을 접수한다. 점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니가 빨리 말을 안 해서 그렇지.'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만원 지하철에서 내릴 즈음 문앞에 있는 나를 굳이 밀쳐내고 먼저 내리는 승객들이 있다. 나를 밀쳐내고 앞서 가면 도대체 얼마나 빨리 나가냐. 씨바... 뭐, 나를 포함해서 다들 스스로가 소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겠지만 공중도덕을 떠나서라도 일상적으로 부딫히는 사람들을 장애물처럼 생각하고 무시하고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자신의 편의를 취하는 생활이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모든 윤리에는 역사적인 문제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선행한다. 허나 우리 개개인도 엘리베이터에서도 출구만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지나가는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있는 데도 이어폰을 꽂고 지나칠 만큼, 어느새 아주 기본적인 공동체 윤리의식조차 나약해진 건 아닌지.


#2.
유독 우리나라가 공중 도덕이나 이른바 공동체 윤리가 낮은 이유는 여러 방면에서 보는 입장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입시에 '몰빵'된 교육 체제가 문제가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는 중학교 시절, 성적이 오른 후로 어머니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모든 다른 일들은 면제혜택을 누리며 자랐다. 설거지, 청소, 빨래 같은 집안 일은 물론 아르바이트 용돈벌이도 안 했고 하물며 학원 때문에 친척 결혼 같은 집안 경조사에도 간간이 빠져도 문제가 안 됐다. 학교에서는 반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예체능 점수를 담임 선생님이 알아서 관리(?)해줬다.

지금도 내 주변을 보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대학 입시 전까지 모든 부모는 자녀가 학교 성적이 오르는 일에 집중하고 다른 많은 일들에는 면제의 혜택을 주는 '관행'이 지속되는 느낌이다. 사실 여기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해 지친 자녀들에 대한 불합리함을 공감하고 있어서, 되도록 공부에 찌들어 불쌍한 자녀의 다른 영역은 통제나 훈육하지 않으려는 '배려'로부터 비롯된다.

아이들은 무섭도록 빨리 어른들의 욕망을 알아채고 그 욕망의 선을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모방하고 체화시킨다. 부모의 욕망에 기인한 이런 가치관, 세계관은 당연히 '공동체 안에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지향하기 보다는 경쟁에 강건한 정신력을 갖추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지금까지 공부한 고생을 통해 남은 여생을 지속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상류층이 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다.

그런 욕구로 아이들은 성장기에 체득해야 할 공동체 윤리적 습속을 익히지도 못한 채 공동체성이 전무하고 암기력만 탁월한 미숙한 성인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스트레스에 취약할 수 밖에 그것이 자연히 공중도덕이 작용해야할 일상적 자리, 버스에서 줄을 서거나 음식을 주문하거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한 욕망, 습관이 분출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요즘 세대는 오죽하겠는가. 어른들의 욕망대로 공부를 했지만 예전보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일자리는 줄었다. 공부를 잘해도 계급상승의 욕망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은 대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떠안은 빚도 만만찮다. 그런 연유로 그들이 비정규직 직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그 일을 공동체의 일원의 역할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잠시 떼우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긴다.
 
결국 이러한 전반적인 구조가 가진 자도 지랄하고 못 가진 자도 지랄하는(죄송) 우리나라의 공동체 윤리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마, 이런 생각이 든다.

2012/08/10 21:48 2012/08/10 2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