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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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ting de Corazon>을 봤다. 이 영화는 스페인 영화라는 걸 빼면 전형적인 2류 불륜 영화다. 원래 이 영화는 중년 남성의 일탈이나 욕망에 집중되었저만 '젊은 여성' 입장에서 조금만 썰을 풀고 싶다.

스토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중년 남성은 자신에게 손자가 생겼다는 얘길 들을 때 즈음 젊은 여잘 만나게 되고 그 여자에게 빠져든다. 젊은 여자는 원래 사귀던 중년 남친이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어 감정에 충실하게 달려가고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된 중년남자의 아내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가고 그녀도 상담하던 남성과 교제를 시작한다. 결국 젊은 여자는 중년남자가 아내와 헤어지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중년남자도 아내가 떠나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탈은 끝나고 중년부부는 손자를 맞는다.
 
때때로 젊은 여성들은 또래 남성보다는 심정적인 여유가 느껴지는 성공한 남성, 혹은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안정적인 중년 남성에게 끌리는 것 같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를 전형적인 방식으로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중년 남성에 호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자신의 unstable한 상태를 stable한 반려자를 통해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자신의 늙음에 대한 자각과 함께 점점 커지는 일탈의 욕구와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지적(질)은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따라서 어떻게 불륜이 시작됐든 대체로 남성은 젊은 여성이 일탈적 존재에서 일상적 존재가 되는 시점에 정신을 차린다. 영화에서도 젊은 여성은 중년 남자와 아이를 낳고 함께 살기를 원한다. 남자는 그 일상의 무상함에 짓눌려 시작된 관계가 다시 삶의 '정상 루프' 안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나면 일상적 영역 안에서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중년 남성이라면 대체로 익숙함과 보수성이 고개를 쳐든다. 아내가 차려준 식사, 아내와 함께 힘들게 키워낸 자녀, 그 아이들과 함께 사는 스윗홈... 그 게임 룰 안에서는 이 영화에서처럼, 아내가 이기게 되어 있다. 이 영역에서 젊은 여자는 철저하게 타자이고 미지의 세계이며 지금까지의 안정화된 삶을 뒤집는 불안 요소가 된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출산 육아 공부 차, 함께 자주 들락거리던 인터넷 카페에서 듣게 된 이야기가 있다. 유부남과 교제하는 여성들의 비밀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에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유부남과 사귀는 여성들의 고충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가끔씩 읽는 holicatyou.com 블로그에도 간간이 유부남과 사귀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본다. 비슷한 패턴은 첨엔 미친듯이 들이대다가 시간이 지나면(일탈이 일상이 되는) 그 관계가 역전되고 종국에는 젊은 여성들만 상처를 입는 것이다.

이 2류 영화와 사례들을 자질구레하게 언급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자 결론이다. '젊은 여성이여, 유부남과 절대 엮이지 말라.' 첨엔 따스한 정서와 공주같은 대접을 받을 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의 경우 홀로 남겨지는 건 젊은 여성이다. 유부남은 가정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그 남편을 용서하고 젊은 여성은 버려진다.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고 내가 아는 한 이는 다분히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2012/07/27 22:51 2012/07/2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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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가끔씩 자신 혹은 주변에서 일어난 성공이나 다행스러운 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분들을 본다. 당연하다. 우리는 범사에 창조주에게 감사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오늘 먹은 맛있었던 식사나 만났던 친구와의 행복했던 대화, 자녀의 건강, 나아가 명문대를 입학하거나 큰 돈을 벌거나 치명적인 질병에서 낫거나 가족에게 경사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것이 성도에게 혹은 대중에게 드러내 놓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지 따져볼 필요도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의 자녀는 명문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면 명문대에 낙방한 부모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열차 사고나 공공장소에서의 위협에서 누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냥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렇듯 그 성공이나 구원이 신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리는 특별히 우리에게 임한 특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면 누군가는 배제됨의 저주를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인 욥의 문제, 나의 고통과 나의 실패는 모두 나의 죄성에 기인하는 것인가. '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타 성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왜 나에게는 임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된다.

사실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지 불평등한 상황 가운데 특혜받는 성도를 표지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은 모든 사람을 예수의 구원 안에 두고자 하는 종교다. 이렇듯 불행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많은 사례들은 '범사 감사'의 특수 사례를 넘어 기독교의 본질을 뒤흔든다. 또한 실제로 그 영광에 가려진 성도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므로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동일하게 인간은 주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타인을 더 좌절하게 만드는 감정 표현을 절제할 필요도 있다.
 
2012/07/24 18:41 2012/07/2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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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글을 디폴트 B급으로 친다. 요즘은 글을 자주 쓰지도 않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줄곳 내 글에 대한 스스로의 아쉬움이 이어졌다. 그것은 이른바 학계, 교계나 주류의 논객들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때 나는 지식으로 철갑을 두른(칠갑 아니고) 논객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난 왜 신학이나 공부를 더 하지 않고 돈벌이 직딩이 되었나...하는 아쉬움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길이 내게 주어진 것도 아니요 실로 내가 가고싶지도 않은 길이란 생각이 점점 커지면서 사실 교계든 뭐든 논객의 위치에서 이탈된 삶이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글 한편을 쓰고서 퇴고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의 부족이 내 스스로의 글에 대한 자존감을 떨어뜨렸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창피하기만 한 이십대에 쓴 내 글들. 그래도 그 글들에 대한 특유의 자존심은 5-6번의 퇴고 작업에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넘긴 글은 솔직히 다시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겨웠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지금은 좀 낫지만 성하가 태어난 직후에 나에겐 글쓸 짬이 없었다. 성하가 좀 자라고 나서는 직장생활이 더 바빠졌다. 뭔가 쓰고 싶은 글이 생겨도 이제는 초안을 마치기조차 쉽지 않다. 때론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옮겨두지 못해서 아쉽게 잊어버린 것들도 많다.(아.. 그 대단했던 생각들이여.ㅋ) 결국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가뭄에 콩나듯 청탁이 들어왔고 나는 그 글을 쓰면서도 허덕였다. 퇴고는 무슨, 퇴근하고 초안을 쓰기도 버거웠고 그렇게 끝나기가 무섭게 마감 직전의 내 원고는 전자메일을 통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초안'이 종이에 찍혀서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엔 마음이 많이 상했다. 내 기준에도 못 미치는 글, 조금은 더 매끄러울 수 있는 표현들. 이제야 생각난 더 좋은 예화... 그래도 그렇게라도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어디냐 라는 생각을 위안삼고 넘어갔다. 근데 그렇게 생각을 하자 몇 번의 글을 더 썼고 그 이후로는 청탁이 아니더라도 글을 써서 내 손으로 매체에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마음에는 그 글들이 B급이라는 평가와 함께.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물론 내 생각도 변한다. 단순히 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어떤 틀이 생기고 그 틀이 강물처럼 이리저리 길을 찾아 바다에 닿으려는 욕망 같다는 느낌. 결국 나는 글쓰기의 대가가 될 마음이 아닌데 내 생각이 조금 더 매끄럽고 조금 덜 매끄러우면 어떤가. 지금 나는 내 실존적인 이슈들을 써내려가고 싶을 뿐인데. 결국은 누군가와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해 연대하고 함께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고 싶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내 글이 뛰어나면 더 좋겠지만 내 목표가 어떤 류의 '팬덤'이나 학계에 오래도록 기억될 fine idea가 아닌 다음에야 글이 더 매끄럽기를 바랄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 말이다. 결국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는 그런 B급 글쓰기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보기에도 조금은 못생긴 내 글들을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2012/07/24 18:40 2012/07/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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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성하 데리러 가는 날. 어린이집에서 아빠아아 하고 뛰어 나온다. 차 창문으로 바람이 뺨을 스치고 내 무릎에 앉은 성하의 머리에 내 턱을 대고 있었다. 내 품에서 꼼제락거리는 성하를 안은 채, 해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언젠가 이 날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회상할 것 같다.

7월 16일.


#2.
세상 '벽'과 만나면 성하는 나에게 달려온다. 놀이터의 친구가 같이 놀던 장난감을 빼앗기거나 넘어지거나 밖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혹은 엄마가 혼을 낼 때. 성하는 두 팔을 벌려 나에게 안긴다. 너무 쌔게 안으면 부서질 것만 같다. 어떤 사물의 크기만으로도 아우라가 생기는 듯, 작다는 것 자체가 울컥한 마음을 가져다 줄 때가 있다. 처음엔 팔뚝만하던 성하는 이제는 내 한쪽 다리만큼이나 자랐건만 여전히 그를 안으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이 아이의 아빠란 사실이, 이 아이가 내 혈육이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에도 성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옷에 자기 얼굴을 묻고 비벼댄다. 조그만 손가락, 머리칼, 특유의 아이의 냄새, 턱에 쓸리는 머리카락. 멍 때리며 눈물을 닦는 표정...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밀어내고 다시 '세상'으로 뛰어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언젠가 다시 내 품에 안기지 않을 날을 떠올려봤다. 아버지도 이렇게 만들어지는 걸까. 난 아버지에게 안겨본 기억이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사진에선 봤지만 그건 그냥 사진일 뿐 내 기억 속 아버진 나를 물리적으로 안아 준 적이 없었다. 성하가 커서도 나에게 안기면 좋겠다. 물론 그땐 성하가 나를 안아주는 거겠지만.

7월 23일.

2012/07/23 23:29 2012/07/2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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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3학년? 5학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아이큐가 118이라는 소문이 반에 돌았다. 당시에 동네 학군이 높았던지 평균 아이큐가 128 정도였고 나는 그보다 10이 낮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너무 창피해해서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선생님에게 물어보셨는데 선생님은 부인하시면서도 끝내 아이큐를 알려주지는 않으셨다. 때문에 선생님은 원칙이라고 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더욱더 내 아이큐가 118이라는 의구심을 키워갔다.

그땐 아이큐가 무슨 내 CPU사양이라도 되는 듯 그 숫자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점점 천재, 영재의 성공스토리보다 99%노력을 강조했던 에디슨이나 둔재들의 성공 사례들에 희망을 얹고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곤 했다.

문제는 머리가 나쁘면 열심히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험 때마다 나는 내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죄책감과 더불어 난 왜 날때부터 똑똑하지 못한가...하는 원망감. 악순환이었다.

중3, 고1 때인가. 학교에서 아이큐 검사를 다시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점수를 올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문제는 악마도 만날 수 없고, 아이큐 검사의 해답지도 구할 수 없다는 것.ㅠㅠ 당시에 내가 한 최선의 치팅은 섹션별로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다른 섹션을 다 풀고 시간이 남으면 되돌아가서 못푼 섹션의 문제를 더 풀었던 정도?

그리고 다시 점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어머니는 내가 아이큐가 낮다고 그간 자학해온 아픈 사연을 설명하셨다. 선생님은 이례적으로 내 아이큐를 알려주었다. 148. 학교마치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가 외친 숫자였다. 어머니의 흥분에는 넌 바보가 아니었어...라는 복음과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난 그때 알았다. 아이큐는 날 규정하지 않는다는 걸. 솔직히 유년기와 사춘기 시기에 작은 단점마저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던 바로 그 시기에 아이들이 내 지능을 갖고 놀린 부분은 5-6년 동안 내게 심한 트라우마가 되어왔다. 고정된 118의 지능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까먹고도 그것으로 어머니에게 혼남과는 별개로 나는 내 지능에 대해 자책과 원망감에 휩싸이곤 했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같았던 그 시절.. 나를 참 많이도 괴롭혔다. 난 반 상위권이었지만 전교 상위권이 아닌 이유를 118에서 찾았고 그것은 성적을 더 올리지 못하는 장애물이 됨과 동시에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도덕적 명령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함을 의미했다.

148. 기쁘기 보단, 왠지 허무 개그같은 느낌의 숫자. 118에 기인한 나의 수많은 낮과 밤의 고민과 의문, 학교와 가정, 세세한 기억하나에서조차 그 원인을 찾던 118은, 알고보니 내 숫자가 아니었다? 이건 뭔 어른들의 개장난이야...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대체로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숫자나 딱지를 붙이는 걸 싫어한다. 지인들의 출신 대학도 잘 모른다. 그것들이 그 생동감 있는 독특한 한 개인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뼈속까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어떤 숫자나 딱지가 한 사람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안다. 누구 말마따나 나도 다 (당)해봐서 알겠다. 고로, 안 해봐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덧글.
이상은 아이큐 퍼기 깔대기였다.^^

2012/07/20 21:46 2012/07/2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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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난놈이 혼자 달려가는 방법. 빌 게이츠가 말하듯 똑똑한 한넘이 어리버리한 여럿을 끌어주는 식. 창의성을 지속 독려하면 한번의 성공으로도 조직이 발전을 이끈다는 점에서 나름 강점이 있다.

‎2. 두번째. 조직원 모두가 공감하고 행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발적 변화를 이끄는 방법이다.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식임에 분명하다. 이는 속도보다는 '함께'가 중요한데, 수직적 조직에서 소통의 문제를 경험한 이들에게 보다 절실한 부분이다.

‎3. 요즘 내가 고민하는 조직은 이른바 exemplar solving 그룹이다. 이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기인한다. 과학사에서 혁명은 난제들을 푸는 exemplar의 확장에 있다고 보았다. 즉 문제 해결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4. 혼자서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낳는다.(혼자 행동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위치에서 규모에 맞는 대안을 찾는 것, 이를 하나둘 실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2/07/20 21:45 2012/07/2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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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는 확실히 뜨거운 매체다. 말 실수하거나 뜨거운 이슈에 위험한 입장 표명을 하면 반나절 안에 퍼져서 이미 자신도 모르는 제3자가 자신의 글을 욕하고 있는 상황을 맞게 되기 십상이다. SNS 속도의 강점이 고스란히 맹점으로 자리잡는 순간이다.

당사자가 정신을 차리고 해명을 하더라도 시작된 논란은 정리되지 않는다. 이미 몇 다리를 건너간 '내 글'은 이미 내 글이 아니며 그저 논란거리에 불과하므로 내 글에 내가 직접 해명을 한다 해도 동일한 루트로의 전달이 보장되지 않는다.

대안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내 경험상 이상적 대안은 없다. 조심스러운 나의 의견은 이것이다. 자신의 SNS 영향도를 축소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 자신의 생각을 널리 전하려는 그래서 유명해지려는 욕구가 사실상 익명의... 방대한 네트워크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았던가.

SNS의 가장 큰 문제는 한 개인이 안면없는 친구들과 수백명씩 엮여 있으면서 그들을 오랜 친구에게 대하듯 허물없는 말과 주장을 쏟아낸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유통된다. 설령 자신이 글을 지워도 지인을 통해, 혹은 메타 사이트들이 꼬박꼬박 저장해두고 있다.

나는 하루에 최소 3-4명의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를 듣는다. 대체로는 무시하지만 때로 맞장구를 치며 은근 뒷담화를 즐길 때도 있다. 나는 비슷한 경로로 나에 대한 뒷담화를 어떤 사람들은 즐길 것이라고 예상한다. SNS는 그런 뒷담화의 기하급수적 확장이 가능한 공간이다.

나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예민한 편이라 내가 포용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는 관계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거나 적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전까지는 선을 그으려고 노력한다. '대중'의 사랑, 인기를 받으려는 욕망에는 그만한 댓가 - 대중의 비난과 험담을 견뎌야 하는 - 따르게 마련이다.

마치 몰랐다는 듯 극도의 분노에 휩싸이거나 극도의 우울함에 빠지거나 계정을 삭제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숨는다. 혹은 마지막 한마디까지 해명하고자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고 그 극단의 종지부에는 호불호가 갈린 절반의 친구들과 비난섞인 교제를 지속하게 된다. 그렇다. 대중성을 감당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라. 그리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SNS의 나를 축소하라.
2012/07/20 18:39 2012/07/2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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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보긴 좀 우울한 감이 있었지만, 영화 <뱅뱅클럽>을 봤다. 이 영화는 포토저널리스트가 피사체를 단지 찍어서 알리는 일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피사체의 현실에 개입해야 하는가의 화두를 던진다. 영화 속 실존인물인 케빈 카터는 퓰리쳐 수단의 기아 사진으로 퓰러처상을 수상한다. 허나 그의 사진은 사진가의 현실 개입에 관한 윤리적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퓰리처상을 수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금 다른얘기지만 한편으로 저널리즘은 역사 속에서 사진 영상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선정적인 사진은 인간정서를 자극하여 이성적 판단 자체를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 한 예로 광주항쟁에서 무기로나 수적으로 터무니없이 열세였던 시민이 군인에 대항하는 한 장면의 프레임을 취하는 것. 이런 게 전형적 영상의 왜곡, 진실의 왜곡에 속한다. 영화 속에서도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이 그 자체만으로도 정부군을 옹호하거나 반군을 옹호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한다.

 
‎그런 이유로 르몽드는 신문에 일절 사진을 게재하지 않는다. 선정적 사진이 사건의 객관성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이 발명된 이래 포토저널리즘은 사회에 많은 화두를 던져왔다. 게다가 미술작품과는 달리 수많은 똑같은 복사물을 찍어낼 수 있는 사진들은 발터 벤야민으로 하여금 '아우라'에 관한 사색을 더하기도 했다. 사진과 인간,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피사체는 나와 타자의 관계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는 낯설면서도 닮은 구석이 있다.


덧글.
 라이언 필립은 인물이 많이 망가졌다지만 그의 얼굴과 연기가 좋았다.

2012/07/16 22:49 2012/07/1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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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집단지성으로 달달한 디저트 맛집을 추천받았습니다.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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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고/ 치즈케익
앤티앤스/ 프레즐(특히 목동현대점)
팥빙수/ 현대백화점(압구정, 목동, 일산) 밀탑과 이촌동 동빙고
진하고 걸쭉한 핫쵸콜릿/ 홍대앞 카카오봄
쇼콜라봉봉/ 도산공원앞 삐아프
타르트/ 홍대앞 스노브
홍대 쪽(상수동)/ 르쁘띠푸와 스노브
설레임(쿠키앤크림)
샤니 보름달
홍대/ Be Sweet On/ 타르트 타탄
이대 후문 맞은편 고가도로 입구 쪽/ 라 본느 타르트
서초동에서 예술의 전당 사거리 쪽/ 김승자 부띠끄 1층/ 카페 듀파르
마카롱/ 광화문 나무와 벽돌
홍대 서교 초등학교 옆/ suave/ 마카롱, 수제 캐라멜, 푸딩
현대백화점 지하/ 스위티 블루바드/ 마카롱
극동방송국 옆/ 라 쁘띠 푸/ 마카롱
와플/ 홍대 정문 옆/ 디디스 고프레
와플/ 서래마을
일민미술관/ 카페 이마/ 빈스빈스 와플
가로수길/ 듀크렘 파이/ FIKA케이크
홍대 에반스와 무슨 음식점 사이길/ D'AVANT/ 와플



*Special Thanks to. 심정희님, 민대백님.^^

2012/07/13 22:48 2012/07/1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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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어제의 생각.
"플래너를 쓰면서 느끼는 건 시간관리를 하기엔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관계, 고민의 흔적, 그 시기의 중요한 메모들은 정리하여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점이다. 일기말고 한 개인의 이력,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는 기록 방법은 없을까."
 
#2. 7habits.
그간 나는 누구보다 7habits 방식으로 시간관리를 잘 훈련해왔다고 자부한다.(아.. 깔대기를 참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은 GTD방식으로 직장에서 뇌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열된 메모리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두 가지 시간관리 방식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줬고 지금도 실무적으로 혹은 특정 영역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방식들의 한계를 본다.

 

*주: 데이빗 알렌은 우리의 뇌를 컴퓨터의 메모리에 비유한다.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각 프로그램마다 일정량의 메모리를 확보하게 되고 따라서 실행한 프로그램 수가 늘어날 수록 메모리 부족으로 컴퓨터는 느려지게 된다. 데이빗 알렌은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판단하여 우리가 빨리 해치우지 않고 미루는 사소한 많은 일들이 우리 뇌의 메모리를 잡아먹고 그것을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메모리 폭주에 비유했다.

 

#3. 크로노스 vs. 카이로스
'관계중심 시간경영'이란 책에서 저자는 시간관리에 있어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구분한다. 우리는 머리로는 시계시간(크로노스) 대비 사건시간(카이로스)을 더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실제 삶에서 시계 시간의 관리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통찰이 그것이다. 결국 시계 시간에 집중된 시간관리는 일정을 관리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한 개인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있는 정보들을 캐치하기가 쉽지 않다.

 

#4.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몇 년 전부터 우리 교회는 '아브라함 학교'라는 독특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성경 속 아브라함 이야기를 명제가 아닌 서사(narrative)적 흐름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중요한 건 삶의 어떤 원리나 법칙(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 구원의 원리와 같은)을 연역적으로 추출하는 것이 아닌 내 삶의 서사, 즉 유년시절부터 청년, 중년에 이르는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 속에서 어떤 선굵은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트렌드이기도 한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중심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5. 카이로스 플래너? 내러티브 플래너?
나는 요즘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카이로스 지향적인' 시간 관리 방법을 익혀나가는 중이다. 이러한 트렌드는 앞서 말한대로 내러티브, 스토리텔링과 같은 현재 우리 세대의 지적 관심과도 일맥상통하지만 이러한 서사적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을 돌아보고 관리(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인생의 방향성을 따져보는)하는 프레임으로 플래너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아마 소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일기를 쓸 것이다. 하지만 일기는 너무 자기고백적이고 비밀스럽다. 내러티브는 보다 사건 기록에 치우치고 조금은 건조한 기록이다.

 

#6. 노트 중독자의 변명.
아무튼, 나는 또 노트를 샀고 이러한 나만의 시간관리 방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많은 주변의 지적 자극으로인해 시작된)으로 스스로를 잘 훈련한다면 좀더 건강한 노년을 맞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노트에 하루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2012/07/11 22:48 2012/07/11 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