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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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로데이에 빼삐로 사갔더니 성하가 달려와서 혼자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폭풍흡입.

 어이가 없어서 아빠도 하나만 주라..했더니 성하기 여유롭게 나를 안심시키며

'아빠는 내가 다음에 사줄게. 걱정마, 걱정마'한다. 걱정이다, 정말.^^

 

 

'11. 11. 14

2011/11/14 23:42 2011/11/1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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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하는 새'라는 핸디캡을 가진 주인공. 그는 매순간 날기를 꿈꾸며 파일럿 복장을 즐겨 입는다. 과학자의 면모를 풍기며 엄청난 발명품을 만들지만 다혈질과 경쟁심 등 감정 기복이 심한 캐릭터. 노래를 못하는 새, 멸종된 외톨이 공룡, 이상향을 가지 못하고 주저 앉은 이들. 그들을 돌보는 공동체. 예쁘지만 요리를 못하는 여성, 요리는 잘하지만 외모가 출중하지 못한 여성. 다분히 마이너한 코드들이 숨어 있는 대서사극.

 

 

'11. 11. 8

2011/11/08 23:41 2011/11/0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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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푸른숲

 

 

"정치를 이해하려면 결국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단일 학문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 그 모두를 동시에 같은 크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섭해야 한다."
(김어준, '닥치고 정치')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김어준 저, 푸른숲 펴냄, 이하 닥정)를 읽었다. 최근 많은 이들이 '나는 꼼수다'와 '닥정'으로 난리다. 두 개 모두 해당 분야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요즘, 그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도 슬슬 많아지는 추세. '닥정'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책이었으나 여러 가지 이야기 해봐야 다른 서평들과 중복될 것 같아 나는 두 가지만 언급하려고 한다.

'레이어(layer)'라는 개념이 있다. 건축이나 CAD 분야, 지도 등등 여러 분야에 쓰이는 이 개념은 간단하게는 하나의 대상이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예를 들면 하나의 지도나 도면에는 건물을 표시한 레이어, 배선배관, 등고선, 도로 등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 대한 특정한 정보를 각각의 레이어로 표시하고 그 레이어들을 중첩하여 보관하는 일이 많다.

정치적 사안에도 다양한 레이어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이성적 논의가 됐든, 사건에 있어서의 팩트가 됐든, 이권 다툼이 됐든 간에 하나의 정치적 사안에는 다양한 측면의 레이어가 중첩되어 있으며 그 레이어들은 하나의 사안을 통찰할 수 있는 큰 그림을 제시하지만, 그 큰 그림을 일반 대중이 접근하기 쉽지 않고 설령 그 전체의 레이어를 봤다 하더라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레이어 가운데에는 '노이즈'라고 할 만한 사이비 레이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그 문제의 핵심 레이어를 찾기까지 대중이 이해해야 하는 선지식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점. 그 사안에 대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레이어를 걷어 내고 핵심 레이어를 찾아서 이해하는 과정을, 진보진영은 대중의 기호에 맞게 성실하게 나서서 해결해주지 못했다. 기존의 정보 전달 프레임을 유지하되 더더욱 어려운 방식으로 정보의 해독을 대중에게 요구한 것이다.

하루에 책 읽는 시간 30분을 내기도 빠듯한 나 같은 직장인에게 이런 문제는 본질이 된다. 물론 정치 기사나 책 읽을 시간은 없어도 커피 마시며 수다도 떨고 지름신이 강림하면 인터넷에서 두 시간 동안 물건을 고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독에 중독된 탓에 영화도 보고 미드도 보고 축구, 야구 경기에 몰두하고 애들과 놀이동산 갈 시간도 있지만 정치에, 그 개별 사안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엄청난 기사 수집과 분석, 독서에 할애할 시간은 별로 없다. '그래, 나 그런 거에 몰두하기 피곤한 인생이고 정치에 무관심한 한심한 인생이다. 그냥 쉴 때는 좀 내버려 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를 시도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닥정'이란 불순한 책을 출간했다. 이 새로운 플랫폼의 창시자 김어준은 정보 전달 측면에서 기존의 고고한 스타일을 버렸고 이를 통해 그 핵심 레이어의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던 정치 현안들, 그 부정부패의 내용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물론 '닥정'도 그렇고 '나꼼수'도 그렇고 모두 다 추정이다, 추정. 소설 같은 이야기다).

물리적으로 한 개인이 정치적 사안의 핵심 레이어를 찾아서 그것을 해독하는 데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건당 24시간 이상이리라는 게 내 판단이다. 미드 회당 1시간짜리를 24편을 보는 데 내가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족히 한 달이 걸린다. 그것도 미드가 매우 재밌어야 그렇게 시간을 내줄 수 있다. 상황이 이러니 직장인들이 정치 사안 하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한 달을 써야 한다면 누가 하겠나.

여기서 파생되는 유익이 바로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이 되겠다. 바로 '재미'다. 이 책의 부제는 '명랑 시민 정치 교본'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비장함을 갖는 대신 '가능한 변화들'을 실행하기 위해 재미있는 플랫폼을 선택했다. 그것도 가장 유행하는 팟캐스트를 이용하는 세련됨을 보이면서 말이다(정작 자신은 스마트폰도 안 하고 SNS도 귀찮아하면서. 실로 대단한 통찰이다).

나꼼수 최장 녹음 시간은 3시간이 넘는다. 그런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이 책도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막힘이 없고, 인터뷰 형식의 글임에도 내용이 충실하다. 재미있고 풍성한 콘텐츠. 그것으로 승부하겠다는 김어준의 전략이 먹힌 거다.

이 책은 그간 진보 진영의 그 누구도 제대로 못해 온, 재미있고 풍성한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이미 상당한 점수를 따고 있다. 또한 서평의 처음에서 인용하였듯 정치적 사안의 다층적인 구조(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를 통섭하려는 태도 또한 유의미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가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정치적인 견해에서 그의 입장과 다소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김어준 자신이 밝혔듯 본인이 '노빠'라는 점과 문재인을 대선 후보로 민다는 점, 한나라당과 여러 후보군에 대한 평가에 동의가 안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을 그보다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지 않는 한 대중들이 그런 입장을 제대로 따져 보게 될지 의문스럽다. 물론 모두가 나꼼수나 닥정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해야만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김어준을 까려면 기존의 난해하고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듯한 어떤 정형화된 진보 진영의 스타일로는 쉽지 않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해보자, 쫄지 말자,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기쁘게 한 표를 던지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입장에 있어 김어준과 다른 맥락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닥치'련다. 대신 그의 새로운 플랫폼 안에서 재밌게 즐기고 놀련다. 그 풍성한 향연에 한동안 그냥 취해 있으련다. 연말쯤 취기에서 깨어나도 충분하다. 씨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 <뉴스앤조이>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2011/11/01 01:44 2011/11/01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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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IVP 제자도 논쟁

10월 4일 온라인 뉴스앤조이 1면에 <한국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라는 제목의 다소 도발적인 기사가 올라왔다. 이 글은 <장기려, 그 사람>의 저자로 잘 알려진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이 쓴 것으로 조회수가 6000회를 넘었고 기사가 올라온 후 불과 며칠 새 페이스북을 통해 관련된 논의를 확장시켰다. 특히 이례적으로 IVP의 신현기 대표가 페이스북을 통해 IVP의 공식 입장을 밝혔고 다음날인 10월8일, 다시 지강유철이 재반론 형식의 글을 올렸다. 이 논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본인도 페이스북에서 관련된 의견을 글로 쓴 바 있으며 그에 대해 각각 신현기 대표와 지강유철이 다시 반론을 쓰면서 논의가 상당히 풍성해졌고 이 논쟁을 통해 더 고민할 거리들이 생긴 듯 하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기에 본지 편집위원의 입장에서 이 부분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고 논쟁 참여자로서 다분히 어떤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토론 관련 내용을 소개하게 되었다.

 

논점을 정리하기에 앞서, 나는 이 논쟁에 참여한 지강유철, 신현기 대표 모두 서로에 대한 격을 갖춘 글들을 보여줌으로써 교계의 논쟁에 있어 어떤 글쓰기 스타일의 방향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믿는다. 신현기 대표는 반론의 시작에서 “지강유철 선생님의 IVP에 대한 비판(토착과 참여를 강조하는)을 달게 듣습니다. 저희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극복하고 싶은 부분입니다...(중략) 지강유철 선생님뿐 아니라 소셜 토론을 통해 나타난 여러 독자 분들의 애정 어린 혹은 따끔한 질책을 겸허히 듣습니다”라는 말로 자신과 출판사를 낮추었고 그에 대한 지강유철의 반론도 “어려운 가운데 거의 전례가 없는 입장이란 형식의 글을 발표해 주신 신 대표님의 결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라는 말로 격식을 갖추어 화답함으로써 그간 사이버 공간에서 본 논쟁 중 가장 ‘명품 논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글쓰기 스타일에 있어서 보는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제 논쟁의 알맹이를 들여다보자. 지강유철은 뉴스앤조이 기고글에서, 존 스토트가 자신의 유작이라고 생각하며 출판한 <The Radical Disciple>의 국내번역본 제목을 <제자도>라고 붙인 것을 문제 삼으면서 한국IVP가 굳이 '급진적(radical)'이란 단어를 과감하게 뺀 것이, 좌파용어인 radical이란 단어를 넣을 때 잃게 될 독자들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그것이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상관없이' 저자가 보다 명확한 설명을 위해 덧붙인 수식어를 임의로 떼어버린 게 문제 아니냐는 거다. 그리고는 시선을 한국IVP 내부로 돌려서 번역 위주의 출판 사대주의에 함몰된 한국IVP를 비판하였다. IVP가 '번역이 아닌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저술과 출판 육성'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랭햄 문서 사역에 인세를 기부한 존 스토트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채 여전히 번역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번역서들은 데이트, 사랑, 결혼 등등 한국적 상황에 맞지도 않는 문제들까지도 번역서를 의존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으며, 과거 IVF(IVP는 IVF의 출판부에 속함)의 아픈 기억인 '6개대 사태'도 이런 번역 위주의 출판과 무관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존 스토트의 유작에서 '급진적'이란 단어를 뺀 것이 좌파적 사회참여의 고배를 마신 그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해석인 셈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이 기사에 대해 IVP의 신현기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례적으로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는 “IVP에 대한 비판(토착과 참여를 강조하는)”을 달게 받으며 ‘소위 우리편 안에서의 자아비판에 대해서도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함을 재차 강조했다. 특히 그는 제목세탁에 대한 해명을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한다면, ‘급진적/철저한/근본적 제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제자도’를 선택했습니다. 무조건 많이만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제자도’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독자일수록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들도 머리말 네 쪽만 읽으면 radical에 대한 저자의 뜻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존 스토트가 말하는 radical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을 이 책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닐 것입니다. ‘급진적 제자도’도 좋지만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날것 그대로” 제.자.도. 석 자를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지강유철은 재반론 글에서 그것은 편집자의 오만한 행동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존스토트의 책의 내용이 급진적이냐 아니냐는 한 마디로 해석의 문제이고 평가의 문제입니다. 저 역시 존 스토트가 급진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목의 문제는 팩트의 문제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 내용에 검증 받았고, 이미 수십 권의 저서를 낸 저자가 유고작이 됨을 직감하면서 그 제목을 정하는 이유와 급진적이란 단어가 오해되지 않도록 의미까지 한정을 하며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걸 어떤 이유로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이겠지요. 자신들이 존 스토트보다 낫다는. 이렇게 바꿀 수 있는 편집자들이 존 스토트보다 연배가 낮고, 글의 내용이나 지명도와 영향력에서 떨어지는 저자와 번역자의 글에 대해 행사할 권력을 생각하면 저는 현기증이 날 지경입니다. 저는 그런 오만을 느꼈습니다.” (부분 인용)

 

또한 신현기 대표가 "지강유철 선생님은 IVP가 좌파 혐오증, 보수지향성, 상술, 심지어 윗선이나 데스크의 입김 때문에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것이 “글 가운데 살짝 ‘가정’을 끼워 넣기는 했지만, 그런 글쓰기는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부정확한 것을 사실로 믿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관계 확인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제가 기자가 아니라 보통의 독자인데, 그런 독자마저도 출판사에 일일이 물어보고 나서야 글을 써야 한다면 거기엔 선뜻 고개를 조아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IVP는 정부기관이나 기업이나 기무사 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려있는 곳이지만 독자가 불만을 토로하려 할 때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서야 글을 쓰라는 것이라면 독자로서는 너무 권위적으로 느껴지거나 글을 쓰지 말라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 말의 요지는 사실관계 파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기자와 독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보다는 독자들에겐 좀 실수가 있더라도 포용해주고 겸손하게 잘못에 대해 ‘그건 이렇습니다’라고 해명해 주시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또한 이 논의에 있어 ‘IVFer로서 <한국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를 대하는 입장’라는 글로 지강유철의 논지에 비판적 지지를 보냈다. 특별히 IVF 내부인으로서 나는 자성의 계기가 되리라는 판단에서 지지를 보냈고 그가 언급한 ‘6개대 사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대목이기는 하나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무엇보다 제목세탁이 '6개대 사태'를 제대로 해결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논지에 대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분들조차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변죽을 울린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는 IVF의 여러 약점, 혹은 상처 가운데 가장 아픈 부분을 툭 찔렀다는 점에서 동일한 통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이것을 불편함, 불쾌함, 억울함으로 보려는 입장과는 다릅니다. '6개대 사태' 이후로 다수의 지부에서 정치색을 띤 사회참여운동에 대해 급격히 냉각되었고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에 대한 입장이 체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IVF 캠퍼스 운동은 '체화'라기 보다는 '배제'가 더 정확한 진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의 시시비비, 사건과 팩트의 명확한 해명에 앞서, 회개와 각성, 그리고 새로운 전략을 짜려는 분위기가 내부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현기 대표는 대체로 ‘제목세탁’에 대한 가정 외에는 다수의 논지에 대한 겸허한 수용 입장을 밝혔고, IVP가 개별 출판물에 대해 일일이 해명을 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실천에 보다 적극적인 출판사가 되어야 함을 재차 강조했다.

 

“농부는 쌀로 말하고, 요리사는 음식으로 말하고, 출판사는 책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낳아놓은 자식이 칠팔백 종이 되니 독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비판과 오해를 견디기 싫어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번에도 지강유철 선생님이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 것이니 경청하고 반성하며 결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중략) 지난 번 글에서는 독자들의 비판 핵심을 ‘토착’과 ‘참여’로 요약하면서 적극적 수용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희 자신이 이미 동의 그 이상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굳이 긴 설명을 달지 않았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실천이 남았을 뿐입니다.”

 

물론 논쟁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특히 지강유철은 글의 중간중간에 ‘실천에 둔감한 지식인’, ‘급진적 제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국내 추천자들’, ‘시건방진 편집자’ 등등을 거론함으로써 논리전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교계의 '특정 부류'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IVP를 홍성사와 비교하면서 두 출판사를 모두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글의 말미에 <제자도>의 편집에 관련된 이들의 이름을 노출하면서 그의 배려의 손길이 더더욱 그들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만든 느낌이 강하다.

 

나아가 나는 이 논쟁의 격식 있는 글쓰기 스타일에는 고무되었지만 정작 핵심적인 논의, 이를 테면 출판에 있어 번역 위주의 사대주의와 한국적 상황에서의 저자발굴, 신학하기, 한국복음주의적 사회참여의 방향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정법'으로 오해했냐 아니냐의 다소 주변적 이슈로 논쟁이 변질된 부분이 아쉬운 대목이다. IVP 입장에서는 기왕 해명할 것이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최근에 IVP가 발굴한 국내 저자들, 이를테면 박영돈, 김영봉, 강영안, 김형국, 우종학 등의 약진과 앞으로 점점 늘려나갈 한국적 상황화, 토착화의 큰 그림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해명하였다면 더 애정 어린 눈으로 IVP를 바라보게 되지 않았을까.

 


마치면서

논쟁을 정리하면서, IVP와 IVF의 문제를 건드려준 지강유철의 글은 시의적으로 적절하였다고 생각되며 신현기 대표의 입장 표명은 개별 기독출판사의 입장을 넘어 교회적으로도 유의미한 행동이었다고 믿는다.

 

복상 10월호에 실린 <한국교회, 자기 신학이 있는가>의 글에서 이만열 교수는 ‘한국교회의 현 위기의 근본 원인을 한국교회가 신학화에 대한 고민과 진통을 제대로 겪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수많은 교회와 신학교, 무수한 신자들이 있음에도 한국교회가 세계에 내 놓을 수 있는 자기 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수입신학 가지고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영성적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논의가 특정 개별 출판사나 선교단체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기독 출판과 복음주의 운동 전반의 고민으로 확장되길 기대해본다. 고유의 생각이나 신학, 사회참여의 실천이 없는 곳이 비단 IVP 뿐이겠는가. (끝)

2011/11/01 00:36 2011/11/0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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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은 공적 글쓰기와 사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공간.
사적공간을 침해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예전에 싸이월드도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왠지 불편했다.
어쨌든 페이스북은 대세가 됐고, 본격적으로 이 플랫폼에
정착한 후에 나는 사적/공적 글쓰기 공간 사이의 담이 허물어질때
... 생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모습들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찰이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언젠가 좀더 풀어내고 싶은 화두...


*페이스북 '11. 10/16
2011/10/16 21:33 2011/10/1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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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엔 '사람이 희망이다' 내지는 '사람이 어쩌고', '리얼 휴머니즘' 등등 연륜있는 이들이 내뱉는 '사람,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류의 말을 할 때면 대체로 흘려 들었다.

당연한 얘기 같기도 하고 나이들어 약해지니 지인을 찾는 거 아닌가 하는 얄팍한 냉소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때때로 진심으로 인생의 선배들이 어떤 맥락에서 '사람'을 부각시켰는지를 잠시 멈춰서서 돌아보게 된다.
 
내가 흘려들은,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그들이 살면서 경험한 많은 환경과 그 안에서 무수히 따져본 우선순위들, 말들, 행동들, 삶들 속에서 부여잡은 뜨거운 그리고 유일한 실체임을. 요즘은 참 많이 공감하게 된다.


*페이스북 '11. 10/15.

2011/10/16 21:32 2011/10/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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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MIS과목 교수님이 본인이 제안한 '제트기 이론'이란 걸 설명한 적이 있다. 일정 속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긴 활주로가 필요한데, 항공모함등에서 출발하는 제트기는 바퀴를 강제적으로 고정시켜놓고 속도를 신속하게 비행할 수준까지 올린 상태에서 풀어주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나 시간을 save하고 바로 이륙시켜주는 점에 착안한 이론이다. 시장점유율이나 소비자 기대치 등등을 설명하면서 고안한 생각이었던 것으로 막연히 기억하는데, 공학적 방법론을 사회경제에 적용한 나름 신선한 접근이었다.


*페이스북 10/15
2011/10/16 21:31 2011/10/1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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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뛰어난 사진가적 자질 중 하나는 '과감한 프레임' 처리에 있다. 아마추어일수록 직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피사체를 모두 담고 싶어한다. 인물의 전신상, 반신상, 얼굴 전체. 실수로 짤라먹는 게 아니라면 일반인들의 사진 작업은 대충 본인이 대상으로 삼는 피사체의 완전한 복원, 혹은 담아내기를 꿈꾼다. 틀 안에 정보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책임감. 그래서 프레임이란 게 무서운 것 같다. 뒷통수를 자르고 얼굴의 일부만을 프레임에 가득 채운 사진. 혹은 손모양, 이마의 주름,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부모의 상반신을 잘라낸 사진. 이런 과감한 프레임처리는 사진에 새로운 생명을 준다. 고정된 프레임의 탈피, 혹은 해체가 필요한 게 비단 사진에 국한되지는 않으리라. 사고나 판단, 우리의 삶도 그렇다.
2011/10/13 21:31 2011/10/1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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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를 보며. 간간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옹호하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까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음악의 급이 다르다느니 저런 실력으로 이겼냐느니, 청중 수준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이다. 나도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농담이다. 실제로 청중들이 다양한 음악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뛰어난' 음악과 '덜 뛰어난' 음악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종이 땡땡땡'과 말러 교향곡은 작곡가의 수고나 음악의 완성도 측면에서 분명 다르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에서 히트친 음원 샘플들을 수집하며 그것과 유사하게 찍어내고(copy) 안무나 비주얼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낸 노래와, 순전히 음악으로만 승부하려는 의도로 언더그라운드 싱어송 라이터가 공들여... 만든 노래는 그 '질'을 평가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뛰어난 음악이 반드시 좋은 음악이 된다거나 덜 뛰어난 음악이 나쁜 음악이라는 생각은 불편하다. 음악적 엘리트주의. '아리랑'이 '환상교향곡'보다 더 나쁜 음악이 될 수 없고 신중현의 '미인'이 나훈아의 '무시로'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한 음악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된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가사의 의미도 모른채 불러대는 딴따라 가수의 노래보다 좋다고 혹은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성악가가 종교음악을 부를 때의 울림이 그런 예일 것이다)

다분히 본인의 음악적 소양이 높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의 가장 큰 실수는 예술에 옳고 그름의 좋고 나쁨의 절대적 잣대를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혹은 비평가들의 냉정한 평가만이 옳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전문적 평가들이 자주 예술을 조망하고 그 수준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평의 잣대로 '이건 쓰레기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본다.

그래 참 불행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새벽녘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신경이 거슬리는 무엇이 돠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생명의 아름다움이 노래가락으로 승화하는 신비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천박하기 그지없는 트로트 한 곡조가 또다른 누군가에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유연함, 공감.. 우리에겐 자주 그런 것이 필요하다.
2011/10/13 21:30 2011/10/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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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님의 노트(2011년 10월 10일)를 읽고

 

김용주 님의 글을 읽고 공감을 넘어 행복했습니다. 논리, 따스함, 날카로움, 분명한 이슈 제기가 잘 버무려져 있어 토론 수준을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토론을 위한 토론이 아닌 실천을 구체화하는데도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해명이라기보다는 몇 가지 보충 설명만 달고자 합니다.

1. 제목에 대해서는 제가 쓴 글(2011년 10월 7일)을 통해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약간의 보충 설명만 드립니다.

(1) 제.자.도. 석 자의 충분성 및 강력함에 대해서는 이미 소상히 말씀 드렸습니다.

(2) 많이 팔겠다는 상업적 목표를 불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팔지 못하는 역량 부족을 문제 삼으면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많이만 팔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 속에 이미 상업적 의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상업적 목표만’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더 팔고 싶다’는 의욕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아니므로, 굳이 무의식적 동기로 밀어 넣고 필요할 때마다 몰래 꺼내어 읽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저희가 발간한 비즈니스 관련 서적의 내용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위선입니다.

(3) “독자층을 넓게” 보아 독자들의 성향을 고려한 것을 소위 ‘정치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이라 함은 경우에 따라 정치적 ‘힘’을 의식하여 비굴한 타협을 할 때 쓰는 말이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4) 저 역시 ‘래디컬’이란 단어를 전혀 주저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의미에서라면 더더욱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래디컬’의 의미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이미 어느 정도 토론된 바 있습니다. 책 제목으로 ‘래디컬’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부정적일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제목을 단 책을 꼭 출판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서도 “래디컬”이란 제목에 어울리는 책을 쓰실 수 있는 분이 나오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번 책에는 이미 든 여러 이유로 넣지 않았습니다. ‘넣지 않았다’는 말을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동기로 ‘삭제’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5) 실제로 존 스토트 책은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제자도”만큼은 존 스토트 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분들이 읽었고, 그 독자들 가운데는 새로운 독자들도 포함됩니다. 그 분들이 존 스토트를 통해 얻을 유익과 도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지난 번 글 1번 항목에서는 독자들의 비판 핵심을 ‘토착’과 ‘참여’로 요약하면서 적극적 수용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희 자신이 이미 동의 그 이상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굳이 긴 설명을 달지 않았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실천이 남았을 뿐입니다. 어제 밤 어느 분의 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담았습니다. “독자들의 수준은 날로 높아지고 과제는 엄청나건만 우리의 역량은 부족하고 하루하루 진도는 더디고. 머리는 아둔하고 해 놓은 공부는 별로 없는데 시험 날짜는 코앞이고, 그런 심정입니다. 갈 길이 먼 출판사입니다.”(아, 아무리 제가 쓴 글이지만 그 분 담벼락에 쓴 글인데 사전 저작권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김용주 님의 글을 통해 토론의 자유와 상상력, 그리고 토론의 규칙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아 매우 기뻤습니다. 저 역시 제 이름 석 자와 ‘님’ 사이에 들어간 직책 명을 떼어 버리고 한 사람의 ‘님’으로서 실시간 활약하며 더 날카롭고 상상력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고 싶은 충동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독자 분들께서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추후로 모든 논의에 일일이 개입하지는 않겠지만 정식으로 문의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성실히 답하겠습니다. 진도가 많이 밀린 출판사입니다.

김용주 님과 이 일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신현기 올림

 

2011/10/12 00:35 2011/10/12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