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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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이번 생일축하 인사는 가족을 제외하면 모두 온라인으로,
특별히 페이스북을 통해 받았다.
이 나이에 생일 축하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모두들 정성
으로 적어준 글을 그냥 날려버리고 싶지 않아 블로그에 옮겨둔다.
축하해주신 모든 분께 다시한번 감사를.

일단 아내의 축하 메시지는 여기에.^^

김용주...
풀네임을 오랫만에 보니 나름 괜찮은걸?여전히 섹시하군...캬캬캬. 어제 문자로도 보냈지만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지대한 역할을 해주어 아주 많이 감사하고, 이에 감읍코자 평생 충성을 맹세하겠소.
사랑합니다. 나의 첫 사랑.
러블리와입흐 배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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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
‎[뜬금] 형, 어제 생일 축하했어요.. ^^;


Jinsook Kim
오빠, 생일 축하드려요. 여긴 아직 3일이야^^ 페이스북을 열면 사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오빠와 가정의 무한\행복을 기원하며 멀리서 동생이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Eun Young Lee
생신축하해요! 해피벌스데이!(미어)
빠라벤스 빠라보세~ 무이또 무이또 무이~~또!! :)(포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여전히 사랑 받고 있는 용주!
오늘 많은 웃음만 있기를!
주님도 너를 보며 오늘 많이 웃으시니! :)
사랑하는구만~  알랍유~(미어)  에우 치 아모~(포어)
^__________^ .


양혜원
"오늘은 김용주님의 생일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페북..그 밑에 '좋아요' 누르는 기능만 있으면 참 좋겠는데 라고 생각했슴다. 각설하고, 즐거운 인생, 행복한 마음 되시길 바랍니다..^^ .


장금복
용주님~생일 축하해용~^^ 무지무지 사랑하는 아내분과 오붓한 시간 보내시겠네요. 축복합니다. 의미있는 행복한 날 되세요...^^.


Sehee Oh
우엥~~아침에 제가 올린 제이엉뉘 생일추카 메세지를 페북이 아구아구 잡솼네요 ㅠ_ㅠ 어쩐지 좋아요도 안눌러주시고 반응이 없다 했더니만...혹시나해서 확인해보기를 잘했네요ㅋㅋㅋㅋ
 암튼 본의아니게 늦게 축하드리지만 그만큼 더 마니마니 츄카드려요!!(>_<)// .


김승중
용주 작가님 생일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좋은 글, 재미도 있으면서 각성하게 하는 좋은 글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장재익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얼마남진 않았지만 행복한 일로 가득 채우세요.. ^^.


윤민규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성하와 배뱅님과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저희 부부도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 잘 보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축하가 늦었네요~ 앞으로 생일 쉽게 기억할 듯 하네요 ㅎㅎ.


조경윤
오... 역쉬 인기남이시네^^ 생일 축하. 하늘에서 폭풍 눈발 축하쇼도 해주시고 ㅋ 행복한 하루 되시길.


임혜진
생일 축하드립니다!
좋은 계절에 태어나셨네요^^.


Ji-young Jung
생일이네요? 축하 많이 받았겠지만 그 축하에 제 껏도 하나 더 얹어놓습니다.^^.


Jae Young Kim
용주언니, 생일축하드려요~ ^^.


김진호
생일 축하 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오늘 종결은 양보하시고오~ ㅎㅎ.


김은석
생신 축하해요~ 편집회의 때 케잌이라도 준비해야겠네요 ㅋ.


James Doh
생일축하드립니당 선배님!!!
멋진 하루 한해 되시길 기도합니다!!!!!.


김성수
용주님~ 생일 축하 축하!^.^.


JeongJae Wie
역시 형의 페북은 인기폭발이라 벌써 생일 축하 메세지가 행렬을 이루는 군요. 저도 이 행렬에 동참해 생일 축하드립니다.^^.


Ko KaGe
엉뉘엉뉘~ 생일 축하 드려요~~
하늘도 기쁜지 눈보라가 휘몰아치.. 쿨럭
 행복한 생월 되시기 바래요~ 히히
(원래 생일은 한달 내내 챙겨먹는거).


최재진
생일추카추카~~.


손정욱
용주님, 생신을 감축드립옵니다~ ^^.


박총
용주 언니, 태어난 날 축하해! 그대가 세상에 있어서 좋네. 적어도 배뱅님과 성하, 그리고 나는 좋다네 :D.


최호진
생축!!.


William Song
언뉘님 생신 축하드려요 ^^ ㅎㅎ.


Claire Park
생일 축하드려요 ^_^// 제이언니 언제나 반짝이는 언어유희 기대하겠슴다! .


Summer Copybean
언니! 언니!
좋은 날 되세요-
생!신! 축하드려요- ㅎㅎㅎ.


김진형
용주님 생신이시네... 오오오옹!
오늘 제 동생도 생일인데 ㅋㅋㅋ
다음부턴 안까먹고 기억할 수 있겠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


Myung-Jae Kim
오늘 생일이시군요!
생일 축하 합니다.
오늘 하루가 더 특별히 신나는 날이 되시길....


서민성
제이언니님!!! 생일 축하해요~~~ ^^


김영휘
생일축하드려요ㅎ


현성숙
오늘이 생일이시군요...저는 기업쿠폰은 없구...좋은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


Yong Jung
생일 축하드립니다. ~


권경우
행님 축하드립니다~!


황선관
제가 마지막일까요?? 생일 축하드려요~~


이하슬민
생일 축하드립니다~ㅎㅎ 용주님 페북 애독청년 드림ㅋㅋ


Sung Woo Kim
용주야 생일축하해. 아주 많이 늦었지만 말이야. 오늘 아내와 영등포에가서 너와 만났던 그 창고 커피숍을 지나가면서 너와 여기서 만났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 건강하렴. 더 멋지게 살아가는 너를 보는게 기쁨이구나.
화요일 오후 11:36 · 좋아요 취소 · 1.


KimMandy
으엇! 오늘 생일이신거에요?!?? 우왕 넘 늦었네요 ㅜㅜㅜ 생일축하드려요... 헤헤


Min Young Jeon
용주야 생일축하한다~~~


Jeongyeol Bae
생신 축하드려요 ㅋㅋㅋㅋㅋㅋ


Jae Yoon Um
축하드려용!!!


Sungmi Han
생일축하드려욤 :)


한수경
축하드려요~


Yugyoung Moon
생일 축하축하!!!


정미선
축하합니다^_^ 어색해도 즐기세요~


장은선
감축드려요. ㅎㅎ Birthday는 정말 소중하지요.


이정현
용주야, 조만감 생일밥 먹자, 빨랑 불러줘 ㅋㅋ


Pax Tecum
제이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하늘에서도 축하의 비가 내리는군요..^^
이번 주는 제이님 생일 주간으로 만드세요~
저녁 반찬 무척 기대됩니다!ㅋㅋ


심정희
오오 생일이시군요. 축하합니다! 배뱅님과 성하와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이진오
용주형제..생일 축하해요.. 늘 좋은 생각, 좋은 글 통해 많이 배우고 있어요.. 즐겁고 감사한 날 되길..^^


최병익
용주형 생일 축하해요~!^^


이근용
성님! 생신축하드리옴니다!


김은령
세상에 나신 날을 축하드립니다~좋은 날 보내세요~~^^


김동문
어, 용주의 생일, 생일 축하.. 생일 자축하는 한턱은 언제 낼껴?


Song-Hun Hong
독일 살면 좋은 게 경조사에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페북하고선 좇아다니기 바쁩니다. ㅠㅠ 생일 축하드립니다! 만수무강하시고, 가정의 평화를 쟁취하시길 바랍니다. ㅎ


송봉운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Yoonjoo Esther Shin
아흑 생일 축하드려요! 제가 너무 눈치없이 이런 날 언니랑 데이트를 @@;;; 죄송죄송합니당 흑 일단 명희언니랑 결혼하신 거 부럽고요 ㅋㅋㅋㅋ 두 분 너무 보기 좋아요 ^-^ 앞으로도 행복하게, 올 한 해는 더더 멋지게, 즐겁게 보내세요!! ^-^ happy birthday to you!


정수진
해피 뻘~스데이 투 유~~~요!!!


Onhwa Ahn
저두저두 마니마니 추카 드려용 ^ㅡ^*
하삐~벌~쓰 데이 투~유 !!


이평직
생일 축하드려요~


Jongsuk Park
나두... 꼽사리 껴서...


이양석
형님, 생신축하드리옵니다..캬캬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캬캬캬
보고싶사와요...


민대백
성하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겠죠?


김진영
우아앙 바람직한 남편상 1호에 등극하신
제이언니님(이라고 쓰니 바람직한 아내로 등극하셔얄듯하지만)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


오수경
제가 1등으로 생일 축하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 (선물 없나영?) 생일 축하드립니다 :) 날마다 생일처럼 기쁜날 되소서.


Dong-Kyu Kim
ㅋㅋ 생일 축하드립니다. ^^; 혹시 1빠?? ㅋ




*12년 4월3일. 페이스북 담벼락&댓글 모음

2012/04/03 23:00 2012/04/0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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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한 여자 (막 14:3-9)

[개역개정]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메시지성경]
3-5 예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손님으로 베다니에 계셨다. 예수께서 저녁을 들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아주 값비싼 향유 한 병을 가지고 다가왔다. 여자는 병을 따서 향유를 그분의 머리에 부었다. 몇몇 손님들이 발끈해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저렇게한심한 일을 하다니! 완전히 낭비다! 이 향유를 일 년치 임금보다 더 많이 받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화가 치밀어서 당장이라도 여자에게 분통을 터뜨릴 태세였다. 6-9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너희는 어째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자는 지금 나한테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일을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동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언제라도 마음 내키면 그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지 않다. 이 여자는 기회 있을 때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내 몸에 미리 기름을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에 메시지가 전파되는 곳마다, 지금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 칭송받을 것이다.”



공동체의 균열, 붕괴.
제 자들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만 그 후에 예수의 행보를 통해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메시야의 도래, 왕의 귀환을 꿈꾸며 들어간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거나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 어떤 혁명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

입 성 직전 누가 2인자인가, 누가 예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던 제자들, 그 혁명적 공동체는 자신들의 이해에 따른 예루살렘 입성 후 그림과 다르게 예수가 행동하자 차츰 의아해해고 분위기가 처진 듯 하다. 예수에게서 열심당의 전사나 다윗의 용맹을 보지 못한 가룟 유다는 곧 예수를 팔 계획을 실제로 진행하고만다.

본문은 그 직전 한 여인의 행동을 묘사한다. 여러 차례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지만 제자들은 그 때마다 심히 두려워하고 다른 말씀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던 부정을 유독 그 말씀에 대해서만 반복한다. 그런 말 마세요, 그렇게 나약해 빠진 생각일랑 버리세요, 저희가 있잖습니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제자들의 프레임 안에서 예수의 죽음은 조직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 프레임 안에서 제자들은 흔들렸다. 결국 예수의 죽음 예언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여인에게 정죄의 말을 쏟아낼 만큼. 가끔 한국 교회의 행보를 볼 때, 가깝게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말씀과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느끼면서도 조직이 가진, 개인이 가진 프레임 안에서의 방향에 역행할 때 우리는 도리어 우리의 프레임을 강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나약한 소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실패한다거나 이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하지 맙시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끝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국에."

실 제로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단지 우리가 우리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신호들을 필터링한다. 특정한 메시지에는 껄끄러워하기도 하고 정말 둔할 정도로 무신경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그의 뜻을 거스른다. 어느덧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게 정당했다, 예수가 말년에는 무능했다 라고 자위한다.

 

'12. 4.

2012/04/02 23:17 2012/04/0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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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의 아비는 악마이다 (요 8:39-47)

[개역개정]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메시지]
39-40 그들이 분개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너희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전해 준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일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에게는 적법한 아버지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오.” 42-4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나는 내 뜻대로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온 것이다. 어째서 너희는 내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인 마귀에게서 났고, 너희가 하려는 일은 온통 그를 기쁘게 하는 것뿐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그가 진리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진리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쟁이는 말할 때마다 자기 본성에 따라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거짓말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 내가 와서 너희에게 명백하게 진리를 말해도, 너희는 나와 관계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내가 그릇된 말이나 죄악된 행동을 하나라도 했다고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는 어째서 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과 한 편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한 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한 분이고 그가 자신을 보내셨으므로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님을 논증한다. 이에 나아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통해 이천년 전의 이 내러티브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내가 유대인들의 회중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이성적으로는 진보적인 입장이면서 정서적으로는 다분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불협화음이나 고성방가, 전투적인 언행이나 급격한 변혁에 반감이 있다. 머리로는 그것이 옳다고 느낄 지언정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나는 다소 움츠려드는 편이다.

유대인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그리고 예수의 행보에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다분히 공감하고 그가 설교하고 행동하는 사역을 지지한 한 사람으로 내가 무리 중에 서 있다. 허나 오늘 논쟁에서 예수는 내가 속한 집단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예수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불쾌함이 찾아온다.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해 재고를 해본다. 갈릴리에서 예언자나 선한 이가 나오지 못한다는 전통적 사고와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을 마귀의 자손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러지 않았을 거라는 말 속에 나이 오십도 안된 자가 은근히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자신의 격을 동일하게 놓는 모습에서 의분이 솟는다.

나 는 아마 그 자리에서 예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예수는 유대인에게 마귀의 자식이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펴면서 자신을 해하려는 의도에 기름을 붓는 걸까. 예수님은 사역 후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등된 자임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나뉘는 결단의 시점을 정하는 것이다.

중 간은 없다. 구속사에서 면면이 흐르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고도 하나님 곁에 붙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향해 중간지대가 없음을 명확히 하신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한 하나님 안에 속해있지 않다면,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반대한다면 그는 어정쩡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백성이다. 마귀의 백성은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항하고 그의 뜻을 꺾고자 하며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

유대인들은 실제로도 그리했다. 지금의 한국교회, 우리의 공동체, 우리 각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대목이다.

 

'12. 3. 30.

2012/03/30 23:17 2012/03/3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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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유대인과 예수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백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에게 자신이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아니하면 유대인들이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 못하리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이 로 인해 유대인은 일부는 그를 믿게되기도 하지만 다수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집행하기를 종용하는 세력으로 변질된다. 사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선민이었고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 상의 중추 세력이었다.

본문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느정도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래서 사이비 유대인 행세를 하는 내 모습을 정확하게 질책하는 느낌이다. 먼저 믿은 자로, 믿은 것을 가르치는 자로, 교회에서는 조장으로 선교단체 생활을 하고 교계에서 일정 부분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하는 나에게 본문은 진정 경각심을 준다.

오늘도 예수만이 참 자유를 허락한다는,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버지를 보는 것, 그 아들 예수님과 사귐을 통한 관계적 정체성으로 그 집에 거할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돌아보게 된다. 형식적인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하게 행하는 것에 집중하던 내게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유대인의 모습이 보일까 두렵다.

 

'12. 3. 29.

2012/03/29 23:15 2012/03/2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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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그는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하나님의 의'가 '언약적 신실함'보다 더 깊은 의미이며 '법정적' 함의보다 더 깊은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주장한다. (83)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는 내가 알기로는 옛관점, 새관점, 가톨릭, 개혁주의, 복음주의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폭넓게 지지받는 관점은 체다카/디카이오쉬네가 일반적으로는 '규범에의 순응'을 의미하며, 이 의미가 하나님의 '의'라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 세운 규범,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본문들(이사야와 시편)이 압제받는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변호하시는 것에 대해 그의 '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과 맺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약속에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84)

파이퍼의 해석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가(imputation) 교리 체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의 특이한 정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전혀 분명하지 않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이 의를 믿는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86)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내내 창세기 15장을 반복해서 인용하며, 이 사실은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하여,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이것이 내가 바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줄임말로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 위대한 내러티브가 바울 자신에 따르면 창세기 15장, 신명기 27-30장, 다니엘 9장 같은 '언약적인' 본문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87)

로마서 3장 1절~8절의 주제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람의 실패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불충성'은 그들의 믿음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를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위임에 충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파이퍼에 반대하여 로마서 3장 5절의 "디카이오쉬네 떼우'를 '언약적 신실함'으로 번역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88-89)

파이퍼는 그의 전체적인 논의 안에서 법정적인 비유의 중요성을 격하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극히 설득력이 없는 시도이다...첫 번째에서 다말, 두 번째 예에서의 다윗이 소유하게 되는 '의'의 상태는 히브리 소송에서 법정이 그들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을 때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나 유리한 판결을 받은 원고가 소유하게 되는 상태로서, 절대 그 재판을 판결한 판사의  '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89-90)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본다. 이는 이를테면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 결국 자신에게로 귀착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당연히 그러한 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창조로부터 언약을 거쳐 새 예루살렘까지 흘러가는 위대한 성경 이야기는, 자신이 아닌 그 외의 모든 것의 번영과 안녕에 대한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인자한, 창조적인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면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물론 하나님 자신의 영과엥 대한 관심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외부를 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개념이 신적 나르시시즘의 형테로부터 구출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제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 그리고 자격이 없는 피조 세계를 향해 풍성하고 인자한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붓고 계시기 때문이다. (92-93)

2012/03/29 22:37 2012/03/2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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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본문은 예수의 설교를 들으며 유대인들이 점점 그에 대한 분노를 쌓아가고 결국은 돌로 쳐 죽이려는 시점으로 치닫는 중반의 말씀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 유대인을 대할 때 구약적 배경 가운데에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천명한다.(25절, 28절) 예수를 잡으러 갔던 성전 경비병들도 결국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7:24)다고 말하며 무리 가운데에는 예언자나 혹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대인은 자신의 보수적인 신앙관에 빗대어 예수의 복음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음에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음모한다. 나는 건강한 보수, 혹은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 하지만 항상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시도, 무엇보다 옳아보이지만 기존의 입장과는 다른 견해나 주장, 혹은 변화에 대한 저항심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과 지식의 양이 늘면서 교만해져서 그런지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커져가는 듯 하다. 예수의 공격적 가르침, 그 진리 앞에서 나의 오감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음부터 그 가르침을 곱씹어보는 훈련이 내 일상 곳곳에서 터져나와야 하지 않을까. 30대 후반의 내 자화상을 돌아본다.

 

'12. 3. 28.

2012/03/28 23:13 2012/03/2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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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까지 마쳐야 하는 온라인 수업이 있어서 아침일찍 잠을 깼으나 성하가 하필 그시간에 깨서 뒤척이며 우는 바람에 수업을 못 들었다. 때때로 자녀 때문에 해야할 일을 못하거나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더 하지 않겠나. 임신 때부터 직장에서는 일도 제대로 못하고 업무 능력이 떨어졌다고 눈치주기 일쑤고 출산 후 최소 2-3년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쏟아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아이를 낳으면 사회가 전혀 책임져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자녀를 키우는 일이 쉽지가 않다.

요즘 한창 뜨는 단어는 '지속 가능한'이란 말이다. 한 사회가, 한 세대가 지속가능한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 자신의 후임자에게 그것을 잘 알려주고 또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간혹 교계의 사역자들 가운데에도 자신은 스타급으로 분류되면서 자신의 공동체에서 어떤 2인자, 3인자, 혹은 청출어람이 되는 리더를 키워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종종 본다. 공동체에서 더 어린 자, 더 연약한 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키워내려는 노력없이 오랜 시간을 방치하면 그 곳은 어느새 '지속불가능한', '역사와 단절된' 형체로 전전하다 끝내 소멸하게 될 소지가 크다.

육아 초기 나는 아이의 소중함과 구별되게 아이를 돌보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게 속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한걸음 뒤에 서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사는 세상보다는 나은 세상에서 나보다 나은 아들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고 있음을 자주 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고 우리 직장도 그렇고 우리 사회또한 그러하다. 임신, 출산, 육아에 관련된 모든 에너지의 손실을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공급, 전투력 투입?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빠이자 직장인, 사회의 한 구성원인 나부터 반성이 요구되는 바다.



#2.
영화 [Womb]을 봤다. 어릴 적 사랑하던 남자를 찾아 할아버지집으로 돌아와서 그를 다시 만나지만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차사고로 그는 죽는다. 그녀는 그를 복제하여 임신하고 그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가 그가 장성하자 그와 사랑을 나누고(성관계를 가지고) 난 후 영화는 끝맺는다. 이렇게 나열한 팩트들은 이 영화를, 그 내러티브들을 다 담지 못한다. 어떤 이의 삶을, 그 파편적인 팩트들 그것도 비난받아 마땅한 사건들을 추려서 나열하고 그 관계성들을 언급하지 않는 판단들을 자주 본다. 그럴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거나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는 성경의 구절들을 아전인수식으로 끌어다가 모든 비판 자체를 부정적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들도 문제지만 팩트를 제시했다는 이유로 어떤 사건을 혹은 한 인간의 인생 전체를 허무는 듯한 말들은, 때로는 입가에 맴돌아도 삼켜야 한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자극했다.



#3.
주말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분의 집들이에 가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헌데 그 모임에서도 여전히 옥의티가 있었으니. 남자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여자들은 부엌쪽에 모여서 음식 만드는 일을 도왔다. 간간이 한두 분이 돕기는 했지만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여자들에 의해 치뤄졌다.

나도 안다. 남자들이 익숙하지도 않은 남의 집 부엌에서 남의 아내를 도와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싫다기 보다는 무안하고 어색할 수 있다는 걸... 트리플A 성격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차라리 아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집 부엌에서 내가 음식을 만들고 접대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아도 남의 집 부엌에서 다른 여자들과 일하는 게.. 참 쉽지 않다.

그런데 대체로 성격이 내성적인 여자들은 남의 집에 초대를 받으면 겉옷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서 음식 장만을 돕는다. 일상적으로 하도 훈련이 되서 성격적 결함을 극복한 것이다! 시댁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여자들은 부엌으로 달려가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한 남의 부엌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셈이다.

나는 꿈꾼다. 여러 가정이 모여서 남자들이 아이들과 놀이터를 나가고 음식을 만들고 아내들이 겉옷을 벗자마자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강정을 얘기하고 한미FTA를 얘기하고 육아와 자녀교육을 이야기하는 모임을. 현실적으로는 소원한 일이고 여전히 어색한 일이겠지만 그런 자리가 내게는 2% 더 즐거울 것 같다.


2012. 3. 20. 페이스북 단문.

2012/03/20 21:41 2012/03/2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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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 등록금은 내가 아르바이트도 했고 부모님도 많이 도와주셔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드렸더니 대놓고 화를 내진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자신은 여력이 없으니 대학원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쌀쌀맞게 말씀하셨다. 퇴직한 아버지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무리도 아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남들은 취업 준비하는데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게 두고두고 맘이 편하지만은 않다. 잘못된 결정이었나 자꾸 돌아보게 된다. 공부에 자신도 없고 2년 뒤에는 다시 취업해서 빚을 잘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자꾸 위축된다. 선교단체를 열심히 섬기던 학생 시절에는 실연을 당하거나 중간고사를 망쳐도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자신감 같은 게 있었는데 몇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빌리고 나니 대출금 갚을 생각만 하면 망망대해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은 식당에서 밥 사 먹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벌이는 없는데 자꾸만 찢어진 주머니로 돈이 새어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가끔씩 지도 교수님이 던지는 농담도 논문이나 졸업과 관련된 얘기면 나답지 않게 경직되곤 한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되뇌지만 오늘밤도 이런저런 잡 걱정으로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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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는 이십대 후반 직장인이다.

오늘도 주식이 떨어졌다. 젠장. 오를 때는 찔끔찔끔 오르면서 떨어질 때는 짤 없다. 냉정한 시장경제! 그래도 주식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작년에는 성적이 꽤 좋았다. 중간중간 소액 투자한 돈을 잃기도 했지만 합계를 따지고 보면 아마 몇 백만 원 정도는 번 것 같다. 그래도 옆자리의 김 과장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성적이다. 작년에 김 과장님은 3천만 원 넘는 수익을 냈다는데, 아마도 주변에서 무슨 정보를 들은 게 분명하다. 올해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분산투자를 위해 펀드도 몇 개 가입했고 부동산도 슬슬 공부하려고 한다. 요즘 은행에 저축해서는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도 못해 마이너스 되기 십상이니만큼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재테크 공부를 제대로 좀 해야겠다. 직장을 다니고 보니 대학 때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어서 빨리 수익률 대박 나는 아이템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면 가난한 우리 교회에도 크게 후원 헌금 내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살 수 있을 텐데. 사실 이제는 투자에 좀 자신이 생겨서 얼마 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올해는 은행 이자보다 큰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 주변에서 ‘인생 뭐 있어, 한방이야’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겉으로 티 나게 동조는 안 하지만 공감이 될 때가 많다. 작년에 주식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선물도 해 드리고 태블릿 PC도 샀다. 올해는 시작부터 주가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기회가 또 올 거란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 승자 아니겠나.


# 3
나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다.
여윳돈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대출받은 돈이 꽤 된다. 결혼할 때 부모님이 보태 주신 돈과 대출금을 합해서 서울에서 전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재미에 빠져서 산 지 어언 2년. 집주인이 전세 시세가 올랐다며 4천만 원을 더 달라고 했고 돈을 추가로 빌리기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경기도로 이사했다. 아내와 맞벌이로 대출금을 조금씩 갚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고 그 때부터 다시 금전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 직원 수가 많지 않은 직장에서 눈치를 받던 아내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출산을 한 첫해에는 아내 수입도 없어졌고 병원비며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대출금을 거의 갚지 못했다. 작년 연말에 ‘전세 대란’이 찾아오면서 지금 사는 전셋집 주인아주머니가 몇 천만 원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됐고 익숙하게 다니던 병원이나 가게들이 주변에 있는데다가 전세 시세가 다른 지역도 비슷하게 오른 터라 어쩔 수 없이 추가 대출을 받았다. 그래도 대기업 다닌다고 신용대출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6.8퍼센트. 변동 금리라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매달 이자만 3,40만 원을 낸다. 친한 회사 동기는 그 정도 금액을 연금보험에 내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 친구에게 뒤처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는 집도 부모님이 사 주셨다. 첨엔 결혼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게 한심해 보였는데. 가끔 재미삼아 몇 년이 지난 후 동기와 내 재산의 차이를 셈해 보곤 하는데 그 때마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 4
나는 40대 초반의 가정주부다.
결혼 초기에는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아이 둘을 낳고는 복직을 포기했다. 하지만 ‘둘째가 좀 더 크면 다시 내 꿈을 펼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 나가는 게 장난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돼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사실 나도 이렇게 아이들 사교육비를 많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반 친구들이 다 학원을 다니는데 내 아이만 바보같이 키울 수는 없잖나. 더군다나 학원을 안 보내면 주변에 함께 놀 친구들이 없다. 큰애는 작년부터 방학 때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내고 있다. 다행히 주변에 그런 정보에 훤한 학부모가 있어서 그 분 인솔하에 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다녀오는데 정말 ‘빡세게’ 공부시키는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된다. 문제는 점점 여윳돈이 없어지고 빚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이 교육비가 얼마나 드는지,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씀씀이 커졌다고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최근 들어 부쩍 부부싸움이 늘었다. ‘돈이 정말 없기는 없나 보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얼마 전 남편이 정색을 하며 빚을 줄이고 전세 살자고 말했을 때다. 확답은 안 했지만 생각해 보면 장기적으로 아이 교육비도 계속 들어갈 거고 집안 가구들도 너무 낡아서 이제는 바꿔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전셋집 매물들을 돌아다녀 보니 두 아이 각각 방을 내주려면 집 평수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애들 학원을 옮기면 성적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이 동네를 벗어나기도 힘들겠고. 나도 빚에 익숙해진 건지, 처음 대출을 받았을 때는 액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 신경도 쓰였는데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봐도 빚 없이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나름 안심이 된다. 아이들 사교육비도 첨엔 미쳤다 싶을 정도로 비싸 보였는데 이제는 간이 좀 커진 건지 오히려 너무 저렴하면 의심이 가기까지 한다.


빚이 곧 신용인 사회

위의 사례들은 주변에서 흔히 들을 법한 이야기다. 내 가족의 일일 수도 있고 이웃의 일일 수도, 혹은 자신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도 급속히 신용카드 사용이 늘었다. 언제부턴가 신용카드는 광고 속 카피처럼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되었고 채무, 빚이라는 단어는 ‘신용(credit)’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신용이 좋은 사람이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은행 이자율은 떨어져서 3퍼센트 대를 넘지 않는 요즘, 돈을 적당히 빌려서 자신의 자산을 불려 나가는 이른바 ‘재테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정받는 분위기다. 대출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가 자기 자산 관리 차원,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테크의 기본적 요소로까지 여기는 인식의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주식 투자를 위해 3천만 원을 빌렸는데 1억 원으로 올라서 빌린 돈도 갚고 결혼 자금으로 썼다더라는 식의 아름다운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돌아다니곤 한다. 실제로 그 누군가는 그렇게 돈을 벌었음에 분명하지만 반대로 빚을 내서 시작한 주식투자로 손절매에, 파산까지 맞은 극단적 부류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사례는 잘 회자되지 않는다. 솔직히 주변에서 대출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먹고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산 관리의 한 형태로, 혹은 사교육비나 재투자를 위한 여유 자금을 어느 정도는 확보하기 위해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정 규모의 소비를 위해 빚을 지는 성향도 강하다. 자동차, 컴퓨터, 고가의 가전제품들도 지금 당장은 여력이 없지만 신용카드로 할부 구매하면 절대 구입을 못할 정도는 아니니 빚지고(물론 대다수는 지불을 살짝 미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상품을 ‘득템’한 후 일단 간지 나게 사용하는 것이다.

빚으로 사는 시대의 복음

2011년 한국은행에서 가계 대출이 900조 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제 곧 개강인데 가정마다 입시에 합격한 신입생들은 그저 기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천만 원대의 등록금을 마련할 걱정에 학부모와 자녀 모두 한숨만 쌓인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당선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립대 반값등록금 선언은 진정한 ‘복음’(good news)임에 틀림없다! 그뿐이랴. 미국, 유럽의 위기와 국내의 전세 대란이 겹쳐서 한겨울에도 동네마다 집집마다 이사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 작년부터 오른 전셋값은 서울의 경우 일 년 사이에 무려 4000~6000만 원 정도가 올랐다. 살던 곳을 고집할 경우 추가 대출이 불가피하고 그럴 경우 대략 이자로만 매년 300만 원 이상 나갈 추세다.

 

최근에 <시사IN>과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 등 진보 매체들이 가계 대출의 심각성을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 심각한 정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탓인지, 세금혁명당의 선대인 대표는 2012년에는 무엇보다 가계 빚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사회가 소비를 조장하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있어 그 ‘관성’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은 매년 새 모델을 출시하는데 가격을 24개월간 낼 통신비에 쪼개 넣음으로써 고가의 기깃값을 숨긴다. 아이들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특정 브랜드의 점퍼를 입지 않으면 창피하다고 하소연한다. 자녀 교육은 어떤가.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학군이 낮은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옆집 아이들은 벌써부터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원어민처럼 발음도 좋던데 내 아이는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면, ‘내가 너무 무심해서 이 아이를 바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노년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노년에 빚만 없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겠거니 싶다.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 봐도 딱히 정답은 없어 보인다. 성도들도 다들 대출 빚을 어느 정도씩은 가지고 있고 사교육비나 소비 규모도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함께 ‘빚진 자들’이라 위로가 되기는 한다. 교회 목사님은 나서서 교인들끼리 돈거래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보증도 서지 말고 큰돈은 누가 부탁해도 빌려 주지 말라고 설교 시간에 강조하곤 한다. 간혹 교회 안에 사기 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돈거래에 있어서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경계심이 강해졌다. 한참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다가 장난으로라도 보증 부탁을 하면 사이코 취급 받기 쉽다. 찬양할 때는 서로를 안아 주기까지 하는 ‘주 안의 형제자매들’인데 서로 돈을 빌릴 수는 없는 게 우리 공동체의 자화상인 셈이다.

 

빚에 허덕이는 성도들을 교회가 도와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교회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융통 가능한 큰돈이 있지 않을까. 실상 교회도 성도들 못지않게 빚이 많다. 개척교회에서 교인이 늘면 담임 목사님은 좁은 공간 때문에 교인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금방 큰 장소로 이사를 가거나 건축을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임대료나 대출 빚이 크게 늘어난다. 허나 매달 성도들이 성실하게 십일조 헌금을 하기 때문에 이자를 갚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는 매달 임대료로만 300만 원 이상을 냈다. 따지고 보면 성도의 헌금이 교회나 이웃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주나 대출 은행으로 가는 셈이다. 이자로 커진 금융자본은 다시 성도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은 다시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가 동반하여 가난해지고 금융자본만 커 간다. 한국 사회의 빚, 한국교회의 빚. 미사여구로 포장된 이 빚은 진정 이 세대의 가장 큰 속임이 아닐까. 그야말로 ‘빚과 속음’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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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본지 편집위원, 현대기아자동차 남양만연구소 연구원 myjay.kim@gmail.com

2012/03/01 00:40 2012/03/0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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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형 한국 복음주의' 논의를 고민하며
복음주의 정론지로서 <복음과상황>의 방향성에 관하여

 

 

들어가면서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1월 호에 실린 정정훈 편집위원의 글 '한국 복음주의, 혁신 없이 미래는 없다'를 흥미롭게 읽고 생각을 좀 더 나눠 보고 싶다. 논의에 앞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부분이 있다.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를 표방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전까지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로 로잔언약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현재 혹은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으며 잡아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지금 시작하려는 건가. 여러 가지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먼저 입장을 조금 표현한다면 나는 한동안 에큐메니컬 그룹을 쫓아다녔다. 정용섭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면서 한동안 대구성서아카데미 모임을 주로 갔었고- MT도 따라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 복음주의 진영을 떠나 에큐메니컬 진영에 속하지 못했다. 물론 인맥적인 낯설음도 있었겠고 신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부정할 정도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다. 여전히 나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한다. 이 글은 그런 개인적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묻어날 것이다.

 

 

복음주의의 정의, 특징

먼저 복음주의의 정의와 특징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 있으나 4명의 신학자를 중심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제임스 패커

패커의 논문 '복음주의 영국 국교도의 정체성 문제'는 네 가지 일반적인 주장과 여섯 가지 특수한 확신들로 이뤄져 있다.

 

1. 실천적인 기독교: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제자도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
2. 순수한/순전한 기독교: 기독교 신앙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닌.
3. 연합하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공통된 헌신을 통해 연합함
4. 이성적인 기독교: 대중의 경험에 집착하는 대중적인 경향에 반함

 

이후 여섯 가지 확신은 △성경의 최고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 하심 △성령의 주 되심 △회심의 필요성 △전도(예배)의 우선성 △교재의 중요성 등으로 표현된다.

 

 

데이빗 베빙턴

데이빗 베빙턴의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은 패커 논문이 발표되고 10년 후 출판되었고 그 책에서 네 가지 주된 특징을 언급한 바 있다.

1. 회심주의(conversionism) - 성령에 의한 회심('중생', '거듭남', '새로남' 또는 '구원') 경험을 강조한다.
2. 성서주의(biblicism) - 성경 또는 성서를 하나님(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유일한(only) 또는 일차적(primary) 권위로 본다.
3. 행동주의(activism) - 문서 선교나 국외 선교 등의 선교 활동을 강조한다.
4. 십자가중심주의(crucicentrism) -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본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알 리스터 맥그래스도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가 어떤 조직이나 교파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을 아래의 4가지로 유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 최근까지 대체로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맥그래스의 것을 따르는 추세였다.

1.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여 성서 공부, 성서 묵상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예수의 십자가를 강조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성령에 의한 개인의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4. 헌신적인 복음 전파

 

 

존 스토트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에서 패커와 베빙턴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전도 활동, 회심 경험, 교제의 필요성이 성격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성령의 주 되심과 같은 진리들과 같은 층위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으로의 구분을 제안한다. 즉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장엄성, 그 사역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주 되심의 삼위일체적 복음을 통해 이후 특징인 회심, 전도, 교제 등은 따라오는 것, 혹은 복음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이 삼위일체적 복음을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였다.

 

1. 성부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주도권
2. 성자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역
3. 성령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사역



복음주의적 정의는 우리를 규정할 수 있나

앞서 언급한 몇몇 복음주의 학자들이 정리한 복음주의의 특징은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나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하다. 몰론 존 스토트의 삼위일체적 신학과 우리의 행동으로 규정짓는 복음주의의 핵심 진리는 그간의 정의의 층위를 새롭게 구분하는 느낌이 강하나 이 또한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사실 개신교도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러한 구분은 맥그래스의 지적대로 복음주의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의는 결국 자신이 어느 교단, 교파에 속하든지 위에서 언급한 복음주의적 특징에 공감, 헌신하는 자라면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권 내부의 이러한 구획 작업은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의한다기보다는 개혁주의자는 누구까지를 신앙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고민한 결과라고 인지하는 편이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사실 이런 고민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솔직히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컬에게 '당신도 복음주의자로 끼워 주겠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끼워 줘서 감사하다고 말할 이가 있을까).

 

하나 개혁주의자들은 20세기에 만연하게 퍼진 연합 운동에 대해 교리적 측면에서 부담을 느껴 왔을 것이고 연합 운동 안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가톨릭, 은사주의, 성공회 등등 많은 기독교 교파들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찾은 셈이다. 결국, 복음주의적 특징의 표명은 신복음주의자들이 고심 끝에 좀 더 연합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파이를 키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름의 필요'에 의해 활기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이유에서 정의 내린 복음주의의 특징으로는 진정한 복음주의의 '구획 설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당혹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 특징으로 구획을 나눌 때 복음주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이른바 '범기독교집단'으로 확장된다. 정정훈 편집위원의 지적대로 한기총도, 순복음교회도, 각종 대형 교회들도 모두 복음주의 교회다.

 

사실 이런 두루뭉술한 범주화와는 구별되게 실제로 복음주의 진영은 그 실체가 있다. 학자들과 교회들이 어느 정도 뚜렷하고 그들이 말하는 메시지가 차별성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주의의 특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이 세상과 혹은 교회 내부에서 지속해서 갈등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 나간 궤적이며 자주 그 특징은 '부정적 전략(negative strategy)'의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존 스토트가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설명하기 이전부터 근본주의에 대한 10가지의 부정을 통해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은 이러한 복음주의의 상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10가지'의 부정이라니).

 

 

근본주의가 아닌, 구복음주의와도 구별된

한국 복음주의는 결국 북미의 상황을 그대로 전승받은 것이고 북미 혹은 영국 복음주의의 특징보다는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 대응해 온 부정, 특히 개혁주의 내의 '근본주의적 흐름'에 대한 부정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과학 혁명으로 촉발된 진화론적, 유물론적 사고와 학문에 대한 극단적 반대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시에 차용한 고등비평에 반대하였고 고등비평적 방법론을 차용한 어떠한 형식의 성경 비평 작업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을 '신복음주의'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논박한 복음주의 신학자 칼 헨리의 저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출판을 계기로 본다(칼 헨리는 이 책에서 "현대의 지성이 전 지구적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는 반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메시지는 서양 문화의 병폐를 해소할 대안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복음주의의 양심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라고 말했고 그 주장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이러한 방향성 중 사회적 참여에 관한 관심은 존 스토트가 참여한 로잔언약을 통해 정리되었고 복상이 따라왔던 복음주의는 이 로잔언약의 사회적 책임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 복상에서 복음주의를 논할 때 사회 참여적 복음주의로 그 구획을 한정하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다소 회의적이다).

 

또한, 로이드존스, 메이첸, 이안 머레이 등 구복음주의자와 구별되는 교파적, 신학적 특징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복음주의는 '진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이안 머레이가 쓴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그는 이러한 복음주의적 구별의 특징과 역사적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영국적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그 사건들을 중심으로 대략 정리한다면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화, 복음주의와 가톨릭의 연합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권 내부의 의견 충돌과 분리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는 그 책에서 구복음주의자들이 '진정한 복음'을 고수하는 견해라는 것을 명시한다. 개인적으로 청교도적 신앙 유산을 중시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출석하면서 나에게는 영국적 상황이 내 신앙적 입장을 결정하고 변호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고 따라서 영국적 고민이 내 실존적 문제로까지 소급되는 경험을 했다. 만일 진보적 성향의 교인이 보수적 개혁주의 교회를 다니는 한국적 상황에서도 이 영국 복음주의의 신학적 입장은 내 경우와 더불어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볼 때 복음주의의 특징은 그 삼위일체적 교리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근본주의적 신앙 흐름에 반대하는 일련의 특징, 학문과 지성의 강조,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열린 자세, 전도와 더불어 사회문제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를 통한 교회 연합 운동의 공감과 성경 해석에서 문자적 해석, 축자영감설의 부정 및 역사 비평에 열린 자세 등이 복음주의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의 구별적 상황(Context)

복음주의의 특징 형성 과정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특징을 명확화하는 과정 중에는 항시 역사적 상황의 압력 혹은 갈등이 동인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의 상황을 볼 때 과학을 위시한 학문적 진보, 특히 진화론과 유물론적인 입장은 지속해서 교회의 태도 표명하기를 기대했고 교회도 한계가 있었겠지만 나름대로는 그 답을 찾고자 애썼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건 교회의 대응이 근본주의적이었느냐 신복음주의적이었느냐 하는 부분보다는, 세상이 교회의 대답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 부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따라서 20세기 북미의 상황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시대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 외에도 '세상은 교회의 입장을 경청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21세기 영국과 북미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나 - 존 스토트의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시작한다 - 우리의 정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현재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이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뉴라이트 운동,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횡포와 구국기도회, 빤쓰 목사의 기독교 정당 창당 등 기독교의 정치 참여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다. 따라서 복상이 할 수 있는 그리고 그간 해 온 전략인 '우리는 다르다, 진보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 집단이 존재한다'는 목소리는 그냥 묻혀 버리기에 십상이다. 사회적 진보 세력이 충분히 커버하고 있는 메시지이며 더 진일보하고 시의적으로도 적절한 이슈 선점과 깊이, 영향력 측면에서 모두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과연 교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 인식은 양희송의 '포스트 2007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와 정정훈 편집위원의 이번 글이 맥락을 잘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정훈의 이번 글은 개인적으로 한국 복음주의를 다시 정리해 보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카리스마적 리더 의존형 운동 방식에 대한 한계점, 이만열, 손봉호 이후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고민,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교회 갱신, 사회참여 양쪽에서 다 무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대목에서 공감과 함께 강한 우려감이 든다. 특히 그가 언급한 '1987년 체제'는 중요한 시점의 지적이며 1987년 체제는 민주화의 불완전성이 그대로 교계에도 복제된 느낌이 강하다. 특히 민주화 주체 세력이 아닌 교회는 이후 사회참여라는 이슈에서 대부분 주도적이지도 못했고 현실 정치 참여적이지도 못했다.

 

물론 전혀 결과물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결과들이 변질하거나 쇠퇴하고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낙천․낙선 운동은 내가 아는바 사회가 관심을 가졌던 교회의 유일무이한 활동이었고 그러한 관심을 곧 이은 영화, 동성애 문제 등 문화 운동에 대한 다소 깊이 없는 반대 운동으로 이내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앞서 언급한 많은 교회의 부정적 활동 때문에 '개독교'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90년대는 민주주의의 태동과 기독교 대중문화 운동이 꽃피우는 시점에서 다행스럽게도 복상적 메시지에 어느 정도 주목하는 집단이 존재했고 그 집단은 어떤 문화적, 인맥적, 신학적인 통일체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복상이라는 매체는 소비되었고 그 메시지, 이른바 복음주의의 특징은 전수되었다. 이후로는 기독교 문화 운동은 세속 문화를 뛰어넘지 못했고 – 원래 못 하는 게 당연하지만 – 그 세속 문화를 비평하는 잣대조차 좀스럽다. 성서한국이나 선교단체로 대변되는 파라처치들도 점점 그 수가 줄고 있고 진보적인 복음주의 집단은 섹트화되고 다각화되었다. 이제는 한 부류로 몰기엔 '너무 다른' 자신들의 입장이 많다.

 

 

전략, 방법론으로서의 복상, 복음주의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적인 측면이나 교회 생활면에서, 학문적 성취나 리더십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단결이나 국가적 영향력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발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필요한 일인가?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한 말이다. 나는 그의 고백에서 진정성을 읽는다. 그리고 이 글에 깊이 공감하는 나는 전략적으로 무엇보다 우선으로 한국교회에 다양한 교리적, 교파적 차이에도 이 분리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연합에 복상이 가장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교리, 하나의 운동으로의 연합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진리 아래에서 다양한 입장과 교파, 교리, 운동들이 방대하게 소개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도 하고 때로는 어떠한 이슈와 이벤트에 물리적으로도 연합하는 일들을 적극 권장하는 운동으로 변해야 하고, 그런 부분에서 복상이 매개체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한국교회의 연합 문제를 생각하면 복음주의 정론지의 틀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의 베이스캠프는 유지하되 국내의 아나뱁티스트, 가톨릭, 성공회 등등의 교단의 필진을 발굴하여 더욱 많은 견해의 장이 마련되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정치, 사회 참여적인 문제에는 어떤 핵심 매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고 복상이 추구하는 세상적 가치들을 꾸준히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도 진보 진영의 메시지를 카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성이 떨어지거나 일반 매체가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성경적 원리들을 돌아보거나 기독교적 가치로 진보 이슈들을 한 번 더 풀어내는 작업들을 복상이 해 주면 좋을 것이다.

 

올해에는 정치적으로 풍성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터인데 이때에는 더욱 과감하게 이슈들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건 어떨까 싶다.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거나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부분에서도 복상의 언로가 정치적으로도 단일화되는 것을 표방하기보다는 복음주의권 전반에서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차분하고 내실 있는 논지를 통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뉘고 그 견해들에 관해 토론과 공감이 가능하도록 방향성을 잡아 주면 좋을 듯하다.

 

2012/02/12 00:39 2012/02/1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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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떠야했던 책](1) 분교음악회, 숲이 된 122개의 추억
예민 (지은이) | 샘터사 | 2003-09-22
예민의 분교음악회, 숲이된 122개의 추억. 예민이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열었던 음악회들의 기억들을 모았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근데 왜 이 책이 안 뜬겨?

 

 


[아깝다! 떠야했던 책](2)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
에이브러햄 J. 트워스키 | 미래사 | 2010-03-05
만화 피너츠를 좋아한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는 게 좋겠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돌아보고 유쾌한 방법으로 변화를 권한다. 읽는 내내 찰리브라운 덕에 즐겁다.^^ (근데 개정판이 계속 나오고 가격도 올리는 걸 보면 나름 뜬 책 같음.)

 

 

[아깝다! 떠야했던 책](3)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지은이) | 돌베개 | 1996-09-12
신영복 교수의 대표작으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꼽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 책보다는 인지도가 적은 "나무야 나무야"를 더 좋아한다. 신영복 교수가 출소 후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적은 서간체 여행기이자 묵상집이다. 내게 지성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시지 않는 게 여전히 불만이지만 이 책만으로도 신영복은 나의 영원한 선생이다.

 


[아깝다! 떠야했던 책](4) 존 콜트레인
마틴 스미스 | 책갈피 | 2004-07-05
국내에 존 콜트레인(재즈연주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이 책을 아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어떤 인물을 다룰 때 그 사람의 내면의 고뇌, 즉 개인사를 넘어 시대를 조명하고 그 흐름속에서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책이 좋다. 이 책은 존 콜트레인 개인을 통해 재즈의 역사와 인종차별에 저항한 민권 운동의 역사를 통찰하는 안목이 있다. 게다가 페이지수가 적기까지 하다!!

 


[아깝다! 떠야했던 책](5)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실벵 다르니 | 마튜 르 루 | 마고북스 | 2006-03-20
대학 졸업후 이른바 백면서생의 지식, 실천을 담보하지 않은 지식에 깊은 회의감이 들던 시절에 무릎을 치며 읽은 책. 당시에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개념도 낯설던 때에 두 청년의 여정(이라쓰고 개고생이라 읽는다)에 깊이 매료됨. '지속가능한 발전', 수익을 내면서 사회적 소명을 실천하는 대안기업가 80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닥치고 일독!

 

 

*facebook 담벼락글 정리.

2012/02/08 22:36 2012/02/08 2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