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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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 있지만 설계만큼 기본에 충실해야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신기술이 적용된 부품, 최고의 디자인, 성능 개선품, 다 좋지만 기본 갭을 확보하지 못한 부품은 자동차 안에서 부품간 간섭을 일으키거나 고온의 엔진룸 안에서 열변형을 일으켜 부품으로써의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특히 내가 설계하는 부품은 차량 진동소음에 지대한 영향을 주므로 아무리 뛰어난 성능의 부품을 만들었다 해도 부품 간 간섭이 일어나면 무용지물에 차량이상진동의 주원인이 된다. 또한 부품 설계단계전에 측정하는 엔진의 중량, 무게중심좌표와 같이 기본적으로 측정하는 데이터를 제대로 따져보지 않으면 오차가 있는 데이터에서 최적 설계를 해본들 실차에서의 성능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요즘처럼 한끝 차이에서 명품이 구별되는 시대에 배워야 할 기술도 많고 알아야할 트렌드도 많지만 실제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들면서 느끼는 건 기본이 엉망인 물건 위에 아무리 새로운 어떤 걸 입혀도 소용이 없더라는 거다.

어떨 때는 설계를 하면서 문득 내 인격이나 내 인생을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허공에 떠도는 이상적 사고를 많이 하는 내게, 부품 설계업무는 엄한 인생 선생같을 때가 있다.

2012/02/08 21:36 2012/02/0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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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페북에 올린 글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북스캔 업체와 전자출판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내실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 것 같아 페친들의 양해를 구하고 갈무리해두었다. 아래는 정리글 모음이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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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가 스캔받은 책들은 절대 공유하지 않습니다. 야박하다 생각하지 마시길. 출판계 분들은 공감할겁니다. 공감하기 때문에 전자책 시장에서 출판계는 엉거주춤하는 것이기도 할 거구요. 자자... 책은 편집자와 저자, 출판사를 위해 사서 봅시다.

Claire Park 근데, 야박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 본인 소장은 괜찮으나 공유는 불법입니다.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부분이에요 ^^;;

OOO 그나 저나 스캔 받은 책은 헌책방에 파는 거야?

윤민규 제가 구매쪽에 있다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해석이 애매해지는데, 스캔을 대행한 업체는 스캔한 사본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을텐데 그러면 스캔본에 대한 소유권은 용주님께 있지만, 스캔대행업체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어디까지인건가요? 혹시 계약서가 있는 건지... 해서요

Claire Park ‎Matt Yoon본인 책을 본인이 스캔하는 건 합법이지만, 스캔 대행업은 저작권 침해로 불법입니다.

윤민규 ‎Claire Park 역시... 그렇군요. 정말 잘못하다간 대학교재를 음원이나 영화처럼 P2P사이트에서 다운받게될 가능성이 있겠네요. 그러면 책을 제본하는 정도야 애교가 될텐데... 이러다가 외국처럼 정말 책값이 엄청 올라가게 되는 것 아닐까요?

Claire Park ‎Matt Yoon 이미 대학교재들도 많이 공유가 되어 있습니다. 뭐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적컨텐츠에 돈을 주고 산다는 개념이 없거든요. 책가격은 한계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도서 시장이;;;; 위험해지겠죠;;

OOO 스캔 받은 원래 책을 헌책방에 팔거나 친구에게 양도를 한 후에 가지고 있는 파일의 권리관계도 복잡해져요. 자신이 스캔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저작물의 개인적 이용 등에 한정하여 저작권이 미치지 않도록 한 것인데, 그 저작물에 해당하는 출판물이 양도되는 경우에는 저 예외에 해당하지 않게 되는 문제로 귀결될 듯해요.

OOO 출판업체들이 저런 서비스를 차단하고, 얼른 ebook 형태로 배포시장을 전환하지 않으면 매출 감소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게 mp3 player 등장으로 음반시장에 나타난 현상인데, tablet + ebook reader 등의 등장으로 출판업계에 뻔하게 나타날 문제입니다.

배용하 책을 번역하거나 쓰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이 무너지면, 소위 지적 평등을 외치면서 불법을 조장하던 사람들은 뭐라할까요? 한번 무너진 출판과 관련된 베이스는 쉽게 복구할 수 없습니다. 엄두를 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수 수익을 맞추는 상업적 출판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출판사의 목을 죄는 일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일이 아닐까요?

김용주 오.. 봇물 터지듯 글들이 올라오는군요. 저도 주목하는 부분이 스캔대행업체들의 DB입니다. 이들의 엄청난 양의 스캔북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예전에 테입으로 음악듣던 시절 복사판을 개인이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닌데 테입을 보내서 대행업체가 테입을 복제하는 격이니...

김용주 저는 킨들이나 아이팟이 어떤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책의 경우에는 소유자가 가공하기 쉬워야 하는데 이게 DRM과 상충되죠. 전자책 시장으로 간다면 이또한 풀어야할 주요 과제임에 분명합니다.

윤민규 요약해보면 현재 법적 테두리에서 수용하는 정도는, '자신이 구입한 책(이후 원본 또는 1차 사본이라 한다)을 스캔하여 이를 소장하는 것이 허용하나, 이는 1차 사본을 가지고 있는 자에 한한다.' 정도가 되겠네요. 스캔본에 대한 저작권 분쟁이 있을 경우, 자신이 그 책을 구입한 내용을 증빙할 서류와 함께 스스로 스캔했다는 내용까지 증빙해야 한다는 점인데요.

김용주 스캔업체는 스캔북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니 문제가 안된다는 입장이구요. 스캔을 위해 책도 분리시켜서 스캔한 후 폐기한다고 합니다. 결국 대행업체는 책의 원본은 소멸시키고 전자책에 DRM 및 소유자 정보 표기 후 사적 사용물로 전환시켜준다는 거죠.

OOO 책을 구입했다는 증빙 서류는 거래가 있었음을 나타낼 수는 있어도 책의 소유권을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동산은 점유에 의해서 소유권이 공시되는 것이니까요. 단지, 책 보관이 번거로와서 스캔한 건데 그 책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스캔이 끝난 책을 보관해주는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에게 맡기는 식으로 멀리 보내버리거나, 출판사에게 책의 소유권을 넘기는 대신 복사본을 적법하게 가지도록 교환하는 등의 계약 형태를 만들어서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거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서도..

Claire Park 제 입장으로서는 불법파일 공유를 없앨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DMR 을 한다고 해도 공유는 되니까요. 외국 책들도 꽤 공유가 되고 있고요. '지적 재산도 타인의 소유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무료로 갖는 것은 불법이다' 하는 인식이 우선적으로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음악 파일을 다운 을 받아도 불법인 건 어느정도 인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책을 읽는 분들이 적어서 그런지 불법 mp3 못지않은 불법 도서 공유의 심각성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현 상황이 음악 못지않습니다.

배용하 스캔 대행 업체가 뭐죠?

김용주 개인이 스캐너를 가지고 책을 스캔하고 책을 양도하는 건 막을 수 없다고 봅니다. 테입 복사해서 갖고 원본을 친구 줬을 때에도 그 복사본으로 장사를 하지 않는 한 제재받기가 쉽잖았지요. 그렇게 보면 또 문제가 생기는게 전자책도 영리 목적이 아니면 편집가능한 형태로 보안을 풀어서 지인들에게 송부할 수 있습니다. 이건 윤리적인 문제일텐데 이렇게 공유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다시 법적인 제재가 생기게 되겠지요.

OOO 스캔 업체가 책의 원본을 소멸시키고 전자파일을 보내는 형태군.. 차라리 출판업체가 적법하게 원본을 회수하고 DRMed copy를 보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이미 문자화형태로 출판된 책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겠네요..

Claire Park ‎YongJoo Kim 스캔업체의 입장은 애매한 것 같아요.우리가 만든 것을 가지고 수익을 창출한다면, 그것에 대한 부분은 상품의 제작자에게 지불했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스캔으로 얻는 수익 또한 저자나 출판사에게 지불해야 하는 게 아닌지요.

OOO 스캔 대행업체로서는 만약에 동일한 책을 10명이 원본을 보내와서 스캔을 요청하면, 그중 한권만 해체하고 나머지 9권은 다시 유통시킬 가능성도 있는데..

김용주 ‎OOO 좋은 지적입니다. 근데 그럴 확률이 없지 않으나 아무래도 어려울 게 대체로 자기 책에 메모가 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자기책을 스캔하지 않으면 소비자가 잡아내겠죠. 이 케이스는 아마도 온라인서점에서 스캔업체로 책을 직배송하는 경우에 한할 듯.^^

배용하 출판사가 책을 판매하고 정가를 매길때는 그 책의 제작에 들어간 물리적 비용과 저작권료를 감안해서 한권의 초종 책의 가격을 정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스캔하고 양도하는 것은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지만 엄연히 도독질이고 양아치나 하는 짓 아닙니까? 그것이 개인이건 스캔업체이건... 스캔업체라는 것이 함법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남의 책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는 말인가요?

김용주 전자책이 그렇잖아요. drm 걸어서 팔고 있죠. 문제는 개인이 drm걸린 파일의 copy & paste가 불가하다는 점, 그리고 drm이 통합되지 않고 기기별, 업체별로 난립한다는 거죠. 이를테면 교보에서 산 전자책을 교보가 지원하지 않는 단말기에서는 볼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교보drm용 단말기와 알라딘drm용 단말기를 모두 가져야 하죠.

윤민규 편집완성본 내지는 최종 출판사을 위한 소장본을 원본이라고 하면, 원본은 어차피 저자가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출판사와 공동소유하거나 판권만 분할해서 출판사가 가지는 경우가 있을테죠. 그렇게 어렵게 출판이 되었다고 하면 PDF본에 대해서는 사실상 규제가 불가할테고, 내용이 유출되는 부분에 대해서 찾아내기도 쉽지 않을텐데... 정말 빨리 E-book이 정착되지 않고서는 출판계가 어려울 것 같네요.

김용주 ‎배용하 제가 산 책을 스캔업체에 보내고 업체는 스캔 후 그 책을 파기하고 전자책에 인쇄 및 카피 보안을 걸고 파일 내에 제 이름과 주소, 연락처를 명기하여 라이센스 작업을 하는 경우 그것이 양아치 짓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봅니다. 문제의 소지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제 책을 제가 스캔해서 전자파일로 만들어서 저만 본다면 문제가 될까요?

Claire Park ‎Matt Yoonㅎㅎ 실제적으로는 출판사유출보다 개인이 타이핑해서 올리는 경우, 스캔해서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요상한 지적 개념이라 스캔 내가 했으니 불펌하지 말라~ 라는 문구가 써져 있는 웃지 못할 경우도 많고요.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그리고 -_- 출판사 유출 본은 알아봅니다;;)

Claire Park 이북 사이트가 해킹 당해서 파일이 유출된 경우도 있죠.

OOO DRM간의 호환 문제는 시장에서 업체 position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에요.. 출판사는 저작물의 publishing에 대한 권리만을 가진다면 어떤 방식의 drm을 채택하느냐는 중립적일 수 있는데, 교보같은 곳이 online publishing 방법까지 주도하고 싶으면 device 제조사의 기술 선택부분과 상충하게 되는 거죠.. 이건 시장에서 해결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문제

김용주 출판사 입장에서는 drm 업체 자체를 불신하죠. 엄청난 양의 전자도서를 줬는데 거기서 누군가가 파일을 돌리기 시작하면 웹하드같은 곳에서 돌까봐. drm를 출판사가 직접 관리하고 싶어하는데 문제는 출판사들이 drm을 자체개발할 돈이 없다는 거. 진퇴양난입니다. 스캔대행업체들도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조항에 보면 공중 복사기에 의한 복제를 규제하는 예외규정이 있는 모양인데 스캔업체는 스캐너가 복사기는 아니라는 주장이죠.^^ 따라서 이를 규제하려고 들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스캔대행은 한시적인 job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여 스캔해야해...^^)

김용주 ‎Claire Park 해킹..출판사가 그런 걸 가장 무서워합니다. 일단 책만드는 분들은 IT쪽을 잘 모르니 컨텐츠를 웹에 태우는 것 자체가 불안한거죠. 게다가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 라이센스에 대한 윤리의식도 그닥 높지 않고.

배용하 저만 본다는 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_^ 다만 이런 일이 그렇게 1인의 양심에 맡길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개인에게 맡겨둘 일이라면 왜 출판사가 비싼 라이센스주고 번역비주고 교열교정보고 제작해서 세금내면서 그 짓을 합니까? 출판사에서 판매하는 것은 최종 생산된 책 바로 그 책임을 기억해 주세요. 전자책형태는 별도의 계약을 해야만 하는 복잡한 계약관계까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다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고 지적인 장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방조하는 것에 대해서 자승자박하는 것임은 확실한거 아닌가요? 시간이 지나면 정말 공들이고 애써서 만드는 책이 줄어들 것이고 스캔할 책이나 나올지 모르겠네요. 출판하는 사람으로서 힘 빠지는 일이군요. 전 스캔업체라는 곳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배용하 dmr이라는 것이 특정한 곳에서만 열리는 식의 암호거는거 같은데요. 그거 만드는데 그리 돈이 많이 드나요? 제가 모르는게 많네요..^_^

OOO ‎@배용하, 개인적 이용을 위한 복제를 하도록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스캐너도 더러 출시되어 있어요. 아마 스캔대행업체는 대형 전문 복사기를 이용하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김용주 엄밀히 말하자면 출판시장도 음반시장의 mp3 공유같은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이미 흐름은 시작되었고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합리적인 합의점, 플랫폼을 찾아서 안착해야 하는데 음반사들과 마찬가지로 출판사도 파이를 잃을 확률이 높습니다.

김용주 ‎배용하 좋게 생각하면 물리적 기반없이 책을 출판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드카피나 종이작업 없이 PDF나 ePub형태로만 배포하면 되니 초기 투자비가 적게 드는 거죠. 돈 안되는 책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지겠죠. 문제는 출판사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거. 굳이 출판사 끼고 안해도 되니 아마존, 교보, 애플의 아이북이 출판에 달려드는 추세.

김용주 ‎(아 오늘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냈다. 이건 전문 컨설팅 수준인데.ㅋㅋㅋ)

민대백 가만 보면 책 만드는 사람들의 전문성을 온 사회가 만만하게 보고 있는 느낌이군요...

김용주 만만해지고 있죠. 요즘 세태가.^^ ‎민대백 님 말씀대로 사실 책은 기획부터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그걸 온라인 서점들은 다운로드수나 취향들에 대한 DB자료로 커버할 수 있다고 보는거죠. "누구나 책을 낼 수 있고 시장이 좋은 책을 선택해 줄 것이다." 과연...^^

배용하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 맞는 말이기도 하고 걱정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 누구나 글을 쓸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번역도 할 수 있겠지만, 편집자가 된다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DMR 만드는데 얼마나 드는지는 대충이라도 알려주실 분은 없나요? ㅋㅋㅋ

OOO DRM인데요.. 비용의 문제가 아닐 듯 합니다. DRM을 업체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를 먼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고, 이게 전자책의 유통 및 거기서 발생되는 수익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복잡한 녀석이죠..

김용주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자체 drm을 걸었다쳐도 단말기 업체들과도 계약을 해야 합니다. 단말기업체는 당연히 온라인 서점의 구분을 따를 겁니다. 일례로 yes24와 알라딘은 drm을 공유합니다. 교보는 독자 drm을 사용합니다. 출판사가 drm을 독자개발해도 소비자가 출판사 사이트에서 책을 사지 않는한 온라인 서점이 막을 겁니다. 비용은 잘 모르겠으나 비용이면에 난제가 있죠.

OOO DRM을 둘러싸고 장치 제조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장치를 많이 팔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하고, 저작권자 입장에서는 보호장치의 완전성에 초점을 두려하고, 유통 쪽에서는 다양한 publisher와 device가 채택해서 이익을 늘리려고하는데 초점을 두고, 사용자는 그런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 불편한 상황을 해소하려고 그런 보호수단을 없애려고 하고 등등..

김용주 ‎OOO 오... 통찰!

OOO 더구나 애플 같은 곳은 장치에서 시작해서 유통을 쥐려하고, 아마존 같은 곳은 유통에서 시작해서 그걸 놓지지 않으려고 장치를 만들고, 그런 규모의 프로젝트를 시장으로 끌어낼 만한 규모가 안되는 업체들은 표준이나 법적 규제를 선택하려고 하는데 정부가 형성되지 않은 시장을 선도해서 결정하는 것은 조심스러우니,, 이게 시간이 자연스레 흘러서 누군가의 힘싸움으로 결정될 때까지 복잡한 문제가 됩니다..

윤민규 결국 소유권이 중요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과연 책의 소유권을 내가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인데, 아마 여기서부터 아예(배포자유, 배포불가, 수익료 지출) 등의 분류가 필요할 것 같아요. 이미 많은 외국대학의 경우 강의안 등을 PDF로 만들어 무료배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질적인 수준은 통제하기 어려워지겠지요. 그렇다면, 현재로선 소유권의 문제가 DRM과 맞물려서 풀려야 하는데 용주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출판사 별로 자신들의 Tablet이 아니면 읽을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는군요. 여기서 소유권을 담보로 하여 중간매체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재화)에 대한 비용으로 또 다른 이윤이 창출되고 있고요. 만약 DRM 자체가 소유권을 함께 포함하고 각 리더기와 출판업체, 저자로 수익이 배분되는 구조이면 좋겠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 같군여. 아마존=킨들, 교보=e-reader를 통해 drm이 배포되고 있다면 벌써 이윤에 대한 단일화가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거대출판사와 북리더, drm간 협의가 이뤄져야 할텐데 영세한 출판사의 경우 과연 이런 부분을 다 따를 수 있을까요?

민대백 이러다 영세출판사에는 등사기와 제본기가 등장할 기세

황희상 결국 기술이 아닌 윤리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류의 근본 문제라서......

김용주 그래서 전자책 시장이 커지지 않고 북스캔업체가 생긴 겁니다. 내가 산 책인데 내가 왜 편하게 못보냐 씨바...! 그런 사람들이 자기책 자기가 수동스캐닝하는 걸 보고 사업화가 된 거죠.ㅋㅋ

OOO 출판계에 계신 분들이 댓글에는 많이 계시니, 일반적으로 말씀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저작물에 대해서 저작권 등의 법적인 수단 및 기술적인 보호 수단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제조사 및 컨텐츠 유통 등으로 인하여 변경되는 시장 구조에서 업을 이어갈지 현 시점에서는 신경 쓰셔야 할 듯요..

배용하 출판사에서 PDF화일 등을 만들어서 아아패드용으로만 만들고 한 개의 혹은 특정 아이패드에서만 열릴 수 있도록 하는 작업등은 불가한가요? ㅋㅋ

김용주 ‎황희상 저는 개인이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하는 시스템에 대한 반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악한 구석이 많으니까요. 또한 drm문제는 또한 카피레프트운동과도 연결이 됩니다. '윤리적인 이유'로 배포하려는 이들도 생길 겁니다.

윤민규 결국 흐르고 흘러 다시 돌아온 본질은 '이윤'이 되는 것 같군요. 어쨌든 많은 분들께 한 수 배워갑니다 ^^

배용하 출판사는 수익을 내야 유지하는 곳입니다. 윤리라는 말이 두루두루 적용되길 바랍니다.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윤리 타령은 정말 구름빵 먹고 바람똥 싸는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요...^_^

황희상 ‎김용주 개인도 시스템도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

김용주 일단 pdf가 문서 표준에 가까우니 아이패드에서만 열리는 pdf를 만들려면 애플과 어도비가 엮여야 될 겁니다. 둘 사이 아주 안 좋습니다.^^ 또한 보안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절대 못 풀 보안은 없습니다. 애플의 전략은 아이팟에서 편하고 저렴하게 음원을 구입하는 플랫폼을 제공했고 그것이 워낙 편하기에 사람들이 윤리적으로도 라이센스를 보호하는 선택을 한 겁니다. 나는 아이팟만을 쓰고 거기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을 한곡에 1불을 줄 수 있다는거죠. 그래서 출판사들이 과도기적으로 하는 일들 중에는 아이패드에 책을 앱으로 배포하는 방법인데 김제동의 책이나 구름빵 같은 동화가 그런 밥법을 썼죠.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보이는 대목입니다만. 아이패드만 한정해본다면 한겨레의 방법도 하나의 선례가 됩니다.(한겨레 가판대라는 앱을 만들었죠) 출판사로 따지면 대장간북이라는 어플을 개발하고 개인 계정에 구입한 책들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럼 대장간에서 출판한 책의 라이센스 관리가 되겠지요. 이건 아이패드가 전자책시장을 완전 점령했을 때 얘기고.^^

김용주 ‎윤민규 출판사-온라인서점-디바이스업체의 파워대결이죠. 전자책 시장의 삼국지랄까요? ^^

민대백 거대 자본이 셋 다 장악할 수도 있겠군요

김용주 삼송?

윤민규 ‎민대백 김용주 샘숭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컨텐츠나 문화사업에 열을 올리는 CJ나 다른 쪽 계열로 우회접근할 수도...

박상구 호홋 흥미로운 댓글들 잘보고갑니다. 음원에 이어 또하나의거대한 새로운시장이 열리는듯하나 왠지 이전보다 자본규모에의한 진입장벽이 더 높아지는듯하여 씁쓸하네요.(끝)



*2012년 2월 3일. facebook 담벼락 글.

2012/02/03 22:34 2012/02/0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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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을 봤다. 나는 검사와 스폰서를 볼 때도 느꼈지만 사법부가 근본적으로 개혁되긴 어렵다고 본다.

사법부 얘기로 시작했지만 삼천포로 조금 빠지련다. 구정연휴에 여성 페친 중 한분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를 만나려다 수행원들에게 물리적 제압을 당하고 옷도 찢긴 일이 있었다. 물론 정황상 그분은 담임목사의 비리로 피켓시위도 했고 소송도 걸려 있는 상태로 보인다. 그 담임 목사는 자기 눈앞에서 여성 성도가 제압당하는 걸 보고도 교양있는 척 대꾸하다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했고 자신을 팔을 잡고 늘어지는 그녀를 경멸하듯 쳐다봤다고 했다.

나는 목사에 대한 '은근한' 반감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였다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 오랜시간 성장하면서 '후천적'으로 습득된 반감이다. 목사는 설교자다. 성경을 해석하여 공동체 안에서 풀어내는 은사르를 가진 자다.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은사대로 그 공동체를 섬기는 만인제사장 집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중소 규모 교회의 목사만 되도 목사의 급여가 1억을 넘고 자녀들은 유학을 가고 그랜저급 이상의 차를 몰고 다니며 전도사나 강도사라 쓰고 수행원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달고 다닌다. 교회에 전화하면 목사와 직통으로 통화할 수 없고 비서가 스케줄을 조율해준다.

이 사람은 우리가 느끼는대로, 성경을 풀어내는 만인제사장 그룹의 한 성도가 아니라 중소기업 회장의 이미지다. 실제로 그들은 목사안수를 받고 나면 아파트 단지 주변에 상가 지하에 세를 얻고 두 주먹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성도들을 은혜로 이끌어 지상으로 옮기고 평수를 넓히고 주변 땅을 사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서 자수성가한 개척자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그건 수사적 표현일 뿐 교회 재산이 자신의 것이며 자기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도가 목사님, 목사님할 때 목사는 회장님, 회장님으로 들린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건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목사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다. 목사가 수행원이나 비서를 왜 달고 다니며 왜 교회를 자기가 세웠다고 생각하고 성도들을 자기 회사 직원이나 아랫사람 대하듯 하대하는지 성경만 읽어서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앞서 얘기한 여성분의 글을 읽고 열 뻗쳐서 "이런 개새끼가 있나. 부축하며 괜찮냐고 물어봐도 시원찮을 판국에"라고 썼다. 헌데 그 이후로 달리는 댓글이 대체로 맘에 들지 않는다. 힘내세요, 신경쓰지 마세요, 주님의 위로를 류의 댓글들. 나아가서 그런 사람은 목사가 아니고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니 맘에 담아두지 말라고도 한다.

위로의 한 측면으로 인정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목사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회에서 목사가 아닐 수 없고 많은 교회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기에 그 교회가 진정 하나님이 보시기에 교회가 아니라고 우리가 선포한다하여 그 교회가 눈꿈쩍이나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교회와 목사들이 여전히 교회질하고 목사질 하는데 '그들은 똥이니 피하세요' 라고 하는게 과연 옳을까.

나는 이런 이원론적 인식이 교회를 병들게 만들고 목사들이 '회장놀이'하는데 기여한다고 본다. 내 주변에서도 목사를 비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무거운 돌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이 괴로운 분들이 천천이요 만만이다. 어른들 중에는 원론적으로 만인제사장임을 인정해도 정서상 우리 목사님에게 굴비도 갖다 드리고 토종꿀도 갖다드리고 미국 가시면 차비도 드리고 차도 기왕이면 좋은 차 타야 안전하실 거고, 우리 위해 새벽기도도 하시는데 자녀들 유학도 보내드리고.. 섬겨드리고 싶은 맘 간절하다.

설령 목사님을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 교회를 떠나거나 피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하지 목사의 적이 되고 비판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게 은혜롭지 못한 일이라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성역이 되어가고 비판도 없고 자정능력도 상실한다. 목사는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안수받고 초창기 개척하느라 고생 좀 하다가 40대 전후로 중소기업 회장직에 등극하게 되면 굽신거리는 성도들로 말미암아 자기도 모르는 새에 비서도 달고 수행원도 달고 돈도 많이 쌓고 산다. 그뿐인가 자기말에 아멘아멘 하며 은혜받기 일쑤니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보면 인내 자체가 어렵다. 자기가 고용한 교역자들 막 짤라대는 걸 보면 자기 인식이 '회장님'이 확실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나도 너무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목사님들도 많고 정말 어떤 소명의식에 의해 정직하게, 그리고 힘들게 사역하는 분들도 많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숨어서 하는 선행 대비 대놓고 이상한 짓하는 목사들이 한국에는 너무 많다. 일단 목사들이 너무 많다. 목사 하려고 줄선 신학생들이 너무 많다. 목사의 길이 좁은 길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목사직에 어떤 이익적 요소가 많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독 한국에서만 신학생들이 넘쳐나는 이 기막힌 수요를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교회도 개혁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편이다. 나라가 나서서 목사들을 핍박하고 잡아가지 않는 한 이 흐름을 뒤짚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예배시간에 가장 은혜로웠던 순간은 교회개혁에 대한 나의 심적 부담감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그렇다고 비판마저 안 할 수는 없다. 대안의 길을 가되 비상식과는 타협할 수는 없다. 회피하고 묵인하는 순간 비상식은 상식이 된다. 이런 상식이 교회가 번성한 건의 상당수는 그것을 묵인, 용인한 성도의 책임이 있다. (이를테면 친구먹어도 되는 목사를 회장님으로 모신..) 자기 수행원이 제압해서 물리적 고통을 받은 성도를 보며 다친 데 없냐고 물어보지 않고 감정의 동요없이 지켜보고, 유유히 교양있게 말하는 목사. 그 목사를 비난하지 않고 당한 성도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그 사람은 '진정한 목사'가 아니라고 위로하는 주변 성도들. 여기에서 나는 조국 교회의 미래를 본다.

쓰다보니 삼천포가 본류가 됐다.ㅠㅠ(물론 삼천포를 의도하고 쓴 글이지만) 나는 부러진 화살을 보며 사법부를 묵상하다가 교회의 목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교회도 개혁되지 못하리라는 내 확신이 강화되었다. 목사가 그럴진대 검사, 판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독특한 면이 있지만 인간이기에 비슷한 면이 있다. 자기가 엘리트였고 특혜를 받으면, 그것도 나이가 어릴 때 굽신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면 왠만해서는 뒤집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법부의 개혁도 그렇고 교회 개혁도 그렇고 개혁되어 보이는 지점이 간혹 생길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렵다. 따라서 그들의 '친구'인 우리가 옆에서 계속 불편하게 해주는 수밖에 없다.



덧글.

내 페친중 적어도 20%는 목사이거나 목사가 될 사람들임을 알고 있다. 그들의 목회적 진의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사과를 덧붙인다. 특히 내가 아는 분들 중 기독잡지 정기구독료 오만원을 낼 여유조차 안 되는 시골교회 목사님도 계신다. 거듭 그런 분들에게 사과를 드린다.

2012/01/26 18:36 2012/01/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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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영문법 학문연구기
중고등학교시절 나는 영어신동이었다.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나름의 룰이 있었다. 당시 일반학생들은 이해하기쉬운 맨투맨 기본영어를 공부했고 공부를 쫌 잘한다 싶은 애들은 성문기본영어를, 겁나 잘하는 애들은 성문종합영어를 공부했다.

나는 당빠로 성문종합영어를 중학교 때부터 보고 이해하는 영어신동이었던 거시다! 따라서 나는 S(주어) V(동사) O(목적어) C(보어)의 위치에 따라 문장의 형식을 완벽히 맞췄고 남들이 어려워하는 '독립분사구문' 문장도 척척 맞춰내는 능력자였다.

따라서 영어시험에서 점수를 잃는 일 따위는 나와 무관한 저급한 학생들의 문제였고 나는 구름위를 날듯 영어 과목에서 항상 우위를 선점하던 시기를 한동안 구가했다.

그러나(급전환 모드)... 당시 나는 실제로는 New England를 "새로운 영국"이라고 번역하는 수준의 영어공부생이었다.



제2기: 단어왕 및 독해왕기
성문종합영어파들은 괄호 안에 들어갈 변형, 이를테면 원동사를 주면 형용사형으로 변환할지 부사형으로 변형할지, 조동사+have PP로 넣을지를 기똥차게 맞추는 능력자들이었지만 실제로 뉴욕타임즈나 미쿡서적들을 단 한 줄도 번역하지 못하는 도메스틱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영어신동이던 나는 그런 일본식 영어공부의 문제점을 간파했다. 그래, 일본에서 수입된 일본식 영문법을 공부해서는 본토 영어를 이해할 수 없구나. 시험문제를 다 맞춰도 영어 한줄 번역 못하니, 오호 통재라. 그런 낙심을 하던 차에 국가는 입시를 수학능력시험으로 전환했고 수학능력시험에는 수학만 나오지 않고 영어도 나오고 국어도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데 내가 간파한 영어공부의 문제점을 국가도 간파했던지 영어 시험은 독해의 비중을 엄청 높였고 급기야 5문제나 듣기시험도 보게 만들었다. 그때 나를 비롯한 영어신동들이 교재를 바꾸기에 이르는데 그때 불같이 번진 교재는 바로 이찬승 박사의 능률영어 씨리즈. 과학적 영단어 암기비법과 함께 리딩튜터라는 걸출한 학습지를 내놓은 능률영어사의 교재들은 입소문으로 순식간에 영어신동들 손에 들리게 된다.

고2 시절. 능률영어사의 도움에 힘입어 하루 100개의 단어를 외우고 20-30개의 독해본문을 풀며 입에 단내나게 영어를 연마한 나는 급기야 고3 수능시험에서 일본식 영문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어만점의 영예를 누리지만... 입시에는 낙방하고 2지망 대학에 안착한다.

그러나(다시 다크포스 스멜)... 당시 나는 실제로는 미국사람을 만나면 "암... 엄..." 수준의 회화를 구사하는 영어공부생이었다.



제3기: 본격 솰라솰라-기(이른바 회화가능시기)
중고등학교 6년을 영어를 연마한 학생들이 어메리칸을 만나면 단 한마디도 못하는 상황에 대해 학계는 여러가지 추론을 해왔다. 동방예의지국에 사대주의 정서도 있는지라 대화를 주도하기 보다는 경청해서 그렇다느니 동양인들은 내성적이라 자기 표현에 약하다느니 나름 난리BLUES였다.

허나 그간 영어의 문제들을 척척 극복해온 신동이 입장에서 볼 때 그런 학계의 추론들은 개소리였다. 영어신동인 내 입장에서도 미쿡사람이 솰라솰라 하면 80% 이상이 안 들렸다. "씨바... 뭐래는거야..ㅠㅠ" 수능 영어만점에 빛나는 내가 이정도니, 이건 국가의 명예 측면에서 보더라도 내가 솰라솰라를 못알아듣고 말도 한마디 못한다는 사실은 정말 국익에 반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영어신동의 영어회화 학원 탐방기가 시작된다. 처음 학원에 가자 상담실에서 언니가 물었다. "미(국)인 회화반을 원하시나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기왕이면 미인이면 좋죠." 아놔... 그 때 언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저넘은 시골마초임에 분명하다'는 눈빛이었음.)

어쨌거나 나는 이 시기를 회화학원에 돈퍼주기, 갖다 바치기...시기로 칭한다. 또한 이때를 갠적으로 내 멘탈에 대한 미국문화강점기로 칭한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할 수 있다면 닥치는대로 뭐라도 할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회화반 선생이 자기네 친구들이랑 밴드연주한다는 미국인 클럽에도 따라가서 음악도 듣고 미쿡선생님 친구들과 술마시며 내가 원어민의 일원처럼 보이면 겁나 흐뭇해하던 시기를 보냈다. (그 시기에 나는 술취해서 횡설수설하는 미쿡사람 첨봤다. 그 와중에도 나는 술주정도 명확히 듣기 위해 음주를 자제하고 귀를 쫑끗 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씨바.)

집에서는 비디오 틀면 자막 안보이게 TV 아래부분에 마분지를 붙여놓고 헐리우드 영화 눈에 단내나게 봤다. 미쿡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꿈도 꿀 정도였다.-_-;;;;; 언어란 게 참 재밌어서 영어를 배우려던 나는 미쿡 문화를 통째로 거의 흡수하다시피했고 나는 햄버거에 콜라를 먹으며 원어민의 삶을 동경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뼈속까지(투더코어~) 친미....처럼 보였다.(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럴 듯.)

그러나(다시 다크포스 스멜)... 휴학 후 나는 영어 침체기에 빠진다. 내게 있어 휴학기는 내 인생 최고의 폭풍독서시기로 정의되는데 그 때 불온서적 참 많이 읽었다. 뼈속까지 친미가 되어가던 내가 빨갛게 물드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두둔.



제4기: 침체기, 이른바 진보주의자 시기
폭풍독서기에 섭렵한 책들은 노암 촘스키(노안 아니고.), 하워드진과 같은 진보 지식인의 책들과 국내에 열풍이 분 안티조선운동의 멤버들, 이를테면 강준만, 진중권, 고종석, 김규항, 박노자 등의 책들을 흡수하던 시기. 오리엔탈리즘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등등 빈 대가리에 채워넣으면 넣을수록 우리 미쿡 친구들이 마구마구 싫어지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유학 준비 때문에 3-4번 갔던 미쿡땅도 그리 달갑지도 않았고 거기서 본 디즈니랜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라스베가스 등등. 다 나쁘게만 보였다. (당시에 나를 봤다면 미국에 간 북한사람 같은 느낌이었을거다. 미국에 사시는 이모가 현지 가이드를 해주셨는데 당시에 결례를 많이 했다. 이모는 개고생하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들으셨으니... 이모, 죄송합니다. 흑흑)

어쨌거나. 자연스레 미쿡에 대한 반감이 내 영어사랑에 제동을 걸었고 점점 영어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사실, 그런 맘도 있었다. 영어공부 할만큼 해서 나... 이정도면 됐지 않나. 영어회화만 5-6년 했는데 뭘 더 바래. 뭐 이런 생각?) 유학에 대한 기대치도 비슷하게 줄어들어 결국 대학원도 국내로 들어간다.

예전에는 미쿡사람만 보면 반가워서 겁나 말걸고 싶고 내 영어가 잘 먹히나 확인도 받고 싶은 충동이 컸는데(아... 창피하다) 그 시기에는 미쿡사람만 보면 왠지 내가 아는 지식을 다 동원해서 앵글로색슨족들을 까대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그래서 간혹 미쿡사람 길 물어보면 가르쳐주고 나서 "여기는 한국이니 니가 한국말을 배워서 물어봐야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흠흠... 그거 영작해서 외우느라 30분 정도 걸렸다.ㅋㅋ)

그러나(다시 다크포스...예감) 세상은 나에게 영어를 하라 하네...의 시기가 왔으니. 직장을 알아보다보니 영어점수를 내야 했고 나는 머리털나고 첨으로 토익을 봤다. 나의 영어신동의 기량을 보여줄 시험이라 여겨서 나는 건곤일척의 마음으로 시험을 봤다. 한달뒤 나온 점수는 695점이었다. 뭥미!!!!!



제5기: 토익시험 쪽집게 추종기
토익시험을 본 첫 인상은 그러했다. 일단 2시간 내도록 달려야 하고 화장실도 못간다는 규정? 지침?이 왠지 더 내 오줌보를 자극했다. 그리고 리딩파트는 인간적으로 너무 문제가 많아보였다. 눈알을 이경규처럼 굴려야만 시간내에 다 풀수 있겠거니 싶었다. 영어신동의 자체 평가와 달리 내 근방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다 푼 사람도 있었다! 뭐야 너도 신동이야?

그런데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글쎄 확 꽂힌 말이 있었다. "야... 진짜 다 나오지 않았냐? 나 반은 그냥 다 맞췄어." 허걱. 뭔소리야... 씨바 지금 문제 사전 유출이라도 했다는거야.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싸는 척하며 내 온갖 기를 모아 그들의 대화를 줏어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린 사람의 이름...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김.대.균...

집에가서 유사 인터넷검색사의 실력을 가진 나는 겁나 뒤져봤다. FTP 사이트며 웹하드, 대학원 연구실 네트워크...

유.레.카.

한때 김대균이 토익을 평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김대균이 유명해진 데에는 영어공부에 대한 그의 정공법과 더불어 꼼수가 공존함을 아는 사람은 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김대균은 거의 매달 토익시험을 봤고 그는 시험문제를 외워서 나오기를 거듭한다. 그가 깨우친 토익의 맹점이 있었는데 2달에 한번은 전세계적으로 치는 시험이지만 격달로 치는 시험은 그렇지 않아서 대체로 문제은행에서 뺑뺑이를 돌리는데 한국이 경우 그 전년도의 같은 달 문제가 절반 이상 출제됐다.

몇년을 시험을 친 김대균은 그 패턴을 알아챘던 거다. 그래서 2월에 시험을 치는 수험생들에게 전년도 2월에 출제된 문제들의 상당수를 알려줬고 그 문제를 풀어본 수험생들은 토익시험장에가서 자기가 아는 문제가 절반이 나온 토익시험에서 2시간을 여유있게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김대균은 토익시험에서 선호하는 답들을 DB화 해서 그 패턴을 알려줬다. 이를테면 "답 중에 instead가 있으면 그게 답이다" 뭐 이런 식이다.

물론 김대균은 이런 꼼수보다는 정공법을 더 강조했다. 본인도 그렇게 정공법으로 영어공부를 했기에 지금의 베스트셀러 선생이 된 것이고. 지금은 김대균 덕분에 토익시험도 자체 시험패턴들을 모두 바꾸었다. 허나 그의 꼼수가 사실 사람들을 모았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어쨌거나.

나의 식어버린 미쿡사랑과 김대균의 꼼수가 절묘하게 어울려서 나는 토익시험을 겁나 잔대가리 굴려가며 봤다. 내가 입사하기 직전에 받은 토익점수는 800점 정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난다. (나중에 더 얘기하겠지만 나는 영어를 공교육+사교육 토탈 10년을 공부했다. 내또래들이 공감할지는 모르겠지만 참 웃기는 일 아닌가. 뭐하나를 10년 공부했으면 거의 박사끝내고 포닥하고 있을 시기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그 점수로 회사를 들어갔다. 문제는 다시 발생하는데. 교육받을 때 사무실 배치받으면 적극적으로 의지를 보이라고 겁나 세뇌교육 시킨다. 나도 사무실 배치 받고 눈에서 레이져 뿜으며 대기하고 있는데 사수님이 물었다. "김용주씨 영어 잘하나?" 나는 질문이 뇌로 올라가기도 전에 대답했다. "네 잘 합니다." 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 이후로 나는 1년간 독일업체와 기술용역에 쓰임받게 된다.



제6기: 기술고문 응대시기~현재
독일 업체와 용역이 시작되었고 그날이후 '영어잘하는 신입사원'이 된 나는 신입사원인데 회의 때마다 끌려가서 회의록을 작성하고 파란눈의 아저씨들에게 업무적으로 말도 해야하는 위기일발...마징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문제는. 내가 하는 말에 따라 업무의 범위가 결정되거나 책임소지가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점. 특히 용역 계약서를 받고는 며칠을 혼자끙끙대야 했다. (영어잘하는 신입사원인데 계약서의 업무분장을 어떻게 하기로 한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되더군. 검은 건 글씨요 하얀건 종이로다... 아하하하하하)

특히 기억에 남는 일화. 업체선정을 앞두고 업체들이 제대로 자료들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사수의 지시에 따라 위협적인 메일을 보낸다. 오늘까지 자료 안 주면 업체 선정에서 배제하겠다는 게 메일의 내용이었다. 다소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자 현지 출근시간이 되자마자 업체 부사장이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근데 윗사람들은 퇴근한 상태였고 급기야 내가 전화를 받았다.

헬로 아이엠 솰라솰라.. 바이스 프레지던트 어쩌구... 니 메일 잘 받았다... 자료 바로 보내주면 우리 안 짜를거냐.. 뭐 그런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독일에서 직통전화가 온 게 당황스럽기도 했고 책임질 사수나 윗분들이 없이 내가 부사장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해야하는 상황도 ㅎㄷㄷ인지라. 허나 영어신동이자 영어잘하는 신입사원인 내가 아마추어같이 보이면 안 될 터. 여유있게 이야기를 재확인한 후 이야기한 내용을 내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으니 메일로 다시 보내달라, 처리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업체 선정에 짤릴까봐 걱정했는데 내 대답에 한숨 돌린 눈치였다.

근데 전화를 끊기 직전 나도 모르게 익숙하게 튀어나온 말이 있었으니 "thank you for calling."... 니가 전화해줘서 고마우이...ㅠㅠ 메일로는 너 기한 어겨서 짤리게 생겼다고 위협해놓고, 전화로 아,,, 전화해줘서 참 고맙습니다...라고 하니. 그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전화기에 대고 와하하하하하하...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you. are. welcome"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한국사람들은 땡큐-유어웰컴 구문이 도식화되어 있다는 걸 비웃기라도 하는듯.-_-;;;;;;

뭐... 그 외에도 머리를 쥐어뜯을 만한 일화들이 참 많이 있으나 과감히 삭제하고. 요즘은 기술용역, 기술고문 관련해서 간헐적으로 회의가 있다. 나는 영어도 잘 못하면서 영어잘한다고 떠들어댄 관계로. 아직도 끌려들어가는 편이다.

근데 이제는 좀 게을러져서 그런지 점점 영어가 콩글리쉬가 되어간다.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런 부분도 있겠고 예전에는 유창하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면 지금은 업무진행상 책임소지나 회의록 상에 명확하게 정리되는 게 중요하다보니 '말' 자체를 잘 하고자 하는 부분의 비중이 다소 떨어졌달까.

물론 아마 우리의 외쿡 아저씨들은 내가 영어 겁나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얼마전 회식자리에서 파트장이 나를 소개하며 "영어를 잘하는 친구"라고 말했는데 외쿡 업체 아저씨의 표정이 묘했다. 아마 "Do you?"라고 하고 싶었을거다.ㅠㅠㅠㅠ



작가 후기
결론적으로 나는 영어를 10년, 그것도 꽤나 하드트레이닝을 했음에도... 지금도 영어가 딸린다. 예전엔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또 딱히 그렇지도 않다. 원서를 보는 게 여전히 불편하고(지금은 아예 안 보는 편)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뭐라고 주절대는거야"하며 이해 못하기 일쑤다.

내 영어공부기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자기희화화이다.ㅡㅡ;;; 영어신동... 사실 무늬만 그런거다. 10년간 영어를 했는데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도 잘봤는데 영어를 대체 뭘 잘한다는 건가. 그렇다고 영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회화도 따로 공부해야 했고, 토익은 토익대로 꼼수로 공부하고. 참 웃기는 일이다.

한편으로 영어를 언어의 하나 정도의 위치로 놓자는 의견도 있다. 그냥 의사수단의 하나이지 않냐... 의사소통만 되면 되는거지 넘 열올려하지말자... 근데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와 직결된다.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예전 노트를 정리하다보면 영어공부 노트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때마다 내 머리속이 참 복잡하다.

아, 이 길었던 애증의 영어공부기여...(끝)
2012/01/20 18:34 2012/01/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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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지식은 실천성, 현장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쉽게 말해 '공부해서 남주자',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 고민을 하자는 것인데 반대로 말하면 실천성을 담보로 하지 않는 지식에 대한 반감 같은 게 있다는 말도 된다.

문제는 실천성이 담보되지 않은 지식들, 학문들도 세상에는 많다. 이른바 잉여, 유희를 위한 모든 지식행위들은 간접적으로는 사회를 즐겁게 해주고 기호를 고급화해주기는 하겠지만 직접적인 실천성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자연의 원리를 캐내는 것 자체에 침잠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앞뒤 안 보고 한우물을 파지않고 그 안에서 좋은 응용지식들을 얻고자 하는 사심으로 학문연구를 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정치적'인 접근일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공감하듯이 소설을 쓰거나 음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 행위도 반드시 실천예술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든지 이 생각을 어떻게 써먹을까 어떻게 구현할까에 몰입하는 행위는 학문을 실용적이냐 아니냐의 범주로 판단하게 만드는 지식의 '실용주의', '도구주의'의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실천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되지 않으나 그 역은 다분히 위험하고 협소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천성을 담보로 하지 않는 학문, 지식 습득에 대한 날을 세우고 사는 편이다. 대안없는 비판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비판을 시작했다면 대안을 고민하는 다음 단계를 밟아야만 하고 어떤 학문을 시작하든지 자신이 서 있는 그 물리적 자리에서부터 그 방향성과 실천의 부담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취미가 공부고 자기 지식을 널리 자랑하는 것을 즐거움, 나아가 사명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시작은 그리할 수 있겠지만 한 우물만 십년 넘게 파면서 여전히 공부를 위한 공부, 학문을 위한 학문, 유희와 잉여질에 머무르는 학문을 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실눈을 뜨고 그 의중을 의심한다. 이른바 '고급취미'를 가지면서 존경까지 받고 싶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내게는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화두뿐 아니라 실척적이지 않은 지식에 대한 비판 또한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옴을 부정할 수 없다.

2012년 1월 18일



#2.
어제 새로 오신 목회자님의 설교를 들었다.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내실있기 때문에 그간 부교역자 설교는 본인 입장에서나 성도들 입장에서도 부담 네지 긴장감이 있는 것이었기에 기대반, 마음비움반으로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설교가 시작되었고 새로오신 강도사님은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정통' 설교자의 면모를 보여주셨다. 사복음서 일화 중 하나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경험을 나누면서 풀어갔다. 때때로 본문과 좀 멀리 있어보이는 부분까지도 꼼꼼이 다루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무관한 본문이 아니어서 연관있게 들었고 설교의 후미에는 최근에 죽은 청년부 성도와의 일담까지 곁들여져서 많은 성도들이 눈물까지 훔쳤다. 머리속으로 이건 설교의 정석이야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전혀 감동이 되지도 마음이 움직이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물론 내 마음 밭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의 설교를 듣는 내내 나는 설교자의 욕망을 보았다, 아니 욕망이라기 보다는 설교에 대한 부담감을 보았다는 것이 좀더 유연한 평가이리라. 첫 설교에서 성도들의 감동과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소 과잉의 설교를 했다는 느낌 말이다. 특히 마지막 일화는 슬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실상 본문과 연결고리가 조금은 느슨해 보였다.

마지막 주기도문에 이르기까지, 첫 설교치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강도사님의 인도에서 나는 <나는 가수다>에서 가수가 펼치는 명경연의 느낌을 받았다. 이 설교로 강도사님은 자신의 기량을 백분 선보였고 다수의 성도는 만족스러워보였다. 근데 애석하게도 나는 마음이 식었다. 냉랭해졌다. 딱히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만 자꾸 어제 설교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2012년 1월 16일.

2012/01/18 21:36 2012/01/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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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복음과상황>의 10년이 넘은 필진이자 독자로서 그리고 편집위원의 입장에서 사죄를 구합니다.

<복음과상황>은 91년 창간된 이래 오랫동안 재정적 어려움을 면치 못했고 제가 필진과 독자모임 대표로 참여하게된 1999년 이후부터도 계속된 부채의 누적을 겪었으나 발행인과 이사회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때 복상독자모임에 참여하던 시절 독자들의 후원금을 모아서 이사회에 전달하는 이벤트를 한 일도 있었으며 급기야 2005년에는 폐간 위기에 처하여 보다못한 <뉴스앤조이>측에서 복상을 살리기 위해 자기 종이신문을 폐간하고 오프 매체 통합을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적자 누적으로 편집부와 출판디자인 업체 등등이 금전적 큰 피해를 입었음을 기억합니다. 당시 편집부는 1년 가량 급여를 받지 못했고 업체도 상당한 돈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뉴스앤조이>는 <복음과상황>을 살리기 위해 재정적인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복음과상황이라는 '개념잡지'를 먹으려 한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는 굴욕을 당한 바 있습니다. 물론 두레선교회나 학복협, 우창록 변호사 개인의 금전 지원을 희석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개신교계에서 복상을 자랑하고 복상에 발을 담그고 있던 구름같이 허다한 목회자 어른들이 잡지에 이름을 걸고 겉으로는 이 매체를 칭송하고 이 매체를 통해 드러냈던 거대담론들의 비판 이면에는 급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환경의 악독 기업의 얼굴이 숨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 글은 이 문제를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지강유철님의 지적에 대한 제 개인적인, 그러나 편집위원의 자격으로 쓰는 글입니다. 저는 신입 편집위원이며 이런 글을 쓸 자격 운운하시면 그에 떳떳하게 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허나 예전에는 저도 함께 잡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설 수 있었지만 잡지를 만드는 멤버가 된 지금은 마냥 뒷짐지고 뒷담화로 삿대질만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복음과상황>의 재정 적자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해당 편집부시절 실무진과 출판업체 및 뉴스앤조이 등 관련된 분들에게 사죄를 구합니다. 또한 매체의 '논조'는 진보적이고 원론적이고 복음주의적이었으나 매체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였음을 복상 독자들에게 사죄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고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마저 불경하게 만든 죄에 용서를 구합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함께 겪었지만 독자모임 이후로 이 문제를 공론화 하고 해소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편집위원이 된 저의 이중적 태도에도 용서를 구합니다. 잡지는 내용으로 말해야 하겠지만, 잡지를 만드는 이들의 현장 또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잡지가 좋아지는 것 만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거듭 사죄를 구합니다. 그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2012년 1월 4일.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김용주.
2012/01/04 21:35 2012/01/0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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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와 있을 때의 행복감 그 뒷면에는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touch가 있음을
나는 자주 깨닫는다.
성하를 간지럽히고 안아주고 만져주고
쓰다듬어주고 폭풍뽀뽀 작렬할 때
성하의 입장에서 느낄 감정을 관찰하고
추정하며 나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나를 아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내가 잘 때나 퇴근했고
아버지가 '우리 애들'이라고 말하면
누나와 내가 아닌 회사 직원들을 지칭했고
대체로 술취해서 들어오셨고
상당 기간 집에 와서는 어머니와 싸웠으며
내 친구의 이름이나 내가 좋아하는 일체를
알지 못했다.


가끔 나는 아내에게 성하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다.
물론 그 때는 아내가 성하를 대하는 모습이
남편인 나를 대할 때보다 더 부드럽고
애정가득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잠들고
밥먹고 같이 놀던 경험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나의 내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좋은 교훈이나 법칙, 지식보다는
좋은 유년시절의 정서를 주고 싶은
아내와 나의 바람.
한편으로 그 씁쓸한 바람은
내가 성하에게 해주면서도 유체이탈하여
그것을 누리고 있는 '셀프 쓰다듬'에 다름 아니다.^^


단 한번도 아버지는 내가 울때 꼭 안아준 적이 없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성하가 울어서 꼭 안아줬다.
진정...주면서 치유되는 '셀프 쓰다듬'이다.

2011/12/15 21:34 2011/12/15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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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참 배울게 많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책'만' 읽는 사람에게는 참 배울 게 없다는 생각도 한다.

김두식 교수님은 몇년전 예수원이라는 기도원에서 경험한 일을 잡지에다 기고한 바 있는데... 평소 그렇게 기도도 열심히고 입만 열면 잘난 척하던 목사들이 노동시간만 되면 다들 뒷걸음질을 치는 반면 매일 공사판에서 일하던 일반 성도들은 나서서 고된 일들을 자처하는 모습에 대해 은근히 꼬집은 바 있다.

모 편집부에 갔더니 점심시간에 남성 편집부장은 신문보고있고, 여자 직원들이 밥상을 차리더니 밥먹고나서도 그분은 커피마시며 노닥거리고 여성들만 설거지에 뒷정리하더라는 이야기를 주워 들은 적이 있다. 아는 목사님 한분은 하루종일 엄청난 양의 독서를 즐기시지만 정작 아내가 집을 비우면 청소나 설거지도 안 하고 아이들도 방치한채 계속 책만 보다가 식사도 배달음식만 드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쯤되면 도대체 책을 통한 지식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노동과 공동체적 봉사를 '제거'해주면서까지 이들을 사회적 응석받이로 키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책이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대리충족시켜주지만 그 대리경험에만 빠져서 대리경험적 지식들만로 자신을 가득채운 형이상학적인 인간으로 '승화'하면 안 되겠다는 반성도 해본다.

'배워서 남주자'는 모토도 그렇다. 배워서 남주는 건 좋은데 그 지식의 전달, 혹은 '이식'이 마치 게임에 미쳐있는 초등학생들이 스스로 더 높은 레벨에 쉽게 올라가는 법을 공유하는 수준의 낮은 사회성, 실천성을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전문용어나 수많은 저자 이름들 속에서 우리가 피부에 와닿게 배울 점을 찾지 못한다면 그건 한낱 아이큐 자랑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페이스북 노트글. ('11. 12. 6)

2011/12/06 21:34 2011/12/0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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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이 석자를 읽으면 은연 중에 나는 '터번을 뒤집어쓰고 총구를 겨눈 테러리스트'가 떠오른다. 미디어 비평서들을 읽기 전까지는 사실 이런 부분에 대해 특별히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람보나 다이하드, 007 시리즈 등 대부분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무기밀매를 하고 미국의 주요도시에서 테러를 자행하는 모든 세력들은 하나같이 다 이슬람 출신이었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이슬람 사람들은 파티에서 점잖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타나 총질을 해대는 이중인격자로 스크린에 나타나기 일쑤였고 이런 영화들에 길들여진 나는 자연스레 그런 인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와는 반대로 한때 우리나라에는 거리를 지나가는 미국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노자 교수의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한국인들은 지나가는 미국인들을 보면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면 미국인에게는 자기가 한국 문화나 생활을 위한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이른 바 '친구 거래'를 제안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도 유색인이 아니라 주인공인 백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백인들 옆에서 함께 웃으며 대화하는 자신을 매순간 상상하다가도 스크린에서 남미, 혹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왠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쉽게 타자화시킨다는 말이다. 이런걸 두고 '옥시덴탈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이 그렇다. 지구의 정반대편에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술술 꿰고 있어도 동남아시아나 중동 지역의 역사나 문화, 국가들의 수도나 대통령 이름은 모르기 일쑤다. 어찌보면 유색인종으로서 그들이 우리와 더 가까울 텐데 정작 아프리카나 중동, 특히 이슬람 세력에 대한 무지, 나아가 반감이 국민 정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그 이면에는 무슬림에 대한 종교적인 적대감 또한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허나 이러한 적대감도 따지고 보면 어느 정도의 '편견'을 내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이쯤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이 올 것이다. 그래,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고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영화나 문화 컨텐츠로 인해 어느 정도의 편견마저 가지고 있으니 이슬람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헌데 그 편견 정화작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던 차에 이슬람에 대한 교과서격인 책이 나왔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와 이슬람을 친절하게 비교하며 설명하는 책이.


2.
본서 <기독교와 이슬람 그 만남이 빚어낸 공존과 갈등>(세창출판사)의 저자 김동문은 중동 전문 기자로 불린다. 그는 요르단에 머물면서 <한겨레21>의 전문위원이면서 <미디어 오늘>과 <오마이뉴스>, < 뉴스앤조이> 등 온오프라인에서 중동전문기자로서 중동과 이슬람 바로 알리기 작업에 매달려왔고 최근에 귀국하여 본서를 출판했다. 그의 기사들을 간간이 접했던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2004년 김선일씨의 피랍사건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다. 미디어오늘의 이수강 기자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동문제 전문 자유기고가이자 기독교 선교사인 김동문씨는 당시 요르단에 있었다. 21일 미디어오늘과 칼럼 기고 건으로 통화를 했을 때, 김씨는 당시 한국 언론이 무차별로 쏟아내던 보도와 달리, 김선일씨는 5월31일에 피랍됐다는 등 자신의 취재 결과를 '오프 더 레코드'로 일러주었다...(중략)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취재한 '5월 31일 피랍'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간곡하게 요청했다...(중략)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다. 피랍 시점 논란이 자칫 송환 협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난 6월 22일 KBS <뉴스9>에 "5월 31일 피랍 주장"이 보도됐다. 국내에 있는 기자가 현지 교민 두 사람의 증언을 딴 리포트였다. 이 기사는 지난해 6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이 보도에 대해 "김선일씨 피랍 의혹에 대한 최초의 문제제기"라면서 "이 사건에 관한 '유일한 특종'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말했다(기자협회보).

판단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말대로 본다면 김동문씨는 '유일한 특종'을 스스로 걷어찬 기자다. 기사를 발표할 지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김씨는 개인적으로 김선일씨와 대학 선후배 관계(한국외대 아랍어과)이자 지난해 2월 바그다드에서 만난 적도 있다고 했다. 보통 언론계에서 말하는 "얘기가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중동전문 자유기고가로 살아가는, 중동에서 기독교 선교사로 생활해온 그의 어떤 '자세'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2005년 6월 미디어 오늘, '있는 그대로 아랍과 이슬람을 보자')

그는 중동에서 기자로 활약했지만 한편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나왔고 이른바 기독교계에서는 선교사로도 불린다. 하지만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 그간에는 도리어 기독교계에서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본서에서도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립'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일례로 그는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이 성직자가 없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직이 엄연히 존재하며 사례비(월급)도 받는다는 점을 언급하는가 하면 지하드(성전)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슬람과 견주어 볼때 기독교도 십자군 전쟁과 같이 불의한 전쟁을 여러 차례 수행했으며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수만 명의 여성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기독교의 역사또한 공정하게 다룬다.


3.
물론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균형' 혹은 공정성을 유지함에 있어 나름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원칙에 준하여 두 종교를 평가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를테면 "자신의 언어로 된 경전을 갖고 그것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는 개인이나 집단의 종교생활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특정 권력 집단의 전유물이 되곤했다. 기독교나 이슬람 세계 모두에 경전을 장악하려는 이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종교 권력자들이 독백처럼 교리를 설파하는 것은 어떤 종교든 옳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정교 분리 논쟁을 다루면서는 "정치와 종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권력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권력욕을 감추기 위하여 수많은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고 지적하며 두 종교를 비교한다(물론 역사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이러한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이러한 원칙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기독교 정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혜안을 주는 듯 하다).

또한 저자는 이슬람에 대한 오랜 편견들을 걷어내는 데에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이슬람 국가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며 그들의 종교전통을 강요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허나 저자는 이슬람 세계가 우리의 생각처럼 단일 창구의 구심점이 없고 오히려 국가마다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이슬람법과 정신에 의해 국가를 통치한다고 선포한 나라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모리타니, 이란, 아프가니스탄, 예멘, 파키스탄 6개국에 불과하고 그 외에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타종교로 개종할 수 있는 나라도 있으며 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은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세속적 국가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이슬람 하면 일부다처제의 나라라고 치부하나 실제 일부다처제는 10% 내외로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라는 사실과, 흔히 여성의 가리개로 일컬어지는 '히잡'을 통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편견에 대해서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 더 많이 가리려는 추세와 현대적으로 개방하려는 형태 - 이 공존함도 설명해 준다(저자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히잡'(가리개) 사용을 강제 규정하며 튀니지 정부는 비슷한 전통 복장인 '니깝' 착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본서의 가장 큰 묘미는 저자가 추구하는 현장 중심의 관점들이다. 허나 그는 거시적인 역사로서의 이슬람의 모습도 깊게 연구하면서 이와 더불어 실제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서 함께 호흡하며 경험한 디테일을 적절하게 조화시킨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가히 '올 어바웃 이슬람' 혹은 현대 이슬람에 대한 교과서격의 책이라고 칭할 만 하다). 사실 이슬람에 대해 어느 정도 깊게 공부한 이들은 자신들이 공부한 거시적 역사 내용을 인용하고 재구성하여 얼마든지 대중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글이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이슬람 국가들의 캠퍼스 풍경이 어떤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연애는 어떻게 하는지, 물담배를 피는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 이슬람은 현대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등을 서술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실제로 발품을 팔아 찾아다니고 이슬람 사람들과 대화하며 얻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들이 책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일상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저자의 기지가 돋보이는 대목 또한 많다. 때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몇 가지의 사례만을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새로 생겨난 신종 서비스가 이른바 (사원의) 자리 잡아주기 서비스. "명당자리 팔아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사원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고 자리를 맡아주고 자릿세를 챙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전화벨소리에 꾸란이 낭송되고 있다. 최근 제공되고 있는 이슬람 지역의 벨소리 서비스 때문이다."

"4-5년 전부터 몸의 선이 노출되는 꽉 조이는 옷을 입거나 아니면 아예 옆구리 터진 옷들을 입는 여학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질밥(겉옷)과 히잡 등으로 온 몸을 잘 감싼 여학생들의 수도 동일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캠퍼스) 커플족은 당연이 부러움의 대상이다. 짝없는 남학생들은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하릴없이 애꿎은 담배만 불에 태우고 있다. 짝 없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오가는 여학생들 감상에 정신을 잃고 있는 경우도 많다."

"(라마단 기간에) 해질녘을 30~40분 남겨둔 오후 5시경부터는 KFC나 맥도날드,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 전문점은 음식을 주문하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먹는 장사는 평소보다 30~40% 이상의 매상을 올리는 분위기다. 해가 지면 금식을 풀고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4.
최근 국내방송 <스타킹>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18세 소녀 "루비의 꿈"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기관총을 든 아랍 복장의 남성이 MC 강호동을 위협하는 장면 등을 내보내 이슬람 문화 비하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는데, 한류 열풍에 힘입어 이 방송이 중동 지역에서도 소비가 되었다는 점도 흥미롭고 이를 의식한 SBS에서 즉각적으로 이슬람어로 사과문을 발표했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물론 여전히 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처럼 이슬람을 떠올릴 때 터번을 쓰고 기관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사실 이슬람은 커피와 설탕, 맥주와 포도주를 유럽으로 소개한 원조이기도 하다. 또한 유대교, 기독교와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갈등과 공존을 모색해 온,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참 얼굴색 만큼이나 친숙한 종교이자 삶의 체계이다. 이러한 이슬람을 특정한 프레임에 국한하여 해석하거나 여전히 '테러리스트의 소굴', '악의 축'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총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정당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들이 상당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그게 오랜 시간 이슬람에 거주하며 이슬람을 경험한 저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책을 맺으면서 한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한국인들이 우리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 세계 출신 이주자들을 선입견을 넘어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는다. '무슬림이니까...'라거나 '이슬람은...' 이런 식의 기계적이고 선험적인 잣대를 조심하기 바란다. 다수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을 대표하여 이곳에 있지 않다. 이슬람 전사로 우리 곁에 자리한 것도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또다른 인격체로 함께 하고 있다."
 
2011/11/28 01:46 2011/11/28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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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 집사님. 안녕하셨는지요. 김용주입니다. 일전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쓰셨을 때 뵌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출판하셨더군요. 저도 본서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으로 본서를 읽고 크게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또한 동일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공감하는 부분은 북미 복음주의의 신학적 가벼움입니다. 본서에서는 "마케팅에 물든"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 기독교계의 소비자중심주의적인 신앙의 성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미국에 세차례 정도 짧게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미국의 한인교회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를 보았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실용주의적 사고와 노만 빈센트 필로 대변되는 "적극적 사고방식", 내적 치유와 자아 회복이 죄성과 복음을 대체하는 성향들을 보았습니다.
미국은 정말 상담과 심리치료의 천국이더군요. 저는 이러한 심리적 기재에 기댄 교회의 문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물론 심리학 자체에 대한 평가에서는 옥 집사님과 차이가 있음을 이전에 출판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느낄 수도 있었지요.

또한 저는 본서에서 지적하고 싶은 몇 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너무 부족한 관계로 글을 몇 번에 걸쳐 나눠 쓰려고 합니다. 제가 본서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 중 첫번째 것은 교리와 교파에 관련된 것입니다. 앞서 강진용 님이 지적해 주셨기 때문에 그 글을 먼저 인용합니다.

"아마도 저자께서는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입장에 있는 듯 보입니다.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웨슬리안 전통에서도 인간은 역시 전적 타락한 존재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행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가졌다면 "웨슬리"가 영국사회에 회개를 선포할리 있겠습니까? 아마도 마케팅교회들이 가진 인간론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유주의자 역시 웨슬리나 알미니안을 따르는 것이 아니구요. 개혁주의 입장에서 간혹 펠라기우스와 웨슬리안-알미니안의 차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 듯 보입니다만, 이 사이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냐 아니야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제 생각엔 웨슬리안-알미니안에서의 복음적 신인합동설과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예정론의 차이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특히 저는 칼빈주의와 구별되는 가톨릭, 성공회나 루터교, 웨슬레-알미니안 등의 교리적 차이에 의해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옥 집사님의 경우에는 교리의 수호를 위해 분리적인 태도를 취했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나 저는 오히려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존 스토트 목사의 입장을 따르는 편입니다.존 스토트의 말년 저작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지적한 내용에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나는 이제 쓰려고 하는 글에서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사상계(가톨릭, 자유주의, 복음주의)가 항상 상호 배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님을 잊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차이점과 더불어 합일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지지하는 것과 절대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종교개혁의 많은 진리들을 여전히 확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주의의 모든 핵심 진리가 복음주의만의 독특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방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헐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중략)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비록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적인 방침과 종종 원칙없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교회 연합 운동에서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확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분별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해 왔다."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교리, 이를 테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구원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성령의 주되심과 같은 핵심적인 교리에 있어 합의점에 도달하는 교회와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하나됨 안에서 충고와 책망 그리고 격려가 필요하겠지요. 제가 느끼기에 옥 집사님의 글에서는 그러한 하나됨 안에서의 책망과 건설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다소 분리주의적인 자세로 교회답지 않은 pseudo(사이비) 교회들을 칼빈주의 교리의 입장에서 분리시켜내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따라서 그러한 칼날로 작용하는 교리에 대한 불편함이 제 심정적 반감을 불러오는 듯 합니다. 물론 혹여, 제가 옥 집사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제 독해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더 이야기해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복음주의권 내부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본서에서 비판하고 있는 빌리 그레엄 목사로 대변되는 신복음주의 진영의 이들이 그렇습니다. 빌리 그레엄 목사도 그 분명한 한계와 많은 대형 집회 전도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분명 그 분이 20세기가 낳은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지의 편집장으로 있었던 필립 얀시와 씨 에스 루이스, 그리고 본서에 언급된 릭 워렌 목사와, 빌 하이벨즈 목사도 그렇습니다. 저도 이들에 대해 동일하게 비판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종종 본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신복음주의, 성공회, 가톨릭, 웨슬레주의자들과 분리되어야 함을 옥 집사님은 주장하시려는 듯이 읽혀집니다.

물론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명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서문에 보면 영국 복음주의 학생운동 역사 가운데 CICCU가 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었던 SCM으로부터 구분지어 나온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그 때에 구별되어 나온 이들의 수는 극히 소수였으나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유지했던 그들이 더 크게 부흥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분수령에 있어 옥 집사님은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보수적 입장에 교리를 국한 시키는 듯 하며 저는 좀더 넓은 범주에서 은사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도와 급진적 복음주의자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연합 집단에서도 옥석을 가려야 함은 자명합니다. 신앙의 스펙트럼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옥 집사님의 입장에 제게는 구획의 측면에서 너무 좁게 잡으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혹은 칼빈주의를 정답, 정교리, 정교파로 확정짓고 나머지 교회들을 그 틀로 쳐내려는 듯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케팅에 물든"의 잣대로 시작된 본서는 교파를 구분하면서 "오래된 복음주의" 대 "신복음주의" 혹은 그 외의 교회들(가톨릭, 웨슬레주의, 에큐메니칼 등)으로 확장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케팅에 물든"이라기 보다는 "교리에 차이를 보이는"으로 대체되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 교회 내에서도 "마케팅에 물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강하게 보이는 교회들이 많은데 이는 그 구획에서 논리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첫번째 제 생각은 이 정도까지 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다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부흥과개혁사 홈페이지에 있는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에 올린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http://rnrbook.com/
2011/11/27 18:32 2011/11/27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