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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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 생각이 든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나 관계, 사랑, 신뢰와 같은 것들은 시간이 조금은 지나야 그 핵심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결국 현재로서는 그 궤적을 잘 기록해두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
('12. 7/6)

#2.
요즘 책이 손에 안 잡힌다. 활자울렁증 같기도 하고. 근본적으로는 일상적 자각없는 담론들을 많이 목격해서 그런지. 성추행 목사,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자기 화를 아이에게 쏟아내는 부모. 수신제가가 안되는 주댕이들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서글픔이랄까
('12. 7/9)

#3.
플래너를 쓰면서 느끼는 건 시간관리를 하기엔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관계, 고민의 흔적, 그 시기의 중요한 메모들은 정리하여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점이다. 일기말고 한 개인의 이력,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는 기록 방법은 없을까
('12. 7/9)

#4.
어제 아내에게 요즘 내가 뉴스타파도 안 보고 심지어 나꼼수도 올라오자마자 바로 듣지 않고 묵혀둔다고 불만을 내비쳤다. 나는 (독학의 혜안으로) 현재 진보의 폭로 이슈들이 장기화되면서 나를 포함한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는 얘길 했다.
('12. 7/10)

#5.
가끔 스스로가 정말 특별하고 독특하다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굳게 믿는 사람을 만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며 섣불리 타인을 자신의 사고 안에 가두려는 사람도 만난다. 가끔은 양손에 넣고 흔들어 둘로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12. 7/10)

2012/07/10 21:44 2012/07/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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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1'이 완결편이었다면 그 주제는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3부작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다' 내지는
'우리는 기계문명과 상생해야 한다'가 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과 같은
말들 속에 내포된 IT에 대한 정서적 반감, 아날로그적
... 감성에 대한 지나친 향수 등이 불편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이유로 인터넷에 접속한다.
'접속' 자체를 게임이나 killing time으로 여기는 것은
전자신호를 '0'과 '1' 그 자체로 치부하려는 것만큼 어리석다.

CD를 그렇게 비난하던 LP 매니아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예술가들도 이제는 컴퓨터로
자신의 창작물 작업을 한다.
수백년된 악기의 소리를 완벽하게 재현하거나
환상적인 photo들도 디지털 작업을 거친다.
물론 직장생활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자료와 보고서
노하우들은 디지털 문서이다.

가끔 IT를 감성적으로 배척하고 비판하는
일반적인 시각은 IT를 필요악으로 설정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컴퓨터에 앉아서 '버리는 시간'
을 모으면 휴머니즘이 되살아나리라는 기대감.

난 그 기대감도 하나의 허구라고 본다.
Homo Faber...
인간의 정체성에는 도구가 항상 자신의 몸처럼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IT가 인간을 인간성을 삼킬 것처럼 떨지만
IT 뒤에 숨어서 IT의 해악을 조종하는 것 또한
인간의 멘탈 그 자체가 아니던가.

인문학적 감성, 아날로그적 감성을
어떻게 기술문명 '안에서' 구현할지를 고민하는 게
나는 더 정직하고 건강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포드주의를 넘어 IT혁명기 깊숙한 시간을 지나는
우리 세대는 여전히 자크 엘룰이 말하는
'기술 사회'의 해악을 원론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중 다수는 아이폰과 맥북으로 소통하고
전자책에 대해 고민하고 클라우드 컴퓨팅을 활용한다.
디지털로 터치된 음원, 포토샵 처리된 사진.
식당, 기차, 비행기, 호텔 예약에서부터 여행 사진을
공유하는 모든 과정 과정마다 IT는 스며들어있다.

나는 지금이, IT의 첨단 도구를 구현한 인간이
이제는 기능보다 더 고차원적 상상력을 발휘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이미 패러다임은 그렇게 변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수는 여전히 그 패러다임의 변화를
'변절'로 여기는 듯 하다.
2012/07/10 21:44 2012/07/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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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고의 연애 영화는 '이것'이다!"라는 주제로
페친들에게 의견을 물은 결과 아래와 같은 영화리스트가
만들어졌습니다.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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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섬머
러브 어패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프 온리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타이타닉
클로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사랑을 놓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에브리원 새즈 아이러브유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그녀에게talk to her
히 러브즈 미
블루, 레드, 화이트
해피 투게더 (왕가위 감독)
굿 윌 헌팅
패밀리맨
광식이 동생 광태
아는 여자
번지점프를 하다
호우시절
만추
북극의 연인들
레옹
연인
워크 투 리멤버
어바웃 러브
우리 사랑일까요
말할수 없는 비밀
냉정과 열정 사이
봄날은 간다
파이란
섹스 앤 더 시티
애수
브리짓 존스의 일기
기쁜 우리 젊은 날
씨네마 천국(감독판)
첨밀밀
러브 액추얼리
브로크백 마운틴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노팅힐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센스 앤 센서빌리티
오만과 편견
원 파인 데이
프랭키와 쟈니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화양연화
세렌디피티
노트북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지금 만나러 갑니다
레터스 투 줄리엣
어톤먼트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좋아해
러브레터
4월 이야기
첫 키스만 50번째
워크 투 리멤버
세인트 클라우드
책 읽어주는 남자

2012/07/07 22:46 2012/07/0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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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단상.
 저는 6.25를 경험한 세대의 정치적 보수성을 인정하려는 편입니다. 젊은 세대의 극우성은 논쟁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이지만 6.25를 경험한 세대의 어른들과는 논리를 넘어선, 그들만의 전쟁 경험에서 생긴 상처난 신념, 정서를 품어야 하지 않나...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이는 제가 기본적으로 광주민주항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전라도 분들에 대한 국가 사회적 이해, 포용의 필요성과 맥락이 같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자녀가 죽거나 헤어지는 가족 붕괴의 사적 고통들을 경홀히 여기는 어떤 이념이나 진영도 결코 옳을 수 없습니다.



단상.
나또한 개혁, 발전, 성장, 진일보.. 이런 단어들을 들으며 바쁘게 어딘가로 달려가는 이십대를 보냈다. 그렇기에 때때로 주변에서 만나는 이십대는 그저 표류하는 배, 난파선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당연히 부정적으로 보였다.

내 이십대에는 항상 할 일이, 아니 해야할 당위적인 일들이 내 삶을 가득채웠고 삼십대에야 비로소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삶이 나를 짓누른다는 것을 알았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음. 제자리 걸음, 더딘 행보... 나아가 고통의 순간순간을 단지 버티는 것. 뒤로 밀려나거나 설령 물러나더라도 줄을 놓지 않는 것. 그저 하루하루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 이것이 참 가치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2012/06/25 21:43 2012/06/2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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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집단 지성의 결과로 정리한 페친들이 애정하는 여성 글쟁이들을 모아봤습니다.
블로그에도 올리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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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정신분석이라는 전문영역을 맑은 정서적 감성으로 전달하는 정신과전문의이자 정신건강 컨설팅 기업인 ‘마인드프리즘㈜’의 CCO(Chief Contents Officer)이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으며 연세대와 아주대 의대 외래 교수를 지냈다. 1996년부터 여러 기업의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자아경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연구한 'ADD 증후군'을 제기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밖에 기업경영에 정신의학을 접목시킨 '심리경영' 등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남자 vs 남자』『사람 vs 사람』『삼색공감』『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공저) 『홀가분』등이 있다.
 

정희진
 여성학은 하나의 분과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정폭력과 여성인권』,『페미니즘의 도전』을 썼고,『한국 여성인권운동사』,『성폭력을 다시 쓴다』을 엮었으며, 그 외 여러 책을 함께 썼다.

김현진
 이제 막 삼십대에 접어든 글쟁이다. 1999년, 강압적이기만 한 고등학교를 박차나고 나와 『네 멋대로 하라』를 쓴 이후로 줄곧 글로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88만원세대를 대표하는 그녀는 늘 거친 현실과 사투를 벌이듯 뜨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집도 절도 돈도 빽도 없이 도시빈민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가진 건 없어도 긍지는 있다고 자부한다. 거침없이 솔직하고 당찬 그녀의 글은 그런 특유의 굴하지 않는 강인함에서 나온다. <한겨레><시사IN> 등에 칼럼을 써왔고, 2011년 현재 <경향신문>에 기고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불량소녀백서』『질투하라 행동하라』『그래도 언니는 간다』『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김현진의 B급연애 탈출기』 『뜨겁게 안녕』 등이 있다.
 

조한혜정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남.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UCLA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를 수료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음. ‘또 하나의 문화’를 통해 여성문화,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담론들을 제시하고 생산해 왔음. ‘하자센터’를 통해 작업장 학교라는 대한학교를 설립하고, 노리단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발족시켜 청소년 문화운동과 대안교육의 다양한 실험을 해옴. 현재 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우정과 환대가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복원을 꿈꾸고 있음. 저서로 <한국의 여성과 남성>, <성찰적 근대성과 페미니즘 ― 한국의 여성과 남성 2>, 연작 형태의 문화 비평서인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1·2·3>, 교육 현장을 다룬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가 있으며, 마거릿 미드의 <세 부족 사회에서의 성과 기질>를 번역했다.

김혜리
 서울에서 태어나 역사를 공부하고 영화잡지 기자가 되었다.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다. 『씨네21』을 만드는 과정에서 쌓인 글을 묶어 리뷰집 『영화야 미안해』, 인터뷰집 『그녀에게 말하다』 『진심의 탐닉』을 책으로 냈다. 영화 속 한 컷을 관찰한 짧은 에세이를 모은 책 『영화를 멈추다』가 『그림과 그림자』와 사촌에 가깝다.
 

목수정
 목수정은 공연 예술, 문화 정책 분야에서 일하다가 현재 파리에서 문화, 여성, 정치 분야의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나이 차가 스무 살 넘게 나는 프랑스 남자와 비혼인 채 아이를 낳고 사는 만만치 않은 미션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성의 사랑학》 등이 있다.
 

장영희
 1952년 9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서강대 영미어문 전공 교수이자 번역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영미시 에세이 《생일》, 《축복》의 인기로 ‘문학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하여 ‘한국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에는 월간 <샘터>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첫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을 펴냈다. 이 책으로 2002년 ‘올해의 문장상’ 제 1회 수상자가 되었다. 2003년에는 아버지인 故 장왕록 교수의 추모 10주기를 기리며 기념집《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엮어 내기도 했다. 마지막 수필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완성해 희망의 빛을 남기고, 향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타계 후 1주기 기념 유고집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가 출간되었다.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1년 1월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였다.
 

김류미
 강남이 허허벌판일 때부터 거기 살았고 반지하 자취생활을 거쳐 다시 강남에 산다. 몇 년 간의 알바 인생에서 얻은 좌우명은 ‘일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였다. 졸업 후, 1년간 희망청에서 일하며 ‘88만원 세대’라는 접점을 고민했다. 블로그질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트윗질에 집중하는 편. 구원 같았던 책을 만들고 소개하며 마침내 쓰게 된 행운도 누렸지만, 여전히 좋은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여전히 하루하루가 산만하다. 저서로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가 있다.
 

노혜경
 시인. 정치에 사랑이라는 담론을 이끌어들인 노사모를 만드는 데 기여했고, 말과 글과 삶의 일치를 통해 지식인의 실천을 꿈꾼다. 탈근대의 정치는 시(詩)여야 한다고 믿는다. 지은 책으로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 <뜯어먹기 좋은 빵>,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등이 있다.
 

강금실
 1957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75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197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여 1981년 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1995년 판사로 재직(1994~1995 서울고등법원 판사)하였고, 2000년에는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를 맡았고, 2001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첫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현재 여성인권대사, 아시아재단우호협회 이사, 법무법인 우일아이비씨 고문 변호사를 맡고 있다.
 

고은광순
한의사, 마인드 힐링 전문가. 1955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2회 구속, 2회 제적됐다. 1984년 대전대 한의예과에 입학,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한의사협회와 한국한의학연구원 감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해 호주제 폐지, 부모 성 함께 쓰기, 종교법인법 제정 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충청남도 시골에서 솔빛한의원을 운영하며 빛사람수양회를 이끌고 있다. 또 새로운세상여성연합 대표로 여성평화행복학교를 운영하며 한겨레 휴센터와 공동 주관으로 ‘고은광순과 함께하는 여성 건강 교실’(2박 3일)을 열고 있다. 곧 충북 옥천 지역에서 공동체 마을을 시작할 계획이다. 저서로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등이 있고, 《펄루, 세상을 바꾸다》 《그래도 내일은 희망》 《웃을 순 없잖아!》 《엄마가 결혼했어요》 등 청소년을 위한 번역서가 여러 권 있다.


김형경
 소설가이자 시인. 1960년 강릉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3년 《문예중앙》에 시가, 1985년 《문학사상》에 중편소설 《죽음 잔치》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3년 첫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제 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세월》,《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외출》, 《꽃피는 고래》를 발표했고, 창작집 《단종은 키가 작다》, 《담배 피우는 여자》,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 등을 펴냈다. 심리 에세이로 《사람풍경》, 《천 개의 공감》, 《좋은 이별》,《만가지 행동》이 있다. 제10회 무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권윤주
고양이와 재즈, 카페를 사랑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카투니스트이다. 대학 졸업 후 각종 일러스트레이션과 캐릭터 작업을 해왔다. 만화 웹진 <넷터치 코믹스>에 카툰을, 영화 잡지 FILM 2.0에 '스노우캣의 영화일기'를 연재했다. 그녀는 자신의 홈페이지 http://www.snowcat.co.kr/ 에서 Snowcat이란 이름으로 일상생활을 잔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노우캣은 네티즌들 사이에 '귀차니즘', '귀차니스트'라는 말을 퍼뜨렸으며, '혼자 놀기'와 '카페 놀이' 등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작품집으로 <Snowcat in New York>, <Snowcat의 혼자 놀기>, <Snowcat in Paris>, <Snowcat Diary>(1·2권), <To Cats 고양이에게>가 있으며, 삽화를 그린 책으로 <웃지 마 나 영어책이야>, 표지 그림을 그린 책으로 피터 게더스의 <파리에 간 고양이>,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 등이 있다. 2002년 제1회 독자만화대상 온라인 만화상, 2006년 제24회 프랑스 3천만 동물 친구들을 위한 재단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여진
영화배우. 2011년 부일영화상, 2002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2000년 대종상영화제, 1999년 춘사대상영화제, 1998년 청룡영화상 수상. <청춘콘서트 2.0 청춘, 외치다>에서 ‘행동하는 청춘 Action!’이라는 내용으로 청년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의제와 행동을 제안하는 액션토크를 서울에서 진행하였다. 청년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대안을 함께 만들어나갔으며, 정의로운 영혼이자 행동하는 여배우로 불리고 있다. 다수의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쌓았고 영화, TV 등 다양한 매체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여배우다. @yohjini

 
나임윤경
 연세대학교와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교육학과 성인(여성)교육학을 공부했으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일, 대한민국 여성들의 현주소를 성찰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바꿔나가는 일에 열정적이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젠더연구 입문』, 『여성교육 개론』, 『여성커리어와 리더십』과 같은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여자의 탄생』, 『여성교육과 실천』, 『여성과 남녀공학대학교의 ‘공정한’ 만남을 위하여』등이 있다.
 

공지영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착한 여자 1,2권》《고등어》《봉순이 언니》《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즐거운 나의 집》《도가니》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별들의 들판》, 산문집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상처 없는 영혼》《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등이 있다. 21세기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제10회 가톨릭문학상,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김려령
 서울예술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마해송문학상,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첫 소설 『완득이』가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까지 아우르며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대표 작품으로『우아한 거짓말』,『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기억을 가져온 아이』, 『요란요란 푸른아파트』,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가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2012 I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어너리스트’로 선정되었다.
 

나희덕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이 있고, 산문집 『반 통의 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편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유리병 편지』등을 펴냈다. 2011년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산문학상, 2003년 현대문학상, 2001년 김달진문학상, 1998년 김수영문학상,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상.
 

유인경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경향신문 여성부 부장을 거쳐, 현재 경향신문사의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유인경의 해피먼데이>, <웬수들과 살기>, <내 인생 내가 연출하며 산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등이 있다.
 

어슐러 르 권
 1929년 10월 21일, 미국 버클리에서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와 작가 디어도어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장 이른 작품들은 <오시니아의 이야기>와 <말라프레나> 등에서 다시 보게 되듯 가상의 나라를 배경으로 하기는 하지만 판타지가 아니었다. 관심사를 살려 출판할 방법을 찾던 르 귄은 초반기 과학소설에 대한 관심을 돌이켰고, 1960년대 초반부터 정기적으로 출판을 하기 시작했다. 르 귄은 1969년에 출간한 유명한 과학소설, <어둠의 왼손>으로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에서 백만 부 이상이 팔리고 16개국에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꼽힌다. '휴고 상', '네뷸러 상'을 십여 차례 수상했으며, 그 외에도 '세계 환상문학상'과 '카프카 상', '필그림 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과학소설 연맹에서 수여한 '간달프 상'을 1979년에 수상하였고, 과학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기여가 큰 사람에게 수여하는 '그랜드 마스터 상'을 2003년에 수여받았다.
 

한나 아렌트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로도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시몬느 베이유, 로자 룩셈부르크, 에디트 슈타인과 함께 4대 유태인 여류 철학자로 꼽힌다. 아렌트는 1906년 독일의 하노버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유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평생 강하게 간직하며 살았는데, 이러한 조건이 그의 삶이나 사상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 아카데미로부터 프로이트 상을, 덴마크 정부로부터 소니그 상을, 함부르크 시로부터 레싱 상을 수상하는 등 50년대와 60년대를 실천적 강의와 저술 활동으로 빼곡이 채우며 세계 지성인의 주목을 받았다. 미완성작으로 남은 <정신의 삶>을 집필하던 중, 1975년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지은책으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혁명에 관하여>, <공화국의 위기> 등이 있으며 사후에 <정신의 삶>, <칸트의 정치 철학 강의>가 출간되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1948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에 입학해 일찍부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시카고 대학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28세의 젊은 사회학도 필립 리프와 결혼, 1952년에 첫 아들 데이빗을 낳았다. 1955년 하버드 대학의 철학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간 뒤 1957년 학위를 수여하고, 이듬해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며 다시 학계로 돌아 왔다. 그 뒤 1959년부터 뉴욕시립대학, 사라 로렌스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철학 강의를 맡게 된 이후 1960년부터 각종 신문과 잡지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쳤다. 이때 첫 번째 소설 <은인>(1963)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예술 평론가로 입지를 굳혔다. 지은책으로는 평론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 등이 있으며,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올해의 평화상(Peace Prize)'를 수상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니콜 크라우스
1974년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의 고독』에 반해 10대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시를 썼으며 이십 대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스탠퍼드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미술가 조지프 코넬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년 동안 마셜 장학금을 받으며 영국의 코톨드 미술 연구소에서 미술사를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과 예술 전반을 깊이 있게 공부한 니콜 크라우스는 남편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함께 뉴욕 문단에서 분더킨트(신동)로 불린다. 2002년에 출간한 첫 소설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는 기억과 정체성, 고독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강렬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니콜 크라우스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적 상상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특유의 서정적인 미스터리 기법으로 사랑을 이야기한 두 번째 소설 『사랑의 역사』(2005)는 출간 당시 뉴욕 문단의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으며,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레베카 피펏
일리노이 주립대와 바르셀로나 대학, 리전트 칼리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국제적인 강연자이자 저술가로, 여러 학교와 목회자 훈련 세미나에서 영적갱신, 전도, 성품 훈련 등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하나남의 마음에 합한 사람>, <전도>, <토마토와 빨간 사과>등이 있다.




 *소개글 출처: 온라인 서점 알라딘

2012/06/16 01:09 2012/06/16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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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를 다 읽었다. 대체로 그 책에 나오는 70년대 독일 여성들의 고통은 헤어나올 수 없는 가사, 육아 노동과 남편에게 언제나 '대줘야' 하는, 그러나 자신은 단 한번도 만족하지 못한 성적 봉사에 기인했다. 그로 인해 멀쩡한 가정에서 호사를 누리는 듯이 보이는 여성들도 스스로를 노예나 창녀로 인식하곤 했다.

여성문제를 파고들다 보니 어느덧 '성해방'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허나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몸담은 개신교계에서는 대체로 함구하거나 회피하는 편이다. 여성 문제를 지적하는 분들도 '몸'에 대한 담론을 풀어가지만 일상적으로 겪는 성관계에서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한다.

알리스 슈바이처는 자신의 책에서 킨제이보고서를 언급하면서 질 오르가즘 vs. 클리토리스 오르가즘의 문제를 거론한다. 결론적으로 질 오르가즘 집착은 남성의 성욕구 충동에 한정될 뿐 여성은 후자를 통해서도 충분히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레알' 여성이 아닌 관계로 더 깊이 다루지 않더라도 성관계 안에서도 남성은 자신의 욕구를 항상 해결하는데 반해 여성은 가정에서도 성적 욕구를 억압받고 강요당하여 남편에게 성적인 '봉사'를 해야했다고 언급한 경우가 많았다. (사례들은 가사노동과 남편 음주폭력과 동반되곤 했다)

성적인 부분, 즉 가정안 섹스의 역학 관계를 규명하기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배우자와의 침실을 공론장으로 끌어내야하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가정안에서의 여성의 성은 은밀하게 억압받고 강요받고 왜곡되는 현실이 지속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자주 느끼는 건데, 남성은 여성문제에 관해 배워야 할 부분이 참 많은 것 같다. 일상 가운데에서 폐쇄적인 이런 성문제를 어떻게 담론화 시킬 지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하겠다. (끝)
2012/06/13 01:08 2012/06/13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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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페북에 유철형님 글을 공유했더니 일본에 있는 전태호라는 페친님이 제게 댓글을 쓰셨더군요. 저도 고민하던 문제라 좀더 다루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글을 좀 써봤습니다. (편집자 주)


'전태호' 님을 인용 - 저는 링크하신 글도 그렇고 말씀하신 것도 그렇고 군이나 양을 붙이는게 왜 촌스러운 것이며 왜 권위적인 것인지 이해가 안가는데요? 촌스러운 거야 개인이 그리 느낄 수 있다 치더라도 이게 일제군국주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던가요? 정작 일본에서는 친한친구끼리도 쓰는 말인걸요. 동급생학생은 물론이고 자기보다 나이많은 사람에게도 친근감의 표시로 씁니다. 일본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된다면 ~씨도 쓰면 안되겠군요. 이것도 일본 신문기사등에서 쓰고 있는 말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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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그런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구요.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 위의 글에 대해 제 생각을 조금 풀어서 쓰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용주군. 이라고 할 때 그는 저보다 연하일리는 없 습니다. 왜냐면 군, 양은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 경우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주야. 라고 하지 않고 용주군. 이라고 했을 때에는 필시 저와 친분이 깊지 않은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결국 용주야.라고 이름을 부를 때는 하대를 의미하나 친분이 있을 경우에 사용되는 호칭이고 용주군.이라고 부를 때는 하대하나 친분이 적절하지 않을 때 사용한다고 봅니다. 결국 OO군은 거리감이 있는 연하의 대상에게 나름 '정중한 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삼촌뻘되는 어른이나 결혼식 주례처럼 선생으로 모시는 분들이 용주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용례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한동안 저는 학교 후배들에게 OO군, OO양이라는 표현을 익살스럽게 쓰기도 했는데 불쾌해하는 친구들이 꽤 되더군요. (그 때 제가 받은 인상은 그들도 이제 나이를 어느정도 먹었는데 선후배 관계를 연상시키는 '하대', 그것도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고 거리감을 주는 표현을 굳이 고수하는 것에 대한 불만 같았습니다.)

 

직장에서 용주군, 혹은 용주양. 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정중한 하대의 의미입니다. 결국 직장 내에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피고용인 간에도 서열이 있다는 의미겠지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피고용인 간에는 일의 경중이 있고 그에 따른 급여차이와 직책이 다르지만 모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두는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원에게는 OO사원님, 대리에게는 OO대리님이라고 부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저와 함께 일하는 조수는 이름을 부르는 편이지만 공적인 자리나 공문서, 메일 등에서는 OO연구원이라고 호칭합니다. 물론 OO씨라고도 칭합니다만 그것은 적어도 저에겐 사내에서 친밀함의 표현이지 회의석상이나 문서상에서 표하지는 않는 호칭입니다.

 

그런 연유로 변호사님들이 직장 내에서 김양, 혹은 OO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중한 하대의 의미일 것이고 특히 전자는 우리나라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시다급 '여'직원을 지칭할 때가 많아 왔으므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굳이 공적인 관계에서 정중한 '하대'를 이미 기득권자인 변호사가 티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상대가 변호사님이라고 호칭한다면 그는 김비서 내지는 김사무관, 김보좌관, 김대리 등과 같은 직책을 부르는 게 적절해보이고 개인적으로는 공적 자리에서는 '님'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실과 괴리감이 크고 그런 방식 자체가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학생을 OO군이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정중한 하대란 의미로 봤을 때 일면 공감할 부분도 있겠습니다. '야이 새꺄'가 호명방식인 토종 교수님들도 많이 봤으므로 어느정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럴 경우 지도교수-학생 간은 도제 제도를 상기하게 만드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학교, 연구실 내에서 지도교수-학생 간의 관계가 고객-서비스(지식)제공자 혹은 협업을 하는 준직장의 구도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이건 뭐 저의 오만불손한 생각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OO군이라고 표현한다는 부분은 좀 걸립니다. 이러한 '정중한 하대'는 그 학생이 교수의 라인 아래 있는 제자임을 공적으로 거명하는 행위이므로 그렇게까지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우스개소리로 하는 유라인, 규라인처럼 '김교수의 아이들'이라는 올가미를 학계에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용주학생이라고 말하는 것 보다 용주군이라는 말이 좀더 정치적으로 들립니다. 교수-학생은 상태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교수님-OO군은 다분히 '상태가 변할 것 같지 않은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느끼는 호칭의 어감에 따른 이야기이므로 군이나 양이 뭐 그리 대수냐, 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지강유철님의 글에 공감하고 그 글을 인용한 대목에서 저는 위와 같은 생각을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지강유철님의 원글을 함께 남기면서 마치렵니다.


교수님들, 아직도 홍길동 군입니까?

/지강유철

 

몇 년 전까지 판사 변호사(검사는 모르겠고)님들께서 사무실 여직원을 김 양, 서 양 이렇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 그 소릴 듣고 웃었습니다. 21세기에 일제시대 잔재인 미혼의 여자를 양으로, 미혼의 남자를 군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웃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을 군으로, 신부를 양이란 쓴 입간판을 세워놓고, 순서지에도 그렇게 써 있습니다. 그것도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신랑 신부와 주례사이에, 또는 신랑 신부와 하객 사이에 권력관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그런 입간판이나 순서지, 또는 주례님의 말씀에 피식 웃습니다. 물론 이 웃음은 앞의 웃음과 다른 의미의 웃음입니다. 굳이 표현을 달자면 애교스런 웃음?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양으로 부르는 사례 중에 제일 고약한 경우는 교수님들이 책의 서문에서 자기 제자들을 그렇게 부를 때입니다. 오늘 제가 책을 읽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목 중 하나인 서문(번역의 경우 역자후기)을 보다가 짜증이 확 몰려왔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세살 뿐이 안 많은, 그런니까 아직 연령으로 볼 때 쉰내가 나지않고, 보수꼴통 노털로 불리기엔 너무 이른 50대 교수님께서 자신의 책에 도움을 준 조교뻘 쯤 돼 보이는 박사과정 학생을 XX군이라 호칭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들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를 향해 XX군이라 불러야 자신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머리 큰 제자를 xx군으로 부르는 습성엔 보수 중도 좌파에 구분이 없더군요. 70-80대 명예교수님들이 그러는 거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40-50대 교수님들이 그렇게 부르면 확 깹니다. 21세기에 XX군이라...이거 너무 칙칙하고 촌스럽지 않습니까? 제자를 군으로 부르는 모든 교수님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제군국주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호칭은 인권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2012/06/01 18:38 2012/06/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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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멘토의 시대'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멘토'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강교수는 이 책을 통해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하고픈 말을, 몇몇 멘토로 각광받는 이들을 지명하여 그들의 명과 암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듯 하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개혁과 진보를 외치는 것 같은 몇몇 열혈 네티즌은 [강남좌파]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책이라고 비난하는 수고를 해 주셨다. 인물과사상에 실린 '박원순 현상의 명과 암'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네티즌이 많았다... 이 사건은 한국 정치가 갈수록 종교화돼 간다는 내 생각을 재확인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대중으로 하여금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적 지지, 내지는 냉정하고도 자성적인 판단을 촉구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서 멘토로 치부할 만한 몇몇 진보적 인물들을 해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 이유로 아마 이 책을 읽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강교수의 '변절'에 실망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이 처음부터 진영에 상관없이 그들의 명암을 드러내는 일을 자처해왔고 그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아왔다고 고백하지만, 내 생각에 그의 억울한 마음의 초점이 약간은 빗나가지 않았나 싶다. 사실 박원순 시장의 당선에는 나꼼수의 영향력이 있었듯,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의 일등공신은 강준만과 그의 [인물과사상]이지 않았던가.
 
강준만 교수는, 현재로서는 그런 평가로부터 벗어나길 바라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타부시 되어온 실명 비판과 양비론 비판의 효시라 할 만 하다. 특히 그는 정치에 관한 한 '도토리 키재기'가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놈을 골라 그를 지지하는 꼼꼼한 수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진보진영에 강한 자신의 스탠스를 유지해왔다. 그가 한국논단이나 김대중, 조갑제 같은 언론과 언론인의 진상 짓거리들을 촘촘하게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진보진영 논객들이 함께 참여한 '안티조선 운동'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강준만 교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 교수는 진보정치에 실망하고 특히 민주당에서 열우당 창당 시기에 논쟁을 하다가 정치 이슈에 대해 절필을 선언한다. 문제는 그 지점에서 그는 언로를 스스로 닫았고 그 후로 심경의 변화 내지는 -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 지평의 확장이 일어났겠지만, 그 부분이 사실상 크게 대중이나 논객들에게 각인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결국 이후로 나오는 [인물과사상] 기고글들이나 [강남좌파], 이번에 출간된 [멘토의 시대]에서 취하는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느끼기에 왠지 낯설고 불편한 것이 되고 있다. 강 교수는 또다시 네티즌들이 그런 불편함을 표하는 것이 불편한 악순환을 돈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멘토라고 생각하는 '강준만'의 변화에 나도 적응하지 못해 작년 초인가..한동안 그의 기고글이나 관련 기사들을 매의 눈으로 열심히 찾아서 읽어대던 기억이 난다. 그의 궤적을 훑어간 지금은 그를 이해한다. 여전히 동의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대체로 그의 지적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책도 나는 귀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영 구획'을 여전히 좋아할 지는 모르겠으나 진보 진영에서 여전히 그는 귀한 존재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덧글)
강준만 교수의 책을 보면서 든 생각2. 우리나라 중도진보는 노빠를 중심으로 분열된 것 같다. 문제는 노무현 전대통령 사후에 정서적으로는 국민 모두가 노빠가 되어 그 정치적 입장조차 비판할 수 없게 된 점. 둘째는 노무현을 아끼는 정서가 노무현의 세력에게는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
전자는 정치사적으로 어려운 부분이고 후자는 당장 대선에서 어려운 부분이다. 후자는 통진당 사태로 대선직전까지 장기적인 카오스 상태가 지속될 듯 하지만 전자라도 어서 빨리 노대통령을 끼고서도 합리적인 논쟁이 가능한 지점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무학의, 아니 독학의 진단을 해본다.

2012/05/30 22:45 2012/05/30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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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회자되고 있는 J목사는 사실 복음주의권에서 김동호 목사와 더불어 차세대 대중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다. 물론 소수가 이미 J목사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지만, 실제로 J목사는 우리 진영에서 사이비나 이단시되는 또라이 목사가 아니다.

그는 주류였고 '장'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를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적절히 흡수도 하면서 사실상 복음주의권은 청년부를 팽창시키는 그의 대중 설교를 적극적으로 소비해왔다.
 
지금 다수가 행하는 그에 대한 비판은 그가 속한 교계 진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회개와 각성이 우선하지 않는 한 섣불리 행해져서는 안 될 비판들이다. 특히 비개신교, 비복음주의권에서 보기에 우리는 J목사의 진영 안에 속한 자들임을 깨닫는다면 어떤 면에서 그를 또라이나 범죄자로 손가락질하며 선을 긋는 게 더 비겁하고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사역을 막는 형태가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가 공적으로 피해자와 교회에 공개적으로 죄를 구하고 근신한 후 종국에는 다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도록 만드는 일에 '우리 진영'은 힘써야 한다. 나는 그것이 내가 아는 '예수 공동체'의 차별성이라 믿는다.

2012. 5. 22.



#2.
어제 CAP 미팅 때 'RAEW 기법'이란 걸 사용했는데 다들 생소하여 모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떠들어댔음에도 불구하고 노말캡미팅(..걍캡)으로 마쳤다.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수행하는 개개인이 체화되지 않은 도구는 의미가 없다. 특히 구조나 시스템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 구조를 이용하는 개인의 역량, 수준, 시점 등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도구를 집어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2. 5. 18.



#3.
스승의 날.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정말 인간 관계 가운데 배운 스승이 별로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성적 농담이나 해대고 학생들에게 장풍이나 쏴댔지...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은 없다. (물론 한 두 명 정도 노말했다고 기억나는 분들은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책으로 만난 유명한 저자들이나 강의를 통해 접한 지식 전달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들을 나의 스승이라고 말하고픈 욕구가 있었지만, 살면서 지식이라는 게 중요하지만 관계성이 없는 지식전달자와 피전달자와의 사이가 이제는 그리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굵어진 후로는 내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고 나 혼자 잘난 척하고 살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스승이라 부를 법한 분은 정말 손꼽는다. 왜 나는 정작 멘토같은 스승이 필요한 나이에는 배움의 열정을 혼자서 책이나 보면서 지냈을까. 후회가 되는 대목이다. 오늘은 한두 사람의 스승에게 문자를 보냈다. 스승의 날. 노년의 지혜를 멀리하고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의 배움을 등한시한 내 가벼움을 반성해본다.

2012. 5. 15.

2012/05/22 21:42 2012/05/2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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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았던 질문 중 가장 대답하기 어려웠던 건 "do you love me?" 였던 것 같다. 대체로 나는 이성이 이런 질문을 던지면 머뭇거렸다. 나쁜 남자라서는 아니다. (내가 어딜봐서 나쁜 남자...ㅠㅠ) 그저 '사랑'이라는 말이 대답하기 쉽지 않은 개념, 정서, 상태를 의미한다는 걸 그 때도 막연히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서로를 육체적으로 갖고 싶은 마음, 혹은 '언젠가는 우리 결혼해야 해' 라는 예비 다짐, 나아가 서로에 대한 특별하고도 오랜 상호 신뢰관계를 지속하는 것.

그땐 내가 사랑이란 말에 대한 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데 대한 실망, 죄책감이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십대에 사랑을 이야기하기가 내 정서적 성숙도에 비해, 참 어려웠다고 변명하고 싶다.

'클로저'란 영화 속 한 장면. 관계의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주드로에게 사랑이 어딨냐고 묻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렀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관계에 균열이 가고 어느덧 그 관념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사랑은 둘 사이에서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그저 타인의 입에서 튀어나와서는 나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말일 뿐이다.

이렇듯 이성 간의 사랑 혹은 사랑하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들리지도 않는 말은 쉽게 오가기는 해도 그만큼 오용될 수 있고 속일 수 있고 또 속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래, 시간을 가로축으로 보았을 때 여전히 그 단어에 얽힌 어떤 행동이 그 어떤 곡선을 그린다면. 그 곡선이 어떤 상승과 하강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우리는 넌지시 자신이 내뱉은 단어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순간의 요동 순간의 폭락. 그것은 사랑이 아니야 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주저했던 때로 중요한 순간에서조차 조심스러워했던 그 단어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참 오랜 시간을 통해 그 궤적속에서 드러나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애정하는 선배 페친 김승중님의 포스팅이 던진 화두에 답하며.)


2012. 5. 21.

2012/05/21 21:38 2012/05/21 2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