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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 <제자도>. 그러나 책의 원제목은 '급진적 제자도'이다. 책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제목을 왜 '급진적 제자도'라고 했는지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이 빠진 책의 제목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본다. (자료 제공 한국 IVP) |
누추한 제 서재의 책을 출판사별로 진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책을 빨리 찾기 위한 조치였지만 얼마쯤 지나니 그보다는 좋아하는 출판사 책이 늘어나는 걸 더 뿌듯해 하고 있더군요. 덕분에 한길사·까치·창작과비평사·문학과지성사·서광사·나남 같은 일반 출판사, IVP·홍성사·크리스천다이제스트·여수룬·나비·한국신학연구소·생활성서사 등의 기독 출판사 책들이 서재의 좋은 자리를 꿰차게 되었지요.
그제 서재를 둘러보다 웬만한 기독 백화점보다 IVP 책이 더 많지 싶어 놀랐습니다. 주요 저자 40명의 책 가운데 130여 권이나 가지고 있더군요. 2000년대 초반까지는 IVP 책이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고마움과 긍지도 커졌습니다. 그러나 책은 좋아하지만 실천에 둔감한 지식인들이 점차 싫어지다 보니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이 늘어나도 별 감흥이 없더군요. IVP가 만든 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번역 위주의 출판을 언제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선생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거든 언행을 삼가라"는 말을 좋아했고 늘 이 원칙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저는 아직도 사랑의 동기가 아님에도 비판에 열을 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IVP의 잘못을 꼬집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랑의 동기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아직도 IVP의 책을 배제한 신앙생활을 상상치 못합니다. 가끔 IVP에 실망할 때가 없지 않지만 IVP가 더 좋은 출판사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언제부턴가 IVP 신간에 눈에 거슬릴 정도로 추천사들이 많아졌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작품일 경우에는 추천사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꽤 알려진 저자의 책에까지 추천사가 넘쳐 나면 속이 더부룩해집니다. 170여 쪽뿐이 안 되는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 <제자도>를 펼치니 15개나 되는 추천사가 날 좀 읽어 달라고 아우성이더군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도>의 격을 높이고 판매에 도움이 될까 싶더군요.
대체적으로 상품 홍보는 제품 인지도가 떨어지거나 상품의 질에 자신이 없을 때 열을 올리게 됩니다. 한 기독교 월간지의 지난해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크리스천이 가장 선호하는 저자는 존 스토트입니다. 원서 <제자도>에 나오는 9개 추천사야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추천사를 6개나 추가한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당사자들에겐 송구한 이야기입니다만 '급진적 제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다수 국내 추천자들의 추천사를 읽어야 하는 일은 좀 괴로웠습니다.
제가 존 스토트를 처음 만났던 1993년에 그분은 일흔셋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 책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책을 구입했습니다. 실제로 2000년 3월 4일, 정성욱 교수의 존 스토트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복음주의의 기본진리>가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 예상했더군요. 하지만 존 스토트는 11년을 더 살았고, <제자도>를 쓰면서는 이런 글을 남겼지요.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급진적 제자>입니다. 한국 IVP가 책 제목을 <제자도>로 바꾼 것은 의외였습니다. 아니 충격이었습니다. <제자도>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핵심만을 추려 다시 쓴 책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작품인데다 가격까지 착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더라도 IVP 재정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만큼은 존 스토트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기품 있게 만들어 주길 바랬습니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제자도>를 볼품없게 찍었다는 뜻이 아니라 책 제목을 꼭 그렇게 바꾸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출판사도 존 스토트에 관한 한 IVP의 전문성을 따라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제자도>서문에서 존 스토트는 이 책 제목을 왜 '급진적 제자'로 했는지 분명히 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편집자라도 '개신교계의 교황'이란 소리까지 들은 그분의 책 제목을 멋대로 바꾸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보수적 기독교는 '급진적'이란 단어를 좌파 용어라 생각해서 싫어하고, IVP는 독자들의 이런 경향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급진적 제자>를 포기하고 <제자도>란 제목을 선택했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런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IVP는 다른 저자도 아닌 존 스토트의 책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사태를 책 제목에서 '급진적'이란 단어 하나 뺀 것을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그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급진적'이란 단어가 빠진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읽습니다.
존 스토트는 50권이 넘는 자신의 저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았습니다. '다른 어느 책보다도 영혼과 마음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더 주목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문서선교회(CLC)에서 번역한 초판과 개정판은 물론 IVP가 새로 번역한 판본들까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제가 가장 자주 참고하는 존 스토트의 책이기도 합니다.
제 신앙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려면 <변론자 그리스도>와 <균형잡힌 기독교>, 그리고 BST시리즈 중 사도행전,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가장 의미 있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가 복음주의권 신학자나 목회자의 치명적 약점인 반지성주의와 현대사회에 대한 무관심에 함몰되지 않은 저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은 복음주의가 세상에 내어놓은 그 어떤 책보다 의미 있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스토트가 '런던 현대 기독교 강의'가 주관한 새 천년 기념 강연을 토대로 쓴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이번 추석에 새로 읽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이 책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종교 다원론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대와 비난에 휩싸일 것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보다 현대 세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인물 아닙니까.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다시 읽다 보니 추석을 뜨겁게 달궜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무모함이 오버랩되더군요. 혹독한 반대에 직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과 같은 분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한 존 스토트나, 검찰의 발표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박명기 교수에 주었다고 스스로 자백한 곽노현이나, 무모함으로 치자면 난형난제입니다.
<복음과상황> 발행인 김회권 목사가 예리하게 꼬집은 것처럼 존 스토트는 '미국 주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의 외식에 도전하고 자유주의적인 급진 윤리를 주창하다가 닭장차에 갇혀 잡혀가던 하비 콕스'만큼 영국 백인 중산층과 긴장 관계를 형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동시대를 산 영국의 버트란드 러셀처럼 '반핵운동을 하다가 구류되고 투옥되는 고난을 자초'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에게 열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구티에레즈 신부나 보프 신부 등 좀 더 급진적인 복음 전파에 주력했던 사제들과의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처럼 '로잔언약 5항의 정신을 발휘해서 한국의 박정희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신앙 성명 한두 줄'도 발표한 일이 없습니다. 본회퍼의 예언자적 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라크 침략이나 1980년대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 대하여 예언자적 탄핵'이 존 스토트의 입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를 타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한계를 드러낸 존 스토트의 급진적인 제자도 타령을 하고 있을 여유가 제겐 없습니다. 그분의 급진적 제자도에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 기독교적 지성의 절반을 형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 IVP의 문제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더 시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IVP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40명의 주요 저자와 그들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국 저자가 4명이니 외국 저자의 비율이 90퍼센트나 됩니다. 반면에 IVP와 함께 기독 출판사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인 홍성사의 국내 저자 비율은 7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IVP 구성원들은 '어찌 감히 홍성사와 IVP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일지 모르겠습니다. 수준이라는 것이 글의 완성도나 수준 높은 번역 등으로 제한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IVP 지체들은 'P스럽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의 잣대로 작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년 나이의 IVP가 아직도 외국 지식의 대리점이고 소매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런 평가에 대해 'P스럽다'는 기준이 어떻게 적용하는지 궁금합니다. 수준이 낮고 글이 안 돼서 한국 저자의 책들을 내기 곤란하다는 변명은 자신들이 얼마나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그 기준을 버리지 않는 한 이 땅의 아픔과 문제들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IVP는 수준 높은 저자를 발굴, 육성하기 위해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행착오 없이 어떻게 이 땅의 기독 출판문화가 성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IVP가 단순히 하나의 출판사가 아니라 한국기독학생회의 정신을 따라 문서 사역을 하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30년 넘도록 아직도 번역에 목을 매고 있다는 현실은 어떤 변명과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가 1974년에 만든 국제 랭햄 파트너십에 속한 프로그램인 랭햄 문서 사역에 그의 모든 인세 수입을 기부했습니다. 제3세계의 목회자, 신학생, 신학교 도서관에 복음주의적인 책들을 보급하기 위해서였지요. 랭햄 문서 사역은 제3세계들이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저술과 출판을 육성'시키는 일이 자신들의 중요한 존재 이유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지요.
한국 IVP는 랭햄 문서 사역의 이런 정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제기독학생회 역시 이런 기조 위에 서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지 못한다면 최근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한국기독학생회의 젊은 학생들은 데이트, 사랑, 결혼, 이혼 등의 문제들마저도 여전히 번역서에서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데이트나 결혼과 같이 사적이고 섬세하고 그 지역의 문화가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를, 언어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가치 체계가 다른 외국 서적에 의존하는 것이 제 눈엔 코미디로 보입니다. 저는 IVF나 IVP가 이런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촉구합니다. 외국 서적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데이트나 결혼과 같은 문제의 진단에서 무기력하고 처방에서도 문제 해결은커녕 또 다른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정치나 사회참여와 같은 문제를 들여다보면 번역 위주의 출판문화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집니다. 한국기독학생회가 이 땅의 민주화의 기로에 서 있던 1991~1992년 당시 '6개대 사태'로 휘청거렸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원인이 저는 번역 위주의 출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의 절박했던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에 IVF가 큰 홍역을 치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번역 위주의 출판문화에 깃든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신앙과 삶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서양 기독교가 설정한 아젠다에 국한하지 않고 지금 이 땅에서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문제들에까지 확장하는 일에 서툴렀기 때문에 6개대 사태가 그런 결론밖에 도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문제의 해결 또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6개대 사태와 관련해서 저는 이제까지 한기연 쪽 주장에 더 많이 익숙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위해 IVF 서울지방간사회가 1991년 11월에 발행한 두 권의 자료집인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Ⅰ-IVF 사회참여 교육지침과 그 비판>과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Ⅱ-6개대 사태 설명과 문건 모음>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또한 IVF 이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김영철 목사님께서 쓰시고 IVP출판사가 낸 <지성사회 복음화 50년>의 해당 부분도 정독했습니다. 김영철 목사님의 책은 '내가 본 IVF 50년의 발자취'란 부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6개대 사태 관련 대목에서 객관성을 크게 결여한 서술을 읽으며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당시 제출되었던 문건들을 공정하게 소개하는 것은 역사 서술에서 기본인 것 같은데 이분이 과연 최소한 서울지방간사회가 낸 두 권의 자료집은 정독하셨는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당시 IVF 학생들에게 6개대 사태의 핵심적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 고직한 총무의 해임이었습니다만 <지성사회 복음화 50년>은 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지면에서 이 부분을 더 논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존 스토트의 마지막 작품에서 '급진적'이 빠진 부분을 보면서 자꾸 시선이 6개대 사태로 이동함을 느낍니다. 당시 급진적인 제자도 원칙에 충실하게 문제를 풀지 못했던 아픈 역사가 아직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IVF나 IVP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IVP가 우선 존 스토트 만큼이라도 급진적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성경적인 균형의 문제가 출판에서도 적용되길 기대합니다. 존 스토트로 밥을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IVP라면 최소한 그 기준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존 스토트를 지적 및 영적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한국기독학생회 역시 학생들을 리더로 세울 때 사역을 마칠 때까지 이성 교제는 안 된다는 기준 등의 근본주의적인 보수성 또한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최근에 잘 아는 모 대학의 리더가 이성 교제와 리더 중 택일하라는 요구 앞에서 끝내 '남친'과 한국기독학생회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6개대 사퇴 때 기록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주초의 문제와 노동가요 등에 대해 한국기독학생회 간사회가 얼마나 과민 반응을 보였는지를 보는 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때보단 이러한 문화적 보수성과 인권 의식이 많이 개선되었을 것이라 믿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IVF 출신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이 땅의 지성과 문화에 소중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알 만한 소설가나 영화감독 중에 한국기독학생회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고, 양심수들이 갇힌 감옥이나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에서, 그리고 성적 소수자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IVP가 만든 책으로 인권 신장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VP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지강유철 / 100주년기념교회 부설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장기려, 그 사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