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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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께서 저와 신현기 대표님께 쓰신 글을 행복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아직 주일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라 개운치 않았는데 이 글을 읽으며 활기를 되찾은 느낌입니다. 업무 때문에 간단히 먼저 적도록 하겠습니다.

 

1.

- 신현기-지강유철이 핵심적인 논의를 제쳐놓고 입장과 해명을 했다는 용주님의 주장에 대해

 

저 는 신현기 대표님께 드리는 해명에서 분명 저의 글과 관계된 논란에 대해서는 차후에 정리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번 글은 신현기 대표님께서 입장문에서 밝힌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이야긴 아직 유효합니다. 제가 오독하지 않았다면 신현기 대표님의 입장문은 이제부터 제대로 논의를 해보자는 출발의 의미라기보다는 이 입장문으로 일단락 짓자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저의 입장은 공격이었고, 신현기 대표님은 수비였습니다. 수비하신 분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면서 해명이라 한답시고 제가, 또는 용주님이나 이 문제에 관계된 분들이 핵심이라 생각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다시 공격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상대 장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저는 판단을 했습니다. 관전하는 사람들이야 그것이 통쾌하거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만 그것은 신현기-지강유철에 대한 좀 더 세심한 배려는 빠져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신현기 대표님의 입장문이 마무리 차원이란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물론 저는 어떤 모양으로든 이 논란에 대해 정리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이 아니라 제대로 된 매체를 통하여 이 문제로 토론을 하자면 가급적 어느 분이든 이에 응하려고 합니다.

 

 

2.

- IVP에서 상업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은 이유로 제목을 바꿨다면 저의 논리가 허물어진다는 주장에 대해

 

저 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저자의 입장에 충실한 제목과 그 대척점의 정치적, 상업적 고려 빼고 제목에 결정적 영향을 줄만한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학적으로 '급진적 제자'가 안 예뻐서? 설마 미학적인 취향을 위해 IVP가 존 스토트의 책 제목을 바꿨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선교적인 관점에서?(하지만 이 책은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할 목적으로 만든 책이 아니니 아예 해당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제목 결정에 무슨 다른 변수가 있을까요? 솔직히 저는 출판사가 책 제목을 정하면서 고려해야 할 세 가지가 저자의 의도와 정치적(또는 신학적) 상업적 판단 말고 더는 없다고 판단합니다. 억지로 가지키기를 할 순 있겟지만 책 제목을 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변수는 될 수 업다고 보는 것이지요.

 

아직까지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우리 출판계의 소위 관행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책 제목을 저자가 힘이 셀 때는 저자가 결정을 하고, 출판사가 힘이 셀 땐 저자가 '을'이 되고, 엇비슷할 땐 협의를 한다는 관행말입니다. 제 생각엔 출판을 담당하는 현직에 계신 분들은 이 관행이 틀렸거나 원칙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하긴, 매일 같이 책 판매 보고서가 올라오는 현장에서 그건 너무 한가한 고민일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관행 이상의 절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음악 작품이나 미술 작품에서 그 그림의 제목을 미술관에서 정한다면 승복할 작가가 있을까요? 제목도 작품의 일부라고 믿는 저는, 그리고 아무리 작품이 맘에 들지 않고 제목이 못 마땅해도 어떤 미술관이든 그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라면 협의를 하든 압력을 넣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발표한 작품을 어떤 미술관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술작품이나 음악 작품과 책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좀 더 따져 봐야 할 것이고,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귀기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이제까지 번역서는 제목을 출판사에서 맘대로 바꿔도 된다는 그 관행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번역서의 제목을 절대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제가 뉴스앤조이 기고문에서 주장했던 내용은, 보통의 경우, 출판사의 상업적 정치적 고려에 의해 제목을 정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스토트의 '제자도'와 같은 특별한 경우는 제발 경제적 논리를 벗어나서 작품과 저자의 의도를 살려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것인데 이를 놓고 이 난리를 치는 것에 대해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합니다.

 

지강유철이 이제부터 모든 출판사는 책의 제목을 정할 때 저자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언이라도 하라고 다그친 것입니까? 저는, 제가 기독교 출판사들은 제목에 관한 출판 윤리강령이라도 만들되, 그 내용은 어떤 경우든 저자의 제목을 따르라고 다그쳤을 때나 보일 법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

- 6개대 사태를 느닷없이 끼워넣었다는 주장에 대해

 

누 구든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한 논리가 부족하고, 제 글쓰기가 함량미달이라는 점도 부끄럽지만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도 드릴 말씀은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다수를 매우 불편하게 할 수 있어서 걱정이 앞서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예를 찾을 수가 없어서 문제가 없는 비교는 아니자만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드려 봅니다.

 

저는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친일청산에 실패한 것으로부터 상당수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지금 어떤 사안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내지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점을 모두 인정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부분에 대해 객관적인 진술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부분에 대해 대체로 인정을 합니다. 저는 6개대 사태로부터 상당수 많은 문제들이 현재까지 IVF와 IVP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글에서 이런 내용을 주장하지 못한 것을 두고 비판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변명을 드리자면 금기를 깨는 행동은 그 행동의 의미로 먼저 이해해야지 거기에서 정교한 논리까지 요구한다면 과연 누가 성역에 도전하겠습니까. 원고지 36매의 글에서 이 정도 이상의 주장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문제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은 화두를 던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다음 논의에서, 또는 이어지는 토론에서 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의 논리에 비약이 너무 컸는지, 아니면 그런 비판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백일하에 드러나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더 진지한 논의를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4 .

우선은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이 정도로 거칠게 써 놓고 빠져나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월요일 아침에 행복감과 활기를 준 용주님께 감사드립니다.

2011/10/12 00:33 2011/10/1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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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유철님과 신현기대표님에게.
- IVFer로서 [한국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를 대하는 입장.

/김용주

지난 한주는 지강유철님이 뉴스앤조이게 기고한 [한국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의 논의가 정말 무성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IVP 신현기 대표님이 공식 입장을 표명해주셨고 바로 다음날 지강유철님이 그에 보충적인 해명을 다시 올림으로써 한주의 후반에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는 논쟁을 지켜보았습니다. 두 분 모두 서로에 대한 격을 갖춘 글들을 보여줌으로써 회의감에 빠진 저의 교계 논쟁에 있어 어떤 글쓰기 스타일의 방향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제가 직간접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이며 제가 교계에서 존경하는 사역자이기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던 듯 합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의 기사가 뉴스앤조이에 실린 후부터 기사를 링크하고 그에 대한 찬성의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찬성'이라는 게 어떤 시비를 극명하게 가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글에서 취할 좋은 교훈이 많다는 의미에서 그러했습니다. 그러한 제 입장을 표명한 후 저는 많은 IVP/IVF와 관련된 이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의도한 바도 있지만 때때로 의도하지 않게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지난 주 내내 참 많았고 그 자체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배움이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IVP에서 '급진적'을 생략하여 생긴 일이니 정말 IVP에 개인적으로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강유철님의 글은 IVP가 존 스토트 신부님이 유작이라고 생각하며 굳이 형용사로 넣은 'radical 급진적'이란 단어를 과감하게 뺀 것이, 좌파용어인 radical이란 단어를 넣을 때 잃게될 독자들 때문이라고 ‘가정’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상관없이'말이지요. 그러고는 시선을 IVP 내부로 향해 번역 위주의 출판 사대주의에 함몰된 IVP를 비판합니다. '번역이 아닌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저술과 출판 육성'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랭햄 문서 사역에 인세를 기부한 존 스토트의 정신과 달리 IVP는 여전히 번역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번역서들은 데이트, 사랑, 결혼 등등 한국적 상황에 맞지도 않는 문제들까지도 번역서를 의존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로 이어지고 IVF의 아픈 기억인 '6개대 사태'도 이런 번역위주의 출판과 무관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존 스토트의 유작에서 '급진적'이란 단어를 뺀 것이 좌파적 사회참여의 고배를 마신 그 사건에 자유롭지 않은 게 아니냐는 것이지요.

먼저는, 제가 생각하는 지강유철님의 글에 대한 문제점을 중언부언하지 않고 말하려고 합니다. 지엽적인 부분에서 지강유철님의 글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부분에서 '실천에 둔감한 지식인들이 점차 싫어지다보니'로 시작된 그의 글은 추천사 비판 부분에서 '당사자에게 송구한 이야기입니다만 '급진적 제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국내 추천자들의 추천사를 읽어야 하는 일은 좀 괴로웠습니다'로 교계의 '특정 부류'를 불편하게 했고 출판 비평을 하던 그의 논지에 갑자기 IVF라는 선교단체의 아픈 상처인 '6개대 사태'를 건드립니다.

재해명 글에서 그는 제목에 대한 편집자의 권한에 대해 '시건방진 편집자들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표현을 쓰면서 원제와 다른 타이틀을 만드는 편집자들을 단번에 불편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홍성사와 비교를 통해 두 출판사를 모두 불편하게 만들었고, 글의 말미에 편집에 관련된 이들의 이름을 노출하면서 그의 배려의 손길이 더더욱 그들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솔직히 저는 그렇게 진행된 그다지 길지 않은 그의 글에서 이미 심기가 불편해질 교계의 그룹들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몇몇 대목에서 부지중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기를 여러번 반복했습니다.

더 중요한 텍스트의 정합성 문제입니다. 존 스토트 유작의 핵심 가치를 표현한 제목을 수정했다는 지강유철님의 제목 세탁 비판이 갑자기 번역 위주의 사대주의 출판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논리적 전개가 떨어집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바른 전개는 '사대주의 하려면 시건방지게 말고 제대로 해라'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랭햄 문서 사례가 빛을 발하여 스토트가 자국 고유 출판에 힘썼는데 IVP는 왜 스토트 책 제목도 막 바꾸고 그의 정신도 계승하지 못하냐라고 이어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강유철님도 그렇게 전개하셨으리라 추정되나 번역서적의 제목에서 비롯된 논지 전개에 아무래도 무리한 흔적이 보입니다.

특별히 그는 가정법을 사용하여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그런 요소가 있었다면 문제다, 라고 제목 세탁의 근거를 추정했기에 만일 IVP에서 정치적 판단도 아니고 상업적 고려도 아닙니다 라고 한다면 그 이후의 논리는 허물어집니다. 특히 갑자기 등장한 IVF의 '6개대 사태'는 정치적 이유라는 가정법이 작동하지 않을 때 논리 비약의 요소가 됩니다. 실제로 신현기 대표는 그 두가지 이유가 아니라고 해명했고 많은 IVF 멤버들은 IVP와 IVF간의 차별성, 그리고 IVF의 중앙조직의 미미함으로 인한 지부별 자발성을 들어 페이스북 등등 여러 채널로 이 글의 불합리성, 부당함, 억울함 등을 토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먼저는 내부자로서의 자성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IVP로 본다면 지강유철님은 순수 독자입니다. 본인이 표현하셨듯 독자로서 자신이 애정하는 출판사에 고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언을 함에 있어 출판사 내부의 여러 문제들, 그 팩트들을 모두 검증하고 허락을 받고 인가된 범위 내에서만 비판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현기 대표님의 자성적 해명은 본이 되는 모습이었고 IVP가 그간 어떤 입장 표명도 해오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례적이라고 할만큼 유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 대목에서도 한가지 짚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제목세탁에 대한 해명 부분에서 신현기 대표님은 부드러운 논조이지만 지강유철님의 논지 자체를 완전히 허무는 언급을 하십니다. 신대표님은 '무조건 많이만 팔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제자도'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독자일수록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통해 이것이 상업적 이유가 아니며, 또한 책을 읽으면 radical이란 다분히 정치적인 단어가 실제 그 의미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을 통해서 그것이 정치적 이유가 아님을 주장하였습니다. 정치적, 상업적 이유가 아니라 IVP의 간판 저자의 유언격인 이 책을 더 많은 이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동기만 남는다면, 사실 '제목세탁'도 '6개대 사태'도 비판거리가 못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니 날것 그대로 ‘급진적’이란 단어를 뺍시다” 라고 했을 때의 무의식적 동기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독자 층을 넓게 본다는 것과 매출액을 가늠하는 것 사이에 구분이 가능한지 저는 의문입니다. 스테디 셀러 저자의 책에서 정치적으로 오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삭제함으로서 얻는 기대치를 출판사의 순수한 동기 해명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마케팅 전략이 배제된 출판이 스테디 셀러의 유작에 작동하리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IVP를 속물출판사로 보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차라리 '제 양심을 걸고 독자층이 많아지는 것을 의도했지만 그로 인해 radical이란 단어 자체를 불편해 하는 보수적 기독인과 스테디 셀러의 출판 수입이 늘어날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더 좋은 해명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6개대 사태' 끼워넣기는 더더욱 심각합니다. 제 주변 IVFer들은 이 대목에서 상당한 불쾌감과 상처를 받은 줄로 압니다. 그만큼 내부적으로 상처가 깊고 미완의 사건이며 해결도 쉽지 않고, 또한 그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는 후배들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쌩뚱맞게 제목세탁이 '6개대 사태'를 제대로 해결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논지에 대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분들조차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변죽을 울린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는 IVF 내부인으로서 이 사건이 언급된 것에 대해 동일한 유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단일 사건, 그것도 IVF의 여러 약점, 혹은 상처 가운데 가장 아픈 부분을 툭 찔렀다는 점에서 동일한 통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이것을 불편함, 불쾌함, 억울함으로 보려는 입장과는 다릅니다.

'6개대 사태' 이후로 제가 알기로 다수의 지부에서 정치색을 띤 사회참여운동에 대해 급격히 냉각되었고 존 스토트 최고의 행적인 로잔언약과 마닐라 선언에서 이루어진 복음의 양날개 이론, 즉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에 대한 입장이 체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IVF 캠퍼스 운동은 '체화'라기 보다는 '배제'가 더 정확한 진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IVF를 사대주의 선교단체로 치부하더라도 문제라 할만 하며 앞서 말한대로 '사대주의 하려면 시건방지게 말고 제대로 해라'라는 논지로 한국 IVF의 내부를 비판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강유철님이 가슴아픈 사건의 변죽만 울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핵심 메시지를 받고 그것을 고민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다고 '6개대 사태' 이후로 IVF가 지강유철님에게 당당히 해명할 정도의 '급진적', '온전한' 행동을 실천해온 선교단체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논리의 시시비비, 사건과 팩트의 명확한 해명에 앞서, 회개와 각성, 그리고 새로운 전략을 짜려는 분위기가 내부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래는 지난 주에 제가 쓴 글입니다.

"난 지강유철님의 기사에 대해 IVP나 IVF 사람들이 흥분조로 부정하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도 아쉽지만, 그보다 더욱더 우리가 한국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주목을 받는 단체니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알자는 류의 자아도취적 정서도 불편하다. 차라리 우리 조직이 간판대비 거품이 많았다거나 내부성찰 없이 참 많은 칭찬을 받고 있었다는 겸손함이 내부로부터 우러나왔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우리가 한국 기독교의 중심이라거나 핵심단체라는 기득권 마인드를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자성이 보다 확산되면 좋겠다. 나도 한 명의 내부인으로서 그런 마음을 품고 싶고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저는 신현기 대표님과 지강유철님의 재해명 글을 읽으며 두 분의 격식있는 논쟁의 스타일에는 고무되었지만 정작 핵심적인 논의, 이를 테면 출판에 있어 번역 위주의 사대주의와 한국적 상황에서의 저자발굴, 신학하기, 한국복음주의적 사회참여의 방향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정법'으로 오해했냐 아니냐의 다소 주변적 이슈로 논쟁이 변질된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기왕 해명할 것이었다면 IVP가 보다 적극적으로 최근에 발굴한 국내 저자들, 이를테면 박영돈, 김영봉, 강영안, 김형국, 우종학 등의 약진과 앞으로 점점 늘려나갈 한국적 상황화, 토착화의 큰 그림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해명하였다면 더 애정어린 눈으로 IVP를 바라보게 되었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글을 쓰다보니 극명했던 제 치우친 옹호가 좋게 얘기하면 조금 누그러진 감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날이 좀 무뎌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한 주간 참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그 가운데 제 생각도 어느 정도 수정되고 분명해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 논의의 중심에 서 있는 두 분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이 크기에 이 글을 쓰면서도 심정이 조금 복잡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디 허접한 제 글에 부족한 부분은 버리시고 건질 수 있는 작은 부분만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샬롬으로 인사 드립니다. (끝)

2011/10/12 00:31 2011/10/1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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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기 대표님께서 발표하신 "IVP ‘제자도’ 관련 토론에 대한 IVP의 입장"을 읽었습니다. 제가 발표한 글과 관련하여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정리하는 일은 차후에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오늘은 신 대표님이 쓰신 입장문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제가 뉴스앤조이에 올린 "한국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는 글은 IVP 북뉴스로부터 청탁을 받고 쓴 글이지만 본래는 뉴스앤조이에 쓰려고 했던 글입니다. IVP에 근무하는 사랑하는 후배가 그 보다는 IVP 매체에 먼저 글을 올리면 좋겠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해 주었습니다. 저는 IVF 출신도, 간사를 역임한 내부인도 아니어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IVP의 원고 청탁에 응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현기 대표님이었습니다. 기사로 나가는 것은 불발이 되었으나 꼭 10년 전 저는 신현기 대표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고, 그 뒤로 몇 차례 사석에서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대표님이 합리적이고 신중한 분이란 확신이 점차 굳어졌습니다. "신현기 간사님이 대표로 있다면" 저의 글이 IVP 잡지에 게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긍정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라는 믿음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고 청탁에 응했던 것입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신 대표님과 저는 같은 취미를 가졌고, 무엇보다 저는 신 대표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시는 교회 공동체에도 관심이 없지 않아서 꼭 가고 싶다는 말씀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신 대표님께 가졌던 저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이번 입장문 발표는 그래서 제게도 매우 소중합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빨리 입장문을 읽을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거의 전례가 없는 입장이란 형식의 글을 발표해 주신 신 대표님의 결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2.

하지만 발표하신 입장문에서 조금 아쉬운 대목이 없지 않아서 주저하다가 저도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 드릴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글의 성격이 반박이나 반론이란 전투적 용어를 피하고 해명 내지 보충설명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우선 제목과 관련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신 대표님께서 이번 입장문에서 밝힐 IVP 출판사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일리가 있고, 제가 편집자의 자리에 있었더라도 같은 입장을 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며 옷깃을 여밉니다. 하지만 저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어제 평화의마을공동체를 담임하고 있는 박삼종 전도사님과 페이스북에서 나눈 이야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인용이 지금 이 글의 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주저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저의 한 단면이라 다소 날이 서 있는 글을 인용합니다.

 

"존 스토트의 책의 내용이 급진적이냐 아니냐는 한 마디로 해석의 문제이고 평가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존 스토트가 급진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목의 문제는 팩트의 문제입니다. 저자가, 그것도 똥 오줌 못 가리는 젊은 저자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 내용에 검증받았고, 이미 수십권의 저서를 낸 저자가, 더군다나 자신이 더는 글을 쓸 수 없음을 직감한 저자가 유고작이 됨을 직감하면서 ........책의 제목을 정했고, 그 제목을 정하는 이유와 급진적이란 단어가 오해되지 않도록 의미까지 한정을 하며 제목을 정했습니다. 이건 팩트입니다. 그렇다면 출판사는 이 부분을 바꿀 권리가 없습니다. 그걸 어떤 이유로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이겠지요. 자신들이 존 스토트보다 낫다는.

 

이 지점에서 멈춰 서서 생각해봅시다. 존 스토트같은 양반이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저서에서 (IVP는)자신들의 잣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제목을 바꿨습니다. 존 스토트를 이렇게 바꿀 수 있는 편집자들이 존 스토트보다 연배가 낮고, 글의 내용이나 지명도와 영향력에서 떨어지는 저자와 번역자의 글에 대해 행사할 권력을 생각하면 저는 현기증이 날 지경입니다. 저는 그런 오만을 느꼈습니다.

다시 해석과 팩트의 문제로 가 봅시다. 급진적 제자도는 팩트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그건 편집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제목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 열을 받는 것은 영국 IVP는 막말로 박삼종 전도사님이나 한국 IVP보다 생각이 부족해서 급진적 제자도란 제목을 달았겠느냐는 겁니다.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책의 내용이 급진적이지 않은데 왜 급진적이라고 했느냐는 비판과 질타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시건방진 편집자들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 비평가와 독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IVP 편집자들은 존 스토트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그리고 신학자들과 독자들의 권리를 빼앗아 오버를 한 것입니다. 그건 당신들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 저와 같이 애정을 가진 독자들이 존 스토트에게 해야 할 비판입니다. 당신들의 역할은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편집으로 밥을 먹고 사는 양반들이 팩트와 의견,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정말 어처구니 없습니다."

 

 

4.

이제 신현기 대표님께서 쓰신 입장문에서 조금 사실과 다르게 읽으셨거나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은 듯 하여 그 부분에 대한 해명으로 저의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신 대표님은, "이번 지강유철 선생님의 IVP 비판은 사실과 다른 면을 단정하여 논거로 삼았다는데 문제가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강유철 선생님은 IVP가 좌파 혐오증, 보수지향성, 상술, 심지어 윗선이나 데스크의 입김 때문에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IVP 구성원들은 어찌 감히 OOO와 IVP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 같습니다.”

 

이 대목은 신 대표님께서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이나 페이스북의 제 낙서를 오독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신 대표님께서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IVP 대표이자 평생 책을 만들어 오신 분이 아니라 길거리에서나 아무 교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분이었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눈에 보기에도 일상의 대화에서 '나는 그렇게 단정한 것이 아니라 가정법으로 썼는데 당신은 왜 그걸 단정했다고 말하느냐" 따위의 문제 제기가 쪼잔해보이거든요. 하지만 신 대표님이나 IVP에는 쪼잔하게 보일 걱정하지 않고 제 문장의 오독 내지 오버한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글의 전문성에 있어서 신 대표님이나 IVP의 전문성과 얼치기 글쟁이인 저의 수준과는 비교조차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 같이 우리말 문법이나 띄어쓰기 조차도 종종 틀리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매일 책을 만드는 분들이, 제가 "IVP가 좌파 혐오증, 보수지향성, 상술, 심지어 윗선이나 데스크의 입김 때문에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단정하신 것은 아쉽습니다. 아니 좀 안타깝습니다. 날선 비판을 받는 입장에서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문장을 꼼꼼하게 읽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그래도 입장문 발표라면 텍스트를 가지고 말씀하셔야지 그 텍스트에 대한 주관적 해석으로 말씀하신 것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신 대표님께서 저의 글에서 문제를 삼으신 부분에 대한 뉴스앤조이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수적 기독교는 '급진적'이란 단어를 좌파 용어라 생각해서 싫어하고, IVP는 독자들의 이런 경향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급진적 제자'를 포기하고 '제자도'란 제목을 선택했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런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IVP는 다른 저자도 아닌 존 스토트의 책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사태를 책 제목에서 '급진적'이란 단어 하나 뺀 것을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그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급진적'이란 단어가 빠진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읽습니다."

 

신 대표님의 입장문이 제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뉴스앤조이 글만이 아니라 페이스북에 쓴 내용까지 문제를 삼으셨기에 그 부분도 인용해 봅니다.

 

"우리 사회에 "급진적"이란 단어는 좌파의 용어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출판사가 조심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판매와 직결되는 문제일테니 말입니다. 또 한편에선 출판사의 데스크 이상에서 그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느껴서 판매보다는 윗선의 의지 때문에 "급진적"이란 단어가 배제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그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동했을 수도 있겠지요."

 

제가 쓴 "~다면 이렇다"는 가정문이 "지강유철 선생님은 IVP가 좌파 혐오증, 보수지향성, 상술, 심지어 윗선이나 데스크의 입김 때문에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단정하시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저는 IVP에 있는 좌파 혐오증과 보수 지향성, 상술, 데스크 입김 때문에 제목이 세탁되었다고 단정한 것이라 아니라 만약 그런 요인이 작용하여 제목이 세탁되었다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썼습니다. 해명글이 길어져서 민망하지만 저의 이 글은 욱 하는 마음에서 며칠간 밤새워 쓴 글이 아닙니다. 저는 '제자도'가 출간되고 난 직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부분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홧김에 쓴 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관계 확인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제가 기자가 아니라 보통의 독자인데, 그런 독자마저도 출판사에 일일이 물어보고나서야 글을 써야 한다면 거기엔 선뜻 고개를 조아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IVP는 정부기관이나 기업이나 기무사 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려있는 곳이지만 독자가 불만을 토로하려 할 때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서야 글을 쓰라는 것이라면 독자로서는 너무 권위적으로 느껴지거나 글을 쓰지 말라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 말의 요지는 사실관계 파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기자와 독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보다는 독자들에겐 좀 실수가 있더라도 포용해주고 겸손하게 잘못에 대해 "건 이렇습니다"라고 해명해 주시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5.

신 대표님께서 또 하나 문제삼으신 대목은 모 출판사와 관련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 역시 대표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민망하실지를 상상하면 제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입니다. 물론 저는 신 대표님께서 다른 출판사에게 그런 의식을 드러내셨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대표로서 그런 편견을 정책에 반영하셨을 것이라곤 꿈에서도 상상치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IVP 전, 현직 간사님들에게 그런 의식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한 분에게서만 확인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정도만 언급해 두겠습니다.

 

6.

이제 글을 끝 맺으려 합니다. 저 역시 글을 쓸 때 뿐 아니라 글을 발표하고 나서 하루에 두 세 시간 뿐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습니다.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나왔던 댓글보다 훨씬 혹독한 비판을 각오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이 불화하면서 몸에 이상증세가 없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끊임없이 댓글 쓴 이들을 이해한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더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여유를 부렸지만 몸은 그런 생각을 배반하더군요. 하지만 그보다 저를 잠못 이루게 만든 것은 신현기 때표님 걱정이었고, 저와 원고를 주고 받는 일을 하였던 천서진 간사님, 노종문 편집장님, 무엇보다 한 번도 만나거나 말을 섞은 적은 없지만 '제자도'를 책임편집한 임혜진 간사님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글을 발표하였고, 댓글이 뜨거워지는 상황에서 천 간사님이나 노종문 편집장님, 그리고 임혜진 간사님께 이런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병 주고 약 주냐?"고 하시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 대표님과는 몇 차례 쪽지를 주고 받아서 부담이 덜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송구스런 마음이 희석되지는 않더군요. 관계된 분들에게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지 모르겠지만 저의 기본적인 입장은 간사 한 분 한 분에게는 별로 불만이 없습니다. 저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IVP에 대한 문제제기였음을 말씀드려 둡니다. 저는 '도적덕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니버의 입장에 공감하거든요. 다시 한 번 보여주신 마음과 써 주신 입장문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2011년 10월 8일

지강유철

 

추신:

1.노트에 글을 쓰니 잡지나 책을 의미하는 기호를 자꾸 거부해서 불가피하게 본문에서는 책 제목을 작은 따옴표로 처리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2.신현기 대표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영국 IVP와 연락을 취하셔서 책 제목과 관련하여 영국 IVP에서는 편집자와 저자 사이에 어떤 토론과 협의 과정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다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영국은 한국처럼 래디컬이란 단어에 대한 과민 반응이 없고, 존 스토트가 급진적이지 않기 때문에, 또는 단순히 제자도가 급진적 제자보다 더 의미를 잘 전달한다는 우리 방식의 문제가 없어서 아무 이견 없이 책 제목을 정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3.

본문에 기록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는 이승장 목사님입니다. 선교단체의 원로 가운데 한 분이신 목사님께서 이 논쟁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신형기 대표님의 글을 '공유'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아니 너무 황송했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비평으로서 제자도란 제목이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제목으로 '제자도'가 더 좋다는 말씀은 조금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논쟁은 어떤 개인의 해석이나 취향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 제목에 담긴 저자의 의도를 출판사가 왜곡했느냐 아니냐를 둔 논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하여 황송하게도 후배의 글을 '공유'해 주시는 모습은 감동입니다. 더 강건하셔서 오래 오래 저희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1/10/12 00:29 2011/10/1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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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어제는 성하가 잘못한 일이 있어 아내가 꾸짖는 중에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사실 아이가 사과는 정말 잘한다)하며 땅을 치고 울었다...가 이내 또 잘 논다. 시간이 조금 흘러 아이가 또 사고를 쳤다.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는 즉시 혼을 내려 했지만 아내가 말했다. "방금 혼냈는데 또 혼내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아?" 성하가 내 눈치를 본다. "아빠가 화가 났지만 또 혼내지는 않을거야 대신 다시 그러면 안돼, 알았지?" 아침에 출근하여 생각하니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는데 아내의 순간적인 판단이 항상 옳다. 신이 엄마에게는 육아에 있어서는 특별한 판단력을 주시는 듯 하다.

 

 

 '11. 10. 7

2011/10/07 23:40 2011/10/0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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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내와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하가 아내를 가리키며,
"얘가 여보야야?" 한다. ㅋㅋㅋㅋ
호칭을 배워가는 성하를 보며 잠시 웃었다.

 

 

'11. 10. 6

2011/10/06 23:40 2011/10/0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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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기타 이슈들
층위의 생각이지만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참 현실적인 이론이란 생각을 했다.

이른바 '신학 혁명의 구조'라고 패러디 해도 될만큼 역사적 논쟁들에 있어, 두 개 이상의 양립하는 이론들이 충돌할 때 실제로 그 이론들의 흥망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포퍼의 견해처럼 진위를 따져서 어느 하나가 바늘에 풍선이 터지듯 펑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이론이 양립하며 나름의 세를 유지하다가 어느 한 이론이 점점 소멸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이론은 그것을 고수하기 위한 입장에서 보수적 권위를 내세우고 새로 등장한 이론은... 기존 이론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풀이(Problem Solving)를 단행한다. 따라서 두 개의 이론은 마치 다른 문제를 풀고 있는(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두 이론은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며 라이트와 파이퍼도 현재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지금은 파이퍼와 라이트의 이론의 중첩기라 할만 하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기에는 어느 한 입장을 버리지 않도록 더글라스 무처럼 양 이론을 포용하는 입장(수정된 개혁주의적 입장)도 등장한다! 풍요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파이퍼가 '칭의논쟁'에서 휘청거리지도 않는 라이트에게 너무 깊이 결정타를 날리려다 빗맞추었다고 느낀다. 그가 바로 그 '파이퍼'라는 점에서 조금은 걱정스럽다.



*관련기사

[CTK] 톰 라이트, 적인가 동지인가
http://www.christianitytoday.co.kr/inews/inews.html?oo_id=469&oo_day=20110906185705&code=200-015&mode=view

[21세기 신학자들] (41) 더글러스 무 미국 위튼대학교 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321960
2011/10/06 21:27 2011/10/0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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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며칠 전 버스를 탔다. 안으로 들어가서 여성분 앞에 섰는데 가슴이 많이 패인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의식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고,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가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마주치고서 즉시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놀라서 그 다음 행동을 고민하는 듯 했다.

멍하게 있던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직감했고 - 엄밀히 말하자면 내 시선이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직감했고 - 뒷걸음치며 과하게 고개를 돌려서 다른 쪽을 바라봤다. 급한 뒷걸음질로 나는 뒤에 서 있던 남자와 부딫혔고 그는 '아이씨~'하며 짜증스런 소리를 내뱉었다. 난 뒷사람에게 목례로 사과하고 붉어진 얼굴과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시선이 그쪽에 머물러 있었지만 정말 보지 않았다. 아니 '의식하며' 본 게 아니었다. 사실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쪽을 보지 않으려면 과하게 고개를 획 돌리고 있어야 했었다. 생각을 하다보니 그렇게 오버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그녀 쪽 어디를 봤더라고 날 째려보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감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상상하는 나의 한심한 모습을 떠올리니 이번엔 내가 도리어 화가 났다.

'뭐냐.. 옷은 왜 그렇게 파지게 입고, 사실 난 당신 옷에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날 싸이코 변태 아저씨 취급하는 거냐.' 머리속에서 별 생각이 다 났다. 흥미롭게도, 나는 오해를 받자마자 그녀를 미워했고 내 행동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에 대해 인식 속에서조차 침묵했다. 내 동기가 중요할 뿐 그녀가 받은 불쾌감, 위협감, 그런 것들은 사실상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거의 99%의 남성들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을 때 '주관적인 모멸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대목에서 흥분한다. 논리적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명수인 '남성들'의 잣대에서 '여자 사람'의 개별적 성향에 따라 절대적 기준없이 사과해야 하거나 안 해도 되는 상황, 처벌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다. 해서 남성들은 '주관적 모멸감'에 대한 처벌에 대해 윤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교통법규 같은 규칙으로 인식한다. "IF 불쾌하다고 하면 THEN 당장 사과한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버스안 그녀가 불쾌해 했다는 점을 공감하지 못하는 나처럼.

또한 다수의 남자들은 성희롱 문제 해결 혹은 예방을 위해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대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한마디로 직장 동료가 아닌 단란주점에서 부르면 나올 법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더듬거나 추태를 부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진일보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남성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때리고 앉았으면 동일한 문제가 됐을까.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같은 의미에서 남성 특유의 동료의식을 버리고 여성을 여성으로 대해야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닐까. 이는 성 불평등과는 다르다. 농담을 던지며 가볍게 몸을 두드리는 게 남성들에게 허락되고 그것이 우정의 한 표현이라고 여성에게도 그렇게 하고 그것의 의도를 존중해달라는 남성들을 우리는 가감없이 '변태'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은 파진 옷과 타이즈를 입고 있어도 그 몸매를 주시한다면,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런거다. 성적 평등과 성적 구별은 엄연히 다르며 그걸 놓친다면 당신은 억울해하면 분노하는 '성추행 변태 아저씨'가 될 것이다.

아내는 종종 나를 '게이'로 분류할 정도로 여성적이라고 평가하지만 나도 때때로 마초적 성향이나 가부장적 정서에 깊이 매몰되어 있음을 의식할 때가 많다. 버스 안에서의 사건이 이를테면 그렇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녀였다면 어땠을까. 한껏 멋내려고 차려입고 버스에 앉았는데 어디서 거구의 아저씨가 앞으로 다가와 내 몸을 눈으로 훑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게 있었을까. 모든 걸 떠나서 일단 불쾌하고 한편으로 무섭지 않았을까. 만일 왜 쳐다보냐고 소리질렀을 때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내가 언제 쳐다봤냐'고 '난 그냥 멍때리고 있었다'고 도리어 화냈다면 어땠을까. 그를 이해하고 공감했을까. ...혹은 경찰에 신고했을까.
2011/10/05 01:03 2011/10/0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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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IVP 제자도 논쟁

‘제자도’ 관련 토론에 대한 IVP의 입장 (페이스북 글)

/신현기 대표

 

 

지강유철 선생님의 뉴스앤조이 글을 통해 소셜 공간에서 벌어진 토론을 지켜보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출판사로서는 가급적 개입하지 않고 독자들의 생각을 더 듣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IVP가 더 들어야 할 쓴 소리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매우 좋은 관점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출판사는 독자들로부터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토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독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입는 모습은 저희에 대한 비판보다도 훨씬 저희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라도 저희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1. 지강유철 선생님의 IVP에 대한 비판(토착과 참여를 강조하는)을 달게 듣습니다. 저희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극복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저희의 능력 부족과 게으름에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지강유철 선생님뿐 아니라 소셜 토론을 통해 나타난 여러 독자 분들의 애정 어린 혹은 따끔한 질책을 겸허히 듣습니다. IVP 살림을 오랫동안 책임 맡아 온 저의 생각은 동료 간사들에게 보낸 다음 글로 대신 피력합니다.

 

“나는 지강유철 님의 비판을 남에게 하는 비판으로 읽지 않는다. 기대했던, 크게 보면 같은 진영이어야 할 출판사에 대한 "자아비판"적 성격을 갖는다고 읽는다. 그랬기에 그가 글의 탄탄함이나 사실여부에 신경을 덜 썼을 것이라고. 그래도 ‘진정성’만을 읽어내는 것이 내겐 더 다급하다. 과거 우리의 아픔을 되새겨 볼 때, 소위 "우리 편" 안에서의 자아비판에 대하여도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2.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라는 지강유철 선생님의 일갈이 있었습니다. 어디 존 스토트뿐이겠습니까? 책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책의 내용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공적 개인적) 삶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습니다.

3. 많이 궁금해 하실 제목 선택 문제입니다. 독자들로선 당연히 자신의 관점을 들어 출판사의 선택에 대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판은 출판사에게 약이 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제목 문제로 저희에게 직접 문의하셨다면 벌써 소상히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글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제목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아무리 대가의 제목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책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제목은 우리 상황과 독자들을 고려하여 만드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래서 제목 짓기야 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출판사도 원제를 자기들 마음대로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한다면, ‘급진적/철저한/근본적 제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제자도’를 선택했습니다. 무조건 많이만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제자도’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독자일수록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들도 머리말 네 쪽만 읽으면 radical에 대한 저자의 뜻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존 스토트가 말하는 radical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을 이 책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닐 것입니다.

 

‘급진적 제자도’도 좋지만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날것 그대로” 제.자.도. 석 자를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존 스토트가 제자도를 말한다면 과연 무엇을 말할지에 대한 궁금증 유발형 제목이 급진적 제자도라는 완성형 제목보다 더 흡인력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더구나 radical을 과연 ‘급진적’으로 번역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희 역시 본문 안에서 그렇게 번역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원제가 The Radical Disciple이니 사실 몇몇 분들이 주장하시는 ‘급진적 제자도’ 자체도 ‘존경하는’ 그 분의 제목을 그대로 직역한 것은 아닙니다.

 

4. 지금까지 말한 입장을 조기에 밝히는 것이 뭐가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지강유철 선생님의 IVP 비판은 사실과 다른 면을 단정하여 논거로 삼았다는데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저희가 나서서 바로잡는 단순한 행위마저도 마치 저희가 지강유철 선생님의 애정 어린 비판에 대해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비쳐질까봐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지강유철 선생님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그 논거로 삼은 사항들의 진위 여부를 말씀드려야 더욱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강유철 선생님은 IVP가 좌파 혐오증, 보수지향성, 상술, 심지어 윗선이나 데스크의 입김 때문에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희 역시 혐오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물으시면, 저희는 쥐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IVP 구성원들은 어찌 감히 OOO와 IVP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IVP 지체들은 P스럽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의 잣대로 작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 친한 관계인 이웃 출판사를 보기가 민망해졌습니다. 찾아가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우스워졌습니다. 물론 IVP 구성원 가운데 철없는 누군가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할 가능성마저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만, 85년부터 IVP에서 일해 온 저는 한 번도 그러한 태도를 지니거나 정책에 반영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지강유철 선생님은 자신의 글 가운데 살짝 ‘가정’을 끼워 넣기는 했지만, 그런 글쓰기는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부정확한 것을 사실로 믿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농부는 쌀로 말하고, 요리사는 음식으로 말하고, 출판사는 책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낳아놓은 자식이 칠팔백 종이 되니 독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비판과 오해를 견디기 싫어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번에도 지강유철 선생님이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 것이니 경청하고 반성하며 결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사실로 인해 지강유철 선생님이 진짜 말하고 싶은 뜻에도 누가 되고, 토론 과정에서 독자들끼리도 마음을 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족한 글이나마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판단착오가 있다면 가르쳐주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날카롭고 거센 토론은 계속하시되,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독자, 필자, 출판사가 공히 참여할 수 있는 진짜 ‘제대로 된’ 출판 비평과 도서 비평이 자리 잡을 수 있으면 하는 희망도 있습니다.

2011/10/05 00:27 2011/10/0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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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 <제자도>. 그러나 책의 원제목은 '급진적 제자도'이다. 책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제목을 왜 '급진적 제자도'라고 했는지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이 빠진 책의 제목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본다. (자료 제공 한국 IVP)

누추한 제 서재의 책을 출판사별로 진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책을 빨리 찾기 위한 조치였지만 얼마쯤 지나니 그보다는 좋아하는 출판사 책이 늘어나는 걸 더 뿌듯해 하고 있더군요. 덕분에 한길사·까치·창작과비평사·문학과지성사·서광사·나남 같은 일반 출판사, IVP·홍성사·크리스천다이제스트·여수룬·나비·한국신학연구소·생활성서사 등의 기독 출판사 책들이 서재의 좋은 자리를 꿰차게 되었지요.

 

그제 서재를 둘러보다 웬만한 기독 백화점보다 IVP 책이 더 많지 싶어 놀랐습니다. 주요 저자 40명의 책 가운데 130여 권이나 가지고 있더군요. 2000년대 초반까지는 IVP 책이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고마움과 긍지도 커졌습니다. 그러나 책은 좋아하지만 실천에 둔감한 지식인들이 점차 싫어지다 보니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이 늘어나도 별 감흥이 없더군요. IVP가 만든 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번역 위주의 출판을 언제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선생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거든 언행을 삼가라"는 말을 좋아했고 늘 이 원칙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저는 아직도 사랑의 동기가 아님에도 비판에 열을 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IVP의 잘못을 꼬집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랑의 동기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아직도 IVP의 책을 배제한 신앙생활을 상상치 못합니다. 가끔 IVP에 실망할 때가 없지 않지만 IVP가 더 좋은 출판사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언제부턴가 IVP 신간에 눈에 거슬릴 정도로 추천사들이 많아졌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작품일 경우에는 추천사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꽤 알려진 저자의 책에까지 추천사가 넘쳐 나면 속이 더부룩해집니다. 170여 쪽뿐이 안 되는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 <제자도>를 펼치니 15개나 되는 추천사가 날 좀 읽어 달라고 아우성이더군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도>의 격을 높이고 판매에 도움이 될까 싶더군요.

 

대체적으로 상품 홍보는 제품 인지도가 떨어지거나 상품의 질에 자신이 없을 때 열을 올리게 됩니다. 한 기독교 월간지의 지난해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크리스천이 가장 선호하는 저자는 존 스토트입니다. 원서 <제자도>에 나오는 9개 추천사야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추천사를 6개나 추가한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당사자들에겐 송구한 이야기입니다만 '급진적 제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다수 국내 추천자들의 추천사를 읽어야 하는 일은 좀 괴로웠습니다.

 

제가 존 스토트를 처음 만났던 1993년에 그분은 일흔셋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 책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책을 구입했습니다. 실제로 2000년 3월 4일, 정성욱 교수의 존 스토트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복음주의의 기본진리>가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 예상했더군요. 하지만 존 스토트는 11년을 더 살았고, <제자도>를 쓰면서는 이런 글을 남겼지요.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급진적 제자>입니다. 한국 IVP가 책 제목을 <제자도>로 바꾼 것은 의외였습니다. 아니 충격이었습니다. <제자도>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핵심만을 추려 다시 쓴 책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작품인데다 가격까지 착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더라도 IVP 재정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만큼은 존 스토트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기품 있게 만들어 주길 바랬습니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제자도>를 볼품없게 찍었다는 뜻이 아니라 책 제목을 꼭 그렇게 바꾸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출판사도 존 스토트에 관한 한 IVP의 전문성을 따라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제자도>서문에서 존 스토트는 이 책 제목을 왜 '급진적 제자'로 했는지 분명히 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편집자라도 '개신교계의 교황'이란 소리까지 들은 그분의 책 제목을 멋대로 바꾸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보수적 기독교는 '급진적'이란 단어를 좌파 용어라 생각해서 싫어하고, IVP는 독자들의 이런 경향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급진적 제자>를 포기하고 <제자도>란 제목을 선택했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런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IVP는 다른 저자도 아닌 존 스토트의 책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사태를 책 제목에서 '급진적'이란 단어 하나 뺀 것을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그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급진적'이란 단어가 빠진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읽습니다.

 

존 스토트는 50권이 넘는 자신의 저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았습니다. '다른 어느 책보다도 영혼과 마음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더 주목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문서선교회(CLC)에서 번역한 초판과 개정판은 물론 IVP가 새로 번역한 판본들까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제가 가장 자주 참고하는 존 스토트의 책이기도 합니다.

 

제 신앙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려면 <변론자 그리스도>와 <균형잡힌 기독교>, 그리고 BST시리즈 중 사도행전,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가장 의미 있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가 복음주의권 신학자나 목회자의 치명적 약점인 반지성주의와 현대사회에 대한 무관심에 함몰되지 않은 저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은 복음주의가 세상에 내어놓은 그 어떤 책보다 의미 있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스토트가 '런던 현대 기독교 강의'가 주관한 새 천년 기념 강연을 토대로 쓴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이번 추석에 새로 읽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이 책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종교 다원론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대와 비난에 휩싸일 것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보다 현대 세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인물 아닙니까.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다시 읽다 보니 추석을 뜨겁게 달궜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무모함이 오버랩되더군요. 혹독한 반대에 직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과 같은 분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한 존 스토트나, 검찰의 발표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박명기 교수에 주었다고 스스로 자백한 곽노현이나, 무모함으로 치자면 난형난제입니다.

 

<복음과상황> 발행인 김회권 목사가 예리하게 꼬집은 것처럼 존 스토트는 '미국 주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의 외식에 도전하고 자유주의적인 급진 윤리를 주창하다가 닭장차에 갇혀 잡혀가던 하비 콕스'만큼 영국 백인 중산층과 긴장 관계를 형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동시대를 산 영국의 버트란드 러셀처럼 '반핵운동을 하다가 구류되고 투옥되는 고난을 자초'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에게 열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구티에레즈 신부나 보프 신부 등 좀 더 급진적인 복음 전파에 주력했던 사제들과의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처럼 '로잔언약 5항의 정신을 발휘해서 한국의 박정희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신앙 성명 한두 줄'도 발표한 일이 없습니다. 본회퍼의 예언자적 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라크 침략이나 1980년대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 대하여 예언자적 탄핵'이 존 스토트의 입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를 타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한계를 드러낸 존 스토트의 급진적인 제자도 타령을 하고 있을 여유가 제겐 없습니다. 그분의 급진적 제자도에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 기독교적 지성의 절반을 형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 IVP의 문제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더 시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IVP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40명의 주요 저자와 그들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국 저자가 4명이니 외국 저자의 비율이 90퍼센트나 됩니다. 반면에 IVP와 함께 기독 출판사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인 홍성사의 국내 저자 비율은 7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IVP 구성원들은 '어찌 감히 홍성사와 IVP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일지 모르겠습니다. 수준이라는 것이 글의 완성도나 수준 높은 번역 등으로 제한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IVP 지체들은 'P스럽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의 잣대로 작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년 나이의 IVP가 아직도 외국 지식의 대리점이고 소매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런 평가에 대해 'P스럽다'는 기준이 어떻게 적용하는지 궁금합니다. 수준이 낮고 글이 안 돼서 한국 저자의 책들을 내기 곤란하다는 변명은 자신들이 얼마나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그 기준을 버리지 않는 한 이 땅의 아픔과 문제들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IVP는 수준 높은 저자를 발굴, 육성하기 위해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행착오 없이 어떻게 이 땅의 기독 출판문화가 성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IVP가 단순히 하나의 출판사가 아니라 한국기독학생회의 정신을 따라 문서 사역을 하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30년 넘도록 아직도 번역에 목을 매고 있다는 현실은 어떤 변명과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가 1974년에 만든 국제 랭햄 파트너십에 속한 프로그램인 랭햄 문서 사역에 그의 모든 인세 수입을 기부했습니다. 제3세계의 목회자, 신학생, 신학교 도서관에 복음주의적인 책들을 보급하기 위해서였지요. 랭햄 문서 사역은 제3세계들이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저술과 출판을 육성'시키는 일이 자신들의 중요한 존재 이유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지요.

 

한국 IVP는 랭햄 문서 사역의 이런 정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제기독학생회 역시 이런 기조 위에 서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지 못한다면 최근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한국기독학생회의 젊은 학생들은 데이트, 사랑, 결혼, 이혼 등의 문제들마저도 여전히 번역서에서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데이트나 결혼과 같이 사적이고 섬세하고 그 지역의 문화가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를, 언어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가치 체계가 다른 외국 서적에 의존하는 것이 제 눈엔 코미디로 보입니다. 저는 IVF나 IVP가 이런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촉구합니다. 외국 서적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데이트나 결혼과 같은 문제의 진단에서 무기력하고 처방에서도 문제 해결은커녕 또 다른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정치나 사회참여와 같은 문제를 들여다보면 번역 위주의 출판문화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집니다. 한국기독학생회가 이 땅의 민주화의 기로에 서 있던 1991~1992년 당시 '6개대 사태'로 휘청거렸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원인이 저는 번역 위주의 출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의 절박했던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에 IVF가 큰 홍역을 치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번역 위주의 출판문화에 깃든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신앙과 삶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서양 기독교가 설정한 아젠다에 국한하지 않고 지금 이 땅에서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문제들에까지 확장하는 일에 서툴렀기 때문에 6개대 사태가 그런 결론밖에 도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문제의 해결 또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6개대 사태와 관련해서 저는 이제까지 한기연 쪽 주장에 더 많이 익숙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위해 IVF 서울지방간사회가 1991년 11월에 발행한 두 권의 자료집인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Ⅰ-IVF 사회참여 교육지침과 그 비판>과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Ⅱ-6개대 사태 설명과 문건 모음>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또한 IVF 이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김영철 목사님께서 쓰시고 IVP출판사가 낸 <지성사회 복음화 50년>의 해당 부분도 정독했습니다. 김영철 목사님의 책은 '내가 본 IVF 50년의 발자취'란 부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6개대 사태 관련 대목에서 객관성을 크게 결여한 서술을 읽으며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당시 제출되었던 문건들을 공정하게 소개하는 것은 역사 서술에서 기본인 것 같은데 이분이 과연 최소한 서울지방간사회가 낸 두 권의 자료집은 정독하셨는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당시 IVF 학생들에게 6개대 사태의 핵심적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 고직한 총무의 해임이었습니다만 <지성사회 복음화 50년>은 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지면에서 이 부분을 더 논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존 스토트의 마지막 작품에서 '급진적'이 빠진 부분을 보면서 자꾸 시선이 6개대 사태로 이동함을 느낍니다. 당시 급진적인 제자도 원칙에 충실하게 문제를 풀지 못했던 아픈 역사가 아직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IVF나 IVP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IVP가 우선 존 스토트 만큼이라도 급진적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성경적인 균형의 문제가 출판에서도 적용되길 기대합니다. 존 스토트로 밥을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IVP라면 최소한 그 기준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존 스토트를 지적 및 영적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한국기독학생회 역시 학생들을 리더로 세울 때 사역을 마칠 때까지 이성 교제는 안 된다는 기준 등의 근본주의적인 보수성 또한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최근에 잘 아는 모 대학의 리더가 이성 교제와 리더 중 택일하라는 요구 앞에서 끝내 '남친'과 한국기독학생회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6개대 사퇴 때 기록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주초의 문제와 노동가요 등에 대해 한국기독학생회 간사회가 얼마나 과민 반응을 보였는지를 보는 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때보단 이러한 문화적 보수성과 인권 의식이 많이 개선되었을 것이라 믿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IVF 출신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이 땅의 지성과 문화에 소중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알 만한 소설가나 영화감독 중에 한국기독학생회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고, 양심수들이 갇힌 감옥이나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에서, 그리고 성적 소수자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IVP가 만든 책으로 인권 신장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VP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지강유철 / 100주년기념교회 부설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장기려, 그 사람> 저자

2011/10/01 00:26 2011/10/0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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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엉뚱하고도 냉정하게 들릴법한 이야기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에서..)

전업주부의 가치는 얼마일까.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무상으로 일하는 아내의 비용을 산정해보자는 말이다. 아내가 아니고 어떤 여성을 고용했다 치자. 나는 아들이 있다고 치고. 집에 상주하면서 육아를 한다면, 아이의 세끼 식사와 목욕, 산책 같은 것을 시켜준다. 내 경우, 아침은 상관없지만 저녁은 차려주고 방청소와 내 옷 빨래, 장보기 등등을 저녁 10시까지 수행하고 잔다면 비용은 얼마가 들까. 일당 10만원? 15만원? 20? 일단 10만원으로 잡고 주말은 전혀 사람을 쓰지 않고 내가 모든 일을 한다고 치면 10만원X20일=200만원이 든다.

게다가 잠자리도 같이 한다. 이 대목에서 남편들은 '잠자리는 함께 즐기는 것'이라고 화를 낼 수 있다. 좋다. 좀 애매하긴 하지만 내가 원할 때 잠자리를 권하는 것과 동의했으나 상대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표현할 경우만 카운트하자. 이 비용은 어떨까. 아저씨들 단란주점 2차 비용 정도로 산정하면 될까. 나는 시세를 잘 모르니 대략 매달 100만원 정도 든다고 치자.

내가 생판 모르는 여성을 고용해서 내 아내 수준의 '일거리'를 요청한다면 최소 300만원 이상은 매달 지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관리비, 생활비 등등이 따로 나가야 하고 주말에 출근을 하거나 일이 있어서 하루이틀 더 써야 한다면 아마 월 350~400만원 선의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고비용의 인력을 실비로 사용하면서 돈벌어다 준다고 생색도 내고 육아를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직장에서 임신했다고 알아서 눈치주고 해고시키기도 하지만) 집에서 니가 하는게 뭐냐고 호통치기 일쑤이나 바로 그 만만한 아내가 하는 노동은 최소 월 300만원 이상의 노동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남자에게 직장그만두고 같은 일을 시킨다면, 그는아마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눈치를 보거나 심한 굴욕감에 그보다 적은 보수를 받는다 해도 분명 직장생활을 선택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거다. 고비용의 노동을 거의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들이 특히 남성들이 꺼려하는 저계급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아내라는 직업'은 통계치가 이야기하듯 여성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남성들이 하도 그 얘기를 못알아듣는 거 같아서 '남성들의 언어'로 한번 계산해봤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이거다. 월급을 받으면 급여로 아내에게 합당한 비용을 지불해라. 그 후에 교육비, 생활비 등 가정에 필요한 돈을 논의하자. 분명 당신은 자동차를 사거나 아이패드, 갤럭시탭을 지를 때 아내에게 돈을 빌리거나 아내에게 고비용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주말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취미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2011/09/28 01:02 2011/09/28 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