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교]를 봤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20년만에 처음 보는 소설인 것 같다. 은교를 보게된 건 영화 [은교]를 보고 영 찜찜했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는 사실 별로였다. 아니 나쁘지 않았지만 플롯이 좀 성글게 느껴졌달까. 결국 열흘을 보내고 소설을 전자책으로 다운받아 읽었다.
일단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단편 '은교'란 소설은 없다.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자기 스승 이적요가 몰래 써 놓은 은교(에 관한 개인의 기록)을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함으로써 갈등이 심화된다. 문제는 소설은 영화에서처럼 이적요가 불같이 대노하거나 두 사람의 갈등이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은 사제간이며 글쟁이들인지라 미묘하게 얽히는 - 물론 중간에 은교라는 17세의 소녀를 두고서도 -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싸이클이 존재하는데 영화는 이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뭉개버린다.
특히 마치 은교를 사이에 두고 욕정과 질투에 불타는 두 남자의 대결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는, 마지막 서지우의 차사고 장면에서도 이적요가 미리 자동차를 고장낸 사실을 알고 분노의 질주를 하다 중앙선을 고의로 넘으면서 사고가 나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소설에서는 그 사실을 안 서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한다. 이는 오랜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데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렇게 서지우는 죽기 직전까지 이적요를 놓지 못했다. 이적요 시인 또한 차를 타려는 서지우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잠시나마 차를 타는 것을 말리려했다. 은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둘은 서로 많이 아꼈노라고 회상한다.
은교와의 관계도 그렇다. 영화는 후반에 이적요가 이마에 키스를 하자 그를 재우고 서지우와 섹스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은교가 먼저 이적요에게 자신에게 키스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허나 이적요는 이마에만 키스를 하고 은교 또한 이적요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온다. (이 차이는 크다) 소설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이적요의 내외적 갈등들도 모두 삭제되었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은교와 만나기로 하지만 은교의 남친 행세를 한 서지우의 지인에게 길바닥에서 고딩을 희롱한 노인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그 사건으로 이적요는 심한 상처를 받는다. 이후에도 은교와 함께 들어간 카페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그 과정에서 겪는 노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특히 이적요의 과거사. 이렇다 할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겪지 못한 그가, 서지우를 질투하는 가운데에서도 셋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행복해하는 장면이나, 어릴 적 동네의 인민군 학생들에게 피터지게 맞던 자신을 구해준 D라는 처녀.(그녀가 이적요의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다) 얼마 전까지 만났던 후배 여성 시인과의 밀회가 자신이 원할 때 발기되지 않는 나이로 접어들면서 관계를 끊은 일 등. 은교보다는 이적요에게 상당히 많은 지면과 묘사를 할애하고 있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의 인생(인간성)을 잘라내버리고 은교에게 호감을 주는 '시적 천재성'(기능)만을 부각시켰다.
장면들도 영화에서는 들쑥날쑥하다. 집청소 알바를 하기로 한 은교가 바로 다음에 이적요의 집에서 잠을 자고 그날 밤 천둥소리에 이적요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자는 장면은 소설 속에서는 한참 후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시인 이적요가 17세의 은교에 대한 욕망이 발전하고 급속도로 안에서 번지다가 내적 갈등 후 그 아이를 내면 깊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지만 영화에서는 70대 노인의 '로리타 애착' 정도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다분하다.
서지우와의 관계도 삼각관계임에는 분명하나 둘의 갈등의 주변 상황들을 잘라내어 그 갈등의 깊이를 무디게 만들었다. 일례로 서지우는 인세 중 육천만원을 가로채지만 그 사실을 이적요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은교라는 단편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비평매체에 싣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그가 이적요의 단편 소설 몇 개를 훔친 뒤 그 결론 부분을 살짝 개작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적요가 불편해하는 것은 서지우가 도둑놈일 뿐 아니라 자신의 소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말을 수정하여 그 소설 자체의 통일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느 인터뷰 상에서 원작 소설가 박범신은 동명의 영화에 대해 비교적 좋게 평했지만, 내 생각에 그는 영화 은교에 대해 서지우의 각색처럼 불편하게 여긴 점들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소설 은교는 참 좋았고 영화 은교는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뭔가 잘못 손댄 '덧칠'처럼 느껴졌다.
사족)
영화 은교는 노출로도 홍보가 많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아쉬운 점을 짚자면 소설 은교에서는 서지우와 한은교의 섹스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적요 시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장면을 적나라한 영화 노출신의 하이라이트로 설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내 생각에 영화의 대중성을 고려해서 굳이 강한 베드신을 넣어야했다면. 서지우가 한은교를 모텔로 데리고 가서 억지로 잠자리를 갖는 장면이어야 했다고 본다. 그게 임팩트도 있고 서지우의 심리 묘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