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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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민자>를 봤다.
상당히 훌륭한 영화였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 제레미 레너라니.
그 연기만으로도 이미 영화는 하늘로 올라선다.
이미 <투 러버스>에서 보여준 감독의 독특한 느와르적
분위기도 좋았고.
그런데, 뭔가 불쾌하다. 뭔가가...
그 뭔가를 찾기 위해 며칠을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영화의 장면들을 이리저리 복기해보았다.
.
#2.
일단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한 여성의
한없는 추락을 소재로 삼고 있다. 
보는 내내 그 여성, 마리옹 꼬띠아르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여성, 끝내주게 예쁘다. 예뻐서 더 안타깝다. (원래 그렇다..)
내가 그녀를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부르노역의 남성은
이 이민 여성을 소유하려들고 클럽에서 춤을 추게하고 
결국 매춘에까지 끌어들인다.
하지만 '나쁜 남자' 부르노마저도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녀가 떠나도록 돕는다.
.
#3.
20년대 미국의 암울한 밤거리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없이 추락하는 내러티브.
흥미롭게도 그 많은 댄서들과 매춘부들 중 영화 속에서
그녀만이 누드장면이 없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은 야하다기 보다는 
불편함 나아가 불쾌함마저 유발하지만, 
유독 '예쁜' 그녀는 왜인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다는 듯
벗은 몸으로 목욕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침실에 눕지도 않는다.
그저 2달러에 그녀가 팔리고 있다는 대사가 그녀의 몸을 대신한다. 
물론, 
마리옹 꼬띠아르의 뛰어난 연기가 그 영화적 어색함을 무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녀만이 안타깝고 그녀만이 빛이 난다. 
.
#4.
나는 자주 영화를 평가하는 나만의 잣대로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특히 주변 인물들을 
감독이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정 인물을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배치한다거나
주인공에게 전적인 내러티브를 내어주는 경우
대체로 나는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내가 불편한 지점은 그런 거였다. 
'이민자'가 이민자'들'이 아닌게 불편했다. 
밑바닥 매춘부들로 전락한 
이민 여성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지나갈 때 모든 남성들이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여성 한명의 몰락에만 몰입하고 애틋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그 구도가, 또다른 소극적 '마초성'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
...
며칠 지난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5/10/02 22:28 2015/10/02 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