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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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스승의 날.

한때 특별한 스승없이 혼자 컸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 지적 여정에 도움을 준 유명인사(주로 책으로만 만난 분들)나 똑똑하다고 정평이 난 이들을 내 나름대로 내 '선생'이라고 칭하고 다니곤 했다. 교제가 없던 분들도 안면만 있으면 '당신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서 난 당신을 내 선생이라고 생각한다'는 류의 메일도 보내곤 했다.

물론 본인에게 '선생' 대접을 해드려서인지 대체로 회신이 왔다. 두세줄 정도의 간단한 답장.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간결하고 건조한 답장. 그때는 그런 답장마저도 소중했다. 그렇게 나의 멘토들은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유령 선생들을 붙들게 된 건 내가 성장하면서 만난 선생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으리라. 초중고 선생님들의 기억이 대체로 ...그리 좋지 않고 입시학원 선생님은 더할나위가 없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 선교단체 간사, 목사님들은 딱히 흠잡을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배울 구석도 마땅히 없어 보였다. (그 때는 그랬다.)

결국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들이 남의 집 아빠, 엄마를 동경하듯 나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남의 집 부모를 내 부모라고 부르고 싶은 욕망을 '선생'의 영역에서는 실행해 옮긴 셈이다. 내 주변에는 변변한 선생이 없으니 내 지적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은 분들을 줄을 세워 위치시킨 후 그들의 인가를 받는 방식.

이십대에는 그런 '너 내 선생님이야' 놀이가 재밌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게 무슨 선생님이냐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년에 한번도 만나지 않고 서신조차 교환하지 않는, 요즘같이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도 실시간으로 카톡을 주고받는 시대에, 아무런 인격적인 교제 없는 책 속의 주인공 혹은 내 지식의 한 프렉탈만을 차지하는 인물과의 지식 교환을 과연 사제지간으로 볼 수 있나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 이건 전형적인 왕따의 골방 놀이에 다름아니지 않나.

부끄럽게도, 이십대에 즐겼던 놀이 중 이른바 '알고 보니 너도 쓰레기군' 놀이가 있었다. 당시 구루의 지위에 올려 놓았던 3-40대의 활동가, 저자, 교계 인사들을 존경하는 인물pool에 상정했다가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거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나면 '쓰레기'로 간주하는 것이다. 은근 쾌감이 있었다.

'너 내 선생님이야'와 '알고 보니 너도 쓰레기였군'놀이는 내 왜곡된 스승의 개념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그리고 30대 후반에 나는 이 놀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선생 혹은 쓰레기로 상정했던 그들의 얼굴과 내 얼굴이 겹친다. 누군가에게 나도 선생과 쓰레기 사이를 오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좋은 사제지간은 인생 여정에서 자주 교류하고 손도 잡아보고 팔짱도 껴보고, 식사를 같이 하다 웃으며 밥풀도 흘려보는 관계가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제간에도 서로의 허물을 지적할 줄도 알고 그럼에도 신뢰를 잃지 않는 관계. 내가 뽀대나는 선생을 지명하고 어떤 이상적인 컬렉션을 모으는 것처럼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그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한 자위행위에 다름 아니란 생각.

탁월하고 현학적인 어떤 이상을 걷어내고 보면, 내 인생에도 많은 선생이 있었다. 내가 세운 높은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했지만 나를 아끼고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준, 활자화된 글로서가 아니라 나를 여러차례 찾아오고 연락하고 조언해 준 많은 인생의 선배들. 때로 그들이 '틀린 생각'을 했을 때도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었지만, 나는 그들을 떠났고 종국엔 기억에서 지웠다.

스승의 날. 나이를 먹을수록 당의정의 단맛이 사라지며 이내 찾아오는 씁쓸함을 감내하듯 내 흥미로운 놀이들의 뒷감당을 하느라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자주 한다. 아침에 문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이 똬리를 튼다...
2013/05/15 23:04 2013/05/15 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