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티베트 속담
애정하는 페친(이진오 목사님)님의 담벼락에 올라온 이 티베트 속담이라는 말을 아침부터 묵상 중이다. 쉽게 말해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없으니 너무 걱정말라는 말이다. 나름 위로가 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걱정은 '하는' 행위가 아니다. 걱정은 증상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걱정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스치듯 본 간판이나 무심결에 받은 전화, 부모의 말 한마디, 회사에서 전달된 공지, 친구의 행동... 이런 것이 내 머리 속을 복잡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현상, 증상이다.
이러한 걱정은, 심리학이 줄곳 떠들어대서 이제는 희화화되는 우리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자라면 서 주위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들은 외부 자극에 대해 취약하지 않다. 반대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서 항시 내가 주도적으로 내 정서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다짐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쉽게 말해 후천적으로 환경에 잘 훈련된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비교적 잘 이겨낸다.
이 두 극단을 제외하고나면 대체로 과거에 어떤 스트레스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일반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타인보다 걱정을 많이 하게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은 뭘 그리 걱정하냐고 걱정도 팔자라고, 과민반응하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지만 유독 나는 그 걱정에서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내면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 반대로 티베트의 속담에 기대어 걱정을 내 주도적 행위로 인식하고 걱정을 차단하려고 들면 상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활이 가능해진다. 매순간 자기 체면을 건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식은 땀이 나는 날도 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걱정이 생겼을 때 그 걱정거리에 침잠하는 것은 당연히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 걱정거리에 돌직구를 날려 걱정하는 것은 늪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평소와 달리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경우에 내가 그것에 유달리 취약하게 느끼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따라서, 내 생각에 걱정을 해결하는 바른 방법은 그 이슈에 내가 평소같지 않은 '그 원인'에 돌직구를 날리는 것이다.
질병은 취약해진 몸상태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질병에 유독 집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리적인 해결은 척척인 사람들이 마음은 미봉책을 자주 쓰려고 한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티베트 속담은 당의정과 같다. 달콤한 힐링 속에 쓰디쓴 고통만 반복될 여지를 남긴다. 내 생각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