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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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5)
- 직장인과 기독인 사이에서

 


어느 날 상사가 내게 주말엔 뭘 하고 지내냐고 묻길래 별 생각 없이 일요일엔 교회를 간다고 했다. 그러자 대뜸 실눈을 뜨며 "너 그런 것도 하냐?"라며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반응으로 인해 하루 종일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교회에는 뭐하러 귀찮게 다니냐고 물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나 같은 부류가 교회를 다닐 거라는 건 좀 의외라는 반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상사는 나 같은 부류는 어떤 부류라고 생각한 걸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는 술자리를 마다 않는 부류로 생각했을까? 아님, 식사 시간에 밥을 앞에 두고 잠시 묵념조차 하지 않는 부류로? 솔직히 그런 것보다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삶에서는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부류로 보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분은 기독인에 대한 안 좋은 면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해서 그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곤 했는데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했으니 내가 유별나 보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기독인은 어떤 모습일까.

 

때로 주변을 보면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부류의 직장인들을 만난다. 같은 선교단체 출신의 학사들을 만나면 주일성수나 경건생활을 규칙적으로 못한 지 오래되었다며 학생 때보다 망가져서 산다는 푸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주일에 교회에도 잘 가고 회사에서 신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식사 시간을 쪼개어 말씀을 나누고 퇴근 버스 안에서도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나만의 느낌일까. 난 교회를 다닌다고 자처하는 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혹은 교회의 지체들에게서 뭐라고 딱히 꼬집을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이기적이라고 할까, 혹은 냉정하다고 할까. 아무튼 그들은 쉽게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동료들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법이 없다. 주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하겠다는 말로 슬쩍 발을 빼기는 해도, 즉시 달려가 살펴봐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한 경우가 많다. 또한 사내의 불합리한 구조적인 문제나 집단 행동에 있어 자주 방관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업무를 하는 데에 있어 책임감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종종 듣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안 좋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나는 내 눈보다 더 부정적으로 기독인들을 대하는 직장의 동료들, 상사들과 함께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를 다닌다고 말한 그 날 이후로 나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정작 그 분에게 교회 다니는 후배 사원인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 날 이후로 나는 회사생활 5년 만에 처음으로 먼 발치에서 나란 사람을 돌아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많은 기독 직장인들과 구별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가. 사실 자신이 없다. 물론 나는 튀는 사원임에는 분명하다. 회사에서 있었던 진급자 회식날, 여성 도우미들이 나오는 유흥주점에서 한 턱을 크게 내라는 회식 분위기에서 가족과 자녀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식사 모임으로 하지 않으면 회식비를 안 내겠다고 우겨서 결국 진급자 축하 회식날 상사들의 가족들과 함께 주말 식사를 했던 적도 있었고, 회의 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의사 결정에는 굳이 나서서 따져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내에서 경조사가 생기면 항상 어디든지 가서 경사면 축하해주고 조사면 위로해주는 동료들도 많은데 나는 자주 그러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늦게까지 일을 마치지 못해도 나는 내 업무가 끝나면 언제고 별 고민 없이 퇴근했다. 솔직히 그간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어필은 많이 했어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희생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역으로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세속적인’ 직원들을 오히려 직장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부류로 취급하기도 하니, 사실 그간에는 회사 생활에서 한 발을 적당히 빼고 지내는 게 올바른 행동 같았다. 이 세상 집은 내 집 아니듯 이 직장도 내 진정한 삶의 터전이 아니리라!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이는 회사에 대한 희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일터에 속한 공동체 일원들에 대한 희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 속에서 기독인인 나의 자리 매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 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많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을 보며 때론 놀라고 때론 칭송하며 그 무리를 따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공유했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도를 따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낼 필요 없이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높은 도덕성과 헌신, 그리고 사랑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내 일터, 내가 속한 지역 사회는 어떤가. 그들은 내가 전도를 하고 다니지 않아도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나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나의 높은 도덕성으로 인해 매 순간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불합리한 업무에 또박또박 불만을 토로하기는 잘 하지만, 여러 일들로 힘들어 하는 주변 동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노력 없이 이름만 몇 번 불러대는 형식적인 기도로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리곤 하는 나와 같은 기독인에게서 진정 복음을 발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은 삶이자 일상,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예배당에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여기 저기에서 큰 소리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다 해도, 직장이나 지역 사회, 가정과 같은 일상의 구석 구석에서 섬기며 희생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서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실감한다. 굳이 식사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예수에 대해 마치 보험을 팔 듯 입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지 않아도 기독인의 주변을 통해 그들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의 현장성이 우리 기독 직장인에게는 부족하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교회 다닌다는 나의 고백에 누가 됐든 또다시 내게 “너 그런 것도 하냐?”는 물음을 던질 것이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8월호 기고글

2008/08/01 00:06 2008/08/01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