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물론, 조금 지나긴 했지만-영화 <쉬리>는 대단한 흥행 성공을 가져오고 있다. 물론, 많은 비판적 잡지에서는 이 흥행 성공의 요인을 언론계의 대대적인 광고, 홍보의 결과로 보기도 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줏대 없는 모방이었다고 나름대로의 평가절하를 하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의 깊이 있는 비평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분야는 내 전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쉬리>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어서 그것을 조금 얘기하고 싶다.
감동할(?) 부분에서는 감동하자!
주변이나 많은 영화 평론 잡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영화를 꽤나 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영화를 그저 흘러가듯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항상 그 영화의 화면 구성, 시나리오의 전개 양상, 혹은 이 영화가 아류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영화를 분석하려 하기 때문에 실상 영화 한 편에 그리 큰 감동을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를 보고는 정작 한다는 말이, "이 영화는 어떤 계열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 영화는 무슨 무슨 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구태 의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의 시나리오 전개는 상식 이하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말들이다.
물론, 평가는 중요하다. 이런 많은 비평이 있기 때문에 영화들의 질도 향상되는 것이며, 그럼으로 인해 영화를 보다 자세히, 그리고 바로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본인도 영화보다는 영화 비평에 더 많이 시간을 할애해서 관심을 가지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나친 비평적 사고는 나의 감성에 많은 마이너스 요인이 되더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슬퍼해야 할 대목에서 눈물 흘리지 못하고, 웃어야 할 부분에서 조소를 보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도 진부하게 취급하며, 너무 상식 밖의 장면에선 상상력을 동원하기보다는 개연성 없는 시나리오를 탓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에 몰입해서 그 스토리를 편한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영화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의 작은 감동들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팀버튼의 <가위 손>같은 희한한 영화 속에도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동의 정서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영화도 하나의 흥미거리이고 오락이다. 보면서 마음껏 즐기고 감상적 정서에 젖어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평은 다음의 문제이다. 처음부터 꼿꼿한 마음으로 영화를 대하여, 자칫 영화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말자.
<쉬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종결부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유중원(한석규 분)이 이방희(김윤진 분)을 죽이고 자신에게 남긴 음성을 듣는 부분에서, 유중원이 정보요원에게 심문 받는 부분에서, 집에서 발견한 이방희가 짠 스웨터를 펼쳐 드는 장면에서...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같이 영화를 본 이들은 액션 영화를 보고 우는 나를 비웃었지만.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후에 갖게 되는 마음의 상처를...더군다나 유중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잖은가...그것으로 그의 삶도 종말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죽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키싱구라미가 죽은 한 마리를 보고 자기도 같이 죽는 것처럼.
쉬리: "키싱구라미"로 대체된 "쉬리"의 비극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내게 돌아오는 질문이 한가지 있었다.
"왜 쉬리인가?"
영화에서 "쉬리"라는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밖에 나오질 않는다. 박무영(최민식 분)이 전화로 쉬리에 대한 얘기를 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쉬리는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물고기의 종류라고 한다. 사전을 찾아 봤는데 강원도와 평안도 일대에 서식한다는 말을 보면, 휴전선 사이의 강에 서식한다는 영화 속 대사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쉬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쉬리"는 분단된 조국의 상징이다. 휴전선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상징적 의미인 셈이다. 또한, 쉬리는 우리 민족에게 당면한 문제인 통일이라는 주제로의 회귀이다. 그것을 해결해야 함을 보여주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 담론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쉬리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영화는 쉬리에서 키싱구라미로 주제를 대체했다.
키싱구라미는 사랑의 상징이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따라 죽는다는 키싱구라미는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낭만적이며, 개별적인 주제의 상징이다. 키싱구라미는 현대인에게 적합한 인간 관계, 그것도 남여 사이의 지극히 개별적인 감정적 문제의 상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쉬리는 이데올로기로 분할된 사회적 이슈의 상징이며 개별적이거나 낭만적인 정서가 아닌 전체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그것은 필자의 단어 선정의 문제일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느꼈던 씁쓸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통일"은, 혹은 "남북 문제"는 영화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진정한 통일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통일에 대한 많은 실망스러운 말들을 들었다. "꽃제비"라는 불쌍한 북의 어린 아이들을 보며 눈물없이 무덤덤하게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들.
"북한이 무슨 우리 동포냐? 그런 놈들은 모두 죽어버려야 한다"는 극단적 표현까지 서슴치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남북문제, 통일의 문제는 현대 한국인 사이의 주요 담론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쉬리>는 비극의 영화다. "남북문제"라는 우리의 심각한 문제를 주제로 다루지 못한 채, "남북문제"를 단지 "배경"삼아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낸,-어떤 의미에선-이 시대의 비극적인 영화이다. 지금도 북한은 박무영의 말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꽃제비"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먹으며 감금된 생활에 고통 받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 인권마저 보장되지 못한 사회에서 사는 같은 민족을 화두로 삼을 수 없는 비극이 우리의 모습이며, "키싱구라미"로 대체된 "쉬리"의 비극인 셈이다.
1999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