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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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했었던
잠 못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2008/03/15 18:59 2008/03/1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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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 <그 놈 목소리>를 통해 공소시효의 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공소시효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감독님도 "범인이 잡혀야 이 영화가 끝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박진표: "범인이 잡혀야 이 영화가 끝난다"는 말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 잊지 않을 것이다, 밝혀여야 한다, 자수해야 한다, 잡혀야 된다' 등의 굉장히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거죠.
천인공노할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한을 연장하거나 폐지하자, 공소시효가 지나더라도 소급입법을 시켜서 소급할 수 있도록 하자는 등의 다양한 주장들이 있는데요. 외국의 경우 공소시효가 없는 나라도 있더군요. 대부분 25년, 30년 이렇게 굉장히 길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40년대엔가 일본법을 가지고 와서 했다는데, 일본조차도 살인죄는 25년으로 늘렸죠. 우리나라가 재일 짧아요. 그거라도 늘려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구요. 그런 움직임이 이미 2년전부터 시민단체 중심으로 일어나 국회에 계류 중이에요.
이 영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소시효에 관한 거에요. 조만간 통과되지 않겠나 싶은데, 그러면 반은 목적을 이루는 거죠. 그게 제 영화적 실험이기도 하고, 사회적 실험이기도 해요.

(인물과사상, "그놈 목소리" 감독 박진표 인터뷰 중에서)


**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과 같은 영화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는 박진표 감독의 인터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사회 참여적인 감독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2008/03/15 18:59 2008/03/1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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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가 오리같은진 몰라도 오리 흉내는 잘 내는 편이지.
어떨 땐 너무 극단적인 것 같아.
대체로 사기꾼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감추거든.
하지만 오리로 치면 매우 신용있고 정력적이지."

"그가 염려되세요?"

"염려된다고 말하진 않았어.
상대 마음을 읽는다고 착각하는 귀찮은 여자가 아니면 좋겠어.
그래,. 사실은 걱정돼."

"뭐가요?"

"마이크가 내가 가졌던 것들을 가졌으면 하고 바래.
난 운이 좋아서 늘 원하는 걸 잘 알지."

"이젠 가정을 꾸리잖아요."

"마이크는 자기가 백조인 줄 모르고 추한 오리로 사는 것 같아.
그앤 자신이 오리인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겠지.
..백조를 만날 때까지.."

"백조를 찾았는지도 모르죠."

"그래.. 그런 상대를 찾았겠지."
2008/03/15 18:57 2008/03/1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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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름답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을 때는
제가 왜 그렇게 운이 좋은지 묻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예쁘고 완벽한 아기를 선사받을 만한 자격이
제게 있었는지 묻지 않았죠.
그러나 그에게 병이 생기자
저는 당연한 듯이 물었습니다.

왜...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제게 생기는지
답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영화 "사랑의 기적"에서 Lenard(Robert de Niro분)의 병이 다시 재발하자
그의 어머니가 의사들 앞에서 했던 말..)


myjay :: 우리는 행복에는 둔감하며 고통에는 민감하다.

그건 행복한 시간은 잠깐이지만 고통의 시간은 너무나 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의 시간들이 기나긴 고통을 견디게 하는 삶의 지지대가 되어 준다.

2008/03/15 18:56 2008/03/1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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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갱들에게 살해된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이 희미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총격으로 숨진 형도.
가끔 함께 장난치던 기억이 흐릿하게 머리 속을 맴돌지만
그것조차 머리 속에서 이제는 날아갈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하다.

어머니.
시칠리아 조직의 두목에게 날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내 눈 앞에서 주검이 되어 쓰러진 어머니의 기억은
되내이기만 해도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아프기만 하다.

아메리카.
9살의 나이에 난 거칠게 자랐다.
그 낯선 땅에서 내 가슴을 져미게 만든 것은
아무 걱정 없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행복한 가정.
부모님의 웃음. 내 또래 아이들의 옷차림.
뜨거운 김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음식들이었다.

가족. 패밀리. 아내와 자식들.
난 이들에게 나의 어두움을 겪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도 결핍으로 고통받았던 나의 과거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패밀리는 상실의 근원이며
다시는 잃어서는 안될 내 존재의 전부다.
2008/03/15 18:54 2008/03/1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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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습한 기운이 느껴지면
내 속에 나를 지탱하던 10마리의 구렁이들이
몸을 비틀며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10마리의 구렁이들은 제각기
자신의 독특한 생각과 몸짓과 행동으로
내 안에서 자기들을 표현하고
나는 혼란 속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통제력과 자제력을 잃곤 한다.

이젠..
그 10마리 중에 적어도 일곱은..
목을 비틀어 숨을 끊어놓고 싶다.

나에게도 생존본능이 있다.

다중인격을 가지고 습한 환경이 찾아올 때마다
몸부림치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는 것보다는
살인이란 죄명을 쓰고 평생을 사는 것이 유익하다. 
2008/03/15 18:47 2008/03/1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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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영 간사.


나는 그 사람을 복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98년도에 복상에 쓴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썼고 나는 그에 대한 재반론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지강유철 전도사님의 제안으로 복상 독자모임을 하게 되었고 처음 모임 공지에 기숙영 간사님과 내가 지강유철 전도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기숙영 간사님과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처음 나를 만나서는 내 글에 대한 좋은 말들을 해 주셨다. 사실 나는 기분은 좋았으나 당시에 나는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터라 인사치레이거니 하며 그냥 흘려 들었다.

그 이후로 담임 목사직 세습 문제로 복상도 뜨거웠고 독자 모임도 제법 많은 숫자가 모였었다. 독자 모임을 하는 동안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숙영 간사와 몇몇 지인과 친해져서 몇 번 정도 따로 만나서 함께 놀기도 했다. 당시 기숙영 간사님은 사랑의교회에서 선교부 간사로 섬기고 있었고 복상독자모임을 하던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해서 한 번은 그녀의 신혼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었다. 사실 자주 만났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내게 기숙영 간사님은 청년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겐 각별한 생각이 드는 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학부 학생 때에 기숙영 간사님을 만났고, 다행히 그 분은 나를 좋은 후배로 본 것 같았다. 하루는 모임을 끝나고 나가는 참이었는데 그 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주먹을 내게 내밀면서 "꼭 주고 싶으니 그냥 받아. 책 사서 많이 읽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학생인 나로서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극구 말렸으나 결국은 그 돈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면 사람들은 오바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그 때 나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다. 마치 정말 무가치해보이는 내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은혜처럼 그녀의 호의도 그렇게 느껴졌다. 내 생각에 기숙영 간사님이 그 당시에 무슨 그런 돈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복학 시절에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여유 없이 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나는 기숙영 간사님이 굳이 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큰 무게감을 느꼈다. 물론 나는 왜 그렇게 이 일에 큰 의미를 두는지 안다. 그 시기의 나를, 내 마음 속을, 내 내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복상을 위시한 교계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왔고 또한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글로든 행동으로든 무언가 큰 짐을 진 사람처럼 노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기숙영 간사님의 행동에 기인한 영향이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잘난 척하기 좋아했던 나의 철없던 그 시절에, 나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내게 애정을 갖고 나에게 기대감을 가졌던 선배로서의 기숙영 간사님에 대한 자리가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로 인해 내겐 은혜를 입은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느끼는 그 정서가 심장에 박혀 있다.

이후로 나는 기숙영 간사님의 소식들을 간간이 접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그렇게 넘기다가 연락이 뜸해진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내 인맥들이 다 그렇다. 물리적으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다. 아니 사실, 요즘은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목표, 성취, 이름값, 영향력, 리더십과 같은 것들에 참 많이도 치중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제자들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 그의 의중을 몰랐던,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제자들과 그들을 사랑한 예수.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준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 나이가 들수록 더 그 무게감이 커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내 글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이들이 다 내 글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혹여 내 글에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사실은 기숙영 간사라고. 부족하나마 내 손에서 쓰여진 글은 그와  같은 선배들이 베푼 후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2008/03/12 00:00 200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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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박스 오피스와 아카데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쾌거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찜찜했는데 얼마전 KINO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아래에 길게 인용한 글에서 발견할 수 있겠지만 스필버그의 영화는 상황이라는 보다 광범위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 혹은 일인의 영웅화라는 전형적 미국 통속극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일인의 혁신적 행동으로 문제의 본질을 축소시키고 마치 그런 것이 현실의 다반사인 것처럼 미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실성이란 그의 테크닉적인 차원에서의 '사실같음'이라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고 또한 많은 현실이 그랬듯이 소수 권력의 동요가 아니라 대중의 바른 의식이 진정한 사회 개혁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스필버그에 대한 영화잡지 KINO의 평을 들어보자.


 
피터팬 구하기, 또는 스필버그의 통과제의 (장훈 기자)
스필버그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술래잡기의 명수이다. <E.T>와 <칼라 퍼플>, <쉰들러 리스트>와 <쥬라기 공원>으로 우리를 완전히 따돌리는 듯 싶었던 스필버그는 이번에는 '한심한' <잃어버린 세계>가 끝나자마자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내놓았다. 스필버그는 유행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기꺼이 자기가 만든 소비의 가속도에 편승하면서 순진하고 낭만적인 휴머니즘과의 행복한 밀애를 꿈꾸었고 이것은 한 개의 꼭지점에서 그 상반된 양편으로 향하는 수직선과도 같았다.

스필버그가 가까운 미래, 공룡들의 습격이라는 하이테크 환타지에서 미국의 기원의 시대인 1800년대까지 올라가 아미스타드호 흑인반란의 역사적 사건으로 옮겨간 것은 너무나도 느닷없는 제스추어였다. 이것은 그가 93년 쥬라기 테마파크의 아수라장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부터 구해낸 한 독일인의 자서전으로 옮겨가면서 박스 오피스와 아카데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을 때와는 또다른 문제였다. <아미스타드>의 소재가 된 아미스타드 사건은 스페인 선적인 라 아미스타드 호에서의 노예들의 선상반란으로부터 촉발되었고, 결국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의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스필버그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으면서 환타스틱한 세계들을 창조해 낸 것처럼 좀 더 진지한 영화들을 찍으면서는 무게있는 역사적 배경위에 영화를 놓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역사적인 사건의 저변에 깔려있는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아미스타드 호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구속과 자유의 단순한 이분법 위에서 숭고한 정신을 갖춘 한 인간(강하고 지적이며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싱크의 모습은 어느새 쉰들러를 닮아 있다)의 감동적인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도식적인 구분 속에 흑백모순은 건국신화의 일부로 서로 뒤섞이며 <아미스타드>는 휴머니즘 통속극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경쟁자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으로 그의 생애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마치 기습을 가하는 복병처럼 다시 복귀하였다. 스필버그가 처음 2차대전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모두들 그에게 '시대착오적'이라며 경고하였고, <아미스타드>가 실패하자 경고는 비웃음이 되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28분을 포함한 2시간 40분의 영화로 환골탈퇴하였다. <쉰들러 리스트>의 미학과 <쥬라기 공원>의 SFX,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와 <아폴로13호>에서 불러 온 톰 행크스를 리믹스하여 완성시킨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목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영화라는 장르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칼라 퍼플>과 <쉰들러 리스트>를 거쳐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스필버그의 어떠한 경향위에 놓여져 있는 영화들이다. 그것은 아카데미 원로 회의로부터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스필버그의 간절한 모습과도 같다. 스필버그의 이러한 아카데미 프로젝트의 전략은 장르 안에서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다. 스필버그에게 리얼리즘이란 언제나 장르 자체를 새롭게 혁신하는 미학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효과가 아니라 사실감의 효과이다. 오마하 상륙작전에서 보여지는 하드고어 영화를 보는 듯한 무자비한 전투장면에 대한 재현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룡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다. (유태인의 학살 장면과 노예선 상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오마하 시퀀스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스필버그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은 놀랍게도 <쥬라기 공원>의 대혼란과 궤를 같이 한다)

공룡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이 SFX의 테크놀로지였다면 전쟁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은 핸드 헬드 카메라와 사운드이다. 테크놀로지를 감상적 휴머니즘과 연결시킬 줄 아는 동시대의 거의 유일한 헐리우드 고전주의자인 스필버그는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그것을 영화의 기술적 재현수단을 통해 복원해내면서 거꾸로 환타지의 공포와 흥분을 이끌어낸다. 역사적 재현에 대한 강박관념을 떨친 스필버그는 기록사진과 영상기억 안에서 그 아우라만을 재현시키는 쪽으로 그의 관심을 돌림으로써 영화는 역사의 진정성으로부터 멀어져서 이미지의 표상화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사실감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 바탕을 이루는 역사의 구도를 지나쳐버린 스필버그는 그 인물들마저도 이미지에 잠식당하게 만들고 그 바람에 영화 속의 인물들은 실체없는 이미지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생생한 이미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스필버그의 휴머니즘은 이러한 비참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는 인물들을 극한의 비참한 상황으로 밀어넣고 그러한 홀로코스트의 점입가경 속에서 감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며 노스텔지어를 통해 이것을 강화한다.

아미스타드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고향은 하나의 원형이다. <아미스타드>에서는 고향을 떠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제 고향을 찾아가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전쟁터의 한 청년을 고향으로 귀환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낯선 곳에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하나의 의지만으로 주인공은 온갖 고초를 겪는다. 스필버그의 노스텔지어는 결국 <E.T>를 원형으로 하는 것이며, <E.T>의 키덜트 무비로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를 외치는 이 두 영화는 90년대에 우리가 만나는 <오즈의 마법사>의 뉴버전이다.

두 편의 영화는 일관된 스필버그의 아카데미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아미스타드>는 실패하였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성공하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이전까지의 스필버그 영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 (재미있지만 진지하지 못하고 인물의 형상화나 내러티브의 형상화에 실패하였다)를 일시에 무너뜨린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가족의 복원이라는 절대선의 가치 앞에서) 미국의 한 평범한 가정의 막내 아들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 함께 빠져 들어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필버그의 또다른 모색이다. 그것은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것 같지만 동시에 단순히 세련된 화술로 말하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이 영화에서 그는 다른 두 개의 과녁을 향하는 자신의 욕망의 화살의 각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출처: 키노)

2008/03/05 18:50 2008/03/0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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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한다.
중립은 억압하는 자만 도와줄 뿐,
억압받는 자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동조하는 것뿐,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결코 힘이 되지 못한다."

- 엘리 위젤
2008/02/18 19:28 2008/02/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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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 제사장설"이 받고 있는 심각한 오해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제사장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고맙습니다만, 나에게는 제사장이 필요 없습니다. 나 혼자서 예수님과 잘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기본 교의에 만인 제사장설을 포함시켰을 때 의도했던 바는, 그러한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이 아닌 서로를 위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내 제사장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나도 당신의 제사장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에서만큼은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는 교만한 개인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그 말은 상호성의 고백이다.

(유진 피터슨, "그 길을 걸으라" 중에서)
2008/01/28 19:26 2008/01/28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