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그건 행복한 시간은 잠깐이지만 고통의 시간은 너무나 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의 시간들이 기나긴 고통을 견디게 하는 삶의 지지대가 되어 준다.
기숙영 간사.
나는 그 사람을 복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98년도에 복상에 쓴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썼고 나는 그에 대한 재반론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지강유철 전도사님의 제안으로 복상 독자모임을 하게 되었고 처음 모임 공지에 기숙영 간사님과 내가 지강유철 전도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기숙영 간사님과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처음 나를 만나서는 내 글에 대한 좋은 말들을 해 주셨다. 사실 나는 기분은 좋았으나 당시에 나는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터라 인사치레이거니 하며 그냥 흘려 들었다.
그 이후로 담임 목사직 세습 문제로 복상도 뜨거웠고 독자 모임도 제법 많은 숫자가 모였었다. 독자 모임을 하는 동안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숙영 간사와 몇몇 지인과 친해져서 몇 번 정도 따로 만나서 함께 놀기도 했다. 당시 기숙영 간사님은 사랑의교회에서 선교부 간사로 섬기고 있었고 복상독자모임을 하던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해서 한 번은 그녀의 신혼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었다. 사실 자주 만났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내게 기숙영 간사님은 청년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겐 각별한 생각이 드는 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학부 학생 때에 기숙영 간사님을 만났고, 다행히 그 분은 나를 좋은 후배로 본 것 같았다. 하루는 모임을 끝나고 나가는 참이었는데 그 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주먹을 내게 내밀면서 "꼭 주고 싶으니 그냥 받아. 책 사서 많이 읽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학생인 나로서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극구 말렸으나 결국은 그 돈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면 사람들은 오바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그 때 나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다. 마치 정말 무가치해보이는 내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은혜처럼 그녀의 호의도 그렇게 느껴졌다. 내 생각에 기숙영 간사님이 그 당시에 무슨 그런 돈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복학 시절에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여유 없이 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나는 기숙영 간사님이 굳이 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큰 무게감을 느꼈다. 물론 나는 왜 그렇게 이 일에 큰 의미를 두는지 안다. 그 시기의 나를, 내 마음 속을, 내 내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복상을 위시한 교계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왔고 또한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글로든 행동으로든 무언가 큰 짐을 진 사람처럼 노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기숙영 간사님의 행동에 기인한 영향이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잘난 척하기 좋아했던 나의 철없던 그 시절에, 나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내게 애정을 갖고 나에게 기대감을 가졌던 선배로서의 기숙영 간사님에 대한 자리가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로 인해 내겐 은혜를 입은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느끼는 그 정서가 심장에 박혀 있다.
이후로 나는 기숙영 간사님의 소식들을 간간이 접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그렇게 넘기다가 연락이 뜸해진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내 인맥들이 다 그렇다. 물리적으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다. 아니 사실, 요즘은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목표, 성취, 이름값, 영향력, 리더십과 같은 것들에 참 많이도 치중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제자들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 그의 의중을 몰랐던,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제자들과 그들을 사랑한 예수.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준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 나이가 들수록 더 그 무게감이 커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내 글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이들이 다 내 글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혹여 내 글에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사실은 기숙영 간사라고. 부족하나마 내 손에서 쓰여진 글은 그와 같은 선배들이 베푼 후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들어가면서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박스 오피스와 아카데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쾌거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찜찜했는데 얼마전 KINO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아래에 길게 인용한 글에서 발견할 수 있겠지만 스필버그의 영화는 상황이라는 보다 광범위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 혹은 일인의 영웅화라는 전형적 미국 통속극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일인의 혁신적 행동으로 문제의 본질을 축소시키고 마치 그런 것이 현실의 다반사인 것처럼 미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실성이란 그의 테크닉적인 차원에서의 '사실같음'이라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고 또한 많은 현실이 그랬듯이 소수 권력의 동요가 아니라 대중의 바른 의식이 진정한 사회 개혁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스필버그에 대한 영화잡지 KINO의 평을 들어보자.
피터팬 구하기, 또는 스필버그의 통과제의 (장훈 기자)
스필버그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술래잡기의 명수이다. <E.T>와 <칼라 퍼플>, <쉰들러 리스트>와 <쥬라기 공원>으로 우리를 완전히 따돌리는 듯 싶었던 스필버그는 이번에는 '한심한' <잃어버린 세계>가 끝나자마자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내놓았다. 스필버그는 유행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기꺼이 자기가 만든 소비의 가속도에 편승하면서 순진하고 낭만적인 휴머니즘과의 행복한 밀애를 꿈꾸었고 이것은 한 개의 꼭지점에서 그 상반된 양편으로 향하는 수직선과도 같았다.
스필버그가 가까운 미래, 공룡들의 습격이라는 하이테크 환타지에서 미국의 기원의 시대인 1800년대까지 올라가 아미스타드호 흑인반란의 역사적 사건으로 옮겨간 것은 너무나도 느닷없는 제스추어였다. 이것은 그가 93년 쥬라기 테마파크의 아수라장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부터 구해낸 한 독일인의 자서전으로 옮겨가면서 박스 오피스와 아카데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을 때와는 또다른 문제였다. <아미스타드>의 소재가 된 아미스타드 사건은 스페인 선적인 라 아미스타드 호에서의 노예들의 선상반란으로부터 촉발되었고, 결국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의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스필버그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으면서 환타스틱한 세계들을 창조해 낸 것처럼 좀 더 진지한 영화들을 찍으면서는 무게있는 역사적 배경위에 영화를 놓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역사적인 사건의 저변에 깔려있는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아미스타드 호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구속과 자유의 단순한 이분법 위에서 숭고한 정신을 갖춘 한 인간(강하고 지적이며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싱크의 모습은 어느새 쉰들러를 닮아 있다)의 감동적인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도식적인 구분 속에 흑백모순은 건국신화의 일부로 서로 뒤섞이며 <아미스타드>는 휴머니즘 통속극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경쟁자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으로 그의 생애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마치 기습을 가하는 복병처럼 다시 복귀하였다. 스필버그가 처음 2차대전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모두들 그에게 '시대착오적'이라며 경고하였고, <아미스타드>가 실패하자 경고는 비웃음이 되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28분을 포함한 2시간 40분의 영화로 환골탈퇴하였다. <쉰들러 리스트>의 미학과 <쥬라기 공원>의 SFX,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와 <아폴로13호>에서 불러 온 톰 행크스를 리믹스하여 완성시킨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목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영화라는 장르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칼라 퍼플>과 <쉰들러 리스트>를 거쳐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스필버그의 어떠한 경향위에 놓여져 있는 영화들이다. 그것은 아카데미 원로 회의로부터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스필버그의 간절한 모습과도 같다. 스필버그의 이러한 아카데미 프로젝트의 전략은 장르 안에서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다. 스필버그에게 리얼리즘이란 언제나 장르 자체를 새롭게 혁신하는 미학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효과가 아니라 사실감의 효과이다. 오마하 상륙작전에서 보여지는 하드고어 영화를 보는 듯한 무자비한 전투장면에 대한 재현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룡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다. (유태인의 학살 장면과 노예선 상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오마하 시퀀스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스필버그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은 놀랍게도 <쥬라기 공원>의 대혼란과 궤를 같이 한다)
공룡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이 SFX의 테크놀로지였다면 전쟁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은 핸드 헬드 카메라와 사운드이다. 테크놀로지를 감상적 휴머니즘과 연결시킬 줄 아는 동시대의 거의 유일한 헐리우드 고전주의자인 스필버그는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그것을 영화의 기술적 재현수단을 통해 복원해내면서 거꾸로 환타지의 공포와 흥분을 이끌어낸다. 역사적 재현에 대한 강박관념을 떨친 스필버그는 기록사진과 영상기억 안에서 그 아우라만을 재현시키는 쪽으로 그의 관심을 돌림으로써 영화는 역사의 진정성으로부터 멀어져서 이미지의 표상화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사실감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 바탕을 이루는 역사의 구도를 지나쳐버린 스필버그는 그 인물들마저도 이미지에 잠식당하게 만들고 그 바람에 영화 속의 인물들은 실체없는 이미지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생생한 이미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스필버그의 휴머니즘은 이러한 비참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는 인물들을 극한의 비참한 상황으로 밀어넣고 그러한 홀로코스트의 점입가경 속에서 감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며 노스텔지어를 통해 이것을 강화한다.
아미스타드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고향은 하나의 원형이다. <아미스타드>에서는 고향을 떠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제 고향을 찾아가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전쟁터의 한 청년을 고향으로 귀환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낯선 곳에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하나의 의지만으로 주인공은 온갖 고초를 겪는다. 스필버그의 노스텔지어는 결국 <E.T>를 원형으로 하는 것이며, <E.T>의 키덜트 무비로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를 외치는 이 두 영화는 90년대에 우리가 만나는 <오즈의 마법사>의 뉴버전이다.
두 편의 영화는 일관된 스필버그의 아카데미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아미스타드>는 실패하였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성공하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이전까지의 스필버그 영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 (재미있지만 진지하지 못하고 인물의 형상화나 내러티브의 형상화에 실패하였다)를 일시에 무너뜨린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가족의 복원이라는 절대선의 가치 앞에서) 미국의 한 평범한 가정의 막내 아들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 함께 빠져 들어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필버그의 또다른 모색이다. 그것은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것 같지만 동시에 단순히 세련된 화술로 말하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이 영화에서 그는 다른 두 개의 과녁을 향하는 자신의 욕망의 화살의 각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출처: 키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