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복음과상황

직장, 30대의 전쟁터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지 6년째다. 현재 나는 자동차 연구소에서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지인들은 내게 설계가 적성에 맞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졸업을 앞두고는 기독교 단체 주변을 기웃거렸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더 신앙적이고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마지막까지 전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졸업반이 된 후,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전공 살리기는 대학원 생활을 거쳐 자동차 연구소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직업이 천직이라거나 소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나의 일상은 이렇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에 퇴근한다. 그래도 주5일제 시행으로 주말에는 쉬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그마저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시키고 있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라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시간 중에는 도통 짬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내에서 어학 공부 같은 자기계발, 혹은 성경 공부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간혹 글이라도 쓰려면 끼니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야만 한다. 정년을 생각하면서 전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돈 계산을 해 보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몇 년 내로 서울에서 작은 평수의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대출금을 다 갚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대기업 사정이 이러니 2차, 3차 협력 업체는 더 열악하리라. 일정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상사의 지시에 의해 업체 직원에게 과도한 업무를 떠넘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퇴사하는 이들도 많다. 급여는 대기업에 비해 적으면서 며칠 밤, 심지어 몇 달씩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잦아서 몸과 마음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육아라는 이름의 부부 프로젝트

최근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이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는 임신 후 육아 휴직 문제로 사내의 암묵적인 압력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채 직장을 그만두었고 출산한 이후에는 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지 못하는 나 때문에 육아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중에는 퇴근이 늦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육아를 많이 돕는 편이다. 문제는 직장에서 일주일의 피로가 가득 쌓인 내 입장에서도 이틀간의 육아가 버거운 게 사실인지라 때로는 사소한 일로 부부 간에 서운해 하며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출산 후 바쁜 남편과 점점 커져 가는 고부 갈등, 육아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주변에도 부쩍 많아졌고 그러한 문제로 연고지 근처나 근무시간에 여유가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남편들도 생겨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의 경우에는 육아 도우미를 쓰거나 기관에 보내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이렇듯 육아라는 프로젝트를 놓고 부부가 서로 동역자가 되어 이를 감당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지칠 때까지 업무를 하고 있는 30대의 부모들은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직장 생활과 육아에 올인하며 이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는 신앙 서적도 꽤나 읽었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때때로 시간을 내어 참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수면 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이런 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대기업과 같은 제조업 관련 직종에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직장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거나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

 

 

개인 영성에 매몰된 기독 학생 운동

선교단체 시절,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갈등은 사역의 방향성 문제였다. 내부적으로 길고 지루했던 논쟁도 있었고 암묵적으로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갈등의 주요 원인은 이러했다. 나의 주장은 개인 영성 훈련과 더불어 사회참여의 문제를 학부 때에 사역 방향에 포함시켜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의 방향성이었다-이었으나 선교단체 분위기는 개인 영성을 먼저 다진 후에 사회에 나가서 각론을 실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주변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졸업 후에 사회참여의 각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지성 사회 복음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선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나 또한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인 영성과 사회참여의 균형성 문제를 거론했을 때 캠퍼스에서 개인 영성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면 분명 졸업 이후에 사회참여 각론에 있어서의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침 내지는 훈련의 장이 필요했을 법한데 기독 학생 운동에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델 제시가 없었고 훈련의 장도 아니었으며 현장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듯하다.

앞서 언급했던 직장과 육아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30대 직장인에게는 분명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전에는 목회 세습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청 광장에 나가는 것을 혼자 결정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도 내 개인의 문제니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좋다는 책과 기사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꼼꼼히 읽었고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시의 적절하게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부 때부터 철저하게 고민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공부했어도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실천해 옮기기가 쉽지 않은데,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가 많았던 캠퍼스에서조차 그러한 고민과 참여의 경험이 없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가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직장에서의 총체적 복음

학부 시절 고민했던 총체적 복음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직업과 신앙 문제의 거창한 통합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첫째는 앞서 말한 신앙과 전공, 신앙과 업무의 통합 문제다. 효율성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앙과 업무를 아우르는 적용점을 찾기란 참 어렵다. 가끔은 전공 분야에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는 기독교인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신앙적인 잣대로 자신들의 분야와 조직을 성급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조금 설계에 익숙해진 ‘초짜’ 설계자이니 말이다. 둘째는 환경문제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소형차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부품의 원가 절감 방안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낸다거나 연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 혹은 부품 업체에서 제조 공정상 폐기물이나 폐수들을 줄일 수 있는 재질과 공법 연구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만일 부품 설계자가 아닌 차종 프로젝트 기획자라면 단품을 넘어 좀 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이런 방향들을 추진해 갈 수 있을 듯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직장에서 다른 팀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에 놓이는 경우, 그 팀의 직무 유기를 부각시키거나 우리 팀의 성과를 과대 포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업무 분장에 있어서도 나와 우리 팀의 책임을 축소하고 다른 팀을 최대한 이용해야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간에는 어떠한가. 고과를 높게 받기 위해 연구 성과를 먼저 보고하려고 애쓰거나 아예 후배 사원의 기술이나 보고서를 가로채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이나 팀의 알력 다툼을 넘어 노조 문제나 협력 업체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와 같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나아간다.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성공보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힘쓰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않으면 쉽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사유하고 작은 일부터 신앙적 양심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장에서 만난 기독교인의 경험

회사 안에도 기독교 관련 단체들이 많다. 많은 경우 사내 신우회가 있고 각 선교단체의 학사모임도 있으며 BBB(직장인성경공부모임)라는 전국적인 직장인 모임도 있다. 부서 내 기도모임부터 로비에서 일대일로 큐티 나눔을 하는 이들도 간간이 보인다. 직장에서 기독교인을 만나서 대학 시절 선교단체에서 활동했다고 하면 어떤 기대감으로 나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난 그런 부류를 싫어했다. 직장에서 내가 만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신앙 색깔을 가지고 있거나 술자리를 거부하는 ‘왕따’에, 업무가 급한데도 불구하고 예배나 기타 신앙 모임에 우선순위를 둬서 다른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인들과 신앙적인 이유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솔직히 내 ‘고매한’ 신앙을 그들 때문에 흐리기 싫다는 일종의 신앙적 우월감도 작용했다.

 

얼마 전 함께 일하던 다른 팀의 수석연구원 한 분이 사무실 내 책상에서 신앙서적을 보고는 함께 식사를 청했다. 그분은 내가 예상한대로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 나는 간간이 참석하는 건 모르겠지만 업무가 바빠서 부서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노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분은 더는 권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셨는데, 그 이야기에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그는 이제 자신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급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이 남은 시간 동안 이 직장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젊은 시절에는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 사내 전도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고 직원들을 열심히 전도했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직원들이 회심을 했다고 했다. 합리적이면서 강압적이지도 않고 늘 직급에 관계없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대하는 그분의 성품으로 볼 때, 그의 인격에서부터 나온 전도가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날 난 내가 참 하찮게 느껴졌다. 사실 그분과 식사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내 신앙생활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선교사가 되지 않은 솔직한 이유가 선교지로 가기 싫어서라는 명백한 이유를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요즘은 힘들다는 핑계로 주일 예배를 빠지기도 하고 헌금이나 후원금을 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그뿐이랴. 스스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구분 지으려고 애쓰는, 답답하고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직장에서 모이기에 힘쓰고 주변 동료들을 전도하는 동안 정작 나는 한 명의 지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 그것도 하루 10시간 넘게 ‘회사’라는 신에게는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하면서 말이다.



기독 직장인의 소통과 공감, 연합과 참여를 꿈꾸며
직장인의 입장에서 졸업 후에 신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학부 시절 그렇게 존경하던 선배들이 학사가 되고 나면 수면에서 사라지곤 하는 일들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지만 정작 30대 중반의, 중간 직급의 위치에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조차 버겁고 힘듦을 경험한다. 매순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고 고민한다. 이런 치열함 때문에 과거에 사회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에 어떤 교계의 중추 세력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도와 봉사에 국한된 지역 교회와 선교단체의 방향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또한 나를 포함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담을 쌓고 그들과의 교류를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제보다 더 꺼리는 편협한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 중, 본이 될 만한 몇몇 분들의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금욕적인 삶, 자기와 다른 의견에 공격적이지 않고 매순간 상대를 포용하려는 성품에 깊이 감동해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모든 면에서 옳다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역사에 대한 몰이해, 신앙적‧정치적인 면에서의 잘못된 편견 등이 답답할 때도 많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완전하고 본이 되는 존재였던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학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내가 느끼는 소명은 복음주의권 안에서의 참여와 연합이다. 또한 요즘 들어 자주 고민하게 되는 것은 우리 세대 기독교인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다. 아직은 다소 무력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삶에 파묻혀서 자신의 일상에 매몰되기도 하고 자기가 속한 영역 안에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이 대다수다. 소통과 공감을 통해 이들을 연합의 장이자 실천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운동과 그에 대한 참여 방법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이 글의 일부는 <공부하는 그리스도인>(IVP)에 실린 ‘기독 지성과 삶의 일치를 향하여’와 복음주의연구소가 주관한 기독 지성 집담회 발제문, ‘현장에서 느끼는 기독 지성 운동’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 주)

2010/07/12 00:20 2010/07/12 00:2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일전에 잠실에 있는 토이저러스에 가서 장난감들을 대충 본 후
이번에는 성하 장난감 몇 개를 사러 다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로로 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이저러스에서 조금씩 업되고 있는 성하군.
(토마스와 친구들 찬조 출연, 얼굴이 뭉개진 인형은 기린. 성하에게 헤드락 당하는 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동차가 있길래 태워주니 시큰둥한 성하.
그러나..
끝나고 일으켜세우니 막 울었다. 뭐냐.. 탈 때 좋아하든가.ㅡㅡ;;;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위로차원에서 기차로 갈아태웠다. 역시 시큰둥 ㅡㅡ;;


누가 이걸 재밌어하는 어린이의 표정이라 한단 말인가. (긁적긁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빠와 캐릭터 인형 옆에서 한 컷. 아빠의 표정은 작위적이고 성하는 엄마에게 뭘 달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에 가기 아쉬운 듯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히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이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피아노를 쳐대는 신동 탄생! (실제로는 별 소리 안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새 건반 아니고 버튼에 관심을 갖는 성하. (엔지니어가 되려나~ ... ... 안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녁은 착한 아빠표 김치찌게. (물론 성하는 못먹는다. 엄마 아빠만 냠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성하 꼽사리에 끼어서 득템한 아이언맨 투. (멋지지 않은가. 두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슴에서 불도 나온다. 우하하하. (그러나 머리 찍어 눌러야 나온다.ㅡㅡ;;;)

...

아내도 득템햇는데 아내 득템 사진은 담 기회에. 넘 졸립다.

 


(사진: 아이폰/ IXUS i)

2010/06/21 21:52 2010/06/21 21:5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내 친구의 시댁이 횡성인데. 어찌어찌하여 친구의 시댁에 다녀왔다.ㅡㅡ;;;
간단히 말해서 아내 친구의 시어머니가 아내를 좋게 보게되어 한 번 놀러오라고
하셨는데 그런 연유로 횡성에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곳이 바로 그곳.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못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내는 채소들을 씻기 바쁘고. 성하는 뒷모습 인증샷.
전원주택과 자연 채취한 풀떼기들로 상당히 업된 아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베큐로 고기도 굽고.
(참고로 아이를 보느라 여력이 없는 관계로 사람들 사진을 하나도 못 찍었다.ㅜ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친구 시어머니가 큰손으로 김치를 담아주시는 모습. (집에서 먹을 때마다 감동 중.ㅠ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내 친구 시어머니(--)는 총각무 담그는 실습을 직접 시켜주시려고,
전날 이웃집 밭에서 총각무를 뽑아 씻어 놓으셨다.(진짜 감동)
담근 총각무는 가져와서 잘 먹고 있다. 냠냠.

사실 이번 횡성 방문의 가장 큰 행사는 친구 시아버지과의 산행이었다.
동네 어르신들과 산나물이나 산삼, 더덕 등을 캐러가는 가벼운 마실이었는데 아내도 산나물을
꽤 많이 가져왔다. 그 이후로 아내는 봄 산나물에 꽂혀서 풀떼기들을 키우고 먹고... 그러고 있다.ㅡㅡ;;;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덕분에 집에서도 자주 웰빙 풀떼기를 경험하는 요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돈나물인지 돗나물인지 하여간 초고추장에 무쳐 먹으면 맛나는 풀떼기.
이상 아내의 풀떼기 여정이었습니다. 에헴.
(사진이 많이 부실한 건 육아의 부담으로 인한 것이니 삿대질 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아이폰/ IXUS i 섞어서.)

2010/06/21 00:02 2010/06/21 00:0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내의 로망은 주말농장을 하는 것이다.
지인분을 수소문해서 근교에 빌릴만한 밭이 있나 알아보려던 중 아내 친구가
헤이리 예술마을 안에 조그만 밭을 얻었다 하여 그 밭을 함께 가꾸기로 했다.

모종을 심던 날.. 나와 성하도 함께 끌려가서 아내는 밭갈고 나는 아이를 봤다.
(뭔가 뒤바뀐 듯 하지만.. 쿨럭..)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내의 친구가 빌린 밭에 고랑을 열심히 파고 있는 두 사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성하랑 노는 중. (표정이 밝다. 냐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은 엄마가 하고 물은 성하가 들이키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밭가는 두 친구. (밀짚모자는 아내의 부탁으로 미리 주문해서 챙겨간 것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하가 지겨워해서 우리는 근처 어린이도서관(?) 같은 곳에 놀러갔다.
사진에 있는 인형은 <그림책 나라의 앨리스>라는 갤러리에 전시된 것들이다.
이 갤러리 주인분이 성하를 예뻐라 하시어 빵도 주시고 놀이방에서도 계속 놀았다는 후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교한 인형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탁에 있는 인형들까지 원더랜드 앨리스를 잘 구현한 듯.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엄마는 해질녁까지 밭갈고 성하는 간식으로 바나나까지 먹었다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


(사진: IXUS i)

2010/05/18 23:58 2010/05/18 23:5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올해 유난히 많은 눈을 허락하셨던 겨울을 뒤로한 채 어느덧 봄기운이 만연합니다.
많은 꽃들이 피었고 이제는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계절의 변화를 설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것들만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꽃들의 색깔과 향기들,
이 자연의 많은 아름다움을 허락하시고 또한 그것들을 누리고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가정, 가족이 하나님이 맨 처음 우리에게 주신 베이스캠프이자
가장 당신의 사랑을 누려야 할 기초적인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정 가운데 상처들을 많이 경험하고 삽니다.
부부간에 다툴 때도 많습니다. 자식을 학대하고 아버지를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가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가정의 어려움들을 주님께 내려놓고
다시 가정 가운데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변화를 위해 행동의 첫 걸음을 내딛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살면서 대하는 많은 사람들과 일들 가운데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저희들의 얇은 지혜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가 많습니다.
또한 그러한 잘못된 결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일을 할 때에도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서
종국에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어그러지는 경험들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께 우리의 삶을 내려 놓고 종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로잡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아 그것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배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예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0/05/09 20:19 2010/05/09 20:19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벚꽃 구경을 하러 집에서 가까운 윤중로를 다녀왔다. 집에서 그리 멀진 않으나
걸어가긴 좀 먼 거리 같았는데 아내의 설득으로 유모차 끌고 산책 삼아 갔다.

여긴 당산 철교 아래. 당산역을 가기 전에 한강 근처 공원이 잘 되어 있었다.
가는 길에 선유도 공원으로 빠지는 길도 있다. 다음엔 선유도 공원에 가기로 합의!
주말에 날이 괜찮아서 그런지, 샴 쌍동이같이 붙어있는 커플도 많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이 프레셔스! 성하군도 들뜬 모습..^^ 그러나 돌아가는 길엔 그냥 자버렸다는 후문이.. 쿨럭.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처럼 나들이 온 김에 가족 셀카 한 방. 성하가 어색하게 웃고 있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단란한 가정의 로망. 아들 목마 태우기를 실행 중인 성하 아빠.
대체 누가 아버지에게 올라탄 아들을 보며 가정의 로망이라고 했을까.ㅡㅜ
어쨌거나 성하가 이렇게 기뻐하는 줄 알았으면 좀더 태우고 다닐 걸 그랬나보다. 아쉽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벚꽃 핀 거리에서 한 장. 저 후덕한 아저씨의 모습을 보라!
(그나마 면도하고 나오길 잘했다.ㅜ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조 마이 프레셔스, 아내님.
이 와중에도 급하게 포즈 취하고 빨리 찍으라고 하심.^^

몇 주 째 주말마다 날이 안 좋아서 멀리 못나가고 있었는데 모처럼 산소 보충 좀 하고 왔다.
나름 즐거웠던 하루. (그러나 아내와 나는 과한 워킹으로 주말 내도록 뻗었다.ㅡㅡ;;;;;)


(사진: IXUS i)

2010/04/18 23:53 2010/04/18 23:53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음악

요즘 제가 주목하는 뮤지션 중에 루시드폴(Lucid Fall)이란 1인 밴드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시사IN에도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번에 그의 감미롭고 세련된 음악은 용산 참사와 광주 항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세상을 향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좋습니다.
그의 기사와 음악 몇 곡을 소개합니다.       
---------


스토리텔링으로 음악을 만드는 루시드 폴 
루시드 폴(사진)은 네 번째 앨범 <레 미제라블>에서 ‘소리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노래’에 전력을 쏟았다. 그는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로 앨범을 채우고 싶어했다. 

2008년 9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학술 콘퍼런스가 열렸다. 스위스 로잔 대학에서 생명공학 박사를 마친 뒤 연구를 계속하던 조윤석(35·루시드 폴)도 참가했다. 포스터를 붙이고 로비에 앉아 있던 중 홀연히, 행사장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자가 아닌 뮤지션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돈오(頓悟) 같은 것이 그에게 찾아왔다. 루시드 폴로서.

그러나 돈오는 아니었다. 점오(漸悟)에 가까웠다. 인간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한다는 동물실험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들은 조금만 익숙해져도 아무렇지 않게 흰 쥐의 목을 비틀 수 있지만, 그는 거부감을 버릴 수 없었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임상시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그 대가로 돌아가는 게 밥 한 끼라는 사실에 끝까지 둔감해지지 않았다. 그런 나날의 결과였다. 그가 생명공학 연구를 그만두고 음악만 하겠다는 결심을 만든 시간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7년간 유럽에서 쌓인 짐을 정리하고 한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2집 <오! 사랑>에 담긴 노래 제목이기도 한 서울 삼청동에 집을 구했다. 인적이 드문, 한번 들어가면 선뜻 나오기 쉽지 않은 그 집에서 그는 곡을 썼다. 네 번째 앨범이었다. 하지만 데뷔 앨범 같은 기분이었다.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전, 그가 이끌었던 밴드 ‘미선이’의 앨범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을 때 낸 작품이었다. 2001년 루시드 폴의 데뷔 앨범은 방위산업체에 다니면서 만든 작품이었고, 2집과 3집은 각각 스웨덴과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낳은 앨범이었다. 그는 애초에 음악계에 속해 있지 않은 주변인이었다. 한 번도 전업 뮤지션인 적이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음악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질적인 존재인 것 같았다.”

네 번째 앨범 <레 미제라블>이 어떤 의미에서 데뷔 앨범인 건 그 때문이다. 이 앨범은 루시드 폴이 경계인의 신분을 떨쳐버리고 낸 첫 작품이자, 이제 전업 뮤지션임을 선언하는 출사표이다. 강박이 컸던 건 당연하다. “전에 있던 것 중 뭘 버리고, 뭘 가져가야 할까 고민했다.” 홀로 나일론 기타를 뜯으며 노래하는 곡은 안 싣기로 했다. 주위에서는 “그게 너다운 거다”라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관철했다. 연주에서의 클리셰(진부한 표현)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에게 연주를 맡기고 그는 ‘음악’이 아니라 ‘노래’에 집중하기로 했다. 멜로디와 코드와 가사를 만드는 데 전력을 쏟고, ‘소리’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기로 했다. 오선지에 멜로디를 쓰다가, 자신에게는 오선지보다 빈 노트와 펜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후였다. 백지에 가사를 쓰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그의 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싱어송라이터란, 소리로서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의 4집 앨범 <레 미제라블>(위)은 지난해 말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용 산참사·광주항쟁 다룬 노래

그가 내려놓은 소리에 대한 고민을, 여러 사람이 나눴다.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들과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편곡과 합주를 했다. 녹음을 3일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일류 세션맨들의 정갈한 연주와 1960년대 브라질 보사노바의 질감을 살린 12인조 오케스트레이션의 풍성한 스트링은 앨범의 사운드를 어느 때보다 고급스럽되 사치스럽지 않게 만들어냈다. 그 소리 위에서 루시드 폴은 노래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고 작은 목소리로, 인터뷰 때 나눴던 대화를 녹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은 집중력이 필요한 그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한다. 넓지 않되 깊이 들어오는 멜로디를. 정갈한 들숨과 조붓한 날숨으로.

지난해 말 조용히 발매되어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던 <레 미제라블>의 타이틀 곡은 ‘고등어’다. 시장 좌판에 얹힌 고등어의 시점에서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노래다.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잠시 집중하며 가사를 음미하고 아주 옅은 미소를 짓게 될, 어느 물고기의 노래다. 그렇게 ‘고등어’가 세상을 헤엄치는 한편에는 용산과 광주가 있다.

용산참사를 노래한 ‘평범한 사람’과 광주항쟁을 다룬 ‘레 미제라블’. 그는 그 노래들을 “하고 싶었다”가 아니라 “하고 싶었겠지”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대문은 다시 지으면 된다. 하지만 피맛골을 다시 지을 수 있나? 피맛골을 지나가면 혈압이 오른다. 폭격 맞은 서울을 보는 것 같다. 4대강은? 거기 사는 새와 개구리는 어떻게 할 건가. 한 번 무너지면 재생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그게 너무 슬프다. 용산, 그 안에는 끔찍한 논리가 있다. 거기서 얻는 막대한 이익을 아무도 나누려 하지 않는다. 단순히 사람이 죽은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애초에 사람이 없다.”


    

 
‘레 미제라블’은? 왜 지금 광주일까? “공권력이 개인을 파괴하는 행위는 너무 많다. 티베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시짱(西藏) 위구르족에게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체첸에서도, 한국에서는 광주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그래서 하고 싶어 했겠지.” 루시드 폴은 원래 그런 이야기들로 앨범을 채우려 했다.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다 외롭고 불쌍해 보인다.

처 음에는 잘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많은 돈을 벌고, 열 살 어린 금발의 아내와 딸 셋이 있으며,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석학인 그의 지도교수는 하루 종일 하품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그의 선배는 평소 밝은 성격인데 회사에서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앨범 하나를 만들려 했다.

그렇게 앨범 <레 미제라블>에는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우리’ 이야기가 된다.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서정적인 것이 이런 멜로디와 사운드에 맞물려 있는 음반을 우리는 좀처럼 만난 적이 없었다. 구체적인 사건과 대상, 은유적인 묘사와 감성이 함께 머무는 앨범을 차트 1위에서 만난 적은 더욱 오랫동안 없었다. ‘미선이’ 시절부터 루시드 폴의 노래는 대체로 그러했다. 옷을 바꿔 입었다고 몸이 바뀌는 게 아니듯, 그는 일관된 방향으로 경계와 중심을 오가며 걸어왔다.

“내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어. 그래서 장기 공연을 하려고. 일주일에 하루 쉬면서,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노래하면 그보다 좋은 연습이 어디 있겠어.” 이 장기 공연을 위해 서고 싶은 무대는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이다. 김광석이 노래했고 김민기가 운영하는 학전에서 그는 홀로 나일론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고 싶어한다.

(출처: 시사IN)

---


레미제라블
그대 떠난 그날 오후 그대 모습 잊을 수가 없네
날 말리다 터져버린 그대 울음 초여름의 거리

비를 부르던 거리의 슬픔 시간은 다시 지나가고 비는 멎었네
서서히 밀려오던 군화 소리 대검의 빛 줄어드는 시간

지쳐가던 사람들 하나 둘씩 쓰러져
마른 달빛 비치던 그 밤 보고 싶었던 그대 모습
내 몸은 식어만 가요 조금 더 살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가도 기억 속의 그대 얼굴 지워지지 않아

작은 풀 하나 피지 못했던 차가운 여기 이자리에
홀로 남은 날 잊어 줘요
이제는 볼 수 없어도 그대는 나를 잊어요

 

평범한 사람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너무나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 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출처: [레미제라블] 중에서)

2010/04/16 21:02 2010/04/16 21:02
Posted
Filed under 정보들/유용한 자료
1. 'RSS' 의 등장과 성장

RSS의 최초 개발은 브라우저로 유명한 Netscape사에서 당시 인터넷 최대 포털 사이트인 네스케이프사의 넷센터(NetCenter)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이것은 유명 신문사의 기사를 손쉽게 제공하기 위하여 고안되었습니다.

넷스케이의 개발역사를 잠시 살펴본다면 95년 MCF(Meta Content Framework)에서 출발한 RSS 형식은 RDF(Resource Description Framework)과 CDF(Channel Definition Format)의 발전과정을 거쳐, RSS(RDF Site Summary)로 등장하게 되지만, Netscape사가 RSS 0.9 버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개발을 포기하게 되었으며,이후 두 개의 개발그룹이 형성되어 개발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2개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RSS-DEV Working Group의 RSS (RDF Site Summary) 1.0과 UserLand의 RSS (Really Simple Syndication) 2.0이 업계 표준 채택을 위한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두 개의 규격이 기능상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UserLand의 2.0이 좀 더 상세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RDF에 기반한 규격 : 0.9, 1.0, 1.1 (2005년 1월)
RDF에 기반하지 않는 규격 : 0.91, 0.92, 0.93, 0.94와 2.0

이 밖에 기타 포맷으로 2004년 12월 야후에서는 Media RSS 포맷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2004년 말을 기점으로 RSS 포맷을 확장하여 Podcasting에 응용하는 방식도 등장하였다.

RSS 의 확산과 더불어 컨텐츠 신디케이션의 중요도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기능, 그리고 표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컨텐츠 신디케이션 표준화를 위한 많은 논의와 노력들이 진행되었으나, 사실상 RSS 규격을 단일화 시키고 표준화 시키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새로운 표준화를 위한 Atom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렇듯 RSS는 계속하여 진화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방식차이는 있지만 “개방형”이라는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RSS는 인터넷의 자리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2. RSS의 백과사전적 정의?

RSS는 컨텐츠 배급과 수집에 관한 표준포맷입니다.

RSS 의 사전적 의미는 Really Simple Syndication(매우 간단한 배급) 또는 Rich Site Summary(풍부한 사이트 요약)의 머리글자이며 , XML기반의 표준 통신 포맷입니다. Wikipedia는 RSS를 하나의 "전송규약(protocol)"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RSS는 http 또는 FTP와 같은 하나의 전송규약에 더 가깝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웹주소를 보면 "http://www.../xxx.htm" 으로 구성됩니다. 이를 풀이하면 http라는 전송방식으로 html파일을 보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http에 대응하는 것이 RSS이며 html에 대응하는 것이 xml입니다. 즉, RSS는 데이터를 보내는 방식이며 xml은 그 데이터의 구현방식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러한 구현방식을 통해 다양한 컨텐츠를 요약하고, 상호 공유하고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만든 표준입니다. RSS로 대표되는 컨텐츠 신디케이션 포맷을 통해 컨텐츠(또는 feed)를 전송 할 수 있으며, 컨텐츠 자체와 메타데이타로 구성되는 각각의 feed에는 헤드라인 내용만 있을 수도 있고, 스토리에 대한 링크만 있을 수도 있으며, 사이트의 전체 컨텐츠가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이용자는 정보에 접근하기 서핑을 하다가 일반적으로 어느 사이트가 맘에 들 경우, 사이트 서핑을 통해 정보를 발견 이용을 하거나, 북마크에 저장을 합니다. 북마크에 저장을 하는 이유는 나중에 와서 정보나 컨텐츠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북마크를 하고 나중에 시간이 될때 그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이구요.

이러한 방식은 직접 방문하지 않고서는 해당 사이트가 업데이트가 되었는지, 새글이 올라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RSS 를 이용하면 직접 방문하지 않고서도 RSS Reader (=Aggregator) 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사이트 업데이트 유무를 쉽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RSS 는 XML 기반의 새로운 표준입니다.

RSS를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기반인 XML 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XML 이란 extensible markup language의 머릿글자로 지금 웹사이트를 구성해온 HTML을 개선한 차세대 인터넷 언어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통언어입니다. HTML이 데이터베이스처럼 구조화된 데이터를 갖을 수 없는 반면, XML은 사용자가 정보화된 데이터를 조작하여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HTML이 웹브라우저를 통해 정보를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형태의 언어라면 XML은 보여주는 것과 데이터베이스를 분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용자가 데이터를 사용하고 싶은 형태로 이용,가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XML은 다른 애플리케이션에서도 이용하고 인식되어질 수 있도록 표준화된 태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상거래, 온라인 뱅킹, 푸시기술, 검색엔진, 제어시스템, 에이전트 등과 같은 넓은 분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3. RSS서비스의 장점

RSS의 장점은 아래의 6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선택적 구독 - 사용자가 원하는 topic과 정확히 일치하는 channel 선택
2) 빠른 구독 - 동시에 다양한 channel 소스 접근
3) History 관리 - 다양한 channel의 과거 기록들 보관이 가능하며
4) 자동화된 컨텐츠 연동이 용이 - syndication / aggregation
5) 컨텐츠 재사용성 - 구조화된 XML 데이타로 손쉬운 변환 및 처리가 가능
6)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 - 1:1에서 1:N으로 동시 접속


4. RSS 주요 용도

현재 주요 용도로는 웹사이트에 새롭게 생성되는 정보들을 쉽게 배포/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규칙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새로운 정보들을 RSS라는 규칙에 따라 제공하면 이용자는 RSS를 읽을 수 있는 브라우저나 리더를 통해 그 내용을 받아올 수 있습니다.

RSS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정보 제공자 측에서 본다면 웹페이지에 RSS를 지원함으로써 사용자들이 손쉽게 자신의 웹페이지의 최신정보를 배포할 수 있게 되어 보다 많은 방문을 유도할수 있을것이며 정보구독자 입장에서 보면 일일히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인터넷을 헤매지 않고도 아주 간단히 새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RSS문서를 제공하는 곳과 이를 사용하려는 사용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5. RSS는 RSS리더를 이용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RSS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은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RSS리더는 RSS문서를 읽는 프로그램입니다. Html 문서를 브라우저를 통하여 읽을 수 있듯이 RSS문서 역시 RSS 리더(reader)를 통하여 문서를 구독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여러가지 RSS리더 들의 소개되고 있으며 그 중 성능이 우수한 국산 프로그램은 2~3종 있습니다.

웹페이지에서 RSS문서를 읽을 수 있도록 웹기반 리더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음의 RSS넷과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작동되는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으로 대표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연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다음 RSS넷 <http://rss.daum.net/>
네 오워크의 RSS리더 [연모] <http://www.yeonmo.co.kr/>

웹 기반리더는 별도의 설치 없이 작동하나 5개 이상의 RSS문서를 구독하는데 브라우저의 해석능력등의 한계로 인하여 사용이 많이 불편하기 때문에 현재 RSS리더 프로그램이 대체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각 리더에서 브라우저를 이용할 수 있어 RSS이용자들은 리더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 2005년 미래한국 RSS 포럼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RSS를 구독할 수 있게 만드는 사이트에서 한 번 써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한RSS와 구글 리더 사이트를 알려 드립니다. 모두 회원 가입이 필요합니다.
개인 블로그에는 RSS 구독기가 내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거기에서도 사용가능합니다.

한RSS          http://www.hanrss.com/
구글 리더기   http://www.google.co.kr/reader/view

사 용 방법은 사이트에서 구독 추가를 누르고 각 사이트에서 RSS 주소를 복사하여 입력하면 됩니다.
그러면 특정 구독 사이트에서 여러 게시판과 포탈 뉴스 기사 업데이트 목록 등을 읽어올 수 있습니다.
2010/04/14 21:01 2010/04/14 21:01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관조적인 삶을 넘어
동네 슈퍼, SSM으로 바뀌다!

작년부터 시작된 SSM, 즉 기업형 슈퍼마켓(Super Supermarket)이 동네의 영세 상인들 사이에 지속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우리 동네에도 말로만 듣던 기습 개점이 몇 개월 전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기습 개점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대기업 로고가 들어간 매장의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며칠 사이에 공사는 완료되었다. 그 맞은편에는 할머니 한 분이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슈퍼 마켓이 개점하는 날, 그 앞에는 대학교에서나 보던 빨간 글씨로 쓴 '지역 장사를 죽이는 대기업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동네 사람 몇 명이 팔짱을 낀 채 그곳을 지켜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다수의 동네 사람들이 대기업의 슈퍼마켓을 찾았다. 처음에는 동네 할머니의 구멍가게를 지나서 슈퍼마켓을 가야 하는 그 길을 지날 때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거나 걸음을 빨리 걷곤 했지만 곧 그런 사람들도 없어졌다. 일주일이 지나서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다.

사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의 구멍가게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 가게에는 먼지 낀 과자들과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들이 많았고 불량 식품 과자들이 항상 진열되어 있었으며 할머니가 앉아 있던 평상에는 색소가 짙은 '슬러시'가 돌아가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색소로 가득한 음료를 먹고는 입 주변이 보라색으로 변해서 돌아다니곤 했다. 결국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 불량 식품 가득한 구멍가게를 살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매일 거대한 유통망으로 새 물건이 들어오고 늦은 저녁에는 할인까지 해 주는 슈퍼마켓을 동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용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이렇게 SSM 업계 1위인 대기업은 동네의 후줄근한 가게들을 공략하고 있다. 그들은 기습 출점이라는 공격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작년 3분기 매출 3,000억, 영업이익 70억을 보이는 등 작년 대비 36.6%의 영업이익을 냈고 아마도 새해엔 이익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

'이마트 피자' 논쟁

다 행히 최근 기업형슈퍼마켓(SSM) 규제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SSM 기습 개점엔 제동이 걸리겠지만 그간에도 영세 상인들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또한 이러한 피해 이면에는 그간 영세 상인들의 취약한 부분들, 이를테면 친절한 서비스, 원활한 유통망, 반품의 용이성, 늦은 시각까지 매장 운영 등에 변별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마트 피자 문제로 불거진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과 나우콤 문용식 대표 사이에 트위터 논쟁도 사실상 이러한 대기업 마케팅의 문제를 좀 더 고민하게 만들었다. 특히 정 부회장의 "본인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시나요?"라는 질문은 트위터 안에서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RT(리트윗)를 하면서 그에 대한 의견들을 쏟아 내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시골의사'로 널리 알려진 박경철이 제기한 이마트 피자의 문제점은 대기업의 영세 상권 침범 문제를 보다 깊숙이 짚어 주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면에 있습니다. 신세계 이마트에 피자를 독점 공급하고 내부 입점해서 빵을 판매하는 조선호텔베이커리는 원래 신세계 관계사인 조선호텔의 소속이었으나 조선호텔에서 분사를 해서 별개의 회사로 독립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정용진 부회장의 동생인 정유경씨가 45%의 지분을 가진 개인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 개인 회사가 이마트에 독점적으로 베이커리 사업을 하면서 베이커리 매출액이 조선호텔의 매출액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조선호텔이 수익을 크게 낼 수 있는 사업을 사주 가족에게 분할해 준 사적 이익 편취의 사례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마트 역시 사주의 특수 관계인이 운영하는 회사에게 독점적으로 사업권을 줌으로써 경쟁 납품의 기회를 포기했기 때문에 조선호텔과 신세계 양사의 이익이 주식회사 주주의 이익을 대주주 가족에게 양도한 것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삼성이나 현대 등 재벌 기업들이 자녀들의 불법적 자산 증여와 자산 증식을 위해서 사용해 온 전형적 수단들이기도 합니다. 재벌가의 윤리의식을 보여 주는 모습이기도 한데 앞으로는 상생을 외치고 뒤로는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이념적 소비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한국 부자들의 모습에서 상생과 공정이 공허한 화두로 들린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

솔 직히 나는 SSM과 이마트 피자 문제를 바라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진보적인 이들은 대기업의 기습 출점이나 재벌가들의 독점적 사업권 문제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을 거시적 형태로 비판했다. 하지만 퇴근길에 SSM을 가 보면 그 늦은 시간에 그곳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이들로 붐비기 일쑤였고, 주말에 마트를 가면 이미 '그 유명한 피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실 나도 이 글을 쓰기 위해 피자를 한 판 사 먹어 봤다. 동네 피자를 주문하면 가격은 비교적 저렴했지만 재료들이 부실하거나 신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결국엔 돈을 더 주고서라도 다시 브랜드 피자를 시켜 먹곤 했는데 마트에서 산 피자는 더 저렴한 가격에 훨씬 재료도 좋았고 맛도 있었다.

나는 마트에서 피자를 사는 이들과 SSM에서 장을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기업을 선호하고 신세계 정 부회장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기에 대다수의 30~40대 직장인들은 은연중에도 대기업이나 재벌에 비판적이고 그 누구보다 그들의 윤리의식이나 부정행위에 냉정하다. 하지만 나는 그 다수의 사람들이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이마트 피자를 사 먹고 동네 SSM을 이용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의 일상이 너무 피곤한 반면, 대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너무나도 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머릿속의 문제의식과 손과 발이 머무는 공간 사이의 괴리감이 발생한다.

일 례로 나는 한때 마트가 24시간 운영된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묶여 있는 입장에서 밤 12시가 넘어서도 장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른다. 선진국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간지에서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문제를 다룬 기사를 읽었다. 그들의 부당한 근로 조건과 불규칙한 근무 시간들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조명했고 나는 그 기사를 읽은 후에야 마트에서 내 편의를 위해 새벽까지 근무해야 하는 직원들의 피곤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대형 마트 이용을 끊기로 결심했다. 동네에서 장을 보고 영세 상인들의 가게들의 물건을 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처음 몇 달은 비교적 괜찮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몇 달을 가지 않고 결국 다시 소비 습관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동네 상인들의 시간에 내가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네에 장이 서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주중이고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많은 물건을 사는 일을 자주 힘들어했다.

반면에 SSM은 물건 하나를 사도 집까지 배달해 주었고 대형 마트의 물건은 매일매일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들어오는 반면 동네 가게는 묵은 물건들을 며칠씩 되팔았다. 게다가 내가 자주 가는 동네 가게는 아줌마가 물건을 팔 때와 아저씨가 물건을 팔 때 가격이 달랐다. 주인아저씨는 자주 적은 양의 채소를 살 때 나에게 바가지요금을 받곤 했고 나는 매번 가격 흥정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지금은 전적으로 대형 마트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그 소비 행태 자체를 끊지 못했다. 사실 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소비자, 과연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영세 상인을 보호하는 문제는 사실 구조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부분이다. 대기업으로부터 그들의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회 구조적, 법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허나 미시적으로 볼 때 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우리는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일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는가. 혹, 비판 의식을 가지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 디테일한 일상의 불합리함은 눈감고자 하는 건 아닐까. 나만 의지력이 약한 사이비 진보주의자인 걸까. 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을 계기로 SSM을 비판하고 이마트의 독점 행위를 문제 삼는다면, 일상적 소비생활에 있어서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지인에게 이런 얘길 했더니 그분도 결연한 마음으로 대기업 가전제품 대신 중소기업의 물건을 샀다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대기업 물건을 사게 되더라는 비슷한 얘길 했다. A/S가 너무 다르더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중소기업 물건은 수리 절차도 복잡하고 기간도 오래 걸린 데다가 고치고 나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대기업은 문제의 물건을 아예 새 제품으로 바꿔 줬다고 했다. 이런 서비스 앞에서 중소기업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개봉한 물건, 며칠 써 보고 문제가 있다고 우기는 물건을 바꿔 줄 수 있을까. 대기업은 해 줬다. 그것도 지나치게 친절하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환상적인 대기업 서비스의 이면에는 누군가 손해 보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반품된 제품은 OEM에 납품했던 하청업체의 손실이 되고 더 낮은 가격에 더 양질의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많은 생산자와 도매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불합리한 거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이런 불합리, 부조리는 고스란히 그 하청업체의 직원들의 낮은 복지와 수당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이면의 부조리는 잘 감추어 둔 채 대기업은 소비자가 원하는 완벽한 고객 감동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문제는 대기업을 대놓고 비판하는 많은 진보적 소비자들이 이런 서비스에 길들여져 정작 소비 자체는 자신들의 '이념적'으로 하지 않는 묘한 기현상이 발생한다. 과연 우리 소비자들은 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다수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대기업 슈퍼마켓과 피자와 치킨들이 주변을 채워 갈 것이다. 나는 요즘 점점 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그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여전히 인터넷에는 많은 이들이 멋지고 탁월한 언변으로 글을 쓰고 트위터에서 지저귀지만 SSM은 늦은 밤까지 성황을 이루고 이마트 피자, 통큰 피자는 더 잘 팔린다. 대기업이 이런 '이념적 소비자'를 과연 두려워할지 의문이다.
2010/04/12 00:19 2010/04/12 00:19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관조적인 삶을 넘어
젊은 남편들 vs. 아버지 세대의 남편들

요즘은 업무 중에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면 살짝 아줌마들 수다 떠는 분위기가 난다. 야근에 특근까지 하고 주말 내내 두 아이를 보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 고부간 갈등이 생겨 중재하느라 진땀 흘린 남편들 이야기가 제법 들린다. 흔히 하는 소리로, 요즘 남편들은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진짜로 헌신적인 남편과 가짜로 헌신적인 남편이 바로 그 두 부류다. 결국 속내야 어떠하든 간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른바 '간 큰 남자'는 없다는 말이다.

집안일과 육아의 경우, 나도 신혼 초에는 집안일에 익숙지 않아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미루다가, 폭발 직전의 아내에게 정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후 많이 변했다. 육아 문제도 회사 일이 바빠도 육아는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남편들 다들 참 잘하는 것 같다. 야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 목욕시키고 재우고 새벽에 분유 먹이고, 주말에는 아예 아이를 전담하는 남편도 많아서 월요일 아침엔 유독 눈이 충혈되거나 조는 남편들도 종종 보인다. TV 뉴스에서 아이랑 나들이 나와 쓰러져 조는 남편들 모습이 나오자, 아내도 남편들의 고충을 아는지 '남편들 참 고생이 많다!'고 한 소리 거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요즘은 가족이 모이거나 명절이 되어 세대 간에 친척들이 모이면 아버지 세대의 남편들을 답답하게 느끼는 젊은 부부들이 많다. 식사 준비할 때는 TV를 보며 무심하게 있다가 음식 투정을 하는가 하면 요즘 아들딸들이 버릇이 없다고 일장 훈계를 몇십 분씩 늘어놓는 분들도 있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드시고 만취하여 실수하거나 그런 상태에서도 굳이 운전대를 잡겠다고 큰소리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말끝마다 "어디 여자가~"라며 대놓고 여성 차별적인 말들을 쏟아 내는 분들은 어떤가. 보고만 있어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주변에서 나는 여성 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를 많이 하기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교회에서 작성하는 모든 가족 카드, 주보 글에도 아내의 이름을 먼저 쓰는 편이고(물론 이럴 경우에도 굳이 순서를 바꾸어 편집하는 분들이 계신다) 집안일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가부장적인 말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직설적으로 문제를 삼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바뀐 부분들도 있다.


'진상 남편', '혐오스런 아버지'가 되기까지

처음 내가 아버지 세대 남편들을 곱씹어 보게 된 건 회사에 들어와서다. 회사에서 임원회의 서기로 자주 들어가는 동기가 요즘 아버지들 너무 불쌍하단다. 자기네 팀장이 나이가 쉰인데 임원회의 끝나고 뒤풀이 가서 임원들 비위 맞추느라 노래방에서 머리에 넥타이 매고 트로트를 불러 대는데, 그 순간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내 아버지도 술을 드시면 전쟁 얘기, 군대 얘기, 그리고 30~40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 내곤 하셨다. 가장 많이 하시던 말은 "그땐 깡패 같은 세상이라…."였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사셨던 70~80년대는 깡패 같은 세상이었다. 부정부패도 많았고 정치적으로는 암흑기였던 그 시절에 촌지, 인맥, 파벌, 노동 운동, 유흥 문화 등 성장기의 한국 사회에서 스무 살 청년의 흔들리는 사회의 첫걸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순수하게 그분들 세대의 입장에서 해 본다. 군대에서와 동일하게 직장에서도 상명하복을 강요받고 '쪼인트를 까여 가며' 청년 시절의 젊음을 회사에 바친 아버지들은 집에서는 그만큼 소외되어 갔다. 집에서는 설거지 수세미나 바느질할 실·바늘 하나 찾을 줄 몰라 아내의 비난을 듣는다. 자녀들 교육은 이미 아내가 전담한 지 오래다. 자녀들이 과하게 공부하는 거 같아 지적을 하려 들면 우리나라 교육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순진한 말을 한다며 구박하기 일쑤다.

아들딸도 아버지가 집에 있는 게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잘 보이지 않던 집에서 가끔씩 존재하는 아버지의 위치는 낯선 손님의 그것만큼이나 낯설고 어렵다. 이미 가정은 어머니의 주도하에 잘 돌아가는 공동체이고, 아버지는 그 공동체에서는 한낱 이방인이자 갈수록 권력도 약해지는 중년 아저씨에 불과하다. 직장에서는 중간 관리 정도라서 자신의 지시에 말대꾸를 상상조차 못하는 신입 사원이 있는 반면, 가정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결국 자기 말을 관철시키려고 과하게 화를 내거나 자녀들에게 폭력을 쓰게 되기도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가족들과는 심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매번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해 대고 자신의 치부를 찌르며 철저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존재로 굳어지면서, 아버지들은 집보다 회사에 있는 게 편한 탓에 점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 간혹 업무상으로 가던 유흥 주점에서 돈을 주면 웃어 주고 술도 따라 주는 젊고 예쁜 여성들의 접대 서비스로 위로를 받는다. 아내와 달리 자기가 술에 만취하면 할수록 더 좋아하고, 옆에서 술잔도 받아 주고 허세 섞인 말에도 도리어 추켜세워 주는 여성들의 접대에 중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남편들은 돌이키지 못할 실수도 하고 그것이 밝혀져서 가정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남자들은 점점 더 '진상 남편'에 '혐오스런 아버지'가 되어 간다.


아버지 세대를 위한, 그리고 우리 남편들을 위하여

교회 공동체건 사회 공동체건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고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들어지는 아버지상이라는 게 있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직장·친구들·교회 가족들을 통틀어 앞서 설명한 케이스에 가까운 아버지들이 꽤나 많았다. 아마 내 주변 30대 중반 전후의 자녀들 중 상당수는 이와 비슷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을 법하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또한 그런 아버지와 살아가는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항상 힘들어했고, 담을 쌓고 살거나 매번 집안싸움으로 크게 번지는 일이 많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자주 부모를 위한 육아 학교 같은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건 하나를 사도 사용 설명서란 게 있고 자동차를 몰 때에도 면허 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할 수도 있는 아이를 키우는 법은 왜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지 지금도 여전히 의아하다. 동일하게 나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를 위한 사용 설명서나 면허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설명서를 쓰게 된다면 세 가지를 반드시 넣고 싶다. 첫째는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존경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마음 깊숙한 곳에 아내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설령 그런 자격이 없는 상황에서도 인정받고 싶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지인들에게 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므로,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표현해주는 게 남편이 가정일에 참여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는 관계 중심적 대화 시간을 만들라는 것이다. 남자는 피하려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깊은 대화 시간을 자주 갖는 게 좋다. 남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자신의 고민들을 가정에 털어놓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때때로 말동무, 술친구가 되어 주어서 가정이 한 남자의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적 고민과 상처들을 들어주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안식의 동굴로 들어감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남자는 자기만의 동굴로 숨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심리적 곤경에 처해 있거나, 중대한 결정을 두고 고민하는 경우거나, 혹은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하고 잠시 쉬기 위해 숨는 시기일 수도 있다. 이 시기 대다수의 아내는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껴서 오히려 조바심을 내기도 하지만, 남편은 아내와 지인들에게조차 생각이 정리되어야만 꺼내어 말할 수 있다.

우리네 가정은 참 문제가 많다. 문제가 많은데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만 많고,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하거나 어려움을 감수하고 헌신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한 번쯤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돌아보고 그 풀리지 않을 법한 실타래를 풀어 보자는 의도이다. 우리 세대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정서와 보수성, 가정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정서의 이면을 살펴보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세대 간의 갈등의 폭을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호하게 아버지 세대만을 탓하며 그들과 소통 자체가 불가하다는 섣부른 판정을 내리기보다는, 서로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2010/04/12 00:18 2010/04/12 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