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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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30대의 전쟁터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지 6년째다. 현재 나는 자동차 연구소에서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지인들은 내게 설계가 적성에 맞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졸업을 앞두고는 기독교 단체 주변을 기웃거렸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더 신앙적이고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마지막까지 전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졸업반이 된 후,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전공 살리기는 대학원 생활을 거쳐 자동차 연구소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직업이 천직이라거나 소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나의 일상은 이렇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에 퇴근한다. 그래도 주5일제 시행으로 주말에는 쉬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그마저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시키고 있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라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시간 중에는 도통 짬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내에서 어학 공부 같은 자기계발, 혹은 성경 공부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간혹 글이라도 쓰려면 끼니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야만 한다. 정년을 생각하면서 전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돈 계산을 해 보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몇 년 내로 서울에서 작은 평수의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대출금을 다 갚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대기업 사정이 이러니 2차, 3차 협력 업체는 더 열악하리라. 일정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상사의 지시에 의해 업체 직원에게 과도한 업무를 떠넘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퇴사하는 이들도 많다. 급여는 대기업에 비해 적으면서 며칠 밤, 심지어 몇 달씩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잦아서 몸과 마음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육아라는 이름의 부부 프로젝트

최근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이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는 임신 후 육아 휴직 문제로 사내의 암묵적인 압력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채 직장을 그만두었고 출산한 이후에는 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지 못하는 나 때문에 육아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중에는 퇴근이 늦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육아를 많이 돕는 편이다. 문제는 직장에서 일주일의 피로가 가득 쌓인 내 입장에서도 이틀간의 육아가 버거운 게 사실인지라 때로는 사소한 일로 부부 간에 서운해 하며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출산 후 바쁜 남편과 점점 커져 가는 고부 갈등, 육아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주변에도 부쩍 많아졌고 그러한 문제로 연고지 근처나 근무시간에 여유가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남편들도 생겨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의 경우에는 육아 도우미를 쓰거나 기관에 보내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이렇듯 육아라는 프로젝트를 놓고 부부가 서로 동역자가 되어 이를 감당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지칠 때까지 업무를 하고 있는 30대의 부모들은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직장 생활과 육아에 올인하며 이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는 신앙 서적도 꽤나 읽었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때때로 시간을 내어 참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수면 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이런 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대기업과 같은 제조업 관련 직종에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직장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거나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

 

 

개인 영성에 매몰된 기독 학생 운동

선교단체 시절,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갈등은 사역의 방향성 문제였다. 내부적으로 길고 지루했던 논쟁도 있었고 암묵적으로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갈등의 주요 원인은 이러했다. 나의 주장은 개인 영성 훈련과 더불어 사회참여의 문제를 학부 때에 사역 방향에 포함시켜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의 방향성이었다-이었으나 선교단체 분위기는 개인 영성을 먼저 다진 후에 사회에 나가서 각론을 실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주변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졸업 후에 사회참여의 각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지성 사회 복음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선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나 또한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인 영성과 사회참여의 균형성 문제를 거론했을 때 캠퍼스에서 개인 영성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면 분명 졸업 이후에 사회참여 각론에 있어서의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침 내지는 훈련의 장이 필요했을 법한데 기독 학생 운동에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델 제시가 없었고 훈련의 장도 아니었으며 현장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듯하다.

앞서 언급했던 직장과 육아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30대 직장인에게는 분명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전에는 목회 세습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청 광장에 나가는 것을 혼자 결정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도 내 개인의 문제니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좋다는 책과 기사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꼼꼼히 읽었고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시의 적절하게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부 때부터 철저하게 고민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공부했어도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실천해 옮기기가 쉽지 않은데,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가 많았던 캠퍼스에서조차 그러한 고민과 참여의 경험이 없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가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직장에서의 총체적 복음

학부 시절 고민했던 총체적 복음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직업과 신앙 문제의 거창한 통합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첫째는 앞서 말한 신앙과 전공, 신앙과 업무의 통합 문제다. 효율성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앙과 업무를 아우르는 적용점을 찾기란 참 어렵다. 가끔은 전공 분야에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는 기독교인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신앙적인 잣대로 자신들의 분야와 조직을 성급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조금 설계에 익숙해진 ‘초짜’ 설계자이니 말이다. 둘째는 환경문제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소형차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부품의 원가 절감 방안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낸다거나 연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 혹은 부품 업체에서 제조 공정상 폐기물이나 폐수들을 줄일 수 있는 재질과 공법 연구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만일 부품 설계자가 아닌 차종 프로젝트 기획자라면 단품을 넘어 좀 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이런 방향들을 추진해 갈 수 있을 듯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직장에서 다른 팀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에 놓이는 경우, 그 팀의 직무 유기를 부각시키거나 우리 팀의 성과를 과대 포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업무 분장에 있어서도 나와 우리 팀의 책임을 축소하고 다른 팀을 최대한 이용해야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간에는 어떠한가. 고과를 높게 받기 위해 연구 성과를 먼저 보고하려고 애쓰거나 아예 후배 사원의 기술이나 보고서를 가로채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이나 팀의 알력 다툼을 넘어 노조 문제나 협력 업체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와 같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나아간다.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성공보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힘쓰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않으면 쉽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사유하고 작은 일부터 신앙적 양심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장에서 만난 기독교인의 경험

회사 안에도 기독교 관련 단체들이 많다. 많은 경우 사내 신우회가 있고 각 선교단체의 학사모임도 있으며 BBB(직장인성경공부모임)라는 전국적인 직장인 모임도 있다. 부서 내 기도모임부터 로비에서 일대일로 큐티 나눔을 하는 이들도 간간이 보인다. 직장에서 기독교인을 만나서 대학 시절 선교단체에서 활동했다고 하면 어떤 기대감으로 나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난 그런 부류를 싫어했다. 직장에서 내가 만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신앙 색깔을 가지고 있거나 술자리를 거부하는 ‘왕따’에, 업무가 급한데도 불구하고 예배나 기타 신앙 모임에 우선순위를 둬서 다른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인들과 신앙적인 이유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솔직히 내 ‘고매한’ 신앙을 그들 때문에 흐리기 싫다는 일종의 신앙적 우월감도 작용했다.

 

얼마 전 함께 일하던 다른 팀의 수석연구원 한 분이 사무실 내 책상에서 신앙서적을 보고는 함께 식사를 청했다. 그분은 내가 예상한대로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 나는 간간이 참석하는 건 모르겠지만 업무가 바빠서 부서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노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분은 더는 권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셨는데, 그 이야기에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그는 이제 자신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급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이 남은 시간 동안 이 직장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젊은 시절에는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 사내 전도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고 직원들을 열심히 전도했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직원들이 회심을 했다고 했다. 합리적이면서 강압적이지도 않고 늘 직급에 관계없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대하는 그분의 성품으로 볼 때, 그의 인격에서부터 나온 전도가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날 난 내가 참 하찮게 느껴졌다. 사실 그분과 식사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내 신앙생활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선교사가 되지 않은 솔직한 이유가 선교지로 가기 싫어서라는 명백한 이유를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요즘은 힘들다는 핑계로 주일 예배를 빠지기도 하고 헌금이나 후원금을 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그뿐이랴. 스스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구분 지으려고 애쓰는, 답답하고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직장에서 모이기에 힘쓰고 주변 동료들을 전도하는 동안 정작 나는 한 명의 지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 그것도 하루 10시간 넘게 ‘회사’라는 신에게는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하면서 말이다.



기독 직장인의 소통과 공감, 연합과 참여를 꿈꾸며
직장인의 입장에서 졸업 후에 신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학부 시절 그렇게 존경하던 선배들이 학사가 되고 나면 수면에서 사라지곤 하는 일들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지만 정작 30대 중반의, 중간 직급의 위치에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조차 버겁고 힘듦을 경험한다. 매순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고 고민한다. 이런 치열함 때문에 과거에 사회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에 어떤 교계의 중추 세력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도와 봉사에 국한된 지역 교회와 선교단체의 방향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또한 나를 포함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담을 쌓고 그들과의 교류를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제보다 더 꺼리는 편협한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 중, 본이 될 만한 몇몇 분들의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금욕적인 삶, 자기와 다른 의견에 공격적이지 않고 매순간 상대를 포용하려는 성품에 깊이 감동해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모든 면에서 옳다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역사에 대한 몰이해, 신앙적‧정치적인 면에서의 잘못된 편견 등이 답답할 때도 많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완전하고 본이 되는 존재였던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학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내가 느끼는 소명은 복음주의권 안에서의 참여와 연합이다. 또한 요즘 들어 자주 고민하게 되는 것은 우리 세대 기독교인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다. 아직은 다소 무력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삶에 파묻혀서 자신의 일상에 매몰되기도 하고 자기가 속한 영역 안에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이 대다수다. 소통과 공감을 통해 이들을 연합의 장이자 실천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운동과 그에 대한 참여 방법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이 글의 일부는 <공부하는 그리스도인>(IVP)에 실린 ‘기독 지성과 삶의 일치를 향하여’와 복음주의연구소가 주관한 기독 지성 집담회 발제문, ‘현장에서 느끼는 기독 지성 운동’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 주)

2010/07/12 00:20 2010/07/12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