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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편들 vs. 아버지 세대의 남편들

요즘은 업무 중에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면 살짝 아줌마들 수다 떠는 분위기가 난다. 야근에 특근까지 하고 주말 내내 두 아이를 보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 고부간 갈등이 생겨 중재하느라 진땀 흘린 남편들 이야기가 제법 들린다. 흔히 하는 소리로, 요즘 남편들은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진짜로 헌신적인 남편과 가짜로 헌신적인 남편이 바로 그 두 부류다. 결국 속내야 어떠하든 간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른바 '간 큰 남자'는 없다는 말이다.

집안일과 육아의 경우, 나도 신혼 초에는 집안일에 익숙지 않아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미루다가, 폭발 직전의 아내에게 정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후 많이 변했다. 육아 문제도 회사 일이 바빠도 육아는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남편들 다들 참 잘하는 것 같다. 야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 목욕시키고 재우고 새벽에 분유 먹이고, 주말에는 아예 아이를 전담하는 남편도 많아서 월요일 아침엔 유독 눈이 충혈되거나 조는 남편들도 종종 보인다. TV 뉴스에서 아이랑 나들이 나와 쓰러져 조는 남편들 모습이 나오자, 아내도 남편들의 고충을 아는지 '남편들 참 고생이 많다!'고 한 소리 거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요즘은 가족이 모이거나 명절이 되어 세대 간에 친척들이 모이면 아버지 세대의 남편들을 답답하게 느끼는 젊은 부부들이 많다. 식사 준비할 때는 TV를 보며 무심하게 있다가 음식 투정을 하는가 하면 요즘 아들딸들이 버릇이 없다고 일장 훈계를 몇십 분씩 늘어놓는 분들도 있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드시고 만취하여 실수하거나 그런 상태에서도 굳이 운전대를 잡겠다고 큰소리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말끝마다 "어디 여자가~"라며 대놓고 여성 차별적인 말들을 쏟아 내는 분들은 어떤가. 보고만 있어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주변에서 나는 여성 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를 많이 하기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교회에서 작성하는 모든 가족 카드, 주보 글에도 아내의 이름을 먼저 쓰는 편이고(물론 이럴 경우에도 굳이 순서를 바꾸어 편집하는 분들이 계신다) 집안일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가부장적인 말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직설적으로 문제를 삼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바뀐 부분들도 있다.


'진상 남편', '혐오스런 아버지'가 되기까지

처음 내가 아버지 세대 남편들을 곱씹어 보게 된 건 회사에 들어와서다. 회사에서 임원회의 서기로 자주 들어가는 동기가 요즘 아버지들 너무 불쌍하단다. 자기네 팀장이 나이가 쉰인데 임원회의 끝나고 뒤풀이 가서 임원들 비위 맞추느라 노래방에서 머리에 넥타이 매고 트로트를 불러 대는데, 그 순간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내 아버지도 술을 드시면 전쟁 얘기, 군대 얘기, 그리고 30~40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 내곤 하셨다. 가장 많이 하시던 말은 "그땐 깡패 같은 세상이라…."였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사셨던 70~80년대는 깡패 같은 세상이었다. 부정부패도 많았고 정치적으로는 암흑기였던 그 시절에 촌지, 인맥, 파벌, 노동 운동, 유흥 문화 등 성장기의 한국 사회에서 스무 살 청년의 흔들리는 사회의 첫걸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순수하게 그분들 세대의 입장에서 해 본다. 군대에서와 동일하게 직장에서도 상명하복을 강요받고 '쪼인트를 까여 가며' 청년 시절의 젊음을 회사에 바친 아버지들은 집에서는 그만큼 소외되어 갔다. 집에서는 설거지 수세미나 바느질할 실·바늘 하나 찾을 줄 몰라 아내의 비난을 듣는다. 자녀들 교육은 이미 아내가 전담한 지 오래다. 자녀들이 과하게 공부하는 거 같아 지적을 하려 들면 우리나라 교육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순진한 말을 한다며 구박하기 일쑤다.

아들딸도 아버지가 집에 있는 게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잘 보이지 않던 집에서 가끔씩 존재하는 아버지의 위치는 낯선 손님의 그것만큼이나 낯설고 어렵다. 이미 가정은 어머니의 주도하에 잘 돌아가는 공동체이고, 아버지는 그 공동체에서는 한낱 이방인이자 갈수록 권력도 약해지는 중년 아저씨에 불과하다. 직장에서는 중간 관리 정도라서 자신의 지시에 말대꾸를 상상조차 못하는 신입 사원이 있는 반면, 가정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결국 자기 말을 관철시키려고 과하게 화를 내거나 자녀들에게 폭력을 쓰게 되기도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가족들과는 심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매번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해 대고 자신의 치부를 찌르며 철저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존재로 굳어지면서, 아버지들은 집보다 회사에 있는 게 편한 탓에 점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 간혹 업무상으로 가던 유흥 주점에서 돈을 주면 웃어 주고 술도 따라 주는 젊고 예쁜 여성들의 접대 서비스로 위로를 받는다. 아내와 달리 자기가 술에 만취하면 할수록 더 좋아하고, 옆에서 술잔도 받아 주고 허세 섞인 말에도 도리어 추켜세워 주는 여성들의 접대에 중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남편들은 돌이키지 못할 실수도 하고 그것이 밝혀져서 가정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남자들은 점점 더 '진상 남편'에 '혐오스런 아버지'가 되어 간다.


아버지 세대를 위한, 그리고 우리 남편들을 위하여

교회 공동체건 사회 공동체건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고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들어지는 아버지상이라는 게 있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직장·친구들·교회 가족들을 통틀어 앞서 설명한 케이스에 가까운 아버지들이 꽤나 많았다. 아마 내 주변 30대 중반 전후의 자녀들 중 상당수는 이와 비슷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을 법하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또한 그런 아버지와 살아가는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항상 힘들어했고, 담을 쌓고 살거나 매번 집안싸움으로 크게 번지는 일이 많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자주 부모를 위한 육아 학교 같은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건 하나를 사도 사용 설명서란 게 있고 자동차를 몰 때에도 면허 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할 수도 있는 아이를 키우는 법은 왜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지 지금도 여전히 의아하다. 동일하게 나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를 위한 사용 설명서나 면허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설명서를 쓰게 된다면 세 가지를 반드시 넣고 싶다. 첫째는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존경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마음 깊숙한 곳에 아내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설령 그런 자격이 없는 상황에서도 인정받고 싶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지인들에게 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므로,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표현해주는 게 남편이 가정일에 참여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는 관계 중심적 대화 시간을 만들라는 것이다. 남자는 피하려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깊은 대화 시간을 자주 갖는 게 좋다. 남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자신의 고민들을 가정에 털어놓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때때로 말동무, 술친구가 되어 주어서 가정이 한 남자의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적 고민과 상처들을 들어주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안식의 동굴로 들어감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남자는 자기만의 동굴로 숨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심리적 곤경에 처해 있거나, 중대한 결정을 두고 고민하는 경우거나, 혹은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하고 잠시 쉬기 위해 숨는 시기일 수도 있다. 이 시기 대다수의 아내는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껴서 오히려 조바심을 내기도 하지만, 남편은 아내와 지인들에게조차 생각이 정리되어야만 꺼내어 말할 수 있다.

우리네 가정은 참 문제가 많다. 문제가 많은데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만 많고,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하거나 어려움을 감수하고 헌신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한 번쯤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돌아보고 그 풀리지 않을 법한 실타래를 풀어 보자는 의도이다. 우리 세대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정서와 보수성, 가정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정서의 이면을 살펴보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세대 간의 갈등의 폭을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호하게 아버지 세대만을 탓하며 그들과 소통 자체가 불가하다는 섣부른 판정을 내리기보다는, 서로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2010/04/12 00:18 2010/04/12 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