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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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결혼하다
아내와 결혼한 지 6년째다. 흥미로운 건 내가 사랑한 한 여성과 결혼 후에 그녀가 '아내'라는 호칭을 얻게 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 후 아내에게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예전엔 명절 때 자기 집에서 편히 드러누워 음식을 끼고 TV를 보며 지냈는데, 갑자기 남의 집에 옷을 차려 입고 제사 음식까지 만들어 가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안 손자들 중에 내가 첫 결혼이었으므로 제사 때 일을 거들 여자라고는 내 어머니를 포함하여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들 외엔 유일한 며느리인 내 아내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큰집이나 우리 집이 가부장적인 정서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 대부분의 일을 서로 나눠서 했고 설거지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분위기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없었지만, 명절에 정작 지방에 있는 아내의 집에는 가지도 못한 채 얼굴도 익숙지 않은 큰아버지 댁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내를 심정적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결혼한 첫 해에, 자기 부모님에게조차 밥상 한번 변변히 차려 본 적 없는 아내는 얼굴도 모르는 남편 친척들의 명절 음식을 하다가 서러운 마음에 급기야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다! 난 가부장적이지 않은 현대 남성이라 여겼지만, 오랫동안 명절 음식 차리기에 지친 우리 집안 어머니들의 일을 덜어 드리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그 노동의 일부가 아내에게 넘겨지는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내와의 긴 대화 끝에 나는 이 일이 아내가 나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가 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명절에 처가에 못 가는 문제는 다행히 우리 집이 신정에 제사를 지내는 터라 구정에는 일순위로 처가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이 의무가 남편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자 감사하게도 아내는 점점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주게' 되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차별들
명절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불합리한 상황들은 이후에도 자주 발생했다. 솔직히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나 자신이 더 꽉 막힌 마초라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 절절하게 깨달았다. 불합리하게 여겼던 호주제는 다행히 2008년에 없어졌지만, 가사 노동의 분배부터 양가 부모님 용돈 문제까지, 화두가 될 때마다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함을 깨달았다. 집 청소를 미루던 나의 습관에서부터 아내가 우리 집 대소사를 챙기길 원하는 어머니의 잦은 전화까지. 한국 사회에서 남편으로서 아내가 결혼 후에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큰 사건은 아내가 임신을 하고 생겼다.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생겼다는 기쁨에 하염없이 들떠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를 넣어서 말이다. 그 얘길 들은 아내는 겉으로 보기에도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내는 남편 성을 따라 아이 이름이 정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석 자 중에 두 자가 남편 집안의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의 대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 입장에서, 자기 자식의 이름에 자신의 어떤 '의도'도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속상할지 공감이 되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그냥 아내와 둘이서 한글 이름을 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버럭 화를 내실 일이 눈에 선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아내를 배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이야기를 해야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이 지은 아이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당시에 무뚝뚝하기만 한 아버지가 아내에게 평소 안 주던 용돈을 주신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아내가 부자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 준 셈이 되었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아내의 존재감을 살려 주려면, 미시적인 현장에서 그 구조 속에 얽혀 있는 다른 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부장적 사회적 굴레를 넘어서

아내와 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매 순간 얼마나 잦은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지를 실감했다. 물론 이런 생각의 흐름을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앞선 세대에 여성들이, 아내들이, 어머니들이 당한 불합리한 차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 세대에는 이 모든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대가 아니던가. 내 어머니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시집왔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명절에 처가엔 자주 가지도 못한 채로 음식을 만들었고, 자식들 이름을 남자 집안의 족보에 따라 지었다. 돌이켜 보면 명절에 어머닌 항시 나를 업고 보따리를 들곤 했고, 아버진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거나 뒷짐을 지고 유유히 담배를 태우시고 먼저 걸음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식과 가정에 대한 어머니 세대의 노동과 헌신은 지금의 내 상식 선에서는 노예 수준의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떤 모성애 내지는 여자의 지고지순함 혹은 현모양처라는 표현으로 미화하는 것에 나는 불편함을 느낄 정도다. 이 시대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미시적인 시각으로 볼 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문제는 이전 세대 차별과 불합리함의 악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다수의 어머니들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해진 많은 어머니들은 그 질서는 지키되 그 강도를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하는 말로 자신이 며느리에게 시키는 것들은 시어머니에게 받은 것의 반의 반에도 안 된다고 하는 말이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대가 다른 아내 세대는 부모 세대의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부장적 질서 자체가 불합리한 데다가 세대 차이가 나는 윗세대의 방식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가부장적 질서의 고착화가, 여성이 도리어 여성을 억압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세대의 아내들을 보며,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의 아내를 보며, 많은 고민과 대안을 찾고자 여전히 애쓰고 있다. 결혼 연차가 높아질수록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아들'이자 '남편'인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작은 일부터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다. 나의 고민과 대안들이 내 세대에서 세대 간의 악순환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더라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와 많은 남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짐에 앞서, 이 두 세대의 여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가 되면 좋을 것 같다. 아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종국에는 가부장적 사회의 부조리를 푸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010/04/12 00:17 2010/04/1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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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경험

나도 그렇지만 또래 친구 부부들도 육아에 정신이 없다. 만나면 나누는 대화도 이제는 아이들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한번은 친한 친구 한 녀석이 지난 주말에 놀이터에 나가 아이랑 노는데 자기 애보다 몸집이 큰 애들이 괴롭히는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나더라고 이야기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지만, 사실 나도 요즘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애지중지하는 내 아이를 다른 부모가 막 대해서 울린다거나, 다른 아이들이 내 아이를 때려서 울리면 애처롭기 그지없다. 솔직히 내가 대신 맞아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이러다 아이 버릇 나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번 자주 조심하게 되지만, 아이가 없었을 때 자신했던 것만큼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 아니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던 TV 채널에서, 유아 살해 사건이나 고질병에 걸린 영· 유아, 전쟁 중인 나라에서 다치는 아이들 보도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갖게 될 심정적인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조교에 대한 기억

돌이켜 보면 대학 새내기 시절 실험 수업 조교는 유독 무서웠다. 실험에 사용하는 약품이나 시편, 장비들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단지 고가의 장비들을 망가뜨릴까 봐 노심초사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자한 교수님의 이론 수업이 끝나면 실습 조교가 들어와서는 '군기'를 잡곤 했다. 그중 유난히 물리학 수업 조교가 특이했는데, 우리는 그를 '전라도 조교'라고 불렀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그를 '전라도 사이코'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 중에도 실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간혹 길게 했다. 그것은 약간 악순환 같아 보였는데, 특유의 사투리를 쓰면서 고향에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할 때면 학생들이 하나둘씩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점점 더 흥분하여 우리들에게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전라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거란 말을 되뇌곤 했다. 우리는 그나마 부족한 실습 시간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자꾸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그가 이상해 보였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전라도 조교인 그가 많이 이상해 보였다.

 

 

5·18이 뭐길래

지난 5월18일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다. 기념행사에 대통령도 불참했고 끝날 때 방아 타령을 연주한다 하여 논란이 일기도 한 이날은, 벌써 3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젊은 세대 다수가 5·18에 대해 모른다는 기사가 간간이 나올 때면 마음이 답답하다. 다행히 몇 년 전 5·18을 직접 다룬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로 인해 대중들은 좀 더 가까이 5·18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극장을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 정말 저런 일이 있었냐'며 눈시울이 붉어진 학생들이 다소 놀란 듯이 대답하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난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어린 나이에 경상도에 살면서 겪은 80년대는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있다더라, 학생들이 과격한 시위를 한다더라, 전라도 사람들이 유별나다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나쁘다더라, 김대중 씨는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더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남한이 빨갱이 나라가 된다더라 하는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때론, 대부분의 말들이 정부가 유포한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 신문을 대하듯, 사실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는 긍정을 하는 느낌을 자주 받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광주'를 모르고 자랐다.

 

 

5·18, 지옥 같은 기억들

5·18은 알다시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가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개헌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 2개의 대대가 진주했고, 18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시작된 비상계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차 시내 중심가로 퍼졌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으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 공수부대 병사들은 …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 대며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1권' 중,122~123쪽)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오줌 먹이기, …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트기, 손톱 밑에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같은 책, 127~128쪽)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 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 이 학살에 대해 송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 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같은 책, 148쪽)

 

 

역사가 내 삶으로 들어오기까지

내가 처음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새내기 때의 그 '전라도 조교'가 떠올랐다.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피해 의식, 자기와 자신의 부모님들이 경험한 일들을 너희가 겪는다면 알게 될 거라던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글자로 접한 그 사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땠을까. 만일 내 아버지가 내 앞에서 피를 흘리며 구타를 당했다면, 만일 내가 그 지방에 살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조교보다 더 멀쩡한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까. 아내와 나는 지금도 내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지나치게 걱정하고 조바심을 낸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객관적 사건이 아닌 관계적 아픔으로 다가온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렇다면 5·18은 끝난 사건인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뒤에서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는 '저 사람 고향이 전라도래'였다. 전라도가 고향인 지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이 차별받을 것을 걱정하여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서울로 옮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 책을 읽고 약간 흥분하여 서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댓글을 쓴 어떤 이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전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광주를 언급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차별을 받는 것도 연민의 눈으로 대하는 것도 피한 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처럼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우리 역사의 한편이 너무 답답하다.

 

우리는 너무 역사에 둔감하다. 냄비 근성으로 대변되는 초고속 사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를 잊은 채, 혹은 모른 채로 현재를 사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 때때로 역사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한 사건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일그러진 방향들이 지속적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것을 먼저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이웃과 사회를 이해하는 길이며 내 삶으로 들어온 역사를 끌어안는 길이다.

2010/04/12 00:14 2010/04/1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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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대 담론에서 미시적 일상으로

90년대 중반인가, 내적 치유와 상담 사역이 한차례 한국교회를 한 번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영향이 크게 줄진 않은 것 같지만 그때처럼 관심이 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 내적 치유나 상담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한국교회가 그간 조직의 논리에 따라 무조건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요한 나머지 사역자 개개인들의 미시적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하고 내면의 문제를 방치한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무엇보다 조직과 일 중심의 사역에서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정권 교체 이후 민주화 투쟁이 수그러들었고 포스트모던 담론이 대중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개인과 미시적 일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들, 이를 테면 과거 부모로부터 받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과 자신의 기질, 개인 영성의 성장 등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다. 반대급부적으로 생겨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기독 지성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주었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오히려 신앙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기현상마저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미시적 영역의 결핍에서 출발한 내적 치유와 상담, 개인 영성과 일상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교회 내에 끼친 긍정적인 면들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진보적인, 일상의 '귀남이들'

생각해 보면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이들 중에서도 일상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비교적 여러 교회를 전전했던 나는 예배가 끝난 식사 자리에서 여성도들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주변을 정리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목사님들도 보았고(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교계에 좀 더 깊이 발을 들여놓은 후 평소에 글이나 책을 통해 호감을 갖거나 존경했던 분들도 평상시에는 주변에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거나 마초 기질을 보이는 등 기대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 일도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는 평신도가 시중들고 목사나 신학 교수님은 대접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는데 결국 교회가 세상 조직 문화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우리 세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유년기 시절을 돌아보면 명절에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누나를 한 손에 잡은 채, 다른 손에는 보자기 짐을 들었던 반면 아버지는 코트에 손을 넣고 유유히 앞서 가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 나 또한 집에서는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는 '귀남이'로 자랐다. 어머니는 세탁기 하나 없이 손빨래를 하다가 급기야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셨는데, 그제서야 나도 집안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동안 나는 왜 집안일을 안 했을까.' 돌이켜 보면 남자가 집안일을 돕는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주변에는 꽤나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진보성을 드러내는 이들 가운데 여전히 일상적 '귀남이'들이 많다. 이는 가부장적인 정서로 똘똘 뭉쳐진 우리 세대가, 진보적인 거대 담론의 습득과는 별개로 일상은 제자리 걸음인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기독교 관조주의의 언행 불일치

한때 교회에서 유행했던 용어 중에 '기독교 관조주의'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던 보수적인 신앙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용어로, '하나님나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이상(理想)은 세상에서의 어떤 구체적 행동 너머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살면서 관조적인 자세로 한 걸음 물러서서 현상이나 상황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조적 자세가 일상적으로 겪는 많은 일들을 방관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당시에 청년들의 입에서조차 이러한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대다수의 교인들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득도한 사람처럼 매사에 수수방관하는 경우가 과하게 잦다. 마치 너무 천국의 삶을 동경한 나머지 현세의 희로애락을 무의미하게 느끼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런 부류일수록 일상 영역에서 기성세대의 보수성이나 가부장적 정서와 같은 인습에 얽매인 현실을 부지불식간에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젖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입에서 내뱉는 말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는데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면 저질인 언행 사이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언행 불일치는 세속주의적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이원론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4. 거시 영역과 일상 영역의 통합을 위한 글쓰기

어릴 때부터 매사에 약간은 방관적인 기질을 가진 나는 회심을 경험한 이후로 '거시적 영역'에서의 정치와 사회 참여,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일상 영역'에서 익숙하게 여겼던 내 안의 차별 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정서, 말만 앞세우고 실천을 게을리하는 등의 잘못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내 오랜 경험상 이 두 영역이 따로 놀아도 큰 고민이나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이유에서다. 특히 일상 영역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공인의 위치에서는 좀처럼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수준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거나 때론 치밀하게 숨기거나 속이면서 살아갈 확률이 높다. 나 또한 살면서 자주 그래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정치, 사회 문제에 무심해지고 일상에 파묻힌 채 삶의 큰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렇다. 이러한 통합 혹은 균형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영역의 통합은 나의 지속적인 고민거리이자 관심거리며 지금은 우리 기독인들이 이 두 영역의 통합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또한 이는 앞으로도 내 글쓰기의 주된 화두가 될 것이다. (계속)

2010/04/12 00:13 2010/04/1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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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 참여의 역사
기독교 내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개 복음주의권에서 통용되는 이 단어는 항상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두 개의 축 혹은 새의 양쪽 날개 중 하나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는 역사적 흐름이 있다. 종교 개혁 시기부터 사회 참여, 세상의 변혁과 같은 문제가 신학적으로 잘 정립이 되어 왔고,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을 통해서도 그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에 이르러 기독교는 감정과 체험에 치중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보다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한 경건주의적 신앙의 형태로 변모해 갔고, 이로 인해 복음주의 역사 속에서 빈번히 복음과 사회의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거나 단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사회나 정치, 학문에 대한 관심이 배제된 이런 부정적 영향이 개신교 전통 속에서 지속되어 오다가, 20세기 중반 <Christianity Today>의 편집장이자 풀러신학교의 초대 교수인 칼 헨리가 자신의 저서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에서 당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사회 참여를 선언함으로써 개인 복음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복음주의' 태동의 시발점이 된다.

칼 헨리와 신복음주의의 태동은 기독교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에 크게 기여했고,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선언'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대회는 10일간 지속되었고 150개 국가에서 2700여 명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 선언은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전도와 사회, 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했다. 또 로잔 언약은, 사랑에서 나온 예수님의 전도(word)와 봉사(deed)를 이분화하거나 고립시킬 수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대회에 참여했던 조종남 박사도 "원색적 복음주의가 귀한 유산으로 간직해 오던 사회적 책임을 로잔 언약에 이르러 되찾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위대한 공헌'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로잔 선언에서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에 있어 소위 '복음 전도의 우위성, 우선성'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는 사살상 사회적 책임보다 한 영혼 구원이 더 중요하며 순서상 우선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후 복음주의권의 지도자인 존 스토트가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에서 어떤 우위성도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 이 두 주제는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수정된 견해를 '마닐라 선언'에서 재차 강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이후 새가 양쪽 날개를 모두 사용하여 난다는 의미에서 '양 날개 이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결국 복음주의 내부에서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복음 전도의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신학적으로 정립된 셈이다.


기독교 사회 참여, 문제점들
이렇듯 역사적인 신학적 입장 정리를 살펴보았으나 실재로 기독교는 얼마나 사회 참여에 운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실천적 열매를 맺고 있는가. 존 스토트가 자신의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밝혔듯이, 정직하게 우리를 돌아볼 때 여전히 그 운동성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역사 속에 그 흐름이 지속되어 온 기독교 사회 참여가 아직도 소원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1. 사례의 부족
단적으로 말해서 사례들이 희박하다. 외국의 경우(물론 대부분이 북미에 한정되어 있다) 1차 대각성 운동 시기에 부흥이 일어난 지역에 술집이 문들 닫았다는 류의 이야기나,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 정도만을 아직까지도 언급하는 일이 다반사이며, 우리나라도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주의 신학이 정착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실상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국내에서 가장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로 평가하는 사례는 1990년대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낙천낙선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치인의 면밀한 조사와 함께 각각의 의원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이 일반 시민 단체와 협조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 추진력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당시 협력 관계에 있었던 진보적인 시민 단체들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이슈들이 약해진 가운데 기윤실이 문화 영역에서 영화 <거짓말> 상영 금지 요청, 가수 박지윤의 <성인식> 뮤직비디오 방영 금지 운동을 전개하자 성적 보수성을 비판하며 돌아서게 되었고,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회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함에 따라 기윤실로부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독립하는 등, 90년대 후반부터 그 운동성과 영향력이 상당 부분에서 수그러들게 된다.



2. 신학적 입장과 실천의 장 사이의 괴리감
또한 기독교가 사회 참여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하더라도 신학적 입장과 그 실천 사이의 괴리감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의 신사 참배 문제, 군사 정권 아래에서의 조찬 기도회 참여, 한기총의 극우 편향성과 권력 친화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 있으므로 굳이 이 글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사례들에 덧붙여, 개신교 신앙의 선배이자 종교 개혁의 두 주역인 루터와 칼뱅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만을 첨언하고 싶다. 최근에 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담은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루터도 칼뱅도 종교 개혁 과정에서 철저하게 세속 권력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왕국은 구별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정치권력의 그늘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세속 권력인 독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뮌처의 반란이 시작되자 루터는 완전히 군주들 편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처형을 묵인했고, 심지어 반란자들을 죽이고 쳐부수고 목 조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영혼이 사탄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에 고무된 자들의 손에 7만 5,000여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장악하여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칼뱅도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그노 전쟁을 통해 조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획득하려 했고, 신학적인 반대파를 화형으로 제압했습니다. 정치권력과 손잡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칼뱅이었지만, 정치적 기반 없이 투쟁에 나선 농민 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현실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그 실천적, 입지적인 한계나 편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 실천을 주저하는 개신교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서 미국이 리비아에 있는 민간인에게도 폭격을 가했을 때 있었던 토론을 자세히 소개한다. 토 론에 참석한 한 학생이 하우어와스에게 그 의견을 묻자 그는 기독교의 응답은 바로 내일 아침에 리비아로 미국 교회가 1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얘길 들은 학생이 미국 정부가 위험 지역인 리비아에 비자를 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하우어와스는 정작 비자가 안 나와서 못 가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담대한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는 교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한동안 충격에 사로잡혔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중에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기독교인들이 '인간 방패'라는 이름으로 반전 평화 팀으로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모교회인 복음주의권 어느 곳도 파송해 주지 않아 전전했던 그들을,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의 하나) 교회가 아무런 단서나 조건 없이 끌어안았던 일이 있었던 터라 더 충격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상황을 <뉴스앤조이> 주재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은하 씨는 편지 한 장만 들고 알지도 못했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라크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여기 아니면 아무도 나를 이라크로 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없나요.' (...) 이재영 간사는 아나뱁티스트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화 운동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 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명하다. 우리가 파송하지 않아도 그는 이라크에 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파송하자'고 회신을 보냈다. 캐나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들도 유은하 씨를 위해 기도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유은하 씨는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 이라크로 향했다. (.. ) 전쟁이 끝나 생사의 문제가 부담이 안 되는 지금에야 비로소 다들 유은하 씨와의 관계를 들춰내고 있다. 유은하 씨는 분명 몸은 '복음주의 진영'에 있었지만 파송은 평화주의 교회로부터 받았다." (주재일, <뉴스앤조이> '유은하가 전쟁터로 떠난 이유는?')

당시 나는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사회 참여를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친정과도 같은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내쳐진 반전 평화 팀을,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흔쾌히 받아 주고 그들을 파송하고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몸소 실천한 재침례파 교회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파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친 후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묻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글을 마치며
기독교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과거 신앙 선배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회 문제에 무심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신학적으로 그 입장이 정립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다행히 이제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두 영역에서 사회 참여를 배제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한쪽으로 처박아 두지는 않겠지만 과거 개신교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도 빈번히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오히려 세상의 논리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 당시 반전 평화 팀 사례와 같이 정작 나서야 할 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용기 있는 행동의 장애 혹은 방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글을 접으면서 나는 최우선적으로 한국교회가 더욱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표준 선(善)보다 더 부정부패가 많고 암암리에 세상과 결탁하고 세상의 부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한국 교회는 사회 참여 자체가 오히려 기독교 세속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한국교회가 주도권을 가진 중심 세력으로서의 사회 참여, 세상 변혁을 이끌기보다는 세속화한 세상을 견제, 비판하고 세상이 때때로 불의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바른 방향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압력 단체로서의 '참여'를 권하고 싶다.

세상 속에서 변혁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 고백과는 별개로 실천의 장으로서의 세상 속에서 한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압력 단체로서의 실천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더 복잡해지고 섹트화한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하며 대안들을 고민함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실천들을 실행해 보는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원론적으로 옮은 말들을 세련되게 되뇌이지만 정작 실천의 장에서는 방관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멈추고, 겸손하게 우리의 할 바를 작은 실천 영역에서부터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 사회 참여의 모습이다

2010/04/12 00:11 2010/04/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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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에 아내가 준비한 각종 선물들.
진정 서프라이즈의 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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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기념으로 데코와 함께 가족사진 한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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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IXUS i)

2010/04/06 23:51 2010/04/0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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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트위터, 페이스북, 링크드인, 미투데이 등 여러 가지 사이트가 있지만
주로 이용하는 것은 트위터이다.
트위터는 140자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대화 내용을 타임라인에 뿌려줄 수 있다.
또한 단순하면서도 임베디드 가능한 플랫폼 때문에 사진을 올릴 수도 있고
모꼬지라는 그룹핑을 이용하여 취미나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오프모임도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나는 이 공간에서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140자를 이용하는 트윗 공간에서 주로 정치나 사회 문제등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거나 아이폰이나 IT쪽의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이들은 140자 밖에 되지 않는 트윗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굳이 정치적인 쟁점을 놓고 서로를 비방하며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나는 트위터라는 플랫폼이 논쟁의 도구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40자로 어떻게 상대방의 비판에 대해 자신의 논지를 일목요연하게 펼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쨌거나.. 나는 개인적으로 트윗 공간에서 거대 담론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되도록이면 논하고 싶지는 않았고 직장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공간이므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 흔히들 말하는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트윗에서 나는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언니'로 불리는 일이 잦았다.^^

솔직히 그간 나는 좀 무거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항상 교회를 이야기할 때 그랬고 글을 쓸 때에도 그런 이미지를 많이 심어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귀여운 막내였고 지금도 아내에게 농담을 자주 던지고 때로는
알랑방귀를 끼는 웃기는 남편이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어머니도 대학 시절 진지하게 나에게 물어봤고
아내도 최근에 진지하게 물어보았는데 그건 다름아닌 내가 '게이'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지금도 가끔 아내는 나에게 '계집애' 같다고 한다.

트윗에서도 그렇고 삶에서도 그렇고 나는 나이가 들면서 나의 자연스러움을 찾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되고 싶던 멋진 모습을 그려놓고 그것에 나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미지 관리 같은 것 말이다.
나이가 서른을 훌쩍 넘기면서 나는 어깨에 들어간 힘이 조금씩 빠지고 있음을 느낀다.
세상을 향한 긴장, 초조함 같은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은 느슨한 태도로
나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서른 다섯, 생일을 지내면서 이제 나는 나의 여성성, 나의 가벼움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2010/04/06 01:24 2010/04/06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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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되새기는 복음주의자의 현실 참여 선언문

칼 헨리의 본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은 개신교의 고전적인 저서에 속한다. 이 책의 원제는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로 여기서 복음주의자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근본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에 와서 종교적 근본주의는 지양해야하는 극단적인 그 무엇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근본주의의 기본 개념은 그 종교의 원칙을 고수하려는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근본 원리들을 지켜나가겠다는 의미이며 그 자체로는 크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칼 헨리가 지적하는 개신교 근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천국(오실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면서 개인의 영혼 구원과 도덕적인 삶으로 복음을 제한한 나머지 사회 정의와 구제, 개혁에 무관심한 점이었다. 인종 차별, 냉전 구도 속에서 정당한 전쟁이라는 문제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정책 등 북미의 개신교 부흥에서 사회 문제는 제외되고 있었다.

우리는 1943년에 출판된 작은 책자를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 선언문]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칼 헨리의 이 저서를 계기로 개신교는 근본주의자들에게서 구별된 신복음주의의 탄생을 촉발 시킨 계기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동일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개신교 후손인 우리의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원제와는 다르게 근본주의자=복음주의자로 등치시켜 놓아도 별반 이 책의 독해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70년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근본주의자의 한계에 여전히 놓여 있음을 반성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재출간은 한국 교회에도 의미가 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나를 포함한 복음주의 진영의 한국 교회는 칼 헨리가 행한 근본주의자를 향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겸손히 다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2010/04/01 21:00 2010/04/0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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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먼로 컬버그는 우리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버드 대학교에서 베리타스 포럼을 통해 기독 지성운동을 시작하고 미국 전역으로 확장시킨 장본인이다. 이 책은 이런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켈리 먼로 컬버그는 이미 1998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선정한 미국을 이끌어 갈 유망한 기독교 지도자로 손꼽히기도 했고 그가 이끌었던 베리타스 포럼에는 복음주의권의 주요 학자들인 톰 라이트, 오스 기니스, 알빈 플란팅가와 같은 학문적 대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지성적인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사랑과 배려가 충만한 여성이라는 사실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지성적인 포럼'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분명 불꽃튀는 토론과 한쪽이 굴복하게 되는 쾌감.. 그러한 논쟁에 참여했던 전설적인 지식인 논객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끈 베리타스 포럼은 지성적인 면에서도 귀감이 되겠지만  켈리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진 대상이 '학문'이라기보다는 동시대의 회의주의에 빠진 캠퍼스의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크고 작은 실천적 행동들에 개인적으로는 더 큰 감동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창조주는 내게 필요한 것이 추상적 진리가 아닌, 나와 더불어 내 안에 사는 인간적 진리임을 아셨다." (205쪽)

"복음의 진리가 본질적으로 자기희생임을 숙고하라... 베리타스는 사랑 안에서 진리와 은혜가 한데 어우러진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닮아 자란다는 것은 은혜 안에서 자란다는 뜻이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귀를 연다는 뜻이다." (263쪽)

한국의 교회를 생각하면 이 두마리의 토끼 모두 놓치는 모습을 본다. 지성적으로도 B급, 아니 그 이하에 속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지도 않은 형국이다. 기독지성의 스캔들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도 분명 예외는 아닐 것이다. 교회를 탓하기에 앞서 그러한 교회의 일원으로 나의 모습도 성찰해본다. 정작 나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존재인가. 지식이 충만함과 동시에 가슴이 뜨거운 사람인가. 무엇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만큼 실천하는 사람인가. 켈리의 베리타스 포럼 이야기는 분명 나와 한국 교회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저, 예수의 정신을 따르자고.(끝)


*베리타스 포럼 사이트: http://www.veritas.org/

2010/03/25 20:58 2010/03/2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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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아내의 권유에 힘입어 이유식 요리에 도전해보다.
이번 주에는 처음 도전해보는 연어 이유식.
14개월이 지나서 대충 어른 먹듯이 먹긴 하는데 간을 하지 않는 편이고
재료도 시기별로 먹는 것과 조절해야 하는 것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나름 편해졌다.^^ 서론은 이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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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200~220g 정도를 한끼에 먹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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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그릇이 나왔네요.^^ 치즈처럼 보이는 게 연어임. (부모는 맛도 못 본 연어..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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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식을 시켜보니 성하가 잘 먹더군요. 뭔들...^^
그럼 재료가 얼마나 들어간 건데. 오늘 이유식 자랑질은 이제 그만.


(사진: IXUS i)

2010/03/21 23:49 2010/03/2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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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 포럼 추천도서


기독교 지성은 항상 형성되어 있으며 또한 재형성되고 있다. 기독교 지성이 형성될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작동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그 외에도, 기독교적 지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쓴 책들을 지속적으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길을 걸어갔다. 그들의 발자취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은 더 쉬워 질 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 『지성의 제자도』중에서


1. 아볼로 포럼 서평공모전 대상 도서

제3회 아볼로 포럼에서는 포럼에 앞서 서평공모전을 진행하였습니다. 미리 읽고 강연을 들으면 도움이 될 만한 여섯 권의 추천 도서들을 선정하였습니다.


경향신문특별취재팀, 『민주화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있나』, 후마니타스, 2008.

우리 언론 사상 최초로 시도한 지식인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이자 변론문. 민주화 이후 크게 변한 지식인 사회에 대해 현장의 기자들이 탐구하여 「경향신문」에 기획으로 연재한 기사들을 모아 한 권으로 엮었다. 현장의 기자들이 악전고투 끝에 만든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이자 변론문으로, 2007년 4월부터 9월까지 4개월이 넘는 연재 기간 동안 지식사회를 긴장시킨 지식인 건강진단서라 평가받은 작품이다.

책의 서문에서 한국의 지식인은 '특별한 계급'이라 명한다. 학벌 체계의 수혜자로서 다른 부분의 엘리트들과 쉽게 친분을 맺을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시 못 할 연고 자본을 보유한 특권층이자 기득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고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의 문제는 분화와 참여가 아니라 '지식인과 권력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 문제의 핵심은 지식사회가 권력에 의해 식민화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지식이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자처가 되는 현실에 있다는 것이다.

-출처 : 다음책소개



이석우, 『대학의 역사』, 한길사, 1998.

대학의 형성원인은 무엇이고, 중세대학까지 대학환경 의 변화는 어떠했는지를 깊이 있게 고찰한 저서. 대학형성의 조건과 환경, 코뮌과의 대립 속에서 성장 한 볼로냐 대학, 자기 방식을 찾아간 옥스퍼드 대학, 중세이후의 대학과 표류하는 대학문화까지를 정리했다

-출처 : 다음책소개



강영안,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IVP, 2001.

근대 철학자들은 어떤 문제로 씨름했고 왜 그런 문제를 붙잡고 씨름했는가? 그 씨름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 데카르트와 칸트, 홈과 홉스, 파스칼과 스피노자 등 서양 근대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담았다.

-출처 : 다음책소개



우종학, 『무신론기자, 크리스천과학자에게 따지다』, IVP, 2009.

NASA가 인정한 과학자 우종학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신앙과 과학의 가상 대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신앙과 과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걷어낸다. 신실한 신앙인일 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가 저술한 이 책은, 무신론자 박 기자와 크리스천 과학자 한 교수의 신선하고 흥미로운 가상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앙과 과학은 서로 충돌하는 적대자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동반자 관계임을 일깨워준다. 아울러 과학을 하나님의 창조가 진실임을 밝혀내는 데 유용함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속에 진화가 숨겨져 있음도 증명해낸다.

-출처 : 다음책소개



도널드데이튼, 『다시보는 복음주의 유산』, 요단출판사, 2003.

1975년 5월부터 7월까지 <포스트 아메리칸(현재 '소저너즈'로 개명)>에 '유산의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연재됐던 글을 묶은 책. 미국 초기 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교회에게 실제적인 신학과 실천적인 신앙의 원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 기독교 역사에서 극히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이를 통해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복음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 그 전거를 되새기고 있다.

-출처 : 다음책소개



류대영,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2009.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조명한 역사서『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한동대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 류대영은 종교의 진면목은 종교적 차원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관찰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개신교가 전통사회, 사회주의, 군사독재, 친미반공 이데올로기 등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는 “종교의 진면목은 신화나 의례, 혹은 상징을 분석하기보다는 정치-경제-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관찰하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개항와 문명개화의 문제, 김일성과 기독교의 관계,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 뉴라이트의 이념과 세계관 등 흥미로운 주제들을 흥미롭게 다루는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시도한다.

-출처 : 다음책소개




2. 아볼로포럼의 추천 도서

서평공모전 대상 도서 외에 복음주의 운동과 학문과 신앙의 조화를 고민하는 분들을 위한 책들을 추천합니다.



켈리 먼로 컬버그, 『베리타스포럼이야기 -하버드를 넘어 미국 사회를 뒤흔든 기독 지성 운동』, 강봉재 옮김, IVP, 2009.

춤추고 놀면서 하는 신나는 지성 운동이 가능할까? 모든 이들의 질문에 담긴 분노와 슬픔에 공감하며 답하는 인격적 지성 운동이 가능할까? 유명 교수가 아닌, 이름 없는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어설픈 지성 운동이 가능할까? 회의와 침체에 빠진 연약한 여성의 지성 운동이 정말 가능할까? 베리타스 포럼의 리더, 켈리의 이야기에 그 답이 있다.

- 출처 : 이강일 목사의 추천사



낸시 피어시, 『완전한진리』, 복있는 사람, 2006.

기독교적 관점에서 현대 문화를 분석한 책. 성경의 진리는 종교의 영역뿐 아니라 삶과 우주 등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답하고 설명해 주는 가장 절실하고 유일한 진리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 바탕 위에서 현대문화 등의 가치 가운데 견고하게 자리한 진리의 분열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 과정을 낱낱이 살핀다.

또한 복음주의가 이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여 지성을 포기하고 가슴의 종교로 전락하게 된 경위를 정치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믿음과 삶의 분열을 낳는 진리관을 통합하고 온전한 관점을 회복할 때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미궁에서 벗어날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성경에 제시하는 완전한 진리를 수용하고, 그곳에 삶을 던져 살아갈 때에야 복음이 현대 문화 전체를 변화하고 타락한 세상을 다시 구속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 : 다음책소개



제임스 사이어, 『지성의 제자도』, IVP, 1994.

우리의 지성이 바로 잡힐 수 있다면 그것은 경건 훈련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더할 바 없이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아무쪼록 많은 학생들과 젊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삶의 각 분야에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자극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출처 : 강연안 교수의 추천사



강영안, 『강영안교수의 십계명강의 -십계명이 열어 보인 삶의 길, 자유의 길』, IVP, 2009.

『십계명 강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실제적 무신론, 종교적 배타주의, 물질적 성공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자의 눈으로 계명 중의 계명 ‘십계명’에 담긴 가치와 사상을 다시 성찰하여 풀어줌으로써,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변화된 존재의 삶, 자유의 길로 나서기를 깊은 울림을 담아 촉구한다.

십계명에 대한 저자의 빼어난 논의를 통해, 독자들은 십계명에 씨앗처럼 담겨 있으며 성경 전체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한 깊고 넓은 깨달음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다음책소개



도널드 오피스,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이지혜 옮김, IVP, 2010. (원제  : The Outrageous Idea of Academic Faithfulness)



학문적 신실함은 무모한 생각일 수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그렇다. 스펙을 쌓는 자들에게, 그리고 스펙을 포기한 자들에게 학문적 신실함은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소리같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심시오 (로마서 12장 2절)'라는 말씀은 대세를 거스르고 무모함을 추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가? 무모한 일이 가능하려면 무모할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분명, 희생이 따른다. 학문에도 충실하고 기독교 세계관도 훈련하며,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이루어 내려는 뼈를 깎는 노력, 쉽진 않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고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우종학 교수 추천사



프랜시스 S. 콜린스, 『신의 언어 (유전자 지도에서 발견한 신의 존재)』,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09. (원제 : The Language of God)


과학과 신앙에 관해, 그리고 창조-진화 논쟁 때문에 고민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과학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유전학 분야의 최첨단에 서는 세계적인 과학자,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주로 고백하는 콜린스 박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현대 생물학의 지식과 함께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 출처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0년 1월호 이 책을 말하다 , 우종학 교수 추천글



3. 포럼 참가자들의 추천도서

이번 포럼 참가자분들이 추천해 주신 도서들의 목록입니다. 책을 읽고 누렸던 감동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현요한, 『성령의 다양한 얼굴』,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8.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상,하』,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김태권, 『십자군이야기 1,2』, 길찾기, 2005.

만화로 구성되어 있어서 더욱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2.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준 책.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후, 2002.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유명한 미국의 진보적 학자. 영화 굿 월 헌팅에도 주인공이 언급한 게 기억나는군요.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자서전적인 책입니다. 미국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양심에 따라 국가라는 폭력에 맞서 싸운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입니다.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1.2』, 한겨레출판사, 2006.

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한겨레출판사, 2009.

박노자는 뭐 설명할 필요가 없을듯 하네요. 군대에 있을 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2>를 읽으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의 다작의 속도는 더딘 독서 속도를 가진-빠르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저에게는 조금 부담감을 주기도 하네요.

앤드류 웹스터, 『과학기술과 사회』, 한울아카데미, 2009.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 및 정책적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1980년대에 출판되었음에도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별로 인식되지 않은 것 같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현실문화연구, 2006.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주는 기본서.

르네 마그리트 화집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추상적이고 모호한 공공성이란 개념을, 스스로 그리고 함께, 사유하면서 자신이 몸담은 영역에서 장차 구체적으로 구현될 '공공성'에 대해 탐색하고 구성해보는데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박동천,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모티브북, 2010.

저자는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거짓된 프레임들을 고발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진보세력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개개인 자신의 편협했던 사고의 틀에 대한 돌아봄, 그리고 좀 더 폭넓은 정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홍구, 『대한민국史 1-4』, 한겨레신문사, 2003.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쉽게 설명한 것 같습니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을유문화사, 2006.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사회』, 문학동네, 2007.

게오르그 짐멜,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존 스토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 IVP, 2002.

짐 윌리스, 『회심』, IVP, 2008.

김대호, 『노무현 이후, 새 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 한걸음더, 2009.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살림, 2008.

진보하는 사회 속에 발생하는 빈곤의 원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지프 E. 스티글리츠,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21세기북스, 2008.

경제적 이슈에 있어 좌파와 우파의 관점을 넘어 보다 현실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4』, 창작과 비평사, 1999.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현대경제연구원, 2008.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가난한 휴머니즘』, 이후, 2007.

김동춘, 『미국의 엔진-전쟁과시장』, 창비, 2004.

니콜라스 윌터스토프,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 IVP, 2007.

한스 피터 마르틴,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2003.

마이클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

하워드스나이더, 비브그릭의 7~80년대 고민이 왜 아직도 유효하고, 필요한지 보여주는 책. 슬럼이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네요.

김윤상, 『지공주의-새로운 토지 패러다임』, 경북대학교출판부, 2009.

누군가 소설보다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윤영, 『내 집 마련의 여왕』, 자음과 모음, 2009

소설인데, 재미있어서요. 이런 상상력과 이런 발랄함으로, 이런 인간에 대한 관찰과 따뜻한 시선으로 현실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요. 읽고 든 바람.



4. 책읽기를 위한 인터넷 사이트

- IVP 출판사 <www.ivp.co.kr> : 신간, 베스트, 스테디 도서 안내와 북마스터추천도서, 주요저자도서에 대한 소개를 볼 수 있습니다.

-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www.readread.or.kr> :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책들을 많이 추천해 놓았습니다. 선생님들께서 현장에서 독서교육을 경험하시며 반응이 좋았던 책들이 담겨져 있는 실제 도서목록들도 많이 올려져 있습니다.

 - 별아저씨의 집(우종학 교수 블로그) <solarcosmos.tistory.com> : 대중과학서, 기독교서적들에 대한 소개 글과 책과 글에 대한 좋은 글들이 많은 블로그입니다.

2010/03/15 20:57 2010/03/15 2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