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나에게도 '절대악'이라 생각되는 존재가 있다. 전두환, 정형근.. 뭐 이런 분덜도 그렇고 살면서 나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를 한 이들. '20세기 기사단' 내지는 '요술공주 쉐리'들이라 부를 법한 '또라이'들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을 퍼부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성경에 삭개오라는 자가 나온다. 민족의 배신자이자 왕따, 또라이 쉐리 삭개오를 예수는 주목하고 있다가 그의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한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던 삭개오. 예수의 방문에 알랑방귀를 끼며 회개까지하고 착하게 산댄다.
걔보다 내가 백만배는 더 착하고 의로운데, 예수와 식사를 한다면 딴놈들은 아니더라도 삭개오가 아니고 내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예수에 대한 의로운 분노마저 든다. 그래 공의는 개뿔, 정말 억울하고 불합리하다.
난 어떤 인간에 대해 절대악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자주 삭개오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내 본성을 거스르고 힘들게 힘들게 그들을 인격체로 대하려는 내 심리 때문에... 나는 진보진영에서 과격하게 극우파나 혹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집단을 아주 쉽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꼴통취급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론 공감도 되면서도 한편으론 참 싫다.
그들도 언제든지 예수가 찾아갈 수 있는 잠재적 삭개오란 인식이 없어 보여 그렇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 사랑어린 권면이 필요하다.
((딴소리))
1. 난 '분노'를 반대하지 않는다. 특히 인권을 위협받는 여성문제,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투쟁에 참여하는 경우, 이들의 바판을 용인, 혹은 적극 동참해야 하고 그에 더하여 그 욕섞인 메시지를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건 기독교 맨탈리티를 가진 이들 가운데 극단적 표현과 비판을 일삼는 부류다. 또한 그 비판은 최소한 '인간'보다는 행동, 논지, 입장에 한정하며 인신공격성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3. 보수적 신학관을 가진 몇몇은 삭개오는 회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 않냐, 예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얐냐, 전두환, 정형근과는 다르다 라고 말할 지 모르겠다. 내 내면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안에 바리새인의 피가 흐르지는 않나 돌아볼 필요도 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다는 게 그렇게 싫었다. 때론 친구들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 중학교 때 어떤 친구는 '서울대에서 만나자'라고 인사했었다. 그리고 대입을 치르고 내게 전화했다. '너도 붙었냐고' -키우던 강아지를 다른 집에 보내기도 했다.
그 순간순간마다 매번 나는 가슴이 철렁했고 슬픔에 울컥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난 내색을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헤어지기 아쉽다고 오버하는 친구들 중엔 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서운해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유년기 시절, 이별의 기억들은 나의 복잡한 심정과 어설픈 행동들을 고착화시켰고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그러나 다소 막연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고독, 외로움, 거절감, 영원히 볼 수 없음에 대한 아련함..
성인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는 이별을 경험할 때마다 그런 정서가 지나치게 반복되어 점점 그 정서를 '인지'는 하되 체감하지는 못하는 시기가 왔다. 정말 나는 이제 '그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서 해댄 거의 광기어린 연락과 집착, 혹은 무정하게 이별을 고하고는 돌아서던 길. 터벅터벅 의미없고 괴롭기만한 인생을 곱씹으며 어디론가 낯선 공간으로 숨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가슴앓이.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일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찾아보니 어디에 뒀는지 모르게 잃어버린 여권지갑처럼. 내 안의 나름 심각했던 이별의 트라우마들을 잃어버렸다. 그저 윤리적 행동양식의 흔적만 남은 채로. '그래, 그 사람 떠나는데 밥 한번은 먹어야지.'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지나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 뭔가 심오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렇게 난 식어버렸다.
*facebook 노트: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오후 2:20 작성
내 성격은 약간 이중적이다. 내가 주도해서 이끌어야 할 상황이 아니면 다분히 내성적이고 수동적이다. 허나 내가 책임을 지거나 나서야 하는 판단이 서면 다소 적극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또한 나는 숫기가 없다. 어린시절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누나가 없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대신 나가서 그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고 불편했다.
대학원에서는 교수님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도록 시킬 때 그게 그렇게 싫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올 것이고 나는 주체가 아닌 입장에서 잘 대답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렇다고 교수님에게 이것저것 예상되는 문제들을 꼼꼼이 물어볼만큼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조금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나는 모세가 주저했을 그 자리에 내가 섰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노예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집트를 떠나자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사실 만만찮다. 그리고 왜 내가 의분을 일으켰던 그 옛날 나의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이 아니고 이제는 모든 기력과 의지도 별로 없는 노년에!
정말 싫다... 하나님의 메신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나올법한 모든 질문들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불가능해보이는 과정들.. 게다가 나는 살인을 한 도망자가 아니던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동족에게 채찍질한 이집트인을 죽인 나를 살인범으로 몰지 않았던가. 아.. 정말 나서고 싶지 않다.
내가 모세였다면.
흔히 역사 속 이스라엘 민족이나 모세 등등 많은 이들을 다룰 때 불순종의 대상 혹은 실수에 대해 가볍게 비난하는 - 그건 모세의 어리석음이지,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 - 판단들이 얼마나 더 어리석은지 깊이 돌아본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생활이 수십년간 이어지고 아이는 굶주리고 돌림병이 돌고 약속은 이뤄지지 않을 때 그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채, 책상 사무실에 앉아서 개고생하던 한 인간, 한 집단을 깊이 묵상치 않고 해대는 비난들은, 사실 그 비난의 잣대를 검증해보지 않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긴장되는 상황을 글자로만 인식하는 나또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모세의 머뭇거림을 십분 공감한다.If I were Moses
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음악 영화의 최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다. <아마데우스>나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마틴 스코세지의 <더 블루스> 등등을 떠올렸다면 이 영화는 기대 이하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더 콘서트> 다분히 상업적인 영화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키웠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잘 짜여진 느낌이라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올리 협주곡 전곡을 13분에 압축하여 펼치는 편집도 나름 괜찮았다. (물론, 30년 동안 한번도 맞춰보지 않은 곡을 솔리스트의 '비상'에 힘입어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심한 과장이다.)
소련 시절 자신이 세운 솔리스트가 감옥에서 죽게 되고, 단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자신은 볼쇼이 극장의 청소부로 전락하게 된 주인공 안드레이. 그 오랜 후회와 고통 그리고 답답했던 시간을 일소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그 무모한 작업에 뛰어든다. 30년간 연주조차 하지 못했던 단원들을 모아서 감옥에서 죽어간 솔리스트의 딸과 바로 '그 곡'을 지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협연을 하려는 안느-마리 자케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협연에 참여하게 되고 여러차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려 마음 먹지만 자신의 부모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최종 결정을 번복하고 바이올린 협연에 나선다.
30년전 부러뜨린 지휘봉을 테입으로 감고 나오는 부분이나 지휘봉을 부러뜨린 바로 그 소련 간부의 도움으로 다시 공연장에 서게 되는 설정, 가망이 없어보이는 일을 꾸미는데도 자신의 일을 뒤로 한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안드레이의 아내, 매 순간 그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오랜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참 훈훈했다.
인간은 참 흥미로운 존재다. 얼짱 몸짱의 솔리스트(멜라니 로랑은 정말 바이올린 솔리스트라고 보기엔 너무나 완벽한 미모를 자랑한다)에, 디즈니랜드에서나 가능할 법한 해피엔딩 등등 여러모로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영화의 중간중간 나는 유쾌했고 때때로 감동했다. 내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7점도 주기 어려운 이 영화를 나는 참 재미있게 보았다. 그래서 유럽 및 미국개봉에서도 평단 및 관객들의 환호를 얻어낸 게 아니겠나. 냉전시대의 비극을 시종일관 위트있게 풀어낸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