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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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 생각한 걸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상대적 박탈감이 큰 편인데 기독인들 사이에서는 잘 드러나질 않는다. 가끔 나는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에 명품 옷을 입은 사람과 9900원짜리 티셔츠 입은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었다. 혹은 물욕이 많은 이들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교인들도 종종 봤다.

더 큰 문제의식은 교회를 가보면 실제로 중산층 이상이 다수고 극빈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사실 은근히 돈없는 사람들이 위화감 때문에 교회 오는 게 꺼려지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따라서 내 생각은 자연히 그럼 소유, 소비 자체를 적절하게 절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게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심사는 그렇다면 맘몬(물질의 우상화)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적정한 소유는 과연 어느정도일까 하는 문제였다. 이건 절대 수치인가 아니면 연봉에 기인하는 건가, 혹은 공동체의 수입 평균에 맞춰야 하는 건가. 넌 교인인데 너무 물질적이야 라고 말할 때의 그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사실 이러한 소유의 문제는 이미 청부론, 청빈론이라는 주제로 교계에서도 한참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해답이라고 부를 만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정답, 즉 청빈론이 옳다한들 교회가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데, 실제로 주일마다 만나는 이들의 개인 소비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도 청빈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나는 남 비판하기 전에 내 소유부터 따져보기 시작했다. 내 소비성향과 소유성향을 따져보고 나는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그 물건 금액의 상한치를 정했다. 이를 테면 냉장고를 살 때 내가 생각하는 상한 금액은 얼마이고 그 이상은 과하다는 식으로. 혈액형이 A형이자 다분히 계획적인 내 성격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이 프로젝트는 척척 진행됐다. 바지는 3만원 전후, 신발은 5만원 전후, 코트와 구두는 15만원 이하, 노트북은 100만원이하, 책은 부부가 합쳐서 매달 10만원, 외식비는 한번에 5만원이하, 매달 20만원 이하...

이런 걸 계산하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에 대한 물가 차이도 생기고 모든 물건을 다 이렇게 정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여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포기했지만.. 사실 지금도 내 심중에는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대한 상한치의 금액을 정한다. 물론 그 룰에 맞게 매번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물건 자체가 필수품이냐 사치품이냐도 중요하니 사치품에 상한선을 정해서 많이 사재낀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이런 고민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물건을 사는 금액보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의 문제가 점점 부각되고 그 여유는 결국 근본적인 연봉, 수입, 소유의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교인들의 경제문제인 셈이다. 나는 소그룹 나눔에서 입고 오는 옷이나 주말에 식당에서 먹은 음식, 아이들에게 사준 고가의 장난감, 그 아이들이 입은 옷, 이런 작은 부분에서 교인들이 상당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 교인들의 다수는 듣기만 할 뿐 그다지 공동체로서 도와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더욱이 그 도움이라는 게 치명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 생활 자체가 안될 정도는 아니지만 매번 소비에 심적 부담을 느낄 정도, 혹은 중산층이 다수인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초라함을 느낄 정도인 경우에 말이다.

난 버젓하게 직장이 있지만 전세 이사를 네번했다. 이제는 미친듯이 오른 전세값으로 아예 전세를 빼고 사택으로 이사했다. 교회를 가면 우리 아이보다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그 장난감에 눈독을 들이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조금 심난하다. 내 동기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부모가 사준 아파트가 있어 같이 시작한 직장 생활에 벌써 모은 돈만 몇억이랜다.

사실 교인 중 누군가는 내가 내 동기를 부러워하듯 내 아이가 입은 옷이나 내 직장, 사택을 갈수 있는 내 형편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예배를 드리나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한다. 난 교계에 쏟아지는 담론들 중 이런 얘기를 콕 찍어서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역사니 내러티브니 하는 신학 논쟁이나 정치이야기들, 물론 중요한 담론이지만 나는 매주 나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 건 것보다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게되는 나눔과 사건들이 더 잦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모두가 '아멘'이고 '샬롬'이다. 집에가서 어떤 가정은 호텔 뷔페를 먹지만 누군가의 아내는 울고 누군가의 아빠는 한숨쉰다.
2011/09/25 21:24 2011/09/2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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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절대악'이라 생각되는 존재가 있다. 전두환, 정형근.. 뭐 이런 분덜도 그렇고 살면서 나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를 한 이들. '20세기 기사단' 내지는 '요술공주 쉐리'들이라 부를 법한 '또라이'들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을 퍼부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성경에 삭개오라는 자가 나온다. 민족의 배신자이자 왕따, 또라이 쉐리 삭개오를 예수는 주목하고 있다가 그의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한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던 삭개오. 예수의 방문에 알랑방귀를 끼며 회개까지하고 착하게 산댄다.

걔보다 내가 백만배는 더 착하고 의로운데, 예수와 식사를 한다면 딴놈들은 아니더라도 삭개오가 아니고 내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예수에 대한 의로운 분노마저 든다. 그래 공의는 개뿔, 정말 억울하고 불합리하다.

난 어떤 인간에 대해 절대악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자주 삭개오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내 본성을 거스르고 힘들게 힘들게 그들을 인격체로 대하려는 내 심리 때문에... 나는 진보진영에서 과격하게 극우파나 혹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집단을 아주 쉽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꼴통취급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론 공감도 되면서도 한편으론 참 싫다.

그들도 언제든지 예수가 찾아갈 수 있는 잠재적 삭개오란 인식이 없어 보여 그렇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 사랑어린 권면이 필요하다.

((딴소리))

1. 난 '분노'를 반대하지 않는다. 특히 인권을 위협받는 여성문제,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투쟁에 참여하는 경우, 이들의 바판을 용인, 혹은 적극 동참해야 하고 그에 더하여 그 욕섞인 메시지를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건 기독교 맨탈리티를 가진 이들 가운데 극단적 표현과 비판을 일삼는 부류다. 또한 그 비판은 최소한 '인간'보다는 행동, 논지, 입장에 한정하며 인신공격성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3. 보수적 신학관을 가진 몇몇은 삭개오는 회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 않냐, 예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얐냐, 전두환, 정형근과는 다르다 라고 말할 지 모르겠다. 내 내면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안에 바리새인의 피가 흐르지는 않나 돌아볼 필요도 있다.

2011/09/25 21:24 2011/09/2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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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다는 게 그렇게 싫었다. 때론 친구들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 중학교 때 어떤 친구는 '서울대에서 만나자'라고 인사했었다. 그리고 대입을 치르고 내게 전화했다. '너도 붙었냐고' -키우던 강아지를 다른 집에 보내기도 했다.

그 순간순간마다 매번 나는 가슴이 철렁했고 슬픔에 울컥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난 내색을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헤어지기 아쉽다고 오버하는 친구들 중엔 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서운해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유년기 시절, 이별의 기억들은 나의 복잡한 심정과 어설픈 행동들을 고착화시켰고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그러나 다소 막연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고독, 외로움, 거절감, 영원히 볼 수 없음에 대한 아련함..

성인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는 이별을 경험할 때마다 그런 정서가 지나치게 반복되어 점점 그 정서를 '인지'는 하되 체감하지는 못하는 시기가 왔다. 정말 나는 이제 '그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서 해댄 거의 광기어린 연락과 집착, 혹은 무정하게 이별을 고하고는 돌아서던 길. 터벅터벅 의미없고 괴롭기만한 인생을 곱씹으며 어디론가 낯선 공간으로 숨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가슴앓이.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일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찾아보니 어디에 뒀는지 모르게 잃어버린 여권지갑처럼. 내 안의 나름 심각했던 이별의 트라우마들을 잃어버렸다. 그저 윤리적 행동양식의 흔적만 남은 채로. '그래, 그 사람 떠나는데 밥 한번은 먹어야지.'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지나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 뭔가 심오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렇게 난 식어버렸다.

 


*facebook 노트: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오후 2:20 작성

2011/09/25 21:23 2011/09/2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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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출3:13-15)

내 성격은 약간 이중적이다. 내가 주도해서 이끌어야 할 상황이 아니면 다분히 내성적이고 수동적이다. 허나 내가 책임을 지거나 나서야 하는 판단이 서면 다소 적극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또한 나는 숫기가 없다. 어린시절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누나가 없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대신 나가서 그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고 불편했다.

대학원에서는 교수님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도록 시킬 때 그게 그렇게 싫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올 것이고 나는 주체가 아닌 입장에서 잘 대답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렇다고 교수님에게 이것저것 예상되는 문제들을 꼼꼼이 물어볼만큼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조금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나는 모세가 주저했을 그 자리에 내가 섰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노예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집트를 떠나자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사실 만만찮다. 그리고 왜 내가 의분을 일으켰던 그 옛날 나의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이 아니고 이제는 모든 기력과 의지도 별로 없는 노년에!

정말 싫다... 하나님의 메신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나올법한 모든 질문들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불가능해보이는 과정들.. 게다가 나는 살인을 한 도망자가 아니던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동족에게 채찍질한 이집트인을 죽인 나를 살인범으로 몰지 않았던가. 아.. 정말 나서고 싶지 않다.

내가 모세였다면.
흔히 역사 속 이스라엘 민족이나 모세 등등 많은 이들을 다룰 때 불순종의 대상 혹은 실수에 대해 가볍게 비난하는 - 그건 모세의 어리석음이지,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 - 판단들이 얼마나 더 어리석은지 깊이 돌아본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생활이 수십년간 이어지고 아이는 굶주리고 돌림병이 돌고 약속은 이뤄지지 않을 때 그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채, 책상 사무실에 앉아서 개고생하던 한 인간, 한 집단을 깊이 묵상치 않고 해대는 비난들은, 사실 그 비난의 잣대를 검증해보지 않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긴장되는 상황을 글자로만 인식하는 나또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모세의 머뭇거림을 십분 공감한다.If I were Moses

2011/09/25 21:22 2011/09/2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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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 생각한 걸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상대적 박탈감이 큰 편인데 기독인들 사이에서는 잘 드러나질 않는다. 가끔 나는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에 명품 옷을 입은 사람과 9900원짜리 티셔츠 입은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었다. 혹은 물욕이 많은 이들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교인들도 종종 봤다.

더 큰 문제의식은 교회를 가보면 실제로 중산층 이상이 다수고 극빈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사실 은근히 돈없는 사람들이 위화감 때문에 교회 오는 게 꺼려지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따라서 내 생각은 자연히 그럼 소유, 소비 자체를 적절하게 절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게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심사는 그렇다면 맘몬(물질의 우상화)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적정한 소유는 과연 어느정도일까 하는 문제였다. 이건 절대 수치인가 아니면 연봉에 기인하는 건가, 혹은 공동체의 수입 평균에 맞춰야 하는 건가. 넌 교인인데 너무 물질적이야 라고 말할 때의 그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사실 이러한 소유의 문제는 이미 청부론, 청빈론이라는 주제로 교계에서도 한참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해답이라고 부를 만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정답, 즉 청빈론이 옳다한들 교회가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데, 실제로 주일마다 만나는 이들의 개인 소비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도 청빈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나는 남 비판하기 전에 내 소유부터 따져보기 시작했다. 내 소비성향과 소유성향을 따져보고 나는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그 물건 금액의 상한치를 정했다. 이를 테면 냉장고를 살 때 내가 생각하는 상한 금액은 얼마이고 그 이상은 과하다는 식으로. 혈액형이 A형이자 다분히 계획적인 내 성격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이 프로젝트는 척척 진행됐다. 바지는 3만원 전후, 신발은 5만원 전후, 코트와 구두는 15만원 이하, 노트북은 100만원이하, 책은 부부가 합쳐서 매달 10만원, 외식비는 한번에 5만원이하, 매달 20만원 이하...

이런 걸 계산하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에 대한 물가 차이도 생기고 모든 물건을 다 이렇게 정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여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포기했지만.. 사실 지금도 내 심중에는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대한 상한치의 금액을 정한다. 물론 그 룰에 맞게 매번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물건 자체가 필수품이냐 사치품이냐도 중요하니 사치품에 상한선을 정해서 많이 사재낀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이런 고민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물건을 사는 금액보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의 문제가 점점 부각되고 그 여유는 결국 근본적인 연봉, 수입, 소유의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교인들의 경제문제인 셈이다. 나는 소그룹 나눔에서 입고 오는 옷이나 주말에 식당에서 먹은 음식, 아이들에게 사준 고가의 장난감, 그 아이들이 입은 옷, 이런 작은 부분에서 교인들이 상당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 교인들의 다수는 듣기만 할 뿐 그다지 공동체로서 도와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더욱이 그 도움이라는 게 치명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 생활 자체가 안될 정도는 아니지만 매번 소비에 심적 부담을 느낄 정도, 혹은 중산층이 다수인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초라함을 느낄 정도인 경우에 말이다.

난 버젓하게 직장이 있지만 전세 이사를 네번했다. 이제는 미친듯이 오른 전세값으로 아예 전세를 빼고 사택으로 이사했다. 교회를 가면 우리 아이보다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그 장난감에 눈독을 들이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조금 심난하다. 내 동기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부모가 사준 아파트가 있어 같이 시작한 직장 생활에 벌써 모은 돈만 몇억이랜다.

사실 교인 중 누군가는 내가 내 동기를 부러워하듯 내 아이가 입은 옷이나 내 직장, 사택을 갈수 있는 내 형편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예배를 드리나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한다. 난 교계에 쏟아지는 담론들 중 이런 얘기를 콕 찍어서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역사니 내러티브니 하는 신학 논쟁이나 정치이야기들, 물론 중요한 담론이지만 나는 매주 나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 건 것보다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게되는 나눔과 사건들이 더 잦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모두가 '아멘'이고 '샬롬'이다. 집에가서 어떤 가정은 호텔 뷔페를 먹지만 누군가의 아내는 울고 누군가의 아빠는 한숨쉰다.
2011/09/25 18:34 2011/09/2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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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간혹 어린이집이나 주일학교를 가보면 문제 아동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산만하고, 선생님을 괴롭히고 친구들에게 폭력을 쓰거나 모임을 방해한다. 부모를 보면 참 멀쩡한데 아이는 아닌 경우 난 원인이 참 궁금했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 아이의 곁에서 혹은 모임에서 아이를 지켜보며 또 육아서적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아이들의 문제 행동의 배후에는 대체로 그 부모에게 문제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이는 대체로 부모의 행동을 모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스트레스를 그대로 방출한다.

문제의 가정이 아니더라도 아동발달단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부모는 때때로 성인의 잣대로 아이를 다루는 오류를 범한다. 교회에서 직장에서 혹은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나는 얼마든지 친절할 수 있고 가면을 쓰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가정은 다르다. 내 본성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공간이며 아내와 불화가 생겨도 가정 안에서 그 불화를 처리해야 한다.(집을 나가거나 이혼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 아이들은 노출되고 때로는 피해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나도 내 몸이 힘들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 아이를 힘으로 제압한다.

우리 가정은 아이에게 매를 들거나 때리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지만 아이가 나름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 그 과정을 무시하고 아이를 끌고 가거나 억지로 목욕을 시키거나 정신없이 보고 있는 TV를 꺼버리거나 장난감 가게에서 팔을 잡아 끈다. 그러면서 자꾸만 '얘는 왜 이러지? 누굴 닮아서 저러니?'라고 아이를 꼴통취급한다. 실제로 그 부모나 가정환경이 꼴통 수준일 확률이 90% 이상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밖에서 사고치면 부모 얼굴에 먹칠하는 거니까 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알고 살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 말에 소름이 돋는다. 자식은 나와 아내, 그리고 가정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CCTV와 같다. 아이가 때로 문제행동을 보일 때 일단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참 아이를 통해 배우는 게 많다.



*facebook 노트: 2011년 9월 22일
2011/09/22 23:28 2011/09/2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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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늦은 밤까지 뒤척이는데 옆에서 아이가 쌔근거리는 숨소리에 울컥한다. 네 숨소리가 아빠에겐 너바나나 글렌굴드, 키스 자렛보다 아름답게 들린다. 이런 네가 자라서 나처럼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내품을 떠나면 참 서운할거 같아.. 우습게도 난 자주 그 생각을 하는데, 막상 그때가 돼도 난 잘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날 창피해하지말길..

 

- 사랑하는 아빠가

 

 

'11. 9. 16

2011/09/16 23:39 2011/09/16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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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내 건강검진 보내놓고 성하랑 놀면서 기도했다.
아픈 곳 없게 건강하다는 결과 나오게 해달라고.
아내 사랑하는 마음이 이런 때 드러나는구나 생각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미 환자들로 가득한 병원에서 검진받는 아내만
무사하길 기도하는 내가 하늘나라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거.. 누구라도 자기 아내 먼저 기도하는 법입니다.. 험험'
조용히 중얼거린다.

오늘 밤은 여러 병원에 흩어진 환자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11. 9. 14

2011/09/14 23:39 2011/09/14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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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음악 영화의 최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다. <아마데우스>나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마틴 스코세지의 <더 블루스> 등등을 떠올렸다면 이 영화는 기대 이하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더 콘서트> 다분히 상업적인 영화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키웠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잘 짜여진 느낌이라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올리 협주곡 전곡을 13분에 압축하여 펼치는 편집도 나름 괜찮았다. (물론, 30년 동안 한번도 맞춰보지 않은 곡을 솔리스트의 '비상'에 힘입어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심한 과장이다.)

소련 시절 자신이 세운 솔리스트가 감옥에서 죽게 되고, 단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자신은 볼쇼이 극장의 청소부로 전락하게 된 주인공 안드레이. 그 오랜 후회와 고통 그리고 답답했던 시간을 일소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그 무모한 작업에 뛰어든다. 30년간 연주조차 하지 못했던 단원들을 모아서 감옥에서 죽어간 솔리스트의 딸과 바로 '그 곡'을 지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협연을 하려는 안느-마리 자케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협연에 참여하게 되고 여러차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려 마음 먹지만 자신의 부모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최종 결정을 번복하고 바이올린 협연에 나선다.

30년전 부러뜨린 지휘봉을 테입으로 감고 나오는 부분이나 지휘봉을 부러뜨린 바로 그 소련 간부의 도움으로 다시 공연장에 서게 되는 설정, 가망이 없어보이는 일을 꾸미는데도 자신의 일을 뒤로 한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안드레이의 아내, 매 순간 그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오랜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참 훈훈했다.

인간은 참 흥미로운 존재다. 얼짱 몸짱의 솔리스트(멜라니 로랑은 정말 바이올린 솔리스트라고 보기엔 너무나 완벽한 미모를 자랑한다)에, 디즈니랜드에서나 가능할 법한 해피엔딩 등등 여러모로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영화의 중간중간 나는 유쾌했고 때때로 감동했다. 내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7점도 주기 어려운 이 영화를 나는 참 재미있게 보았다. 그래서 유럽 및 미국개봉에서도 평단 및 관객들의 환호를 얻어낸 게 아니겠나. 냉전시대의 비극을 시종일관 위트있게 풀어낸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2011/09/14 21:31 2011/09/1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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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출1:8-14)

시심 본문 중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때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맙시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을 반대하기 마련입니다"라는 적용 문구는 현실에 맞지 않다.

장로 대통령님을 모시고 고.소.영 인사가 회자되며 강남 한복판에서 무리하게 건물을 세우고 뉴라이트 정신에 입각한 짝퉁 정당을 창설하려는 지금은 오히려 요셉의 생전의 시대가 우리 현실에 더 맞을 것이다.

내가 기독교를 믿고 세상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나 생각해본다. 감옥에 갖힌 적도 없고 바울처럼 돌에 맞거나 매질을 당한 적도 없다. 군대에서도, 입사할 때도 불이익을 당하긴 커녕 종교활동을 적극 권장받았다. (도리어 담임목회세습 반대 시위에 참여했더니 장로, 집사라는 분들의 육두문자와 신변을 위협하는 메일을 받았고 시위장에서는 교인에게 비난을 당하고 멱살을 잡혔다!) 도대체 이 본문을 현재 기독인으로서 우리 삶의 고난으로 연결시키는 이유가 뭔가.

물론 불교집안에서 종교로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독교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한 권력이 나의 인권을 훼손할 정도의 고통을 사회전반에 행사한 적은 없다.

우리 솔직해지자. 우리 시대 기독교는 혼합주의 내지는 정치-종교의 일치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가 험한 길이라면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이렇게 넘쳐나고 밤거리에 붉은 십자가로 도시 가득히 도배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에 이렇게 기독교 간판을 걸고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괜시리 성경묵상 적용 문구를 보니 기독교인인게 더 부끄럽다.
2011/09/12 21:21 2011/09/12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