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아주 어릴 적 하나님이 계속 나를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마치 매순간 119 구급차 내지는 엄마아빠가 출동대기조처럼 내 근처에 있다는 생각. 그 상상만으로도.
나이가 들고 사춘기 시절이 되고 하나님은 항상 내 근처에 있다지만 나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찾아왔다. 입시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는데 원하던 대학에 낙방하고, 몸은 하나님이 천사를 둘러서 바이러스의 침투조차 막을 수 있을진대 한달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뭐냐 이건..
나이 서른이 넘자 매순간 하나님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게 조금 씁쓸할 때가 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내가 하는 생각들, 말들, 그리고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조차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내 맘속 동기들을 누군가 아무런 스크린없이 똑바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미드에나 나올 법한 최첨단 수사대가 내 내밀한 범죄를 캐러다니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나이에 따라 달랐고 지금도 마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 분 입장에서도 내가 피조물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일을 버젓이 하면서, 마치 윤리적으로 '청정인간'인냥 주변에 그럴싸한 말을 해댈 때면 분명 그분은 어깨를 들썩이며 이마를 찌푸릴 것이다. 내가 성하에게 무서운 눈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아빠한테 혼나!'라고 아주 먼 공간에서 소리치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편의 저자는 군대를 데리고 전쟁을 하던 경험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는 전쟁 가운데 장수가 뛰어나다고 해서 혹은 병사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전쟁이 항시 넉넉히 이기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그 정확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명확히 경험했다. 그는 구원의 순간을, 마치 미운 짓하던 내 자식도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 뛰어들어 구해주는 엄마의 급한 손길처럼 느꼈을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한 애증이 교차한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자주 나는 '나라는 피조물'을 버리고 싶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창조-피조 관계 속에서 얽힌 혈연? 창연?은 정말 다급한 순간에 '미운 피조물 새끼'를 구원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고 살아왔다. 시편의 기자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나또한 그에 심하게 동의한다.
풍산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 안에 무엇이든 배달하는 정체 불명의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알게 된 국정원 요원들은 그를 이용하여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애인을 데려오려 하고 그로 인해 이 남자는 남한과 북한의 요원들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김훈의 에세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남한 요원과 북한 요원에게 번갈아가며 잡혔을 때마다 묻는 질문이 '너는 어느 쪽이야, 북이야 남이야?'였다. 남자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표면적 정보는 전혀 없다. (그 대목에서는 김기덕의 전작 '나쁜 남자'의 깡패 주인공과 닮았다.)
하지만 영화는 남자의 행동과 내면 연기를 통해 그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휴전선 근처에서 이산가족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주는 이 남자에게 분명 나름의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죽이려던 북한 고위층 간부가 흐느끼며 자신의 애인 인옥을 죽기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고 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인옥을 만나게 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오열하는 할아버지의 영상을 담아 마지막 휴전선 넘기를 감행하여 북에 있는 할머니에게 그 영상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람, 편지, 영상 그 어떤 것이든 남북을 가르며 전달한다. 그의 인생 동력은 '사랑'이며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는 일신의 돌봄 없이 남북 요원 사이의 이전투구의 장에 자신을 던진다.
영화의 플롯은 대체로 '레옹'과 많이 닮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해결사에게 어느날 찾아온 사랑은 그의 자기관리를 허물고 그 감정의 흔들림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위험한 상황 속으로 내달린다는 점에서 그 감정선이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는 그에 더하여 남북한 분단 상황 가운데 처한 주인공의 고뇌와 복수가 우리의 피부에 와닿게 느껴진다.
특히 탈북한 고위 간부의 암살에 대한 위협과 불안, 그리고 정보를 캐내려는 남한 요원의 시선으로 인한 압박으로 자신의 애인에게 집착하고 그녀를 꺼내준 남자에게 강한 질투심을 보이는 장면들이 미시적 측면에서도 개연성 있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사단의 화려한 재기와 배우로서 윤계상의 약진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마음은 무겁지만 여러 면에서 풍성했던 점에서 나름 유쾌한 영화라 평하고 싶다.
곽교육감의 2억 전달 건 관련하여, 일부 진보진영의 우려감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한 감싸기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후보 단일화와 당선 이후 2억을 전달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진보진영에서는 '관행' 내지는 현실적으로 눈감아줘야 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게 솔직히 불편한 마음이다.
만일 '곽노현'이 아니고 '정형근'이나 '오세훈'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면서 2억을 나눠주고 그것이 선거의 대가성이 없는 돈이었다고 말했다면 과연 진보진영에서는 문제삼지 않았을까. 결국 이것이 진영논리가 되어 나는 착한 편이고, 착한 편의 마키아밸리즘적 정치 행보는 때때로 배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건 현실 정치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드는 격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곽교육감의 정치 성향과 그의 교육 정책을 지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태로 더 마음이 아프고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건, 진보보수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곽후보의 감싸기와 까기로 일관하는 두 극단적 반응에 심한 무기력함을 느낀다.
이 사건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경선을 포기한 후보에게 당선 후 당선자가 위로금(이 됐건 대가성이 됐건, 어려움에 처한 이에 대한 배려가 됐건 간에)을 직접 금전적으로 보상하게 만든 경선 시스템의 불합리함에 있다. 그렇다면 그 불합리함, 부정행동에 대한 자성과 그 시스템의 개정에 여당, 야당, 시민단체, 국민이 모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하여 개선책을 찾고자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일개 교육감 한명의 부정행위에 여야가 이전투구식 입장표명을 해대기에 앞서, 최소한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야하지 않냔 말이다. 그 구조의 문제를 다루면서 곽후보의 2억 전달의 선의나 억울함을 정상참작하며 그 배경도 따져보고, 반대 입장에서 위법행위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해야 하지 않을는지. 한편으로는 진보측에서도 마치 자신이 교육감 경선에 나서면 현실정치의 관행과는 상관없이 독야청청할 것처럼 곽교육감을 비난하는 것도 탐탁치만은 않다.
곽 교육감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그에 대한 원론적 비판을 거둘 셈인가. 진보 진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조금이라도 먼지가 묻으면 야쿠자처럼 할복하는 문화를 강요하는 건 아닌지. 선거에 있어 여야 후보 모두가 공정하게 부정함 없이 당선되는 중립적 구조에 대한 고민 없이 이런 진영논쟁의 진흙탕 싸움에 이제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내가 생각하는 곽 교육감 사건에 대한 생각은 이러하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후 5:27
기술사회 관련해서 자끄 엘룰 등을 언급하며 기술에 비판적인 이들 가운데에는 서울공화국에 살면서, 자동차를 몰고 노트북과 스마트폰, 타블릿 PC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적극적으로 기술의 진보를 흡수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일상영역에서 기술 발전과 적극 동행하는 현실 대비 기술문명에 대한 이상적 비판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실상 당사자들은 언행의 불일치, 더 나아가서 자신은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지적 우월감을 행사한다는 비난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부터 일상과 괴리된 비판에 자신이 없어졌다. 한동안 거대도시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고가의 가전제품을 쓰지는 않아도 대체로 기술사회의 혜택을 적극 수용하는 나에게 있어, 인생의 상당 시간을 귀농하여 농부였던 엘룰이나 문명을 전적으로 거부했던 니어링 부부,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여 오두막 생활에 전념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은 피부에 와 닿지 않게 참 멀기만 하다.
내가 기술사회를 비판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들의 삶처럼 일상의 알맹이가 있을 때가 될 것이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전 9:11
개인적으로 무상급식을 지지하고 투표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오세훈 시장과 무상급식 관련된 진보진영의 반응에는 어느정도 반감이 들었다. 일부 과격한 표현도 그렇고 특정 정치인의 지지여부와 복지정책을 1:1로 연결하는 단순구도가 그러했다.
물론, 무상급식 찬반투표를 오세훈 시장이 자신의 승부수로 던진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보수성향 시민들이 오세훈을 구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의 큰 치적은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자기 백성과 정치인 모두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때로 좌파우파 논쟁을 상식-비상식 구도로 가져가면서 자주 보수진영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아닌, 보수 성향 국민들을 그런 선악 구도로 몰고 가는 부분이.. 내심 불편하다. 김두식 교수님의 말처럼 SNS 안에서 진보 과잉 현상이 겨우 찻잔 속 폭풍에 불과하겠지만, 그 과잉 공간 안에서 좀더 예의와 겸손으로, 또한 깊은 묵상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나의 선행은 나의 바른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지, 타인의 악행으로인해 나의 도덕성이 높아진다고 생각치 않는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24일 수요일 오후 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