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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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4:11~22)

가끔 아동성폭행범 뉴스가 나올 때면 쥐도새도 모르게 범인을 잔인하게 죽일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의 원수에서부터 지하철에서 성희롱을 즐기는 직장인까지. 악행을 범하려는 그 자리에서 손목이 잘라졌으면 좋겠다.

그 뿐이랴, 개인적으로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모멸감을 주었던 일들로 인해, 나는 너무 억울해서 밤새도록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상황을 곱씹고 있는데 당사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잘 지내며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 그 만행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길 매순간 고대한다.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진정 존재한다면 나는 매일매일 소원을 빌 것이다. 한번에 여러 사람을 해치울 수 있게 소원을 조직적으로 Grouping할 것이다! 까먹거나 빠져나가게 되는 악인이 존재하지 않도록 전심을 다해 문구들을 만들어 '바람돌이'에게 빌 생각이다.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다윗'으로 추정되며 그의 노년의 지혜를 풀어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만을 하며 평화를 찾기까지 힘을 다하라고 권한다. 주님의 얼굴이 악한 자를 노려보시고 그들의 기억을 이땅에서 지워버리신다고 말한다. 의인의 부르짖음을 주님이 반드시 들어주시고 재난에서 건져주신다고 약속한다. 악인은 끝내 죽음을 맞고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처음 이 메시지를 듣던 청년시절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감격의 눈물이 아닌 내 혈기를 막아서는 세력에 대한 분함 때문에. 왜.. 왜 나를 막아서는 건가, 당신은 악인들을 그대로 놔두면서,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때때로 그들이 회개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용서해 줄 마음도 있으면서. 지금 왜 나의 이 울분을 참으라는 건가.

솔직히 지금도 나는 그런 생각에 자주 사로잡힌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다르게 매사에 불의한 일들에 심기가 불편하다. 때때로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아내만 인식하는) 이마가 붉어지면서 온유한 말투로 뼈있는 소리를 내뱉는다.

사실, 살면서 누군가는 나로 인해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내가 참지 못한, 나쁜 감정에 휩싸여 잘 처리하지 못하고 내달린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고 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내 행동에 이를 갈았을 것이다. 몇몇 기억은 분명히 그러하리라고 확신하며 몇몇 기억은 뚜렷하진 않지만 분명 나는 그 당시 내가 되고싶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강간범, 살인범 등 범죄자의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유기되었거나 심한 학대와 폭행, 구타를 당했던 이들이거나 사회에서 심한 차별과 모멸감,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경우가 많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런 경험으로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행동에 어두운 원인이 있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쁜 기억과 에너지가 시간의 축을 따라 흘러간다. 누군가 술에 취해 쇠망치로 내 머릴 내리쳤고 나는 요람에서 방긋 웃기만 해도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는 대,신 내가 보호받아야 할 부모로부터 칼에 찔리고 강간을 당하고 소년원으로 보내졌다면, 나는 누군가가 되었건 손에 잡히는 어떤 이에게나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악행의 인과응보.

"주님의 얼굴이 악한 자를 노려보시고 그들의 기억을 이땅에서 지워버리신다"는 그 분의 약속은 이 고리를 끊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내가 악인의 팔다리를 잘라서는 그 악행의 인과응보를 끊을 수 없다. 누군가는 자신의 환경탓에 나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해하려는 이들에게 또다른 악한 마음의 씨앗을 심겨줄 것이다.

"평화를 찾기까지 힘을 다하라" 평생 전장의 피흘림, 집안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의 연속, 부하를 죽이고 아들의 칼을 피해 돌아다닌 다윗은, 말년에 그 악행의 인과응보의 고리를 끊는 "샬롬"의 선언이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악이 사람을 통해 만연한 것을 싫어하시고 그들의 고통스런 기억과 행동을 이땅에서 축출해버리고자 하신다. 그 뜻이 이뤄지기 전에 우리는 악한 마음과 행동을 해결하지 못한다.
2011/09/12 21:20 2011/09/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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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긴다>를 다 읽었다. 논쟁 지향적인 성향이 내재해 있어서 그런지 책 읽는 속도가 평소대비 두세배는 되었던 듯 하다. 다 읽고 보니 사실 얘기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 개인적으로 기대보다는 (논쟁할만한) 내용 자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이 책은 천국, 지옥, 진노하는 하나님 이런 개념 때문에 교회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던 semi-christian에게 큰 울림을 줄 책이라 확신하지만 성경을 비교적 깊이있게 공부한 학자풍의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보수적 신학도들에게는 약간의 실망감을 줄 수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에 대한 논쟁은 '깊이'보다는 '입장'에 기인하리라고 예상한다. 나또한 그런 부분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총평. 기존에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생길 법한 논란거리들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관계로 내가 굳이 동어반복의 글을 쓸 필요는 없겠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김영봉 목사님의 추천 서문과 의견이 일치한다. 교계의 배경 때문인지 내가 약간 더 보수적인(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그가 신학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점, 이 책이 현대 기독교의 내세주의적 사고에 균형을 준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정죄하는 교회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점에서 크게 김영봉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금 불편한 부분은 그의 성경해석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과장된 해석이 보이면 그의 논리적 큰 흐름에 상관없이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사랑이 절대 이기지 못한다'로 목소리 높일 것이다. 두번째로 불편한 부분은 신앙의 균형점인데 제자도로서의 예수의 희생, 헌신이 배제된 채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사탕발림의 메시지만 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곧 포이에마에서 복음주의진영의 비판서 '하나님이 이긴다'도 번역 출간한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내가 랍벨이 말하는 큰 형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신앙적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고난에 대한 균형이 다소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최근 고인이 된 존 스토트 신부님이 '더' 좋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되는 각각의 이슈마다, 필요 이상으로 균형 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그의 성실함이 '더' 좋다.

마지막으로 그의 확신에 차서 말하는 '스타일'이다. 난 겸손한 사람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마음이 커지는 게 개인적으로도 참 우려스럽지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설교자들, 웅변가들에 일단 점수를 후하게 주지 못하는 게 요즘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족이긴 하나, 기독교 내부에서 자기 PR에 유능하고 자신과 반대성향의 집단에 지나치게 과격한 이들은 이제 부담스럽다. (사족으로, 예수님도 욕을 하셨다지만 예수에게 배울 게 욕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욕의 제자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조폭에게서도 그 제자도를 실현할 수 있잖나.) 좋은 방향성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랍벨의 이런 확신에 차고 단호한 태도가 조금은 아쉽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서, 지옥의 존재 부정이나 보편적 구원론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너무 '하이웨이 스타'처럼 내달리는 것 같아 간간이 혼자서 '워-워-'를 되내인다. 때때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도올 김용옥을 떠올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 분노하며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은 칼빈주의자들을 더 자주 그려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란 설교에 감동하며 회개하고 '이 벌레같은 날위해'라는 가사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대다수의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이 책은 치명적으로 불온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니! 성경에 명시한 지옥을 상상할 수 없다니. 불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열린 태도라니. 김영봉 목사님에 따르면 실제로 이 책의 여파로 인해, 2011년 6월 15일, 남침례교 연차 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편의를 위한) 복음으로 추락시켰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핵심교리를 버렸다는 비판을 할 '구름같이 허다한' '칼빈의 후예들'이 몇몇 떠오른다. 그들은 교리를 잣대로 랍벨의 책을 대충읽고 쓰레기통에 쳐넣을 것이다. 혹은 조목조목 오류를 짚어내면서 정통 교리를 사수하려는 정의감에 불타오를 것이다. 솔직히 나는 교회의 성도들, 그 개별적인 삶을 돌아보고 고민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더 걱정스럽다. 교리를 떠받들고 자기 성도는 '벌레'같이 보는 목회자가 두럽다. 의심에 찬 성도들을 이교도 취급하고 그들의 회의감을 제대로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도 예정설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설교하는 기성 교회 목사님들이 두렵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지,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그들보다 랍벨이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끝)
2011/09/07 21:30 2011/09/0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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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3:13-22)

아주 어릴 적 하나님이 계속 나를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마치 매순간 119 구급차 내지는 엄마아빠가 출동대기조처럼 내 근처에 있다는 생각. 그 상상만으로도.

나이가 들고 사춘기 시절이 되고 하나님은 항상 내 근처에 있다지만 나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찾아왔다. 입시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는데 원하던 대학에 낙방하고, 몸은 하나님이 천사를 둘러서 바이러스의 침투조차 막을 수 있을진대 한달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뭐냐 이건..

나이 서른이 넘자 매순간 하나님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게 조금 씁쓸할 때가 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내가 하는 생각들, 말들, 그리고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조차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내 맘속 동기들을 누군가 아무런 스크린없이 똑바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미드에나 나올 법한 최첨단 수사대가 내 내밀한 범죄를 캐러다니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나이에 따라 달랐고 지금도 마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 분 입장에서도 내가 피조물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일을 버젓이 하면서, 마치 윤리적으로 '청정인간'인냥 주변에 그럴싸한 말을 해댈 때면 분명 그분은 어깨를 들썩이며 이마를 찌푸릴 것이다. 내가 성하에게 무서운 눈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아빠한테 혼나!'라고 아주 먼 공간에서 소리치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편의 저자는 군대를 데리고 전쟁을 하던 경험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는 전쟁 가운데 장수가 뛰어나다고 해서 혹은 병사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전쟁이 항시 넉넉히 이기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그 정확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명확히 경험했다. 그는 구원의 순간을, 마치 미운 짓하던 내 자식도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 뛰어들어 구해주는 엄마의 급한 손길처럼 느꼈을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한 애증이 교차한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자주 나는 '나라는 피조물'을 버리고 싶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창조-피조 관계 속에서 얽힌 혈연? 창연?은 정말 다급한 순간에 '미운 피조물 새끼'를 구원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고 살아왔다. 시편의 기자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나또한 그에 심하게 동의한다.

2011/09/05 21:20 2011/09/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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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 안에 무엇이든 배달하는 정체 불명의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알게 된 국정원 요원들은 그를 이용하여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애인을 데려오려 하고 그로 인해 이 남자는 남한과 북한의 요원들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김훈의 에세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남한 요원과 북한 요원에게 번갈아가며 잡혔을 때마다 묻는 질문이 '너는 어느 쪽이야, 북이야 남이야?'였다. 남자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표면적 정보는 전혀 없다. (그 대목에서는 김기덕의 전작 '나쁜 남자'의 깡패 주인공과 닮았다.)

하지만 영화는 남자의 행동과 내면 연기를 통해 그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휴전선 근처에서 이산가족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주는 이 남자에게 분명 나름의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죽이려던 북한 고위층 간부가 흐느끼며 자신의 애인 인옥을 죽기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고 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인옥을 만나게 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오열하는 할아버지의 영상을 담아 마지막 휴전선 넘기를 감행하여 북에 있는 할머니에게 그 영상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람, 편지, 영상 그 어떤 것이든 남북을 가르며 전달한다. 그의 인생 동력은 '사랑'이며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는 일신의 돌봄 없이 남북 요원 사이의 이전투구의 장에 자신을 던진다.

 

영화의 플롯은 대체로 '레옹'과 많이 닮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해결사에게 어느날 찾아온 사랑은 그의 자기관리를 허물고 그 감정의 흔들림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위험한 상황 속으로 내달린다는 점에서 그 감정선이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는 그에 더하여 남북한 분단 상황 가운데 처한 주인공의 고뇌와 복수가 우리의 피부에 와닿게 느껴진다.

특히 탈북한 고위 간부의 암살에 대한 위협과 불안, 그리고 정보를 캐내려는 남한 요원의 시선으로 인한 압박으로 자신의 애인에게 집착하고 그녀를 꺼내준 남자에게 강한 질투심을 보이는 장면들이 미시적 측면에서도 개연성 있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사단의 화려한 재기와 배우로서 윤계상의 약진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마음은 무겁지만 여러 면에서 풍성했던 점에서 나름 유쾌한 영화라 평하고 싶다.

2011/09/01 21:29 2011/09/0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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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교육감의 2억 전달 건 관련하여, 일부 진보진영의 우려감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한 감싸기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후보 단일화와 당선 이후 2억을 전달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진보진영에서는 '관행' 내지는 현실적으로 눈감아줘야 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게 솔직히 불편한 마음이다.

만일 '곽노현'이 아니고 '정형근'이나 '오세훈'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면서 2억을 나눠주고 그것이 선거의 대가성이 없는 돈이었다고 말했다면 과연 진보진영에서는 문제삼지 않았을까. 결국 이것이 진영논리가 되어 나는 착한 편이고, 착한 편의 마키아밸리즘적 정치 행보는 때때로 배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건 현실 정치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드는 격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곽교육감의 정치 성향과 그의 교육 정책을 지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태로 더 마음이 아프고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건, 진보보수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곽후보의 감싸기와 까기로 일관하는 두 극단적 반응에 심한 무기력함을 느낀다.

이 사건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경선을 포기한 후보에게 당선 후 당선자가 위로금(이 됐건 대가성이 됐건, 어려움에 처한 이에 대한 배려가 됐건 간에)을 직접 금전적으로 보상하게 만든 경선 시스템의 불합리함에 있다. 그렇다면 그 불합리함, 부정행동에 대한 자성과 그 시스템의 개정에 여당, 야당, 시민단체, 국민이 모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하여 개선책을 찾고자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일개 교육감 한명의 부정행위에 여야가 이전투구식 입장표명을 해대기에 앞서, 최소한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야하지 않냔 말이다. 그 구조의 문제를 다루면서 곽후보의 2억 전달의 선의나 억울함을 정상참작하며 그 배경도 따져보고, 반대 입장에서 위법행위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해야 하지 않을는지. 한편으로는 진보측에서도 마치 자신이 교육감 경선에 나서면 현실정치의 관행과는 상관없이 독야청청할 것처럼 곽교육감을 비난하는 것도 탐탁치만은 않다.

곽 교육감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그에 대한 원론적 비판을 거둘 셈인가. 진보 진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조금이라도 먼지가 묻으면 야쿠자처럼 할복하는 문화를 강요하는 건 아닌지. 선거에 있어 여야 후보 모두가 공정하게 부정함 없이 당선되는 중립적 구조에 대한 고민 없이 이런 진영논쟁의 진흙탕 싸움에 이제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내가 생각하는 곽 교육감 사건에 대한 생각은 이러하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후 5:27

2011/08/31 21:19 2011/08/3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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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 관련해서 자끄 엘룰 등을 언급하며 기술에 비판적인 이들 가운데에는 서울공화국에 살면서, 자동차를 몰고 노트북과 스마트폰, 타블릿 PC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적극적으로 기술의 진보를 흡수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일상영역에서 기술 발전과 적극 동행하는 현실 대비 기술문명에 대한 이상적 비판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실상 당사자들은 언행의 불일치, 더 나아가서 자신은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지적 우월감을 행사한다는 비난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부터 일상과 괴리된 비판에 자신이 없어졌다. 한동안 거대도시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고가의 가전제품을 쓰지는 않아도 대체로 기술사회의 혜택을 적극 수용하는 나에게 있어, 인생의 상당 시간을 귀농하여 농부였던 엘룰이나 문명을 전적으로 거부했던 니어링 부부,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여 오두막 생활에 전념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은 피부에 와 닿지 않게 참 멀기만 하다.

내가 기술사회를 비판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들의 삶처럼 일상의 알맹이가 있을 때가 될 것이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전 9:11

2011/08/30 21:17 2011/08/3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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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상급식을 지지하고 투표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오세훈 시장과 무상급식 관련된 진보진영의 반응에는 어느정도 반감이 들었다. 일부 과격한 표현도 그렇고 특정 정치인의 지지여부와 복지정책을 1:1로 연결하는 단순구도가 그러했다.

물론, 무상급식 찬반투표를 오세훈 시장이 자신의 승부수로 던진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보수성향 시민들이 오세훈을 구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의 큰 치적은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자기 백성과 정치인 모두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때로 좌파우파 논쟁을 상식-비상식 구도로 가져가면서 자주 보수진영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아닌, 보수 성향 국민들을 그런 선악 구도로 몰고 가는 부분이.. 내심 불편하다. 김두식 교수님의 말처럼 SNS 안에서 진보 과잉 현상이 겨우 찻잔 속 폭풍에 불과하겠지만, 그 과잉 공간 안에서 좀더 예의와 겸손으로, 또한 깊은 묵상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나의 선행은 나의 바른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지, 타인의 악행으로인해 나의 도덕성이 높아진다고 생각치 않는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24일 수요일 오후 8:40

2011/08/24 20:35 2011/08/2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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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새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성하랑 자려고 누웠는데 번개가 번쩍 하자 성하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게 뭐야?"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 사진찍을 때처럼 번쩍하지? 아빠랑 같이 사진찍자"라고 둘이서 사진찍는 흉내를 냈다.

옆에서 듣던 아내가 그게 무슨 사진찍는 거냐며 아이에게 거짓말한다고 어이없게 웃더니 "성하야,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쿵쿵 소리나는 건 구름들이 서로 박치기를 해서 그래. 구름이 쎄게 박치기 하면서 번개도 치고 천둥소리도 나는거야"라고 설명한다. 성하는 한동안 별 반응이 없이 누워있었고, 그렇게 여러차례 천둥번개가 쳤다. 난 그게 뭐 대수냐며 같이 멍하게 누워 있는데, 성하가 가만히 천둥번개 소리를 듣다가 "구름이 너무 많이 박치기 해서 머리에 피나겠다"고 혼자 웃으며 말했다. 아내와 나도 더불어 웃었다.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내뱉는 말들이 아이의 동심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의 '교정'은, 3살난 아이가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웃긴 말로 떼우려는 내 가벼운 생각 이상으로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른들이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적 생각들을 가로막는 일들이 비단 이뿐이랴. 아이에게 아내같은 엄마가 있어 참 감사하다.


(페이스북 2011년 8월 17일)
2011/08/17 23:27 2011/08/1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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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와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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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카메라 보기가 쉽지 않아서. 세번째 성공! ^^

(사진: iPhone 3Gs)

2011/08/16 23:20 2011/08/1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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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성하가 잠에서 깨서 나를 보고는 막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성하야, 어제 너 엄마랑 잔다고 아빠 회사 가라그랬잖아.
그래서 아빠 회사 가려고 하는데..?"라고 했더니
아내가 밤새 그걸 기억하고 있었냐고 혀를 내두른다.


아침부터 소심한 트리플 A형 인간임이 밝혀지면서 기분이 메롱이다.ㅠㅠ
(나 진짜 달래려고 한 말인데.. 왜~ 왜~)

 

'11. 7. 21

2011/07/21 23:36 2011/07/21 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