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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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하종강-이선옥

다시 한번 느낀 건데 트위터는 논쟁의 도구로는 부적합한 것 같다. 파급효과는 큰 반면 제대로된 소통에 제약이 있어보인다. 즉흥적, 즉각적 감정 대응...그에 따르는 순식간에 팔로워를 타고 전파되는 속도가 정말 무서울 정도다.

공지영-하종강-이선옥의 표절 문제는, 과거 월간지 논쟁으로 본다면 2-3개월간 주고받을 내용이 축약+감정고조 상태로 진행된 느낌이 적지 않다. 더우기 한 가지 이슈로 한 사람의 내면이나 그의 인생 여정을 모두 난도질하는 식의 표현들이 오가는 대목에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제3자 입장인 나조차도 꽤나 불쾌했다.

다들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겠고 트위터라는 공간 자체의 특수성도 감안해야겠다. 그리고 언제나 공지영은 주변의 지적에 다소 까칠한 언니의 모습을 보여왔는데, 그 까칠함이 적에게 향했을 때는 환호하다가 아군을 향하니, 비판을 넘어 '공지영'이라는 인간 자체를 냉소하고 실망감을 내비치는 경우들은 ...좀 아쉽다. 공식적으로는 '좀'이지만 내심 상당히 아쉽다.

'12. 8. 16.


힘조절
 
1.
 섬세한 작업이나 운동 경기에서 힘조절을 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장에서 자동차 조립시에도 규정 토크를 줘서 나사를 돌려야지 과토크를 주면 나사 머리가 날아가거나 나사산이 뭉개진 채로 차에 박힌다. 그러면 빼내서 다시 조립하기 조차도 쉽지 않다.

2.
아내와 대화 중에 말하길 우리 나라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10개 중에 1-2개 잘못했는데 그것을 잘 가려서 비판하지 못한다는 얘길 했다. 트위터나 게시판 댓글에도 지지와 비난의 극단을 달릴 줄만 알지 그 사이의 입장 표명이 쉽지 않다는 거다. 모처럼 탁월한 지적이란 생각을 했다.

3.
 보수층은 너무 덮어줘서 문제라면, 진보는 서로에 대한 분노지수가 너무 높은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진보:보수:무당파를 30:30:40으로 분류
하지만 난 우리나라 진보가 30이나 되는지 잘 모르겠고(그런 이유로 김두식 교수는 자주 진보를 찻잔 속 태풍으로 비유한다) 그 진보의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고 그 사이가 너무 소원하다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한다.
 
4.
비판은 장려되어야 한다. 비판은 당사자와 더불어 지켜보는 제3자에게도 양쪽의 논리적으로 약한 부분을 짚어보는 계기를 만들며 더욱 다양한 시각,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힘조절되지 않은 비판은 때로는 과투입된 처방전처럼 독이 된다.
 
5.
 사사로운 잘못에도 매번 회초리 100대를 맞아야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완성도가 뛰어난 성인이 될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승자독식 사회와 더불어 패자, 실수자에게도 가혹한 사회다. 또한 진보 논객들은 그런 오류나 잘못들을 귀신처럼 찾아내어 극단적인 혐오나 냉소를 쏟아내고 스스로의 '관'이 없던 대중들은 그 논리대로 호불호를 흡수하여 그 극단적 정서를 가감없이 '리트윗'한다.
 
6.
 어쩌다 공지영 얘기가 나와 이 글의 말미는 공지영의 옹호가 되는 느낌이지만,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하다못해 철새 김민석에서 코리안 드림 박찬호, 최근에는 임수경, 이정희까지. 내가 겪은 많은 이들은 그들을 중간 정도를 옹호하고 중간 정도를 비판하지 않았다.

7.
 난 가끔 내 주변 진보 진영 지인들이 나의 말실수나 잘못된 논지 한두번으로 나를 떠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종종 있다. 요즘은 진영에 상관없이 SNS에서 주기적으로 언팔에 친구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지애를 느끼던 이들이 실망감을 비추고 갑자기 관계망에서 사라지면 참 마움이 지옥 같다. 삶의 방향성이 같은 지옥. 솔직히 난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12. 8. 16.



입금하라!

아내와 오늘도 공지영-하종강-이선옥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내 트위터와 페북에도 여전히 관련 글들이 오르내린다. 이제 나도 세 사람 당사자들의 글들은 충분히 읽었다. 솔직히 모두 공감이 간다. 허나 여기서 누구의 손을 드는 순간 뭔가 내 주변 사람들과도 서로 벽을 만드는 느낌마져 드는, 일종의 '서늘함'이 내 이마에까지 전달되는 요즘이다.

사실 나는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의 근본에는 22명의 자살로 귀결된 쌍용차 문제 자체가 존재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같은 사건으로 이십여명이 줄줄이 목숨을 끊는 이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에 국민적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데 세 사람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호불호로 확대 재생산, 그것도 강한 분노와 더불어 퍼지는 게 공감이 되다가도 이 논리싸움이 솔직히 때론 절망스럽기도 하다. 그만큼 각자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반대입장으로 해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사실상 이 문제는 담론의 과잉 수준에 이르렀으니 당사자가 아닌 제3자들은 논지를 퍼나를 때에 근본적인 쌍용차 문제 자체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또한 자판이나 두들기며 잘잘못을 가르는 무책임한 논객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글 하나 쓸 때마다 후원계좌에 입금하라는 거다. '닥치고 입금'이 아니고 '선 떠들고 후 입금'하라는 거다.

인증샷까지 권하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고. 글하나에 입금 한번. 잘잘못 가리는 일이 중요한 만큼 쌍용차 노조에 도움을 실질적인 주었으면 싶다. 먼저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일빠로 입금하련다...!

'12. 8. 21.

2012/08/22 21:49 2012/08/2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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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복음과상황>의 10년이 넘은 필진이자 독자로서 그리고 편집위원의 입장에서 사죄를 구합니다.

<복음과상황>은 91년 창간된 이래 오랫동안 재정적 어려움을 면치 못했고 제가 필진과 독자모임 대표로 참여하게된 1999년 이후부터도 계속된 부채의 누적을 겪었으나 발행인과 이사회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때 복상독자모임에 참여하던 시절 독자들의 후원금을 모아서 이사회에 전달하는 이벤트를 한 일도 있었으며 급기야 2005년에는 폐간 위기에 처하여 보다못한 <뉴스앤조이>측에서 복상을 살리기 위해 자기 종이신문을 폐간하고 오프 매체 통합을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적자 누적으로 편집부와 출판디자인 업체 등등이 금전적 큰 피해를 입었음을 기억합니다. 당시 편집부는 1년 가량 급여를 받지 못했고 업체도 상당한 돈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뉴스앤조이>는 <복음과상황>을 살리기 위해 재정적인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복음과상황이라는 '개념잡지'를 먹으려 한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는 굴욕을 당한 바 있습니다. 물론 두레선교회나 학복협, 우창록 변호사 개인의 금전 지원을 희석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개신교계에서 복상을 자랑하고 복상에 발을 담그고 있던 구름같이 허다한 목회자 어른들이 잡지에 이름을 걸고 겉으로는 이 매체를 칭송하고 이 매체를 통해 드러냈던 거대담론들의 비판 이면에는 급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환경의 악독 기업의 얼굴이 숨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 글은 이 문제를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지강유철님의 지적에 대한 제 개인적인, 그러나 편집위원의 자격으로 쓰는 글입니다. 저는 신입 편집위원이며 이런 글을 쓸 자격 운운하시면 그에 떳떳하게 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허나 예전에는 저도 함께 잡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설 수 있었지만 잡지를 만드는 멤버가 된 지금은 마냥 뒷짐지고 뒷담화로 삿대질만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복음과상황>의 재정 적자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해당 편집부시절 실무진과 출판업체 및 뉴스앤조이 등 관련된 분들에게 사죄를 구합니다. 또한 매체의 '논조'는 진보적이고 원론적이고 복음주의적이었으나 매체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였음을 복상 독자들에게 사죄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고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마저 불경하게 만든 죄에 용서를 구합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함께 겪었지만 독자모임 이후로 이 문제를 공론화 하고 해소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편집위원이 된 저의 이중적 태도에도 용서를 구합니다. 잡지는 내용으로 말해야 하겠지만, 잡지를 만드는 이들의 현장 또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잡지가 좋아지는 것 만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거듭 사죄를 구합니다. 그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2012년 1월 4일.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김용주.
2012/01/04 21:35 2012/01/0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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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위의 생각이지만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참 현실적인 이론이란 생각을 했다.

이른바 '신학 혁명의 구조'라고 패러디 해도 될만큼 역사적 논쟁들에 있어, 두 개 이상의 양립하는 이론들이 충돌할 때 실제로 그 이론들의 흥망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포퍼의 견해처럼 진위를 따져서 어느 하나가 바늘에 풍선이 터지듯 펑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이론이 양립하며 나름의 세를 유지하다가 어느 한 이론이 점점 소멸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이론은 그것을 고수하기 위한 입장에서 보수적 권위를 내세우고 새로 등장한 이론은... 기존 이론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풀이(Problem Solving)를 단행한다. 따라서 두 개의 이론은 마치 다른 문제를 풀고 있는(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두 이론은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며 라이트와 파이퍼도 현재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지금은 파이퍼와 라이트의 이론의 중첩기라 할만 하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기에는 어느 한 입장을 버리지 않도록 더글라스 무처럼 양 이론을 포용하는 입장(수정된 개혁주의적 입장)도 등장한다! 풍요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파이퍼가 '칭의논쟁'에서 휘청거리지도 않는 라이트에게 너무 깊이 결정타를 날리려다 빗맞추었다고 느낀다. 그가 바로 그 '파이퍼'라는 점에서 조금은 걱정스럽다.



*관련기사

[CTK] 톰 라이트, 적인가 동지인가
http://www.christianitytoday.co.kr/inews/inews.html?oo_id=469&oo_day=20110906185705&code=200-015&mode=view

[21세기 신학자들] (41) 더글러스 무 미국 위튼대학교 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321960
2011/10/06 21:27 2011/10/06 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