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기타 이슈들
"한국은 유독 T.P.O.(옷을 상황에 맞게 입는 것)에 약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큰 행사 외에는 장소에 어울리게 입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죠."


술자리에서 주도를 지키지 않은 이에게는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소에 맞는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 되려 겉치레가 심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좋은 패션이란 아직까지는 검소한 옷이지, 상황에 맞는 옷은 아닌 것이다. '권력=악, 저항=선'의 도식이 '복장규제=악, 자율복장=선'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무엇이 사무실 복장으로 적당한지에 대한 철학이나 지식없이 그저 눈에 익은 것은 선호하고 낯선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니 복장 규제에 대한 반발이 들끓을만하다.

 

- '넥타이는 좋고 짧은 치마 나빠? 오늘도 사무실은 세대 전쟁',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 (2013. 9/12)

 

 

한국에서 드레스코드가 사회적 이슈를 탄 대표적인 케이스가 몇 가지 있다. 축구선수 안정환이 이전 선수들과는 달리 경기 입장시 정장을 입어서 운동선수의 계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흔들었던 경우. 반대로 유시민 전 장관이 국회의원이 되고서 당선자 선서식에 면바지를 입고 나타나 공직자들의 의복을 통한 보수성향에 경각심을 주었던 일. 마지막으로는 나꼼수의 수트빨 날리는 멤버들 모습. 진보는 멋을 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역행하는 그들의 세련된 패션 코드는 대중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

 

이것을 어떤 진영 논리나 계급 논리 혹은 권력 관계에서의 억압 구도를 잠시 접어둔다면, 나는 한국사회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슷한 시기에 수입되면서 겪은 문화코드가 고스란히 드레스코드에도 묻어난다고 보는 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나라는 한복을 벗은 후로 유럽이나 미국처럼 어떤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의 긴 양장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서양의 문화에 어떤 합의로 녹아든 '상황에 맞는 의복 문화' 경험이 없다. 그저 어떤 공적 자리에서 입어야 하는 의무적 드레스 코드가 있을 뿐.(결혼식, 장례식, 기업 킥오프미팅, 논문 발표장, 관료 사회의 특정 회의 등)

 

서양의 드레스코드는 오랜 전통(모더니즘, 혹은 그 이전)과 파격(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시간차가 큰 만큼 그 안에서 상당한 규칙과 규칙의 파괴를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상대를 배려한다. 규칙은 규칙대로 존중하고 파격은 파격대로 허용된다. 물론 정장 안에서도 문화전쟁은 있다. (일례로 미국 백인은 흑인들의 화려한 색을 천박하게 여기고 유럽(영국) 백인은 미국 백인들의 펑퍼짐한 수트를 양키들의 옷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드레스코드에 관해 윤리와 눈치와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양장에 대한 교양이 없다. 사실 그럴 여유?랄까 그럴 필요? 엄밀히 말해 그런 게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미국을 사랑하면서도 미국을 증오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서양의 잘나가는 세련된 패션코드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대중들의 문화 소비 영역에서는 강한 거부감 혹은 겉치레가 심한 된장남, 된장녀로 매도하게 되는 습속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기업이나 국가가 의복에 어떤 규정, 가이드를 제시하는 순간 권력의 억압으로 여기고 '내맘대로' 캐주얼 복장이 진보와 자유의 코드로 읽힌다. (근데 그 자유함이 때론 어색하고 뽀대도 안 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중이, 대중의 확신이 서양의 의복문화를 흡수하면서 그다지 주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모던, 포스트모던의 공존 속에서 그저 옷은 치마의 길이나 넥타이의 유무, 검은색은 점잖고 빨간색을 화려하고.... 이런 기초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된다고 본다. 게다가 타인의 드레스코드에 대해 쉽게 삿대질을 하는 강한 윤리의식, 진영논리, 권력논리마저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근데 그 기저에 한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양장 문화에 대한 사색, 주체적 수용, 여유로운 수용이 없지 않았나 싶다.

 

정답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기업이 캐주얼 정장의 가이드를 제시할 때 지나치게 억압의 기제로 받아들이거나 결혼식, 장례식에 양장의 정석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험담하거나 타인이 빨간 바지를 입었다고 SNS에서 '이건 좀 아니자나요'라고 공유하거나, 진보진영에서 수트빨 날리는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마저 한심하게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 물론 그런 생각 자체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양장을 대하는 한국인인 나의 스탠스, 나의 철학 같은 걸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흥미로운 기사를 읽으며 들었던 잡생각은 이 정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09/h2013091221253186330.htm

2013/09/15 23:28 2013/09/15 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