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홍상수와 더불어 김기덕을 싫어했다. 홍상수 감독은 자주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불호를 말할 필요는 없겠고. 김기덕은 '나쁜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가 싫어졌다. 특히 '나쁜 남자'는 예술 영화가 아니라 그냥 나쁜 영화라고 결론내린 기독교계의 입장과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 공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까지도 페미니스트를 위시한 여성들이 김기덕 영화를 불편해하고 비난하는 입장에 대해 동의하고 이해한다.)
그를 다시 보게된 계기를 만든 작품은 <수취인 불명>. 양동근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사실 김기덕 영화인지를 모르고 봤다. 알고 나서는 김기덕이란 감독에 대한 내 평가가 너무 편향되지 않았나 돌아봤다. 이후로 장동건이 출연한 <해안선>과 하정우가 출연한 <시간>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계기는 <영화는 영화다>를 제작하면서 생긴 제자감독과 배급사와의 불화와 그로인한 은둔 생활의 시작, 그리고 <아리랑>으로 복귀한 일련의 과정에서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간 '김기덕'을 깊이 파고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의 영화를 모두 다시 보았다. 오늘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학력이 없으며 15살때부터 공단에서 기계공 생활 등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하류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청소년기는 전형적인 밑바닥 인생이었고 아마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결국 그 이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아는 김기덕의 모습으로, 촉망받는 감독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잔인하고 가학적이고 성적인 묘사가 많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의 영화 스타일이 헐리우드 CSI로 대변되는 그것 - 폭력, 섹스의 묘사 - 보다 건강하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미국 드라마 속의 폭력과 섹스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선사하기 위한 묘사인 경우가 많지만 김기덕에게 그것은 그의 하류인생 속에서 겪은 삶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부모의 폭력, 길거리를 전전하며 겪는 가학적 일상, 주변에서 겪는 매춘, 그것에 연루된 여성들, 다시 그들과 엮인 남성들. 그 잔인하고 힘겨운 일상 가운데 김기덕은, 그 안에서도 휴머니즘을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지 않았나 하는 변명, 혹은 소극적 옹호를 하고 싶다.
내가 그의 영화에 애정을 갖는 또다른 이유는 그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 공감과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악인조차 그 악행의 이유가 있고 정의에 불타는 선인에게도 빈틈이 있다. 그 인물들은 환경(하류인생) 속에서 추락을 거듭하지만 그 안에서도 때때로 (그의 표현대로) '연꽃'을 피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김기덕이 유하보다 더 나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유하 감독의 인물들은 원래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배신자이고 원래부터 악한이다. 그런 인물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물론 감독의 동정조차 받을 수 없다.)
이번 영화, 피에타도 청계천의 공단들이 철거되는 한국적 상황 그 가운데에서 내몰리는 서민들이 부채를 갚지 못해 고통받는 자본주의적 구조 안의 지옥같은 삶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 일상은 실제로 김기덕이 경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내 편안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돌아보면서, 내가 그런 힘든 삶을 살지 않았기에 김기덕 영화의 극단적인 스타일에 대해 관객으로서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싶다. 또한 그의 다소 극단적인 스타일은 선정성을 도구화하는 헐리우드식 영화나 미드의 스타일과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 예전에도 한번 썼듯이 - 궁극적으로는 나는 그가 최우수영화상을 수상하는 것보다 고단했던 그의 생의 남은 시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