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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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는 단연... 아이와의 약속이다. 요즘 성하는 하루종일 쫑알쫑알 말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다. 집에 있으면 내가 전담하므로 간단히는 물줘..에서 시작하여 배고파 밥줘, 뭐 사줘, 이거(치킨, 돈까스) 시켜줘, 실내놀이터 가자, 어디 놀러가자, 장난감 사줘, 과자 사줘 등등 입 안에 무슨 순서대로 원하는 걸 말하는 스피커가 달린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해댄다.

문제는 내가 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인데, 아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대충 대답할 때도 있고 밤늦게 뭘 먹고 싶다고 우기면 쉽게 내일 사준다고 달랜다거나 어딜 놀러가고 싶다고 하면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가자고 둘러댄다. 이건 마치 어정쩡하게 친한 지인을 만났을 때 간단한 안부를 묻고는 헤어지는 인사로 '담에 밥...이나 먹자고'라고 하는 말과 유사한 '중요도'를 같는 표현이다.

더 큰 '문제는' 나는 그 시간을 무마하는 용도로 사용한 표현들을 아이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자주 놀라곤 하는데, 아빠 지난 번에 내가 원하는 날에 OO에 놀러간다고 했지? 라고 말하거나 어제는 늦어서 내일 아침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준다고 했지? 라고 말할 때... 솔직히 나는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내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권력구도에서 흔히 '약자'라고 표현되는 이들을 대하는 어떤 바로미터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착하지 않다는 걸 경험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선악의 개념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 포장하지 않을 뿐이다. 그 원초적 욕구, 욕망에 대해 옳고 그름의 당위를 입히는 건 어른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노동자, 농민, 장애인이 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약한 것이지 약한 것이 선한 것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동물의 왕국이건 문명화된 사회집단이건 간에 약자의 목소리는 간과되거나 축소되거나 무마되기 싶다. 약자의 도덕성에 결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에 고려되어야 할 무엇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고과권자는 자신이 개별 직원들에게 어떤 등급을 줬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하위 고과를 받은 직원만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저새끼가 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는지를 두고 수십개의 시나리오를 세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적대적일 때 권력자는 왜 이들이 이렇게 사납고 거친 모습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 지점이 내가 불편한 어떤 지점인 것 같다. 사실상 나도 나름대로 너무도 바쁘고 주말에는 좀 늘어져 있고 싶은데, 아이에게는 또 나름대로 좋은 아빠라고 불리고 싶다. 결국 나는 그런 타협점을 찾기 위해 그 시간들을 무마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하고도 부드러운 방식, 다음에 OO할게, 내일은 꼭...이라는 말을 쓴다. 다음에는 좋은 고과를 줄게, 다음엔 꼭 내가 밥을 사지, 다음엔 국민이 원하는 방식의 구조를 세우겠어. 뭐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다 일관된 본질을 갖는다는 말이다.

솔직히 요즘 나는, 오늘을 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세월호로 대변되는 재난 앞에서 뭐 대단한 걸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되도록 즉시 하고, 내가 (그저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어떤 류의 loss는 신경쓰지 않고 산다. 그 분투에는 소박하게도 내 아이와의 아주 사소한 약속도 '관리'하는 것이 포함된다. 협력업체의 나이어린 사원 대리와의 업무 분장도 그렇다. 내가 잘못한 건 사과하고 그들이 잘해준 건 반드시 메일로 감사한다. 오늘을 살지 않으면 그들은 내일 회사를 떠나고 나는 다시 그의 선의를 잊은 채 일상에 매몰될 게 분명하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스티븐 코비의 유명한 시간관리의 법칙이 있다. 나는 자주 되묻는다. 내가 과연 소중한 게 무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내가 승진이 명백한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했던 과정에 들인 시간을 쏟을 수는 있지만 아이가 지나치듯 말했던 사소한 선물을 기억해서 어느 저녁에 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빠른 승진이 빠른 퇴사를 부를 수도 있겠고 노년의 어느날 내 아이가 그 사소한 선물을 기억해주며 고맙다고 말할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뭐, 모를 일이다.

중요한 건, 중요하지 않다고 굳게 믿는 어떤 관계가 살면서 정말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6살난 아이를 통해 매일매일 경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내겐 꽤 불편하다.
2014/06/30 23:07 2014/06/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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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좀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의 위너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듯 하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통해 일반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를 발굴하는 값진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정작 재능을 단기간에 고갈시키는 일종의 포이즌이라고도 볼 수 있다.

1등은 재능도 확인받고 상금도 받고 게다가 엔터테인먼트사와 계약까지 체결하는 일타삼피를 누리는 게 아니다. 몇개월동안 이뤄지는 살떨리는 경합 속에서 개별 참가자는 자기의 능력의 최고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 그 집중력 때문에 대중은 주목하고 프로그램은 매주 뜨겁게 달아오른다. 마치 불꽃놀이를 한번에 터뜨리듯 그 순간은 다들 눈을 떼지 못하지만 그 이후에는 느슨한 속도나 작은 섬광에는 반응하기가 쉽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오디션 프로그램은 숨은 재능인을 찾아내서 그의 전부를 몇개월 안에 전소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 그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소비한 대중은 대부분 그 이후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본 참가자들에게 관심을 갖기가 어려워진다. 특히나 1위나 상위 참가자들은 마치 중견 연예인을 보듯 그의 모든 쇼맨십을 이미 다 겪은 듯한 착각마저 갖는다. 대중문화 속 연예인들은 재능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어필하는 신선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한의 경쟁이 사라진 공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능을 전소해버린 무대에서 오디션 위너들이 경험해야하는 이른 피로감, 무력감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관성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가운데에는 사실상 상당히 악의적인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령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기어 이빨들이 척척 물려돌아가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망가뜨린다. 이렇듯 우린, 재능이 있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타 없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있다. 문득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2014/06/30 23:05 2014/06/3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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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하나의 떠다니는 생각 중 하나는 최근 김보성과 비락식혜로 불거진 '의리'에 대한 것이다.

대체로 나와 정치적 성향을 공유하는 많은 이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이른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인맥 사회구조에 질색했다. 지식인, 지성인이라면 혈연, 학연과 같은 조직논리와는 구별되게 언제든 정화를 위한 내부 고발도 결단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치부됐다. (실상 삶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지만)

내 기억으로 '의리'가 전면에 부상하고 그것이 어색하지 않게 된 시점은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김어준의 의리(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것으로 비롯된 나꼼수의 진영정체성이었다.(난 사실상 나꼼수가 박원순시장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 시점부터 곽노현 교육감 이슈 등에서 논리 이면에 숨겨진 더 큰 음모론을 까발리고 진영 사이에서 의리를 지켜내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고 나아가 진보진영에서도 권장되는 조직, 공동체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상황.

곽노현 교육감의 사건 때만 해도 그의 편을 드는 지점에 찬반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김보성의 의리 광고를 정서적으로 불편함 없이 즐긴다.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지점에서도 풀어야 할 매듭이 나는 조금 있다고 본다. 이것도 언제가 썰을... (이렇게 대충 막 써대는 건, 하루 지나면 막 다 까먹어서. 나중에 기억 안 날까봐서다.ㅠㅠ)


#2.
주변에 몸도 마음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자제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갈등도 사실 많이 커졌다. 특히 페북에서는 웃는 일, 노는 일, 먹는 일 등 그 순간순간 일어난 일들이 타임라인으로 정리된 내 페이지와 댓글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사회참여나 운동, 정치적 입장, 이슈에 대해서는 양립가능하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지만...

지인이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들이 속한 공간에서 나는 흔쾌히 농담을 하고 즐거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곁에 있다면 난 가만히 웃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위로삼아 말할 수 있겠지만... 기쁜 일보다는 슬프고 우울한 일이 많은 요즘. 이대로 지속된다면 아마도 조만간 난 페북을 접을 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든 영억이 잿빛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일로 그런 가운데 있거나 계속 어둠 속을 헤매는 분들이 참 많다. 구원은 언제일까. 그 날이 속히 오면 나는 더 행복하게 sns를 할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간절한 오후.


#3.
우리에게 어른세대는 '힘'을 가진 세대였다. 그래서 우리세대는 힘을 통한 군대식 상명하복에 피로감을 느낀다. 반면 우리세대는 합리적 논쟁, 즉 '말'을 가진 세대였다. 아마도 우리 아래세대는 불행히도 우리의 말에 피로감을 느끼게 될 것같다.

2014/06/25 21:13 2014/06/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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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말과 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말이나 글과 그 담화자의 인격과의 연관성에 대한 생각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예전보다는 말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습관을 버리려고 애쓴다. 말과 사람 사이의 연관성이 그리 견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극단적인 예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씨는 아버지에게 유년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란 사람은 교회 목사였다. 은수연씨가 집에서 도망쳤다가 아버지에게 잡히면 길거리에서건 경찰서에서건 그 목사 아버지는 말로 주변 사람들을 구워삶았고 세상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은수연씨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곤 했다고 한다.

2.
그 반대로 말로 자주 오해를 사게 만들고 말만 하면 그 의도나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도 그런 사람이었다. 김어준 총수는 유시민 전장관이 말 때문에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종종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인이나 연예인들(이 두 그룹은 구분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의 한 두 마디에 그 사람의 사활을 거는 감정적 평가들, 그 극단적 비난에 회의적이다.

그런 단회적인 말 몇마디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의 퍼즐을 맞추려는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했든지 그 사람을 10년, 20년 주시하고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지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는지를 지켜보다보면 그 사람이 정작 마음에 두고 있는 바를 자연히 알게 된다. 말은 자주 사람을 속인다.

3.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 사람을 10년씩 지켜볼 아량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실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내 관심에 엮여있는 사람들이 내 가치관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지, 반대하는지, 혹은 배신의 언사를 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기간에 한 인간의 숨은 속내를 찾기 위해 드러난 말로 퍼즐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그렇다고 말과 글이 그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푹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지향점마저 잃어버리는 모습이랄까. 대체로 우리는 누군가 말을 하고 글을 쓰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가정하는 편이 옳다. 물론 말과 인격은 자주 어긋나고 결을 맞추려다 실패할 확률이 항상 존재하겠지만...

4.
나는 말과 글을 한 인격을 단기간에 평가하는 도구나 잣대로 활용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말과 글을 통해 그 사람의 균열점, 숨은 속내를 훔쳐볼 수 있는 하나의 보조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적극 찬성한다. 말과 말 사이에 끼어드는 실수들, 헛나온 말, 행간에 독립적인 어색한 문장들. 그 속에서 정작 담화자의 민낯을 추정해볼 수 있다.

멀쩡하던 설교자가 어떤 사건을 접하고는 이전과는 공유할 수 없는 어떤 주장을 뜬금없이 할 때,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질타에 오해라고 손사레를 지을 때. 우리는 그의 안정된 일상 속 잘 정돈된 담화에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어떤 속내를 경험하게 된다. 그 말(실수)가 말하는 사람의 전부를 규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균열지점을 통해 적어도 그 인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생긴다. 전에 했던 말과 글, 그의 정치, 종교적 스탠스를 새롭게 해석해 볼 필요성 말이다.

...그런 생각, 잠시 끄적여본다. (졸려서, 쓰다가 급마무리.)


2014. 5. 30. 페북 담벼락.

2014/05/31 09:27 2014/05/3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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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분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고로 썼다가 지울 수도 있다.
최근 나는 성하 사진을 전혀 올리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환청을 듣는다.
'니 아이는 살아 있잖아.'

내 아이 사진에 웃다가 그 아이 사진을 페북에
공유하려는 순간 환청을 듣는다.
게다가 내 아이도 잃을 것 같은 두려움도 엄습한다.
그래 우리 성하는 살아있지...
이 복잡한 감정에 대해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담아두고 있기도 쉽지가 않았다.
내 감정을 타인에게 어떤 의도나 어떤 행동의 제약을
주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페북에서 아이 사진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미혼이지만 아이를 갖고 싶은 싱글.
결혼을 했지만 노력해도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는
부부들, 나아가 아이를 잃은 부모들.
아이가 건강하지 않은 부모들.
글을 올릴 때마다 불특정 다수의 부모들이 내 앞에
서있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냥.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이기적으로라도 누리고 싶었고 공유하고 싶었다.
그냥... 이제까지는 그게 됐다.
최근들어 나는 일상적으로 대화하듯 페북의 글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아이의 사진에서는 어떤 증상이라고 할만한
수준의 환청과 현기증이 난다.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럴 때는 그냥 아이 얼굴을 보며 웃어주기만 했다.

그냥.
요즘은 내가 믿는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냥 이쯤에서 세상의 종말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한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상식이 최선인 세상.
평등하게 건강하고 평등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상.
그게 그렇게 간절한 것이었나. 그런 생각.
이런 글. 안 쓰고 싶었는데 비가 오길래. 미안합니다. 다들.
(2014년 5월 12일 페북 글)
2014/05/13 00:19 2014/05/13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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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부로 저는 이단개신교에서 노랑리본교로 개종합니다. 노랑나비교라고도 합니다. 노랑리본교는 절대 세월호 참사관련해서 전도지를 배포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신의 어떤 의도가 있다고 섣불리 설교하지 않으며 또한 무턱대고 침묵을 권하거나 성도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도 않습니다. 좌빨 종북 친노 전교조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노랑리본교는 공중파 언론을 증오하며 뉴스타파 국민티비, 그리고 이상호 기자를 후원합니다.

2.
'노랑리본교' 개종 시에는 십일조를 내야 정교인이 되지는 않지만, 반드시 시민언론 후원을 권합니다. 노랑리본교는 농담반, 진담반이지만 이건 진심입니다. 차일피일 미루던 일, 대단한 금액을 후원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교계 후원을 줄이고 시민언론 후원을 늘립니다. (물론, 이 변화는 어느 한쪽이 미워서가 아니라 어느 한쪽에 더 힘을 실어줘야 할 절실한 당위를 이번에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호 기자의 고발뉴스 http://www.goba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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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클럽 http://www.ohmynews.com/NWS_Web/tenman/index.aspx?CMPT_CD=PT005

2014/04/28 22:56 2014/04/2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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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독백일 뿐이다.

1.
그저 뭔가에 몰두했다. 그게 독서일수도 있겠고 보고서일 수도 있겠다. 하다못해 영화 몇 편을 잠들 때까지 보기도 했다. 마음이 조금 가라 앉으면 잠시 세월호 관련 기사들과 페북의 글들을 한꺼번에 읽고 금방 나와버렸다.

2.
페북에서 실종된 아이들을 자기 자녀들에게 투사하여 글을 쓰는 이들을 보면서도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도 당신들 자녀들은 살아 있잖아. 그건 상상일 뿐이잖아. 내가 실종된 아이들의 부모라면 나는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내 아이가 "아빠 갔다올게"하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을 거란 상상을 하며 슬퍼했다.

3.
말하는 걸 좋아하고 글쓰는 걸 좋아하지만 일주일째 페북을 들어가면 '얼음'이 되어버린다. 솔직히 감정의 과잉이 불편한 내 소심한 성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의 기운, 고통의 기운 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 곳에서 너무도 유려하게 표현력을 발휘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되지 않는 상태. 내 사적 감정의 투사로 인해 서로 다른 슬픔의 표현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비판을 해댈 수 있겠다 싶었다. 그저 발을 뺄 뿐.

4.
며칠이 지나고 일상적인 글을 담벼락에 올리는 페친들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너무나 행복해보이는 사진, 맛있는 음식, 자기 아이가 예쁘다며 올리는 사진들을 상당수의 페친들이 불편해했고 뒷담화가 한창이었다. 나는 공감했다. 하지만 나도 일상을 살고 있다. 지인들을 만나서 농담을 하기도 하고 출근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업무에 몰두했다. 퇴근해서는 아이와 놀아주고 음식을 만들어서 가족과 함께 먹었다.

5.
이 모든 일상들이 실시간으로 공개된다면 아마 내 주변에서도 나에 대한 뒷담화를 했을 것이다. 보이는 곳에서 하냐, 숨어서 하냐, 혹은 내가 그것을 공개하냐의 정도에 따라 이 슬픈 현실에서 나의 인간됨은 다르게 평가된다. 나는 이게 유교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 조문객들이 구슬프게 울며 절을 하다가 일어나서는 금새 표정이 바뀌는. SNS에서만 과잉 슬픔의 표현이 난무하고 내 주변은 그렇지 않은 불균형.

6.
내 감정을 직면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누구라도 툭 건드리거나 앉아서 세월호 뉴스를 계속 보고 있다간 금새 허물어질 것만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 게다가 나는 그것이 값싼 눈물임을 알고 있다. 내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면서도 타자 속에 머물지 못하는 내 이기심을 돌아보며 나는 오히려 건조하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7.
실종자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내 감정 내 입장, 내 안에 일어나고 있는 슬픔이나 무기력감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저 투사일 뿐, 내 슬픔, 내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고 타인의 현실인데 그것을 내가 느낀다는 사실에 멈춰서게 될 수 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뿐이었다.

8.
따지고 보면 독립 언론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됐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고 더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됐다. 매체를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 참 중요하단 생각 다시금 하게됐다. 여전히 나는 희생자들의 부모와 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마치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 주변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서적으로 지지해주고 주변에 있으면 그 곁에서 편이 되어 주는 것이란 생각.

9.
머리 속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지만 사실 나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그래서 일에 매달리거나 일상에 몰입하려했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볼 여유는 없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잊지는 않아야 한다. 특히, 사건의 디테일들은 묻어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따져보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곱씹어볼 것이다. 그저 지금은 내가 그 상태가 아닐 뿐이다.


 

2014/04/24 23:49 2014/04/24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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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나는 자주 내가 꽤나 자기성찰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 부류 중 하나다.
그런데 한국에 매료되어 한국을 깊이 경험한 젊은 영국 기자의 이 책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엔 그 깊이에 놀라기만 했지만 천천히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나를 자극하는 어떤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깨달았다. 인지하지 못하던 한국인 특유의 행동양식,사고방식. 이건 마치 심리검사지를 통해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경험과 유사했다. 밑줄을 그은 본문이 하도 많아 고민하다가 정리를 해두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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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의 파벌 중 일각에서는 중국에 도움을 청했다. 동학농민군을 막을 만한 힘이 조선 조정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청나라에서 보낸 3천 명의 군인을 동원해 동학농민군의 북상을 막고 휴전을 위한 협상을 벌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중국의 개입은 추후 조선을 병합하고자 영향력을 넓혀가던 일본을 자극하고 말았다. 일본은 그 앙갚음으로 8천명 규모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고위 관료들을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전부 교체했다. 중국과 일본이 조선을 놓고 벌이던 힘겨루기는 1984년에서 1985년까지 진행된 1차 청일전쟁의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4월 19일 학생들은 고려대학교에서 경무대까지 행진했다. 군인들의 발포로 2백 명 가량이 죽었다. 그로 인해 시위대의 행렬은 더욱 불어나 마침내 4월 25일에는 경찰과 군이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쳐 5년 후 그 곳에서 사망했다.

한국에서 극좌로 간주되곤 하는 정치집단은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극우의 요소로 평가되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다. 친미적이고 반복적인 성향 외에도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협력했던 이들에게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기에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에 치안을 담당했던 친일 협력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같은 일을 시키고 예전과 비슷한 직급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1965년, 박정희가 일본으로부터 소프트론 및 차관 형식으로 미화 8백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심지어 훗날 대통령이 된 당시 20대 초반의 이명박 또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3개월간 투옥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미적 성향과 친일 잔재에 맞서고자, 한국의 좌파 세력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사상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좌파는 '민족'과 같은 단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했고 심지어 한 좌파 성향의 신문은 그 이름이 '민족일보'였다. 오늘날의 주요 좌파 언론인 한겨레는 '하나의 민족', 혹은 '하나의 인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우파는 '국가'라는 단어를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반도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같은 민족을 배제한 한국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유교는 교육을 통한 성공과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남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한 최소한의 기준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언제나 달성할 수 없는 목표처럼 보인다.

한국에서는 직업을 구할 때, 이력서에 여권 사진을 붙이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이런 관행 때문에 특히 여성 지원자를 뽑는 경우, 입사 서류 심사는 일종의 미인 대회로 둔갑해버리기도 한다. 성형수술이 하도 성행하다보니, 마치 출전한 선수 절반이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본인이 내키지 않아도 수술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의 삶을 스트레스로 가득 채운다. 한국의 자살률이 높은 원인이 바로 이 과잉 경쟁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녀가 더 행복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이다.

한국어에는 '촌스럽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뭔가가 구식이고 조잡해보일 때 쓰는 말이다. 머리 모양, 옷, 가수, 심지어 사람의 이름마저 촌스럽다는 지적을 받아 조롱거리나 놀림감이 될 수 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시골에 속한 것들은 서울의 새것과 반대돠는 것, 뒤처지고 낡은 것, 갈아치워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교외 지역과 '오래된 것'이 완벽히 동일한 것처럼 취급된다는 것은, 도시의 화려한 생활방식과 도시화가 사람들에게 끼친 전면적인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홍익대학교 근처의 '곱창전골'처럼 1960, 70년대의 낡은 음악을 틀어주고는 술집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복고풍마저 결국은 문화적 엘리트들이 즐기는 첨단 유행이라는 것이다.

정치영역에서도 한국인들은 비슷한 변덕을 부리는데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경우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곤 한다. 추문에 휩싸인 정치인은 잠시 경멸을 당하지만, 운이 좋으면 대중이 곧 그 사건과 그의 비행을 잊어버리게 되고, 훗날 그는 복귀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런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으로 '냄비근성'이란 말이 있다. 이는 냄비처럼 빨리 끓어올랐다 금새 식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일에 금방 분노하고 또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은 막판 인터넷 여론몰이로 승리를 거뒀지만 그의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임기 초반에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자 노무현의 반대 세력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근거로 삼아, 노무현이 총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탄핵하고자 했다. 이에 밪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대통령의 지지도는 극적으로 다시올라갔다. 하지만 이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다시 떨어졌다. 여기서 핵심은 노무현이 좋은 대통령이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대중이 그만큼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노무현을 좋게 봤다가, 나쁘게 봤다가, 좋게 봤다가, 다시 나쁘게 봤다. 그리고 2012년 노무현은 박정희 다음으로 한국에서 두번째로 인기 있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회사를 가족처럼 여기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와 같은 진정한 평생직장의 개념이 성립된 바 없다. 이 직장 저 직장 오가는 서구권 노동자와 달리 한국 노동자에게는 고용주에 대한 충성이 요구됐지만, 노동자들은 50대가 되면 은퇴할 것을 강요받는 처지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충성심은 제대로 된 보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정부는 항상 포장마차와 길거리 음식점들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올림픽, 월드컵, G20 정상회담 등 국제적인 행사가 열릴 때는 그 노력을 두 배로 늘려 숫제 이들을 없애버리겠다는 식으로 달려든다. 관료들은 이런 대중 음식점들이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후진적인 것처럼 보여서 나쁜 인상을 줄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다. 그들은 대신 정제된, 따라서 지루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모습, 즉 경복궁과 김치와 전통 춤 같은 걸로 꽉 채운 모습을 보여주면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매력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가까운 중국을 놓고 봤을 때, 솔직히 규모로만 따지면 한국의 어떤 유물도 자금성 하나를 압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같은 것을 억누르는 대신 다른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만의 무언가를 홍보한다면 한국을 좀더 잘 알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들어 재벌들은 영화판에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삼성과 대우는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뗐는데...재벌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것은 벤처 투자자들로 그들은 소극적 투자를 하면서 가급적 간섭하지 않고 재능있는 감독들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던 찰나, 투자자들은 완벽한 시기를 잡아 혜택을 누린 것이다. 경제위기가 해소되면서 인터넷 중심의 벤처 열풍이 불었고 정부가 좀더 작은 규모의 기업들을 육성하고자 지원에 나서면서 한국 경제에는 이지머니가 홍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 발라드 가수들은 대부분 기술적으로 완전무결하게 훈련받은 이들인데, 사람들의 눈물샘을 제대로 자극할 수 있도록 과도한 감정이 실린 소몰이 창법을 구사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앞서 언급한 두 정신과 의사에 따르면 '정'은 개인의 가슴이나 머리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정은 '우리'에 대한 강한 의식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의사는 또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단순한 복수형 대명사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집단화된 '나'에 가깝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나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의 누군가 라고 표현한다. '내 엄마'는 '우리 엄마'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정이 사랑이나 우정과 다를 게 뭐냐고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맞는 지적이지만, 사랑이나 우정과 달리 정은 지역 단위나 조직, 혹은 사회적 차원과 같이 큰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같은 고향 사람, 같은 부대 병사, 같은 학교 동문들은 정에 기반한 실질적 상호 부조 및 책임을 느낄 수 있다. 대학 동문회나 교회처럼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집단은 가시적인 영향력을 확장해나갈 수도 있다.

한국에서 사업은 곧 개인적인 일이다. 장차 함께 일할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종교가 어떻게 되세요?"나 "왜 결혼 안 하셨어요"같은 질문을 던져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단기적인 주고받기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관계 형성에 능해야 사업에 성공한다. 그러므로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서구인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개인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이제 막 같이 일하게 된 사이에서 상대방이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다소 껄끄러운 일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호응하는 사람에게는 장기적인 사업상의 이익뿐 아니라 진솔한 우정이라는 보상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오랫동안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해온 미국 이민 4세대 피터 언더우드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일단 믿고 봐야" 하는 일이다.

명예란 이토록 중요한 것이므로 거래 상대방인 한국 기업이나 그곳 직원을 동료들 앞에서 비판할 일이 있으면 대단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단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마지막 극약처방으로 공개적인 비판을 개진해야 하는 것이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내뱉는 거친 말은 어떠한 종류의 관계에든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SKY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한국의 사회적 사다리 중 가장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다. 한국 엘리트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사람들은 수월하게 정치계, 재계에 진출하기도 하고, 자신이 비판하는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 보유 여부와 무관하게 언론 지면에 오르내리는 공공 지식인의 역할도 맡을 수 있다. 그 결과 교수라는 직함은 액면가보다 휠씬 값어치가 높아지며, 정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수천만 원 이상의 뇌물이 오간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2014/04/16 23:09 2014/04/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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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성하와 잘때 나는 자주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1, 2년 사이에 성하는 혼자 자게 될 것 같다.
4살의 아이와 5살의 아이는 다르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새끼 강아지가 성견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이가 자라는 걸 지켜보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
그 놀라움과 비례하여 아빠인 나의 존재감은 작아진다.
내가 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참 작다는 생각.
도리어 아이에게 나의 부정적인 습속을 강요하면서도
그것을 아빠의 의무, 도리라고 여길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생각.

나에게서 났지만 나와 다르고
조만간 독립된 '성인'이 될 이 아이를 그저 어떤 정해진
시간동안 맡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는
어떤 시기를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 미련도 남는다.

조그만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턱 올려놓고 쌔근거리는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지켜보다 잠드는기억,
좋을 땐 표정을 숨기지 않고 팔짝팔짝 뛰며 달려오는 모습.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이제는 정색을 하고 스스로 하겠다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또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많이 아쉽고 그립기까지 하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어떤 것이 소중하게 기억될까.
부모는 대체로 아이에게 선행하는 어떤 지식이나 물질을
물려주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아이가 커서 기억될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내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유년시절 살갑게 사랑받았다는 기억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혼자 던져진 채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아빠의 손길을 통해 정서적으로 사랑받았음을 떠올리면서
누군가에게도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를 내면 좋겠다.

세상이 자주 아이를 홀대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온기를
잃지 않고 '아빠, 나 씩씩하지?' 하며 웃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뭐, 굳이 아빠에게 말하지는 않아도 좋다.

오늘도 성하가 잠이 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고
두 볼을 손으로 감싸주고 작은 다리를 올릴 수 있게 허벅지를 내준다.
내일의 이 아이는 오늘의 그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2014/04/13 13:01 2014/04/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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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어떤 진영에 서거나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만큼
낡아보이는 것도 없을 거다.
시대는 변했고 트렌드도 변했고 과거는 잊혀졌고
그것을 기억하고 되내이는 것만큼 소심해보이는 일도 없어졌다.
당신들 참 쿨해.

관능미의 여왕으로 불리는 모니카 벨루치가 나와서
비참하게 강간을 당했던 영화 <돌이킬 수 없는>.
끝까지 영화관에서 자리를 뜨지 않기가 참 힘들었지만
영화속 남자 조연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남친인 주인공은 길길이 뛰며
강간범을 잡으려고 안달이 나서 돌아다니는데
그녀를 마음 속으로 사랑하던 그의 친구는
상당히 소심하게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른다.
정작 강간범 앞에서 남친은 팔이 부러진 채로 제압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친구는 적정한 거리에서 적당한 둔기를 찾아내고는
단번에 주저함이나 떨림 없이 강간범의 머리를 박살낸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없이 잊고 사는 게 아냐.
쿨한 세상에 쿨하지 않은 단 한 사람으로 남는다해도.
언젠가, 영화처럼...
적정한 거리에서 적정한 도구들이 구비된다면,
언젠가 나도 우아하게 부숴주겠어.
마치 평범한 퇴근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2014/04/13 12:59 2014/04/13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