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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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인 혁오의 와리가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중.
...
성하: 아빠 이거 기타소리야?
나: 응.
성하: 기타 치면서 노래부르는거야?
나: 그렇지... 왜?
성하: 멋있다... (허공을 쳐다보다가 눈감는다)
...
그렇게 우리 둘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음악이야기를 나누었다.
2015/08/03 00:05 2015/08/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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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불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나는 연인과 부부, 가족의 문제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어느 정도는 확신하고 있다. 살면서 그런 경우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순수한 피해자가 아닌 경우도 있고 반대로 가해자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물론 이건 가정이다) 아내와 내가 갈라설 경우 대략 10년간의 관계에서 아내가 서운했던 큰 몇 장면들을 추려서 공론화시킨다면 나는 금새 개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될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대략 명확한 선악구도가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명확한 선이 어떤 각도에서는 반전 지점으로 돌변하는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일례로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안 좋은 기억들이 대체로 지배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내게 특별히 악행을 저지른 구석은 없다. 오히려 긴 세월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안락한 환경을 조성해 준 좋은 부모다.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 뿐.)

사실 우리가 자신의 사적 영역을 허물면서 받아들이는 일련의 관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잦다. 사적 영역이 허물어지면 서로 간에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무례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다. 그게 '스킨십'이 됐건 '과한 농담'이 됐건 '무리한 책임을 지우는 상황'이 됐건 간에 말이다. (물론 폭행, 사기, 강간 등 극단적 범죄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관계에서 자주 권력구도가 발생하고 그럴 경우 '을'이 피해를 입는 일이 생긴다. 게다가 이런 관계가 지속될 경우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요구되고 공론화가 필요하고 사회 구성원의 윤리적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쉽게 타자들의 연인, 부부, 가족처럼 깊은 관계에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여 단정짓고 누군가에게 객관적인 사실 이상의 혐의를 씌우고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자신처럼 비판하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마저 한통속으로 몰아가는 반응들은, 적어도 내게는 꽤나 무례하고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대체로 약자의 편에 서는 용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공론의 장에 가해자로 추정되는 이가 서 있더라도 갑을 관계 외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당사자 간의 깊은 영역에 존재하는 진위 문제를 따져볼 생각의 여유가 필요하다. 언제나, 역사 속에서 매번 단정적인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영이나 권력구도를 초월한 영역이기도 했다.
...최근의 몇몇 사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15/07/21 21:02 2015/07/2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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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edm 찬양 관련 ivf 사과문은 적절했다고 본다.
해당 논란에 대해서는 열린 토론을 유도하되 절차상의
미흡함과 편견 섞인 기성 교회의 우려에 대한 사과,
무엇보다 행사를 준비한 이를 위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
어느덧 시간이 훌러 비판의 날을 세우던 대학생 신분에서 
중년 어디 즈음으로 정체성이 변해가는 나를 본다.
솔직히 내게는 그닥 본이 될 만한 교회의 어른을 찾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내가 본이 되겠다고 설쳐보기도 했다.
.
대부분의 꼰대들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침묵을 지켰다.
그 와중에 몇몇은 공감대 없이 설치다가 조용히 사라져갔다.
.
내 세대의 신앙의 선배들이 할 일은 
(한때 우리가 그랬듯이)
비판의식 충만한 신앙을 가진 청년들에게
계속 그 길을 탐구하고 달려갈 수 있는 공적인 장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기성세대가 '다름'을 '옳지않음'이라고 쉽게 정죄할 때
미안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자고 
이해를 구하고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설령 앙쪽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중재라 하더라도
논쟁이 부정적으로 과열될 때 적극적으로 
모두가 고려된 해명을 통해 담론의 장을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역할은 그런 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신속한 개입을 통한 중재는 하되 학생 자발성에는
간섭하지 않고 기독문화의 지향점을 지켜보는 태도가 적절하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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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나의 결핍에서 오는 긍정적 평가임에 분명하다.
내가 겪은 신앙의 어른들은 청년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급이 맞지 않는다며 우회적인 훈계를 일삼고 
논란이 증폭되면 설명없이 활동과 조직을 아예 없애는 방식으로
대처해왔다. 그런 생태계에서는 냉소와 몰이해만을 키워갈 뿐이었다.
.
난 edm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밥 만세-_-)
하지만 다른 장르와 동일하게 edm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ccm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궁서체로 쓰긴 싫었는데...어쩌다 여기까지 왔다.
그대들의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때까지 이쁘게 봐 주시라.
뿌.잉.뿌.잉.
2015/07/19 20:45 2015/07/1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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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 가운데 타인의 공감을 얻기가 가장 힘든 감정이다. 분노는 지극히 주관적인, 각자만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개인적인 역사의 기반 아래 만들어지는 감정이다. 분노는 그 자체로 내 개인의 역사가 응축된 '감정적 지문'이다. 그리하여 분노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 슬립이 가능하다."
- <당신이 화내는 진짜 이유> 중에서
2015/07/19 20:44 2015/07/1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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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보고서를 빨리 쓰는 편이다. 
초안은 대략 하루, 이틀 정도면 쓴다.
대체로 주변을 보면 5일 정도를 쓴다.
물론 이 보고서는 임원급 보고서를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내 보고서의 퀄리티가 높다고 생각한다.
(허세 쩐다.ㅋㅋㅋㅋ)
.
2.
보고서에서 중요한 지점,
대체로 보고 대상이 높을수록 
보고서의 결론은 최종보고자인 팀장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 내용과 향후 계획은 실무를
집행해야 하는 실무자가 가지고 있다. 
보고서에서 소요되는 5일은 
팀장이 기대하는 결론에 대한 실무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간의 반복이다.
시켜서 해보니 궁합이 안 맞다. 잘 안될거 같다.
혹은 설득을 위한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정당한 반대 질문에 대한 변명, 대안이 궁색하다.
결국 실무자가 가진 데이터로 대충 초안을 만들고는
이런 저런 이유로 본론에 의해 서론과 결론이 
자주 흔들리고 그것을 조율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
3.
솔직히 보고서를 빨리 쓰지만 
작성 전까지 내가 소요하는 시간은 하루 이틀이 더 든다.
결국 초안 완료까지 최장 4일이 걸리니 
빨리 쓰는 게 아니다. 그저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
짧으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최초 보고서 작성 지시를 받은 후
나는 하루이틀을 멍 때린다. 어떤 때는 무려 칼퇴근한다.
물론 그동안 그 보고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다.
머리 속에 3-4페이지 본문이 대략 배치가 될 정도로
그리고 팀장의 결론과 실무적인 방향이 조화를 찾을 때까지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지 혹은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내러티브가 설득력을 갖는지 머리 속에서 본문을 가지고
충분히 '논다'. 
내러티브 내러티브 하는데, 사실 보고서도
그 내러티브의 구조가 서야 키보드를 친다. 
머리 속에서 완성된 보고서를 풀어내니까
당연히 초안이 빨리 나온다.
보고서에서 중요한 건 보고 시점이다.
자주 하는 말로 피보고자를 불안하게 만들면 안된다.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면 항상 초안 일정을 알려야 하고
되도록 그 시점 이전에 보고서를 들이밀어야 한다.
그 시점에 나는 반드시 멍 때리는 시간을 포함시킨다...
.
4.
이 허세 넘치는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멍 때리는 시간. 
그 시간이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머리 속에 여유를 주면 버퍼링에 효율이 높아져
그 이슈에 대해 다분히 여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상상도 더 많이하고 관조적으로 몇 걸음 뒤에서 
실무자가 아닌 팀장이나 경영진의 입장을 따져보고
반대로 협력업체의 일을 덜어주는 방향이나 
결국 실무자인 내가 더 뺑이치지 않을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멍 때림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다.
실제로 주변의 혹자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탱자탱자 놀다가 '데코' 쩌는 보고서를 쓰는 놈.
보고서에 손이 빠르면 더 열심히 더 늦게까지 하면
더 높은 퀄리티의 보고서가 나올텐데 
바쁜 사무실에서 여유를 가지면서 허세부리는 놈.
직장이 지옥은 아니지만 나름 냉정한 구석이 있다보니
대놓고 나에게 직설을 날리는 이들도 있다. 
빨리 끝냈으면 더 열심히 하란말이야! 더더...
.
5.
솔직히 그 편견을 깨 줄 생각은 없다.
누가 내게 멍 때리는 시간을 뺏는다면 
나는 회사가 덜 효율적인 결정을 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슬프게도 멍을 때려보지 못한 사람에게
멍 때림의 효용성을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멍 때림은, 
하나의 신앙이자 종교적 신비함이 그안에 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성도들도 있다.
맨인블랙 보지 않았나.
인간인 줄 알았는데 외계인인 능력자들이 많지...
나는 그 영화가 <멍 때림 신도>을 향한 오마쥬였다고 들었다.
얼마전 서울시에서 있었던 멍때리는 행사 하지 않았나.
거기에서 회자된 아이가 강북지방 대표간사라는 의혹도 있다.
주변에 멍 때리는 사람을 돌아보라. 그리고 당신도 우릴 찾아오라.^^
2015/06/30 00:00 2015/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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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 외모도 좋고 글도 잘쓰고 생각도 깊고... 
인용할 부분이 워낙 많아서 힘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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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2008년 ‘희망’과 ‘변화’를 표방하며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물리치고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재선 때는 오바마 캠프에서 희망이나 변화 같은 공약을 포기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를 인류의 구원자로 내세웠던 민주당 캠프는 2012년에 다른 전략을 썼다. 오바마가 적어도 상대 후보인 밋 롬니보다는 낫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기본 메시지였다.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인 것은 맞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사실을 운운하는 것이 한국 정치문화에 도움이 되는가? ‘독재자의 딸’을 수없이 외쳤지만 민주당은 결국 선거에서 패배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정희를 반대하는 국민보다지지하는 국민이 더 많다는 사실올 순순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명예훼손이 '불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나 독재 정권에서 유독 심각한 문제로 취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권력자를 비판하려는 기자나 논평가를 주저하게 만드는 현상을 ‘위축 효과'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명예훼손 위반으로 최대 7년 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으니 재갈물리기 효과가상당하다. 가끔 필자 주변의 한국인들에게 위축 효과 이야기를 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한국은 영국이나 미국과 다릅니다. 한국은 정치문화가 성숙하지 못해서 엄격한 법이 없으면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필자는 한국은 다르다며 자국올 평하하고 서방 국가를 특별 취급하는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 거기에는 서구인들은 정치적으로 성숙한 어른이고 한국인들은 어린이라는 발상이 깔려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논리일지 모르지만 자국민을 모욕한 발언임은 물론 사대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최근 가장 심각한 사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드러난 해운사들과 규제감독기관 간의 유착이었다. 하지만 이뿐이 아니다. 외신기자로 일할 때 은행 고위 간부들과 금융위원회 둥 규제 당국 간의 회의에 여러 번 참석했는데 서로 너무나 친해서 매번 놀랐다. 이들은 엄연히 피감 대상과 감독기관 관계다. 말하자면 밀렵꾼과 파수꾼의 관계와 같다. 필자가 아는 금융위원회 간부 한 명은 금융위원회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줌직한 국영 은행의 요직을 꿰쳤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사실 <이코노미스트>의 경우 광고 수업이 전체 수업의 3분의 1에 불과해 특정 광고주가 회사전체에 실질적인 영향올 미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광고 빼버리겠다는 으름장은 먹히지 않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언론사 수익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높아 대기업이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 홍보팀은 약점올 가진 한국 기자들을 함부로 다루는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외신기자들에게도 무례를 저지르고만 것이다. 다른 대기업 홍보 담당자는 “내가 요구만 하면 우리 할머니 팔순 잔치 기사도 써줄걸"이라며 특정 신문에 막강한 피워를 휘두를 수 있다고 으스댔다. 또다른 신문에는 돈을 써서 회사에 부정적인 온라인 기사를내린 적이 있다며 한국 신문사들이 재정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라고 귀띔했다.

노무현 정부 후반부터 한국 언론의 자유는 절대적 기준으로 보나 상대적 기준으로 보나 꾸준히 후퇴해왔다. 2006년 국경없는기자회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언론의 자유는 7.75점으로 세계 31위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언론자유도 지수가 24.48점으로 치솟아 세계 50위를 기록했다. 2014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돼 25.66점을 기록하며 세계 57위를 차지했고 급기야 2015년에는 26.55점으로 세계 60위를 기록해 아이티, 파푸아뉴기니, 말라위보다 언론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부는 늘 숫자와 세계 순위에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언론자유도지수 순위등은 예외다. 2011년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언론 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하향 조정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유명 대학 교수들이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발언하며 유명인사가 될 수 있다. 책을 출간하고 기자들의 전화를 받을 준비가 된 교수라면 얼마든지 특정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올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에 널리 퍼진 교육열을 반영한다 한국에서는 하버드 박사연 똑똑할 뿐 아니라 오류가 없고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한국에서는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이냐는 것이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정치인의 덕목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연 필자는 똑똑한 것뿐 아니라 남융 위한 삶을 살아왔는지 공직에 헌신하려는 의지가 있는지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한번은 김어준이 성차별주의자로 해석될 법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내가 아는 좌파성향 친구들 절반정도가 우리 영웅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SNS에 토로하며 큰 실망강올 표했다. 하지만 애초에 김어준올 구세주, 총수로 받들지 않았더라면 실망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김어준은 호감가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명박을 싫어한다. 하지만 단지 나와 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김어준 또는 그 누구라도 완벽하길 기대하지는 마라.
“어마어마한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해법은 무엇일까요" 토크콘서트 마지막에 있는 질의응답 시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 사람들은 시사평론가들이 해결책까지 제시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들이 마치 모세라도 되는듯이 말이다. 정작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실속 있는 해답을 내놓지 않으연서 자신감 넘치고 강한 어조로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은 보통 정치인이거나 종교기업가다. 질문에 잘만 대응하연 크게 성공활 수도 있고 영향력도 확장할 수 있다 .이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길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잘 간파하고 이를 이용한다. 그런데 강한 어조로 호소하는 답변이 정말 좋은 걸까? 때로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오히려 현명하고 솔직한 대답 아닐까.

한국은 아직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에 대한 열망이 강한 나라다. 많은 사람이 부자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주사위는 이미 재벌에 유리하게 던져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랍도 남들보다 앞서고 싶어한다. 솔직히 그들도 아이들이 명문대에 가길 바라고 좋은 것을 사고 싶어한다. 계급의식이랄 것도 없다. 예를 들어 내 고향인 영국 북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동계급의 긍지 말이다. 2014년 퓨 리서치 센터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78퍼센트가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70퍼센트), 영국(65퍼센트)을 포함한 10대 ‘선진국’보다 높은 수치다. 엄밀히 말해 한국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닌데도 대다수 국민은 ‘자유 시장’이라는 말에 매료되는 것 같다. 따라서 매우 안타깝게도 빈곤충에 대한 자비로움을 강조해봤자 효과가 없고 빈부격차로 인한 계급 갈둥 이야기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한국좌파는 외신기자와 인터뷰할 때 통계나 경제이론을 인용하거나 차분하고 합리적인 어조로 전경련 같은 조직이 내세우는 주장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지 못한다. 대신 삼성이 엄청난부를 축적하는데 아직도 빈곤충이 많은 것은 부당하며 정부는 소수 특권층인 최상위 1퍼센트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사실에 기반한 논리적 주장을 듣고 싶어하는 윌스트리트 저널이나 파이낸셜타임즈 기자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의사소통 방식이다. 반면 한국 우파는 어떻게 포장해야 영미권에 어필할 수 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 대기업 독주를 침해하는 모든 것은 ‘시장 원리에 반하는’ 것으로 매도하고 ‘사회주의’라는 구호가 미국인에게는 공산주의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것 또한 잘 알고 활용한다. 유창한 영어로 경제이론도 이것저것 언급한다. 똑똑하고 박식한 기자라면 그런 주장이 말도 안 되며 한국 대기업의 독주가 시장원리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지만 모든 기자가 똑똑하고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새정치연합은 과거 386 세대와 운동권 지식인충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젊은 유권자나 보통 사람들의 고충올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인권변호사와 언론인 등을 포함한 운동가 중심 정당의 또다른 문제는 경영 역량을 갖춘 사람이 드물다는 점이다. 운동가나 인권변호사 둥이 당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직력이 뛰어난 검중된 인물들도 필요하다.

2011 년과 2012년의 안철수만큼 유명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연단에 올라 ‘대선에 출마하겠습니다'라는 말 대신 ‘각지역 공동체에서 함께 모여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아이디어나 제안을 나누며 즐기자'고 했다면 실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올 것이다. 적어도 각 공동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 유권자 스스로 정책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것이고 연령대나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협력했올 것이다. 어쩌면 한국 정치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운동이 태동했을지도 모른다.

왜 한국의 불평등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질까? ... 좌파는 대기업의 끝없는 탐욕이 원인이라고 지적할 테고 우파는 현대자동차의 '귀족’ 노동자 둥을 예로 들며 상대적으로 좋은 여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 여건에 처한 동료 노동자에게 폐를 끼치는 ‘이분화’된 노동 시스템을 문제로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차적인 문제들이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한국 노동계에 닥친 재난은 한국이 중국 등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한미FTA를 반대하던 그 많ejs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다른 FTA 에 대해서는 조용한 것을 보면 정말 놀랍다. 미국과 연관된 것은 나쁘고 (일본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가 엮이면 신경 쓸 것 없다는 것이 한국 진보의 사고방식이다.

가장 보수 성향의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정부가 복지 예산을 확대했다가는 그리스꼴이 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 정부가 연간복지 예산을 9퍼센트까지 확대했지만 한국은 아직도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전체 GDP에서 복지 지출이 10퍼센트 미만인 두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이 구미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닮고 싶어하는 나라, 미국의 복지 지출은 19퍼센트 수준이다. 그리스는 그보다 높은 24퍼센트로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고, 프랑스의 복지 지출은 33퍼센트에 달해 솔직히 지나치게 관대한 편이다.

독일도 최근 몇 년간 실업수당 규모를 축소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실업수당보다 후하다. 복지병을 믿는 사람이라면 두둑한 실업수당이 보장된 독일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보다 일을 더 안 하려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독일의 실업률은 영국보다 낮다. 독일에서는 보통 사람이 양질의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 아닌가 싶다. 게다가 ‘게으른’ 영국에서 실업수당이 전체 사회복지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런데 셜문조사 결과 영국인들은 그 수치를 41퍼센트로 실제보다 훨씬 높게 추측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이 내세운 메시지는 이랬다. ‘가난하고 딱한 국민이여, 국민의 최상위 1퍼센트만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빈곤해진 이명박 정권 아래 끔찍한 시간을 보낸 여러분, 여러분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복지를 확대하겠습니다.’ 마치 사탕을 잃어버린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수사였다. 복지에 대한 궁극적 메시지는 ‘복지는 정부가 여러분에게 투자한 것입니다. 투.자를 통해 여러분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나중에 세금을 많이 낼 수 있을 만큼 성공해서 돌려주십시오‘라고 전달되어야 한다. 지위 상숭에 대한 열망이 강한 한국에서 특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먼저 페미니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특히 직장 내 여성의 지위 문제에 관해서는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111위)가 아랍에미리트(109위)나 바레인(112위) 수준과 비슷한 것으로 발표된 2013년 세계 경제포럽의 세계 성격차 보고서 내용올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여성이 심각하게 차별받고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여성 노동력 활용 비율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여성 차별문제는 공정성 변에서 따져야 할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 문제와도 직결된다.

우리는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사망 사건의 책임자, 백혈병으로 근로자가 사망한 수원 삼성반도체, 캄캄한 밤에 빙판길임에도 총알 배달을 요구해 배달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중국음식점 주인, 여학생을 뺑소니치고 도로에 방치해 내상으로 죽게 한 음주 운전자를 비난할 수 있고, 비난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나서서 제대로 규제해야 그와 같은 안타까운 인명사고를 최소화 할 수 있다. 역대 한국 정부는 하나같이 안보의 중요성은 외치면서 안전은 외면해왔다. 하지만 안전이야말로 정부 존립의 핵심이다.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존재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한국 정치계에서 동물 권리는 아직 주요 이슈 대접을 못 받지만 동물 권리에 대한 세대 간 인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예쁜 프릴 달린 코트를 업은 반려견 사진을 끊임없이 찍는 20대가 있는가 하면 모란시장 같은 곳에서 개를 때려죽이는 사랍도 있다. 개인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호기심에 두 번 정도 먹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잔인한 방식으로 식용 개가 도살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부터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따라서 좀더 인도적인 방식의 동물사육이나 도살을 추진히는 정치인이 있다면 최소한 젊은 동물애호가들은 감동하지 않을까. 
2015/06/19 22:58 2015/06/1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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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내와 육아, 가사분담을 고민하다가 어느덧 이 모든 문제가 이 나라의 가부장제로 거슬러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페미니즘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이가 크면서는 내 안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아이에게 한없이 투사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심리학을 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부모의 교육열기가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 입시를 넘어 석박사에 취업까지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면서 한국사회 전반에 경쟁구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 모든 문제가 엮여있고 한쪽만 봐서는 그 실타래가 풀리지 않거나 일개 부모 한두명, 문제아이 한두명의 미시 사건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심하게 잘난 남성들은 육아와 자녀교육 같은 하위 담론은 시시하다 여기거나 관심 자체가 없다.


#2.
이른바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에 국한된다는 생각, 혹은 남성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생각은...여전히 지지부진한 여성인권 측면에서는 일말 옳은 면이 없지 않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운동을 오히려 좁은 구석으로 내모는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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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여성주의가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가부장제에 갇힌 여성과 남성 모두이다. 페미니즘은 사실상 힘, 폭력, 권위의식, 규율, 경제성, 효율성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원시적 남성성으로부터 남성을 해방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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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와 소꼽장난을 하며 뒹구는 남성, 아빠, 아들, 권위의식으로 까라면 까야했던 분위기에서 다과나 차를 마시면서 맞담배를 피우며 느슨하고 창의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남자들의 회사 회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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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결단이라며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을 감수하던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벗어나 아이를 위해, 소외된 자를 위해 버려진 동물들을 위해, 어딘가에서 파괴되고 있는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보존하기 위해, '작은 것'을 잃으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항변할 수 있는 '남성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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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페미니즘은 엠마 왓슨이 말하는 ‪#‎HeForShe‬ 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을 넘어 남성이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공유해야 할 이론이자 운동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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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글을 읽다가 당시에는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을 끄적여봄.

15. 6. 13.
2015/06/13 23:17 2015/06/1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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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과서에는 없는 심리학적 방법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도둑질을 하는 아이에게 매번 1실링의 상을 준 것은 이론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그 이론은 훨씬 뒤에 나왔는데, 잘못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불충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도둑질을 하는 아이는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다. 그 아이는 상징적으로 사랑을 훔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동전이란 형태로 사랑의 표시를 보여주었다. 요점은 그 방법을 계속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간단치만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서머힐에서 그 아이에게 주어진 자유가 그 아이를 치유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을까? 다른 친구들에게 자기가 좋은 녀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그 아이는 얼마나 갈망했을까?"

(A.S. 닐,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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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3 23:14 2015/06/13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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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건, 사람을 판단하는 확고한 기준이자 내 청년시절 열정을 쏟아부은 하나의 방향성이기도 했다. 그 근성은 내 세포 속 어딘가에 남아서 여전히 내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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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욕심, 글의 완성도에 대한 칩착, 글쟁이에 대한 엄밀한 잣대.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지 않은 글을 좋다, 맘에 들지 않는 글을 맘에 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거절하기 어려운 서평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고 긍정적인 평을 기대했던 가까운 사람들의 글에 무반응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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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어떤 기준을 가지고 단호한 자세를 유지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럴 처지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그랬다. 초대받은 식탁에서 친구의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맛이 어때 라고 웃으며 물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이 떨리는, 그러나 절대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최고라고, 하얀 거짓말을 결코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아이의 그 무엇이 나에게 있었다고... 이해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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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과 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솔직히 나는 예전보다 더 글을 칭찬할만한 사람을 손 꼽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예전보다 더 뛰어난 '촉'과 '썰'을 가진 사람들이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글'판'에서는 엄지를 추켜세울만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너무나도 당위적인 이야기, 정보를 조합하여 정리한 지식봇, 과거의 영광에 기댄 허세썰, 니가 틀려서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진영이 분명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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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내가 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런 글을 며칠째 끄적이고 있는 걸 보면 내 코가 석자이면서도 누군가의 글에 쉽게 덕담을 해대지 못하는 내 피노키오의 코와 같은 난감함을 혼자 삭히지 못하는 이유에서일 수도 있겠다. 엄밀히 말하자면 글은 그 사람과 공동운명체인 것 같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답지 않을 때 그 글도 빛이 바래는 것을 경험한다. 물론 그렇기에 글에 목숨을 걸고 주둥이를 놀렸던 나는 참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지나쳤고,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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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글에 대해, 사람에 대해. 냄새가 섞인 글을 끄적이고 싶었을 뿐.

2015. 6. 7.
2015/06/13 23:11 2015/06/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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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을 시켰다. 배달 그릇에 담겨왔다. 어떤집은 일회용 그릇에 준다. 장사가 잘되서 하루에 백그릇씩만 팔면 삼개월이면 만개의 일회용 그릇이 버려진다. 그렇지 않고 그릇에 담아주는 식당은 일일이 그릇 회수를 하러 한번더 배달을 와야한다. 집집마다 배달을 선호하는 이유는 집에서 음식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가사노동에서 해결되기 위해 음식을 시키는 이들 중 상당수가 그릇과 쓰레기를 함께 담아 내어놓는다.

배달 오토바이는 그릇 수거시에는 쓰레기를 담는 수준의 큰 통을 싣고 다닌다. 한번은 배달하시는 분과 오토바이가 함께 넘어졌는데(다행히 다치시진 않았지만) 도로 한복판에 집집마다 버린 음식물이 뒹굴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지켜봤지만 누구하나 그곳을 치울 마음은 없었다. 내가 왜. 따지고보면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고 내 집도 아니고 공공 도로가 더러워졌는데. 다들 합리적인 생각을 하며 자기 걸음을 재촉한다.

이 배달음식으로 발생하는 난관을 해결할 방법은 물론 있다. 내가 가족들과 식당에 가는 것이다. 혹은 배달 음식을 가져오면 집그릇에 옮겨담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릇은 내가 씻어서 반납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최소한 기름과 시간써가며 두번 걸음하는 번거로움도 일회용용기의 배출도 막을 수 있다! 근데. 생각해보면 굳이 내가 왜. 니들 그거 하라고 내가 돈 주는거잖아. 내 하루도 충분히 힘들어 돈내고 아무 생각없이 서비스받겠다는 거지. 배달음식이 그러라고 장사하는 거 아닌가. 이렇듯 나도너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거겠지. 그러는동안 아파트 쓰레기수거장에 쌓인 물건들이 하루에도 집한채 수준이다.

간혹 공부 좀 하는 사람들이 토론을 하거나 글을 통해 인간은 진보하는가..에 대한 논쟁. 나아가 회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는 희망 같은 걸 이야기한다. 예전같으면 아마 나도 숟가락 하나를 더 얹으며 테트리스 퍼즐 맞추듯 논리적인 생각들을 현실에 맞게 말하고 싶어했을 것 같은데. 솔직히 요즘 나는 짜장면 배달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에 회의감이 찾아온다. 밥한끼 먹는 것만 유심히 봐도 우리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다. 인간은 진보하는가. 오늘도 너와 내가 함께 보는 바이다.
2015/05/02 23:54 2015/05/02 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