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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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는 단연... 아이와의 약속이다. 요즘 성하는 하루종일 쫑알쫑알 말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다. 집에 있으면 내가 전담하므로 간단히는 물줘..에서 시작하여 배고파 밥줘, 뭐 사줘, 이거(치킨, 돈까스) 시켜줘, 실내놀이터 가자, 어디 놀러가자, 장난감 사줘, 과자 사줘 등등 입 안에 무슨 순서대로 원하는 걸 말하는 스피커가 달린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해댄다.

문제는 내가 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인데, 아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대충 대답할 때도 있고 밤늦게 뭘 먹고 싶다고 우기면 쉽게 내일 사준다고 달랜다거나 어딜 놀러가고 싶다고 하면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가자고 둘러댄다. 이건 마치 어정쩡하게 친한 지인을 만났을 때 간단한 안부를 묻고는 헤어지는 인사로 '담에 밥...이나 먹자고'라고 하는 말과 유사한 '중요도'를 같는 표현이다.

더 큰 '문제는' 나는 그 시간을 무마하는 용도로 사용한 표현들을 아이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자주 놀라곤 하는데, 아빠 지난 번에 내가 원하는 날에 OO에 놀러간다고 했지? 라고 말하거나 어제는 늦어서 내일 아침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준다고 했지? 라고 말할 때... 솔직히 나는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내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권력구도에서 흔히 '약자'라고 표현되는 이들을 대하는 어떤 바로미터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착하지 않다는 걸 경험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선악의 개념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 포장하지 않을 뿐이다. 그 원초적 욕구, 욕망에 대해 옳고 그름의 당위를 입히는 건 어른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노동자, 농민, 장애인이 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약한 것이지 약한 것이 선한 것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동물의 왕국이건 문명화된 사회집단이건 간에 약자의 목소리는 간과되거나 축소되거나 무마되기 싶다. 약자의 도덕성에 결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에 고려되어야 할 무엇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고과권자는 자신이 개별 직원들에게 어떤 등급을 줬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하위 고과를 받은 직원만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저새끼가 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는지를 두고 수십개의 시나리오를 세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적대적일 때 권력자는 왜 이들이 이렇게 사납고 거친 모습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 지점이 내가 불편한 어떤 지점인 것 같다. 사실상 나도 나름대로 너무도 바쁘고 주말에는 좀 늘어져 있고 싶은데, 아이에게는 또 나름대로 좋은 아빠라고 불리고 싶다. 결국 나는 그런 타협점을 찾기 위해 그 시간들을 무마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하고도 부드러운 방식, 다음에 OO할게, 내일은 꼭...이라는 말을 쓴다. 다음에는 좋은 고과를 줄게, 다음엔 꼭 내가 밥을 사지, 다음엔 국민이 원하는 방식의 구조를 세우겠어. 뭐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다 일관된 본질을 갖는다는 말이다.

솔직히 요즘 나는, 오늘을 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세월호로 대변되는 재난 앞에서 뭐 대단한 걸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되도록 즉시 하고, 내가 (그저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어떤 류의 loss는 신경쓰지 않고 산다. 그 분투에는 소박하게도 내 아이와의 아주 사소한 약속도 '관리'하는 것이 포함된다. 협력업체의 나이어린 사원 대리와의 업무 분장도 그렇다. 내가 잘못한 건 사과하고 그들이 잘해준 건 반드시 메일로 감사한다. 오늘을 살지 않으면 그들은 내일 회사를 떠나고 나는 다시 그의 선의를 잊은 채 일상에 매몰될 게 분명하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스티븐 코비의 유명한 시간관리의 법칙이 있다. 나는 자주 되묻는다. 내가 과연 소중한 게 무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내가 승진이 명백한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했던 과정에 들인 시간을 쏟을 수는 있지만 아이가 지나치듯 말했던 사소한 선물을 기억해서 어느 저녁에 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빠른 승진이 빠른 퇴사를 부를 수도 있겠고 노년의 어느날 내 아이가 그 사소한 선물을 기억해주며 고맙다고 말할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뭐, 모를 일이다.

중요한 건, 중요하지 않다고 굳게 믿는 어떤 관계가 살면서 정말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6살난 아이를 통해 매일매일 경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내겐 꽤 불편하다.
2014/06/30 23:07 2014/06/30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