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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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사회인이 되기까지 이십년, 혹은 삼십년동안을 우리는 교육받는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고 주변 친구들과 경쟁하고 놀이도 교제도 연애도 미룬 채 좋은 제품으로 사회에 출시되기 위해 분투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동일하게 내 아이가 사회에 나가기까지 전심으로 아이를 양육한다. 이 양육이라는 것은 '자기계발'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쳐지지는 않는지, 발육상태와 IQ, EQ, 조기교육에 글로벌시대의 인재가 되기 위해 해외여행, 어학연수까지. 한번 쳐지면 2등 시민, 3등 사회인, 꼴찌 인생이 되는 것처럼 다들 달리고달리고...달린다.

2. 
사회는 기본적으로 불규칙적이다. 의도된 반칙과 예기치 않은 재난들이 한 사회를 쓸고 다닌다.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불합리한 이유로 그 재난이 가중되거나 극복되기도 한다. 원치 않았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얻기도 하고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자폐나 ADHD,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열심히 일했지만 파산하거나 해고되거나 타국에 가서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사회적 불규칙성에 의해 모두가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는 기대와 달리 소수자, 약자가 생겨난다. 반대로 정당하게, 때로는 불합리하게 강자와 메이저 계급 또한 생긴다.

3.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가 정작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이삼십년 동안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나의, 내 자식의 역량 강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를 '폐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함께 공생하며 서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한다. 사회생활을 위한 라이센스가 있다면 그건 '자기계발'이 아닌 '공동체 속의 공생' 노하우를 숙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장애를 얻게 되었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졌을 때 사회는 나에게 장애를 가지고 사는 법을 교육시켜줘야 하고 내 이웃들이 나를 잘 대할 수 있는 에티튜드와 사회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를 다른 친구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어린이집에서 퇴출시키기 보다는(최근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 아이를 공동체에서 없애기 보다는 그의 문제를 경험하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미 자라면서 그런 소수자, 약자를 폐기하는 방식에 익숙한 아이들은 성장하면 자연히 괴물이 되기 마련이다. 요즘 애들 문제라지만 그 아이들을 만든 사회는 그 부모와 부모 세대의 세계관(교육) 결과인 셈이다.

4.
우리 주변에도 사회의 불규칙성은 편재하다. 신체 및 정신장애, 질병, 산재, 실직과 실업, 미취업, 싱글,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외모와 학력 컴플렉스, 미혼모, 입양, 성소수자, 버려진 반려동물들, 왕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약자와 소수자 문제에 일상적으로 제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강자와 권력자는 관심이 없고 좌파와 진보는 지식만 깊다. 정작 사회는 '그게 무슨 국가가 할 일이냐, 사회가 부담할 비용이냐, 빨갱이냐' 라는 망발들이 합리적이고도 시크한 생각인듯 구성원들을 계몽한다. 뒤쳐지기 싫으면 너나 잘해라.

5.
우리가 배워야 할 기본적 소양을 배우지 못한 이유로, 우리는 소수자, 약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몰라 당황하고 허우적 대다가 소수자를 더 내몰고 지옥으로 보내면서 어설픈 웃음을 짓는... 멍청한 인간들로 전락했다. 내가 그런 처지가 아니면 다행이고, 잘못해서 그렇게 되면 깊은 좌절과 우울감에서 그 누구도 건져내어 줄 수 없는 그런 자조사회가 되었다. 우울증과 강박증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인 셈이다.

6.
올해들어 조촐하게 진행하는 세미나를 '소수자와 공생하는 법'을 함께 배워가는 방향으로 잡았다. 시작은 '입양'이다. 물론 이 방향성에서 중요한 방점은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공생'이기도 하다. 이는 소수자만을 위한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와 강자를 비판하기 위한 교과서적인 네거티브 스타일도 아니다. 리얼 월드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한쪽을 배제, 폐기하거나 어느 한쪽을 악마취급해서는 온전한 사회구성원이 될 길은 소원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5/03/19 23:37 2015/03/19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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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의 글은 시대를 가르고 있다.
적어도 '내 세계'에선 그렇다.
.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다면 
구원은 (만약 구원이 존재한다면)
정희진 선생을 기점으로 시작되고 있는 듯 하다.
.
그녀는 항상 페미니즘을 여성만을 위한 학문이나 철학, 
세계관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그녀를 다른 페미니스트와 구별짓는 가장 단호한
지점이 이것인데 그녀는 사회 안에서의 다양성이라는 
화두, 평화학(항시 그녀는 자기분야를 그렇게 소개한다)
에 이르는 '문'으로 여성학을 치부한다.
.
정선생은 짧은 글에서조차 '진영논리'와 '거대사-미시사',
'당위'와 '윤리'를 허문다. 
그것이 그녀가 페미니스트로서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
2015/03/08 23:19 2015/03/0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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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복되는 겸손의 표현과
타인에게서 보이는 겸손의 인지...
그런 걸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편견이 있다.

물론 대놓고 자화자찬,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이
취미생활인 사람들 곁에 있는 것도 피곤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자주 내 관찰심리를 부추긴다.

편견이겠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는 겸손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어느 정도의 가면을 
쓰고는 살지만 굵직한 일들에 정직하게 
말하며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자주,
스스로 겸손을 표하고 타인의 겸손을 발견해내는
사람들은 겸손 자체에 무딘 사람보다 
어두운 이면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
그것이 여전히 자기 내면에 '이슈'라는 반증.
뭐, 그런 생각... 간간이 한다.
2015/02/24 07:51 2015/02/24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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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상당기간을 비판글을 썼다.
자음과 모음들을 모아 춤을 추게 만들었다.
실명으로, 텍스트를 쪼개가며 글쓰는 것,
쓰여진 글을 풀어서 되돌려 주는 것.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
더 강한 답글을 만나면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
2.
글에 레벨을 따지지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관'을 세우는 것보다) 쉬운 경우가 잦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바둑이나 장기를 옆에서 훈수 두듯이 당사자에게
안 보이는 것들이 옆에선 매직아이처럼 도드라진다.
.
3.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더이상 누군가에게 비판글을 쓰지 않게 됐다.
전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주에 한두명은 거론했던 과거에 비해
나는 참 글에 있어서는 평화주의자가 된 거 같다.
솔직히 요즘은,
싫어하는 누군가를 비판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누군가를 옹호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
.
4. 
사실 그 작업은 비판글을 쓰는 것처럼 쉽지 않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오해의 소지도 있고, 일정부분 정치적인 타협도 필요하다.
나아가 정작 당사자가 원치 않을 때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부정하는 일은 비교적 쉽게 
주변에서 받아들여지지만(적어도 '다름'을 인정받지만)
내가 누군가를 긍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의심의 눈초리와 부정적인 반응,
박쥐, 회색인간, 양다리 등등
냉정하게 말해 나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곤 한다.
.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를 긍정하는 일,
좋아하는 누군가를 옹호하는 것을 내 지향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내게 어떤 거룩한 소명이라거나 
큰 그림에서의 의무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 이유로 비판글을 쓰지 않게 되었기에
불구자의, 대안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마치 조폭이나 강력계 형사가 칼이나 피를 보면
몸이 굳어버려 더이상 '영업'을 못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
.
6.
물론, 
여전히 비판적인 문구들이 유희처럼 머리속을 맴돌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를 넘어선 현기증이 나를 누른다.
글쓰기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면 나는 살기 위해
평화주의자'연' 해야 한다. 그렇게 걸어가야 한다.
.
7.
김성근 감독.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내게도 그는 참 높아 보였다.
각설하고 내가 꽂힌 그의 고매한 리더십은 바로,
'내 선수 중에 버릴 사람은 한명도 없다. 모두 쓸모가 있다.'
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었다. 인간은 모두 쓸모가 있다.
사실 '쓸모'라는 것은 인격체에 부여된 최소한의 효용성이다.
내가 그에게서 취한 화두는,
나에게만 보이는(그런 류가 존재한다면)
그 효용성이라는 것을 힘.써. 드러내자는 거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내 글쓰기의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
...
요즘 그런 생각하고 산다. 
뭐... 그런 생각하느라 글은 별로 안 쓰고 산다.
2015/01/28 20:43 2015/01/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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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회에서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과 마주하면서 생기는 '설렘'에 관한 단상이다. 물론 요즘 불거진 사건이 화두를 던져줬지만 딱히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나아가 그 사건에 대한 윤리적, 법적 판단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그리고 일상적인 중년 아저씨의 관찰기다.

사실 젊은 여성과의 관계의 발전을 통해 설렘을 경험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롤리타 같은 소설에서부터 데미지나 연인 같은 영화. 그리고 매일 보게되는 포탈 뉴스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 하나둘은 일상적으로 듣게 된다. 흥미롭게도 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중년 남성의 대부분이, 참 평범한 사람들이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여자를 특별히 밝힌다거나 평소에 업소에 드나든다거나 질퍽한 농담을 일삼았던 이들이 아닌. 

대체로 포탈에서 기사화되는 사건에서 많은 여성들은 문제의 남성을 변태로 치부하거나 가정있는 남자의 파렴치한 일탈, 욕망으로 치부하는데, 나는 많은 경우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중년 남자의 복잡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변 다수의 여성들은 아빠 오빠 빼고 모든 남성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일정부분 그건 사실이다) 아무튼 앞서 말한 것을 '평범한 남자의 복잡한 욕구'라고 정의하자.

신정아가 쓴 <4001>을 보면서도 느꼈고 이번에 공개된 문제의 카톡 문자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사회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게 설렘을 느끼는 중년 남성의 욕구는 크게 3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물론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젊은 여성의 몸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남성은 마치 노년까지 사춘기시절의 성적 욕구를 가진다고 치부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많은 경우 주변 남성들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두번째는 '젊음'에 관한 것이다. 많은 중년, 나아가 노년의 남성들도 마음만은 젊은 줄 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십대 여성이 '아저씨'라고 부를 때, 사회에서 친구처럼 대하고픈 여성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많은 중년의 피터팬들은 심정적 지옥을 경험한다. 주고받은 대화나 문자에서 젊은 여성이 허울없이 대할 때, 서로 반말을 주고받거나 친구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중년 남성은 '설렌다' (사실 나는 이 '젊음'에 대한 욕망이 몸에 대한 욕망보다 크다에 내 오른팔을 건다.^^)

마지막은 '도와주고 싶은' 욕구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여성에 비해 남성은 존경받고 싶은 욕구, 도와주고 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 욕망이 높은 젊은 여성과 도와주고 싶은 중년 남성의 니즈가 통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소림사에 갓들어온 동자승, 키다리 아저씨, 사조수 관계 등 남성은 자신이 미숙한 어떤 존재를 다듬어가는 과정에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 분명 있다. 가르치면서 통제하려는 욕구, 그것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것 말이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모범생으로 커온 평범한 남성들의 일상적인 욕구의 자제, 직장생활에서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의 스트레스, 표현의 억압 등의 이슈들이 있다. 뭐, 그런 이야기는 김두식 교수님의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충분히 이야기된 바이니...

나는 이 '설렘'의 존재에 대해 양자가 인지하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인지하는 '설렘'은 자연스럽게 욕망의 본질에서 빗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지하게된 복잡한 욕망은 그 감정, 행동의 방향성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게 만들므로 그 설렘의 최종 책임을 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정서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삿대질하는 포탈 뉴스에서 경험하듯. 

뭐,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잠간 해봤다...-_-;;;

페북. 2015. 1. 21.
2015/01/21 23:00 2015/01/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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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세배 후에 세뱃돈을 챙긴 성하.
며느리는 수고했다고 큰아버지에게 용돈을 받고,
결국 아빠만 빈손으로 돌아옴. 
---
아빠: 성하야, 아빠 만원만 줘라. 
성하: 싫어. (..라고 하며 아빠 눈치를 살핌)
아빠: 아빠는 오늘 받은 돈도 없잖아.ㅠㅠ
성하: ...
(10초의 망설임 끝에 만원짜리를 던져줌.-_-++)
아빠: (던진 돈을 공중에서 붙잡으며) 고마워.
성하: 아빠는 오늘 한푼도 못 받았으니까.
아빠: 흙... 성하 쵝오!
(엄마 등장...ㅋㅋㅋ)
엄마: 성하야 엄마도 줘라. 
성하: (뭐지 이건...이라는 표정)
엄마: 성하는 맨날 아빠만 좋아하구! 엄만 안주구!
성하: 안돼. (햄릿의 고뇌가 느껴지는 순간...)
엄마: 줘라~~잉.
성하: ...
(다시 10초의 망설임 끝에...)
성하: (아빠에게) 아빠 만원 다시줘. 엄마땜에 안되겠어.
아빠: 야... -_-+++++
2015/01/02 11:33 2015/01/0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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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사실 난,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초반까지를 애늙은이처럼 지낸 이유로.
'토토가'에 나온 가수 대부분을 방송에서 본 적이 없다.
가수 뿐이겠나. 스포츠와 드라마, 음악프로그램 등.
TV 자체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 토토가 자체가 생경하긴 했다.

하지만 나왔던 가수들의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그 시절에 내가 지나쳤던 또래문화가 저랬구나, 저 문화가
내 20대를 지나쳤구나, 뭐 그런 생각에... 잠시 뭉클했다.

내게 90년대는 한없이 많은 책을 읽고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많은 지식들에 목말라하며
인터넷에서 내 지식을 무기삼아 논쟁을 벌이며 나름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ㅎㅎ 그게 뭐라고.

내 취향이 그 시절 대중의 기호와 다르다는 걸 입증하려는 듯,
영화와 음악도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가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게 정말 활활 타오르던 시기였고.^^

오랜만에 무도를 보면서.
당대를 살았으나 솔직히 공감할 수 없는 컨텐츠를 보면서도
내심 감정이 흔들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아마도 그런 이유이겠지. 

지금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몇년째 계속 늘어가는 
느낌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_-;;;
2015/01/02 11:32 2015/01/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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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알고리즘을 활용한 빅데이터 처리와 IT 의 팡범위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문 기술은 거의 없다. (방사선 전문의, 회계사, 중간 판리자, 그래픽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풍을 포함하는) 각양각색의 지식 노동자들은 패턴 인식 소프트웨어가 모든 전문 영역을 관통하기 시작한 불편한 상황을 이미 감지하고 있다. 

마이크 맥크레디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이용해 히트할 가능성이 있는 음악을 식별해 내는 스타트업 뮤직엑스레이 (Music Xray) 대표이다. 삼년도 지나지 않아 5000 명이 넘는 아티스트와 음원 계약을 맺은 이 회사는 곡의 구조를 이전에 녹음된 곡들과 비교하는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신곡이 음악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잠재력이 있는지 추정한다. 그들은 이미 무명 아티스트의 곡을 찾아내 그 성공을 정확하게 예상한 인상적인 실적올 자랑하고 있다. 

에파고긱스가 개발한 이와 유사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영화 대본을 분석해 홍행작을 예상한다. 이 프로그램이 홍행작을 식별히는 데 성공을 거둔 덕분에 업계에서는 알고리즘 평가 표준 요금 체계까지 구축되었다. 미래에는 이런 종류의 예측도구 덕에 값비싼 포커스 그룹조사를 수행하거나 시장조사 계획을 실행할 마케팅 에이전트를 비싸게 고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어차피 정확도 변에서도 알고리즘이 걸러 낸 빅데이터에 대한크라우드소싱의 성과에 비하면 무색할테니까 말이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갖가지 정보로 관심을 끄는 친근한 어조의 스포츠 뉴스 광고 문안을 창작해 내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빅텐네트워크 (Big Ten Network) 는 경기가 끝나고 나서 바로 몇 초 뒤에 게시할 문안 원본을 알고리즘을 사용해 작성한다. 카피라이터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셈이다."

- 제레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사회>
2015/01/02 11:31 2015/01/0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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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을 남자보다 하위의 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여성들은 큰 상처를 받는다.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이 그 전형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 남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거나 여자라고 중요한 직무는 맡기지 않고 잡일만 시키는 것도 그녀들의 자존감을 다치게 한다.

그러면서도 남자들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여성의 섬세함을 기대한다. 어차피 여자들이 나중에 다 정리해주겠지, 라는 식이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자기 엄마 같은 줄 안다.

또 이런 사회에서는 남자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까지 여성에게 요구한다. 물론 책임지기가 두려워 남자를 보살피는 역할에 만족하는 뒤틀린 여자들도 적지 않으니 남자만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이 여성에게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 미즈시마 히로코, <여자의 인간관계> 중
2015/01/02 11:29 2015/01/0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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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무언가를 쓰는 행위에 익숙한 나에게
올해처럼 글쓰기에 흥미가 떨어진 적도 없었다.
아무리 하소연을 하고 괴롭다 말해도
내심 쓰는 행위 '자체'가 내겐 나름 즐거움이었는데
올해는, 솔직히 꽤나 힘들었다.
.
내 속에 들어가보지 않고는 공감할 수 없을 듯한
주기적인 이 미묘한 감정의 늪이랄까.
연필에 무게추가 달린 듯
손가락에서 키보드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매일같이 떠오른 생각의 실타래를 좇아가다
단어 하나를 치고는 페북을 끄적이다가
이 책 저 책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단어 몇 개만 노트에 적고는 잠을 청했다.
.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죽 훑어보면서 
쓰고 싶던 글감들을 끄적인 메모들이 눈에 띄었다.
정말 쓰고 싶은데, 정말 지금은(그때는) 쓰고 싶지 않았던
그 모순적인 감정을 복기해냈다.
내년에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
당위적인 담론,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욕망, 지적 허세,
그런 것들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상관없이
글이라는 페르조나(만약 있다면) 이전에 존재하는
나만의 놀이로서의, 나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서의
본연의 쓰는 행위에서 다시금 편안함, 행복함이 얻어지면 좋겠다.
부디, 내년엔.^^
2015/01/02 11:28 2015/01/02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