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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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여성 저자들의 책과 글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여러차례 말했듯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된 후에도 한참동안을 여성 저자들의 글에 별로 호감을 갖질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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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가장 큰 변화는 남성들 특유의 '가오잡는' 문어체가 인터넷에서 사라지고 나아가 출판계에서도 구어체, 말글이 점차 대세를 이루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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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논문에서나 볼 법한 문어체 글쓰기 스타일이 불과 10-20년 전까지 출판시장 전반을 차지했었다. 글 꽤나 쓰던 사람들은 누구나 입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한자까지 병행하여 쓰면서 자신의 가오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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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서 가오를 살렸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글쓰기를 배웠고 그 흐름대로 룰을 따랐을 뿐이다. 지금은 흔한 강준만식 글쓰기도 당시에는 쉽게 읽히는 잡글이라며 기성 논객들은 그를 폄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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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게시판이 글로 범람하고 인터넷 소설이 등장하고 온라인 속 컨텐츠 포화 상태를 경험하면서, 어쩌다보니 오프라인에서조차 부지불식간에 구어체 문장들이 익숙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글쟁이의 판세는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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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내가 여성 저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건, 그 시절 문어체 문장의 룰이 가부장제의 수컷냄새를 내지않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종종 어설프게 사용되거나 혹은 그들이 원하는 담론의 형태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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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내에서도 훈계하는 식자층 교회 오빠들의 현란한 글쓰기와 그것을 소비하며 감탄하는 자매층이 있었고, 자매들의 글쓰기는 '가오의 룰'을 갖추지 못한 관계로 폄하되거나 담론과 논쟁의 영역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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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갑자기 2016년의 내 독서편력을 돌아보니 이전에 그렇게 좋아해서 '엄지척'하던 교회 오빠들의 글은 어느새 허세와 자화자찬, 고답적인 스탠스에서 오는 형식적인 측면의 불편함 같은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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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언니들'의 글은 자신의 경험이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서는 어느덧 무협지스러운 과장없이도 전지구적 거대담론에 이르는, 그러면서도 독해의 불편함 없는 구어체 문장의 매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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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 남성 저자들의 글에서는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정형화된 형식'이 자주 나를 불편하게 만들곤 하는데 몇 가지를 예를 들자면,
- 대가들의 이름과 책을 나열하거나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급을 과시하려는 시도
- 본론을 말하기 전에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서론을 과하게 부풀리는 허세  (일례로 삼국지에서 관우가 나타나기 전에 키는 몇 자에, 그가 쓰는 창이 일반인 키의 세 배인데 수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적인 그 용어와는 다르다는 기나긴 설명.
- 이 얘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 사람도 이 얘기를 하고 저 사람도 하더라는 설명으로 책의 절반을 소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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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은 책 한권을 털어내면, '이 얘기를 하나 전달하려고 이렇게 많은 말을 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점점 TED 15분짜리 아이디어를 400쪽에 담으려는 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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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이야기인 거 같나. 서점에 가서 여성이 쓴 책과 남성이 쓴 책을 대충 읽어보시라. 예전엔 난해하게 써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구어체로 여전히 수컷의 가오를 잡는 이들이 많아서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거다. 아마 몇몇 책들은 읽다보면 축지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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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룰이 바뀌었다. 고로, 여성 저자들의 약진을 앞으로도 기대하는 바다.
2016/06/12 15:19 2016/06/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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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MMPI,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고 
최근에 강헌 선생 덕분에 명리학을 '독학'(?)하면서 느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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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마치 서양의학과 한의학처럼 겉마음과 속마음으로 나눈다면 
MBTI와 MMPI는 겉마음을 다루는 외과적인 접근을 취하고
에니어그램과 명리학은 속마음을 다루는 내과적 접근을 취하는 것 같다.
일례로,
MBTI나 MMPI가 자신이 외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을 정리, 분류하여 
개별 인간의 성향을 규정한다면,
에니어그램과 명리학은 좀더 근본적인 영역의 마음의 동기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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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루는 이 도구들은 모두 특정 이론을 근거하여
임상적인 과정을 거쳐서 통용되어 왔는데
MBTI는 융의 심리적 유형론(1921)에서 정리된 개념에 토대를 두었고,
에니어그램은 고대 중동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지혜'에 근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점차 활성화되었다.
에니어그램은 머리, 가슴, 장형으로부터 9가지의 유형을 분류한다.
개인적으로는 에니어그램을 인간의 원초적 죄성(욕망)에 의한 분류체계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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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주팔자로 알려진 '명리'는 중국의 당나라 이후에 체계화된
동양의 음양오행을 가지고 인간을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오행은 세상의 질료인 나무, 불, 물, 쇠, 흙의 기운으로 분류되며
열개의 천간과 열두개의 지지를 조합하여 사람의 마음과 길흉화복을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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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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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의 흥미로운 지점은 오랜 임상에 의해 정립된 통계적 구조이다.
사실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리를 다루는 도구는 어떤 가설과 이론에 근거한다.
프로이트는 자아, 초자아, 이드라는 개념의 토대위에서,
칼 융은 융 나름의 심리 유형을 가지고, 
에니어그램은 머리, 가슴, 내장을 형상화하여 
오랜 임상의 축적을 통해 이론을 체계화한 것처럼,
명리 또한 그 오랜 시간의 임상의 무게를 통해 음양오행이라는 동양적 전제로
인간의 내적인 영역을 풀어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모든 각각의 개념들은 
보이지 않는 것(마음)을 형상화한 나름의 접근 방법인 셈이다. 

그런 연유로 입문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명리는 내 기대보다 훨씬 정교했다.
(사주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 많고 한자울렁증이 있어서 
사실 처음에는 명리 자체에 부정적이었지만.-_-)
널리 알려진 MBTI, MMPI 등은 20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로 
사실 임상적으로는 상당히 더딘 축에 속한다고 평가한다면,
명리학은 이런 서양의 도구들보다 임상적으로도 훨씬 강건하며
아직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나를 이해하는데 더 강력하게 도움을 주는 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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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건 우리가 익히 아는 '신살'에 혹하거나 
혹은 결혼 시기를 짐작하거나 복권을 사거나 
부적이나 작명을 통해 오행의 부족함을 채운다거나 
흉한 기운을 내보낸다는 접근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저 인간의 심리, 마음을 이해하는 여러 도구 중에 하나로
곰곰이 살펴보면 나에 대한 생각보다 많은 통찰들을 얻게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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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40일 가량 겉핥기를 해본 소감은 여기서 접고,
'만인의 위한 명리학'을 시도한, 강헌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2016/06/11 00:29 2016/06/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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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을 하고 몇 년이 지나서였던 것 같다. 댓글로 의견을 주고 받다가 논쟁이 벌어졌다. 좀 심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서로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한발씩 물러서고 대화를 마쳤다. 앙금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는 바로 직후에 자기 담벼락에 나를 공격했던 논조의 글을 올렸다. 그 이후 나는 그분과는 소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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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텍스트비판을 즐겼다. 진보 기독교권에서 처음 쓴 글도 반론글이고 게시판에서 논쟁도 자주했다. 타인의 글을 인용하여 재배치(해체)한 후, 그 글의 모순을 되돌려주는 작업은 흥미진진했다. 복학후부터 대학원 졸업시기까지. 나는 많은 책들, 타인의 필력 높은 글들을 읽고 지식과 논리를 쌓고, 타인과 논쟁하는 과정 자체를 즐겼다. 잃은 사람도 많았지만 관계가 깊어지는 경험도 했고 무엇보다 소소하게나마 내 글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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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는 글, 타인의 엉성한 텍스트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글을 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과정이 불필요했다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내 글과 내가 부유하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는 내가 비판하는 칼날이 어디를 향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결혼을 하고나서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더 탄탄하게 말할 수 있는 논지를 내뱉는데 주저함이 생겼다. 발화자와 발화내용의 부조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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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글과 말, 논리, 논지, 객관성, 탁월함. 이런 것들에 대한 회의감도 생겼다. 논리가 엉성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가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자주 겪었다. 내 글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글과 내 삶의 적절한 조화가 더 중요해졌다. 거품빼기랄까. 나는 더 어리버리하게 말하고 글을 허술하게 쓰는 것을 의도하는 경우가 생겼다. 의도적으로 방어적으로 논지를 숨기기보다는 내 인간적인 편견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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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모든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아내가 옆에서 자주 내 모습을 지적질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내 글과 내 삶의 간격을 줄이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자기를 변호하고 포장하고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보여준다. 나도 여전히 그렇다. 굳이 내 입으로 빈틈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건, 솔직히 마음이 내키는 일이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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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페북을 활용하는 의도는 다르겠지만. 나는 페북을 일종의 놀이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좋아요'를 대놓고 누르기를 유도하고, '싫어요'는 없는 플랫폼 자체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의도한 반면 부정의 피드백은 더 큰 반감을 유발한다고 느꼈다. 이런 구조에서는 자신의 글을 좋아해서 공유하기를 바라지, 누군가의 담벼락에 칼질의 대상으로 언급되기를 원하지는 않게 된다. 물론 그렇게 페북을 사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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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을 하면서 글을 잘 쓰는 이들을 자주 목격했고 나는 컨텐츠가 좋은 이들과 페친을 맺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타인의 글을 비판하기 위해 공유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나는 결국 그런 사람들과는 온라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언젠가 내 글도 그들의 논리에 맞게 칼질이 되어 그들의 담벼락에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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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나는 누군가 내 글을 공유하더라도 그와 나 사이에 공유된 페친에게만 그 글이 보이도록 설정해두었다. 페북은 내 페친이 내 글을 공유하면 그 친구의 친구들에게도 내 글을 읽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몇몇 글들은 설정 자체를 그렇게 묶어뒀다. 그와 별개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내 페친들도 내 글을 자신의 비판 논지를 펴기 위해 인용하지는 않았고 공유할 때에도 내게 의사를 물었다. 페북의 시스템은 그럴 필요없이 페북을 사용하도록 기능이 구성되어 있으므로 굳이 내게 그럴 필요는 없지만 난 그런 페친들에게 안정감 이상의 어떤 연대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건 마치 비행기나 버스에서 좌석을 뒤로 충분히 젖힐 수 있지만 뒷사람을 고려해서 자제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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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친들에게만 공유하는 글들의 다수는 페북이라는 '내 놀이터' 공간에서 친구들과 공유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글의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내가 체화하고 행동할 수 있는 수준의 글만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물론 여전히 논리적으로 완벽한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그건 매체 기고글이나 논문, 보고서에서 보여주고 싶을 뿐.(기고글로 욕먹는 것에 불만은 없다.ㅜㅜ) 페북을 공적 언로로 생각하거나 때때로 선교의 도구로 활용하는 목사님들도 계시지만 이곳에서 나는, 그저 편견도 있고 빈틈도 많은 김용주라는 한 인간을 이해받고 싶은 정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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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페친 중 한분이 나의 편견을 지적하며 내 글을 자기 담벼락에 공유했다. 사실 그분의 페북 스타일을 볼 때 언젠가 내 글도 저 담벼락에 비난의 대상으로 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 됐다. 결국 나는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 분은 미리 글을 쓸 때 제한하고 싶은 부분을 말을 하는 게 좋지 않냐고 말하고 불편하다면 글을 지우겠다고 했다. 반나절 정도 오늘 일을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페북에 쓰는 내 글은 반복적인 것 같지만, 다시 남겨본다. 페북에서의 김용주 사용설명서 정도라고 받아들이시면 된다.


2016. 6. 5. 페이스북에서.
2016/06/06 20:11 2016/06/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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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의 다름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매번 겪어도 좀처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이 찾아오는데 감정의 깊은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글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글이란 게 덧없다는 생각...
요즘 더더욱 많이 하기에. 조금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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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뉴스앤조이에
이재철 목사 "세월호 유족들 우상시하면 안 돼"라는 기사가 떴다. 
읽었다.
내용은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강의 및 질의응답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질의 응답 중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있었고 그 워딩은 '적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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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김종희 전대표가 해당 강의의 동영상을 올렸다.
60분 질의응답 중 3분이 할애되었고 그 영상에서 이목사는
슬픔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없다고 전제한 뒤 문제의 워딩을 말했다.
물론 그 외에도 회자된 20대 이야기도 기사로 읽었다.
이에 대한 내 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고 모두 내가 느끼기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반응들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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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와는 사적인 관계는 없다.
그저 20년 가까이 글과 책으로, 그의 주변에서 들은 풍문으로 
정리한 내 입장은, 소위 말해 존경하는 목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양화진을 둘러싼 갈등 관계의 이야기를 듣고 2주간 자료를 모아
이 목사를 옹호하는 기사를 뉴스앤조이에 쓴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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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100주년기념교회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이 목사의 평소의 생활습관, 타인을 대하는 모습, 
얼마전 암에 걸렸을 때의 행동, 자녀가 결혼했을 때의 이야기
그런 변변찮은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보다 더 뜨거운 이 '3분의 워딩'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페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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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지인인 뉴조의 편집장은 페북에
언론의 역할이 깔놈은 까고 칭찬할 놈은 칭찬하는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글에도 당연히 호불호가 갈렸고, 
나는 특유의 어정쩡한 태도로 그 스탠스가 나와는 맞지 않으나 
언제나 '그'는 지지할 거라고 댓글을 남겼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친분이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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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 다르다'...
나는 매사에 깔놈을 까고 칭찬할 놈을 칭찬하는 언론이... '싫다'.
한때 나는 진중권을 싫어했는데,
그가 한겨레를 깔 때와 조선일보를 깔 때의 수준이 같아서였다.
알파고가 연일 핫이슈다. 인공지능, 지능형OO라고 말하는
기계, 프로그램도 이제 산수나 논리만으로 다음 단계의 출력을 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라는 말이 냉정함, 정없음, 어쿠스틱의 배제를 의미했다면
나는 최근 점점더 '기계적'인 인간들을 대면하는 기회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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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란으로 올라온 댓글 중 반복적으로 접한 글 중,
'이 목사도 이제 맛이 갔다', '은퇴나 하시라'는 류의 글을 읽었다.
물론 페북이나 인터넷 기사의 댓글은 비슷한 성향을 갖는다.
실언을 하면 그 사람은 금새 쓰레기가 되고 퇴출 대상이 된다. 
물론 간간이 좋은 기사엔 멋지다, 짱짱맨 등, 과한 찬사도 보인다
이것이 대체로 항상 분노가 쌓여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터넷 정서다.
솔직히, 백보 양보해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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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페북에서 교회 테두리 안의 지인들이, 
얼굴을 맞대기도 했고 함께 깔깔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맛집 음식을 함께 먹거나 사진을 나누며 병맛돋는 글과 말들을 하던 
지인들, 그리고 눈팅으로 알던 그들의 친구들이.
마치 모두 레알 친구인 것 같던 이들이 이재철 목사에 대해
해대는 말과 글들의 수위가... 솔직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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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모든 매체의 후원을 끊었다.
생각의 차이겠지만 나는 학생들, 아이들 후원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독교 관련 후원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하지만 두 매체, 뉴스타파와 뉴스앤조이는 여전히 후원한다. 
물론 금액은 적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다. 
'뉴스앤조이는 후원할만한 매체다'라는 상징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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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뉴스앤조이를 후원할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판단의 9할 이상은 그동안,
깔놈을 사정없이 까지 않고, 빨아줄 놈을 무턱대고 빨아주지 않은
김종희 대표의 데스크 판단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선택은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았지만,
매번 자신의 진정성있는 해명이 있었고, 분노가운데에도 정이 느껴졌다.
정통 기독 비판 매체지만 뉴스앤조이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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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안철수가 정치에 입문한 후
4년을 지켜보기로 했고, 꽤많은 실망 속에 그를 욕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치판에 첫 발을 들여놓게 만든 게 국민들이므로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
나라도 그렇게 살자, 뭐 이런 나이브한 생각. (솔직히 아직도 한다.)
뉴스앤조이의 새 술과 새 부대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기독 매체를 나는 언젠가 버릴 것이다.
매체를 만드는 사람은 사랑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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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도 밝혔듯 이 글은 고민 끝에 쓴 글이다. 
그리고 이 글은 김종희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글이다.
2016/03/12 20:35 2016/03/1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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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올린 글에 대한 댓글을 읽고
그 글을 타임라인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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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과 말이 나에게 호의를 보여준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걸 직접 설명할 정도로, 우려를 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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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을 뒤로하고도 내가 고집할만큼
글이나 말이 그리 중요한가, 관계성보다
그게 더 큰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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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있다.
꽤 오래 잡글을 쓰다보니 특정대상이
원하는 글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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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입장의 동일함' 때문에 그 입장의 재확인을
위해 내 글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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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때로 달라진 내 입장에 대해서는,
그 다름으로 인해 조만간 '나'라는
인터넷 공간 안의 하나의 '계정'에 대해
쉽게 규정짓거나 폐기 삭제할 준비가 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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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글을 향한 불특정 다수의 댓글 경험에서,
혹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어떤 온라인 지인들과
어느날 더이상 친구관계가 아님을 알게 된 순간.
마음 속 씁쓸함을 털어내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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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내가 별 생각없이 누군가에게 
쉽게 내뱉은 말들이 (나쁜 면에서) 큰 의미로
전달될 때 자책을 넘어선 깊은 좌절감 같은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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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쏟아낸 글과 말에 대한 심한 회의감.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는 동떨어진 어딘가로 나를
계속 이끌어가는 듯한 어두운 어떤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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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오후.
회사 사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털어내는 동안.
내 머리 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고 있다.

2016. 2. 14.  페북글.
2016/02/16 21:23 2016/02/16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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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말내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다가 출근을 하고 일상이 시작되니 하루 업무에 적응하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지만. 그냥 미뤄뒀던 <담론>을 읽으면서 뼈속 깊이 자리잡은 그분의 자리를 돌아보려고 한다. 너무 무겁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선생의 글들을 돌아보고 싶다.

2016. 1. 19.
2016/01/24 10:25 2016/01/2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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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위터와 아이폰의 조합은 온라인 생태계를 바꿔놓았다. 트위터에 연결되어 있으면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곳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국회에서, 시위 현장에서,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행동들에서부터 셀렙들이 출몰하는 장소까지... 회사에 앉아 있는 내게 트위터는 고급 정보를 전달했고 나는 현장에 없어도 그 정보를 공유하고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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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타임 '아고라'로서의 존재감도 드러냈다. 아침에 터진 이슈에 대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수많은 유명한 논객들과 파워 블로거, 기자, 트위터리안들이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트위터 안에서 수십번 수백번 리트윗을 거쳐 그 논지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오보에 대한 의견들이 한동안 잦아들지 않아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고 원치 않게 사생활이 공개되어 고통받는 이도 생겼다. 그럼에도 당시 트위터는 순기능이 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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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인터넷에서 논쟁을 즐기던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처음으로 논쟁의 묘미를 느꼈던 <인물과사상>은 3개월에 한번 발간되는 강준만의 일인저널룩. 당연히 논쟁의 속도는 더뎠다. 당시 진중권과 홍세화, 유시민 등 걸출한 논객들이 논쟁에 참여했지만 우린 다음 반론을 읽기 위해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후엔 월간 인물과사상을 통해 월간 논쟁으로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한달 간을 기다려 읽었던 반론글을, 무슨 논술 공부하듯 읽고 또 읽고 원글을 찾아 읽고 다시 반론글을 읽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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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시판 논쟁은 그 속도가 훨씬 빨랐다. 게시판에는 붙박이 대표 논객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게시판의 공기를 주도했다. 갑자기 치고 올라온 뉴페이스는 자신의 지식을 어느 정도 입증해야 했기에, 약간의 허세삘 글들 몇 편을 쏟아내는 수고를 해야 했다.(일종의 레벨 테스트? ㅋ) 어쨌거나 게시판에서 일어나는 논쟁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다. 이슈가 발생하고 그곳의 주류 논객이 글을 쓰면 그것의 조회수가 급증한다. 하루이틀이 지나면 드디어 누군가의 반론이 올라온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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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에는 비슷한 형식이 있었는데, 일단 반론자는 처음 쓴 글의 텍스트를 분석해야 했다. 상대의 텍스트를 해석하여 짚어주고 그 오류를 풀어가는 형식. 이때 뒤집히는 상대의 텍스트가, 딱지 뒤집히듯 휘청거리면 독해의 쾌감이 상당했다. 그렇다고 당시에도 논쟁이 신사적이었던 건 아니다. 마지막에 사족처럼 덧붙이는 말에 상대를 비꼬거나 인신공격성 멘트를 우아하게 덧붙여서 한껏 반론을 도발하며 끝맺었다. 스웩. 상대가 고수라 재반론에 들어가면 게시판 유저들은 하루이틀 뒤에 그 즐거운 독해를 다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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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제부턴가 난 논쟁을 멈추었다. 모르겠다. 표면적으로는 페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가 논쟁에 적합한 플랫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굳이 SNS에서가 아니라 블로그에서 할 수도 있고 게시판이나 다른 매체를 활용할 수도 있을텐데 표면적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엇보다 내가 논쟁의 '속도'를 못 따라가겠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인 것 같다. 텍스트를 음미할 시간이 없다. 아침에 불거진 이슈는 당일에 일면식없는 수많은 논객들의 물량 공세에 이미 과식 상태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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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논쟁은 '분노의 표출'인 경우도 많았지만 대체로 텍스트 독해의 즐거움, 소화한 텍스트에 대한 해체의 더 큰 즐거움, 뒤집기의 쾌감이거나 때론 정-반-합에 이르는 묘미. 이 모든 것이 타인의 사고와 글쓰기에 대한 기대, 어떤 의미에서의 리스펙? 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왜냐면 인터넷은 공각기동대의 대사처럼 방대한 공간이라기 보단 또다른 (말 통하는) 한 무리의 게시판 공동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의 인신공격은 라임을 맞추거나 힙합의 훅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있었다.

논쟁의 속도. 속도를 논하는 사람은 이미 지나간 사람이다. LP판을 회상하는 사람들은, 정서적인 공감은 받지만 음악계의 대세와는 무관한 흔적같은 존재일 뿐이다. 난 속도감있는 지금의 논쟁이 싫다. 물론 이미 5-6년전부터 몇몇 공간에서 상대를 대놓고 하수나 쓰레기처럼 대하는 정서가 싫었다. 그리고 다시 강산의 절반이 변하고는 혼잣말이나 하고 싶은 소.박.한. 중년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어떤 이슈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이 더 깊어져서 어느덧 과잉 담론은 흘러가게 두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이 그렇다.
2015/11/09 21:32 2015/11/0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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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글을 쓴지 일년 만에 다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솔직히 몇년 전까지 나는 '여성 글쟁이'의 글을 즐기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로 그다지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뭐랄까 약간의 배려차원? 여성이 저평가되고 있다는 인식, 
여성을 도와야 한다는 또다른 차원의 , 여성폄하 혹은 맨스플레인이랄까.
의무감에 의한 봉사나 후원, 뭐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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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페미니즘 담론에 깊이 빠져들게된 최근 2-3년간
나는 독해의 방식, 담화자의 스탠스, 담론의 가치, 
뭐 이런 거창하게 말할 수 있는 '읽기 습속'이 급속도로 변했다.
예전에 즐겨읽던 책들이 지루해졌고 
책제목을 외우고 본문마저 인용하던 많은 책들이 시시해졌다.
반면, '희생과 봉사'의 심정으로 읽던 여성 저자들의 책들은
남성 저자 특유의 지식 도매상이 유통하는 
'상품들'보다 더 본질적이었고 
가벼운 주제에서조차 인간을 깊이 파고드는, 
하지만 분석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은 스타일의 그 무엇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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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성 글쟁이'에 대한 내 입장 변화도 컸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게 만든 계기가 있었는데,
연초에 있었던 강헌 선생의 "음악사 속의 여성" 강의 덕분이었다.
사실 나는 강헌 선생의 스타일에서 약간의 마초성을 읽곤 했는데,
그의 강의에서 잠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마저 들었다.
역사 속에서 남성(성)이 해온 많은 것들의 허망함, 초라함, 어이없음.
뭐 그런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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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이야기의 끝이 기승전-여성, 여성짱, 
뭐 이런 글을 쓰려는 건 아니다.
그저 여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편견을 경험하지 않은 
남성의 입장에서 통용되는 지식, 
통용되는 글쓰기 스타일, 통용되는 사회적 가치,
이런 것들에 대한 편견을 털어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그런 편견을 걷어냈을 때 얼마나 많은 다양성을 보게되는지
뭐, 그런 류의 이야기를 '새삼' 하고 싶었다.
.
5.
오늘 <여배우들, 2009>을 봤다.
그 영화가 무언가를 계몽하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 영화의 내러티브에 어떤 암시도 없었지만.
그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글을 풀어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http://myjay.byus.net/tc/614
2015/10/10 21:25 2015/10/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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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하는 말인데.
진보매체에서 난민 아이 사진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합성하고
삽화로 재현하는 부분들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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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사진 자체의 임팩트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
써먹어야 할 컨텐츠에 대한 도리
혹은 윤리,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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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난민국가가 되었고
내 아이가 죽었다면,
일본이나 미국의 진보적인 매체
에서 내 아이의 사진을 삽화로
합성으로 혹은 그대로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난 그들과의 연대보단
고립을 택할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인터넷 기사도 
보고싶지 않을 것 같다.
.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어떤 이슈를 위해서 소비해야할
혹은 소비해서는 안될
컨텐츠의 선택도 우리의 맨얼굴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2015/09/13 23:34 2015/09/1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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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미더머니의 승리다. 내 관전평은 그랬다.
그 중심에는 물론 '블랙넛'이 있었다.
내 촉으로는 만약 1번의 경선이 더 있었다면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룰을
깰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
내 식으로 말한다면 '착한편'(우리 진영) 논객들은
초반부터 블랙넛의 인성을 문제삼았다.
'일베'스러운 블랙넛을 쇼미더머니가 잘 활용하고 있다고
그의 과거 쓰레기같은 랩을 거론하고 공연에서 보여주는 저질 퍼포먼스에
냄비처럼 타올랐다.
.
2.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미더머니의 승리다.
아마도 시스템은 블랙넛이 악동으로 부각될 때부터 그의 스토리를 털었으리라.
(난 마이크로닷이 실제로 만난 블랙넛에 대한 호감을 표할 때 복선을 읽었다.)
처음부터 기획되진 않았겠지만 쇼미더머니는 블랙넛을 악동 캐릭터로 
몰고가는 것을 방기, 혹은 유도하다가 그의 고단했던 과거를 통해 
인간 김대웅을 이해하도록 내러티브를 구성했고, 그것은 진정 판을 뒤집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YG등딱지 뗀다던 송민호는 태양의 후광아래 이겼지만 작아보였고 
블랙넛은 인간 드라마를 완성하고, 그간의 비호감 캐릭터를 털고 하차했다.
.
3. 
블랙넛의 후회와 찌질한 랩에는 진정성이 있다.
과거의 고단한 삶과 방황했던 시간들에 대해, 쓰레기 가사들에 대한
비난에 대해 아이돌 스타처럼 즉각 사과하는 치밀함과 신속함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렇다고 이해해 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찌질했던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음악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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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전히 그가 탐탁치 않다. 
가사를 절어서 탈락한 피타입, MC 메타, 하다못해 힙합의 가오를 말하다
아쉽게 하차한 릴보이에 비해 그의 철학?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랩은 참 훌륭하다. 플로우를 타는 감각, 딜리버리,
무엇보다 에너지넘치는 다른 래퍼들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능력, 집중력이 남다르다. 
욕하면서도 음악에 고개를 흔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
4.
하지만 나처럼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많은 비판자들은
앞으로도 생각해볼 지점들이 있다.
블랙넛을 비판하던 담론, 이른바 여성혐오, 막장을 즐기는 시스템,
가족주의를 통해 쥐어짜는 감동으로 얼버무리려하는 
저 자본주의에 찌든, 힙합정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쇼미더머니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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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돈에 찌든 시스템이 나같은 정의로운 논객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호소력 있는 내러티브를 주고 있다.
왜냐면 시스템이 김대웅이라는 개인을 우리보다 더 깊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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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랩이나 내뱉는 인성에 문제 있는 놈'이라고, 그렇게
우린 한 개인을 우리의 담론, 진영, 바른 삶과 행동이라고 규정짓는 사고로
어떤 한 인간의 결과물을 판단하고 비평하고 결론짓는다. 
SNS가 생겨난 이후로는 섬광과 같은 속도로 한 사람의 인생을 저주한다.
.
5.
텍스트 비평이 유효하던 시기가 있었다.
텍스트만 가지고 떠들던, 그래야 했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에 의해,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텍스트 너머의 발화자, 담론의 주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을 보게 만들었다,.
사이버수사대와 SNS, CCTV가 발화자, 컨텐츠 생산자의 
신상, 과거와 현재, 일상의 모습 그 모두를 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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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사회참여를 외치는 진보교수의 자녀는 해외유학을 나가 있고
사교육을 비판하는 집단은 모두 사교육으로 인서울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고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는 종교인들은 비싼차를 몰고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그 부를 세습하고 성추행을 일삼는데도 건제하고,
김대웅은 지옥같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끄적인 쓰레기 같은 가사를
20대에 읊었다는 이유로 그의 '인성'이 회복불가 수준의 사이코 취급을 받는다.
.
6.
물론 블랙넛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이것은 구분하고 싶다.
무릎팍도사나 힐링캠프에 나와서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려던 연예인들은
이미 정점에 놓였던 '가진자'였다. 인생이 고단했던 20대의 젊은 래퍼를 까려면 
최소한의 형평성은 맞춰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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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나는 블랙넛이라는 인간 자체의 판단은 조금 더 유보하고 싶다.
인성을 거론하려면 40까지는 기다리고 싶다.
솔직히 블랙넛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뱉어낸 말과 행동에
대해 너무 명확한 구획과 판단이 가혹하리만큼 빠르게 이뤄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내가 자본주의의 쓰레기 방송 쇼미더머니의 승리라고 단언하는 지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2015/08/24 22:53 2015/08/24 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