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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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시33:13-22)

아주 어릴 적 하나님이 계속 나를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마치 매순간 119 구급차 내지는 엄마아빠가 출동대기조처럼 내 근처에 있다는 생각. 그 상상만으로도.

나이가 들고 사춘기 시절이 되고 하나님은 항상 내 근처에 있다지만 나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찾아왔다. 입시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는데 원하던 대학에 낙방하고, 몸은 하나님이 천사를 둘러서 바이러스의 침투조차 막을 수 있을진대 한달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뭐냐 이건..

나이 서른이 넘자 매순간 하나님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게 조금 씁쓸할 때가 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내가 하는 생각들, 말들, 그리고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조차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내 맘속 동기들을 누군가 아무런 스크린없이 똑바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미드에나 나올 법한 최첨단 수사대가 내 내밀한 범죄를 캐러다니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나이에 따라 달랐고 지금도 마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 분 입장에서도 내가 피조물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일을 버젓이 하면서, 마치 윤리적으로 '청정인간'인냥 주변에 그럴싸한 말을 해댈 때면 분명 그분은 어깨를 들썩이며 이마를 찌푸릴 것이다. 내가 성하에게 무서운 눈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아빠한테 혼나!'라고 아주 먼 공간에서 소리치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편의 저자는 군대를 데리고 전쟁을 하던 경험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는 전쟁 가운데 장수가 뛰어나다고 해서 혹은 병사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전쟁이 항시 넉넉히 이기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그 정확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명확히 경험했다. 그는 구원의 순간을, 마치 미운 짓하던 내 자식도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 뛰어들어 구해주는 엄마의 급한 손길처럼 느꼈을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한 애증이 교차한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자주 나는 '나라는 피조물'을 버리고 싶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창조-피조 관계 속에서 얽힌 혈연? 창연?은 정말 다급한 순간에 '미운 피조물 새끼'를 구원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고 살아왔다. 시편의 기자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나또한 그에 심하게 동의한다.

2011/09/05 21:20 2011/09/05 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