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간단히 먹고 인터넷을 잠시 보다가
빨래를 돌리고 널고 있는 중.
성하는 옆에서 혼자 재잘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며 놀고 있다.
조규찬 음악을 틀어놓고 집안일을 어슬렁 어슬렁...
성하는 쫑알쫑알 장난감을 들고 따라다니는 모습이.^^
나른한 오후. 살짝 행.복.하.다.
2012년 12월 1일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2쪽)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이상 면역학적 주제가 아니다. (13쪽)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는다.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질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쪽)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20쪽)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4쪽)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8쪽)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31쪽)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35쪽)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변신한다. (58쪽)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지금도 가끔 수능시험과 본고사 시험이 떠오른다. 그 춥고도 어색했던 기억.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은... 아랫배가 지속적으로 아프지만 시험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정도의 통증. 생애 첫 새벽기도 일주일 참석.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입시가 무슨 역사책에서 문무를 겸비한 청년들이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대회, 축제라고 하기엔 좀 살벌한 경기 정도로 여겨졌다.
평가는 가치중립적이다. 혹은 자신의 지식이나 수련을 검증하는 절차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권력들, 사회 내의 특정 '장'에서 작동하는 '평가'의 위상이다. 입시를 지낸 많은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충고와 격려, 조언들을 일삼는다. 혹은 성적 비관으로 인한 일탈, 혹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에 당혹감을 느낀다.
난 우리세대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로서 충고나 조언을 하거나 혹은 꼰대기질을 발휘해서 의지력 부족이나 자살로 귀결된 학생들에게 안타까움으로 가장된 비난을 일삼는 일련의 입장이 불편하다. 평가라는 축제를 전쟁터로 만든 건 어른들의, 권력들의 욕망이 그 중립지대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S대 합격이란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성적 서열에 따라 '인'서울대와 지방대, 그리고 학과순으로 전국학생을 줄세운 후 그것을 세속권력의 줄에 매핑시킨 어른들의 죄의 결과다.
그것을 말리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 장의 법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어른들의 순응, 방조, 부드러운 동조가... (그들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비극적이게도) 부드럽게 아이들을 일탈과 자살로 내몰고 있다. 그러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어줍잖은 멘토링으로 청춘들의 고장난 삶을 연장시켜준다.
대한민국 최대 '내전의 날'인 수능시험일. 전쟁을 막아주지 못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충고나 격려, 위로를 하기에 앞서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지못미. 꿈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 청년의 시기에 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학생들에게 더 밝은 사회를 선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헛된 꿈과 희망의 멘토링으로, 혹은 개인은 힘이 없다는 핑계로 나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오늘만은 더욱 그러하다. 미안하다, 청춘들.
'12. 11. 8.
아내와 자주 대화하는 부분인데, 실내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배우는 게 많다. 이른바 '몰입'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학습한다. 재미가 있으면 친구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30분이 넘도록 집중력을 가지고 특정한 관찰과 행동을 지속한다.
이때 가장 큰 방해꾼은 부모다. 부모의 놀이룰과 아이의 놀이룰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가 몰입 단계에 들어가기 직전 부모들의 개입이 시작된다. "OO야, 그거 입에 물면 안돼", "OO야 소리지르지마, 시끄러워.", "OO야, 일어나 바닥 더러워"
함께 아이들이 노는 순간에도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OO야 빨리 장난감 친구에게 줘. 니가 형이잖아", "OO야 저기 동생이랑 같이 블럭 쌓아봐"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부모가
놀이터에서 지향하는 놀이방식의 아바타 수준으로 아이는 자율성을 잃고 불안해하며 자주 노는 중간중간에 부모의 눈치를 본다.
부모는 아이 곁에 아예 붙어 앉아서 놀이지침을 교육시킨다. "OO야 우리 블럭으로 집을 만들어볼까" 부모는 아이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자동차를 만들어준다. 아이는 부모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을 가지고 잠시 놀다가 이내 싫증을 낸다. 하지만 자신이 자발적으로 놀기엔 왠지 불안해졌다.
결국 아이는 엄마에게 놀이 의존을 시작한다. 엄마 이거해줘, 집 만들어줘, 여기에 올려줘, 나는 잘 못하니까 엄마가 이걸 해줘... 부모는 자기 없인 아이가 노는 것도 혼자 잘 못한다고 한숨을 내쉰다. 내 시간 없이 아이에게 올인한다고 주변 부모들과 하소연을 간간이 해댄다. 그러다 이내 자기 아이를 보고 소리친다. "OO야 그렇게 만들면 안돼. 집이 무너지잖아"
2-3세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나 17-18세 입시생을 키우는 부모나 어떤 길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그 길로 걷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부모들은 아주 초기단계부터 아이의 자발성을 왜곡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걱정스러운 상황이 있다. 어릴수록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렇다고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이를 물리적인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항균티슈로 닦은 장난감만을 고상하게 가지고 놀 수는 없다. 아이 입장에서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하나의 역할극 내지는 무선조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는 은연 중에 아이의 몰입에 의한 학습 발달을 방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물론 그 반대의 극단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몇몇 부모들은 아이를 놀이터에 던져 놓고 자신은 스마트폰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내가 종종 그렇다.ㅠㅠ) 때때로 부모는 개입하지 않음과 방치를 오해한다.
개입하지 않는 순간에도 부모는 효과적으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세밀한 행동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이는 도약하기 직전의 선수나 잠시 웅크린 개구리와 같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작은 몸짓, 표정, 손길, 말 한마디들을 읽으면서 아이의 독특한 성격과 욕망, 성장의 속도를 유추할 수 있다.
때때로 적당한 시점에서의 부모의 개입은 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모터 로봇을 돌려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작은 매듭에 걸려 헝클어진 실의 한쪽 끝을 풀어주면 긴 실타래가 한번에 풀리는 것처럼 아이는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다.
잦은 개입, 혹은 완전한 방치.. 그것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두기, 적당한 개입, 무엇보다 좋은 관찰자로서 부모가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이의 몰입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직 더 배울 것이 많겠지만 현재로서 내가 느끼는 부모의 자리는 그렇다.
급진적 성담론, 복음주의는 대답하지 말고 대안하라!
- 캐시 루디의 <섹스 앤 더 처치> 서평
/김용주
'섹스 앤 더 처지'
유명한 미국 드라마인 '섹스 앤 더 시티'의 아류 같은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순전히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동성애에 대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의 견해와 정서에 도전한다. 정말 독특하고 뛰어나다!?"라고 평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마지막 물음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즈음 그 의미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나는 개인적 관심에 의해 페미니즘, 젠더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 성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화된 신학, 가정예찬 문화
저자인 캐시 루디는 듀크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철학, 신학, 정치학, 여성학, 윤리학의 학제간 통섭을 시도한다. 본서는 그녀의 역량이 탁월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본서에서 펼친 그녀의 교회 내의 현실 인식 및, 진단은 놀랍기까지 했다. 서평을 하기에 앞서 먼저는 공감하는 그녀의 논지를 따라가 보기로 하겠다. 그녀는 미국 기독교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젠더화된 신학’의 위계가 역전되었음을 설명한다.
"영역이 분리되기 전(19세기)에 미국 기독교 여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밖에 없었다. 여성은 욕정이 가득하고 영혼이 없으며 죄에 빠지기 쉬운 존재로 간주되었다. 여성 기독교인은 국가나 지역 교회와의 관계에서 남편에게 의존했다. 아버지 혹은 남편은 자녀를 영적으로 양육하는 일을 혼자 감당했다. 그런데 산업화와 함께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변화로 남자는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불사신처럼 단련해야 했고 그래서 여성은 영성이 남달라야 한다는, 특히 양육과 살림 같은 중요한 일들과 관련해서 더 그래야 한다는 믿음이 퍼졌다.
이처럼 젠더화된 신학의 위계가 역전되었다. 즉 영역 분리 이전에는 여성이 구원과 관련해 남성에 종속되었다. 반면 영역분리 후에 남성은 아내를 통해서, 그리고 아내가 만들어주는 안식처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건강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가정 예찬 문화는 미국 기독교인에게 강력한 신학적 유산을 남겨놓았다. 이 유산에 따르면 기독교는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는 가정에서 더 기독교 다울 수 있었다...가정 예찬 풍조로, 여성은 가족의 영적 생활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역할 때문에 사실상 공적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족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능력을 갖춘 여성들은 가혹하고 무정한 경제 세계에서 협상하고 일하는 능력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젠더화된 신학적 인간학이 여성이 하느님과 더 깊고 중요한 관계를 맺게끔 할지는 몰라도, 이러한 관계는 실질적인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우파가 여성이 받는 실질적인 억압과 견제에 감응하는 방법은 사회권력, 물적 자원, 역사적 영향력을 경시해버리는 것이다. 곧, 오직 영적 능력에만 주안점을 두면서 현재 여성이 당하는 아주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차별은 간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과 사회경제적 정의 모두이다. 이 둘을 서로 경쟁하거나 상호배타적인 요구로 설정하는 어떤 모델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파의 젠더화된 신학은 다른 방식으로 남성을 억압힌다... 간단히 말해 남자는 아내가 전업주부로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충분한 소득을 올려야 한다. 게다가 영적 관계에서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의존한다. 교회 활동에서 이 논리는 그대로 반복된다."
(캐시 루디, "섹스 앤 더 처치", 이하 같은 책)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남편들도 '산업 역군'으로서 해외에 나가기도 하고 국내에서도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 인해 남성들의 ‘밥벌이 시장’ 경쟁은 보다 심해졌고, 여성은 더욱 육아와 집안일에 대한 책임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아내를 둔 남편들이 흔히 "집에 오니 살 것 같다"거나 "아내가 잠시만 집을 비워도 남편이나 애들이 티가 난다"고 하는 말들이 이를 테면 가정 예찬 문화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회 문화 속에서도 80-90년대 교회 성장의 주축은 여성도, 여집사들, 그리고 교회 여전도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새벽기도와 각종 예배 참석뿐 아니라 봉사활동에 참여도가 높았는데 자연스럽게 여성이 가정의 신앙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의 영적 역할론은 세속 사회에서 여성 차별의 결과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구조적 여성 차별이 여성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만 갇히게 만들었고 여성은 그 안에서 세속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스윗홈'을 구현할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특히 저자는 "여성의 가정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을 추켜세우는 동안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어떤 권력도 얻지 못했"고 "가정은 대체로 남성에게만 피난처였으며 여성에게 가정이란 단지 일하고 억압받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동성애의 단혼제 프레임
저자인 캐시 루디는 동성애 기독교인이다. 그녀는 기독교 우파가 혼외 성관계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를 앞서 말한 ‘젠더화된 신학’과 ‘가정 예찬 문화’에서 찾고 있다.
"기독교 우파는 이런 변화(지난 30년간의 성 혁명)에 반발하면서 부부의 성관계만이 도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보수 기독교가 순결을 강조하는 이유는 전반적으로 신학적 이해관계, 특히 젠더화된 신학과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섹슈얼리티와 기독교의 관계는 오래되고 복잡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현대 기독교 순결 운동의 신학적 토대로서 봉사하는 가정 예찬과 관련되어 있는 사태이다.
동성애에 대한 우파의 비난은 젠더, 결혼, 가족 생활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동성애자가 전통 가족 이데올로기와 충돌하는 이유는 성행위를 (국가가 승인한) 결혼관계에 국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기에 우파는 성관계를 맺는 모든 게이와 레즈비언을 처음부터 문란한 사람들로 치부한다."
그녀의 동성애 옹호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나는 그녀가 지적하고 있는 북미 기독교 우파 가정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녀는 우파 가정의 개인화된, 사회나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삶의 문제를 지적한다. 또한 최근 동성애를 포용하려는 우파 내부의 분위기도 바로 이 개인화되고 분리된 핵가족 문화를 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전통 가족 가치와 결부된 양분된 젠더 역할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인의 젠더를 기준으로 예측할 뿐만 아니라 "전통 가족"이 기독교 공동체의 자리를 빼앗아버리는 사회구조를 형성한다. 직계 가족만을 책임지며 사는 기독교인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능력을 상실한다. 가족 가치 운동은 우리를 더 관계 중심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대신 더 고립되고 분리된 삶으로 밀어 넣고 있다.
그런데 단혼제에 대한 이러한 암묵적인 강조머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 관계의 구조를 모방하도록 강요한다.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처럼 공동체가 아닌 배우자나 핵가족에 충성과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집을 사서 "함께" 살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라고 권고를 받는다... 오늘날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의 핵가족을 흉내내는 달인들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 한 명은 성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생식, 상호 보완, 그리고 상호 합의(상호성)
캐시 루디는 역사적으로 섹스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녀의 논지에 따르면, 현대 교회는 섹스를 생식의 목적에서만 유의미한 행위로 간주하던 시기를 지나 상호 보완적인 의미로 나아갔다고 진단한다.
"생식에서 상호보안으로의 변화에서 유지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다. 기독교 우파들을 포함하여 젠더화된 신학에 입각한 공동체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장하려는 욕구였다. 상호보완을 뒷받침하는 생각은, 하느님께서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도록 의도하셨고 그러한 성적 연합으로 그들은 하느님과의 일체감과 친밀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상호보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은 남녀가 함께 살도록 계획하셨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보다 급진적인 성담론으로 나아간다. 이른바 상호 합의, 혹은 상호성(mutuality)으로서의 섹스가 그것이다. 그녀의 급진적 성 윤리에 따르면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 더 나아가 단혼제의 구속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거지요?"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해방운동가들은 기독교 성 윤리를 위한 규범으로서 생식성과 상호보완성 모두를 폐기하고 성인이 상호 합의한 성적 행위는 도덕적이라고 본다. 상호 합의한 섹스가 우리를 서로 그리고 하느님과 가깝게 하고 모든 환경에서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도록 장려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카터 헤이워드는 상호성(mutu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섹스가 하느님과 정의 둘 다와 관계된다고 제시한다."
공동체에 충실한 젠더 문화의 탄생(?)
급진적 성담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진단과 현실 인식에 크게 공감한다. 특히, 가정 예찬 문화라거나 단혼제가 교회 내에서 핵가족화되고 자기 가족만을 책임지려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 교회 공동체는 점점 붕괴되어가는데 남성은 사회 생활을 통한 가족 부양에 ‘올인’하고 여성은 가정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미명하래 가족 이기주의에 갇힌 현대 문화에 대한 그녀의 인식 말이다.
"제임스 넬슨은 이렇게 말한다. "독신자들은 파트너가 없다는 이유로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빈번하게 간주됩니다... 사실 자발적인 독신생활이란 어쩐지 기독교인 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많은 교회에서 독신들이 안식처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녀는 (이성애에 국한된)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한 교회 안에서 독신자, 동성애자들은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이 교회를 겉돌거나 급기야는 떠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이것이 무슨 공동체이며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관계 맺는 형제 자매들의 집단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대안이자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녀가 이러한 문제, 즉 기독교 공동체의 긴밀함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성 해방이 그것이다. 그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바보야, 문제는 섹스야."라고.
"낯선 이들끼리 우연히 성적 관계를 맺을 때조차 아주 종종 만남 그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관계를 맺는 이들에게 의미를 남긴다. 보통 우리는 섹스를 하면서 개인의 경계를 잠시나마 잊는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변화하면서 타인과 연합하게 된다. 섹스가 설명할 수 없지만 아주 깊이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기 때문에 우리는 섹슈얼리티의 도덕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성 윤리는 친교와 소속의 신비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비록 모든 동성애자 공동체가 그렇게 이상적인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할 지라도, 각각의 성적 만남은 일정부분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을 공고히 하고 각 개인의 참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공동체를 더 튼튼하게 한다. 비록 섹스 파트너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할지라도 그런 만남 각각은 자신의 소속감을 강화한다."
그녀가 경험한 성적 교제는 우리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깨고 "섹스를 하면서 개인의 경계를 잠시나마 잊는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는 섹스가 "아주 깊이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친교와 소속의 신비를 규명"하게 된 셈이다. 그녀는 결국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급진적 젠더 문화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나는 다르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게이 및 급진적 성 공동체의 구성원은 배타적 관계라는 "보편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델 -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 에 맞춰 성적, 사회적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세계에 있는 많은 이에게는 보통 공동체 전체에 충실하는 것이 내부 구성원들의 짝짓기보다 필수적이고 의미가 있다.
나는 동성애자 사회의 공동체적 섹스를 부도덕한 행위로 서술하는 것보다는 동성애자들과 급진적 성 문화의 긍정적이고 공동체적인 측면을 연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공동체들이야 말로 동성애 차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핵가족이라는 헤게모니가 도전받는 얼마 남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하는 섹스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는 모든 교회에서 도덕적이라고 선포되고 축복받아야 한다.
나의 제안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또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인 구분선을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재정렬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남성/여성 또는 동성애자/이성애자라는 낡고 억압적인 구분을 적극적으로 무시하면서 교회/세상이라는 새로운 구분을 지지하는 성 윤리 체계를 추구하기를 제안한다."
그녀의 급진적 도전, 복음주의 교회는 대답하지 말고 대안하라.
아마도 다수의 기독인들은 이 책을 무시하거나 교회 안에서도 성적 문란함이 경건한 시대정신을 물들이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혹은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나 그녀가 제시하는 급진적 성 해방 공동체의 문제들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자는 책을 집어던지거나 불태울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책은 그간 내가 경험한 어떤 페미니즘보다 '리버럴'했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내가 익숙한 신학자들을 자주 인용한다. 이를 테면 기독교 근본주의 역사를 짚으면서 조지 마스던이나, 마크 놀, 나단 해치, 그리고 짐 월리스 같은 복음주의자의 저작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젠더 논쟁에 있어서는 ‘퀴어 이론’을 교회공동체의 성 해방 문제와 접목시킨다. 학제간을 넘나드는(interdisciplinary) 그녀의 논지는 현란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녀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실질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의 대안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안에는 역사 속에서 차별받고 상처받은 여성들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근본적 공감이 깔려 있다. 진보적인 성향의 남성과 결혼한 많은 여성들이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폭력에 시달렸고 그녀들은 가정에서 성적 만족을 누리기 보다는 억압받고 ‘창녀 취급’(성적 서비스만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받아왔다. 오죽하면 부부싸움 후의 상대와의 성관계에 대해 남성은 "부부싸움 후 육체적 화해를 이루었다"고 보는 반면 여성은 "부부싸움 후 성폭행까지 당했다"고 받아들인다는 얘기가 자주 회자되겠나.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알리스 슈바르처는 "아주 작은 차이"란 책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성적 만족을 얻지도 못하면서 남편들에게 성관계를 요구 받는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많은 여성들은 가정에 갇혀서 가사노동과 육아의 짐을 벗을 수도 없다.
캐시 루디는 교회 안에서 '정상적'이라고 평가되는 가족이 단혼제 구조 속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서 오히려 교회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냉정하게 짚고 있다. 결국 그녀는, 앞서 얘기한대로 섹스가 "아주 깊이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친교와 소속의 신비를 규명"하며 결국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서 성적 경험을 공동체 사람들과 공유하는 급진적인 성 해방 공동체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의 대안이 이른바, '섹스 환원주의', '젠더 환원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느낀다. 성교로써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그녀의 대안에 동의할 수도 없고 성경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비판을 길게 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간 우리는, 기성 교회는 말만 무성하게 해댔다. 비정상적인 신학과 비정상적인 공동체, 비정상적인 정치의식에 대해 말은 참 많이도 한다. (지금도 내 페북 담벼락에선 칼빈주의, 성추행 목사, 정부비판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하지만 캐시 루디의 ‘비정상적인 대안’에 이르게 되는 과정 안에서의 미시적이지만 현실적인 문제, 그 안에서 고통 받은 소수들에 대한 진심어린 공감과 치열한 진단이 없었던 건 아닌가. 동성애, 낙태 등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가"만 떠들어댔지, 우리 중에 누가 진정으로 이슈 자체보다 그 당사자들의 친구가 되어준 이들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 관계를 떠나 논리적인 선포만 난무하는 기성 교회는 이제 이런 책들에 대답하지 말고 대안하자. 난 이렇게 말하고만 싶다. (끝)
부활논쟁
Did the Resurrection Happen?
앤터니 플루, 게리 하버마스 지음|데이비드 바게트 편집
내가 기독매체에 처음 기고했던 글은 누군가가 쓴 글에 대한 반론이었다. 그 때가 1999년이었는데, 당시는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사상”이라는 일인저널룩을 통해 한국 보수진영 인사들과 매체들에 대한 이른바 ‘실명비판’을 활발하게 시도하던 시기였고, 이제 막 유명해진 진중권이 내게 아이돌 스타만큼이나 멋있어 보이던 때였다. 나는 한동안 잡지에 실린 그의 논쟁 글이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따라 했고, 매체에 기고한 나의 첫 반론 글에는 자연스럽게 논쟁을 유발하는 냉정한 스타일이 묻어났다. 나는 그 글로 인해 온·오프라인에서 몇 차례 더 논쟁을 주고받았고, 그 일을 계기로 이후 몇 년 동안 교계 온라인 논객 ‘행세’를 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처음 원고를 쓰던 날 상대에 대해 공격적인 표현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심약한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려 글을 쓴 후에도 잠을 설쳤다. 많은 논쟁을 겪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진중권의 그것과는 다른 내 스타일을 찾아갔는데, 특별히 교계 논쟁은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한 몸 된 지체 안에서 주고받는 것이므로 더 신중하게 사랑으로 행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논쟁」은 가히 우리가 배워야 할 명품 논쟁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무신론자의 대표 격인 앤터니 플루 교수와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쟁의 전문가인 게리 하버마스 교수가 베리타스 포럼에서 진행한 세 차례의 논쟁 중 마지막 논쟁을 담고 있다. 하버마스 교수와 플루 교수는 1985년에 한 컨퍼런스에서 만난 이후로 우정을 쌓아 왔고, 그런 신뢰 속에서 세 차례에 걸쳐 논쟁이 이뤄졌기에, 이들의 논쟁은 태생적으로 양질의 토론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며 진지하게 경청하는 논쟁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이 논쟁에서 하버마스가 토론을 거의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논쟁은 2003년 1월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행해졌고, 이듬해에 플루는 유신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이와 관련한 대화를 녹취하여 출판했고, 그 내용은 이 책의 2부에 실렸다.) 또한 플루는 2007년에 에이브러햄 바기즈와 「존재하는 신」을 출판하면서 무신론에서 이신론으로, 다시 유신론으로 입장을 바꾼 자신의 지적 여정을 풀어냈으면서 이 책은 관련된 논의를 지켜보던 많은 이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플루의 지적 여정을 돌이켜볼 때, 이 책에서는 하버마스가 우세하게 논쟁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을 마치 ‘유명한 무신론자와 싸워 이긴 유신론의 승리’에 관한 책으로 독해하면 안 된다. 여전히 많은 무신론자가 유신론에 대한 회의와 심한 조롱을 일삼고 있으며, 유신론도 ‘젊은 지구 창조설’이나 ‘지적설계 이론’으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는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아 오지 않았는가. 또한 플루의 고백처럼, 그는 ‘레알’(real) 기독교로 회심한 것이 아니며, 여전히 계시를 믿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년의 무신론자가 회심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유신론에 대해 열린 자세를 견지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도리어 폄하하는 기독교인들도 종종 있는 듯하다. 이런 이들은 무릎 꿇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하지 않는 한 기독교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비전문가로서 조금만 생각을 덧붙인다면, 나는 플루의 회심이 학계나 일반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고 본다.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앤터니 플루는 큰 의미가 없는 이름이겠지만, 무신론자들에게 플루는 중심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특히 1950년에 발표한 「신학의 위증성」은 현대 무신론의 방향성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며, 「신과 철학」, 「무신론 추정」은 무신론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플루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배경지식이 없는 이들이 여간해서는 따라잡기 어려운 무신론 논쟁의 학문적 추이를 경험하게 된다. 일례로 이 책의 부록에 실린 데이비드 바게트의 “부활의 의의”를 읽어 보면 늪에 빠진 기분이 들 것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시작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유신론 비판과 창조, 진화 논쟁에서 언급되는 ‘틈새의 신’, 지적 설계 이론, 방법론적 자연주의, 과학주의 등을 이해하려면 과학철학사 전반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대한 반대 주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와 샘 해리스로 대변되는 ‘신 무신론자’들의 저서, 그리고 하버마스의 ‘최소한의 증거’에 대한 입증과 비판에 동원되는 역사적 예수 논쟁에 이르기까지, 실로 비전문가가 다루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깊이와 넓이의 논의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론은 실상 현대 학문적 풍토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지만 플루의 ‘변절’이 다시 이 논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불완전한 회심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그가 쓴 「존재하는 신」의 후반에는 로이 에이브러햄 바기즈의 신 무신론 비판과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대화가 실려 있다. 관심 있는 이들은 이 책을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큰 유익은 오랫동안 무신론의 학문적 여정을 걷던 노학자가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의 학자와 오랜 시간 격을 갖춰 논쟁을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해 나가는 모습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불행히도 나는 논쟁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 가운데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한두 번은 있었겠지만, ‘뜨거운 감자’와 같은 사안을 두고 이런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강준만의 “인물과사상”이 많은 논객을 양산했지만, 그들은 2000년대 초반에 ‘안티 조선운동’으로 뭉쳤다가 노무현 정권 후 뿔뿔이 흩어졌다.
내 기억에 당시의 논객들은 서로 교제도 나눴는데, 그들이 지나치게 호된 비난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흩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때 나도 논쟁에 대한 ‘쿨’한 룰이 있었다. ‘깔 때는 살벌하게 제대로 까주고 당하고 나서도 내가 틀렸으면 깔끔하게 인정하자’는 것. 문제는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안이 그리 많지 않고 (‘너도 말실수 했잖아’ 식의) 인신공격이나 상호 비방이 이어지면 그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떨칠 수 없더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 논객 강준만이 요즘 자신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양비론을 글쓰기 전반에 내세운 것이 못내 아쉽지만, 오랜 논쟁으로 인해 어떤 입장을 떠나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이 그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존 스토트가 영혼소멸설을 주장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누군가가 ‘그 영감 이제 노망이 나셨군’ 하고 썼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 지인의 글에 ‘이런 글 안 쓰려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댓글을 쓴 이도 있었다. 정해진 종교적 룰에 따라 쉽게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만, 신뢰를 잃지 않는 가운데 상대의 입장을 비판하는 훈련은 우리에게 여전히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런 연유로, 치열한 논쟁을 위한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가 될 것 같다.(끝)
*IVP 북뉴스 2012년 5-6월호 기고글.
http://www.ivp.co.kr/booknews/index.php ··· ad_st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