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성하가 구토와 고열을 동반한 증상으로 새벽에 응급실에 다녀왔다.
다행스럽게도 고열의 원인은 목감기였는데...
새벽에는 열이 너무 올라서(39.4도ㅠㅠ)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다.
밤새 침대시트와 이불 빨고 성하 해열제 먹이고 닦아주다가 응급실 찍고 회사에 30분 지각...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똑같은 시간에 해가 뜨고
사람들은 로봇들처럼 어제 그 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일들을 하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조용한 사무실의 아침.
문득...
어제 이 시간의 나와 같지 않은 내 모습에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아침.
'12. 10. 19
사랑이 이긴다 Love Wins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포이에마
<사랑은 이긴다>를 다 읽었다. 논쟁 지향적인 성향이 내재해 있어서 그런지 책 읽는 속도가 평소대비 두세배는 되었던 듯 하다. 다 읽고 보니 사실 얘기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 개인적으로 기대보다는 (논쟁할만한) 내용 자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이 책은 천국, 지옥, 진노하는 하나님 이런 개념 때문에 교회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던 semi-christian에게 큰 울림을 줄 책이라 확신하지만 성경을 비교적 깊이있게 공부한 학자풍의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보수적 신학도들에게는 약간의 실망감을 줄 수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에 대한 논쟁은 '깊이'보다는 '입장'에 기인하리라고 예상한다. 나또한 그런 부분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총평. 기존에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생길 법한 논란거리들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관계로 내가 굳이 동어반복의 글을 쓸 필요는 없겠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김영봉 목사님의 추천 서문과 의견이 일치한다. 교계의 배경 때문인지 내가 약간 더 보수적인(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그가 신학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점, 이 책이 현대 기독교의 내세주의적 사고에 균형을 준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정죄하는 교회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점에서 크게 김영봉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금 불편한 부분은 그의 성경해석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과장된 해석이 보이면 그의 논리적 큰 흐름에 상관없이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사랑이 절대 이기지 못한다'로 목소리 높일 것이다. 두번째로 불편한 부분은 신앙의 균형점인데 제자도로서의 예수의 희생, 헌신이 배제된 채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사탕발림의 메시지만 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곧 포이에마에서 복음주의진영의 비판서 '하나님이 이긴다'도 번역 출간한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내가 랍벨이 말하는 큰 형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신앙적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고난에 대한 균형이 다소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최근 고인이 된 존 스토트 신부님이 '더' 좋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되는 각각의 이슈마다, 필요 이상으로 균형 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그의 성실함이 '더' 좋다.
마지막으로 그의 확신에 차서 말하는 '스타일'이다. 난 겸손한 사람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마음이 커지는 게 개인적으로도 참 우려스럽지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설교자들, 웅변가들에 일단 점수를 후하게 주지 못하는 게 요즘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족이긴 하나, 기독교 내부에서 자기 PR에 유능하고 자신과 반대성향의 집단에 지나치게 과격한 이들은 이제 부담스럽다. (사족으로, 예수님도 욕을 하셨다지만 예수에게 배울 게 욕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욕의 제자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조폭에게서도 그 제자도를 실현할 수 있잖나.) 좋은 방향성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랍벨의 이런 확신에 차고 단호한 태도가 조금은 아쉽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서, 지옥의 존재 부정이나 보편적 구원론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너무 '하이웨이 스타'처럼 내달리는 것 같아 간간이 혼자서 '워-워-'를 되내인다. 때때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도올 김용옥을 떠올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 분노하며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은 칼빈주의자들을 더 자주 그려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란 설교에 감동하며 회개하고 '이 벌레같은 날위해'라는 가사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대다수의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이 책은 치명적으로 불온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니! 성경에 명시한 지옥을 상상할 수 없다니. 불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열린 태도라니. 김영봉 목사님에 따르면 실제로 이 책의 여파로 인해, 2011년 6월 15일, 남침례교 연차 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편의를 위한) 복음으로 추락시켰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핵심교리를 버렸다는 비판을 할 '구름같이 허다한' '칼빈의 후예들'이 몇몇 떠오른다. 그들은 교리를 잣대로 랍벨의 책을 대충읽고 쓰레기통에 쳐넣을 것이다. 혹은 조목조목 오류를 짚어내면서 정통 교리를 사수하려는 정의감에 불타오를 것이다. 솔직히 나는 교회의 성도들, 그 개별적인 삶을 돌아보고 고민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더 걱정스럽다. 교리를 떠받들고 자기 성도는 '벌레'같이 보는 목회자가 두럽다. 의심에 찬 성도들을 이교도 취급하고 그들의 회의감을 제대로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도 예정설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설교하는 기성 교회 목사님들이 두렵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지,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그들보다 랍벨이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끝)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7)
/김용주
(8) 학생-간사 간 갈등의 고조
이미 깨어질 대로 깨진 간사-학생간의 신뢰는 갈등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 때부터 사침에 동의하지 않았던 4명의 간사를 포함한 대책위는 이의서와 지속적인 항의를 거쳐 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간사회는 이런 6개대 학생들을 IVF에서 분리시키는 절차상의 수순을 밟게 된다.
“간사회의 논의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던 4명의 간사들은 방향성 논의 자체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이의서를 작성하였다.(8/9) 8/10 모임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 및 정체성이 다양성으로 수용될 수 없다는 공식적인 확인이 이루어진 후, 6개대 중심의 연합기도회를 가졌다.(8/17) 이 기도회에서는 (1)방향성 논의 결과에 따르지 않는 지부에 대해 분리한다고 말했던 것에 대한 간사회의 해명과 (2)IVF의 다양성 인정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하여 중견간사들(주희재, 박영덕, 황성수)와 만났다.(8/21) 그리고 동북/서남 대표자 수련회(8/23~24)에 6개대 대표가 특별한 사유 없이 모두 불참하였다. (중략) 9인대책위가 신학적인 차이를 공식 인정하고, 대표자들이 학협임원에 대한 탄핵을 결정하였으며(9월7일, 간사-대표자협의회), 91년 1학기 동안 서울대를 담당하였던 박영덕 간사가 서울대 지부의 문제를 이사회에 정식 중재 요청함에 따라 6개대 학생들은 (1)방향성 문제제기 결과에 대해 6개대의 연합적 대처를 주도하고 (2)자신들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적극 홍보하기 위해 'IVF 현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위(이하 '대책위")를 발족시켰다. 이 대책위에서는 (2)와 관련하여, 학사회 창립기념 강연회가 열리던 100주년기념관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10월2일) 또 IVF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해 공식 기자회견(10월8일)을 가져 교계신문들에 자신들의 입장이 기사화되도록 했으며, 'IVF 현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학생들과 학사들에게 우편 발송하였다.(10월14일)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대책위의 서술은 아래와 같다.
“9인 대책위 중 6인의 원칙위반과 간사들의 분리 선언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지부 혹은 개인들 150여명이 모여서 기간의 상황보고와 그에 대한 기도와 아울러 간사들의 입장에 대한 공개해명을 요구하였다. 서명작업을 거쳐 공개서한을 간사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중략) 현 사안에 대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회 형식으로 모였으나 9인대책위 위원장이 대책위 토론 중 합의되지 않은 논의사항을 토론 중 각자의 신학적 입장인 것처럼 보고하였다. 한 대표간사는 6개대 학생들을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학협임원 탄핵소환, 6개대에 대한 경고, 대책, 지침, 지침에 대한 교육 동의 안건을 가지고 9월7일 간사-대표자회의를 열 것을 대표간사회와 9인대책위 중 6개대 대책위 3인을 제외한 6인이 절차를 무시하고 강제해냈다.(중략) 현행 학협임원 및 총무, 6개대의 신학적 문제 및 단체행동, 향후 대책 등의 안건을 가지고 열렸다. 학협단체에 관한 안건은 지난 여름 ‘임시 대표자 협의회’에서 학생들의 손에 의해 재신임이 결정된 학협회장과 총무를 대표간사 2인의 손에 의해 탄핵되었다. 불신임을 묻는 이유는 6개대와 같이 행동했으며 대표간사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날 6개대 학생들은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신앙적 확신’이라는 문건을 배포하였고 신임간사(정지훈, 장은경, 최진영, 황호동)들이 쓴 문건 ‘사회참여 지침에 대한 이의서’는 배포하려 했으나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포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차이가 ‘분리’되어야만 하는 근거나 기준이 되느냐, 달리 말하자면 같은 복음주의라도 간사의 신학적 입장과 같지 않으면 IVF에서 함께할 수 없는가를 간사들로부터 듣는 것뿐이다.(중략) 신입간사의 6개월 후 재면접이 ‘이의서’를 밝힌 직후에 있었다. ‘이의서’ 배포 자체와 ‘이의서’ 내용 중 IVF 정체성에 관한 이견, 대표간사의 지도 거부 등의 이유로 잠정적 해임이 결정되었다.(9월13일) 이사회는 재면접을 통해 잠정적으로 결정된 해임을 공식 통보하였다. (10월3일)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9) 서울대 지부 취소
가장 먼저 서울대 지부가 취소된다.
“91년 1학기동안 서울대를 담당하였던 박영덕 간사는 6월 사태 이후 여러 차례 모임을 통해 IVF 본래적인 활동을 전개하도록 설득하고 서남 중견간사들과 함께 서울대 리더들을 만나 간사회의 요청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리더들이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1)IVFR 운동의 정체성이 대한 이해 차이와, (2)그러한 문제를 지도하려는 간사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문제제기하여 9월 정기이사회(9월30일)에 서울대 문제를 정식 상정하였다. 이에 이사회에서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공식 경고하고(10월7일) 수습위원을 선정하여 학생 리더 및 학사들과 만나 대화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서울대 학생들이 IVF 정체성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간사의 지도력 자체를 거부하였기에 서울대 지부 취소를 결의하였다. (10월28일)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6개대 중 서울대가 가장 먼저 대상이 된 것은 박영덕 간사의 지도 거부 문제와 더불어 당시 모교 출신 이사들이 본 사태를 알게 되면서 이를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강: 박 간사님과 학생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에 대한 중재안을 서울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지부취소 결정이 났죠. 중재안은 ‘LGM 끝나고 막걸리 먹지 마라. 뒤풀이 할 때 술집 가지 마라.’ 그런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사실 서울대는 건대나 경희대에 비하면 비교가 안됐는데, 어쨌든 그렇게 됐죠./ 이: 서울대 지부 취소는 특히 서울대 출신 이사님들이 실체(일반운동권과 비슷한 분위기)를 알고 나서 경악을 했어요. 그 분들의 모교였으니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소리,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서울대 학생들은 ‘서울대 지부취소 철회’를 결의하였고 문건을 통해 “IVF의 건강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고, 결코 우리끼리 무엇을 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리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로 매도 당하였고 IVF에서는 사회참여 자체가 비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호소하였다.
“서울대 지부취소의 거론은 기초의회선거에 대한 서울대 IVF 입장 대자보 부착 때부터였고 그후 9월11일 서울대 출신 이사 3인, 학사 2인, 박영덕 서남부대표간사, 학생 3인이 모여 지부 속에서 함께 노력하고 지부취소는 없던 것으로 하자는 합의를 했으나 9월30일 그 합의가 대표간사에 의해 다시 번복되고 서울대는 지부취소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6개대는 5월 이후로 계속 같은 문제의식과 행동들을 했으며 이는 보수회귀로 불구자적인 모습이 되어가는 IVF의 건강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고, 결코 우리끼리 무엇을 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리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로 매도 당하였고 IVF에서는 사회참여 자체가 비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울대 문제를 그 자체만으로 볼 수 없고 6개대 전체와 문제의식의 맥을 같이하는 많은 IVF 형제, 자매들에게 가하는 조치의 시작으로 본다. 실제로 6개대 중 동북부 4개 대하의 경우 6개월 동안 한 지부씩 대표간사들이 만나면서 사침의 입장으로 교육되지 않는다면 지부취소를 하겠다는 게 동북부 대표간사의 입장이다. 한번도 대체 수련회에서 제기된 문제제기가 적극적으로 상대협에서 논의된 적이 없으며 학생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사고하는 현재 시점에서 IVF 공식입장도 아닌 ‘사침’을 잣대로 삼아 뿌리를 자르려는 의도는 도저히 인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협의 서울대 지부 취소는 철회되어야 한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10) 6개대 지부 취소와 한기연 출범
“두 번째 보이콧(제2차 대체수련회)에서는 서울대 지부 취소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시정을 요구하는 항의가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날 간사님 몇 분이 6개대가 보이콧을 하던 장소(천마산 기도원)에 오셔서 지부별로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이 있었고, 이 날 마지막으로 학교별로 방마다 모여서 최종 결정을 내렸죠.” (이강일,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이후의 사태는 IVF 자료집에는 정리되어있지 않으나 6개대가 IVF와 분리된 후 세운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이하 한기연)의 자료를 통해 6개대의 그 이후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대 지부 취소 이후 최종적으로는 92년 1월에 나머지 5개 지부도 취소되었다.
"협의의 과정에서 팽팽한 접점과 긴장이 계속되자 동북부 4개 대학에도 최후의 카드가 제기되었다. 바로 다음의 2개항에 대한 동의 여부에 따라 지부취소를 이사회에서 결정하겠다는 통보였다. 그 2개항이란 '간사회의 지도를 받을 것'과 '연대활동 금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건국, 경희, 고려, 광운 등 4개 대학은 겨울수련회에서 2개항이 결국 학생지도력과의 열려있는 대화를 거부하고 적극적인 사회선교활동에 대한 금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서 거부의사를 합의한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사실상 2개항에 대한 동의란 그간의 고민과 논쟁을 백지화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화ivf는 자체 수련회와 몇 차례의 리더모임에서 이화ivf의 방향성을 정리하고 서남부 간사회를 만났다. 이화ivf는 최종적으로 중앙의 파견간사가 아닌 이화 출신학사의 간사지원을 요구하는 안을 제출했는데 서남부 간사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1992년 1월 25일 ivf는 건국, 경희, 고려, 광운, 이화 지부승인을 취소하였고 장안을 시끄럽게 하던 6개대 사태도 일단락되었다." (한기연, '한기연의 태동')
그 후 6개대는 체제를 정비하여 같은 해 10월에 한기연이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출발한다.
"(6개대) 학생회의 연합기구(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이하 한기연)가 건설('92. 3.)되고 초기 한기연은 세상을 변혁할 새로운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열망으로 하나되어 있었다. ivf내부의 기나긴 논쟁과 싸움은 신앙이 더 이상 개인에만 머무르거나 적당한 사회적 봉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에 통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열려있는 신앙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중략) 학생회와 간사 몇 분으로 용기 있는 출발을 감행했지만 전문성의 결여와 재정문제, 안정된 지도력의 부재, 새로이 대두되는 기독교사회운동의 중요성 등 한기연에게 헤쳐나갈 난관은 너무도 많았다. 이에 한기연은 이사회와 동문회, 간사회, 학생회가 갖추어진 명실상부한 기구로서의 면모를 추진하게 된다. 기구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직적 체계를 갖추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체계를 어떻게 운용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체로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명 정도의 한기연 학생과 동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9명의 이사가 추대되고 한기연의 정신과 목적을 공유하는 당당한 출발을 선언('92. 10.)하였다.” (한기연, '한기연의 태동')
한기연은 그 후에도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고, 초창기 6개대 학생들의 상당수가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당시 6개대 사태를 경험한 이들은 6개대 학생들과의 관계 복원 실체가 없어졌다는 점에서의 복원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고직한 간사와의 관계와 IVF 구조의 복원이라는 숙제가 남았다고 말한다.
“김, 강: (6개대 멤버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해도 이제 복원할 관계의 실체가 없다는 게 어려운 점이죠./ 강: 지금의 한기연은 당시의 한기연과 같은 단체로 보기 어렵죠. 사람도 다 바뀌었고, 방향이나 성격도 달라졌죠. 복원할 대상이 분명치 않아요./이: 고직한 간사님과의 관계는 회복이 필요하죠./ 이: 결국 담아낼 장이 없으면 방향성이나 내용은 그냥 떠돌아다니고 말기 때문에, 이를 담아낼 구조의 복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은 (방향성에 있어서는 간사들이 다 결정을 하니까) ‘가르치는 자 = 간사, 배우는 자 = 학생’이라는 구도가 굳어져버렸는데, 구조의 복원뿐 아니라 권한과 책임의 복원도 함께 되어야 해요. 일단 지방회 차원에서는, 학생대표들로부터 방향성이나 구조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이것을 학원사역협의회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법 등 자발성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IVF 전체 차원에서는, 사회부나 과거의 여성부와 같이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강일,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5. 마치면서
6개대 사태를 한 개인이 정리하면서 어떤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한 옳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어떤 결론이나 평가, 혹은 입장 표명은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가운데 혹은 자료를 인용하는 가운데, 되도록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각, 신앙적 확신이 명시적, 혹은 비명시적으로 드러났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돌아보면 IVF로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서조차 내가 IVF에 속함을 후회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로잔언약으로 대변되는 사회참여와 복음전도의 동등한 사역적 강조는 내 신앙의 근원적인 DNA로 각인되었음을 고백한다. ‘6개대 사태’는 20년 전 공동체의 상처이기에, 후배인 내 입장에서는 백지로 비워져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회자되면서도 사실상 실체 없이 극단적으로 신화화되는 상황을 경험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에서 다시 이 사태를 거론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이것을 메우고 싶은 열망이 내 안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6개대 사태’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6개월 동안 자주 눈물을 흘렸고 상당 시간 영혼의 몸살을 앓았다. 부디 이 초안이 어느 누구에게도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부족한 부분은 더 다듬어져서 좋은 자료로 거듭나기를 기도한다. (끝)
한 하나님 안에서.
2012년 10월 3일.
한양대학교 IVF 김용주.
1.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I, II – 서울지방간사회
2. IVF 소리기획, ‘91년, 6개대 사태를 돌아본다’
3. IVF ‘6개대 사태 세미나’
4. 이재천, ‘소리가 만난 사람, IVF와 함께한 꿈과 열정의 시간’
5.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6.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
7. 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8. 신옥수, <에큐메니즘 A에서 Z까지> 제13장
9. 김회권, <복음과상황> ‘우리가 주창하는 복음과 상황’
10. 김회권, <복음과상황>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11. 이종철, <복음과상황>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6)
/김용주
(5) IVF 사회참여 교육지침
간사회에서는 이러한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IVF 사회참여 지침 마련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동안 학원사역부에서 작업해오던 내용을 당시 황성수 간사의 발제로 정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IVF 사회참여 교육지침’(이하 사침)이라 불리는 문건이다.
“간사회는 독립적으로 방향성 논의를 진행했는데 이것과는 별도로 6개대 학생들과의 계속적인 대화를 위해 간사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방향성 논의는 황성수 간사의 발제안(6월 이전까지 고직한 간사와 논의해왔던 결과물)을 중심으로 크게 (1)복음주의 안에서의 사회참여의 위상 (2)IVF의 사회참여의 범위 등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예정되었던 간사수련회를 포기하면서 총 3차(9일)에 걸쳐 논의한 결과물이 '사회참여 교육지침(사침)'으로 나오게 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사침은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신학적 근거와 학원 IVF 운동에서의 사회참여 지침을 방대하게 집대성한 자료로서 당시 간사회의 신학적 깊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침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IVF가 복음전도의 사명에 치중한 단체임을 재천명하였고, 실천 각론에서 학생들의 집단적 사회참여를 막는 방향으로 서술됨으로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건이 되고 말았다. 당시 간사들이 이 사침을 가지고 미숙한 방식으로 지부 학생들의 동의를 묻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는 여러 지부에 치명타를 안겨줬다.
“강: 사회참여지침으로 인한 부작용이 많았어요. 내용이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참 간사들이 그걸 들고 학교에 가서 문제 있는 학생들에게 동의여부를 물었는데, 그 때문에 떨어져 나가게 된 학생들이 많아요./ 이: 연세대의 경우는 90, 91학번이 많이 없어졌죠. 6개대 사태의 여파가 6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회참여에 의식이 있었던 여러 학교에 치명타를 줬어요.”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이 지침에 대한 동의여부를 묻는 과정에서 1명의 전담보조 간사(최진영 간사, 이대 담당)와 3명의 수습간사(정진훈(경희대 광운대), 황호동(건국대), 장은경(이대))가 동의하지 않았다. 정진훈, 장은경 간사는 사회참여에 있어서 로날드 사이더의 입장을 IVF가 취해야 한다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황호동 간사는 '사침' 중 하나님나라 확장 부분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혔으며, 장은경 간사는 교육방법론에도 이견이 있었다. 이들은 논의 후 문제가 된 6개대를 특화된 공동체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간사회가 동의한 '사침'을 거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이의서(‘사회참여 지침에 대한 이의서’)의 형태로 간사회와 학생회에 전달하였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6) 9인 대책위
“학협에서는 서울지역 임시 대표자협의회를 개최하여 IVF 방향성 논의를 위한 9인 학생대책위원회(이하 '9인대책위')를 구성하였다.(7월1일) 9인대책위에서는 2차에 걸쳐 자료수집 및 연구일정을 계획했고(7월3일, 9일), 농활을 마친 후 본격적인 연구와 토론에 들어갔다.(중략) 9인대책위는 방향성 논의 중 6개대측 3인 위원들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이해와 IVF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6개대 측의 3인 위원과 논의해왔던 서남/동북의 6인 위원들은 6개대 측 3인 위원들의 IVF 운동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논의기간 중 간간히 표명했으며, '사침'을 가지고 9인대책위와 논의하던 자리(8/10)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6개대측 3인 위원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도 복음주의이며 IVF의 정체성은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남/동북의 6인 위원들은 IVF의 신학적 입장과 정체성은 논의할 부분이 아니라 교육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9인대책위 토론에서는 사회참여 방향성 외에도 학생자발성에 대한 논의시 간사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중을 드러냈다. 한 학생은 “간사님들이 학생운동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셔야 한다. 개척지부는 간사중심적일 수 밖에 없지만 준지부 이상에서는 간사님이 뒤로 물러서고 학생중심적이어야 한다. 즉 집단적 결정권에서 간사님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리더 모임에서 또는 아래에서 수렴된 내용인 간사님 선에서 한마디에 무시될 수 없다. 대표나 리더를 통해 간사님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지만, 논의 구조에 직접적 발언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생각도 드러냈다. 특히 학생들 중에는 신앙적 전제 자체가 다른 급진적인 부류도 있었다.
“6개대의 학생들도, 급진적인 친구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모두를 통으로 보기는 어려워요. 그 중 급진적인 지도 그룹들은 한신연(한국신학연구소) 쪽에서 나온 책을 주로 학습했기 때문에, 6개대 쪽에 전제가 다른 사람들이 있긴 했어요. 당시의 보수적인 사람들한테는 충격적이었을 고백이나 내용들이 있었고(창세기를 신화로 믿는다든지), ‘죄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얘기하지 말라’는 등 복음주의적 확신에서는 떠나버린 이야기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우후죽순처럼 있었어요. 또 91년 LTC 때 3분의 1 정도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들었는데요, 사회참여 얘기는 많았지만 정작 기초적인 복음은 거의 못 들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못 만난 친구들이 많았던 거예요. 그걸 문제시 하지 않는 분위기가 6개대 중에 있었던 게 사실이고요.”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특별히 기초적인 복음조차 훈련되지 않은 학생들이 당시 6개대에 속해 있었지만 6개대측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던 분위기는 당시 간사들이 심각하게 우려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리더수련회(LTC)에서 대상자의 1/3이 영접을 했던 당시 상황은 성경연구와 신앙훈련에 충실했던 간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신앙적 기본기 없이 교만하기만 한 존재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IVF에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부족했으며 각론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모델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델을 기존 운동권에서 따오게 되었고 노동자나 농민에 대해서 이해하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사실 복음주의권내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히 논의가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서 이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신실한 선배들은 복음주의와의 균형 속에 이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지만, 후기 후배들은 기초 영성이 부족하여 복음주의적 마인드의 기초 없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신학적 전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89년에서 90년 LTC때 대상자의 삼분의 일이 그제서야 영접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참여 운동론의 이론을 바깥에서 들여오다 보니 신학적 이탈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 IVF 지부 중 10개 대학 정도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특히 8월24일 대표자협의회 회의록에는 간사들의 불편한 심기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회의에 참석한 간사들은 “사회참여 지부, 혹은 복음전도 지부식의 편차는 인정할 수 없고 지부 내에서 특수 Cell의 운영은 장려한다”고 언급하면서도 “신앙적인 기초가 없는 사람이 실천의 영역에 뛰어드는 것이 문제가 있다”며 운동성향 학생들의 무너진 신앙적 기초를 지적했고 “간사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학생의 입장에 동의되는 부분에서만 도움을 주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불편한 심기를 표했다. 이 대목은 공동체 안에서 세대간의 인간적인 신뢰가 무너진 토론의 전형으로서, 개인적으로 6개대 사태를 통틀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6개대 쪽 세 명의 학생들과 함께 사태를 해결해보기 위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결성해서 여름방학 내내 세계신학의 흐름, 복음주의 신학, IVF의 역사와 정신 등을 스터디했는데, 스터디 하는 내내 서로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런데 막바지에 그쪽(6개대쪽 세 명) 친구들은 우리와 방향성이 같다는 거예요. 교리기초에도 다 동의한다면서요. 스터디 하는 내내 우리 쪽에서는 서로 방향성이 다르다는 걸 절감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그 친구들이 ‘우리는 같다’고 하니까 어찌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문제해결이 안 되고 그 뒤에도 갈등이 계속됐어요.”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6개대 학생들은 이 토론에서 강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나, 마지막 협의 시에 자신들이 기존 IVF와 방향성이 같으며 그 신학적 교리들에도 동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간사들과 서남, 동북 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6개대 학생들은 간사회에서 이미 그들을 IVF에서 분리시키기를 원했음을 간파했고 스스로가 분리되는 사태는 막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6개대와 나머지 학교들이 분리되지 않은 것은 6개대 학생지도그룹은 작은 규모로 갈라져 나갈 생각이 아니었거든요. 전략적으로 IVF를 장악하면 영향력이 커지니까 분리하지 않고 전체로 함께 가길 원했죠. ‘연합학생회를 하려고 했던 이유도 어떻게든 학생협의회의 4개대, 6개대 중심의 멤버들을 연합학생회 쪽으로 데려오기 위한 거거든요. 가령 학협 회장선거만 봐도, 6개대 외의 친구들은 별 생각 없이 오는데 이 친구들은 어떻게든 자기들 세력을 심으려고 계획적으로 접근했지요. 스스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지요. 이 때는 세계사적으로 소련이 붕괴되어 탈이데올로기의 분위기기 조성되었기 때문에 제3세계 학생운동이 위축되던 시기였습니다.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1991년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이에 6개대 IVF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학생운동의 흐름이 자신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세미나')
(7) 농활 갈등
“방향성에 대한 심각한 갈등 속에서 예정대로 진행된 농활(7월11~19일) 역시 갈등이 표면화되고 심화되는 연속성 상에 있었다. 농활과 관련하여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이외에도, 사전 협의된 바 있는 농활 전반에 관한 원칙들을 농준위에서 실행하지 않았으며, 농활명칭('농촌복음화 현장훈련')과 농활기간 동안 대원들이 지켜야 할 행동원칙을 놓고 몇몇 학생들과 논란이 있었다. 또 농활기간 중 6개대 학생들은 작업시 타학교 학생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방향성 문제제기가 정당함을 홍보했으며, 간사들의 지도력을 배제한 상태에서 농활을 진행한 마을들이 있었다.(중략) 농활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간사로서 무책임하다고 판단하여 농활학교에서의 ‘농활지침’ 강의를 하고 농활에 모든 간사가 참여키로 했다. 일부 학생들이 의도적으로 간사들을 방해, 배제함으로 효율적인 지도가 어려웠으며 일부 간사들은 심각한 인격적 모멸까지 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대책위는 간사회측에서 만든 ‘농촌복음화 훈련지침서’가 사침과 마찬가지로 그간 학생자발적 사업이었던 농활에 대한 새로운 ‘체계’(굴레)로 이해했다. 특히 농활 실무자들에 대한 간사회의 징계가 결정되자 이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농활학교 중 황성수 간사의 ‘서울지역 IVF 농촌복음화 훈련지침서(이하 농훈)’가 농준위 실무자에게 배포되고 일반 학생들에게 강의돼 학생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농훈에 따르면 학생들의 농촌활동은 교육적 훈련일 뿐이며, 따라서 학생은 우선 배워야 하고 졸업 후에나 진로를 결정해 현장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농활의 역사를 무시하고 새로운 체계를 잡아가려는 의도에 학생들의 반발은 컸다. 또한 이 기간 중 공식적으로 농준위 실무자 중 6개대 대책위 위원들에 대한 징계를 간사회에서 결정, 통보하였다.” (대책위, ‘IVF 서울지역 농활 학교 개최’)
당시 농활에 참가한 간사들은 참아내기 힘든 대우를 경험해야 했다. 기록된 일화 중에는 “농활 첫째 날 간사들을 소개하던 중 대원으로 소개하며 형제 자매, 혹은 간사님으로 부르지 않고 대원으로 부름”, “동네 이장님께 대원 소개를 하던 중 황성수 간사가 자신을 지도간사로 소개하자, 소개가 끝난 후 학생들이 황간사에게 항의하며 대원의 자격으로 농활에 참여할 것으로 요구” 등의 사건이 있었고 “그날 늦은 밤 평가화에서 황간사님이 해야 할 문건 작업으로 노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하자 함께 대원으로 똑같이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평가회에 발언권을 줄 수 없다고 함”으로써 결국 간사회는 이와 함께 여러 사유를 들어 징계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계속)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5)
/김용주
(3) 강경대 사망과 시국선언
“1991년 4월 26일, 학원자주화 투쟁에 참여한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 소속 사복경찰에게 쇠파이프로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부터 강경대의 유해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히기까지 25일간 한국은 대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4월 29일엔 전남대생 박승희가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 중에 분신했고(5월 19일 사망), 5월 1일에는 안동대생 김영균이(5월 2일 사망), 그리고 3일에는 경원대생 천세용이(5월 3일 사망),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는 등 모두 11명의 목숨이 사라져갔다. 이른바 ‘공안정국’에서 ‘치사정국’으로, 그리고 다시 ‘분신정국’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강경대 사망은 공권력의 살인행위 혹은 당사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측면 외에도 기독학생운동사에서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87년 6.29선언 이후로 사회주의 노선의 급격한 쇠퇴에 따른 학생운동의 위기감과 기독학생들에게는 암울했던 80년대에 자신들이 침묵해야 했던 죄책감, 신앙적 양심이 묘하게 교차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공권력이 쇠파이프로 1학년생을 때려죽인 사건은 운동권과 기독학생 두 진영 모두의 행동을 촉발시켰다. 또한 이후의 분신정국은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대행진’이라는 보수적 기독학생 집회라는 다분히 반대 극단의 형태 또한 양산했다. 이러한 교회의 전반적인 보수회귀의 분위기는 IVF에서 이미 사회참여의 논리를 획득한 학생들로 하여금 이 보수회귀의 흐름을 막는 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고 인식하였다.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 학생들의 혼란을 우려한 간사회는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학생들의 IVF 행동지침으로 삼고자 했으나 고직한 간사가 문건 내용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NCD와 사전 협의된 바 없는 내용이므로 교육 불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나아가 고 간사 스스로가 선교단체 연합기도회에서 행한 현정권에 대한 비판조의 시국선언이 매체를 통해 IVF NCD라는 공식 명칭으로 게재되면서 사태가 커지게 되었다.
“국회위원 외유사건, 수서특혜사건, 페놀유출사건 등에 휘말려 있던 캠퍼스에 강경대씨의 죽음은 큰 위기감을 몰고 왔다. 급변하는 캠퍼스 상황에서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할 경우 나타날 학생들의 혼란을 우려한 서울지역의 간사회에서는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라는 문건을 작성, 일부 배포하는 한편, 5월3~4일로 예정되어 있던 대표자 수련회에서 대표들의 동의를 거쳐 이후 캠퍼스 상황에 대처하는 공식 문건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위의 모임에 NCD로 참석했던 고직한 간사는 문건 내용에 몇 가지 문제 제기하면서 더불어 NCD와 사전 협의된 바 없는 문건으로 교육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다. 그 후, 몇몇 대표들의 문제제기가 있었기에 이 문건에 대한 동의 요청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캠퍼스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의 활동으로 인해 신촌에서 있었던 강경대씨의 장례식에 200여명, 영동교회에서 있었던 연합시국기도회에 30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5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제시한 행동원칙을 따르지 않는 일부 학생들이 나타났고 그 동안 최진영 간사의 지도를 받아왔던 학협 산하 사회부가 연합시국기도회에서 '현 시기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제기'라는 문건을 사전협의 없이 배포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한편 다른 선교단체들과 가진 시국 연합기도회의 강사로 초청받았던 고직한 간사의 발언이 기독교연합신문에 보도(‘나단의 심정으로 노태우 정권에 대해서 심판을 선언한다’고 설교한 내용이 기독교연합신문에 실림. 기사에 ‘IVF NCD’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게재)되면서 이것 역시 문제화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이때 간사회측에서 작성한 문건은 IVF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공동체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기도할 것을 종용했으나, 동시에 각자의 신앙적 양심에 따른 정치적 행동에 대한 자유를 천명했다.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기도하는 것인가 또는 기도만 하고 앉아있을 것인가 물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것이고, 이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과 행동으로 믿는다. 우리는 이미 서울지역 학생들에게 공고된 ‘서울지역 학생 사회참여 지침’에 따라 이 사건 자체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나 어떤 정치적 행동을 공동체적으로 지지, 촉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 개인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올바른 신앙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각자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그에 따르는 개인 나름대로의 정치적 표현 – 예로 성명서, 대자보, 단식, 농성, 시위 등 – 을 행할 자유를 존중한다.” (간사회,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제안’)
당시 6개대 사태를 겪은 이재천 간사는 학생들이 개별적인 동참 이상을 원했었다고 말한다.
“1991년에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하는 상황이었는데, IVF의 사회참여를 열심히 부르짖었던 학생들이 그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간사회에서도 성명서를 내고 같이 참여를 했는데, 학생들은 그 이상을, 즉 정치참여를 원했어요. 간사회도 사회참여에 동의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요구를 현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전체 IVF 리더십에서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이재천, 소리 ‘소리가 만난 사람, IVF와 함께 한 꿈과 열정의 시간’)
민감했던 시기에 고직한 간사의 시국선언 등 행보로, 학생들은 보다 적극적인 참여의 열망을 키워갔으나 이내 전해진 고 간사의 직위해제 소식은 학생들을 카오스 상태로 만들었다. 특히 학생들은 이 방향성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다소 과도한 목소리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 간사 자신도 당시 상황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는 세계사적으로 소련이 붕괴되어 탈이데올로기의 분위기기 조성되었기 때문에 제 3세계 학생운동이 위축되던 시기였습니다.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1991년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이에 6개대 IVF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학생운동의 흐름이 자신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고직한 간사님이 직위해제를 당합니다. 이에 6개대 IVF는 가만히 있으면 IVF가 사회참여성을 잃어버리겠다고 생각하였고 연합학생회를 장악해서 연합학생회를 통해서 구속력을 발휘하려고 하였습니다. IVF가 기독교 선교단체지만 사회문제에 주력하는 팀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 그것이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학적 이탈, 경건성 상실, 간사와 마찰 등을 황성수 간사님(당시 연대 간사님)과 함께 고직한 간사님도 우려하셨습니다.”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학생들 입장에서는 고직한 간사의 직위해제 이후 IVF의 보수회귀에 대한 우려감을 가질만한 개연성이 다분히 존재했다. 6개대 사태로 인해 결국에는 서울대 지부취소 결정을 하면서 공개한 당시 총무의 서신을 보면 당시 간사회와 이사회의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남 총무는 서신에서 “IVF는 다른 선교단체들보다 앞서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왔지만, “IVF는 신학적으로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가르친다고 해서 IVF의 정체성을 사회참여를 하는 단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간사회 자료와 당시 한국 기독교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간사회와 이사회는 IVF가 사회참여적인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적 부담을 느낀 것 같다.
“80년대 초반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거나 백안시 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IVF는, 다른 선교단체들보다 앞서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온 것과 복음만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쳐온 것, 그리고 기독성을 가지고 운동권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의 잘못된 이해와 적용 때문에 IVF가 사회참여를 하는 단체로 오해 받는 결과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IVF가 신학적으로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가르친다고 해서 IVF의 정체성을 사회참여를 하는 단체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일부에서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 정체성 간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남진선, ‘IVF 현사태에 대한 총무의 공개서한’)
(4) 수련회 보이콧, 중재 노력, 6개대 대체수련회
“고직한 간사의 직위해제를 뒤늦게 간접적으로 접한 일부 학생들은 이 문제가 보수회귀적인 상대협 간사들이 학생들의 사회참여 요청을 수용해왔다고 판단되는 고직한 간사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았다. 특히, 이전부터 IVF가 사회참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문제제기 해왔던 6개대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열리던 동북, 서남 수련회 조장모임(6월22일)에서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와 수련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수련회 거부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6개대에서는 대체수련회 준비 과정에 대해 충분히 밝히지 않았다) 이후 6개대 학생들은 비상모임을 통해 대체 수련회를 준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간사회는 고 간사의 직위해제가 IVF의 방향성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고 말했지만 대책위는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사건들이 IVF 보수회귀라고 판단했다.
“5월6일 시국 연합기도회의 강연내용과 IVF 참여부분에 대한 기사가 기독교 연합신문에 실린 것으로 인해 이사회에서는 고직한 간사를 직위 해제시켰다. 이것은 고간사 사역의 방향성에 대해 내린 결정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간사 주도의 수련회 준비과정에서의 내용의 전면적 퇴보, 의견수렴 차단 등으로 IVF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던 6개대 학생들은 고간사 직위해제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 IVF 보수회귀라는 판단을 하고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와 IVF의 보수회귀에 대한 대책위’(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대책위는 수련회 보이코트를 결정하고 수련회 준비 중에 있는 간사님들과 조장들에게 알렸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할만한 아무런 장도 없었다. 장시간에 걸쳐 찬반의 의견들이 나오고 토론한 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수련회는 6개대 학생들과 서남, 동북지방으로 나뉘어져 치르게 된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수련회를 앞두고는 간사와 학생 간의 갈등이 극대화되었고 급기야는 특정 학교의 리더들과 특정 학생에 대한 비난과 해당 학생들의 제명 가능성이 언급된다.
“서남부 수련회를 앞두고 수련회 리더훈련에서 서울대 리더들을 배제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서울대는 IVF 활동에 특히 내용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수련회에 오면 서로가 곤란하니 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이유였다. 특별히 사회참여에 적극적이던 학생 한 명을 거론하며 도저히 그런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수련회에서의 이런 움직임과 함께 IVF는 복음전도를 위한 단체이니, 생각이 다르면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대책위, ‘IVF 방향성과 고간사 직위해제에 대해’)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 결정 후 서울지방 1~3년차 간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간사협의회를 구성하여 고 간사 문제의 중재 및 대체수련회 준비 중인 6개대 학생들과의 합의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고직한 간사와 상임대표간사협의회(이하 상대협) 간사들이 방향성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고 본 서울지역의 1~3년차 간사들 역시 비상 전국간사모임(6월19일)이 끝난 후, 그리고 학생들이 수련회를 거부하고 대체수련회를 준비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후(6월20일) 비상 평간사협의회(이하 '평간사회')를 구성하였다. 평간사회에서는 (1)고직한 간사 직위해제 문제 중재 (2)대체수련회 측과의 대화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는데 아래와 같은 활동 결과가 있었다. (1)과 관련하여, 수련회 기간 중 고직한 간사의 직위해제문제를 규명하는 공청회를 준비하였으나 문제가 방향성과 관련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수련회 강사로 와있던 송인규 전총무가 중재의 노력을 보임에 따라 이 문제를 상대협에 다시 위임하였다. (2)와 관련해서는, 학생들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담당간사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모색하였다. 수련회 최종 조장모임이 끝난 후, 이상인 간사는 비공식 학협임원모임에 참석하여 대체수련회 개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련회 안에서 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수련회 첫날 오전에는 평간사회 4명의 간사들이 대체수련회를 준비하던 김병규(학협회장) 및 박용덕(경희대87)과 만나 (1)수련회 내의 언론의 자유 보장, (2) 간사-학생 간의 동등한 발언권, (3)이후 문제에서 평간사 협의회와 연계, (4)서남/동북의 동등한 발언권 등을 조건으로 학생들이 수련회를 참석하겠다는 동의를 얻었고, 6개대 대표들은 최소한 화요일까지 수련회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모임 이후의 접촉에서 6개대 대표들이 평간사회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결국 대체수련회가 독립적으로 개최되었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평간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체수련회가 독립적으로 개최되자 서남, 동북 수련회도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진다. 이에 간사회에서는 두 지방의 학생대표 3인을 각각 선출하여 대체수련회측과 대화에 임한다.
“학생들은 이미 6개대가 방향성 문제를 제기하여 수련회를 거부하고 있음을 알고 수련회에 참석했다. 학생들은 수련회에 집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정상적인 수련회 운영이 어려움을 알게 된 간사회에서는 6개대 학생들의 일방적인 의견만을 듣고 수련회 진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부 학생들과 만나 대화하는 한편, 당일 밤 긴급히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그동안 있었던 사태전개 과정과 평간사회의 중재과정을 보고하고 이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였다. 서남지방의 경우, 월요일 저녁에 있었던 대표-간사모임에서는 3인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수련회 기간 중 소그룹 리더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간사회, 동북수련회, 대체수련회를 오가며 수 차례의 모임을 가지며 사태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수요일, 서남지방의 3인 대표와 동북 대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1)간사와의 협력, (2)양수련회의 연계, (3)대체수련회와의 대화를 위해 총 6인의 위원들(서남, 동북지방 각 3인)을 추가하여 대체수련회 측과의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체수련회에서 제안한 방학 중 방향성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북, 서남 6인 대책위의 노력으로 여러 사람의 권고가 받아들여지고 대체수련회측의 방향성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져 공시적인 방향성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간사회와 대체수련회측 사이에는 화해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간사대책위에서는 (1)간사회를 근거 없이 보수회귀로 규정하였던 것에 대해 사과문을 발표하고 (2)자숙하여 농활의 전면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7월3일) 6개대 대표 중 이때 참석하였던 4인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간사들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찾아 다니며 중재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수련회 문제 외에도) 힘들게 이루어낸 합의나 구두 약속 후 실제로는 학생들이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더욱 학생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고 이는 간사-학생 간의 갈등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한다.
**고직한 간사 면직 사유
간사회와 대책위의 중요한 입장 차이 중 하나는 고 간사의 면직 사유이다. 대책위는 이것이 고간사의 사역의 방향성 문제이며 따라서 이는 IVF 보수회귀의 시발점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간사회는 방향성의 차이가 아닌 간사회 내부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고직한 간사가 제출했던 서신은 현재 자료집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당시 IVF 총무의 서신에서만 그 이유가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고직한 간사는 오랫동안 IVF의 간사로서 학생운동을 통한 복음화 사역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에 고직한 간사가 IVF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된 것에 대해 저를 비롯한 모든 간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고직한 간사가 마치 기존의 간사들과 방향성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소위 보수회귀적인 간사들이 고직한 간사를 몰아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고직한 간사와 기존의 다른 간사들은 신학적인 면에서 또 방향성 면에서, 약간의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큰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고직한 간사가 면직되게 된 것은 단순히 간사회 내부의 문제였습니다.” (총무, ‘고직한 간사 면직에 관하여’)
간사회에서 발표한 문건 ‘6개대 형제자매들의 대체 수련회를 바라보며’에는 좀더 자세히 그 사유를 밝히고 있다.
“고간사님의 징계사유는 6개대 대책위가 주장하는 바 ‘시국기도회 참여’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 빚어진 결과 즉, 기독교 연합신문에 왜곡 보도된 사실에 대해 고간사님이 아무런 도의적 책임이 없다고 하시며, 그에 따라 이사회에서 요청한 정정보도 내지는 사과광고 개재요구를 거부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기청협(기독교청년협의회), 복음과상황 편집인 등의 일을 이사회의 사전 동의 없이 한 것에 대한 중지요청 중 복음과상황 편집인만은 계속하겠다고 한데 대한 징계였습니다. 또한 이와 별개로 상임대표간사협의회와의 대립이 있어왔으며 이는 NCD의 업무 부장에 대한 견해차이와 고간사님의 사역평가에 대한 이견으로 빚어졌습니다. 따라서 6개대 대책위의 주장대로 방향성 문제와 관련된 징계나 평가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간사회, ‘6개대 형제자매들의 대체 수련회를 바라보며’) (계속)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4)
/김용주
4. IVF 6개대 사태
앞의 기사는 당시 기독진보매체였던 복상이 바라본 ‘IVF 6개대 사태’의 전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좀더 자세히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물론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본 사건을 다룸에 있어 서울지방간사회(간사회)가 발행한 ‘6개대 사태 자료집’(이하 자료집)과 IVF <소리>지 특집 ‘91년, 6개대 사태 돌아보기’를 주로 인용하였다. 자료집 인용은 서울지방간사회와 6개대의 ‘고직한 간사 직위해제와 IVF의 보수회귀에 대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입장 차이로 인해 각 사건별로 간사회와 대책위의 입장을 함께 서술하였다.
(1) IVF 당시 분위기: 진보적인 간사 주도의 사회참여 바람
“사회적 정의와 그리스도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던 중에 IVF 간사님께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적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회 참여에 대해 고민하던 청년들에게는 복음과 같은 말씀이었죠. 그것은 자기 삶에 정당성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청년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을 양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IVF는 다른 선교단체보다 먼저 이런 고민을 활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공정선거감시단으로 활동(주: 공정선거감시단에 IVF 멤버들이 참여. 복음주의 학생운동권에서는 전례 없던 정치 참여)하기도 했고 1988년에는 농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6개대 사태를 설명하려면 당시 IVF 내부의 사회참여 흐름과 학생자발운동 성향의 태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시종 간사는 당시 보수성 일변의 다른 선교단체와 달리 IVF는 몇몇 간사들에 의해 기독교세계관을 가르쳤고 당시에 공정선거감시단과 농활 등을 통해 사회참여 활동을 추진했음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당시의 신앙과 괴리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함께 고민하면서 갈급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 중심에는 특히 6개 대학(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건국대, 경희대, 광운대)이 도드라진 활동을 하게 된다.
“기독대학생들도 자기 신앙을 지키면서 동시에 사회적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섹트(sect) 안으로 도망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IVF는 약간 중간지대에 위치해 있었죠. 학생들이 공동체에 들어와 있지만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문제, 당시 시대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을 끌어안으려고 했으니까요. 대부분의 지부는 끌어안았지만, 그걸 실천적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던 팀들은 방법론을 거의 학생운동 쪽에서 많이 찾았죠.(중략) 당시 간사들 중에 급진적인 한두 분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강의내용 자체가 전통적인 신앙관 자체를 뒤흔드는 굉장히 급진적인(radical) 내용이었어요. 그런 분들이 건대와 경희대를 이끌었고, 고대와 서울대가 그 뒤를 따라갔죠. 광운대는 개척 지부라서 리더십이 강하지는 않았는데 농활을 같이 다니면서 그 네 학교와 친하게 지냈어요. 6개대 중에서 광운대와 이대는 방향성이 달랐다기보다는 단지 그 네 대학과 친했을 뿐이었죠.”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 진보적 운동의 중심에는 당시 복청의 멤버였던 고직한 간사가 있었다. 그는 IVF 내부에서 사회참여의 방향성을 연 선구자로 평가된다. (당시 고직한 간사의 평가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인용한 이시종 간사의 시각에 의지하였음을 밝힌다.)
“고 간사님의 리더십 스타일이 독특하긴 했지만, 이분은 70년대 학번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당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쳐 뚫어내신 분이시죠.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를 하셨고요. 고 간사님이 IVF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부분을 열지 않았으면 오늘의 위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IVF는 없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죠. 선교한국 운동, 학복협 운동도 견인해내셨고 90년대를 연합의 시대로 여신 분이니까요. IVF에서 고 간사님의 역할은 굉장히 큰 것이었죠. IVF운동이 80년대 후반에 놀랍게 성장할 수 있도록 시대의 이슈를 잡아낸 것도 고 간사님의 역할이었어요.” (이시종,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고직한 간사는 당시 IVF에서 사회참여의 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학생자발성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고 간사가 꿈꾼 복음주의 연합학생회는 전향적인 시도였지만 몇 년 뒤 그가 직위 해제된 이후 연합회는 간사회와의 심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이 당시에 IVF 사회 참여 운동에는 그 물꼬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고직한 간사님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고직한 간사님은 탁월한 운동가였죠. 그 분은 IVF가 캠퍼스를 장악하는 꿈을 꾸셨습니다. 지금의 대학 총학생회의 연합체와 비슷한 전국적인 복음주의 학생회인 "연합학생회"를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IVF내에서 연합학생회장을 뽑고 전체 학생회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하셨죠. 또 학생들이 총학생회와 동아리 연합회장에 출마하는 것을 북돋았습니다. 많은 의식 있는 선배들이 고무되어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있다. 가장 큰 부분은 시대적 상황 가운데 전향적 시도를 많이 이루었지만 신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강조하지 않은 점과 IVF 타간사와 충분한 소통 없이 일을 진행하여 운동의 내적 추진력을 얻지 못한 점이 그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주의적 마인드가 부족했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학생들과 간사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고직한 간사님이 간사들과 충분히 대화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간사회에서 어려움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김: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간사회에서 내부적으로 정리를 해 내지 못한 면이 있어요./ 강: 아마 간사회와 합의되지 않는 내용들에 대해서 답답해하시다가, 마음이 맞는 몇 사람과 얘기하다 보니 사실상 나머지는 배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 이분의 생각이 워낙 앞서가셨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좇아오기 힘들었다고도 하더라고요. 간사님들 중에 로잔을 아셨던 분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호주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로잔을 아셨기 때문에 그걸 소개하시고 원론적인 부분을 여셨죠. 그런데 그것을 실천하는 단계에서 사태가 수습이 안 되었던 거죠.”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따라서, 고직한 간사로 대변되는 진보적인 IVF 간사들이 영향력을 끼친 사회참여과 학생자발운동 방향성은 신학적 기초의 부재와 기존 학생운동과 방법론의 혼재 속에서 충분히 체화되지 못한 채 ‘6개대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IVF에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부족했으며 각론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모델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델을 기존 운동권에서 따오게 되었고 노동자나 농민에 대해서 이해하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사실 복음주의권내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히 논의가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서 이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신실한 선배들은 복음주의와의 균형 속에 이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지만, 후기 후배들은 기초 영성이 부족하여 복음주의적 마인드의 기초 없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신학적 전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89년에서 90년 LTC때 대상자의 삼분의 일이 그제서야 영접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 참여 운동론의 이론을 바깥에서 들여오다 보니 신학적 이탈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학생운동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정리하자면 간사와 학생 간의 갈등으로 붉어진 6개대 사태는, 사실상 고직한 간사로 대변되는 IVF 내부의 사회참여, 학생자발성에 대한 운동 전략이 간사회와 이사회 전반적으로 소통과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시대적 사명에 갈급해있던 당시 학생들의 지지 속에 불안한 성장을 하다가 고 간사의 부재 속에서 신앙적으로 미숙했던 학생들에게 그 책임이 과하게 전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6개대 사태를 경험한 당사자들은 “6개대 사태에서 학생들과 관련된 부분은 미미하”며, “6개대 학생들한테만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정확하게 없었다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 제가 볼 때, 6개대 사태에서 학생들과 관련된 부분은 미미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미성숙한 간사회가 신학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것과, 사역 철학에 있어서 그 시대에 맞는 전략을 무엇으로 택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차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포괄적으로는, 우리 IVF 운동이 당시 상황에서 던져졌던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던 거죠. 당시 사회참여 문제에 대해서 이론적, 신학적인 문제뿐 아니라 실천적인 부분까지 대안이 있었다면, 우리가 그런 학생들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겠죠. 원론적인 차원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은 열렸는데 방법론까지는 못 나아간 거고요. 그러니까 6개대 학생들한테만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정확하게 없었다는 것이고 또 어떤 면에서 더 치열하게 고민해 내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2) IVF 연합학생회와 학생자발성
IVF 연합학생회는 고직한 간사의 주도로 88년에 시작되었다. 6개대 대책위측은 연합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88년 농촌활동의 문제의식과 학생자치기구로서 해야 할 사명에 대한 학생 스스로의 깊은 토론과 간사회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인 제1대 연합학생회가 대의원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으며 자기 사업으로 여름농촌활동, 체육대회, 창립제 등 대중사업을 통해 연합사업의 유의미성과 학생자발성의 내용을 채워갔다. 89년 제2대 연합학생회가 그 맥을 이어가는 가운데 본격적인 부서별 활동을 통해 학생문화 역량강화와 기독운동에 대한 헌신적 인자 배출, 자발적 활동의 내용 심화를 이루어갔지만 그때부터 간사회와는 사소한 마찰들이 있어왔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학생자발적 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연합회는 점점 사회문제를 놓고 간사회와 의견 대립을 갖는 조직으로 성장해갔고, 간사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학생들이 의사결정을 진행할 수 있는 구조의 특성 때문에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6개대 중심의 학생들이 연합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 모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이를 간파한 간사들은 추진력을 제한하기 위해 연합회를 협의회로 축소시키기에 이른다.
“문제는 ‘연합학생회’라는 이름이었어요. 연합학생회, 즉 연합체는 의사결정을 학생대의원들이 한다는 뜻이거든요. 간사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학생들이 결정할 수 있는 정도까지 법적으로는 규칙을 만들어 놓은 거였어요. 연합학생회를 만든 이유는 당시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필적할 만한 학생조직 - 기독교적인 멘탈리티(mentality)를 가지고 사회변혁을 하고 복음도 전할 수 있는 - 을 만들 수 있다는 포부로 조직했기 때문에, 사회참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거기에 올인을 했고 그랬기 때문에 파워풀하게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에서 출발하니까, 특히 급진적인 지도그룹이 있었던 4개대(광운대, 이대를 제외한)의 멤버들은 연합학생회를 장악하려고 목숨을 걸었어요. 그렇게 운동에 너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니까, 그 의도를 간파한 간사들은 ‘연합학생회’를 ‘학생협의회’(학협)로 바꾸려고 했죠. ‘연합회’는 학생들이 의사결정을 하면 모두가 다 따라야 하는 구조이지만, ‘협의회’는 모두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거든요. 그래서 협의회로 바꾸려고 했고 끝내 바꿔냈죠. 그러나 학생들은 내용적으로는 계속 이것을 연합체로 가져가려고 했어요. 6개대가 분리되어 나간 후에 6개대 쪽 학생들(지도그룹)이 ‘한기연’이라는 이름을 만든 이유도 연합학생회라는 이름의 문제의식에 자기들의 이상을 담아가려고 했던 측면이 있죠.”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간사들은 연합회를 학생협의회(학협)으로 변경한 후 간사 지도 거부 태도 등을 이유로 임원을 재선출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언급하게 될 농활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학생-간사 간의 신뢰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으며 이 때 발생한 소통의 부재가 결국 6개대 사태를 대화로 풀지 못한 채 파국을 맞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90년 10윌 서울지방에서는 제3대 연합학생회 임원구성을 준비하였다. 변성렬(고대88)은 담당간사의 사전동의 없이 학협대표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그 동안 학생이 간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왔던 태도 등을 볼 때 연합학생회 대표로서 부적절함을 들어 후보 사태를 종용하였으나 변성렬은 이를 거부하였다. 간사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대표자회의에 정식으로 통보하여 문제 제기하였으나, 가을 대표자 수련회에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변성렬을 3대 연합학생회 대표로 선임하였다. 이에 간사회에서는 전체회의를 거쳐 변성렬의 방향성, 지도력, 자질 등을 문제로 제기하여 연합학생회의 활동을 일단 정지시키고 대의원 총회를 연기한 후, 임시 대표자협의회를 통해 연합학생회의 위상을 재검토하고 그 임원을 재선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임시대표자협의회의 논의를 거쳐 (1)연합학생회의 명칭을 학생협의회(이하 '학협')로 개칭, (2)김병규(건국88)를 학협대표로 재선출, (3)간사회의 지도하에 학협을 운영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변성렬에 대해서는 간사회의 지도를 받는다는 동의 하에 학협 총무로 임명하였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 2월 27일 학생 대의원총회(경희대)에서 인준 받았다.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이에 대해 대책위는 학협 문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상대협은 제3대 연합학생회 회장, 부회장의 선거결과를 묵살하고 연합학생회는 학생협의회로 위상을 추락시키고 회장으로 추대된 학생마저 간사의 발언과 강요로 회장 선출이 무효화되었고, 연합학생의 무용론까지 거론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제3대 학생협의회가 꾸려지고 회장 김병규, 총무 변성렬, 부회장 이정아, 서기 강병도, 회계 한명호 등이 선출되었다. 올해 들어서는 7월1일, 학협 회장과 총무에 대한 불신임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로 결정이 난 상태이지만 9월7일, 간사-대표자 협의회에서 대표간사들이 부결안을 무시하고 불신임안이 제출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 일사부재의 원칙마저 무시하는 월권적 행위이며 직접적 연계가 없었던 학협기구를 개별적 사람이 암묵적 지지를 표했다는 추상적 이유로 해체시켰던 것이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사회참여 문제와 학협을 둘러싼 학생자발성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던 학생-간사 진영은 갈등 상황 가운데에서 91년 ‘강경대 사망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3)
/김용주
3. 한국기독학생 운동
이제는 본격적인 ‘6개대 사태’의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관심을 87년 전후의 기독학생들에게로 집중하려고 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6개대 사태 당시의 한국 사회와 IVF 내부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화가 달성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기독학생운동의 보수-진보 양극화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1)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비신화화
“한국사회는 '87년 민주화 투쟁과 80년대말 밀어닥치기 시작한 사회주의권의 퇴조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형을 양산하고 있었다.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시민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대중운동의 발달과 6공화국의 등장이라는 형식적 민주화 과정은 그동안 운동권이 가졌던 무조건적 윤리적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운동을 비신화화시켰다. 급격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보수집단에게는 '자본주의의 승리론'을, 운동세력에게는 희망의 부재현상을 낳았고 국민들의 안정회귀 심리는 사회보수화 현상을 야기시켰다. 급기야 희망이 없는 시대, 이데올로기를 말하면 우스운 시대가 되었다. 이 간극을 비집고 시민운동이 등장하였지만, 아직 책임 있는 운동세력으로 성장하기에는 미약한 실정이다.”(이종철 기자, <복음과상황>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
87년 이후 민주화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퇴조가 학생운동의 위축을 가져왔다. 복상 이종철 기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따라 교회도 원래의 보수성을 넘어 더 강력한 보수집단으로의 역현상이 있었다고 진단한다.
“기독학생운동의 조류도 일반 사회운동의 조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새롭게 변화된 환경을 맞이하여 시민운동, 윤리운동노선이 교회 전반적으로 인정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전의 80년대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도전에 방어적, 수세적이었다는 점에서 - 즉,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모순보다는 유물론 사상에 대한 경계심리가 더 컸다 -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이념의 급격한 퇴조는 한국교회를 원래의 보수성으로, 또는 더 강력한 보수집단으로 회귀시키는 역현상을 빚기도 했다.” (이종철 기자, 같은 기사)
따라서 80년대를 살았던 기독학생들은 점점더 양극화 현상을 띄게 되는데, 한쪽은 민주화 물결로 말미암아 더욱 열광적인 근본주의 신앙으로 회귀하게 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광주항쟁과 운동권 학생들이 고문당할 때 어떤 행동으로 동참하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인해 이제라도 보다 급진적인 연합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두 극단적인 방향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2) 보수적인 기독청년운동
물론 80년대 초부터 한국사회 보수성향의 주류 기독교는 탈정치적인 성향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과거 광주항쟁이 있던 같은 해, 한국교회는 ‘세계복음화 대성회’라는 엄청난 규모의 집회를 치른 전력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80년대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그 해 8월에 여의도 광장에서 '세계 복음화 대성회'라는 초유의 대집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민학교 동창회까지도 허가를 맡아야 했던 당시에 정권은 무슨 이유로 이런 대형 집회를 허락했는지 모르지만 그 집회의 주된 논조는 "민족의 난국타개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회개하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자"였다. 원수마저도 품어야 한다는, 그래서 가진 자, 가해자는 용서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이고, 그에 대해 잘못을 질타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무지한 자가 되는 거룩한 이타심.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초월적 수동주의, 선교이데올로기 속에 한국사회의 모순은 정당화되었고 교회의 모순은 회칠한 무덤처럼 덮여 갔다.” (이종철 기자,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
특히, 6.29선언 바로 전 해인 86년 캠퍼스에서는 한쪽에서는 운동권 학생이 분신하는 일이 일어났고 반대쪽에서는 ‘예수대행진’이라는 보수 기독학생들의 집회가 열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특히 김회권 목사는 ‘예수대행진’을 기획한 한사랑선교회 중심의 학생들은 운동권 학생들을 향해 ‘자살을 선동하는 마귀의 영’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며 일대일 대결구도를 만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예수대행진운동은 공개적이고 반운동권적인 대항 퍼포먼스 성격의 집회였다. 1986년 오월제 행사 기간 중 문익환 목사님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대중 집회 연설을 했다. 문 목사님이 “전태일 열사의 영이여~”를 외치던 상황이었는데, 학생회관 4층 옥상에서 서울대 원예대를 다니던 이동수가 투신자살을 한다. 한사랑선교회 소속이었던 김한식은 대학생을 선동해서 자살시키는 것은 마귀의 영이라며, 마귀의 영이 점령한 아크로폴리스를 우리가 지배해야 한다면서 꽹과리 치고 나팔 불며 행진하는 예수대행진을 기획했다. 나는 그게 옳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기독 동아리 일부가 김한식이란 인물을 따라갔고, 채플연합운동을 했던 친구들도 사상적으로는 크게 동조하지 않았지만, 운동권과 1대 1로 맞대응하려는 그 큰 흐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결의 일환으로 캠퍼스 내에서는 운동권과 기독 학생들 사이에 대자보 싸움도 있었는데 예수전도단과 한사랑선교회가 주도했다.” (김회권, <복음과상황>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류대영 교수는 8-90년대 격변기에 보수 교회 안에서 기독청년들의 고민과 뒤늦은 각성, 참여의 움직임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해볼 때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군사독재에 협조한 보수 교회의 지도자들의 이중적 행태, 로잔 언약을 통해 사회참여의 틀은 마련했지만 그 실천에서는 너무 온건했던 보수 기독인들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식의 투쟁에 동참하지 못했던 당시 기독학생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참여적인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넓은 의미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학적 전통에 속하는 한국의 교회는 1980년대의 파괴적인 혼란과 아픔 속에서 줄곧 침묵을 지켰다.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 “인본주의적 사회참여는 위험하다”, “민주화 세력 속에는 ‘불순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다”는 등의 논리는 보수교회가 1980년대의 상황 속에 침묵하는 데 충분한 신학적 명분을 여전히 제공하고 있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는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대표성을 가진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군사독재에 협조했다. 로잔 언약을 비롯하여 사회참여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밝힌 복음주의적 선언서와 신학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사회참여의 당위성에 관한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어가는 와중에도 그것을 실천하는 보수적 기독교인은 극히 드물었다. 1980년대의 한국 상황에서 사회참여는 “신학”보다는 일차적으로 “용기”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여는 곧 핍박과 고통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당위성은 즉각 실천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리고 “구조변혁”보다는 “개인의 변화”를 우선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개인윤리 차원의 사회참여는 자기 몸에 불을 지르는 극단적 방법으로 대표되는 극한의 투쟁상황에서 당당하게 실천되기 어려웠다. 이 점은 청년, 대학생들이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윤실은 보수교회 기성세대가 처음으로 조직한 사회참여 운동이었지만 청년들에게 “너무 온건”하게 보여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 시기의 화두는 민주화 쟁취, 민족통일, 민중해방 등 무거운 주제들이었다. 이 점에서 참여적 복음주의 청년, 학생들은 기성세대보다 몇 발 앞서가고 있었다. (중략) 1980년대의 한국적 상황을 더 깊게 이해하고 행동하려던 복음주의권 젊은이들은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진보적 상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보수교회 교인들 일부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집단행동을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권의 종말이 눈앞에 보이고 민주화운동이 시민운동으로 확대된 시점에 이르러서였다. (류대영, 같은 책)
(3) 대학기독신문과 기문연의 조직
이러한 기독학생들이 시대적 상황 가운데 고민하던 중 보수 교회 출신의 청년들 몇몇이 해방신학 모델을 본떠서 공동체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문화연합운동(이하 기문연)의 시작이다.
“보수교회 출신 청년들이 시작한 기문연이 해방신학에 기초한 남미 천주교의 사회참여 모델을 수용하여 봉천동의 빈민촌에 “기초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기문노련”이라는 조작된 공안사건으로 고통을 겪었던 시행착오는 이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류대영, 같은 책)
당시 멤버였던 김회권 목사는 자신의 글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종철, 이승재, 최은석, 박정수, 유욱 등 5명이 어느 날 신림2동에 있던 나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예수대행진운동으로 지치고 좌절한 마음을 안고 밤새 치열한 고민을 하다가 새벽에 우리 집에 온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문필가가 필요하다며 기독언론운동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종철 등의 리더십으로 1986년 10월 <대학기독신문>을 시작했다. 그 신문의 주 필자는 나를 비롯해 박영범, 이종철, 박문재, 이문식, 최은석, 이승재, 이덕준 등이었다. < 대학기독신문>과 최은석, 이승재, 유욱, 이종철 등이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서 만든 기문연은 거의 같이 움직였다고 보면 된다. 기문연에서 공부하던 이들이 <대학기독신문>에서도 활동했다. 이 청년들이 초기에는 이문식 목사, 박문재 전도사, 박영범 목사, 그리고 나의 공동 지도 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박문재 전도사가 장신대 신대원 2학년 때부터 독점적으로 이끌기 시작했고, 청년들과 봉천5동으로 집단 이주해 공동체 실험을 시작했다. 이문식 목사는 당시 구로희년교회를 목회하고 있었고, 박영범 목사는 대학촌교회 청년부 사역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나는 ESF에서 사역을 계속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문연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미치게 되었다.” (김회권, <복음과상황>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4) 기문노련 사건과 복음주의청년연합, 그리고 복음과상황 창간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문화노동운동연합(기문노련)으로도 이어졌다. 위장 취업을 장려하지 않았으나 이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 중에는 노동자로 사는 청년이 많았다. 이 그룹의 핵심 멤버였던 최은석 등을 중심으로 구로공단 지역에서 야학을 하거나 모여서 스터디를 하는 등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최은석이 작성한 서류가 발각되어, 공안 사건으로 비화된다. 그 결과 모임이 해체되고 <대학기독신문>도 압수 대상이 된다. 그것이 ‘기문노련 사건’이다. 당시 9시 뉴스에도 2분 정도 보도됐다. 11명이 경찰에 잡혀가 4개월 이상 감옥살이를 했다.” (김회권, 같은 기사)
‘기문노련 사건’ 이후 공동체는 자연스레 해체되었다가 이들은 다시 복음주의청년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때 IVF로서는 6개대 사태의 핵심인 고직한, 한철호 선교사가 합류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당시 IVF의 진보적인 사회참여 성향은 국제 IFES 조직이나 한국 IVF 내부로부터 기인했다기 보다는, 복청 회원들 간의 스터디와 활동을 통해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특히 당시 멤버였던 고직한 간사는 이후 서울지방 IVF 타간사 및 이사회와의 불협화음을 내다가 결국은 직위해제 과정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보더라도 IVF는 복청의 영향 속에서 기독교 사회참여의 논리를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10월인가, 내가 <대학기독신문>에 사회변혁론적인 장문의 글을 기고했는데, 당시 합동신학교에 다니던 강경민 목사가 나를 찾아와 복음주의청년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강경민 목사는 당시 홍정길 목사가 시무하던 남서울교회에서 박철수, 이문식 등 청년 그룹과 겨자씨선교회를 만들고 아모스 스쿨이라는, 마치 요즘 기독청년아카데미 같은 강좌를 매년 열고 있었다. 강경민 목사의 동역자들인 박철수, 이문식과 김호열과 김회권, IVF의 고직한과 한철호 등이 합작하여 복청을 만들었다. 성인경, 민종기 등이 조금 늦게 복청 멤버로 합류했다. 1987년 4월에 내가 ‘복청 선언문’ 초안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남서울교회에서 복청을 만들기 위한 기도회를 시작했다. 복청의 대표는 박철수 목사가 맡았다. 나는 통일분과 위원장을 했다. 외국에서 돌아온 서경석 목사, 조성기 현 예장통합 사무총장 등도 이 모임에 들어오고 싶어했으나 함께하진 않았다. 복청을 모체로 복음주의청년학생연합회(복청학련)를 만들었고, 최초로 한 일이 1987년 대선 당시 공명선거운동이다. 직선제 도입 후 첫 민주 선거에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운동이었다.”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5) 한국 IVF 개혁운동과 6개대 분열
기독학생들이 속한 선교단체 중 진보적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IVF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종철 기자는 IVF가 선교단체로서는 전향적인 노력을 시도했지만 선교단체 특유의 보수성을 깨지 못하고 내부적 갈등 국면에 처했다가, 결국은 급진적이었던 6개 대학지부가 분리되어 나오게 되는 진통을 겪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이른바 IVF의 ‘6개대 사태’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우선은 이종철 기자의 연재 기사를 인용하고 6개대 사태를 보다 깊게 다룰까 한다.
“선교단체 내부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운동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IVF내에서 시작되었다. '87년 대선운동을 하면서 고양된 의식은 IVF 자체가 역사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88년 가을에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연합학생회를 구성한다. 연합학생회는 대학간 펠로십(fellowship) 차원을 뛰어넘어 밑으로부터 학생연합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캠퍼스 내에서의 상황적 요구를 수렴할 수 있게 하였고, 목적의식적으로 하나님나라운동의 역사성을 기독학생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한다. 이 연합학생회는 방학 중에는 대규모적인 농촌봉사활동을 실시함으로써 현장과의 만남과 그를 통한 의식화를 꾀하였다. 일부 선진적인 기독학생들은 겨울방학 중 공활을 수행하기도 했다. 서울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부산에도 연합학생회가 결성되는데, 이 모임은 농활, 통일심포지움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위로부터의 지도나 간섭에만 무조건 순응하는 형태가 아닌 밑으로부터의 의사를 결집 수행하는 참다운 학생자발운동, 주체적 기독학생운동의 모형이 창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개혁운동은 선교단체의 강고한 틀을 깨지 못하고 견제를 당함으로써 결국 3기 집행부 때에는 학생협의회 차원으로 축소되고 '92년 내부 진통을 겪으면서 6개 대학지부가 IVF로부터 멀어져 나와,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한기연)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진보적 복음주의 운동의 열악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종철, 같은 기사) (계속)
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2)
/김용주
2. 한국의 정치적 상황
6개대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기독학생들이 로잔 언약에서 기독교 사회참여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80년대에는 광주민주화 항쟁이 있었고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잦은 고문이 가해졌다. 6개대 사태 당시 ‘의식화된’ 학생들에 대한 불편한 입장들을 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80년대 학생운동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학생들의 다수가 광주항쟁에 대한 죄책감과 동년배 학생들의 고문에 의한 죽음에 깊은 분노를 느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주로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를 인용하였다.
(1) 광주 민주화 항쟁
5·18 광주항쟁은 영화 <화려한 휴가>로 인해 이제는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 간략하게 사건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가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개헌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 2개의 대대가 진주했고, 18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시작된 비상계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차 시내 중심가로 퍼졌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드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중략)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 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오줌 먹이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트기, 손톱 밑에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중략)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 지역에 장난 삼아 총질을 가했다. 이 학살에 대해 송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 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참상에 대해 전해들은 이십 대의 젊은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며 학교를 다녔을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광주항쟁 이후로 80년대는 운동권의 데모가 그치지 않던 시기였고 자연히 당시의 대학생들은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담론적 고민이 주를 이루었으며 기독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시종 간사(당시 학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 캠퍼스 상황은 지금 학생들이 전혀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정치적 문제에 캠퍼스가 집중하고 있었고 아픔도 많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 분신하거나 투신한 사람을 수십 명이나 봐왔습니다. 심지어 DPM(아침기도모임) 갈 때 여기저기에 피가 흥건히 고여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 크리스천도 동일하게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정의부분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인 대답이 없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신앙을 잃었습니다. 교회에서 고등부회장을 했던 사람이 총학생회 회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학생운동권에 투신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2) 독재정권의 고문 탄압
80년대 중반은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극에 달하는 시점에서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잡혔고 고문을 당했다. 그 중 최근에 고인이 된 김근태 전의원의 고문 사건과 고문 도중 죽어간 박종철 사건을 통해 당시 학생들이 느꼈을 캠퍼스에서의 심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김근태 고문 사건
"1985년 10월 29일 5공 정권은 학내 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 (38,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각 신문은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이 사건은 흔히 ‘깃발사건' (혹은 민추위 사건)으로 불려져 왔는데, 이는 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5공 정권이 급조해낸 것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민청련이 배후 조종세력으로 몰려 김근태 등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수배자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연행돼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비극을 겪게 된다." (강준만, 같은 책)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김근태 전 의원이 고백한 장문의 고문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25일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중략)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릎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중략)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준만, 같은 책)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수사관들은 1985년 10월의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추궁하였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조사실 안의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 앞으로 데려가 물고문을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을 가지고 박종철의 양손과 양발을 결박한 다음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박종철의 머리를 물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빼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물고문에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결박 당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 과정에서 욕조의 턱에 목부분이 눌려 박종철은 숨을 쉬지 못했고, 결국 경부압박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박종철의 죽음이 알려지자,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추모제를 가졌는데, “누가 우리 친구 종철이를 죽였는가", "선진조국에 고문 살인 웬말이냐"는 플래카드 등이 학내에 내걸렸다. 1월 16일 오전에 화장한 박종철의 유골은 임진강에 뿌려졌다. (중략) 1월 17일 치안본부 특수대는 수사에 들어갔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박종철의 사망 사실을 시인하였다. 경찰이 배포한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해명성 보도자료는 세간의 비웃음과 더불어 분노를 유발케 했다." (강준만, 같은 책)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은 야권과 종교, 시민단체의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같은 해에 6.10 민주화 항쟁으로 나아가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1주일 뒤인 87년 5월 27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민통련, 종교운동단체 등의 재야단체들과 신민당, 민추협 등을 총망라한 발기인 2천1백 96명 중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국본)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민정당의 후계자 지명일인 6월 10일에 박종철군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박종철 고문 사건의 여파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를 무력화시킬 만큼 대단한 것으로서 6.10 항쟁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강준만, 같은 책)
(3) 6.29 선언
"범국민적인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폭탄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 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당시 노태우는 광주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약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 후보는 물론이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노태우의 구상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추인했다. 이에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준만, 같은 책)
결국 같은 해에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이 극에 달했고 당시 노태우 대표위원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제시하였고 이에 전두환 전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인다. 강준만은 이를 두고 차기 정권 획득을 위한 군사정권 나름의 전략이자 ‘전두환 전대통령의 자신감’의 발현이었다고 평가한다. 어쨌든 당시 분위기는 민주화가 성취되었다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공유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6개대 사태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화가 달성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이후 기독학생운동의 보수-진보 양극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열기는 급속히 가라앉았다. 아니 민주화가 다 이루어진 것처럼 들떠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보인 반응이 그걸 잘 말해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다음과 같은 시각도 있었다. “엄청난 대중투쟁 양상에 당황한 미국은 6.29 선언을 촉발시켰다. 6.29 선언은 대중투쟁이 쟁취한 성과이지만 전술적 후퇴를 통해 재반격을 노린 미국과 군부독재의 위장된 교두보라는 양면성을 띤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보진 않는다 하더라도 학생운동 진영이 손을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학생운동 진영은 7월 3일 연세대에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시국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학생들은 민주정부의 10대 강령을 제안하면서 6월 항쟁의 투쟁 방식에 대한 반성에 임하였다." (강준만, 같은 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