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매매 단상 3
- 목사님 단상. 1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몇몇 페친분들의 포스팅을 받지 않고 있지만 가끔 다른 페친의 좋아요로 그 분들의 포스팅이 쓰리쿠션 찍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도 교계에 스타급 목사님의 포스팅이 그렇게 내 담벼락에 떠서 할 수 없이 읽었다... 페친의 상당수가 목사님이라 자주 지적(질)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목사님들의 포스팅을 보면 그분들의 '욕망' 같은 게 읽힌다. 이른바 설교 욕구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나름의 정체성,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겨서인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 있어 거침이 없다.
흥미로운 건 글의 도입에 자신에 대한 약점 내지는 험담을 툭 던지는 게 상례인데 중반 이후를 읽다보면 그 약점에 대한 고백은 장대한 피날레를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에피타이저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라는 내러티브가 사례들을 바꿔가며 반복된다.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것이 흡사 미국드라마의 시즌2, 3로의 진화를 보듯 흥미진진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글들을 보면 조금 씁쓸하다.
어림잡아 개신교인 반, 비개신교인 반의 친구를 가진 내 입장에서 그런 글들이 반대쪽 분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하면 좀 오글거릴 때가 있다. 기온차가 너무 크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구획(교계내) 안에서는 좋아요 작렬이니... 그 프레임이 깨질리는 없겠으나, 내가 기대하는 포스팅은 좀 다른 것들이다. 페북의 특성상 좋아요를 유도하는 글들이 요구된다. 목사님들은 된장남처럼 자기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들을 자랑하지는 못하니 주로 자신의 거룩한 생각, 행실, 선행사례들을 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유명 목사님들의 회개거리, 실수, 분노, 망가짐,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고백들을 읽은 적이 별로 없다. 하다못해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하등한' 일반 성도들에게 기도부탁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요즘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극도의 갈등을 겪는 게 적나라하게 표현되는데(배트맨은 허리까지 부러지지 않던가) 우리네 유명 목사님들은 죄지을 틈도 없이 성공만 하시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초류향이나 레밍턴 스틸같은 실력자(?)이셨는지 전혀 일상사에 어려움이 없이 성도들에게 모범 사례들만 설파하신다.
아무래도 페북이, 목회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부족해요', '실패했어요' 같은 버튼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2013년 1월 3일
"백 미터 밖에서 보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거죠. 밖에서 페미니스트로서 발언을 하는 건과 현실에서 여성으로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의 사회적인 괴리가 큰 것 같아요. 반대로 생각은 정말 가부장적인데 인격적으로 여성을 대하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됐으면 그걸 실제로 표현해야 자기 것이 되잖아요. 생각과 태도의 괴리가 없는 것, 가능한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건강한 변화가 아닐까 싶어요."
“남자들도 쉽지 않은 건 알아요. 아내를 배려해야 한다는 게 이중적인 부담으로 느껴지죠.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것과 아내가 자기 이름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물론 남자들도 ‘나는 뭐 내 걸 챙기면 살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그래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갖게 되는 네트워크와 직함이 있잖아요. 여성들은 계속 가정에서 지내다 사회에 나갔을 때, 그 갭이 상당하거든요. 남성과 다른 코스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동일한 사회적 위치에 서기까지는 정말 힘들죠. 여건의 차이를 인정해주고 여성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 양혜원 님. 인터뷰 내용 중
솔직히 잘 의식하지 않았는데 '매를 맞는다'는 표현 자체가 대단한 '가부장적 창의력'이란 생각이 든다. 매를 때리는 경우에는 대체로 훈계를 하는 자와 받는 자를 규정하고 그 둘 사이의 관계에서 훈계 행위로 말로 하느냐 물리적인 힘을 가하느냐로 구분된다. 따라서 방법을 떠나서 '훈계 행위에 대한 긍정'이 전제된다. 결국 '매맞는다'는 의미는 아내가 남편의 훈계를 받는 존재임을 처음부터 암시한다.
'구타당한 아내', '아내 폭력', '폭행' 같은 대상과 행위를 명시한 표현이 아닌 가정폭력이라는 보다 큰 범주화로 포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매맞는 아내라는 말은 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구조적으로 접근한다면 여자가 출가하여 남편의 집안으로 들어가면 서열 최하위의 노동자가 되고 그 노동자는 그 개별 가정(부부)의 가사, 출산을 도맡아야 함은 물론 그 집안의 가부장적 질서에 잘 몸을 녹여야 한다.
명절 제사나 기일, 혹은 남편 집안의 대소사에 불참 내지는 무신경하거나 개별 가정에서 남편을 보필(아침 접대, 남아 출산,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가사노동 전담)에 부실하거나 귀가시간이 늦도록 회식에 참여하거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안해야 할 일들(흡연, 음주과다, 종교생활 집중)을 행할 시에 남편과 남편의 집, 본가에서는 개별 여성을 제대로(가부장적 원리대로) 훈육할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조직'에 들어온 신입 노동자인 여성은 국가가 법치를 내세우듯 유교주의라는 법도에 따라 여성을 '매'로 다스릴 수 있다. 우리는 교양인이니, 대부분의 경우에는 대화로 여성을 훈육해야 하겠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요즘 여성(아내, 며느리)들이 분위기 파악을 못할 때는 좀 강하게 우리 집안의 법도를 인지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말단 가족원(여성)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이 매를 들어라. 그리고는 사랑(성관계)으로 달래줘라. 이게 '매맞는 아내'란 말이 담고 있는 함의다.
내 생각이 과한가. 요즘 얘기같지 않은가. 불행히도 대답은 NO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은 교회 사역자들이 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해 비판한다. 대체로 나는 그 목소리에 공감하지만 때때로 목회자들이 세속/비세속을 정말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주식도 안 하고 룸싸롱도 안 가는 다수의 목회자들에게 있어 성/속 개념은 명확할 것이다. 물론 기업의 CEO급 목사들은 술도 먹고 주식도 하고 부동산도 사고 룸싸롱도 가고 바람도 피우시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런 분들은 다수가 정죄하니 오늘은 대상에서 제외하고. (물론 드러나지 않은 몇몇 분들의 루머들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도 오늘은 제외) 대신, 자신이 처음부터 근처에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세속의 금을 그을 줄 아는 이들의 자기의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는 길을 가다가 우물가에서 이방 여인에게 수작을 건다. 알고 보니 여인은 남편이 다섯인 부정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긴 대화를 주고 받다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복음과 그 메시야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요한복음 4장)
대체로 목회자들은 후반에 드러난 교훈에 꽂힐테지만 나같은 세속인은 초반에 예수님이 수작을 걸면서 주고받는 언어유희와, 그 대화를 지켜보는 제자들의 초조함(기이히 여김)에 꽂힌다. 땡볕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누가봐도 '문제의 여자'임을 알텐데 예수는 겁도 없이 그녀에게 무장해제의 자세로 대화를 시도한다.
예를 들면 한 목사가 길을 가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들어간 곳이 알고보니 영등포 집창촌 골목이었다고 치자. 아마 그는 깜짝 놀라 그곳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혹은 물을 달라고 했다가 물을 가져온 여인의 옷차림, 행색이나 말투를 경험하고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거나 반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무섭게 훈계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나라면 훈계까지는 아니라도 그곳을 피했거나 어쩔 수 없이 물만 얻어먹으면서도 불결하다는 느낌을 은연중에 표했을 것 같다.
예수의 뛰어남, 고결함은 자신이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 대한 존재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이슈를 접했을 때 자동적으로 하게되는 성속에 대한 판단 '이전'부터 자리잡은 그 영혼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앞잡이 같은 존재인 삭개오의 집에가서도 밥을 먹으며 희희낙낙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모범시민, 모범목회자들에게 알아서 악의 길로 달려들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모범적 성장 배경에서 배제시킨, 이른바 자기의에 기준한 판단으로 세속을 규정짓고 세속적인 삶에 불결함을 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세속주의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종교인들, 특히 개신교 배경의 목회자들에게서 예수의 얼굴보다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살던 탕자의 형의 얼굴이 자주 오버랩된다.
보수진영의 목회자들이 동성애자, 불신자, 미혼모, 혼전 동거관계에 대해 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진영의 목회자들도 쉽게 보수파 정치인과 논객들, 기업, 언론인들의 삶을 불결하게 여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또 가진자의 악행의 규모면에서 분명 동의되는 지점이 있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그 개별적인 인간 자체에 성속의 선을 너무 짙게 그어버리는 건 아닌가 우려감도 든다.
목회자 뿐 아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 믿는 개신교인 모두가 예수의 삶을 따른다면. 적어도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가지고 '자기의'로 삼는 일을 그치고 자신이 걸은 길에 대해 겸손히 동참을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세속주의에 대해 묵혀뒀던 나의 생각은 그렇다.
2013년 1월 7일
성하에게.
불과 6-7년전만해도 너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느덧 엄마 아빠가 '아들바보'가 되어 있구나. 삶이란 게 참 신기하지. 새해가 밝고 니가 아빠에게 "이제 나 다섯살이야. 아빠 나한테 까불지마"라고 말해서 엄마랑 한참 어이없게 웃었어.ㅎㅎ 빨리 크고싶어하는 네 동심 가득한 모습을 함께 해서 참 재미있고 기쁘다.
작년보다 더 말을 잘하는 너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는 아빠를 보며, 엄마는 아들의 '똘마니'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가끔 아빠는 네가 이제 다섯살 밖에 안 되었으니 아빠의 이 지극정성을 니가 기억도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좀 아쉽다. 기록으로라도 남겨서 묵혀두었다가 네가 철들면 생색을 낼까 싶다.
내 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하셨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나의 곁에 없었기에 함께 웃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오래된 앨범이나 생일 카드들을 보면 지금도 그 글에는 시를 쓰는 내 아버지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지만, 솔직히 그건 아버지가 글솜씨를 뽐내기 위한 것이지 아들의 소소한 일상을 깊이 관여한 글이 아니란 생각에 조금은 씁쓸하기도 해.
너에겐 그런 글자랑하는 아빠가 아니고 좀더 가까이에서 살을 부비며 웃어주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려고 한다. 한해도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마워. 성하라는 아름다운 영혼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 너의 똘마니 아빠가
2013년 1월 5일
2013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