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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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십대의 나는 "사람이 희망이다"라거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같은 말이 불편했다. 대학생 시절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사람 개개인의 관계성보다는 '구조적인 개선'이 시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러한 생각은 진중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중권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가장 문제가 혁명이나 근대화 과정의 갈등을 경험하지 않고 근현대 사상을 동시대에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모던을 건너뛰고 포스트모던 담론화에 치중한 나머지 도리어 사회 전 영역에서 논리적인 설득과 합리적인 사고, 이를 통한 합의점에 도달하는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근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래서 그 글 제목이 '백 투더 퓨처'였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혈연, 지연을 극복하고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실명으로 상대의 논리적인 맹점을 치열하게 비판하는 것이 정당하며 나아가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그가 가혹할 정도의 표현을 썼건 안 썼건 자신의 견해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면 상호가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미국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스타 시스템의 맹점으로도 보이는 인간 - 물론 이것은 소수의 선택받은 인간에 국한되지만 - 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인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연줄들을 끊고 어떤 개인이건 이상적 시스템 안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최장집 교수가 주장하는 보스 정치에서 정당 정치로의 이행,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논지의 말미에 붙이는 "구조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선행되야" 한다는 이야기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2.
그런 생각에 꽂혀서인지. 나는 지인들에게조차 '개새끼'라고 욕을 먹더라도 정당한 비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크고 작은 논쟁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언제부턴가 나를 "쌈닭"이라고 놀리기 시작했다.ㅠㅠ) 인간관계는 당연히 이슈 중심, 모임 중심으로 흘러갔고 나의 모든 시간은 어떤 막연한 목적성을 가진 조직(?)들에 사용되었다. 당연히 그런 공간에서조차 토론은 살벌했고 온오프를 오가는 상호 비판은 자주 작은 모임에서조차 분리에 분리를 거듭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심정적으로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성격이었다. 연애를 할 때도 헤어질 것 같은 혹은 헤어져야 할 것 같은 상황이 올까봐 미리 선을 긋곤 했다. 나의 논리와 나의 성품은 점점 충돌하기에 이르렀고 어느 순간 나는 멘붕이 되어 '일' 혹은 '이슈'와 관련된 인간관계를 버렸다.

그 시기 내가 뒤늦게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은 내게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료? 동역자? 뭐 이런 건 있는데 그냥 만나 술한잔 하거나 어깨동무하고 들어가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당구를 치거나. 뭐가 됐든 '그냥' 연락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알았던 친구들에게 당시의 난 항상 '바쁜 사람' 뭔가 모임이 많은 사람, 놀자고 하면 몇 개의 모임 이름을 대며 머리를 긁적이며 뒷걸음치는 사람일 뿐. 그러나 이제는 일이 없으면 마땅히 전화를 걸만한 사람조차 없었다.

친구도 없고(사실, 없었다기 보다 내가 그들을 밀어내버린) 제대로 놀아본 적도 없는.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고 시간이 나면 모임으로 약속을 빼곡히 채우던 나의 캠퍼스 생활. 그 끝물에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내 모습을 발견했다.

#3.
나이 서른을 넘기고서야 나는 새삼 친구의 중요성을 느꼈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직장 생활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나는 조금더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책으로만 만났던 사회 이슈들은 그 안에서 환원되지 않는 각기 다른 배경의 사람들의 이슈로 가득했다. 내가 생각했던 논리게임은 어떤 이에게는 정당했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부당하게 다가옴을 알았다.

구조적인 개혁, 변화에 꽂혀 있던 나는 사회문제나 조직의 문제를 보면서 결국 이것이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을 좀더 하게 되었다. 특히 몇몇 사람들이 조직 전반에 좋은 방향성을 제시하는가 하면 반대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어떤 조직은 아주 심각한 악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면서 이전 조직은 와해되기도 하고 회복하기도 한다. 빌 게이츠처럼 한명이 몇 천명을 먹여살리는 엘리트를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운 구조는 아무리 견고해도 사람이 금새 변화(개선)시키거나 망쳐 놓을 수 있다는 게 현실이라는 생각. 최근들어 더 많이 하게 된다.

요즘도 가끔 지인들에게 전화가 온다. 무슨 일 있냐면 '아니 그냥 해봤다, 잘 지내냐'는 말에 자주 나는 가슴이 뭉클하다. 그냥 연락하고 싶은 사람. 그 관계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요즘은 한다. 예전에도 자주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쓰다듬'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이십대에는 의지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모던보이'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한때는 '조직의 개새끼'가 되는 게 무슨 훈장이나 되는 줄 착각한 적도 있다.

기독교에는 회심이라는 개념이 있다. 선한 영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전적으로 그 영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내 속에서 선한 일들을 행할 동력이 생겨난다는 거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건 타인이 아무리 악한이라도 그가 회심의 과정을 언젠가 겪게 되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악인과 대치상황이 벌어지는 상황에서조차 사람 그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 죄가 된다. (설령 그가 MB라 하더라도.)

지금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며 "꽃으로라도 사람을 때리"면 안된다는 말들. 솔직히 이제는 구조의 변화보다 사람의 변화를 더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적이고 현실적이고 인간 냄새 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2/10/28 21:53 2012/10/28 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