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좌담회(첫 번째 정리 by 노종문)

일시: 2009.5.25. 19:30~21:30
장소: IVP 2층 회의실
참석자
양형주(목사, 대전초원교회)
김명윤(목사, 수서교회)
노종문(목사, IVP 총무)

노: 톰 라이트의 훌륭한 기여는 지난 세기의 성서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해 놓은 방대한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고, 복음주의적으로 잘 소화하여 해설해 줌으로써, 그 거대한 지식의 축적물을 교회가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물고를 터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 훌륭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 학문적 성경 연구와 교회의 선포를 연결시켜 주는 소중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톰 라이트의 중요한 저서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 그가 주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존의 유대인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세계관을 어떻게 전복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여러 면에서 전복시켜서 그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 동안 우리는 예수 믿고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이야기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성경적 종말론과 소망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이야기 세계를 다시 한번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위해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김: 저는 조금 비판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뭔가 한 두 단계를 건너 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같이 신약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굳이 여러 가지 문화적인 설명으로 회피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 질문을 제기한 것처럼 그 텍스트의 내용이 당시의 세계관과 신앙의 반영이 아니냐 하는 질문에 직면해야 하는데, 이 책은 단순히 텍스트 뒤로 숨었다는 느낌이 좀 듭니다. 텍스트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오늘날의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건너 뛰는 느낌이 든다는 거죠. 앞 부분에서 1세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텍스트를 설명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우리 시대의 상황은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가능성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이미 내려진 결론에 대한 적용의 장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 기대를 가지면서 읽어내려 갔는데 명쾌하게 안 풀린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사실 설교할 때 가장 걸리는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부활한다. 이게 어떻게 성립하느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건 나름대로 조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성경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두 사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이 책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적 사건이 되려면, 부활이 예수라는 특수한 경우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으로 인류와 죽음과의 관계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 되는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부활했답니다. 많은 증인이 봤어요. 근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 부활했으면 여기 있어야지. 그 사람이 부활한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되면 이건 아주 특수하고 희귀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은 될 수 있지만, 그걸 보고 나도 부활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저로서는 제일 큰 관심이었는데, 그 부분은 여전히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양: 어떤 내용이 들어갔으면 하는 기대가 있으셨습니까?

김: 말하자면, ‘그가 우리같이 되심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와 같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기독론적인 장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의 부활을 보고 우리가 우리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 하는 내용을 다루어주는. 예수님은 그때 부활했는데 우리의 부활은 아직 안 일어나고 있는 이 간극이 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있을 지 모르겠는데 우리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다는 거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 고리가 나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는데 그게 끝까지 안 나오는 거에요.

양: 그것과 관련해서 뒷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보증’이라는 말에는 ‘첫 번째 납입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첫 보증으로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되는 것이죠.

김: 아무튼 저는 그것까지 좀 더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얘기도 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관련해서 저는 또 승천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우리 가운데 있으면 간단한 문젠데. 도마의 경우처럼 누구든지 불신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서 만져봐, 하면 전도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도마 이후로 이천 년 동안 만져지는 예수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그 어간에 있었던, 제자들이나 목격자 사이에 있었던 그 사건은 그 후로 재현되진 않았습니다. 그게 승천과 재림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 활동하는 물질적 육신을 가진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우리가 보증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활 사건과 우리의 경험과의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이 질문은 여기서 명쾌하게 다루지 않았는데, 다 설명 됐다고 생각하고 비껴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은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망할 세상이다, 벼랑으로 가는 차 기름칠 해서 뭐하냐, 이런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행하는 모든 수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재창조 하신다고 설명하는 부분들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부활이라는 것이 1세기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말할 순 없을까 하는 의혹이 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각적으로 만져지고 경험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론을 이야기하려는 그 태도가 특수한 하나의 세계관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니냐, 서구적인 세계관과 연결되어있는 존재론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아닐까요.

노: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활을 설명하는 다른 어떤 세계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건인 것 같습니다. 보통 서구의 세계관에 두 가지 근원 즉, 헬라적 세계관과 히브리적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는 물질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물질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세계라고 봅니다. 톰 라이트가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부활은 창조가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믿는 세계관을 확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저도 아쉬웠던 점을 하나 이야기 하면, 책의 뒷 부분에서 실천적 대안과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행전이고, 성령님의 선교거든요. 한국 교회에는 성령님에 대해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성령님을 빼고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가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어, 성령님은?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지요. 지금이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면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역할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었으면 했습니다.

노: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성령님의 위치는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진술이 구체적으로 안되었는지 모르겠지만요. 성령님은 피조세계의 부활이라는 약속을 현재화하는 새 창조의 영이시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육체적으로 부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재하시면서도 임재하시는 그 미묘한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으로서 성령님이 계신 것이잖아요. 톰 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예수님이 교회와 지나치게 일치되면 교회는 예수님을 볼모로 잡고 승리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가 있지만, 예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지금 이 물질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죠.
 
양: 예. 그런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독자들이 오해하기 쉽죠.

김: 그래서 저도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 드는 것이, 이 정도 이해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이것은 알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건너뛰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예요. 앞부분에서 부활을 증명하고, 그 사건의 의미와 충격을 서술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이게 전제가 되었다면 그 다음은 실천으로 넘어 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더 친절한 징검다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100페이지나 200페이지 정도 늘렸더라면 하는 소망이 조금...

노: 이 책의 원제목이 Surprised by Hope니까, 주로 Hope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Hope의 핵심 내용은 부활이고, 부활만 일어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 있는 새로운 창조인 것 같습니다.

양: 사실 이건 엄청나게 충격적인 내용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Hope가 죽음을 이긴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떨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죠. 그 소망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이 세상을 장악한 악을 이기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에요.
그렇다면 사실 보증이라는 말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텔레비전을 살 때 돈을 일시불로 다 내지 않고 계약금만 주면 가져올 수 있잖아요. 그리고 집에 두고 계속 돈을 조금씩 내서 완전히 갚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부활도 우리에게 오는 거죠. 예수님의 부활이 첫 보증금을 내신 것과 같은 사건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상당히 뚜렷한 비전이 있고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 저는 부활이 개인의 부활을 담보한다는 차원보다는 온 세상이 부활을 위해서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지금 온 세상이 궁극적인 재탄생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 이게 역사의 의미다. 이런 말이 좀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복음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상당 부분이 소멸하거나 파괴되거나 망가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로 가니까 뭐 크게 소망스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회복의 비전, 고통과 고난 자체가 온전히 극복되는 그런 비전을 품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중에, 과거에 일어났던 슬픈 일과 고통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로 마지막만 좋으면 뭐하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부활과 재창조의 복음은 일부분만 좋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변혁되는 그 운동을 하나님이 지금 계획하시고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온 우주의 변화라는 점이 굉장히 새로운 기대를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종학씨의 [블랙홀 교향곡]을 읽었는데, 그 책을 보니 우주가 너무 넓은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우주라는 공간에 비하면 지구는 이게 뭐 진짜 너무 말도 안 될 정도로 좁은 공간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우주가 이렇게 넓은데, 만일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셨다면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공간의 낭비다. 그러므로 우주를 하나님이 만드셨을 리가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의 승천 이야기에 대한 해설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하나님의 통제실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그 곳에 들어가면 우주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런 위치가 된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상상도 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중에 저 넓은 우주를 다 사용할 계획을 준비해 두셨는지도 모르겠다.

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방금 제가 찾던 유비가 하나 떠올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웠던 것이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들과 경험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려고 했는데, 이제 부활이라는 곳에 지레의 받침대를 놓고 거꾸로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이 굉장히 신선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수많은 세계관적인 논의들을 청소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비유가 없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방금 떠오른 것이 뭐냐 하면 영화 [트루먼 쇼]입니다. 그 영화에서 트루먼이 완벽하게 지어진 스튜디오 세계 안에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장면에서 스튜디오 등이 하나 떨어집니다. 등이 떨어지는 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사건인데, 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세계 전체의 구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은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문은 사실 전체 공간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구명에 불과하지만 그 구멍의 존재 자체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우주론을 다 무너뜨리는 한 구멍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허구성을 한 점이 폭로할 수 있는 거죠.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싶었지만 뭔가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으면 이 한 점의 파워를 더 생생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양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사고에 길들여져 있어서 한 사람 보다는 수많은 사람의 증거를 찾는 것이죠. 단 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논하는 논리적 점프에 대한 부담감이 항상 있었는데 지금 얘기하다 보니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 천장에 구멍이 하나 뚫린 겁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또 다른 빛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죠.

노: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기독교 세계관에 관해 다시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이 현대의 다른 세계관과는 달리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닥에까지 내려가면 그 존재론적 기초의 기둥이 되는 사건이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단순한 선언적 명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며 그 사건 때문에 우주관 자체가 전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을 복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속죄 쪽에 너무 집중하다가 보니 부활이 복음에서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속죄마저 개인 구원의 문제와 죽어서 천국 가자는 식의 메시지로만 해석이 되어 버리니까 복음의 어떤 전복하는 힘이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양: 그런데 이 책이 제시하는 복음의 전복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복음 운동이 과연 그런 모습이었는가 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공동체가 탄생한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로마 제국 체제 전체를 정복하고 뒤집는 어마어마한 운동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우리가 보통 선교라고 부르는 정도, 즉,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레오바고 같은 데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옮겨가고, 교회세우고, 또 옮겨가고, 이렇게 된 거잖아요? 물론 얼마 후에는 환난과 핍박이 있고, 그 환난 속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 메시지가 포함된 요한계시록이 나오기는 하는데, 정치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복음 전파로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는 성격이 달라진다는 느낌이 사실 있는 것 같습니다.

노: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가 복음전파하는 모습하고 이 책에 나타난 복음의 전복성에 대한 해석이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말이군요.

김: 이 책에서 파루시아(왕의 현존)라는 말을 설명할 때 그 부분을 좀 언급하는 것 같아요. 바울은 누가 정말로 세계를 다스리는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복음과 상황] 인터뷰에서 김세윤 박사는 바울이 현실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두 가지 생각, 즉, 로마가 궁극적인 통치자는 아니지만, 또한 로마제국이 이룬 평화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주권자가 예수님이라고 선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굳이 그걸 가지고 로마제국과 대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다. 구원자. 이런 의미 자체가 상당한 정치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었음에도 그 극단으로는 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노: 그렇게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요구가 정치적 액션이 아니라, 뭐랄까 십자가의 길과 그 후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이런 것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어떤 정치적인 액션이 아니었고, 그냥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갔는데 정치적인 세력과 충돌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들이 받은 사명이 예수가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 정치적 핍박이 오면 받는 거고, 핍박이 없으면 즐겁게 또 계속 선포하는 것이었죠. 또 통치자들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잠정적인 권세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관하실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이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 초대교회의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사실은 로마 제국이 그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가 나온 거지 핍박이 없었다면 로마 제국을 그렇게 사단의 졸개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쓴 로핑크는 당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대조 사회라고 말을 하잖아요. 제자 공동체가 그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사회였고, 그래서 세속 체제와 너무나 대조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로마가 영향을 받아서 바뀌었다는 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글로벌 이슈를 갖고 적극적으로 액션을 취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끌어오는 노력 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이루고 그로부터 어마어마한 공동체적 변혁력이 생겨나는 그런 그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은 문제가 되는 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너무 욕을 많이 먹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의 변화보다 먼저 교회가 대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이런 부분이 이 책에는 생략된 느낌이 듭니다.

김: 무시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데 생략된 것 같습니다.

노: 저는 이 책이 제시하는 부활과 새 창조라는 비전을 중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새롭게 재구성 한다면, 그리고 철저히 그 패러다임에 맞춰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수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로마 제국 내에서 미미한 존재였고, 그들의 공동체는 변두리의 소수자 공동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복음전파는 전략적으로 보아도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오늘 한국 교회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적인 성찰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인 집권자들과 힘있는 교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 이 책에서도 잠깐 다루지만,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가진 내러티브 자체가 모던적이어서 발전과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현실을 해석합니다. 한쪽은 경제 성장을 통해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이고, 한쪽은 민주화 내지는 계급 투쟁을 통해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양쪽 모두 모더니티의 진보의 환상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내러티브는 그 틀 자체의 한계로 인해 약자의 문제라든지 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었습니다. 현 정권이나 한국교회의 일부 흐름도 힘으로 뭔가 밀어붙이고 제압을 하여 평화도 만들고 발전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던적인 스토리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이 내러티브 자체를 좀 새로운 것으로 대치하고 현실 정치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함이 필요한데, 이것은 한국에도 없고 미국에도 없고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더니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성경적인 내러티브를 써내야 할 과제가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약자 중심의 내러티브라든지, 출애굽 스토리와 같은 그런 종류의 내러티브로 한국 역사를 읽는 다든지, 뭔가 좀 다른 이야기로 우리의 삶을 읽고 그에 비추어 정치적 과제를 설정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양: 사실 부활의 능력은 십자가를 전제로 했을 때 오는 거잖아요. 십자가는 우리가 제일 약하고 무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건데, 사실 우리가 힘이 있을 때는 십자가가 사라지게 되죠. 저는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대안들이 교회가 어느 정도 사람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은 우리가 십자가의 무력함을 통해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됩니다.

노: 결국 이 부활이 소망이 되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며 경험되는 것인데, 부활 만을 강조하다 보면 아까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이 또 무시될 수 있겠네요.

김: 이 책은 여러 강연들을 엮으면서 정리를 했기 때문에 연결 부분이 느슨한 것 같습니다. 큰 덩어리는 두 가지인데, 부활에 대한 상세한 논의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현실적인 과제들 이 두 개의 큰 기둥이 있고 그 사이는 약간 느슨하게 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 한 권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 책은 복음주의적 사회참여를 위한 든든한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는 결정판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명목상으로만 가지고 있는 사회 변혁 운동들은 뭔가 신학적 기초가 부족했고, 반대로 보수적인 진영에서는 왜 세상을 개혁해야 되는지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는데,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최근의 복음주의자들의 논의들이 사회참여와 복음 사이의 튼튼한 다리를 놓는 좋은 기여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면서 내가 가졌던 당혹감은 내가 교회에서 만나는 청년보다 이 사람들이 더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 낫고, 의지도 강하고.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을 전도해서 우리 교회로 데리고 가면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오히려 교회의 청년들을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들에게서는 정말 이 사회의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느껴지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신앙 공동체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의 이기적인 자아와 죄성에서 벗어나서 정말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헌신하는 존재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꽁꽁 묶어놓고 있고,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 중요한 일들이 진행되니, 과연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손이 따로 하나씩 두 개가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어요.
요즘 나름대로 정리하는 생각은 끝이 다르더라는 거에요, 끝이. 인간적인 개혁이라는 것은 그 어떤 수많은 지뢰밭들이 있는 것 같아요. 죄성의 유혹과 성취의 결과물을 자기들이 취하려는 욕심들 때문에 개혁의 주체가 어느 순간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런 일들이 내 주변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종종 보이더군요. 부활과 신앙의 세계를 전제로 가지지 않은 인간적인 개혁이 갖는 수많은 덫들이 그때는 안 보였는데 지금은 조금씩 보이면서 정말 이 세상 개혁을 위한 토대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노: 이 책에서 톰 라이트가 약간 미묘한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는 경구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을 말할 때,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 이라는 표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라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이고, 하나님 나라를 정말 건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우리는 그 일을 기대하면서 지금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소명 받아 실행하는 것이고. 이런 긴장을 놓치면, 아까 말씀 하셨듯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또 성취감을 맛보려고 하고 뭐 이렇게 되는데, 그것은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천박한 수준에서 이해한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결국 하나님 주권에 의해서 오는 나라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큰 비전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것을 준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고요.
초대교회가 로마사회에서 노예제도를 왜 대대적으로 뒤집어 엎지 않았을까. 그런 면을 보면 초대교회는 알았던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직접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오는 나라인데, 그걸 기다리는 중에 우리는 그 첫 열매를 누리면서 축하하고 있는 공동체다. 그런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기뻐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거다 곧 이루어질 거다’라는 기대와 전망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그래서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예상보다 지연이 되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것 자체가 크게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첫 열매고 하나님 나라를 조금 미리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하나님이 정하실 것이다’라는 패러다임 자체가 크게 바뀐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게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양: 근데 조금 아쉬운 것은, 지옥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으면 좋았겠는데…

김: 저도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양: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 대해서 천국 못지 않은 관심이 있잖아요. 단테의 신곡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옥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나오거든요. 이 책이 지옥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 정도의 말로 마치니까 아쉽더라구요. 물론 신약성경이 지옥에 대해 더 자세히 제시하지 않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요.
오늘날 교회에서는 지옥을 설교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시대적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그럼에도 은근히 다 전제하고 있는 것이 지옥이거든요.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이 연옥, 낙원, 지옥인데, 연옥과 낙원까지는 좋은 설명을 하는데, 지옥은 전통적인 지옥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넘어가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입니다.

김: 그것도 아마 일종의 컨텍스트와 관련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 이야기 조차 안 한다, 그런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대다수 영국 성공회 교회들이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자기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겠다. 다만 이거보다 더 말하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는 어렵다. 아무도 모르는 영역이다. 그 정도에서 멎은 것 같아요.

양: 가끔 지옥에 다녀 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묘사하는 지옥에 대해 들어보면 지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곳인데, (웃음) 좀 아쉽네요.

노: 성경 본문만으로 본다면 지옥에 대해 이 정도로 가르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상상력이 덧입혀지고 그것이 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와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양: 하지만, 단테의 신곡에 그려진 지옥의 많은 장면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을 기초로 쓴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계시록에 묘사된 지옥에 대한 기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시록을 1세기의 이야기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가 종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많은 부분이 계시록 때문이거든요.

김: 복음서 안에서도 양과 염소의 심판 장면이라든지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간다든지[마25:46],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막9:48]는 묘사가 나옵니다.

양: 사실 지옥에 대한 이런 묘사가 주는 종말론적 긴장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노: 성경에는 죽은 악인의 영혼들이 머무는 음부와는 다른 최종 심판으로서의 형벌 받는 불 못이 분명히 나오지만, 이 불 못이 영원토록 지속하는가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는 겁니다. 불 못이 오랜 시간 후에 불이 꺼져버리느냐, 아니면 문자 그대로 영원히 계속 타느냐 이게 논쟁이 되었었죠.

양: 사실은 계시록과 복음서에서 지옥이 심판의 이미지로 종종 나타나니까, 지옥을 너무 무덤덤하게 축소해서 기술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노: 그러니까 현재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죄에 대해서 분명히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는 메시지 자체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김: 톰 라이트는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루살렘성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도시 밖으로 흘러가서 만국을 소성시키는 장면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나가고 그 강변에 치료하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비전으로 마무리 된다는 거죠. 그 부분은 만유회복의 이미지인데, 우리는 이 부분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는, 우리는 구원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지옥에서 불타고 고통 받고 있다. 그럼 그게 무슨 구원이겠는가, 그건 양쪽 모두 영원한 저주로 느껴진다는 거죠. 이게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는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 위해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연옥과 같은 개념도 없고.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식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수가 어떻게 해서든 거기까지 흘러갈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전혀 연민의 정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저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완전히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므로 우리에게 고통과 연민의 감정이 없을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로 정리하면 어느 정도 설명은 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찜찜하죠.

노: 이제 좀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우리 교회와 독자들이 특별히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김: 지금까지 우리는 속죄론 중심의 복음을 전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부분부터 전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부활 중심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특히 남성들의 경우 교회에 나오는 중요한 계기가 죽음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죽고, 죽음을 가까이서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죠.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인식하면 그 안에 죄가 포함되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가 죽음 이후의 삶,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에 대해 안내를 해 준다면 자연스럽게 전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노인들을 전도하는 부분에서도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양: 요즘 웰-다잉이나 존엄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는데, 교회가 어차피 우리는 죽어야 될 존재인데 어떻게 죽어야 되고 죽음 이후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를 성경적으로 잘 제시하여 소개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정황에 적절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 이 책의 흐름도 죽음의 문제로 시작해서 부활을 말하고 더 큰 새 창조의 비전까지 확 나가고 있는데,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듯이 죽음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르는 세계이며 혼란이 많고 때로는 굉장히 공포스럽기도 한 존재입니다. 제 주변에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본 경험을 말하는 분들이 있고 저도 심리적으로 정말 공황장애와 같은 경험,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믿을만한 설명이 있고, 그 공포스러움에 대해서 복음이 뚜렷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그 메시지 자체가 안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교회에서 잘 가르쳐지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복음이 소개될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 재창조의 첫 열매를 누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런 식으로 복음이 좀더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죽음을 단순히 하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하고, 죽음으로서 모든 고통이 끝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자살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죠. 내가 이 고통을 죽을 때까지 당해야 한다면 지금 죽음으로써 여기서 해방이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라고 말할 수 있죠.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면 내가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왜 정죄하는가 물을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보다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 것인가를 확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오래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 분의 장례식에 참여해 보면, 죽음으로 이제 드디어 고통이 끝이 났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벗어나 예수님의 품에서 쉴 수 있구나 하는 기대가 생기는 거죠.

노: 그런 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듯이 우리는 죽으면 주님 품에서 쉬는 것이죠. 그 약속은 정말로 좋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좋은 약속, 부활의 약속이 그 뒤에 또 있는 것이고요.

김: 오늘날의 많은 삶의 모습들이 정말 지치고 힘들고 하니까 죽음을 오히려 환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방향의 유혹을 받는 세대에서 삶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려면, 그 복되고 기쁜 삶에 대한 가시적 증거가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교회 공동체가 그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삶,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음과 삶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 이게 강력하지 않으면 이 육신에서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이거를 영원히 잊는 쉼을 선택하고 싶어지겠죠.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고 기뻐야 이 삶을 영원토록 이어가고 싶은 소망이 생기는데, 이 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노: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 죽은 후배의 삶에 대해서 묵상하며 이건 부활이 없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라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친구의 인생의 모든 절정이 다 경험된 것이라면, 그것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아, 우리 인생의 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비로소 피는 것이구나’라는 소망을 주죠. 또, 노인이 평생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그러면 그분의 인생이 정말 만족스러운 인생일까. 하나님은 그가 경험한 인생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 꽃이 활짝 피는 상태를 아직 남겨두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부활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게 하는, 그래서 현세의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없는 소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 이 책에는 어떻게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와 있고, 왜 우리 삶에 이런 불완전함과 고난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분의 다른 책이 있죠?

노: 그 책은 제가 번역한 책인데,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책입니다.

양: 저는 이 책이 교회에게 큰 과제를 남겨주는 책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해야 되느냐 하는 과제죠. 상당한 창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교회는 힘이 많다는 것, 그리고 양극화 현상으로 힘이 없는 교회도 많다는 것,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교회가 연대하여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제입니다. 교회 안에 아직은 불일치와 싸움과 신학적인 입장 차이들이 다양한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조화하여 각자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이 사회를 하나님의 정의와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하느냐 하는 어마어마한 과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노: 저는 그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데, 우리가 그걸 못 발견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데 주파수를 맞추고 있거나, 하나님의 재창조역사와는 다른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창조해 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눈 먼 자들을 눈 뜨게 하시는 메시아적 사역을 행하시는 그 현장 속에 교회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된 곳에 딱 진을 치고 '평안하다'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희망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중산층만의 종교 집단이 되어가는 위험스런 신호가 보이는 것 같아서요. 정말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그 곳에 교회가 함께 있어야 되고 또 교회가 성령님의 그런 운행하심을 가시화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제가 이 책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은 상당히 명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신약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혼란과 분열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가장 존중한다고 내세우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에 별로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좀더 분명하게 형성이 된다면, 세부적인 차이들에 대해서 좀더 관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입장 차이를 관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해석함에 있어서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든지 하는 판단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성경의 권위를 동일하게 인정하고 텍스트를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이면서 부분적으로 다른 해석을 취한다면 상호간의 소통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면에서 서로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그런 내용을 성경에서 읽어냈느냐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성을 포용하는 데 주저함이 있는 것이죠.

양: 그런 면에서 우리가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아요. 열린 대화 말입니다. 서구에서는 타 종교와의 대화까지도 진행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의 대화도 잘 못하고 있죠.

김: 복음주의든 에큐메니컬이든 서로에 대해 너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 라는 판단이 너무 강해요. 이것이 그저 실천 방식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갈등이 이 책이 제시하는 정도만이라도 성경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읽는다면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제일 큰 소득은 그것입니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구나. 저는 지금까지 성경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할까에 혼란스럽게 고민해 왔었는데, 성경이 상당히 일관성 있는 그림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 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 저로서는 제일 큰 소득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 우리가 핵심적인 어떤 진리, 부활이라든지 십자가라든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이라든지 이런 핵심적 진리를 함께 충분히 많이 공유하고, 지옥 문제라든지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아서 논쟁의 결말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열린 마음으로 겸손함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 좀더 깊이 연구하고 좀더 많은 대화를 해서 공통된 비전을 형성한다면,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겠습니다.

양: 우리의 대전제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소망하며 하나가 되어 함께 일하자는 거니까, 그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될 것입니다.

노: 이렇게 마무리를 하면 좋겠습니다.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본 출처: IVP BOOKNEWS 7-8월호
   http://www.ivp.co.kr/booknews/index.php?bno=87&cid=225#Read_start
2009/06/26 20:47 2009/06/26 2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