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1)
: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정리하며
들어가면서
작 년 말 즈음 아는 지인으로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웹진에 세계관 연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예전부터 웹진에 대한 생각을 자주 말했던 그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고 싶다고 했고 본인 자신도 지금 공부 중이라고 했다. 알게 모르게 주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관심 있어하는 기독인들이 더러 있다. 하긴 90년대에만 하더라도 진보적인 기독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는 거의 동일한 단어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는 무슨 말만 하면 기독교 세계관 운운했고, 대화 중에도 프란시스 쉐퍼가 후렴구처럼 등장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기독교 세계관은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과 함께 80-90년대의 진보적인 한국 복음주의권 내에서 신앙의 지침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와 사회문제에 괴리된 성경공부와 개인영혼구원의 시급성을 앞세운 사영리류의 전도 및 대형집회 위주의 한국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행해진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천명한 로잔언약을 통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깨우쳤다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교회 활동만이 영적이며 세상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문화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설령 그 열매가 미미할지언정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사고 전환은 신앙과 학문의 조화를 통한 지성의 제자도 추구, CCM이나 기독영화제와 같은기독교 문화 사역의 질적 성장 및 낙천, 낙선 운동으로 대변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 운동의 흔적들을 남겼다. 90년대를 캠퍼스에서 보낸 나를 포함한 청년들에게 있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성 보수적인 교회에서 품고 있던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시켜주었고 기독교적 지성의 추구를 통해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변화에 있어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개혁주 의 기독교 세계관의 의의나 비판적 성찰은 추후에 더 언급하겠지만 내가 서론에서 장황하게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그것이 한국 교회에 끼친 유익이 크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이제는 점점 청년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데, 그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 혹은 담론 자체가 이제 갓 공부를 시작하려는 입문자가 접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내용이 복잡해졌고 다양화되었으며 어려워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쉐퍼나 아더 홈즈, 알버트 월터스 등으로 시작된 기독교 세계관은 그동안 많은 반론과 그에 대한 해답, 그리고 대안적인 세계관이 제시되어왔다. 이제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서로 떠올리는 '관'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지금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어렵고도 혼돈스러운 일이며 항상 논쟁의 여지가 존재함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연재글을 쓰려는 것은 세계관 입문자들에게 비교적 쉽게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중요한 이슈들을 소개하고 앞으로 기독교 세계관 담론에 대하여 더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계관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연초부터 쓰기로 한 글은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로 여전히 나는 독서 중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오죽할까. 초반부터 엄살이 심했다. 이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들을 내가 아는 선에서 되도록 쉽게 써내려가볼까 한다.
세계관은 어렵다
사 실 내게 글을 청탁한 지인이 좀 특별한 경우이지 주변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하는 신앙인들이 거의 없다. 복클(복음주의 싸이클럽)이나 기학연, 복음주의연구소 등 몇몇 교계의 학구적인 그룹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느끼기에 지역 교회 내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죽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용어를 쓰는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신앙 지침'이나 '교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신앙에 대해 지성적 측면에서 깊이 알고자 하는 소수만이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들이 결국 앞서 언급한 학구적인 그룹들의 논의들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최근에 ‘복음주의연구소’에서 아볼로 포럼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추가로 진행되었다. 송인규 목사의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 관>이라는 책에 대한 김기현 목사와 양희송 실장의 논평,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있었는데 결국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어떤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수 교단에서 자란 많은 기독인들은 이러한 신앙적 불일치를 불편해 한다. 내 주변에는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인들이 많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이런 논쟁들에 무관심하거나 조금 발을 담그다가 내부적인 불일치로 인해 불편한 마음으로 관심을 접은 채 그저 열심히 말씀 보며 기도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적군과 아군이 분명한 것을 선호하는데 기독교 세계관 논쟁에 있어서는 누가 '우리편'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다. 나는 이런 지역 교회의 평범하고 보수적인 성도들이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는 것이 기독교의 지성적 후퇴를 가져다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문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 논의 자체가 이미 너무 복잡해졌고 입문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워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잠시 예전에 썼던 글을 인용해볼까 한다.
“ 알버트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철학, 신학과 구별 짓는 키워드로 ‘일상’과 ‘상식’을 든다. 세계관이 그만큼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상식의 문제이며 일상적인 문제다. 하지만 개혁주의 기세 자체가 철학, 신학을 잘 알지 않으면 논의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을 많은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중략) 물론 세계관이 신학, 철학적 토대 없이 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관은 철학과 신학에 대해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철학적, 신학적 연구가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된다.”
(복음과상황,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론)
원 컨대 기독교 세계관이 일상과 상식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학과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 전반에 걸쳐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은 어찌 보면 기독교 내의 지성 그룹 안에서 ‘뜨거운 감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도예베르트가 정립한 것으로 주로 화란 개혁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혁주의를 말할 때는 칼뱅이나 아브라함 카이퍼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관 명제들이 모두 개혁주의적인 교단의 영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쳐도 관련 논문과 책들이 엄청나다. 그뿐인가.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 중 최초의 저작이자 가장 얇은 책인 <이성에서의 도피>에서는 헤겔, 키에르케고르, 슐라이엘 마허, 칼 바르트에 미미하나마 미쉘 푸코까지 다소 어려운 사상가들의 명제들을 비평한다. 관련된 사상가들의 원전은 고사하고 입문서들이라도 읽으려면 그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브라이언 월쉬와 리차드 미들톤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란 책에서는 현대(근대) 세계관들을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친절하게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도서 목록>이라는 15페이지 분량의 책목록을 소개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95년에는 처음 저작이 현대성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모습의 세계관 저서를 추가로 선보였다. 이 책은 2007년에 김기현 목사와 신광은 목사를 통해 다소 늦게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과 이전 저작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존 하워드 요더나 니콜라스 톰 라이트, 스탠리 하우어워스 같은 신학자들의 저작들도 언급하였다. 이런 주요 저작들 몇 권만 언급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분야는 개신교 역사와 신학, 그리고 철학, 사회학 등등 실로 그 영역이 방대하다. 그 뿐인가. 실천성을 담보한 기독교 세계관은 종종 북미의 정치적 상황과 우리 나라에서의 복음주의 역사들을 자주 언급한다.
일 이 이쯤 되고 보면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수많은 신학자들과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한 번쯤은 뛰어들려고 하는지 알 만 하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 학문과 기독교 사상을 연계해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또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만 일방적으로 제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복음주의 안팎의 여러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기존의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거나 나름의 대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의 학문적 향연이 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분야는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지속적인 담론 생산이 가능한 화두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흐름은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담론들이 점점 평신도들의 관심 내지는 일상 생활과는 괴리감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 자체의 난해함과 그것이 학문활동에 기인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캠퍼스 학생들과 직장 신우회에서 시간을 쪼개서 성경 공부하듯이 기독교 세계관과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그런 방향으로 권면을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입문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기독교 세계관 논의 자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느 정도 소통의 통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미 10년 넘게 흘러온 기독교 세계관 논쟁은 이미 새로운 입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논의가 넓어졌고 깊어졌다.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골목길 맛집 같다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나는 비교적 거칠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그 렇다면 세계관은 무엇인가. 알버트 월터스에 따르면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좀 어려운가. 브라이언 왈쉬의 좀더 평이한 정의를 따른다면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자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세계관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중요한 이유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이 특정한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이 그 세계관에 부응하도록 방향 지워진다는 사실 때문이다.(브라이언 월쉬, 그리스도인의 비전)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삶이 특정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수긍하더라도, 그 삶이 세계관에 의해 방향지워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들도 있다. 이러한 정의 자체가 자율적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 그 행동을 규제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적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일관되게 행동하지도 않을뿐더러 합리적이지도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제임스 사이어는 그의 책 <기독교세계관과 현대 사상>에서 세계관의 유형들을 '참된 최고의 실재', '세계의 본질', '인간', '죽음', '지식', '도덕의 기초', '역사의 의미'라는 7가지의 질문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브라이언 월쉬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좀더 간단한 4가지의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세계관의 유형을 구분 짓는다. 이러한 구분작업의 유익은 첫째, 몇 가지의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회심을 한 이후에도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변화되어온 현대 사상-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허무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 사상으로 치부해도 무방한-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관들과는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짧은 지면에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몇 가지의 특징만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적 구조
첫 째,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명제적 구조로 요약한다. 이는 헤르만 도예베르트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이후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틀이 되었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도에서 중요한 것을 몇 가지 정리하자면 첫째로 '문화 명령'이라는 개념이다. 창1:28에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흔히 청지기적 사명으로 표현한다. 월터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물러나셨지만 자신의 형상(인간)을 땅 위에 세우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땅의 발전은 인간 종족의 방식에 의하며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포함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이 발전시키는 사회와 문화의 창작물 혹은 조직들도 모두 이 청지기적 사명에 포함된다. 거칠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문화 명령'이라고 정의하는데 성경은 '문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선한 창조'라는 개념이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선포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선포는 창조의 완전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어 등장하는 타락 사건에서의 타락은 '전도된 악'이며 결코 존재 자체의 악한 면이 아니라고 한다. 부연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선악구도는 기타 종교의 신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선과 악의 존재적인 대립이 아니라는 의미다. 악은 선의 타락이고 존재의 왜곡이며 결코 지속적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의 이런 일시적인 타락 구조를 회복시키기 위해 ‘구속’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고, 구속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강조되는 사실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타락과 구속의 범위’ 혹은 영역이다. 악의 전도가 피조계의 전영역에 미쳤던 것처럼 구속 또한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피조계의 모든 영역,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문화와 사회제도와 예술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피조계 전 영역에서의 구속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인간 존재의 전영역에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은 땅은 한 치도 없다"는 이른바 영역주권론에 근거하고 있다. 리차드 니버는 자신의 고전적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대립, 일치, 종합, 역설, 변혁의 5가지 모델 중에서 변혁 모델을 다른 모델보다 우월하게 제시했는데, 그는 이 변혁 모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인간의 문화 영역(사회적 관습, 정치 기구, 언어, 경제 조직 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역사 속에서 부패한 인간의 사회 질서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써 종말론적 미래를 종말론적 현재로 수용한다고 주장한다.(김영한,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피조계의 전 영역에 대해 세상 가운데에서 지속적으로 문화 명령을 수행할 책임을 가지며 사회와 문화를 포함한 전 영역에서의 변혁을 추구하도록 부름 받는다.
구조-방향 모델, 이원론 문제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구조-방향 모델’이다. 이는 <창조, 타락, 구속>과 <그리스도인의 비전>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먼저 '구조(structure)'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자체나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지시하며 ‘본체’, ‘본성’, ‘본질’로도 표현할 수 있다. 이것도 말이 어렵고 모호하긴 하다. (실제로 월터스가 사용한 ‘구조’란 용어는 설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쿤의 패러다임만큼 용어의 모호함으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방향’은 무엇인가. '방향(direction)'은 ‘죄와 구속의 질서’이다. 여기서의 한쪽 방향은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과 변질이며 다른 방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타락을 설명할 때 구조-방향 모델은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창조계가 원래의 일방성(순종)을 잃고 이방성(순종-불순종)의 존재로 변한 것으로 묘사하는 셈이다. 이 때 구조는 가치중립적이며 방향에 의해서만 선악이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방향 모델은 기독교 세계관을 흡수한 많은 청년들에게 적용점을 시사했는데, 일례로 80-90년대에 교회 안에서 전자기타를 사용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었을 때 가치중립적인 전자 기타(구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방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특정 교단에서 전자기타나 드럼의 사용, CCM의 수용 문제는 나름 진지하고 심각했다.) 진보-보수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구조-방향 모델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구조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혁명에 동조할 수 없고, 방향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무사안일의 보수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월터스, 창조-타락-구속)
셋째는 이원론 문제이다. 월터스에 따르면 이원론이 교회에 침투한 역사를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어거스틴이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보지 못하여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 속에 거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른바 ‘구조’를 ‘방향’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선과 악 자체가 창조 자체에 내재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며, 이는 선한 창조 내에 어떤 것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송인규는 <평신도 신학>에서 ‘세상1’(구조)을 ‘세상2’(방향, 즉 세속화)처럼 여겨서 ‘세상1’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혼합주의로 치부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잘못된 이원론적 구도는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 예배와 활동, 성경과 학문,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등 세상 속의 많은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층위의 개념들을 성속 개념으로 대체하게 만들었고 이른바 이런 ‘이원론적 행습’의 탈피는 80-90년대 로잔언약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지성의 강조: 신앙과 이성의 통합
마 지막 특징은 합리적, 논리적 지성의 강조이다. 이는 프란시스 쉐퍼의 3부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절망의 선(the line of despair)’과 ‘신앙의 비약(the leap of faith)’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쉐퍼에 따르면, 고전적 철학과 사상은 헤겔에 이르러 상대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헤겔은 진리의 문제를 정립-반정립의 과정을 거쳐 종합에 이르는 이른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는데, 쉐퍼는 헤겔이 변증법적 방법론을 통해 현대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았으며 진리로서의 진리는 사라지고 상대주의적 사고와 종합(synthesis), 즉 양립가능한 다양한 ‘진리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쉐퍼는 실존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키에르케고르가 헤겔로부터 시작된 현대성을 본격적으로 이끌었다고 보았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는 종합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대신에 우리는 ‘신앙의 비약’을 통해서 참으로 중요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고 주장했다. 쉐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의 비약이라는 개념을 선포했을 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적, 신학적 모두의 현대 실존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 만일 합리주의적 인간이 삶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목적, 의미, 사랑의 정당성과 같은)을 다루기를 원한다면 그는 합리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크고도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을 이루어야 한다. 합리주의 구조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 답변을 제공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통일된 지식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해야 했다. (프란시스 세퍼, 거기 계시는 하나님)
쉐 퍼는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종교적 실존주의는 기독교를 합리적으로는 논증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냈으며 신앙은 결국 비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쉐퍼가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문제는 바로 이 ‘절망의 선’의 와해, 즉 신앙과 이성, 신앙과 합리성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상대주의적 진리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성경적 진리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성의 강조, 신앙에 있어서 이성의 사용에 대한 강조는 비단 기독교 세계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행한 <칼빈주의 강의>에서 그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설명하는 대신에 칼빈주의와 정치, 과학, 예술, 미래의 주제를 다룬 바 있다. 카이퍼는 이 강연에서 종교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했으며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통합,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추구하는 일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수혜를 입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주요 특징이자 우선적인 과제임에 분명하다. (계속)
*이 글은 웹진<크리스찬 프레스>와 월간<복음과상황> 5월호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