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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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 집사님. 안녕하셨는지요. 김용주입니다. 일전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쓰셨을 때 뵌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출판하셨더군요. 저도 본서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으로 본서를 읽고 크게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또한 동일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공감하는 부분은 북미 복음주의의 신학적 가벼움입니다. 본서에서는 "마케팅에 물든"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 기독교계의 소비자중심주의적인 신앙의 성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미국에 세차례 정도 짧게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미국의 한인교회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를 보았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실용주의적 사고와 노만 빈센트 필로 대변되는 "적극적 사고방식", 내적 치유와 자아 회복이 죄성과 복음을 대체하는 성향들을 보았습니다.
미국은 정말 상담과 심리치료의 천국이더군요. 저는 이러한 심리적 기재에 기댄 교회의 문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물론 심리학 자체에 대한 평가에서는 옥 집사님과 차이가 있음을 이전에 출판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느낄 수도 있었지요.

또한 저는 본서에서 지적하고 싶은 몇 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너무 부족한 관계로 글을 몇 번에 걸쳐 나눠 쓰려고 합니다. 제가 본서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 중 첫번째 것은 교리와 교파에 관련된 것입니다. 앞서 강진용 님이 지적해 주셨기 때문에 그 글을 먼저 인용합니다.

"아마도 저자께서는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입장에 있는 듯 보입니다.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웨슬리안 전통에서도 인간은 역시 전적 타락한 존재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행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가졌다면 "웨슬리"가 영국사회에 회개를 선포할리 있겠습니까? 아마도 마케팅교회들이 가진 인간론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유주의자 역시 웨슬리나 알미니안을 따르는 것이 아니구요. 개혁주의 입장에서 간혹 펠라기우스와 웨슬리안-알미니안의 차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 듯 보입니다만, 이 사이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냐 아니야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제 생각엔 웨슬리안-알미니안에서의 복음적 신인합동설과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예정론의 차이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특히 저는 칼빈주의와 구별되는 가톨릭, 성공회나 루터교, 웨슬레-알미니안 등의 교리적 차이에 의해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옥 집사님의 경우에는 교리의 수호를 위해 분리적인 태도를 취했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나 저는 오히려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존 스토트 목사의 입장을 따르는 편입니다.존 스토트의 말년 저작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지적한 내용에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나는 이제 쓰려고 하는 글에서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사상계(가톨릭, 자유주의, 복음주의)가 항상 상호 배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님을 잊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차이점과 더불어 합일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지지하는 것과 절대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종교개혁의 많은 진리들을 여전히 확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주의의 모든 핵심 진리가 복음주의만의 독특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방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헐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중략)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비록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적인 방침과 종종 원칙없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교회 연합 운동에서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확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분별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해 왔다."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교리, 이를 테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구원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성령의 주되심과 같은 핵심적인 교리에 있어 합의점에 도달하는 교회와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하나됨 안에서 충고와 책망 그리고 격려가 필요하겠지요. 제가 느끼기에 옥 집사님의 글에서는 그러한 하나됨 안에서의 책망과 건설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다소 분리주의적인 자세로 교회답지 않은 pseudo(사이비) 교회들을 칼빈주의 교리의 입장에서 분리시켜내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따라서 그러한 칼날로 작용하는 교리에 대한 불편함이 제 심정적 반감을 불러오는 듯 합니다. 물론 혹여, 제가 옥 집사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제 독해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더 이야기해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복음주의권 내부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본서에서 비판하고 있는 빌리 그레엄 목사로 대변되는 신복음주의 진영의 이들이 그렇습니다. 빌리 그레엄 목사도 그 분명한 한계와 많은 대형 집회 전도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분명 그 분이 20세기가 낳은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지의 편집장으로 있었던 필립 얀시와 씨 에스 루이스, 그리고 본서에 언급된 릭 워렌 목사와, 빌 하이벨즈 목사도 그렇습니다. 저도 이들에 대해 동일하게 비판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종종 본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신복음주의, 성공회, 가톨릭, 웨슬레주의자들과 분리되어야 함을 옥 집사님은 주장하시려는 듯이 읽혀집니다.

물론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명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서문에 보면 영국 복음주의 학생운동 역사 가운데 CICCU가 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었던 SCM으로부터 구분지어 나온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그 때에 구별되어 나온 이들의 수는 극히 소수였으나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유지했던 그들이 더 크게 부흥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분수령에 있어 옥 집사님은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보수적 입장에 교리를 국한 시키는 듯 하며 저는 좀더 넓은 범주에서 은사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도와 급진적 복음주의자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연합 집단에서도 옥석을 가려야 함은 자명합니다. 신앙의 스펙트럼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옥 집사님의 입장에 제게는 구획의 측면에서 너무 좁게 잡으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혹은 칼빈주의를 정답, 정교리, 정교파로 확정짓고 나머지 교회들을 그 틀로 쳐내려는 듯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케팅에 물든"의 잣대로 시작된 본서는 교파를 구분하면서 "오래된 복음주의" 대 "신복음주의" 혹은 그 외의 교회들(가톨릭, 웨슬레주의, 에큐메니칼 등)으로 확장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케팅에 물든"이라기 보다는 "교리에 차이를 보이는"으로 대체되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나 신칼빈주의 교회 내에서도 "마케팅에 물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강하게 보이는 교회들이 많은데 이는 그 구획에서 논리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첫번째 제 생각은 이 정도까지 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다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부흥과개혁사 홈페이지에 있는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에 올린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http://rnrbook.com/
2011/11/27 18:32 2011/11/27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