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연휴에 영화를 두편 봤다. <남쪽으로 튀어>와 <더 헌트>.
#1.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사회가 밀어내는 캐릭터들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은 국가로부터 그리고 자기가 대학시절 함께했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조차 불편해하는 캐릭터다. <더 헌트>에서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인데, 친구 어린 딸의 거짓말로 인해 성추행범으로 몰리면서 동네의 절친들 대부분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는 사실 별로 힘들지 않았다.(레미제라블 때와는 달리) 두 편의 영화 모두 나름 해피엔딩인 이유도 있다. 최해갑은 국가의 눈을 피해 달아난 채로 생활을 계속하고 루카스는 결국 자신의 누명을 벗는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해피엔딩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두 영화가 너무 개연성있는 현실을 보여줘서, 내 주변 그 누군가가 겪은 사건을 잘 풀어내면 이런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 진영이 같건 다르건 원래 그 사람의 편이었건 아니었건 그 사람에게 일어난 위협 혹은 누명, 혹은 오명, 나쁜 평판이 불거지면 대체로 주인공을 등진다. 영화속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최해갑의 주변이 그렇고, 루카스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 둘의 명약관화한 상황이, 어떤 대세랄까 혹은 지배적 정서에 소수의 올곧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묻히는 느낌이 강하다.
#2.
하지만 나는 이 두편의 영화를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사람 주변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헤아리고 실제적으로 도와주고 그들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극'소수다. 또한 대체로 어떤 진영을 대변하는 부류가 아니라 그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아끼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의 오명에도 흔들림이 없다.
예전에는 오정현 목사같은 길을 걷게 될 때 나를 깨우쳐줄 냉정한 비판자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살아보니 내 진영 사람들의 냉정함 또한 공포스럽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도 언행 하나 흐트러지면 끝장이다.
지금은 좀 자유로워졌는데 한동안 나는 글쓰기에 조금 짓눌려 있었다. 반론을 예상하는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때로 내 글은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게다가 교계에서 신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글 자체에 대한 열등감도 높았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옹호해야 할 시점에서 나는 머뭇거렸고 눈치를 봤다.
어느순간 이 모든 긴장감이 지겨워졌다. 내가 방어해야하는 논리의 치밀함이 사안을 둘러싼 사람들, 인격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정작 내가 해야할 말들은 가려가며 해대고, 안 해도 될 말들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나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3.
물론 지금도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페북에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불편하고 페친이었다가 아닌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생겨도 불편하다. 어떤 이슈에 따라 진영이 나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면 그로 인해 호불호가 갈라지는 대목에서 특히 그렇다. 여전히 나는 신경이 쓰이고 글을 쓰고서도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누군가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의 '옳은' 생각, 나의 기호, 나의 삶의 태도를 대중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중의 지지와 칭찬에 대한 욕망이 어느정도 전제된 행위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진영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며 운동성을 얻고자 애쓴다.
하지만 당사자가 오명을 얻을 때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오명이 아니라 정말 잘못을 한 것이라면 더더욱이 재기가 쉽지 않다. 말실수 하나로도 텍스트 독해 자체를 못하는 비전문가가 될 수 있고 누군가를 옹호하다가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며 순식간에 친구에서 친구-아님으로 변할 수 있다. 루카스는 하지도 않은 아동 성희롱으로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친구에게 멱살을 잡힌다. 그게 정상적인 인생이고 삶이다.
나는 내 지지자가 많아지길 간절히 원하는 20대를 보냈다. 30대에는 20대의 구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하게 좌절하고 주눅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거품을 빼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도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을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돌아본다.^^ 이 두 영화는 내 고질적 고민을 돌아보게 만든다. 지지자를 넓히는 삶은 위험하다. 그저 내 주변을 밝히는 삶이 더 유익하고 가치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1.
법륜 스님은 과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하소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딸을 폭행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감사하라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물론 그의 행위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성추행을 당했다는 그 생각이 나를 더러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추행을 당했는지 사랑을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이 도리를 깨쳐 버리면 어릴 때 상처를 담박에 벗어날 수 있고 이 도리를 못 깨치면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2.
내가 최고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여자, 정혜>에서 정혜는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기억을 묻어두고 사는 여자다. 그는 결혼 첫날밤 남편과 원치않는 상황에서 관계를 갖고 나서 그녀가 처녀가 아님을 안 남편의 비아냥 대는 듯한 추궁에 그날 새벽 짐을 싸서 호텔방을 나온다. 그녀의 일상은 '비정상적'이다. 딱히 어떤 광기어린 행동은 없지만 매사에 의욕도 없어보이고 존재감도 없다. 호감이 가는 남자가 생겼지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어느 날 그녀는 칼을 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정작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지도 못하고 뛰쳐나오다 넘어지고는 울음을 토하고 만다.
#3.
한동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교육 교재는 남성들의 비아냥 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다'라는 대목이 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남성들은 공공연하게 여성들에게 무안한 질문을 하고는 "굴욕감을 느꼈냐" 내지는 "이것도 성희롱이냐", "OO씨는 괜찮다는 데 니가 불쾌한 건 왜 그런거냐" 등등 당사자가 불쾌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내용에 대해 남성들을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때로는 부하 여직원들에게 사소한 일로도 분노를 표출해댔다.
성희롱, 성추행, 나아가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빨리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가능한 빨리 잊는 것이다. 피해를 입기 전 상태로 몸도 마음도 회복하는 길이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거나 교통사고 등에 의해 물리적으로 몸을 다친 것과 달리 성폭행은 다분히 경미하게 다치더라도 그 정신적 내상이 크다. 남성들은 쉽게 여성을 위로한답시고, 평상시에도 하는 성관계를 강제적으로 한 셈 치고 잊어라, 그것에 매몰되고 괴로워해봐야 니 손해다 라는 류의 이야기로 다독인다. 하지만 그녀는 주변에서 정상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당사자는 잊기를 강권하고 주변인들은 오래토록 잊지 않는, 참 이율배반적인 반응이다.
#4.
개인적으로 나는 법륜 스님의 결론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가해자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고 나는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고통 속에 침잠해있어봐야 나만 손해다. 털고 일어나야 한다. 특히 이런 정신적인 문제는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기억을 잊자, 그저 어느 남자와 하루 잤다고 생각하자... 내 마음이 평정심을 찾는다면 그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영화 속 정혜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자다. 없던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이해할 수 없는 우울함과 굴욕감, 스스로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원인이 있었기에 현상이 있다. 정신도 몸과 다르지 않게 고통에 신음한다. 내가 어떤 고통에 매몰되는 것은 그 원인으로 인해 내 마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5.
때로 건강한 여성들은 특히 '아버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딸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혹은 사회적인 상황에 대해 비교적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편이지만 아버지의 격려와 애정이 부족했거나 나아가 '아버지'에 의해 성적 유린을 당한 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자라면서 에너지를 충족시켜줘야할 대상이 에너지를 빼앗는 가해자 역할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에게 먼저 공감해주고 그녀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태도 없이 득도한, 혹은 '외란에 강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처방을 던져주는 법륜 스님의 말들이, 내게는 고통스럽게 읽혔다. 적어도 칼럼에 쓸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정하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처방이라 여겼다.
내가 법륜 스님같은 훌륭한 멘토도 아니고 전문 상담가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 경험과 상식으로 판단하건데,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한 진정한 힐링은, 그녀가 겪은 사건이 정말 큰 일이었음을 공감하고 더불어 피해 여성을 여전히 가치있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계속 아껴주는 것이다. 그 고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적 치유들이 그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본서는 박영선 목사가 설교했던 내용을 주제별로 묶어서 그의 30년간의 사역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된 책이다. '믿음', '성화', '교회'라는 주제에 따라 총 3부작으로 기획된 본 시리즈 중 첫번째 책으로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총 29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믿음의 두 축을 구조화하고 있는데 전반 12개의 설교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고 후반 17개의 설교는 믿음의 책임에 대한 것으로, 믿음의 '본질'과 '책임'의 두 축에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대체로 성도들은 기독교 교리 자체를 어렵다고 느낀다. 실제로도 교리는 어렵다.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는 아볼로 교회 성도들처럼 심도있는 공부가 어느 정도 필요한 종교임을 인정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다소 어려운 교리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많이 해왔다. 그럴듯한 예화를 들거나 설교 중에 멜로디를 덧붙인 찬양곡을 사용하기도 하며, 때로 만화처럼 쉽게 대중이 호감을 가질 법한 도구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잠시동안 성도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는 하지만 정작 교리의 '깊이' 자체는 반감시키는 역효과를 감수해야 한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는 요즘 흔히들 쓰는 말로 교리에 대한 '돌직구'다. 그는 굳이 어렵게 설명해야 하는 길을 우회하지 않는다. 쉽게 설명할 다른 도구들을 찾는 대신 설교 본문 자체의 논리, 구조화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의 설교는 놀라우리만치 구조적이다. 설교를 듣는 중에 머리 속에 형이상학적 그림들이 그려진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전달되는 설교를 경청하다보면 어느덧 견고한 집이 하나 머리 속에 지어져있다. 그것이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되는 박영선 목사의 탁월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설교 중에 직설화법이나 욕을 하기로 유명하다. 유머나 재치로 받아들여지는 대목도 분명 있지만, 대체로 그의 직설화법은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묘한 경각심을 준다. 교리라는 모호한 삶의 체계가, 그것이 일상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예화는 그에 관한 이야기거나 주변에서 겪을 법한 이야기가 많다. 아마도 설교시간에 스스로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거리낌없이 대놓고 욕을 하는 설교자로도 박영선 목사는 독보적일 것이다. 나는 이런 그의 설교 '스타일'이 많은 성도들에게 교리의 깊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박영선 목사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 역할을 톡톡히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기대한다.
3권의 단행본과 7권의 강해시리즈에서 선별한 내용이니 박영선 목사의 강해서들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새롭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교리나 주제를 놓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설교를 비춰본다면 이런 인위적인 구분 자체가 더 기독교 교리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장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남포교회 홈페이지에 가면 매주 그의 설교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혹은 그의 설교 중 상당 부분이 출판되어 있다. 그 중 핵심만을 취하고 싶다면 본서를 권한다. 아울러 진정한 지도자, 설교자가 갈급한 한국교회에 박영선 목사가 좋은 본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끝)
내가 쓰는 livescribe라는 회사의 echo펜은 원래 anoto라는 스웨덴 기업의 기술이다. anoto사는 광학 카메라가 격자무늬 패턴의 노트를 통해서 정보를 읽어들이는 방식을 통해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는 기술의 원 발명 기업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모든 스마트펜은 다 그 회사에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기술의 탁월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광학펜과 도트 격자노트로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려는 기술을 개발한 것 자체가 탁월한 발명이기는 하지만 손글씨를 디지털 방식으로 입력하는 장치는 타블렛, 펜마우스 등 여러가지의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갤럭시 노트의 경우, 자체개발한 정전식 펜으로도 손글씨를 정밀하게 쓸 수 있다.
아래의 동영상을 보면 내가 정작 지적하고 싶은 대목을 알 수 있다. livescribe사는 기개발된 스마트펜을 가지고 다른 목적, 용도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펜에 보이스레코더를 장착하고 그것과 디지털펜을 실시간으로 싱크를 맞추면서 녹음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기할 때 외부 음성이 모두 녹음이 되고 그것을 다시 재생하거나 특정 기록 부분의 음성만 선별적으로 들을 수도 있다. 노트 필기 순서대로 음성이 따라가며 재생되는 형태로 판서 강의를 동영상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교육공학 분야에서 livescribe의 스마트펜은 획기적인 결과를 냈다. 하위 20%의 학생이 이 스마트펜을 통해 수업을 리뷰하고 나서 상위 20%의 학생으로 탈바꿈했다. 노트필기만으로 기억하지 못했던 강의를 녹음된 형태로 복습하면서 그 학업효과가 괄목할만큼 좋아진 것이다. 아래 동영상에서도, 인터뷰하는 해당 수학 교수는 100명의 학생에게 일일이 문제를 풀어주던 과거와 달리 1번의 녹음+필기로 만든 파일을 100명에게 이메일로 보냄으로써 똑같은 문제를 100번 풀지 않아도 되는 이 마법같은 펜을 극찬한다.
livescribe가 녹음 싱크를 맞출 생각을 하지 않았던 때의 이 스마트펜은, 그저 손글씨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회사는 이 디지털펜을 기억을 되살리는 효율적인 툴로 뒤바꿈시켜놓았다. 이것이 anato보다 livescribe가 더 탁월한 기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소다. livescribe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대학생들을 비롯 저널리스트, 법조계, 영업 등 전문 직업인들에게 모두 400,000대의 스마트펜을 팔았다. 반면 anoto는 그간에는 노키아, 로지텍, HP, livescribe 등에 기술을 라이센싱했고 최근 ADP시리즈 제품을 내놓았다. 물론 여전히 레코딩 기능은 없었다.
ps. thanks to @Jaejin Choi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아나 운전, 인간관계 등 일상적으로 겪는 이야기들을 적다가 마지막에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환원 혹은 유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의 어리석음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환원하거나 새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대목은 죄많은 인간 하나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한 존재가 그들의 죄를 위해 값진 희생을 치르는, 보다 고차원적인 '유비'(analogy)가 된다.
나는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공의, 정의로 환원하는 신심을 추호도 의심하지는 않으나 사실 자주 이런 글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신심으로 도약하는 모든 '개별 이야기'는 퇴색되기 때문이다. 본론은, 더 고차원적인 의미는, 더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런 너저분한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다수가 설교욕구가 있다. 어떤 사건의 의미를 신심에 비추어 조명하고 그것을 설파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 그는 신심도 검증받고 대중의 구루 지위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이 점점 현실의 디테일한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일상을 설교거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내 작은 일상의 깨달음을 신심으로 환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엔 챙겨서 그런 욕구를 억제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신앙은 어떤 고차원적인 의미로 유비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남루한 일상 자체를 더도 덜도 말고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