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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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보고서를 빨리 쓰는 편이다. 
초안은 대략 하루, 이틀 정도면 쓴다.
대체로 주변을 보면 5일 정도를 쓴다.
물론 이 보고서는 임원급 보고서를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내 보고서의 퀄리티가 높다고 생각한다.
(허세 쩐다.ㅋㅋㅋㅋ)
.
2.
보고서에서 중요한 지점,
대체로 보고 대상이 높을수록 
보고서의 결론은 최종보고자인 팀장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 내용과 향후 계획은 실무를
집행해야 하는 실무자가 가지고 있다. 
보고서에서 소요되는 5일은 
팀장이 기대하는 결론에 대한 실무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간의 반복이다.
시켜서 해보니 궁합이 안 맞다. 잘 안될거 같다.
혹은 설득을 위한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정당한 반대 질문에 대한 변명, 대안이 궁색하다.
결국 실무자가 가진 데이터로 대충 초안을 만들고는
이런 저런 이유로 본론에 의해 서론과 결론이 
자주 흔들리고 그것을 조율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
3.
솔직히 보고서를 빨리 쓰지만 
작성 전까지 내가 소요하는 시간은 하루 이틀이 더 든다.
결국 초안 완료까지 최장 4일이 걸리니 
빨리 쓰는 게 아니다. 그저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
짧으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최초 보고서 작성 지시를 받은 후
나는 하루이틀을 멍 때린다. 어떤 때는 무려 칼퇴근한다.
물론 그동안 그 보고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다.
머리 속에 3-4페이지 본문이 대략 배치가 될 정도로
그리고 팀장의 결론과 실무적인 방향이 조화를 찾을 때까지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지 혹은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내러티브가 설득력을 갖는지 머리 속에서 본문을 가지고
충분히 '논다'. 
내러티브 내러티브 하는데, 사실 보고서도
그 내러티브의 구조가 서야 키보드를 친다. 
머리 속에서 완성된 보고서를 풀어내니까
당연히 초안이 빨리 나온다.
보고서에서 중요한 건 보고 시점이다.
자주 하는 말로 피보고자를 불안하게 만들면 안된다.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면 항상 초안 일정을 알려야 하고
되도록 그 시점 이전에 보고서를 들이밀어야 한다.
그 시점에 나는 반드시 멍 때리는 시간을 포함시킨다...
.
4.
이 허세 넘치는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멍 때리는 시간. 
그 시간이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머리 속에 여유를 주면 버퍼링에 효율이 높아져
그 이슈에 대해 다분히 여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상상도 더 많이하고 관조적으로 몇 걸음 뒤에서 
실무자가 아닌 팀장이나 경영진의 입장을 따져보고
반대로 협력업체의 일을 덜어주는 방향이나 
결국 실무자인 내가 더 뺑이치지 않을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멍 때림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다.
실제로 주변의 혹자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탱자탱자 놀다가 '데코' 쩌는 보고서를 쓰는 놈.
보고서에 손이 빠르면 더 열심히 더 늦게까지 하면
더 높은 퀄리티의 보고서가 나올텐데 
바쁜 사무실에서 여유를 가지면서 허세부리는 놈.
직장이 지옥은 아니지만 나름 냉정한 구석이 있다보니
대놓고 나에게 직설을 날리는 이들도 있다. 
빨리 끝냈으면 더 열심히 하란말이야! 더더...
.
5.
솔직히 그 편견을 깨 줄 생각은 없다.
누가 내게 멍 때리는 시간을 뺏는다면 
나는 회사가 덜 효율적인 결정을 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슬프게도 멍을 때려보지 못한 사람에게
멍 때림의 효용성을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멍 때림은, 
하나의 신앙이자 종교적 신비함이 그안에 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성도들도 있다.
맨인블랙 보지 않았나.
인간인 줄 알았는데 외계인인 능력자들이 많지...
나는 그 영화가 <멍 때림 신도>을 향한 오마쥬였다고 들었다.
얼마전 서울시에서 있었던 멍때리는 행사 하지 않았나.
거기에서 회자된 아이가 강북지방 대표간사라는 의혹도 있다.
주변에 멍 때리는 사람을 돌아보라. 그리고 당신도 우릴 찾아오라.^^
2015/06/30 00:00 2015/06/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