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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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큰 그림으로 읽기를 멈추자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성경의 각 본문들은 이른바 메타담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 본문이 그 자체로 독해되지 않고 다른 본몬과의 통일성 안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닌 구약적 배경에서의 '그 단어'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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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각 성경의 서브텍스트들은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메타담론으로서의 성경은 신적인 의미에서의 하나의 큰 그림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분히 보수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교리의 중요성, 거룩한 경전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 서로 충돌하지 않는 온전한 그림을 그리는 신학자들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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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구하는 실존적 성경읽기는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교리의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 작은 그림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와 같다. 적절한 비유가 있다면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성경의 큰 그림으로 본다면 내가 추구하는 성경읽기는 <본 레거시>로 치부할 수 있겠다. 제이슨 본과 국가 간의 음모를 다루는 큰 그림의 내러티브가 있다면, 그 큰 그림 안에서 메인스트림이 아닌 이들이 겪는 소소한 로컬 내러티브가 <본 레거시>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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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구속사가 예수와 주요 제자들, 그리고 구약의 특정 왕들과 예언자들의 담론, 그리고 굵직한 행위에 대한 추적이었다면 그 안에 속한 소시민적 백성, 시민,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신자들의 관점에서 메타담론을 바라보는 셈이다. 그것은 그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좀더 상상력과 직관, 실용적, 실존적인 측면에서 성경을 독해하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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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은 개별 인간사의 소소한 질문들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연역적이면서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개별 인간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접근한다. 악은 왜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준의 거대담론을 들이민다. 자잘한 생각들, 교리를 침해하는 이야기들은 부차적으로 치부되거나 배제되고 원리와 원칙으로 한발 물러나거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명시적으로 알 수 없는 신적인 의미가 있다는 모호함으로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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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적 모호함을 유지하면서 성경을 소시민적으로 읽고 텍스트 간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읽는 것. 성경의 영웅들, 주인공들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제자들의 이웃, 형제, 부모, 혹은 그 이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예수의 길과 내 삶의 연속성, 불연속성, 죽음의 의미, 하나님 나라... 이런 생각들이, 다분히 새롭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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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로컬 내러티브 안에서 성경을 읽는 중이다.
2016/11/04 20:28 2016/11/0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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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성경읽기라고 할 때 가장 큰 이슈는 내 삶의 목적성이다. 내 삶의 의미와 신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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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구원을 선포하고 재림을 약속한 후 초대 교회 시대를 지나 중세, 근대, 현대의 이시점까지 흘러왔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행위, 예수를 영접함, 영혼 구원, 타 종교와의 영적, 육체적 대결 자체에 집착했던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참여, 앙가주망, 인격적 사귐, 통전적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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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의 함수에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예수가 메시아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언은 '운동', '전략'으로서의 기독교에서 이천년을 지내면서 '삶의 양태'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되었다. 타자(비기독인)로 하여금 믿음의 가부를 결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믿음의 본을, 믿음의 삶을 정착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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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타문화에 대한 긍정, 존중, 그리고 서구의 세속화에 따른 재복음화 필요성 대두 등 복음화라는 이슈는 개념이 넓어지고 그만큼 집중력은 약해졌다. '무식한 추동력'은 '사려깊은 주춤함'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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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신앙인들은 타문화권 복음전도를 위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본인에게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게 정말 시급했다면 교회 자체가 자기 몸불리기 신학을 고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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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세상의 방식과는 구별된 자로 (하지만 세상 안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사회에서 성취를 하고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살아간다. 자동차를 만들고 태블릿을 사고 인터넷을 이용하고 영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감동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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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의 초림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위치한 우리 세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유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상태를 지속시키는 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분쟁, 전쟁, 정치적인 불의함, 차별, 사람들 사이의 소외, 마음이 닿지 않음... 이 부족함을 견디어야 하는 실존적인, 나아가 신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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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여기'를 강조할수록 불완전한 세상에서 이천년을, 그 이상을 살아야하는 당위에 관한 신학은 흔들린다. 이것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치시킨다면 우리는 삶의 양태를 바꿔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온전함으로 신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 중간기가 담고있는 신적 의미에 대해 더 깊은 질문과 이해를 필요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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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후자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6/10/03 15:22 2016/10/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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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통, 세상의 고통.
이것들이 인식될 때마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들이 들 때가 있다. 예수가 구원을 이야기한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속사. 그 어딘가에 태어난 나, 우리.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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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사명, 선교명령은 새 밀레니엄이 오기 전에 땅끝, 즉 10/40창에 속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들어가야만 선교과업이 완성된다고 믿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이 사는 곳으로 파송되었다. 그 와중에도 선교명령에 부합하지 않는 곳에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문화 속에 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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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already but not yet'이란 구속의 표준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보다는 '아직'에 방점을 찍은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은 충분치 못한 현실에 대한 헌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르페디엠'이 우리의 신앙 모토 '지금 여기'로 둔갑했고 '이미'의 신앙이 더 중요한 미덕이라는 사실을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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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사명을 약화시킨다. 구조-방향 모델은 복음전도, 즉 선교의 당위성을 희석시킨다고 느꼈고 그것을 당대의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진영과의 논쟁, 화해 속에 양날개 이론, 그 중에 복음전도의 우월성을, 다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나아가 총체적 복음, 통전적 복음이라는 개념으로 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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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른바 '전략', '운동'과 '삶'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는 통찰에 기인한 반성이자 어느 정도의 혜안이었다. 하지만 통전적 복음이 '이미'쪽으로 옮겨온 순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사명이었던 선교의 동력은 금새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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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밀레니엄을 넘긴 시점에서 사명은 늦춰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기술은 진보하여 오지에서조차 인터넷망과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선진국에서 파송하기 전에 선진국으로 다국적의 비기독교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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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이 고달픈 사람들은 고달픈 대로, 나 같이 죽음 이후의 삶?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묵상,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실존적 신앙의 고민이 늘어간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드는 근본주의적 교회 집단 외에는 이제 천국, 하나님 나라, 내세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는 기독교 특유의 목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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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통전적 복음이 현대적 문화 풍조와 콜라보를 이뤄 '지금 여기'의 신학으로 자리잡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연속선 상에서 악이 소멸되는 형태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재림의 임박을 알린 정경의 메시지와 달리 왜 이천년 동안 우리는 악이 소멸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버티고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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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버틴다는 표현을 다수의 인간이 쓸 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괄목할만한 진보와 기술발전, 수명의 연장, 덕질의 향연과 극단적 쾌락과 엑스터시를 즐기면서,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며 사는 건 아닌지. 갑자기 엄습한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내세의 희망을 손짓할 때, 그 모든 종교에 기대는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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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은 우리는 우리의 삶, 죽음에서 기독교 자체를 소외시킨 건 아닌지를 말이다. 말과 삶의 일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듯 내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과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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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체험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지만 그 이상을 믿는 것이다. 살면서 믿음에 대해 교조적, 논리적, 확신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살면서 교리에, 세상문화에, 기독 전문가 집단에 번번이 신앙의 권위를 내어주곤 했다. 그 권위 안에서 내 신앙의 논리와 체험을 통합하고 정립시키려고 애쓰곤 했다. 물론, 그 권위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모든 게 나 자신과 일정 부분은 소외된 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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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거칠게 쓰자면, 내 생각은 이렇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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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나를 인식한 시기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초기의 내 신앙, 즉 유년기, 청소년기에는 성경이 내겐 신비로운 책이었고 어려운 책이었고 무서운 책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내 신앙은 재편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었고 - 그 때에는 나름 진지했던 - 타종교와 기독교의 비교, 기독교의 정합성 등에 빠져 지냈다.

이후로는 보수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권'으로 대변되는 신학적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이 가장 성경을 연구하는데 흥미를 자극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바닥의 교리와 주석에 대부분 의존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때 '렉시오 디비나'가 지적인 분석에 충실했던 복음주의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이 일어 나름대로는 성경을 보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나도 그 유행에 합류했었다.

대략 30년 이상을 성경을 읽어왔지만 최근에 나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이 모든 배경, 즉 내게 주어진 교리와 내 종교적 배경 안에서의 주석과 강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에서 벗어나 내 실존적 질문들과 씨름하는 성경 읽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런 성경 읽기가 어떤 방식이다 라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통칭하자면 허세 없는 성경 읽기,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인, 실존적인, 내재성으로만 신적 의미를 찾는 성경 읽기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설명이 충분치는 않지만, 일단 그렇게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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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날씨: 해가 쨍쨍
제목: 아빠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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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화를 보았다. 재밌었다.
아빠가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나는 아빠가 너무 좋았다.
엄마는 맛있는 걸 안 사주는데 아빠는 사줘서 좋다.


*선생님: 호호호. 아빠만 점수 얻어요. 일기 잘 썼어요.
2016/09/21 21:39 2016/09/2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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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화요일
날씨: 해가 쨍쨍
제목: 카드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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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호한테 카드를 따주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병호가 나에게 카드를 한장 주었다.
2016/09/21 21:37 2016/09/2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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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일요일
날씨: 비가 오다가 그쳤다 함
제목: 우리집 둘째 고양이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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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니 침대 위에 나비가 올라와 있었다.
야옹 하며 울어서 아빠를 깨워 나비 밥을 주라고 했다.
2016/09/21 21:35 2016/09/2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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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월요일 
날씨: 해가 쨍쨍하다가 흐려짐
제목: 정빈이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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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이가 띠를 잃어버렸다.
정빈이는 품띠다. 나 같으면 속상했을 것 같다.
정빈이는 괜찮아 보였다.
2016/09/21 21:32 2016/09/2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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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진심 아내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몇 번 있는데 이건 그 중 하나의 사례가 될 것 같다.

올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우리 부부는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나는 내심 학교에서 미리 공부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받아쓰기가 그 첫 단계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다른 애들만큼은 하길 바랐다. 아니 선행학습은 아니더라도 1학년 과정은 잘 따라갔으면 했다.

아내는 내 생각과 달랐다. 아내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에게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은 맞춤법, 한글을 정확하게 쓰는 게 아니라 글쓰기의 기본기를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말은 잘 하지만 저학년 때 자신의 생각을 군더더기 없는 글로 적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데 실제로 부모들이 그런 건 가르치지 않고 이상한 것에 열을 내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내는 다른 건 무심해도 아이의 공부 중 일기쓰기는 꼭 챙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장황한 이야기를 줄이고 줄여서, 다듬어진 내용을 몇 줄의 일기글로 쓰도록 훈련시킨다. 매일 30~40분 정도. 그 과정을 보면서 나는 아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블로그의 한편에 아이의 일기 기록을 남기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2016/09/21 20:25 2016/09/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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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메갈리아, 정의당, 레진코믹스.
연이어 이슈들이 진행되고 있는 듯.
이 시점에서 논리를 말로 잘 풀어내지 못하면
누군가에겐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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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에게 왕자가 필요없다는 문구에 동의한다. 
또한, "만약 80년대에 어떤 정당이 '전대협을 지지한다'거나, 
90년대 야당이 '한총련을 지지한다'고 했다면 
"대학교를 불태우고 경찰을 때린 게 잘했다는 거냐", 
"집회 쓰레기는 너희가 치워라" 등등의 온갖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라는 기사의 논조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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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모든 불평등에 대한 저항들은 항상 기득권자들의 
엄중한 룰에 의해 가차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했다. 
메갈리아를 향한 엄중한 잣대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잣대를 들이대는 세력이 '진보적'이었던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비'기득권일 뿐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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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말을 아껴야 한다.
왜냐하면 정작 말 몇 마디 때문에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다.
솔직히 나는 생각의 다름이 나아가 입장의 다름을 만들고
나와 너의 구획을 긋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든 방향, 지향에서 멀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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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상당수는 설령 생각이 다르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동무를 하고 비싸지 않은 골목 맛집에서라도
얼굴을 맞대고 숟가락을 들고 싶어 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동네의 구석구석을 걷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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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 중 몇몇은 생각을 넘어 다수와 취향과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들과 공존하고 사랑을 받으며 함께 어울려서 각자의 고유한 색깔대로
지지를 받으며 그 방식이 다수의, 기득권의, 익숙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주변과 함께 일상을 나누고 싶어한다. 
나또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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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 모든 것들이 매순간의 이슈마다 각자의 생각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생각의 '진영'에 서서 상대에게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일 민족이라 굳게 믿는 우리는 비슷한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사상 검증을 점점더 타인의 '말'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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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써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규정짓는 것에 점점 회의적이 되어가는 나는.
말을 아껴야한다. 앞으로는...
2016/07/28 23:18 2016/07/28 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