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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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사이에 전자책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책장을 넘길 때의 질감, 펜으로 그은 밑줄이나 끄적인 메모 등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깊게 배인 종이책은, 스마트폰이나 이북(e-book) 단말기로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점점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좁은 방 양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가는 이사할 때마다 옮기기 힘든, 그렇다고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느낌이다. 10년이 넘은 책들은 어느덧 제본이 벌어지고 색도 바래고 책벌레도 꼬이는 데다가 잦은 이사로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결국 나조차도 자연스럽게 전자책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실제 구입도 많이 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전자책 시장의 규모가 외국 같지는 않아도, 최근 몇 년간 나름 양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상당량의 신간들을 전자책 형태로도 읽을 수 있다. 만 2년 정도를 써본 내 입장에서도 전자책은 매력적인 면이 많다. 나는 그날그날 읽고 싶은 이슈가 달라서 보통 가방 속 책이 두세 권은 족히 넘는다. 따라서 조금만 두꺼워도 그 책은 가방에 못들어가고 그 결과 영영 안 읽게 될 확률이 높다. 이에 반해 전자책은 분량에 상관없이 상시 50권이 넘는 책이 단말기에 들어 있으면서도 서류 가방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한 신간이 나온 사실을 출근 후에 알더라도 온라인으로 주문하거나 서점을 찾을 일없이 바로 다운로드를 받아 그 즉시 읽는 게 가능하다. 읽다가 필요한 부분들은 줄을 긋거나 표시해둔 후 집에 와서 일일이 타이핑하는 일이 잦았는데, 지금은 읽다가 필요한 부분은 SNS나 스마트폰으로 보내고 필요할 때 카피해서 쓰면 그걸로 끝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유한 기독교 관련 전자책은 전무하다. 규장, 나침반 등 몇몇 기독 출판사들이 전자책을 출시하고 있긴 하나 대다수는 전자책 시장 자체에 발을 들여놓을 계획이 없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기독출판계로 하여금 전자책 시장에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만드는 건가. 사실 디지털 콘텐츠들은 순식간에 시장의 판세를 뒤집어 놓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레코드점에서 CD를 구입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원 파일을 다운받는 일이 잦다. DVD를 컬렉션처럼 모으던 사람들도 이제 대부분 영화는 블루레이급 파일로 다운받는다. 이미 출판 시장도 디지털 시대를 열었다.

 

 

출판계의 고민, 핵심은 DRM
전자책 시장이 급성장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한다”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내놓으며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 단말기가 2008년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아마존은 전자책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다. 킨들이 성공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전자 잉크(e-ink) 기술을 이용한 뛰어난 가독성, 3G 통신망을 이용한 잡지․도서의 즉각적인 다운로드, 그리고 ‘7인치 200그램’의 뛰어난 휴대성이 그것이다.


킨들의 성공에 이어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넷북과 전자책 단말기를 커버할 만한 태블릿PC ‘아이패드’를 2010년 세상에 내놓았다. 출시 초기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잡스의 예견대로 이 ‘10인치의 아이폰’은 전자책 단말기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기기로 급성장했다. 아마존도 태블릿의 가치를 알아보고 곧 킨들 어플리케이션과 ‘킨들 파이어’라는 태블릿 형태의 단말기를 개발했다. 검색 사이트의 표준으로 불리는 구글도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구글 북스’라는 프로젝트를 시작,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는 등 본격적인 전자책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아수스(ASUS)사와 함께 ‘넥서스’라는 자체 태블릿PC을 제작하고 작년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이로써 태블릿 시장은 아마존의 킨들파이어, 애플의 아이패드, 그리고 구글의 넥서스, 이렇게 3사의 경쟁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 메이저 출판사들이 아닌 애플, 구글, 아마존이 전자책 시장에 적극적인 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출판시장은 빠르게 디지털로 진화하고 있는데 정작 출판업계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에 있다. 아마존은 전자책 사업 시작부터 자체 포맷의 DRM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한다. 사실 출판계는 DRM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술적인 전문지식이 없으므로 자신이 보유한 콘텐츠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한다. 자칫 DRM이 풀린 상태로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이 시장에 퍼질 경우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날로그 콘텐츠들이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음반회사들은 이미 엄청난 재앙을 경험한 바 있다. 디지털 음원은 곧 MP3 파일로 음성적으로 대규모로 유통되었고 곧 음반사들의 수익 악화로 이어졌다. 음반은 돈을 내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콘텐츠로 변질되어 갔다. 이런 불안 속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음반업계에 불법 복제를 차단하는 음원 유통망으로서의 아이튠즈 사업을 제안했고, 결국 메이저 음반사들은 모두 아이튠즈에 음원을 한곡당 1달러에 ‘헌납’했다. 음반사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아성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비슷한 갈등이 불거진 바 있으며 구글은 자사가 스캔한 수천만 권의 책에 대한 저작권 문제로 미국출판사협회와 7년간 긴 소송을 치렀고 다시 작가협회와의 소송이 예상된다.
 


전자책 시장의 변화, 기독출판의 대응은?
영화와 음악 같은 디지털 콘텐츠들은 점점 배급, 유통과 같은 업체로 그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떤가. 아마존은 자기 고유의 포맷과 킨들이라는 기기를 이용하여 이미 전자책 시장의 중심에 섰고 이제는 출판사를 배제한 채, 저자와 직접 전자출판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 여기에 아이패드로 전자책 시장을 넘보는 애플과 넥서스를 개발한 구글까지 출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형국이다. 전자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출판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개별 출판사들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 콘텐츠들처럼 종이책도 유통업체가 권력을 갖기 시작했고 전자책 시장의 확대에 따라 더욱더 이 흐름은 가속화될 것이다.


<복음과상황> 1월호 “그르니에의 ‘섬’이 되는 기독 출판을 희망함”에서 김진형 전 IVP 간사는 최근 9년간 결산회의 때마다 영업 담당자들이 “올해처럼 경기가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며 푸념을 했다던데, 나는 기독출판계가 한국 출판 시장에서 그간 꽤 선전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양적인 측면에 국한된 평가가 아니다. 물론 말랑말랑한 간증서나 자기계발서, 성공지향적인 가치관들을 기독교 신앙인양 포장한 책들이 호황인 트렌드는 여전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양서를 출간함으로써 평신도에서 목회자까지 책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며 신앙을 성장시키는 동력 내지는 자정 능력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출판시장은 최근 몇 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고 향후 몇 년 안에 극도의 위협과 난관에 처할 수도 있다. 기독출판계 또한 동일하리라고 본다. 혹시, 관성적으로 ‘묻어가기’ 내지는 세속 출판사들을 따라 하겠다는 전략이라면, 최소한 공이 날아가는 방향을 알고 떨어지는 곳에 서 있어야 제대로 슛을 날릴 수 있다. 내 생각에 ‘포도주’는 여전히 새 술인데 ‘부대’는 낡아 가고 있다.(끝)

2013/03/12 21:11 2013/03/1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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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0일, 그간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된 것인가?' 카페에는 옥한흠 목사의 아들인 옥성호 본부장이 사랑의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메일이 공개되었고 23일에 <뉴스앤조이>는 이와 관련해서 '아들의 격노, "아버지 옥한흠 목사를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그 메일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기사를 내보냈다. 관련 기사와 메일 전문을 읽어 보면 고 옥한흠 목사가 사랑의교회 건축을 지지했다는 교회 측 설명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구구절절 설명하였고 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사진과 동영상이 함께 전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만일 이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사랑의교회 측은 이와 관련해서 어느 정도 해명이 필요하게 될 것 같다.
 
이 문제는 즉각 인터넷 사이트에서 회자되었고 지금까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도 의견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메일의 내용은 이렇다. 옥한흠 목사가 원하고 찬성해서 건축을 추진했다는 교회 측 주장과는 달리 옥한흠 목사는 교회 신축과 함께 잃어 가는 사랑의교회의 명예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2009년 예배 시간에 상영된, 교회 건축을 독려했던 옥한흠 목사의 동영상은 사실 옥 목사가 오정현 목사의 거듭된 부탁에도 거절하다가 교회가 둘로 쪼개질 수 있다는 오 목사의 말에 괴로워하며 힘들게 찍었던 것이며 그 영상조차도 옥 목사의 우려의 목소리가 삭제된 채 방영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옥성호 본부장의 입장은, 교회에 실망한 교인들이 떠나가고 공공 도로 점유로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며 사역 헌금들이 공사 대금으로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 상상을 초월하는 은행 대출금의 이자를 내는 현 상황에서 건축은 중단되어야 하며 옥한흠 목사는 결코 '이런' 건축을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옥한흠 목사는 생전에 인터뷰나 설교 등을 통해 자신이 강남에서 시작한 사랑의교회가 규모의 교회, 맘몬의 교회가 될까 봐 매순간 노심초사했다. 교회의 세속화를 늘 염려하며 행여 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 그것이 자신의 죄라며 괴로워했다. 교회 건축에 원론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은퇴 후 자신의 후임인 오정현 목사가 건축을 결정했을 때에도 그 결정이 사실상 자신이 교회를 너무 키웠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여겨 그것마저 회개의 제목으로 삼았다. 옥성호 본부장도 자신의 책에서 옥한흠 목사가 생전에 교회의 규모에 대해 우려했고 교인 수가 많아지는 현상을 반기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은퇴 후 저(옥한흠)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 수 2만 3000명, 전체 등록 교인 수 5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옥성호, <아버지, 옥한흠> 143쪽 인용)."
 
이에 반해 오정현 목사는 교회 내의 늘어나는 교인들을 가지고 끙끙거려 온 옥 목사와는 달리 예배당 건축이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행보는 사랑의교회의 또 다른 욕망이다. 사실 오정현 목사는 그간 사랑의교회에서 억압되어 온 교인들의 '이드(id)'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도 교회 내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오정현 목사를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해석한다면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그간 '초자아(superego)' 역할을 감당한 옥한흠 목사 아래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왔던 건 아닐까. 내가 전해 듣기로 몇몇 성도들이 '우리 교회는 능력(돈)도 있는데 건물도 높게 올리고 구질구질한 공간들을 대기업 교육장처럼 깔끔하게 단장하면 안 되겠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교회 신축 문제 이전부터 이런 조짐은 있었다. 새벽 기도의 기복성을 경계한 옥한흠 목사와는 달리 오정현 목사는 부임 직후부터 '특새(특별 새벽기도회)'를 무슨 대형 집회처럼 열었고 그곳에 온 사람들의 복을 빌어 줬다. 지방에서도 사랑의교회 '특새'에 참석해서 자신의 작은 교회에서는 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겠다며 심야 버스를 타고 올라오던 까닭에 한동안 예배당은 타 교회 성도들로 넘쳐났다. 아마 그때부터 사랑의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자교회의 엄청난 스케일에 스스로도 놀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러한 총동원 형태의 집회 스타일에 익숙해지면서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이전에는 억눌러 왔던 메가처치의 '규모적' 감동을 영적인 코드로 욕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옥성호 집사가 보낸 메일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아버지의 명예'는, 내가 해석하기로는 일개 가족주의적 아버지의 명예의 회복, 혹은 옹호가 아니다. 그것은 옥한흠 목사가 끝까지 분투하고 지키려 했던 규모의 신, 맘몬 신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고 있는 '강남' 지역 교인들의 '제자도'였다. 어떤 의미에서 오정현 목사는 그간 옥한흠 목사가 힘들게 지켜 내고자 했던 사랑의교회의 금욕적 제자도를 '영 단번'에 풀어 줬다. 건축 결정에 우려감을 표한 교인들도 있었겠지만, 내심 눌려왔던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분출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들도 많았으리라.
 
옥한흠 목사는 암이라는 지병을 얻어 가면서까지 교회의 세속화·맘몬화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다행히도 강남에 있는 교회 중에 '복음주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랑의교회를 만들어 냈다. 이를 두고 청어람 양희송 대표는 사랑의교회가 강남의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소망교회, 광림교회 등과 비교해 볼 때 쉽게 동일시되지 않는 "강남에 있지만 강남에 속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지점이 있었다고 말한다(양희송 대표도 2009년에 쓴 자신의 글에서 사랑의교회 신축에 대해 우려감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사랑의교회는, 스스로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건 간에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어떤 본이 되었고 실제로 교회의 금전 규모로 봐도 여러 기독교 핵심 사업의 중심에 설 만한 위치였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 체제가 끝나고 오정현 목사 체제가 되면서 한국 복음주의의 중요한 축이 급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사실 지역 교회로서, 강남지역 메가처치 교회로서의 사랑의교회에 나는 관심이 없다. 교회 건축을 결정했던 몇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 교회는 강남에 넘쳐난다. 그런 교회들을 다 문제 삼자면 끝도 없다. 문제는 옥한흠 목사로 인해 형성된 한국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사랑의교회의 위치와 그 대표성을 넘겨받은 오정현 목사가 복음주의의 소중한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 퇴행의 방향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단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복음주의권의 많은 중간 지도자급 사역자들이 이런 상황들을 그냥 지켜보거나 감내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 안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어진 '구조'는 일단 덮어 놓고 긍정하는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수혜자들이라 그런 것인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떠도는 풍문이 아닌, 문제의 메일 내용과 기사들을 다 읽고 나서도 옥성호-오정현 간의 세력 다툼 격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몇몇 기독교인들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아닌 것마저 포용하려는 그 관대한 종교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어쭙잖은 지식으로 포스트모던 담론 놀이나 영적인 언어, 현학적 분석으로 사태를 흐리지 말고 그냥 큰 예배당이 좋다고 말하자. 차라리 한국교회도 좀 잘 먹고 잘살고, 어디 가도 안 구질구질하고 세련되게 이른바 중산층의 종교답게 규모도 좀 갖추어지길 은근히 바랐다고 말하자. 제발 이제라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그렇게 고백해 달라.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생각이 이제는 좀 바뀌었다. 솔직히 나는 '제자훈련'으로 대변되는 옥한흠 목사의 신학적, 목회적 한계를 논할 정도로 한국 복음주의가 고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보는 책들은 웬만한 사람들은 한 번에 이해조차 못할 정도로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수준이지만 교회 안에서 영적 지도자들의 잘못된 사역 방향을 보며 그 현상을 학문적, 신학적으로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솔직히 한동안 그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가 그 짓거리만 20년 동안 하는 걸 지켜봤다. 시간은 많은 걸 다시 보게끔 만든다. 남편의 감언이설로 결혼을 승낙한 아내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의 일상을 통해 그 말의 진정성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한국 복음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그 고상함 안에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순복음교회나 미국의 수정교회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 얘기다. 그리고 이게 자유주의 신학이니 알미니안이니 가톨릭이니 죄다 비판하며 내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복음주의의 '진정성'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우리는 제2의 오정현 목사가 나타나면 또다시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며 책상머리에서 그 신학적, 학문적 의미를 연구할 것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오정현 목사님과 사랑의교회, 그리고 관련된 많은 교계의 동역자분들은 지금이라도 옥한흠 목사의 교회론으로 돌이키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로 지금의 방향은 내가 애정을 갖고 뿌리를 계승하고 싶었던 '그' 복음주의가 아니다. 오정현 목사가 대표성을 갖는 사랑의교회와 그 축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한국 개신교가 여전히 복음주의라면.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내 신앙고백이다.
 
2013/01/24 21:10 2013/01/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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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전자책 시장의 이슈와 전망
: 기독 출판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킨들, 태블릿PC의 성공과 전자책 시장의 호황

전자책 시장이 들썩거리고 있다. 아마존은 지난 7월 19일에 매체를 통해 2/4분기 전자책 판매가 종이책 판매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지난 3개월간 판매 기준 1.43배로 전자책의 판매수가 높았고 지난 한 달로 좁히면 양장본 대비 1.8배 수준이다. 아마존은 이미 킨들2의 가격을 낮춘 데에 이어 이번에 킨들3의 가격도 파격적으로 낮추었다. 또한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판매로 전자책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앞다퉈 전자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미 인터파크 '비스킷', 삼성전자 'SNE-60K', 북큐브네트웍스 '북큐브', 넥스트파피루스 '페이지원', 아이리버의 '스토리' 등의 전자책 단말기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전자책 시장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으며 갤럭시탭과 아이패드의 국내 출시는 시장의 기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자책 시장이 콘텐츠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한번 구입한 전자책을 여러 다른 기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전자책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전자책의 성장은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하는 것'이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e-book 리더기)를 내놓고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이 단말기가 2008년에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성공적으로 출판 시장에 안착했다. 킨들의 성공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로 전자 잉크(e-ink) 기술을 꼽을 수 있겠다. LCD와 같은 액정은 쉽게 눈이 피로하고 햇빛 아래서는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전자 잉크를 사용한 단말기는 비교적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가며 가독성이 우수한 장점이 있다. 둘째로는 3G(3세대 이동통신 기술 규격)망을 이용한 신문 및 e북의 신속한 다운로드 통신망 지원이다. 이러한 통신망을 이용하여 어디서나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단 몇 분 내에 다운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휴대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킨들은 광고를 통해 휴가지에서 여성이 한 손으로 킨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자주 부각시켰다.) 대체로 2G의 용량을 지원하는 전자책 단말기는 많게는 1,500~2,000권 정도의 온라인 도서를 저장할 수 있으며 가볍고 한 손으로도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

 

한국의 전자책 추이

국내에서도 킨들의 열풍에 힘입어 올해 들어 많은 기업들이 전자책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단말기를 중심으로 본다면 킨들의 상당 부분을 모방한 인터파크의 '비스킷'이 상당히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 느낌이다. 비스킷은 LG에서 개발했으며 킨들처럼 키패드를 탑재하고 있으며 LG텔레콤의 3G망을 이용하여 책을 PC 연결 없이 구입하고 신문을 구독할 수 있다. 삼성의 SNE-60K는 와이파이를 지원하며 터치스크린을 지원한다. 북큐브도 와이파이 지원 및 사전 탑재하였고 아이리버의 스토리도 SD 메모리 확장 및 사전을 지원하며, 넥스트파피루스의 페이지원은 키패드 및 무선 기능 등을 없애고 가격을 낮춘 저가형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단말기 시장은 점차 그 기능들이 개선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단말기의 사양(specification)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책 시장의 관건은 단말기보다는 콘텐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는 이미 6만 8,000권 정도의 전자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삼성, 아이리버 등의 단말기를 지원하고 있다. 후발 주자로는 '비스킷'이라는 독자 모델을 개발한 인터파크가 2만 5,000종의 전자책을 내놓았으며 연말까지 10만 권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예스24와 알라딘은 <중앙일보>, 비룡소 등과 연합해 '한국이퍼브'라는 회사를 출범하고 지난 4월부터 온라인 서점을 통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북큐브네트웍스 역시 국일, 다락원, 대교출판, 푸른숲, 행복한책읽기 등 100여 개 출판사와 제휴를 체결하고 전자책 시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업체들은 최근 독자적인 단말기를 통해 전자책을 보게 하던 폐쇄적 방식에서 구매한 추가적인 비용 부담 없이 PC와 휴대폰, 전용 단말기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다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계속되는 변화들

최근 들어 전자책 시장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간판급 단말기 가격의 하락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이 지난해 누크(Nook)라는 단말기를 3G버전은 199달러, 와이파이 버전은 149달러의 파격가로 시장에 뛰어들자 킨들은 즉시 킨들2를 그보다 10달러 낮은 189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 2위 대형 서점 체인인 보더스가 코보(Kobo)라는 단말기를 150달러에 내어놓고 20달러 상품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추격에 나섰다. 이에 아마존에서는 다시 킨들3을 킨들2와 같은 가격으로 출시하였다. 킨들 초기 버전이 40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절반 이하로 가격이 떨어진 셈이며 이러한 저가 정책에 힘입어 아마존의 전자책 시장은 2/4분기 실적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100달러 수준으로 단말기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만큼 전자책 시장의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단말기 중심의 전자책 시장에 또 다른 변화의 조짐도 있다. 검색 사이트에서 온라인 인터넷 솔루션의 표준으로 변모하고 있는 구글은 다른 회사들이 단말기를 중심으로 시장 진입을 시도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주력 부문인 '검색'을 앞세워 구글북스(Google Books)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기에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이미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했다. 이 서비스는 절판된 책이나 저자의 허락을 받은 도서의 전체를 검색할 수 있으며 시판 중인 서적은 정보나 책의 일부분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구글북스 서비스에 출판사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 서비스가 가진 잠재력과 출판계의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 되면 실로 출판계의 디지털 혁명이라 할 만하다.



전자책으로 인해 기대되는 효과들

초창기 전자책 시장은 일인 출판과 같은 전자출판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전자출판은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디자인, 편집, 인쇄와 같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출판사 고유 기능의 과감한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미 아마존을 통해서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또한 2007년 킨들의 성공을 기점으로 전자책 시장은 비교적 충분한 양의 콘텐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가볍고 작은 단말기로 2,000권 이상의 책을 소지하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의 증가와 휴대성의 비약적인 개선이 생긴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서를 보면서 사전 기능을 통해 단어를 실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3G망을 이용해서 버스 안에서도 신간 서적이나 신문을 다운 받아 읽을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효용 성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자책에 대한 몇 가지의 이상적인 기대들도 있다. 먼저는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지가 맞지 않아 미출간 혹은 절판된 많은 전문 서적들의 디지털 콘텐츠화이다. 책 한 권을 기획하여 상품으로 팔기까지 고비용이 드는 종이책 시장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자책 시장은 이러한 출판 시장의 자본 논리를 해체시키고 콘텐츠의 전문화, 다양화를 만들 수 있는 퍼텐셜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저장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참고하려고 수집한 방대한 양의 종이책들은 부피도 크고 보관하기도 힘들다. 개인적으로도 글을 쓸 때 인용할 몇 페이지 때문에 보유한 많은 참고 문헌들은 이사할 때마다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그렇다고 그 참고 문헌의 페이지들을 모두 타이핑한다는 건 시간과 노력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전자책은 이러한 참고 문헌 확보에 엄청난 이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검색 기능이다. 만일 전자책을 데이터베이스처럼 관리하고 그 콘텐츠를 검색을 통해 필터링 혹은 클러스터링(clustering)할 수 있다면 그 효용성 또한 클 것이다. 일례로 논문을 쓸 때도 관련 연구 논문 및 서적을 검색하고 검색한 논문들 중에서 내 논문 주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을 추려 내는 작업을 하는 데에도 적게는 며칠에서 많게는 몇 주 동안을 허비하기도 한다. 현대의 이슈는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체계화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유효하고 가치 있는 정보들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전자책은 이 작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구글북스로 검색한 자료들을 3G망을 통해 단말기에 다운 받고, 단말기에 저장된 자료들을 즉시 검색어를 통해 분류하여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해 두는 작업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로 리서치 논문 한 편을 쓰는데 드는 시간은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전자책 시장의 장애 요소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자출판 시장은 아직 장애 요소들이 많이 있다. 종이책 대비 전자책 콘텐츠 자체의 수적인 부족 현상이나 출판 업계의 미온적 대응, 대중의 종이책 선호 정서, 혹은 디지털 매체에 대한 반감 등을 전자출판의 장애 요소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자체에 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전자출판의 핵심 문제들은 모두 이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로 귀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존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시작부터 저작권 보호 기능이 적용된 자체적인 파일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하며 전자책 배포 시 자체 DRM 툴이 적용된 콘텐츠를 다운 받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DRM은 저작권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지만 단순히 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몇 가지의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째로 콘텐츠의 자유로운 복사, 인용, 배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자책은 DRM 툴을 통해 허가되지 않은 사용자나 단말기에서 전자 문서를 볼 수 없도록 콘텐츠의 열람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보유하고 있는 전자책이라 하더라도 흔히 사용하는 텍스트의 전체 혹은 부분적인 COPY & PASTE가 불가하다. 단말기뿐 아니라 PC 상에서도 DRM과 연동되는 프로그램 안에서만 부분적인 추가 기능(책갈피, 밑줄 등)만을 지원한다. 이는 사용자가 손쉽게 콘텐츠를 가공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막는다.

둘째는 DRM 툴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이 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출판업계가 우려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며 이 문제는 이미 음반 시장에서 mP3 파일로 그 폐해를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첫 번째 문제와 어떤 면에서 모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전자 콘텐츠의 DRM이 풀릴 경우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그 순간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들이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출판 시장은 전자책을 통한 수익 구조를 흔들어서 결국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셋째로 저작권 자체에 대한 인터넷 서점과 출판업체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문제가 된 바 있으며 구글북스와 저작자, 혹은 국가 사이에서 지금까지 협의 중인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로는 전자 콘텐츠에 대한 판권을 종이책과 별도로 가져가게 되었으며 구글북스도 디지털 콘텐츠에 대해 저자와 저작권을 협의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점점 더 저자와 인터넷 서점 사이의 직접적인 협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므로 출판업계는 자신의 입지를 줄어들게 만드는 이 변화들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오픈소스, 카피레프트 운동을 지향하는 그룹에서 저작권 자체의 허용에 대한 목소리도 높다.

 

 

기독 출판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전자책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이미 9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최근 아마존의 전자책 판매량 증가와 삼성의 갤럭시탭, 애플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단말기의 개발과 콘텐츠의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 출판계는 이런 전자책 시장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내가 알기로는 아무런 대응을 않고 있다. 비교적 시장의 규모가 큰 기독 출판계는 아직 전자책 시장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디지털 시장의 빠른 변화는 곧 콘텐츠 시장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물론 이는 기독 출판계에만 한정된 이슈는 아니다. 일반 출판업계도 대응이 미진하긴 마찬가지다. 대체로 전자책 시장 진출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앞서 언급한 여러 장애 요소들로 인해 선뜻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결국 현재 전자책 시장은 인터넷 서점과 같은 온라인 서비스업체에서 시장 선점을 위해 단말기를 앞세워 출판업계의 등을 떠밀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미 가속화된 전자책 시장은 그 미래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곧 콘텐츠 시장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독 출판 내지는 온라인, 오프라인 기독 매체들은 이에 대한 대응 전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 윤리 내지는 세계관적 접근이 필요한 DRM과 전자책 저자의 판권 문제 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 개혁 세력이라 자처하는 소위 복음주의 출판계는 매번 세상의 변화에는 뒷짐 지고 있다가 슬그머니 무임승차하려는 본성을 이제는 조금씩 고쳐 나갈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 <전자책의 충격>, 사사키 도시나오,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년 7월
- '전자책 춘추전국시대 최후의 승자는?', 임정욱, <시사IN> 147호, 2010년 7월 10일
- '출판계 e-book 열전' (1)프롤로그~(8), <파이낸셜뉴스>, ㈜한국출판콘텐츠, 2010년 2월 17일~4월 14일
- '출판·잡지·신문·이통사 헤쳐모여-콘텐츠 전쟁의 총아 e북', 송창섭, <한국경제매거진>, 2010년 2월 15일
- '출판사와 전자책 공생의 길', 한기호, <한겨레>, 2010년 2월 5일
- '출판 생태계 위협하는 디지털 도서관', 한기호, <한겨레>, 2009년 12월 4일
- '넌 종이책 보니? 난 전자책 본다', 한윤정, <경향신문>, 2009년 12월 3일
- '전자책 열풍, 아마존 킨들 성공 요인 무엇일까?(1)~(3)', <디지털데일리> 2009년 10월 22일~27일
- '디지털, 출판의 미래 바꾼다', 구본권, <한겨레>, 2009년 10월 16일
- '이머징 이슈; 책의 진화', 정지연, <전자신문>, 2009년 10월 1일
- '알아봅시다; 전자잉크', 김승룡, <디지털타임스>, 2009년 7월 22일
- '킨들 독서·신문 구독 문화 바꾸나', 김중태, <한국일보>, 2009년 6월 24일

2012/10/12 00:21 2012/10/1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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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복음주의 지성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직장인 지성운동 사례
제목: 직장인 지성운동의 현실과 고민들 (설문을 중심으로)

/김용주


기독 지성운동에 대한 발제를 준비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주변 학사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참에 간단히 설문지를 만들어서 주변 학사들에게 설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질문지를 공람시켰고, 그 결과를 가지고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기독지성운동의 현실과 고민들을 살펴보았다. 질문은 총 7개로 객관식 문항들이 많았으나 문항들에 구애받지 않고 기타 의견을 개진해달라고 주문했다.


1. 자신이 기독지성운동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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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실 이 질문은 직장인들이 본인을 기독지성운동의 주도적 존재로 느끼는지에 대한 의도로 던져 보았다. 다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했지만 17명 중 4명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 4명의 직장인은 이후에도 기독지성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는 답을 주로 하였다.)


2. 기독지성운동의 구성원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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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는 대학 졸업자가 기독지성인이라는 대답이 29%였고 무엇보다 기타가 51%로 가장 높았다. 기타에 대한 의견으로는 ‘기독지성에 대한 관심자’나 ‘스스로를 기독지성인이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기독지성에 속한다’고 답했다. 결국 다수의 응답자는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 기독지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고 응답자 중 29%는 학부 졸업하는 정도의 교육 수준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직장인 입장에서 기독지성 운동의 범위, 혹은 실천 영역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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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직장인들이 기독지성운동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주어졌으며 응답자들은 비교적 고르게 선택했다. 복수 응답이 가능한 관계로 기타가 27%로 가장 많았는데 기타 의견으로는 ‘삶의 전 영역’이 실천 영역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고, 이에 더하여 ‘보다 심화된 전문 영역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4. 본인이 생각하는 기독지성 운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직장/사회인 입장에서)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중복되는 답변들을 제외하고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았다.

 

 

A. 어떠한 사역이던지 기존의 방식이 아닌 더 나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변화를 수시로 모색하는 것
B. 직장/사회인 입장에서 볼때는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까지를 하시기 원하시는지를 살펴봐야 함. 이는 구별된 사회적(?)인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각자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문제로 연결되며, 이러한 가운데 진행될 수 있는 여러 활동들을 의미
C. 기독교 세계관에 부합한 직장 생활을 기본으로, 해당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정책 혹은 각종 의견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 및 전공에 국한되지 않은 이 사회의 전반적인 시대정신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
D.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정신과 가치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삶으로 표현되고, 자연스러운 삶의 양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E. 교회 내에서 부족한 성경공부나 책나눔(소개)을 하고 가정 공동체에서 성경을 같이 보고 공부함
F.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유지하고 삶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
G. 각 학문 영역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고 실천하는 것
H. 기독교적 지성의 축적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속한 영역 (직장, 학교, 특정 조직)에서 성경적 관점에 맞게 살려고 하며, 그에 수반되는 지식을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며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
I.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어떻게 적용시키며 변화를 이끌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며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공동체적으로 사회에 대안을 제시

설문 결과, 많은 학사들이 삶, 일상, 실천과 같은 말들이 기독지성 운동의 핵심 단어로 중복해서 나타났다. 결국 직장인들에게 있어서는 기독 지성이 아는 것, 지식의 습득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고, 전문 영역에서 더 나은 방향과 실천을 고민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일상, 삶, 실천에 있어 기독 지성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나 한계를 표현(‘지성의 축적에 머물지 않고’ 등)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5. 실제로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독지성 운동 활동이 있는가?

A. 없음. (바뻐ㅜㅜ)
B. 없음!! 부끄러움!!!
C. IVF 수도권학사회. 관심영역별로 그룹을 나누어 성경적 가치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있으며 갓 졸업한 학사들이 사회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실제적인 움직임은 부족)
D. 성경과 신앙서적, 일반서적을 다양하게 읽으며 바람직한 세계관과 안목을 형성 및 공부 분야에서 적용점을 찾기 위해 모색 중 (인권법학회 구성 등)
E. 아기 엄마들과의 큐티모임. (성경적 육아교육에 대한 고민, 산후 위로 사역)
F. 신우회. 믿는 이들이 회사 내에서 모여 개인과 회사, 나라를 위해 중보 (모임이어서 관계의 한계성이 있음)
G. 교회 장애인예배. 소외된 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나라를 위해 예배드림

학사들의 답변들을 보면 대다수의 학사들이 거의 활동이 없었고 그들은 이런 실천 없는 삶에 대한 고민과 부끄러운 마음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IVF 학사회 모임이나 신우회와 같은 기존의 모임들을 참석하여 충전과 변화를 꾀하기도 하였지만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개중에는 장애인 예배로 봉사를 하거나 출산 후 엄마큐티 모임을 하는 학사들이 있었고 이런 모임들이 잘 발전되어 정착된다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6. 기독지성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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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독지성 운동의 장애 요소로는 ‘개인영성 회복만으로도 어려움’(31%), ‘바쁜 직장생활로 인한 시간할애 어려움’(24%)가 주된 이유였고 기타에서 ‘육아’ 등을 꼽는 것으로 보아 일상에서도 직장 생활과 육아 등 절대적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자기를 추스르기에도 바쁜 게 학사들의 현실인 것으로 보였다. 설문 대상이 주로 30대 전후반의 직장인들이므로 이들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기독지성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14%), ‘정보 지식의 결여로 인한 실천 저조’(14%)가 비슷한 수치였고 기타(17%)에서는 ‘롤 모델의 부재’를 꼽는 학사도 있었다.


7. 기독지성운동의 실천을 위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같은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모임
(교육부분도 그 안에서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B. 대학생들이 졸업하고 기성세대로 넘어가는 인생의 주요한 변곡점(취업, 결혼, 출산 등) 이후에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묶어줄 수 있는 공동체
C. 시간(직장 생활, 육아 등으로 인한), 공간, 물질적 여유, 혹은 그것들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능력
D. 기독 지성운동에 대한 강력한 동기 부여
E. 비슷한 직종이나 분야 혹은 생활권 등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들에 대한 논의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
F. 적극적으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필요 (빌라 공동생활 등)
G. 풀타임 운동가들과의 접점 마련

 


이 질문은 6번의 걸림돌 해결을 위한 방법을 물어본 것이었으나 의견이 분분하였다. 무엇보다 학사들 대다수는 ‘전문적인 정보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현재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시간적, 물질적 부담에 대한 해소’가 선결 조건이라고 여기는 학사들도 있었고 기독지성운동 자체가 필요성이나 매력 자체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동기 부여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정리하면서

1. 학사들의 설문 결과
설 문에 응한 이들이 특정 지부 학사들 소수에 국한된 관계로 통계적인 의미를 갖지는 못하겠지만 몇 가지의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학사들 다수는 기독지성운동을 학문 영역에 국한시키기 보다는 삶과 일상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원리들이 작용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천에 대한 나름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실제로는 그 열매가 미약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학사들이 기독지성운동을 하기 힘든 장애 요소로는 바쁜 직장 생활과 육아 등으로 물리적인 시간과 관심을 갖기가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삶과 괴리감이 있는 기독지성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보이기도 했다. 기독지성운동을 위해 학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비슷한 직종, 분야 혹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주제 등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이나 공동체를 꼽았고 시간적 물리적인 문제의 해결도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기성 모임보다 한층 전문화되고 일상에서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모임이 필요한 반면 실제 그러한 활동을 하기에는 여력이 없다는 것이 학사들의 현실인 셈이다.

 


2.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며
직장을 다니는 학사로서 느끼는 기독지성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지난번 ‘기독지성 잡담회’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30대 학사들은 일상에 허덕이고 있는 반면 학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른바 변방의 고수들은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지성적 탁월함에 매몰되고 있는 듯 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실제로 한국 복음주의의 윗세대로 꼽히는 손봉호, 이만열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이렇다 할만한 기독지성 운동가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중동 전문기자로 꼽히는 김동문 선교사, 법조계의 김두식 교수 정도 외에는 한국 사회에서 복음주의 기독 지성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교수 그룹을 제외하고 일반 학사들만을 고려한다면 한국에는 ‘복음주의 학사 운동’이라고 할만한 토대가 전혀 없다고 평가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연유로 설문에서 보았듯이 학사들 중 일부는 자신이 기독지성 그룹에 속하는지조차 의문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기독지성 운동에 대한 무지와 회의감에 빠지기도 쉽다. 선배들의 선례나 롤 모델 자체가 없는데 후배 학사들이 어떻게 그 길을 개척해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학부생일 때부터 이미 지성사회 복음화라는 모토 자체를 버린 IVF 캠퍼스 운동은 사회인이 된 학사들에게 지성 영역에서의 어떤 소명 자체를 심어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30대의 가장 바쁘고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내 입장에서도 본이 될만한 대안을 제시할 자신은 없다. 따라서 대안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몇 가지 고민거리들을 나누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1) 기독지성운동 자체의 회의적 이미지를 탈피해야 한다. 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며 이러한 이미지는 점점 더 강화될 것처럼 보인다. 기독지성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신학적 지식을 현실 세계에 발 딛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풀어내는 데에는 비교적 열심을 내지 않는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한국기독지성운동도 학구적인 몇몇 대학원생, 신학생, 목회자들의 전유물로 탈바꿈되었고 그 현학적이고 난해한 용어들과 개념들로 인해 그 실천성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젊은 학사들에게 기독지성 자체에 대한 회의감만 증폭시키는 듯 하다. 기독지성의 훈련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독서와 성경연구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연구 자체를 불필요한 지식 습득이라 여기고, 아무런 교육 없이 직관적인 관심만으로도 기독지성운동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 학사들의 관점은 그간 지성운동을 이끈 나를 포함한 많은 선배들이 정작 실천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 매몰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게 만든다.

2) 거대 담론에서 미시적, 일상적 영역으로의 기독지성운동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례로 진보진영의 운동들도 점차 이데올로기나 진영 논쟁에서 생태적인 관심과 교육, 먹거리 등으로 이슈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기독지성운동이 과거에는 정치적인 개혁세력으로 뭉쳤다면 이제는 보다 미시적인 일상과 삶 전반에 걸친 관심과 대안들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육아와 교육은 그 자체로 여러 영역(먹거리, 공정무역, 아동도서관, 입시, 대안학교 등)으로 확장 가능하므로 그런 부분에서 보다 전문적인 모임이나 연구 등을 통한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형 할인점에서의 소비를 줄이고 생협이나 공정무역 제품 등을 구입하거나 제3세계 지역 어린이 일대일 후원 결연을 맺는 등의 후원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봉사활동 등에 참여하는 등의 미시적인 삶의 근본 원리들을 돌아보고 그 적용점들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3) 직장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의 온오프 모임 구성이 필요하다. 간혹 기독운동가들이 주최하는 모임들을 보면 주중 오후 시간이나 혹은 참여가 어려울 정도로 자주 모이는 등 직장인들이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 대다수이다. 물리적으로 여건이 허락치 않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전임사역자들의 섬세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약자이다. 이들이 여러 모임이나 세미나 등의 지성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불편한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세부적으로 챙기지 않는 한 일반 직장인들이 기독지성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그들에 대한 적극적 배려가 필요하다. (끝)

2012/10/11 23:53 2012/10/1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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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느끼는 기독지성운동
/김용주


1. 현장, 30대의 일상이라는 전쟁터
대 학을 졸업한 지는 7년째이고 회사에 입사한 지는 5년째이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화성에 있는 직장에 출근하면 퇴근은 11시. 그래도 주5일제 시행으로 주말에는 쉬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그마저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더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감당시키고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명예 퇴직을 권하며 선임연구원, 수석연구원으로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다. 정년이 그만큼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내에서 자기 개발이나 어학 공부, 혹은 성경 공부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에 끼니를 걸러야 한다. 책을 읽거나 글이라도 쓰려면 식사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야만 한다. 정년을 생각하면서 전세 대출금을 갚기 위한 돈계산을 해보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몇 년 내로 서울에서 작은 평수의 집은 커녕 대출금을 다 갚기도 쉽지 않을 성 싶다. 대기업 사정이 이러니 2차, 3차 협력업체는 더 열악하다. 일정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상사의 지시에 의해 업체 직원에게 과도한 업무를 떠넘겨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퇴사하는 젊은 업체 직원들도 많다. 급여는 대기업에 비해 적으면서 며칠 밤, 심지어 몇 달씩 야근에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잦아서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최근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이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는 임신 후 육아 휴직 등 사내의 껄끄러운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채 직장을 그만 두었고 출산한 이후에는 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지 못하는 나로 인해 육아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요즘은 주변에서도 출산 후 바쁜 남편과 고부갈등, 육아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많아졌고 그러한 문제로 이직을 하는 남편들도 생겨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의 경우에는 육아 도우미를 쓰거나 기관에 보내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요사이 육아 관련해서 알아야 할 것들도 많아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정보를 빨리 얻어야 좋은 부모가 된 기분이다. 이렇듯 육아라는 프로젝트를 놓고 부부 두 사람이 서로 동역자가 되어 이를 감당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지칠 때까지 업무를 하고 있는 30대의 부모들은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직장생활과 육아에 올인하며 이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는 신앙서적도 꽤나 읽었고 사회 문제에 관심도 있었고 때때로 참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수면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이런 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대기업과 같은 제조업 관련 직종에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직장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좀더 자라거나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

 


2. 일상에 허덕이는 다수의 기독지성인들
IVF 시절,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갈등은 선교단체의 방향성 문제였다. 내부적으로 길고 지루했던 논쟁도 있었고 암묵적으로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갈등의 주요 원인은 이러했다. 나의 주장은 사회 참여의 문제를 학부 때에 사역 방향에 포함시켜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한 IVF와 복음주의의 방향성이었다-이었으나 지부 내의 분위기는 개인 영성을 먼저 다진 후에 사회에 나가서 각론을 실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리더쉽 자체가 두 방향으로 분리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이후에는 IVF 외적인 일들-기연 활동, 총학 진출, 복음과상황 독자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지부 학사 모임이 있었는데 이제는 점점 그 모임 자체가 경조사 모임으로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며 주변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졸업 후에 사회참여의 각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직장에서 기독인을 만나서 간혹 IVF 선교단체에 속했다는 말을 하면 여전히 어떤 기대감으로 나를 대하는 것을 종종 본다. 사실 지성사회 복음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선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삶의 모습이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나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성 문제를 거론했을 때 캠퍼스에서 개인 영성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면 분명 졸업 이후에 사회참여 각론에 있어서의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침 내지는 훈련의 장이 필요했을 법한데 IVF운동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델 제시나 훈련의 장 내지는 현장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듯 하다. 학사회 모임도 여전히 실천을 담보로 한 어떤 운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그저 파라처치의 OB 예배 모임 내지는 재활 교육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에 앞서 언급했던 현장의 문제들이 30대 직장인에게는 분명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담임직 목회 세습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청 광장으로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혼자 결정하고 시간을 내어 참석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도 내 개인의 문제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좋다는 책과 기사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꼼꼼히 읽어냈고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곤 했는데 이제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시의적절하게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학부 때부터 철저하게 고민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공부했어도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실천해 옮기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가 많았던 캠퍼스에서조차 그러한 고민과 참여의 경험이 없는 다수의 기독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가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길 기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3. 변방의 고수들, 선지자적 방관주의
다 행히 특정 부류의 기독인들이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선교단체 출신의 신학도들이나 석사, 박사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 주로 대학원생들이 이런 부류이다. 이들은 여전히 캠퍼스에서 고민했던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으며 어떤 사안에 대하여 최신의 자료들을 가지고 균형있고 시의적절하게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들의 실천이 비교적 약해 보인다는 점이다. 어떤 기독 잡지 기자는 내게 교계에서 비판적인 글을 쓰는 몇몇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이론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가 느끼기에 지성적인 영역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교계의 다수의 사람들이 비판적인 논조에만 그치고 실제로 그 문제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IVF가 됐건 복음주의권이 됐건 간에 그간 지성사회 복음화를 부르짖으면서 어떤 현장에서의 실천이 전혀 담보되어 있지 않은 많은 담론들은 어떤 의미에서 지성적 탁월함 자체에만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과거의 낙선 운동이나 목회세습 반대 운동, 그리고 최근 IVF 출신 학사들이 하고 있는 러빙핸즈 같은 사역들에서 간간이 열매들이 파편적으로 나오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패턴이나 연결고리를 가지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이고 개인의 역량에 국한된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잘 찾아보면 주변에 지성 영역에서의 변방의 고수들은 많으나 그들의 이른바 선지자적 방관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현장으로 내려와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첫발을 내딛는 행위는 시도조차 않은 채, 헛딛는 교계의 행보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에 그치는 것 같다. 그리고 북미 중심의 기독교 이슈들과 출판물들에는 비교적 빠른 습득과 전파를 보이지만 한국적 상황에 대한 성경적 적용이나 토착화 문제, 그리고 외부에서 오지 않은 독특한 기독교적 관점의 생성에는 미흡한 면이 없지 않은데 이도 결국 돌아보자면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 한국 사회의 저변에 딸려 있는 상황들과 기독교 지성운동이 따로 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4. 참여와 연합을 꿈꾸며
직장인의 입장에서 졸업 후에 복음주의 운동, 혹은 지성사회 복음화 운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학부시절 그렇게 존경하던 선배들이 학사가 되고 나면 수면에서 사라지곤 하는 일들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지만 정작 30대로서, 직장에서 중간 직급의 위치에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조차 버겁고 힘들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매순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런 치열함 때문에 과거에 사회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기독인들이 이 시기에 어떤 교계의 중추세력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선교단체의 방향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현장의 무게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지성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인들은 한 발 물러난 위치에서 현장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에 머무르는 느낌이다. 이 두 부류는 운동성을 담보로한 어떠한 연결 고리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내가 학부시절부터 가지고 있는 소명은 복음주의권 안에서의 참여와 연합이다. 남들이 보기에 다소 무력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있다. 이들을 실천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운동과 그에 대한 참여 방법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끝)
2012/10/11 23:51 2012/10/1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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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의 이웃인가

/김용주 (예수가족교회)
 

모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정 뒤편의 길목에 한 젊은이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팔은 뒤틀려 있었고, 지갑이 열린 채로 중요하지 않은 카드들만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외진 길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폭행하고 지갑의 돈과 신용카드를 훔쳐간 모양이었다.

마침 한 교수가 세미나 장소를 가로질러 가기 위해 외진 길을 들어서다 그 젊은이를 보게 되었다. 이 교수는 조교수로 있지만 이 세미나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정교수 혹은 부교수로 임명될 것을 약속 받은 터였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 그 젊은이를 힐끔 보고는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고 지나갔다. “술 취한 학생 아냐? 지금이 몇 신데 벌써!”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한 선교단체의 대표로 있는 간사가 그 길을 지나갔다. 그는 오늘 지부 선교단체 학생들이 모두 모이는 집회를 인도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차가 막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늦은 터였다. 평소 시간엄수를 중요하게 여기고 동아리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던 이 간사는 이미 죄책감이 그를 누를 만큼 누르고 있는 터였다. 그는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다가 쓰러진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젊은이 가까이에 가서 말했다. “젊은이, 지갑이 떨어졌어. 카드도 챙겨야 할 거 같네. 시간이 괜찮으면 집회에 오게. 복음에 관해 듣게 될걸세.” 그리고는 집회장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흘러 입회를 청하기 위해 주변을 서성이던 증산도 학생이 쓰러진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놀라서 달려들어 그를 부축하고 나와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 쓰러진 젊은이의 입원수속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으나 이 학생도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증산도에 가입하면서 집에서 쫓겨났고 자기가 아르바이트 하며 모은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던 터였다. 그는 은행에 가서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인출하여 젊은이의 입원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원무과 직원에게 혹 돈이 모자라면 이틀 뒤에 다시 주겠다고 얘기한 후에 다른 막노동 자리를 찾으러 나갔다.

위의 이야기는 기독교인을 위한 누가복음 10장의 비유이다. 우리는 대답할 지 모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증산도 학생이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설령 그 사랑을 잠시 실천할 수 있더라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증산도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거짓된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 진리를 행할 수 없다고. 내가 아는 많은 기독교인은 증산도 학생들을 ‘개’처럼 여겼다. 마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개’처럼 여기듯이. 

우리는 이 비유 이후에 던진 예수님의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했던 자비와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이, 그 이웃이라는 것이 교회의 범주를 넘어서며, 자신의 친분의 범주를 넘어서며, 지금 가장 급박하게 가난과 멸시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 안에서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 세상을 단순히 영적 전쟁터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를 갈며 ‘개’ 같은 증산도는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유를 들어 말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다.

2012/10/01 07:38 2012/10/0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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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 등록금은 내가 아르바이트도 했고 부모님도 많이 도와주셔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드렸더니 대놓고 화를 내진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자신은 여력이 없으니 대학원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쌀쌀맞게 말씀하셨다. 퇴직한 아버지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무리도 아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남들은 취업 준비하는데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게 두고두고 맘이 편하지만은 않다. 잘못된 결정이었나 자꾸 돌아보게 된다. 공부에 자신도 없고 2년 뒤에는 다시 취업해서 빚을 잘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자꾸 위축된다. 선교단체를 열심히 섬기던 학생 시절에는 실연을 당하거나 중간고사를 망쳐도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자신감 같은 게 있었는데 몇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빌리고 나니 대출금 갚을 생각만 하면 망망대해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은 식당에서 밥 사 먹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벌이는 없는데 자꾸만 찢어진 주머니로 돈이 새어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가끔씩 지도 교수님이 던지는 농담도 논문이나 졸업과 관련된 얘기면 나답지 않게 경직되곤 한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되뇌지만 오늘밤도 이런저런 잡 걱정으로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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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는 이십대 후반 직장인이다.

오늘도 주식이 떨어졌다. 젠장. 오를 때는 찔끔찔끔 오르면서 떨어질 때는 짤 없다. 냉정한 시장경제! 그래도 주식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작년에는 성적이 꽤 좋았다. 중간중간 소액 투자한 돈을 잃기도 했지만 합계를 따지고 보면 아마 몇 백만 원 정도는 번 것 같다. 그래도 옆자리의 김 과장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성적이다. 작년에 김 과장님은 3천만 원 넘는 수익을 냈다는데, 아마도 주변에서 무슨 정보를 들은 게 분명하다. 올해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분산투자를 위해 펀드도 몇 개 가입했고 부동산도 슬슬 공부하려고 한다. 요즘 은행에 저축해서는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도 못해 마이너스 되기 십상이니만큼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재테크 공부를 제대로 좀 해야겠다. 직장을 다니고 보니 대학 때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어서 빨리 수익률 대박 나는 아이템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면 가난한 우리 교회에도 크게 후원 헌금 내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살 수 있을 텐데. 사실 이제는 투자에 좀 자신이 생겨서 얼마 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올해는 은행 이자보다 큰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 주변에서 ‘인생 뭐 있어, 한방이야’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겉으로 티 나게 동조는 안 하지만 공감이 될 때가 많다. 작년에 주식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선물도 해 드리고 태블릿 PC도 샀다. 올해는 시작부터 주가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기회가 또 올 거란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 승자 아니겠나.


# 3
나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다.
여윳돈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대출받은 돈이 꽤 된다. 결혼할 때 부모님이 보태 주신 돈과 대출금을 합해서 서울에서 전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재미에 빠져서 산 지 어언 2년. 집주인이 전세 시세가 올랐다며 4천만 원을 더 달라고 했고 돈을 추가로 빌리기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경기도로 이사했다. 아내와 맞벌이로 대출금을 조금씩 갚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고 그 때부터 다시 금전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 직원 수가 많지 않은 직장에서 눈치를 받던 아내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출산을 한 첫해에는 아내 수입도 없어졌고 병원비며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대출금을 거의 갚지 못했다. 작년 연말에 ‘전세 대란’이 찾아오면서 지금 사는 전셋집 주인아주머니가 몇 천만 원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됐고 익숙하게 다니던 병원이나 가게들이 주변에 있는데다가 전세 시세가 다른 지역도 비슷하게 오른 터라 어쩔 수 없이 추가 대출을 받았다. 그래도 대기업 다닌다고 신용대출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6.8퍼센트. 변동 금리라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매달 이자만 3,40만 원을 낸다. 친한 회사 동기는 그 정도 금액을 연금보험에 내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 친구에게 뒤처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는 집도 부모님이 사 주셨다. 첨엔 결혼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게 한심해 보였는데. 가끔 재미삼아 몇 년이 지난 후 동기와 내 재산의 차이를 셈해 보곤 하는데 그 때마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 4
나는 40대 초반의 가정주부다.
결혼 초기에는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아이 둘을 낳고는 복직을 포기했다. 하지만 ‘둘째가 좀 더 크면 다시 내 꿈을 펼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 나가는 게 장난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돼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사실 나도 이렇게 아이들 사교육비를 많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반 친구들이 다 학원을 다니는데 내 아이만 바보같이 키울 수는 없잖나. 더군다나 학원을 안 보내면 주변에 함께 놀 친구들이 없다. 큰애는 작년부터 방학 때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내고 있다. 다행히 주변에 그런 정보에 훤한 학부모가 있어서 그 분 인솔하에 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다녀오는데 정말 ‘빡세게’ 공부시키는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된다. 문제는 점점 여윳돈이 없어지고 빚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이 교육비가 얼마나 드는지,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씀씀이 커졌다고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최근 들어 부쩍 부부싸움이 늘었다. ‘돈이 정말 없기는 없나 보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얼마 전 남편이 정색을 하며 빚을 줄이고 전세 살자고 말했을 때다. 확답은 안 했지만 생각해 보면 장기적으로 아이 교육비도 계속 들어갈 거고 집안 가구들도 너무 낡아서 이제는 바꿔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전셋집 매물들을 돌아다녀 보니 두 아이 각각 방을 내주려면 집 평수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애들 학원을 옮기면 성적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이 동네를 벗어나기도 힘들겠고. 나도 빚에 익숙해진 건지, 처음 대출을 받았을 때는 액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 신경도 쓰였는데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봐도 빚 없이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나름 안심이 된다. 아이들 사교육비도 첨엔 미쳤다 싶을 정도로 비싸 보였는데 이제는 간이 좀 커진 건지 오히려 너무 저렴하면 의심이 가기까지 한다.


빚이 곧 신용인 사회

위의 사례들은 주변에서 흔히 들을 법한 이야기다. 내 가족의 일일 수도 있고 이웃의 일일 수도, 혹은 자신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도 급속히 신용카드 사용이 늘었다. 언제부턴가 신용카드는 광고 속 카피처럼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되었고 채무, 빚이라는 단어는 ‘신용(credit)’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신용이 좋은 사람이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은행 이자율은 떨어져서 3퍼센트 대를 넘지 않는 요즘, 돈을 적당히 빌려서 자신의 자산을 불려 나가는 이른바 ‘재테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정받는 분위기다. 대출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가 자기 자산 관리 차원,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테크의 기본적 요소로까지 여기는 인식의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주식 투자를 위해 3천만 원을 빌렸는데 1억 원으로 올라서 빌린 돈도 갚고 결혼 자금으로 썼다더라는 식의 아름다운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돌아다니곤 한다. 실제로 그 누군가는 그렇게 돈을 벌었음에 분명하지만 반대로 빚을 내서 시작한 주식투자로 손절매에, 파산까지 맞은 극단적 부류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사례는 잘 회자되지 않는다. 솔직히 주변에서 대출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먹고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산 관리의 한 형태로, 혹은 사교육비나 재투자를 위한 여유 자금을 어느 정도는 확보하기 위해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정 규모의 소비를 위해 빚을 지는 성향도 강하다. 자동차, 컴퓨터, 고가의 가전제품들도 지금 당장은 여력이 없지만 신용카드로 할부 구매하면 절대 구입을 못할 정도는 아니니 빚지고(물론 대다수는 지불을 살짝 미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상품을 ‘득템’한 후 일단 간지 나게 사용하는 것이다.

빚으로 사는 시대의 복음

2011년 한국은행에서 가계 대출이 900조 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제 곧 개강인데 가정마다 입시에 합격한 신입생들은 그저 기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천만 원대의 등록금을 마련할 걱정에 학부모와 자녀 모두 한숨만 쌓인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당선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립대 반값등록금 선언은 진정한 ‘복음’(good news)임에 틀림없다! 그뿐이랴. 미국, 유럽의 위기와 국내의 전세 대란이 겹쳐서 한겨울에도 동네마다 집집마다 이사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 작년부터 오른 전셋값은 서울의 경우 일 년 사이에 무려 4000~6000만 원 정도가 올랐다. 살던 곳을 고집할 경우 추가 대출이 불가피하고 그럴 경우 대략 이자로만 매년 300만 원 이상 나갈 추세다.

 

최근에 <시사IN>과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 등 진보 매체들이 가계 대출의 심각성을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 심각한 정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탓인지, 세금혁명당의 선대인 대표는 2012년에는 무엇보다 가계 빚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사회가 소비를 조장하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있어 그 ‘관성’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은 매년 새 모델을 출시하는데 가격을 24개월간 낼 통신비에 쪼개 넣음으로써 고가의 기깃값을 숨긴다. 아이들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특정 브랜드의 점퍼를 입지 않으면 창피하다고 하소연한다. 자녀 교육은 어떤가.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학군이 낮은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옆집 아이들은 벌써부터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원어민처럼 발음도 좋던데 내 아이는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면, ‘내가 너무 무심해서 이 아이를 바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노년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노년에 빚만 없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겠거니 싶다.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 봐도 딱히 정답은 없어 보인다. 성도들도 다들 대출 빚을 어느 정도씩은 가지고 있고 사교육비나 소비 규모도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함께 ‘빚진 자들’이라 위로가 되기는 한다. 교회 목사님은 나서서 교인들끼리 돈거래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보증도 서지 말고 큰돈은 누가 부탁해도 빌려 주지 말라고 설교 시간에 강조하곤 한다. 간혹 교회 안에 사기 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돈거래에 있어서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경계심이 강해졌다. 한참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다가 장난으로라도 보증 부탁을 하면 사이코 취급 받기 쉽다. 찬양할 때는 서로를 안아 주기까지 하는 ‘주 안의 형제자매들’인데 서로 돈을 빌릴 수는 없는 게 우리 공동체의 자화상인 셈이다.

 

빚에 허덕이는 성도들을 교회가 도와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교회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융통 가능한 큰돈이 있지 않을까. 실상 교회도 성도들 못지않게 빚이 많다. 개척교회에서 교인이 늘면 담임 목사님은 좁은 공간 때문에 교인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금방 큰 장소로 이사를 가거나 건축을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임대료나 대출 빚이 크게 늘어난다. 허나 매달 성도들이 성실하게 십일조 헌금을 하기 때문에 이자를 갚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는 매달 임대료로만 300만 원 이상을 냈다. 따지고 보면 성도의 헌금이 교회나 이웃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주나 대출 은행으로 가는 셈이다. 이자로 커진 금융자본은 다시 성도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은 다시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가 동반하여 가난해지고 금융자본만 커 간다. 한국 사회의 빚, 한국교회의 빚. 미사여구로 포장된 이 빚은 진정 이 세대의 가장 큰 속임이 아닐까. 그야말로 ‘빚과 속음’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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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본지 편집위원, 현대기아자동차 남양만연구소 연구원 myjay.kim@gmail.com

2012/03/01 00:40 2012/03/0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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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형 한국 복음주의' 논의를 고민하며
복음주의 정론지로서 <복음과상황>의 방향성에 관하여

 

 

들어가면서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1월 호에 실린 정정훈 편집위원의 글 '한국 복음주의, 혁신 없이 미래는 없다'를 흥미롭게 읽고 생각을 좀 더 나눠 보고 싶다. 논의에 앞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부분이 있다.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를 표방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전까지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로 로잔언약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현재 혹은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으며 잡아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지금 시작하려는 건가. 여러 가지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먼저 입장을 조금 표현한다면 나는 한동안 에큐메니컬 그룹을 쫓아다녔다. 정용섭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면서 한동안 대구성서아카데미 모임을 주로 갔었고- MT도 따라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 복음주의 진영을 떠나 에큐메니컬 진영에 속하지 못했다. 물론 인맥적인 낯설음도 있었겠고 신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부정할 정도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다. 여전히 나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한다. 이 글은 그런 개인적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묻어날 것이다.

 

 

복음주의의 정의, 특징

먼저 복음주의의 정의와 특징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 있으나 4명의 신학자를 중심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제임스 패커

패커의 논문 '복음주의 영국 국교도의 정체성 문제'는 네 가지 일반적인 주장과 여섯 가지 특수한 확신들로 이뤄져 있다.

 

1. 실천적인 기독교: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제자도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
2. 순수한/순전한 기독교: 기독교 신앙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닌.
3. 연합하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공통된 헌신을 통해 연합함
4. 이성적인 기독교: 대중의 경험에 집착하는 대중적인 경향에 반함

 

이후 여섯 가지 확신은 △성경의 최고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 하심 △성령의 주 되심 △회심의 필요성 △전도(예배)의 우선성 △교재의 중요성 등으로 표현된다.

 

 

데이빗 베빙턴

데이빗 베빙턴의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은 패커 논문이 발표되고 10년 후 출판되었고 그 책에서 네 가지 주된 특징을 언급한 바 있다.

1. 회심주의(conversionism) - 성령에 의한 회심('중생', '거듭남', '새로남' 또는 '구원') 경험을 강조한다.
2. 성서주의(biblicism) - 성경 또는 성서를 하나님(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유일한(only) 또는 일차적(primary) 권위로 본다.
3. 행동주의(activism) - 문서 선교나 국외 선교 등의 선교 활동을 강조한다.
4. 십자가중심주의(crucicentrism) -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본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알 리스터 맥그래스도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가 어떤 조직이나 교파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을 아래의 4가지로 유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 최근까지 대체로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맥그래스의 것을 따르는 추세였다.

1.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여 성서 공부, 성서 묵상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예수의 십자가를 강조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성령에 의한 개인의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4. 헌신적인 복음 전파

 

 

존 스토트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에서 패커와 베빙턴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전도 활동, 회심 경험, 교제의 필요성이 성격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성령의 주 되심과 같은 진리들과 같은 층위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으로의 구분을 제안한다. 즉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장엄성, 그 사역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주 되심의 삼위일체적 복음을 통해 이후 특징인 회심, 전도, 교제 등은 따라오는 것, 혹은 복음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이 삼위일체적 복음을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였다.

 

1. 성부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주도권
2. 성자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역
3. 성령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사역



복음주의적 정의는 우리를 규정할 수 있나

앞서 언급한 몇몇 복음주의 학자들이 정리한 복음주의의 특징은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나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하다. 몰론 존 스토트의 삼위일체적 신학과 우리의 행동으로 규정짓는 복음주의의 핵심 진리는 그간의 정의의 층위를 새롭게 구분하는 느낌이 강하나 이 또한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사실 개신교도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러한 구분은 맥그래스의 지적대로 복음주의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의는 결국 자신이 어느 교단, 교파에 속하든지 위에서 언급한 복음주의적 특징에 공감, 헌신하는 자라면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권 내부의 이러한 구획 작업은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의한다기보다는 개혁주의자는 누구까지를 신앙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고민한 결과라고 인지하는 편이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사실 이런 고민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솔직히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컬에게 '당신도 복음주의자로 끼워 주겠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끼워 줘서 감사하다고 말할 이가 있을까).

 

하나 개혁주의자들은 20세기에 만연하게 퍼진 연합 운동에 대해 교리적 측면에서 부담을 느껴 왔을 것이고 연합 운동 안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가톨릭, 은사주의, 성공회 등등 많은 기독교 교파들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찾은 셈이다. 결국, 복음주의적 특징의 표명은 신복음주의자들이 고심 끝에 좀 더 연합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파이를 키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름의 필요'에 의해 활기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이유에서 정의 내린 복음주의의 특징으로는 진정한 복음주의의 '구획 설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당혹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 특징으로 구획을 나눌 때 복음주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이른바 '범기독교집단'으로 확장된다. 정정훈 편집위원의 지적대로 한기총도, 순복음교회도, 각종 대형 교회들도 모두 복음주의 교회다.

 

사실 이런 두루뭉술한 범주화와는 구별되게 실제로 복음주의 진영은 그 실체가 있다. 학자들과 교회들이 어느 정도 뚜렷하고 그들이 말하는 메시지가 차별성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주의의 특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이 세상과 혹은 교회 내부에서 지속해서 갈등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 나간 궤적이며 자주 그 특징은 '부정적 전략(negative strategy)'의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존 스토트가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설명하기 이전부터 근본주의에 대한 10가지의 부정을 통해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은 이러한 복음주의의 상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10가지'의 부정이라니).

 

 

근본주의가 아닌, 구복음주의와도 구별된

한국 복음주의는 결국 북미의 상황을 그대로 전승받은 것이고 북미 혹은 영국 복음주의의 특징보다는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 대응해 온 부정, 특히 개혁주의 내의 '근본주의적 흐름'에 대한 부정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과학 혁명으로 촉발된 진화론적, 유물론적 사고와 학문에 대한 극단적 반대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시에 차용한 고등비평에 반대하였고 고등비평적 방법론을 차용한 어떠한 형식의 성경 비평 작업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을 '신복음주의'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논박한 복음주의 신학자 칼 헨리의 저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출판을 계기로 본다(칼 헨리는 이 책에서 "현대의 지성이 전 지구적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는 반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메시지는 서양 문화의 병폐를 해소할 대안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복음주의의 양심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라고 말했고 그 주장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이러한 방향성 중 사회적 참여에 관한 관심은 존 스토트가 참여한 로잔언약을 통해 정리되었고 복상이 따라왔던 복음주의는 이 로잔언약의 사회적 책임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 복상에서 복음주의를 논할 때 사회 참여적 복음주의로 그 구획을 한정하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다소 회의적이다).

 

또한, 로이드존스, 메이첸, 이안 머레이 등 구복음주의자와 구별되는 교파적, 신학적 특징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복음주의는 '진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이안 머레이가 쓴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그는 이러한 복음주의적 구별의 특징과 역사적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영국적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그 사건들을 중심으로 대략 정리한다면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화, 복음주의와 가톨릭의 연합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권 내부의 의견 충돌과 분리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는 그 책에서 구복음주의자들이 '진정한 복음'을 고수하는 견해라는 것을 명시한다. 개인적으로 청교도적 신앙 유산을 중시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출석하면서 나에게는 영국적 상황이 내 신앙적 입장을 결정하고 변호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고 따라서 영국적 고민이 내 실존적 문제로까지 소급되는 경험을 했다. 만일 진보적 성향의 교인이 보수적 개혁주의 교회를 다니는 한국적 상황에서도 이 영국 복음주의의 신학적 입장은 내 경우와 더불어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볼 때 복음주의의 특징은 그 삼위일체적 교리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근본주의적 신앙 흐름에 반대하는 일련의 특징, 학문과 지성의 강조,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열린 자세, 전도와 더불어 사회문제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를 통한 교회 연합 운동의 공감과 성경 해석에서 문자적 해석, 축자영감설의 부정 및 역사 비평에 열린 자세 등이 복음주의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의 구별적 상황(Context)

복음주의의 특징 형성 과정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특징을 명확화하는 과정 중에는 항시 역사적 상황의 압력 혹은 갈등이 동인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의 상황을 볼 때 과학을 위시한 학문적 진보, 특히 진화론과 유물론적인 입장은 지속해서 교회의 태도 표명하기를 기대했고 교회도 한계가 있었겠지만 나름대로는 그 답을 찾고자 애썼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건 교회의 대응이 근본주의적이었느냐 신복음주의적이었느냐 하는 부분보다는, 세상이 교회의 대답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 부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따라서 20세기 북미의 상황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시대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 외에도 '세상은 교회의 입장을 경청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21세기 영국과 북미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나 - 존 스토트의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시작한다 - 우리의 정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현재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이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뉴라이트 운동,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횡포와 구국기도회, 빤쓰 목사의 기독교 정당 창당 등 기독교의 정치 참여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다. 따라서 복상이 할 수 있는 그리고 그간 해 온 전략인 '우리는 다르다, 진보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 집단이 존재한다'는 목소리는 그냥 묻혀 버리기에 십상이다. 사회적 진보 세력이 충분히 커버하고 있는 메시지이며 더 진일보하고 시의적으로도 적절한 이슈 선점과 깊이, 영향력 측면에서 모두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과연 교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 인식은 양희송의 '포스트 2007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와 정정훈 편집위원의 이번 글이 맥락을 잘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정훈의 이번 글은 개인적으로 한국 복음주의를 다시 정리해 보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카리스마적 리더 의존형 운동 방식에 대한 한계점, 이만열, 손봉호 이후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고민,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교회 갱신, 사회참여 양쪽에서 다 무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대목에서 공감과 함께 강한 우려감이 든다. 특히 그가 언급한 '1987년 체제'는 중요한 시점의 지적이며 1987년 체제는 민주화의 불완전성이 그대로 교계에도 복제된 느낌이 강하다. 특히 민주화 주체 세력이 아닌 교회는 이후 사회참여라는 이슈에서 대부분 주도적이지도 못했고 현실 정치 참여적이지도 못했다.

 

물론 전혀 결과물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결과들이 변질하거나 쇠퇴하고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낙천․낙선 운동은 내가 아는바 사회가 관심을 가졌던 교회의 유일무이한 활동이었고 그러한 관심을 곧 이은 영화, 동성애 문제 등 문화 운동에 대한 다소 깊이 없는 반대 운동으로 이내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앞서 언급한 많은 교회의 부정적 활동 때문에 '개독교'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90년대는 민주주의의 태동과 기독교 대중문화 운동이 꽃피우는 시점에서 다행스럽게도 복상적 메시지에 어느 정도 주목하는 집단이 존재했고 그 집단은 어떤 문화적, 인맥적, 신학적인 통일체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복상이라는 매체는 소비되었고 그 메시지, 이른바 복음주의의 특징은 전수되었다. 이후로는 기독교 문화 운동은 세속 문화를 뛰어넘지 못했고 – 원래 못 하는 게 당연하지만 – 그 세속 문화를 비평하는 잣대조차 좀스럽다. 성서한국이나 선교단체로 대변되는 파라처치들도 점점 그 수가 줄고 있고 진보적인 복음주의 집단은 섹트화되고 다각화되었다. 이제는 한 부류로 몰기엔 '너무 다른' 자신들의 입장이 많다.

 

 

전략, 방법론으로서의 복상, 복음주의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적인 측면이나 교회 생활면에서, 학문적 성취나 리더십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단결이나 국가적 영향력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발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필요한 일인가?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한 말이다. 나는 그의 고백에서 진정성을 읽는다. 그리고 이 글에 깊이 공감하는 나는 전략적으로 무엇보다 우선으로 한국교회에 다양한 교리적, 교파적 차이에도 이 분리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연합에 복상이 가장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교리, 하나의 운동으로의 연합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진리 아래에서 다양한 입장과 교파, 교리, 운동들이 방대하게 소개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도 하고 때로는 어떠한 이슈와 이벤트에 물리적으로도 연합하는 일들을 적극 권장하는 운동으로 변해야 하고, 그런 부분에서 복상이 매개체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한국교회의 연합 문제를 생각하면 복음주의 정론지의 틀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의 베이스캠프는 유지하되 국내의 아나뱁티스트, 가톨릭, 성공회 등등의 교단의 필진을 발굴하여 더욱 많은 견해의 장이 마련되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정치, 사회 참여적인 문제에는 어떤 핵심 매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고 복상이 추구하는 세상적 가치들을 꾸준히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도 진보 진영의 메시지를 카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성이 떨어지거나 일반 매체가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성경적 원리들을 돌아보거나 기독교적 가치로 진보 이슈들을 한 번 더 풀어내는 작업들을 복상이 해 주면 좋을 것이다.

 

올해에는 정치적으로 풍성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터인데 이때에는 더욱 과감하게 이슈들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건 어떨까 싶다.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거나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부분에서도 복상의 언로가 정치적으로도 단일화되는 것을 표방하기보다는 복음주의권 전반에서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차분하고 내실 있는 논지를 통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뉘고 그 견해들에 관해 토론과 공감이 가능하도록 방향성을 잡아 주면 좋을 듯하다.

 

2012/02/12 00:39 2012/02/1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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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시장의 이슈와 전망 (인물과사상 5월호)

/ 김용주



킨들의 성공과 전자책 시장의 호황

전자책 시장이 들썩거리고 있다. 아마존은 2010년 7월 19일, 매체를 통해 2/4분기 전자책 판매가 종이책 판매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지난 3개월간 판매 기준 1.43배로 전자책의 판매수가 높았고 지난 한 달로 좁히면 양장본 대비 1.8배 수준이다. 아마존은 이미 킨들2의 가격을 낮춘 데에 이어 이번에 킨들3의 가격도 파격적으로 낮추었다. 또한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판매로 전자책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앞다퉈 전자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미 인터파크 '비스킷', 삼성전자 'SNE-60K', 북큐브네트웍스 '북큐브', 넥스트파피루스 '페이지원', 아이리버의 '스토리' 등의 전자책 단말기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전자책 시장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으며 갤럭시탭과 아이패드의 국내 출시는 시장의 기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자책 시장이 콘텐츠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한번 구입한 전자책을 여러 다른 기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전자책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전자책의 성장은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하는 것'이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e-book 리더기)를 내놓고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이 단말기가 2008년에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성공적으로 출판 시장에 안착했다. 킨들의 성공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로 전자 잉크(e-ink) 기술을 꼽을 수 있겠다. LCD와 같은 액정은 쉽게 눈이 피로하고 햇빛 아래서는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전자 잉크를 사용한 단말기는 비교적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가며 가독성이 우수한 장점이 있다. 둘째로는 3G(3세대 이동통신 기술 규격)망을 이용한 신문 및 e북의 신속한 다운로드 통신망 지원이다. 이러한 통신망을 이용하여 어디서나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단 몇 분 내에 다운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휴대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킨들은 광고를 통해 휴가지에서 여성이 한 손으로 킨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자주 부각시켰다.) 대체로 2G의 용량을 지원하는 전자책 단말기는 많게는 1,500~2,000권 정도의 온라인 도서를 저장할 수 있으며 가볍고 한 손으로도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



아이패드, 전자책 시장의 중심에 서다!

2010 년 1월 27일, 스티브 잡스는 그간 비밀에 쌓여 있던 태블릿 PC의 발표회를 가졌다. "애플은 마법같고 혁명적인 제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2010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We want to kick off 2010 by introducing a truly magical and revolutionary product.)"는 말로 시작된 이른바 '아이패드(iPad)'의 키노트는 발표 당시부터 지금까지 태블릿 PC와 전자책 시장을 뒤흔드는 일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초기에는 아이폰의 크기만 키워놓은 듯한 단조로운 모습과 기능에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당시 스티브 잡스가 예견한대로 크기만 다른 것 같은 이 '물건'이 넷북과 전자책을 대체하는 혁신적인 기기로 급성장하였다. 또한 당시 언론에서 '아이패드'의 가격이 999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아이패드'의 가격이 최저 499달러부터 시작한다고 발표하자 참석자들은 예상 밖의 가격에 또 한 차례 환호성을 지르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아이패드가 출시된 이래로 앱스토어에 올라온 어플의 수는 35만종이며 그 중 아이패드용 어플의 숫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별히 전자책 시장만으로 한정하더라도 아마존 킨들이 아이패드의 어플로 탑재되었고 많은 매체들과 제휴를 맺는 등, 기존 전자책 단말기 대비 칼라 지면의 전문 서적이나 패션 잡지 등의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터파크, 북큐브, 알라딘 등 온라인서점을 중심으로 아이폰과 아이패드용 전자책 어플들이 개발되어 탑재되고 있으며 어플을 통해 전자책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지난 3월 2일, 놀랍게도 병가 중인 스티브 잡스가 발표회에 참석하여 이슈가 되었던 아이패드2는 듀얼코어 탑재와 중량 15%, 두께 30%가 줄어드는 등 많은 개선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499달러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태블릿 PC 시장은 당분간 성능에 더하여 저가 전쟁에 시달릴 듯 하다.



한국의 전자책 추이

국내에서도 킨들의 열풍에 힘입어 2010년부터 많은 기업들이 전자책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단말기를 중심으로 본다면 킨들의 상당 부분을 모방한 인터파크의 '비스킷'이 상당히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 느낌이다. 비스킷은 LG에서 개발했으며 킨들처럼 키패드를 탑재하고 있으며 LG텔레콤의 3G망을 이용하여 책을 PC 연결 없이 구입하고 신문을 구독할 수 있다. 삼성의 SNE-60K는 와이파이를 지원하며 터치스크린을 지원한다. 아이리버의 스토리도 SD 메모리 확장 및 사전을 지원하며, 넥스트파피루스의 페이지원은 키패드 및 무선 기능 등을 없애고 가격을 낮춘 저가형으로 개발되었다. 북큐브도 와이파이 지원 및 사전 탑재한 제품을 출시했다가 최근에는 ‘815’라는 모델명으로 저가의 단말기를 선보였다. (단말기는 페이지원과 동일한 제품이다.) 하지만 단말기 시장은 점차 단말기 간의 기능들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사양(specification)의 비교 자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책 시장의 관건은 단말기보다는 콘텐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는 이미 6만 8,000권 정도의 전자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삼성, 아이리버 등의 단말기를 지원하고 있다. 후발 주자로는 '비스킷'이라는 독자 모델을 개발한 인터파크가 초기에 2만 5,000종의 전자책을 내놓았으며 작년말까지 10만 권의 컨텐츠를 확보한다고 밝혔다. 예스24와 알라딘은 <중앙일보>, 비룡소 등과 연합해 '한국이퍼브'라는 회사를 출범하고 작년 4월부터 온라인 서점을 통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북큐브네트웍스 역시 국일, 다락원, 대교출판, 푸른숲, 행복한책읽기 등 100여 개 출판사와 제휴를 체결하고 전자책 시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업체들은 최근 독자적인 단말기를 통해 전자책을 보게 하던 폐쇄적 방식에서 구매한 추가적인 비용 부담 없이 PC와 휴대폰, 전용 단말기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다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속적인 변화와 경쟁

최근 들어 전자책 시장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간판급 단말기 가격의 하락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이 지난해 누크(Nook)라는 단말기를 3G버전은 199달러, 와이파이 버전은 149달러의 파격가로 시장에 뛰어들자 킨들은 즉시 킨들2를 그보다 10달러 낮은 189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 2위 대형 서점 체인인 보더스가 코보(Kobo)라는 단말기를 150달러에 내어놓고 20달러 상품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추격에 나섰다. 이에 아마존에서는 다시 킨들3을 킨들2와 같은 가격으로 출시하였다. 킨들 초기 버전이 40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절반 이하로 가격이 떨어진 셈이며 이러한 저가 정책에 힘입어 아마존의 전자책 시장은 2/4분기 실적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100달러 수준으로 단말기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만큼 전자책 시장의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단말기 중심의 전자책 시장에 또 다른 변화의 조짐도 있다. 검색 사이트에서 온라인 인터넷 솔루션의 표준으로 변모하고 있는 구글은 다른 회사들이 단말기를 중심으로 시장 진입을 시도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주력 부문인 '검색'을 앞세워 작년부터 구글북스(Google Books)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기에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이미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했다. 이 서비스는 절판된 책이나 저자의 허락을 받은 도서의 전체를 검색할 수 있으며 시판 중인 서적은 정보나 책의 일부분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구글북스 서비스에 출판사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 서비스가 가진 잠재력과 출판계의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 되면 실로 출판계의 디지털 혁명이라 할 만하다.

 


전자책으로 인해 기대되는 효과들

초창기 전자책 시장은 일인 출판과 같은 전자출판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전자출판은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디자인, 편집, 인쇄와 같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출판사 고유 기능의 과감한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미 아마존을 통해서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일이 가능하며 국내에서는 교보문고가 현재 7월을 목표로 전자책 출판 솔루션을 개발 중이다). 또한 2007년 킨들의 성공을 기점으로 전자책 시장은 비교적 충분한 양의 콘텐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가볍고 작은 단말기로 2,000권 이상의 책을 소지하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의 증가와 휴대성의 비약적인 개선이 생긴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서를 보면서 사전 기능을 통해 단어를 실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3G망을 이용해서 버스 안에서도 신간 서적이나 신문을 다운 받아 읽을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효용 성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자책에 대한 몇 가지의 이상적인 기대들도 있다. 먼저는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지가 맞지 않아 미출간 혹은 절판된 많은 전문 서적들의 디지털 콘텐츠화이다. 책 한 권을 기획하여 상품으로 팔기까지 고비용이 드는 종이책 시장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자책 시장은 이러한 출판 시장의 자본 논리를 해체시키고 콘텐츠의 전문화, 다양화를 만들 수 있는 퍼텐셜을 가지고 있다(실제로 지난 4월8일, 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 북큐브네트웍스는 `절판 도서의 전자책 복간`에 대한 협약을 마치고 이달부터 절판 도서를 전자책으로 복간키로 합의했다.) 둘째는 저장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참고하려고 수집한 방대한 양의 종이책들은 부피도 크고 보관하기도 힘들다. 개인적으로도 글을 쓸 때 인용할 몇 페이지 때문에 보유한 많은 참고 문헌들은 이사할 때마다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그렇다고 그 참고 문헌의 페이지들을 모두 타이핑한다는 건 시간과 노력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전자책은 이러한 참고 문헌 확보에 엄청난 이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검색 기능이다. 만일 전자책을 데이터베이스처럼 관리하고 그 콘텐츠를 검색을 통해 필터링 혹은 클러스터링(clustering)할 수 있다면 그 효용성 또한 클 것이다. 일례로 논문을 쓸 때도 관련 연구 논문 및 서적을 검색하고 검색한 논문들 중에서 내 논문 주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을 추려 내는 작업을 하는 데에도 적게는 며칠에서 많게는 몇 주 동안을 허비하기도 한다. 현대의 이슈는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체계화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유효하고 가치 있는 정보들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전자책은 이 작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구글북스로 검색한 자료들을 3G망을 통해 단말기에 다운 받고, 단말기에 저장된 자료들을 즉시 검색어를 통해 분류하여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해 두는 작업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로 리서치 논문 한 편을 쓰는데 드는 시간은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전자책 시장의 장애 요소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자출판 시장은 아직 장애 요소들이 많이 있다. 종이책 대비 전자책 콘텐츠 자체의 수적인 부족 현상이나 출판 업계의 미온적 대응, 대중의 종이책 선호 정서, 혹은 디지털 매체에 대한 반감 등을 전자출판의 장애 요소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자체에 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전자출판의 핵심 문제들은 모두 이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로 귀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존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시작부터 저작권 보호 기능이 적용된 자체적인 파일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하며 전자책 배포 시 자체 DRM 툴이 적용된 콘텐츠를 다운 받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DRM은 저작권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지만 단순히 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몇 가지의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째로 콘텐츠의 자유로운 복사, 인용, 배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자책은 DRM 툴을 통해 허가되지 않은 사용자나 단말기에서 전자 문서를 볼 수 없도록 콘텐츠의 열람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보유하고 있는 전자책이라 하더라도 흔히 사용하는 텍스트의 전체 혹은 부분적인 COPY & PASTE가 불가하다. 단말기뿐 아니라 PC 상에서도 DRM과 연동되는 프로그램 안에서만 부분적인 추가 기능(책갈피, 밑줄 등)만을 지원한다. 이는 사용자가 손쉽게 콘텐츠를 가공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막는다.

둘째는 DRM 툴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이 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출판업계가 우려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며 이 문제는 이미 음반 시장에서 mP3 파일로 그 폐해를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첫 번째 문제와 어떤 면에서 모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전자 콘텐츠의 DRM이 풀릴 경우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그 순간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들이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출판 시장은 전자책을 통한 수익 구조를 흔들어서 결국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셋째로 저작권 자체에 대한 인터넷 서점과 출판업체 사이의 갈등이다. 저작권 문제는 애플의 아이튠즈 내에 설치된 앱스토어와 음반사와의 갈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MP3 포멧이 음반 시장의 불법복제의 통로로 활용되면서 이를 잘 활용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각 음반사와 음악 한 곡에 대한 다운로드 가격을 저가로 체결하였는데 이를 통해 앱스토어가 음반시장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사례가 온라인서점인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문제된 바 있으며 구글북스와 저작자, 혹은 국가 사이에서 지금까지 협의 중인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로는 전자 콘텐츠에 대한 판권을 종이책과 별도로 가져가게 되었으며 구글북스도 디지털 콘텐츠에 대해 저자와 저작권을 협의하도록 규제하고 있다(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구글과 출판사 간에 온라인에서 자유로이 출판•저작물을 노출할 수 있도록 2008년에 맺은 1억2500만 달러 상당의 계약이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구도는 점점 더 저자와 인터넷 서점 사이의 직접적인 협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므로 출판업계는 자신의 입지를 줄어들게 만드는 이 변화들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오픈소스, 카피레프트 운동을 지향하는 그룹에서 저작권 자체의 허용에 대한 목소리도 높다.



마치면서: 출판업계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전자책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이미 9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최근 아마존의 전자책 판매량 증가와 애플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단말기의 개발과 컨텐츠의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전자책 시장의 핑크빛 기대와는 달리 전자책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와 관심이 아직 그렇게 높지는 않다. 출판업계에서도 전자책 시장 진출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앞서 언급한 여러 장애 요소들로 인해 선뜻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현재의 전자책 시장은 인터넷 서점과 같은 온라인 서비스업체에서 시장선점을 위해 단말기를 앞세워 출판업계의 등을 떠밀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시장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아마존은 지난 1월 전자책 판매가 종이책을 앞질렀다고 발표했고 애플은 지난해 4월 이후 아이북 온라인샵에서 다운로드된 전자책이 1억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반스앤노블의 임원 마크 패리시는 “앞으로 24개월 안에 전자책이 출판산업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했고 포레스터앤가트너 리서치은 올해 1800만대의 전자책 단말기가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

전 자책 시장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첨단 단말기 개발이 진행되고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도 개인의 컨텐츠 출판이 가능한 수준까지 변화하고 있는 지금 그 미래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긴 어렵겠지만 나는 출판업계 입장에서 현 시점이 전자책 시장에 대한 좀더 명확한 기술적 이해와 단기적 장기적 청사진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 시장 진입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음반 시장이 결국 음원 대부분의 판매를 애플의 아이튠즈에 넘겨준 것을 귀감으로 삼아 미래의 출판 시장에 대한 큰 그림과 그에 대한 명확한 기술, 컨텐츠 및 판매 전략을 가진 자만이 시장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조만간 흥미로운 전자책 시장의 한 판 승부가 될 듯 하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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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상식, 반스앤노블 “e북 매출 2년내 종이서적 상회”, 파이낸셜뉴스,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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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정, 넌 종이책 보니? 난 전자책 본다, 경향신문, 2009년 12월 3일
‘전자책’ 열풍…아마존 ‘킨들’ 성공요인 무엇일까?(1)~(3), 디지털데일리 2009년 10월 22일~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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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 [이머징 이슈] 책의 진화, 전자신문, 2009년 10월 1일
김승룡, [알아봅시다] 전자잉크, 디지털타임스, 2009년 7월 22일
김중태, '킨들' 독서•신문구독 문화 바꾸나, 한국일보, 2009년 6월 24일
2011/05/01 00:37 2011/05/0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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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김용주 (예수가족교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친구가 내게 물은 우스개 소리였다. 정답은,

1. 냉장고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넣는다.
3. 냉장고를 닫는다.

였다. 당시엔 웃겼는데 허무개그의 원조 격쯤 되는 농담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난 때때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상상을 가끔씩 해보곤 한다.

한참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두리번 거리던 내게 잡혔던 것 가운데 하나는, 존 힉(John Hick)의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였다. 흔히 기독교 전통 안에서 다종교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 크게 3가지의 분류를 한다. 첫째는 배타주의(Exclusivism)이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포괄주의(Inclusivism)이다. 이는 칼라너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카톨릭의 두 번째 바티칸 공의회(vatican Ⅱ)에서 받아들여진 입장으로, 모든 종교들은 바로 구약으로서 신약인 그리스도교를 향한 포장역할을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교를 통해야만이 모든 종교들은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다원주의(Pluralism)가 있다. 이는 타종교를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배제하거나 환원시키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생각이며, 그 인정 위에 상호 간의 깊은 이해와 배움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존 힉은 마지막 입장인 다원주의에 속한다. 그는 미국 IVF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 타 종교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종교다원주의자적인 색깔을 갖게 된다. 그의 눈에 비추어진 기독교는 상당히 편협해 보이며 배타성이 짙은 공동체였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는 고등비평을 받아들인 불트만이, 기독교의 역사 중 신화와 같은 신비적인 이야기들은 배재시키려 했던 "기독교의 비신화화" 작업 이후에 많은 신학자들이 다른 종교들을 연구하면서 느꼈던 어떤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제3세계로 총칼을 앞세워 들어가서는 서구적인 방식을 강요했던 유럽의 역사 속에 기독교의 비참한 위상은 녹아 들어 있으며, 또한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말살된 자국의 문화와 주입된 서구문화 속에 그들의 종교도 자리잡고 있음을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그들의 다원주의를 인정하자는 항변은 단순히 진리를 무시하려는 태도라기 보다는 냉혹한 힘의 논리에서 받은 패배자들의 고통과 한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 보호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이 현대 선교의 중대한 context일 것이다.

하지만, 혹자의 말처럼 "진실되지 않은 위로는 또 하나의 고통을 안겨 줄 뿐"이다. 이들의 말처럼 종교는 그 정도로 다원주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겠다는 철 지난 농담과 같다. 각각의 종교에서 핵심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core부분을 뽑아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코끼리의 팔과 다리를 어처구니 없는 크기로 냉장고에 쑤셔 넣으면서 잘려나가기도 하고 구부러져 부러지기도 한다. 코끼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지만 종교다원주의자는 그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냉장고에 들어간 코끼리를 보고 만족해 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또 하나의 폭력일 따름이다.**
2010/10/01 07:41 2010/10/01 0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