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5): 직장생활 보고서 (3) (2003. 9.)
/ 김용주
<직장 문화, 대중 문화, 그리고 소비 문화>
많은 직장인의 경우, 아침에 출근을 하면 일단 컴퓨터를 부팅함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컴퓨터가 켜지면 메신저에 접속을 하고 스포츠 신문을 검색하면서 무슨 재미난 기사거리가 없나 헤드라인들을 훑어 본다. 다음은 주식에 관련된 컨텐츠들을 검색한다. 이미 주식을 가진 직장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주가의 오르고 내림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틈틈이 자신들이 주로 이용하는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낸다. 대개 쇼핑몰을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잠시라도 사람들의 눈을 잡아두기 위해 여러 가지의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곳곳에서 "2시간 동안 50% 대박 세일"이라거나 마일리지 적립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대개 많은 직장인들은 당일에 생기는 이런 류의 기회들에 항상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중고차 사이트라거나 컴퓨터 주변기기, 디지털 카메라와 같은 전자제품에 관한 사이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제품들을 고르면서 쉬는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런 직장인들의 성향에 발맞추어 가장 낮은 가격을 찾아주는 사이트들도 꽤 많아졌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 결제할 수 있는 사이버 머니들도 마일리지나 충전 방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결제 체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를 넘나들며 할인 혜택까지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개 회사에서 소위 인기 있는 동료는 그러한 정보들에 민감한 사람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직장인들은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점점 소비문화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느낌이며 그런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유명한 음식점이나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일에 혈안이 되는 듯 하다. 대개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짧은 시간의 대화는 아침에 검색한 스포츠 신문에 나온 연애인의 스캔들과 같은 내용이 아니면, 맛있는 음식점의 위치나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는 사이트, 마일리지로 결제할 수 있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그러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직장에서 인기도 높다. 물론 정치 이야기가 가끔 나오지만 항상 "더러운 판"이라거나, "정치하는 이들은 모두다 썩었다"는 식으로 흘러서 금새 화제는 바뀌고 만다.
결국 회사에서 생활하는 많은 시간에서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러한 소비 문화를 잘 할 수 있는 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러한 기호에 아주 민감하게 기업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방향의 소비 패키지 상품들을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직장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되는 듯 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 두 가지는 직장과 이성교제였다. 둘 중에 하나가 해결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쪽으로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주변에서는 보다 진지한 연애 소식들이 들려왔고, 조금씩 주말이면 정장을 입고 국수를 먹으러 다녀야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다가 집들이를 한다고 여기저기 찾아가는 일도 생기더니, 급기야 이제는 돌잔치에 가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가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일일 연속극을 어른들은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보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니까 설령 드라마에서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도 동질감이 느껴지고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상황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드라마 속 집안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주변에서 가정을 이루어 가는 선배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실 그 중에는 학부시절에 존경하던 선배들도 많이 있다. 캠퍼스에서 그들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것 같았고, 세상의 구조적인 악행들에 크게 분노하고 마음 아파하며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부르짖곤 했었다. 정치인들에게 내밀던 날카로운 잣대들과 하루하루 자신을 연단하고 모임 때마다 고백하던 그 도전적인 이야기들이 나에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보던 영웅담처럼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 나이가 되어 그런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곤 했다.
그들이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갔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난 조만간 그들이 속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대단한 움직임이 생길 거라 기대했다. Home Coming Day처럼 올드 멤버들이 캠퍼스 후배들을 찾아오는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나는 그들의 '승전보'를 들을 마음에 가슴이 설레곤 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의 대부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간혹 들리는 이야기들만 무성했다. 취업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겠다는 선배도 있었고, 때론 선배 중에 그렇게 자신이 비난하고 정죄의 화살을 던지던 불신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릴 때의 철없던 열정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선배도 만났다.
솔직히 말해서 난 선배들에 대한 배신감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들의 신앙이 '영적 허구'였다며 그들이 캠퍼스 시절에 세웠던 칼날 그대로, 그 텍스트를 가져다가 그들의 컨텍스트를 해체해 버리고 싶었다. 그 모순된 삶의 방향에 딴죽을 걸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지만 당시의 내 마음이 그러했다. 나에게 그들은 신화나 전설에나 나오던 영웅이었으니까.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
내가 칼자루를 놓게 된 건 친 누나가 결혼을 하고 그 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때 난 30대 전후의 가정의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 이후로 난 '생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경기가 나빠진 이후로 대부분 내 주변의 직장인들은 정상적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그에 비해 장래에 대한 보장은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항상 제2의 직장에 대한 기대와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 사회에서 심하게 휘둘리면서 말이다. 때론 자신이 그렇게 신봉하던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성 교제가 시작되고 대개 서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남녀 직장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가 이끄는 대로 연애를 하기에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서로 시간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하여 백일, 이백일, 오백일, 천일 기념, 그리고 Valentine Day, White Day부터 시작하여 Yellow Day에서 '빼빼로' Day까지!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서 챙겨야 한다. 사실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이런 기념일들은 기업들의 횡포로 인해 그 가치가 퇴색하고 있으며 각종 기념일마다 거리에 쏟아지는 소모적인 상품들은 마치 그러한 상품을 주고받지 않으면 친밀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소비의 '장'을 형성한다.
결혼을 하고 나면, 이제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정신 없이 돈이 되는 일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수도권에 살고 있는 맞벌이 직장인 커플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주식에 손을 대거나 아니면 자신의 직업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도 많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두 집안 사이에 있는 경조사를 챙기는 일도 두 사람이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가 된다.
조금 안정이 될 때 즈음에는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자라면서 육아에 대한 부담으로 여성의 경우는 직장을 그만 두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생후 몇 년 간은 아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육아에 대부분의 관심을 집중하게 되고 아이가 크면서부터는 또다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한 스타일의 교육 열풍에 휘둘리게 된다. (많은 부모들은 남들이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바보가 되고 있다는 이상한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는 듯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가운데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하루하루 성실하고 자족하며 사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상을 시간을 배분하여 삶에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 나누어 쓰는 개념으로 따져본다면, 정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만 최선을 다하고 살아도 항상 부족함이 느껴지고 한계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가까운 자신의 주변 관계 속에서도 부족함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고 그렇게 대부분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하며 살고 있다. 내가 쉽게 생각한 것처럼, 그들은 사회에서 사라진 게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놀면서 삶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도 그들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따름이다.
<운동가의 편견>
직장인들의 반대편에는 운동가들이 있다. 내 주변에는 이러한 운동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청빈하고, 검소하고 또한 소박하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며 소비문화가 이야기하는 요구들에 둔감하다. 그러한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이며 그러한 것들에 휘둘리는 삶의 무가치함을 일찌감치 깨우친 탓이다.
그 분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내 안에 그들과 같은 삶이 정답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그리고 나는 아직은 정답에 이르지 못한 삶 가운데 있다는 자괴감으로 인해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다.
물론 그 분들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버려야 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으며 이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 구조적인 악행들에 대해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거룩함이 그 분들에게는 있다.
사실 난 그 분들에게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한 편에 두고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운동가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일반인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져야지만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별 문제의식 없이 소비 문화에 젖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각성을 요구하는 운동가들의 의식은 그들의 정중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결국 '너, 똑바로 살아'의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깊게 발을 들여 놓았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며 살고 있다. 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세상을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름의 삶은 누구보다 고단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독 직장인들은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악행을 저지르는 일은 드물며 오히려 누구보다 더 자상하고 배려를 잘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다. '비도덕적인 사회'를 위해 대부분 자신의 미시적인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도덕적인 개인'에게, 힘들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너, 똑바로 살아.'
<중간 지점을 모색하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약간 편향되게, 때론 과장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직장 생활의 이모저모이다. 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직장인들이 사회에서 묻힐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그리고 한편에서 내심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운동에 대해 이야기였다.
나는 복학 후에 저학년 때 나와 친했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를 잃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 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지만 많은 비전을 나누던 선교단체의 동료들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그들은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어떠한 경건의 훈련들을 모색했던 데에 비해, 당시의 난 기독인의 사회 참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문서운동이나 학내 문제, 기독 시민운동에 대한 고민들, 대안들을 모색하고 움직이려고 주변을 '충동질'했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는 시위를 나가는 이도, 총학생회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에 뜻을 같이 하겠다는 이도, 사회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고 기독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그 대안들을 모색해 가자는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이도 없었다. 내가 내 것들을 포기해 감에 따라 주변의 기독인들은 그런 나를 부담스러워 했다.
다수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에 가까운 나를 '좌편향'으로 위치매김시켜 균형 잡히지 않은 부류라며 거리를 두었고, 가까운 리더들은 내가 가진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식의 정죄는 시대착오적인 운동권의 잔재라고 충고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학생이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면 '급진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급진적' 복음주의라고..)
나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90년대 선배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그들을 비난하려던 나의 시도는 비슷한 판에 속하게 되고 함께 공유하는 문화를 통해 조금씩 무뎌지게 되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까 한다. 사실 졸업 후에, 내가 복음주의 기독운동에 뛰어들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에서 기독운동을 하려면 한국 기독교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한국의 복음주의권 보다는 한국의 진보 진영이 도덕적으로 더 깨끗해 보였고, 난 개혁을 외치면서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주는 녹을 먹으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보다 큰 이유는 기독 운동가들보다 기독 직장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한국의 복음주의를 변화시키는 것은 소수의 운동가들이 아니라 다수의 직장인들의 더디지만 전반적인 변화에 의해서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캠퍼스에서 문서 운동을 하던 것처럼 직장인과 운동가 사이의 중간 지점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서로의 벽을 허물고 어떤 적정선의 행동방식을 찾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행동방식'이 직장인들 나름의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걸맞는 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언젠가 직장에 갓 들어간 동기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학생들의 사회참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회사에 들어가면 QT조차 제대로 못하는 기독인들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학생 시절에는 경건훈련이나 열심히 하고 사회인이 되어서 사회참여를 하라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나름의 공감할 만한 논리를 구사하던 그 친구도 4-5년이 지난 지금 사회참여를 하는 사회인이 아니라 단순한 직장인으로 수면에서 사라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거 가진 것 하나 없던 시절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운동을 해 본 일이 없는 대부분의 기독 학생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사회에 들어가고 난 후에 미시적인 차원에서 너무 많은 책임과 관계에 얽매이기 때문에 적신일 때도 하지 못했던 운동성이 있는 행동은 엄두도 못 내는 채로 결국 주저앉기 마련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내 주변의 그런 친구들과 과거 영웅처럼 대하던 선배들의 적절한 운동성을 살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회색지대에 머무는 이유일 게다.**
당신의 결정이 한국 교회의 희망입니다
: 대형교회 목사님의 아드님들에게 보내는 서신
/김용주
새벽에 잠에서 깨면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던 때가 불과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이제는 어느덧 따스한 햇살이 그간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온기를 가져다 주는 봄기운을 느낍니다. 이 서신을 님께서 받아보실 즈음에는 이미 녹음(綠陰)이 푸르게 새 생명을 얻을 시기일 것 같습니다. 평안하신지요.
저는 조그만 교회를 다니고 있는 기독 청년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우연히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과 성도들의 가슴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줄 만한 이야기였기에 저는 지금까지도 많은 관련된 이야기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것이 기정사실로 들어날 때마다 저는 님과 님의 아버지의 선의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님의 아버지께서 한국의 교회를 세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흔히 복음주의 1세대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지금의 대형교회로 성장한 몇몇 교회의 목회자 분들의 헌신과 노력이 깃들어 있으며 그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터 위에서 우리가 커왔다는 생각을 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 분들의 노고에 항상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처음 담임 목회직 세습에 대한 논의가 나왔을 때에도 저는 그 부당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님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좀더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부성애는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본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님께서도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 그리고 효심(孝心)으로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하셨을 거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저는 세습이 부적절한 판단과 행동이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서도, 부족한 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내심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님에게 서신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님이 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저와 성도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위하여 큰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으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 사역을 하다 보면 자신의 아들을 학대하고 내버리고,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임의로 자녀들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볼 때, 저도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되어서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진정 누군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지속적인 자기 것의 포기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하지만, 님의 아버지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 분들입니다. 당신 입으로 자주 말하는 '주의 종'입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작정하신 분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의 자식 사랑은 공감은 하지만 용납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의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인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그 분들의 가르침 아래에서 시장바닥에서 힘겹게 일을 하면서도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께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헌금을 해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식의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보내는 일이 있어도 교회에 헌금이 부족한 경우에는 기꺼이 자식의 대학 진학을 포기시키고, 집의 전세비를 빼서라도 헌금에 열심을 내었던 일이 다반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님의 아버지가 독재 시절에 사회에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선량한 성도들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의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장하게 된 기독교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희망을 잃어가던 시기에 큰 버팀목과 안정을 줄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억지스레 고개를 끄덕여 보던 적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제가 듣게 된 이야기들은 오히려 저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의 그러한 과거지사는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꽃피울 때에 진정 그 당위성이 받아들여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재정적인 비리 의혹과 '제왕적 리더쉽'이라고 표현되는, 그리고 인맥을 중심으로 담임 목사직을 세습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간 그분들의 논리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려던 일말(一抹)의 명분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님의 아버지의 부정부패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와 포럼장에 가 보기도 하고 기사로 듣기도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하늘 아래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만나야 하는 건지, 처음 시위에 동참하러 가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저는 이내 님의 아버지를 왜곡되게 사랑하는 사역자들의 이상한 행동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비난과 욕설, 그리고 폭력을 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단으로 치부하고 조롱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사역자 분이 전문적으로 힘을 쓰는 머리짧은 분들을 데려와서 포럼 위원들을 힘으로 진압했을 때에 저의 가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분노할 수 없는 채로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대응에 저는 같은 식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 분들도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야 할, 서로의 심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한 형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님의 아버지께서 권력과 명예나 재산을 탐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기사들이 나온다 해도 저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아들의 길을 조금만 닦아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은 한국의 천만 성도들의 아버지에게도 동일한 마음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뒤로한채 예배당을 짓는 곳에, 선교를 하겠다는 곳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여진다는 곳에 님의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성도들은 자식의 편안을 위해 모아 두었던 재산들을 거리낌 없이 바쳤습니다.
저는 님이 커다란 기업의 사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백억원이 드는 개척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아버지의 교회에서 이제는 목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장인어른과 40년 사이의 리더쉽을 뒤로한 채, 대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기까지 또한 아버지를 잘못 섬기는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좋건 싫건 그러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주변의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빨리 안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게 됩니다. 아픔이 지속되면 누구나 힘들어하고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2세대인 님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정말 뵐 수 있다면 무릎을 꿇고라도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님의 청년기의 꿈은 이런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전해듣고 마음에 생겼던 뜨거움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낮아짐과 그 피흘림. 죄를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던 창조주의 사랑 앞에 우리의 초라함과 죄성을 깊게 뉘우치며 가슴 아파하며 눈물로 회개한 그 날의 우리는 이런 것을 꿈꾼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얻게 될 안정된 그 자리에서 님은 젊은 시절의 영적 충만함과 기쁨을 느낄 수 없지 않습니까. 님께서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가졌던 그 기쁨은 지금의 자리와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었지 않았습니까. 편안한 그 일체를 버리고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찬송하고 기뻐하고 눈물흘리던 님들이 아니었습니까.
저의 아버지도 나이가 드셨습니다. 젊었을 때의 패기와 어릴 때 제가 느꼈던 아버지로서의 강한 인상이 많이 사라지셨고, 마음도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인간적인 부분으로 이해해 드려야 할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때론 자식을 위해 판단력도 많이 흐려지시는 것 같습니다. 제 아버지도 점점 제가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아버지께 저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됩니다.
사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험한 삶을 마쳐갈 즈음에 자식이 고생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권력이 내게 있다면 저도 그러한 일에 분명 유혹을 받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육체의 부모는 님을 맡은 것 뿐이며 우리의 영적 아버지는 때때로 육체의 아버지가 행하는 잘못된 방법들을 원치 않는다는 저의 신앙 때문입니다.
님의 결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님의 교회에서 이야기하듯 님의 교회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돈으로 세워진 예배당 같은 건물이나 재산과 명예가 아닌 성도들 그 자체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님의 아버지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님의 결정에 희망을 걸고 싶습니다. 님은 아직 젊지 않습니까. 지금 님의 학력과 재산과 명예만 가지고도, 아버지의 그러한 방법 없이도 님의 능력은 드러날 수 있지 않습니까.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커온 님들이 아닙니까. 님의 꿈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 교회에서 ‘주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님의 결정을 통해 그것을 확증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저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그러한 결정으로 인해 님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희망으로 님을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합니다. 종국에 역사는 굽어진 허리는 바르게 펴기 마련이며 그러한 올바른 역사의 결정을 내리게 될 때에, 님의 아버지께서도 마음이 누그러질 것이며 결국에는 님을 자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피를 심장에 이식 받은 형제된 저의 바람입니다.
영육 간에 평안과 건강을 기원하며.
김용주 드림.
용주 : 일단 청부론, 청빈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깨끗한 부자는 가능한가, 크리스찬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시작해 볼까요.
동언 : 질문이 영 맘에 들지 않는데요. (웃음)
상국 : 부자와 깨끗함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깨끗한 부자’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서로 정의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용 주 : CBS에서 있었던 청부론 관련 토론을 보면서 느낀건데, 가난과 부에 대해 다른 용례로 쓰이는 말들을 주고 받으면서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강한 김목사님이 토론의 주도권을 쥐게 된 거죠. 토론회 이야기는 차후에 더 하기로 하구요. 서로가 생각하는 부와 가난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그러면 청부론, 청빈론 사이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해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구요.
상국 : 단순히 돈이 많이 있을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용주 : 원론적으로는 돈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상국 : 축재과정을 무시한다면.. 돈이 많은 것을 문제삼고 싶진 않은데요.
용주 : 그러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해보도록 하지요. 김동호 목사님이 “부와 가난은 은사다”라고 하시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국 : 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난이 은사같진 않아요. 자발적 가난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은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 모르겠는데 그냥 가난은 은사로 취급될 수 없는 문제로 보여지는데요.
동언 : 부와 가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말인가요?
용 주 : 김동호 목사님은 가난과 부가 은사라는 논리를 방언을 예로 드시더군요. 방언은 은사인데 나는 방언을 받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더라. 방언은 받는 사람도 있고 못받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은사인 거다. 크리스찬으로 부를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중요한 건 부가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순복음교회의 이른바 “삼박자 구원론”을 의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구요. CBS에서 그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셨잖아요. 그리고 가난에 대해서는 가난하게 사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도 은사이기 때문에 기독인 모두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동언 : 저는 가난하게 살게된 게 목적의식적으로 청빈하고 검소하고 수도사적인 삶을 살겠다고 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열심히 살아도 마이너스인 사람이 많은 게 현실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 국 : 깨끗한 부자라는 걸 쓰시게 된 것은 상황적 맥락이 아닐까요? 부자를 옹호하기 위해보다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성도들이 부자되기를 좋아하고, 돈을 번다는 것이 인기가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고 쓸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쓰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언 :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욕망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고 보는 게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성경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국 : 그러면 다 못 입고 못 사는 걸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잘 되길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고생해서 가난하게 살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기초인 것 같아요.
용 주 : 동의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깨끗한 부자>에는 김목사님의 개인적인 예화들이 꽤 있거든요. 김목사님 개인적으로는 금전 사용의 바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책에서 가난이 은사다라고 말한 부분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여기에서는 가난이란 말을 구분지을 필요가 있구요. 저는 자신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데 근검절약하는 삶을 사는, 이른 바 “청빈”은 개인의 인격적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실제로 김목사님이 가난을 은사라고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을 못 가서 불치의 병이 아님에도 죽게 된 부모 혹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심한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주변에 많은 게 현실이구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은사라고 김목사님이 표현하신 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신앙적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요. 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체제로 인정해야 하니까 자연히 가진 자의 윤리적 행동 지침으로 책이 흘러가는 것이지요.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최소한 어느 정도 도우라는 식의.
동언 :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교회성도 중에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담임목사님이 모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은데..
용 주 : 그럴 수도 있죠. 아무튼 그래서 전 가난을 좀 구분 지었으면 좋겠어요. 청빈과 구별되는 가난은 구조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재난이라고 생각해요.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오는 상황적 재난이라는 거죠. 은사가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김목사님의 자기 고백에서 드러나는데요. 저는 그것이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목사님은 당신의 입으로 자신은 무난하게 목회했고, 새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재정적 문제가 별로 없었지만 떳떳하고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그것은 김 목사님이 선택하신 일이라고 봐요. 김목사님이 만약에 수도권에 교회가 넘쳐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골로 가서 목회를 하셨다면 그런 부가 주어지지 않았겠죠. 자신의 여건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부는 은사가 될 수 없다는 거죠. 은사는 주권적인 것이어야 하니까요.
상 국 : 전 두 책의 오해의 소지를 좀 줄였으면 하는 생각이거든요. 두 분의 공통점은 극단적 금욕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김교수님의 책도 그렇고 극단적 금욕주의는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제 생각에 두 분의 차이는 김목사님은 부자들과 함께 목회를 하시는 분이고, 김교수님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분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부가 쌓여서 필요 이상으로 향락하고 사치하는 부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있구요. 오히려 필요한 만큼만 갖고 나머지는 나누어줘야 한다는 관점이라는 거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초반 동기 문제는 명확하게 차이가 있는데 실제 방법론상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고. 김목사님은 내 부는 정당하다라고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예화나 세부항목들을 보면 사치, 향락하는 부자를 길러낼 것 같진 않잖아요. 동기에 대해서는 이만큼 떼었으면 만족한다, 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순 있다고 봐요. 하지만, 부자가 돼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두 분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동언 : 제가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데, 김영봉 교수님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요?
용 주 : 저는 기독인이 부자가 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앞서서 부자에 대한 개념도 구분을 지어야 오해의 소지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자를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 소유가 많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고 봐요. 그런 경우에 고지론적인 의미에서의 부자는 가능해요. 기 독인으로서 기업의 사장이나 회장이 될 수 있겠지요.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정죄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몰론, 과정을 봐야하겠지요. 그리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부의 축적과정이 깨끗하다는 게 문제의 소지가 많긴 해도 원론적으로 소득은 많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는 거지요. 반면 소유가 많은 기독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김목사님 책에서 소유지향적 인간과 존재지향적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자가 존재지향적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소득이 높은 사람이 존재지향적일 순 있겠지만 소유가 많은 사람은 이미 소유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봐야한다는 거죠. 저는 원론적으로는 기독인이 소유가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김영봉 교수님의 책과 김동호 목사님의 책을 서로 비교를 좀 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요. 두 분의 텍스트 자체는 분명 다른 부분이 존재하지만 컨텍스트에서는 만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 자체로 본다면 김목사님은 지침서 정도의 가벼운 책인 반면, 김교수님은 좀 구체적인 학술서의 분위기가 나요. 저는 김목사님이 저축의 문제나, 원로목사제도에 반대하는 부분, 노후에 대해 목회자들의 예와 그에 대한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해요. 책에도 나오지만 한경직 목사님이 깨끗한 빈손이 되실 수 있었던 건 교회가 그만한 대우를 해 주었기 때문이잖아요. 목회자들에게 노후에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져 주는, 그런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나 한국 교회의 전반적 행태인 기복신앙을 의식하여 부가 복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은 좋게 생각한다는 거죠. 반면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도 있어요. 이를테면, 78쪽에 쓰여있는 ‘성경은 헌금과 구제가 기독인으로서의 최소요구’라는 부분이 그렇구요. 80쪽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수입의 1/10은 십일조로, 1/10은 구제로 내고 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깨끗한 자기 소유이니까 자유하라는 부분 말이지요. 책에서 김목사님은 사모님과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제가 몸에 베여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말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동 언 : 한 80만원이 소득인 사람에게 8만원은 헌금하고 8만원은 구제하고 나머지 64만원으로 살아라,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건가요? 1억 가진 사람에게 1천만원 헌금하고, 1천만원 구제하고 나머진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요.
상 국 : 실례를 김목사님에게 갖다 대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깨끗한 부자가 오해의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부자 아닌 사람이 오히려 감동적인 예화로 많이 나오는데, 부자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 부분도 그렇고. 관심은 부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인데. 부자들은 정말 돈 쓰지 않잖아요, 사치하는데에만 쓰지 말고 적어도 이만큼은 이웃을 위해 써라, 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동언 : 저는 오히려 그 부분이 아쉽거든요. 김 목사님은 부자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인지..인식의 한계 아닌가 싶은데요.
상 국 : 계산법으로 보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더 좋은 제안을 하는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을 쓰고 나머지는 나누는 데 써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차피 생계비가 정해져 있으니 그 나머지는 이웃과 나눠야 한다는 계산법이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언 : 두 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산을 하는지 궁금한데요. 그런 차이가 나는 건..
용 주 : <깨끗한 부자>에서 김목사님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소득의 1/7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자유한 마음으로 써도 된다는 부분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에 대해 김교수님은 자신의 책에서 청부론자들이 말한 1/7의 나머지 부분도 소유가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김교수님은 자신이 부양하고 있는 식구들의 한 달 생활비를 계산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소득보다 마이너스인 사람은 오히려 채워줘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이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동언형제 말처럼 수입이 50만원인데 할머니와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십일조로 5만원, 구제헌금으로 5만원을 내고 나머지 40만원으로 식구를 부양해야 하는가, 혹은 두 부부가 사는데 월급이 1000만원인 사람이 200만원을 헌금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김교수님은 청부론의 이런 문제들을 걸러내신 것 같아요. 김목사님의 예화들을 볼 때 김목사님이 부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쓰신 것 같진 않지만 규장 책들에서 보이는 명료한 지침들은 오히려 더 많은 의혹과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좀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깨끗한 부자>를 보면서 느낀 점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중상층 이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었어요.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최소 중산층 이상이고 그런 이유로 부자의 윤리 지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김교수님은 청부론에 대한 비판적이고 보완적인 입지에서 책을 쓰셨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시간적인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구요.
동언 : 김동호 목사님을 보면서는 현실적으로 가진 자의 종교가 된 마당에 어떤 최선의 방법이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성경이 지향하는 바를 이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원색적으로 선지자처럼 선포해야 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저는.
태 종 : 김목사님의 문제의식은, 대부분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재물관리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고려하여 본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요? 사실 교회 입장에서는 십일조 헌금조차 내기 힘들어하는 게 현실이니까..
상국 : 그렇죠. 부자가 오히려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동 언 :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과연 ‘깨끗한 부자’를 보고 회심을 할까요? 기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책으로 쓰고도 꽤 팔린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책이 김목사님에 대한 감탄사로 귀결되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 국 : 저도 좀 그런 부분이 있었는데요. <깨끗한 부자>에서 불편했던 점은, 불공평한 사회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적 자선 등으로 덮어 놓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 말이죠.
용주 : 김동호 목사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회상은 이상적인 미국사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상 국 : 그런 느낌이 강하죠. 가난의 문제를 자선으로 해결 할 수는 없잖아요. 이런 식의 해결책은 점점 더 부의 불균형이 심해져서 사회적인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획일적인 공산주의를 싫어한다면 미리미리 부의 재분배에 힘쓰고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면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보면서는 초반부에 우린 다 가난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균형을 잡아가시는 것 같더라구요. 돈 벌기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 회사를 운영한다 라는… 기본적인 사람들의 부에 대한 관심, 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웃에게 쓰고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라는 관심을 가지고 부를 운용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김영봉 교수님의 접근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기독교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용 주 : 청부론 관련해서 CBS 토론회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관련된 이야기도 같이 해보지요. 제가 본 느낌을 말하자면, “깨끗한 부자”라는 말도 구분을 좀 지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깨끗함’을 이야기할 때 저는 개인 윤리와 기업 윤리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토론회에서 김목사님과 김남호 사장님이 이야기하는 부자는 기업윤리에 관한 이야기로 보였거든요. 저는 인격적 완성과 이웃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는 개인과 이윤을 내는 것이 목표인 기업은 분명 구분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얼마는 사회에 환원하고, 얼마는 신앙공동체에 환언한다는 식의 논리는 기업윤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이것을 개인윤리로 생각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끗함,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고 봐요. 김교수님이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내가 공정한 경쟁에서 노력하여 얻은 소유에 대해 전적으로 공정하고 깨끗한 과정을 거쳤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하루 8시간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도 하루 20시간을 공부해도 대학에 떨어지는 머리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머리 좋은 사람에게 그 경쟁은 공정했고 그가 번 돈에 얼마를 환원하면 깨끗한 삶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거죠. 나아가서 백인사회에서 성장한 사람과 흑인사회에서 성장한 사람, 선진국에서 자란 사람과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란 사람, 부유한 가정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과 가난해서 교육은 고사하고 병원도 못 가서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공정한 경쟁으로 부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단순히 그가 번 돈의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으로 그 돈이 순수하게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동 언 : 저는 성서의 기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웃실천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당연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8/10이 내 것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고백이 되어지는 신앙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교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는 공격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용 주 : 저는 그런 식의 대응에 아주 짜증나요. 부의 재분배를 얘기하면 무조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로 몰아세우는 논리 말이죠. 부의 재분배나 기회 균등을 얘기하면 “빨갱이”로 몰아 세우는 그런 방식에는 환멸감이 들어요. 토론하지 말자는 얘기잖아요.
동언 : 근데 사실 기독교가 좀 사회주의적이지 않나..
상국 : 그렇죠, 그런 색채가 있다고 봐요.
동언 : 적어도 자본주의에서 가질 수 있는 소유욕에 대해서는 부자청년의 비유에서처럼 근심하며 돌아서는 청년에 대해 김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궁금하군요.
용 주 : 그 내용이 두 책 모두에 나오는데요. 김교수님은 김동호 목사님이 언급한 욥의 경우는 성경을 통틀어 부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사례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대부분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자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고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가 성경 전반적인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어요. 반면 김동호 목사님의 경우에는 청빈론자들이 인용하는 부자 청년의 비유가 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지를 펴시더군요. 그 청년의 중심이 물질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라고 한 것일 뿐 다른 이에게는 재산 말고 명예나 자녀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동 언 : 저는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가 오히려 그런 맥락에서 소위 중산층, 기독 중산층이 욕망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금전적 소유욕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자 청년은 단순히 2000년 전의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전반적으로 적용할 만한 문제라는 생각이구요. 많은 기독인들이 말로는 절제하면서 산다지만 결국은 부자청년의 근심을 늘 안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용 주 : 토론회에서는 김동호 목사님이 논리적으로 잘 말씀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를 충실히 하셨다는 느낌이 든 반면, 고세훈 교수님은, 토론 자체로만 본다면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토론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도 많이 하였고 그로 인해 뜬구름 잡는 식의 거시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김동호 목사님에게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실 때는 마음이 정말 안 좋았습니다. 김목사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깨끗한 부자>에서 쓰였던 바르지 못한 표현들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절충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런 작업이 토론회에서 잘 되지 않은 것 같아요.
동언 : 김동호 목사님 책의 원래 제목은 <신앙과 부>였다는 말도 있던데요.
상국 : 규장에서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아주 선정적으로. (모두 웃음)
용 주 : 저는 고 교수님이 부가 동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개인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논지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김목사님이 세부적인 원칙들이나, 기준을 정해서 그것을 지켜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을 가리켜서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실제로 김목사님이 동안 교회에서 그런 정관을 지속적인 토론과 연구를 거쳐서 만들어 가는 것에 큰 호응을 하고 있거든요. 그거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 교수님 생각처럼 절대적인 잣대로 낮아짐을 이야기한다면, 동적인 영성에 대한 주의환기가 된다 할지라도 기준 자체가 없다면 개선 여부를 판단할 잣대가 없고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고착화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봐요.
상 국 : 대부분의 교회는 일단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고세훈 교수님 쪽이 김동호 목사님 쪽의 좀 깨끗해 보자는 주장을, 너희도 똑같다라는 주장으로 몰아 붙인 상황이 됐어요. 지금 상황에서라면 같이 가는 게 현명하다고 보이는데. 기복신앙을 꺾은 다음에 우리가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고 나오는 편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구요. 그렇자 않더라도 넌 틀리고 나는 옳다는 측면이 아니라 당신이 말하는 부분은 이런 단점이 있다는 등의 개선점을 찾아가며 같이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나,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교회현실을 반영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인 김영봉 교수나 비판적 서평을 썼던 김종희 대표가 나왔다면 좀더 좋은 토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용 주 : 동의해요. 저는 사실 토론을 보면서는 김동호 목사님이 <깨끗한 부자>보다는 <깨끗한 교회>란 책을 전병욱 목사님이 교회 성공신화적인 얘기를 하듯 쓰셨으면 아주 훌륭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모두 웃음) 물론 그랬으면 규장에서 책이 나오진 않았겠지만.
동언 : 자기 교회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단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용 주 :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토론회에서 김남호 사장님과 김동호 목사님은 우리가 가난해진 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시던데 그거 잘못 짚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김남호 사장님은 대뜸 “그러면 얼마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라거나 “부자가 가난해진다고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분은 가난해짐, 청빈한 것을 마치 기업의 회장이 사직을 하고 청소부를 해야 하는가, 뭐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여기에서 부의 개념에 오해가 생긴 거 같아요. 사장이 소득이 많을 수는 있지만, 소유가 많은 게 문제인 거죠. 이 분은 기업 윤리와 개인 윤리를 동일시 하는데 개인은 적법한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라는 걸 잊은 거죠.
상 국 : 사실 저는 토론회를 보면서 내심 “바늘귀”가 의심스러웠어요. 부자들 거 다 뺏어서 혁명하자는 얘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책을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책 내용은 단순히 가난하자는 얘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요.
동언 : 덕분에 규장 책만 더 많이 팔렸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썼길래 하는 마음으로..
용주 : 저는 규장 책은 그렇지 않아도 잘 팔린다고 볼 때 일반 성도들이 <깨끗한 부자>에 뭐라고 써있길래 하며 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현상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동언 : 토론하면서 드는 생각은 김목사님이 한국 교회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쓰신 거라면 교회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교회의 윤리가..
상국 : 김목사님의 윤리보다 떨어진다고 봐야 해요. 전반적인 한국 교회의 현실이..
용 주 : 이제 대충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데요. 종합적으로 얘길 하자면, 김목사님의 책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CBS 토론회에 기대를 많이 했던 거거든요. 토론회 초반에 김동호 목사님이 용어의 정의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맞는 말이에요.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면서 논리적인 비약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토론 자체가 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고세훈 교수님이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한 것 같고. 저는 여기에서는 좀 걱정이 되거든요. 실제로 김동호 목사님이 계신 숭의 교회는 한국교회로 봐서는 정말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요. 그러한 과정에서 김동호 목사님은 내외로 힘들어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토론회에서는 서로 절충하고 협력하는 계기가 되어도 모자랄 판국에 어느 정도 실질적인 개혁의 모양새를 만들어 가는 김목사님을 마치 기복신앙이나 삼박자 구원론과 도매급으로 넘기면서 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일로 상처를 받으신 것 같구요. 특별히 고 교수님의 경우 개혁연대 계신 분인데, 그렇잖아도 개혁연대가 강경한 느낌을 준다는 교계 보수적 기독인들의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좀더 사려 깊게 행동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동 언 : ‘깨끗한 부자’에 대한 비판적 글이나 토론이 나오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용주 형제 말처럼 김 목사님의 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을 것 같구요. 오히려 안타까운 것은, 김목사님이 하시는 개혁의 작업들이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에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려고 토론에 나와서 오히려 손해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안쓰러움도 생기네요.**
** 복상 서울 독자모임은 앞으로 잡지의 모니터링과 병행하여 관심 분야와 이슈가 되는 분야에 관련된 토론을 모임에 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복상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복음과상황> 서울 독자토론모임: 청부론 vs 청빈론 토론
정리: 임정은 자매/ 사진: 권경우 형제